| ▲ 2006년 연합뉴스 취재 결과 호치민의 목민심서 애독설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 자주시보 |
|
11월 6일 베트남에 가서 아펙회의에 참가한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의 옛 영도자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즐겨 읽은 건 다 아는 일이라는 발언을 했다.
한국에서는 호치민이 제일 좋아한 책이 《목민심서》라는 설이 널리 퍼졌는데, 한국에서 유행되었거나 유행되는 불확실한 설들이 하도 많아서 곧이곧대로 믿어주기 어렵다. 호치민은 한시를 많이 쓸 정도로 한학에 밝은 분이라 《목민심서》원본을 볼 능력은 분명히 있다. 단 지금까지 필자가 본 베트남과 중국에서 나온 자료들로는 《목민심서》애독설을 확인할 수 없다.
한국의 어떤 사람들은 호치민이 1930년대 초반 소련 모스크바에서 공부할 때 조선인 동창생듩에게서 《목민심서》를 증정받았으리라 추정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같은 시기 모스크바에 있었던 조선인 박헌영이 선물했다고 단언한다.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국가인 소련으로 가면서 봉건잔재로 불리기가 딱인 《목민심서》를 갖고 간다는 게 부자연스럽거니와, 더구나 박헌영은 일제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온 뒤 가만히 조선을 떠나 소련으로 갔기에 그런 비밀스럽고 위험한 탈출행동에서 《목민심서》를 갖고 간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리고 호치민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과 베트남에서 여러 가지 가명과 여러 가지 신분으로 활동했고 중국 군벌의 감옥에도 1년 남짓이 갇혔으며 중국농민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피신하여 체포를 면하기도 했다. 그의 수감기는 베트남혁명사에서 유명하고 그가 감옥에서 쓴 한시들은 시집으로 출판도 되었다.
호치민의 경력이 그처럼 복잡하기에 1930년대 초반 모스크바에서 받은 《목민심서》를 서거할 때까지 갖고 다녔다는 한국식 설정과 추측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호치민이 정말 《목민심서》를 보았고 또 조선인에게서 선물로 받았다면 오히려 1960년대 초중반 조선(북한) 간부에게서 얻은 게 아닐까?
중국 베이징의 민족출판사가 20권본 “조선고전문학선집”의 17권으로 1986년 12월에 출판한 《정약용작품집》 맨 앞에는 당시 베이징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박충록 선생의 “다산 정약용의 문학에 대하여”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세계평화옹호위원회 결정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정다산선생 탄생 200주년이였던 1962년에 그를 문화명인으로 기념하였다.”(12쪽)
1948년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 나라의 진보단체들이 설립한 세계평화이사회(world peace council)는 세계평화보호대회를 여러 번 열었고 문화명인들도 적당한 계기에 지정하여 국제적 범위에서 기념활동을 벌렸다. 정약용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보이는데, 물론 우선 해당국가에서 먼저 후보를 제출해야 하니 조선이 정약용을 내놓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1960년대 조선에서는 정약용의 지위가 전에 없이 높아져 《목민심서》가 노동당원들의 필독서로까지 되었다. 그러니까 당시의 국제, 국내 분위기에서 어느 조선 간부가 호치민이나 어느 베트남 간부에게 《목민심서》를 증정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목민심서》가 반도 북반부에서 가졌던 특이한 지위는 1967년에 사라졌다. 1967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가 평양에서 진행되고, 한국에서 “갑산파”라고 부르는 박금철, 이효순이 실각하면서 《목민심서》숭배바람이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저작집》에서는 2편에 《목민심서》관련내용들이 나온다. 한 편은 1967년 7월 3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6차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당면한 경제사업에서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며 로동행정사업을 개선강화할데 대하여》이니 기술혁명 부진현상을 비판한 대목에서 나온다.
”우리 당 제4차대회에서 7개년계획기간을 전면적기술혁명의 시기라고 결정은 하여놓고도 그 수행에 적극적으로 달라붙지 않기때문에 기술혁명이 진척되기는커녕 농촌경리, 건설, 채취공업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부문들에서 한자리에 계속 머무르고있습니다. 한동안은 기계화한다고 벅적떠들었는데 요즘에 와서는 건설장들에서 따치까나 밀차 같은것도 다 줴버리고 다시 등짐을 지고있습니다. 기양관개공사를 할 때에는 우리의 기계공업이 방금 창설된 시기였지만 적지 않은 일을 콘베아로 하였는데 지금은 저수지공사를 하는것도 모두 등짐으로 합니다. 장정들이 등짐을 지는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녀자들이 등짐을 지는것은 참 보기딱합니다.
……
기계화를 하지 않고 기술혁명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도대체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계속혁신, 계속전진의 구호를 들고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가는곳마다에서 들끓었는데 요사이는 모두들 《목민심서》를 읽어서 그런지 침체속에 잠겨 잠잠하며 그저 한자리에 앉아서 뭉개고있습니다.“
다른 한 편은 1970년 7월 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21차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한 결론 《간부들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며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을 강화할데 대하여》이다.
“우리 당은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혁명에 끝까지 충직한 혁명가로 만들며 우리의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이미 1966년에 열렸던 당대표자회에서 온 사회를 혁명화, 로동계급화할데 대한 방침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나쁜놈들은 당대표자회결정을 관철하기 위하여 노력할 대신에 당의 계급로선을 어기고지주를 되살리려 하였으며 자본주의사상, 봉건유교사상을 비롯한 온갖 잡사상을 퍼뜨리려하였습니다. 그놈들은 《목민심서》를 간부들과 당원들의 필독문헌으로 내리먹이고 사람들에게 지주놈이 쓴 시를 읽게 하였으며 청년들이 날라리를 부리게 하는 이른바 《10개년전망계획》이라는것까지 세워 내리먹였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우리가 이자들을 그냥 놔둘수없었으며 그놈들을 제때에 쳐야 모든것이 명백해지고 당의 로선을 옳게 관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당은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를 계기로 반당분자들을 치고 그놈들이 퍼뜨린 부르죠아사상과 봉건유교사상, 수정주의사상을 비롯한 온갖 기회주의사상 여독을 철저히 뿌리빼며 모든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오직 우리 당의 유일사상밖에 모른다는 확고한 혁명적관점으로 무장시킬 과업을 내세웠습니다.”
《김정일저작집》에도 2편에 《목민심서》가 언급되는 바, 시기는 모두 1967년 여름이다.
먼저 1967년 6월 1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일군들과 한 담화 《반당반혁명분자들의 사상여독을 뿌리빼고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울데 대하여》를 보자.
“얼마전에 있은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는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며 수령님의 혁명사상에 기초한 당대렬의 통일과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우리 당의 투쟁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력사적인 회의였습니다.
……
반당반혁명분자들은 우리 당의 혁명사상에 대한 선전은 하지 않고 부르죠아사상과 수정주의사상, 봉건유교사상을 비롯한 이색적이며 반동적인 사상들을 많이 류포시켰습니다. 그들은 민족적인것을 살리고 주체를 세운다는 구실밑에 봉건유교사상을 설교하면서 우리의 사회주의현실에 맞지 않는 지난날의 낡고 뒤떨어진것들을 덮어놓고 되살리려고 책동하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계급성이 없고 정치적으로 변절되였는가 하는것은 우리 당문헌과 혁명전통교양자료를 많이 출판하여 그것을 가지고 근로자들을 교양할 대신에 실학자들의 책을 많이 출판하도록 하고 정다산의《목민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지정하여 당조직들에 내리먹인데서도 잘 알수 있습니다. 어떤자들은 조선의 고유한 미풍량속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녀학생들에게 큰절을 하는 방법을 배워주고 시집갈 때에는 가마를 타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음 1967년 7월 3일 당사상사업부문 및 문학예술부문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작가, 예술인들 속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울데 대하여》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목민심서》유행을 비판했다.
“당사상사업부문 일군들도 로동계급적선이 바로서있지 못하였습니다.
당사상사업부문 일군들이 로동계급적선에 확고히 서있었더라면 반당반혁명분자들이 봉건시기 실학파학자가 쓴《목민심서》와 같은 책을 필독도서로 내리먹일 때에 그것이 우리 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반당적행위라는것을 제때에 간파하였을것입니다.
물론 실학파들의 사상이나《목민심서》와 같은 도서들이 우리 나라의 력사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지는 민족문화유산인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오늘 우리 간부들의 사업에서 지침으로 될수는 없습니다.《목민심서》에《애국》이요《애민》이요 하는 문구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애국주의나 인민성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습니다. 허위와 기만, 위선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말마디는 다른 책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문구가 현란한데 매혹되여서는 안되며 그 본질을 로동계급의 립장에서 똑똑히 파악하여야 합니다.“
조선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6차 전원회의를 “당의 유일사상체계가 철저히 세”워지고 전당과 온 사회를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하는데서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로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런 평가와 조선의 실천을 어떻게 보느냐는 각자의 세계관과 입장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겠다만, 그 회의 뒤에 《목민심서》가 민족고전의 하나로 되돌아가 학자들이나 연구하는데 그쳤음은 분명하다. 또한 문학예술작품들에서도 정약용을 전문 다뤘거나 찬미한 작품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고, 가끔 언급되는 정도이다. 예컨대 백보흠의 중편소설 《우리의 벗》을 보자.
“그때 너렁청한 십자굴 복판에 여섯 개의 철기등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박혀 있었는데 그 한쪽 옆에는 중세기의 유물과도 같은 목조 기중기 두 대가 서 있고 그 어방에 기다란 직사각형의 백 밀리미터 철판이 놓여 있었다. 수싣 명의 사람들이 목조 기중기 옆에서 수선거리다가 내가 나타나자 일제히 눈길을 돌렸다.
나는 목조 기중기며 철판이며 여섯 개 쇠기등들을 일별하는 순간에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직감하였다.
……
현대의 기중기를 사용할 수 없는 좁은 굴간이라는 데서부터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게 제기된 것이었다. 과학이 발전한 현대전에서도 가끔 재래식 무기가 필요한 것처럼 역시 창조적인 건설작업에서도 옛날 정다산이가 만들어낸 저런 중세기적인 기중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종이 위에 적혀 있는 운명적인 숫자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만한 계산을 하는 데는 나에게 계산척이 필요 없었다.” (문예출판사 1990년 2월 출판, 185~ 187쪽)
대충 조사해보니 반도의 북반부에서 정약용의 지위가 급격히 높아지던 시절에는 남반부에서 정약용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는데, 북반부에서 지위가 하락된 뒤에는 남반부에서 지위가 점점 올라갔고 21세기에 들어서서는 다방면 능력자와 공부천재의 이미지가 강화되어 별의별 책들이 다 쏟아져나왔다.
헌데 신격화되는 한편 희화화되는 현상도 생겨나니,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어른들이 질릴 지경으로 똑똑한 녀석으로 등장했다. 이는 실존인물 정약용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역사인물들에 대한 남과 북의 평가차이는 예전에 주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생겨났으니, 김유신과 이성계가 전형적인 사례이다. 정약용은 워낙 남북이 정치원인으로 평가를 달리 할 이유가 많지 않은 인물인데, 어쩌다나니 현실정치의 영향을 받았고, 이제 와서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정약용을 아는 범위와 이해하는 정도가 엄청 차이난다.
어찌 보면 해외에 사는 사람들이 반도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정약용 이름을 파는 한국식 돈벌이와도 관계가 없으므로 정약용에 대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볼 때 《목민심서》는 엘리트의식이 강하고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사회주의사회에서도 실행가능성이 희박한 작품이다.
옛 사람을 너무 우러르지도 너무 얕보지도 않으면서 그의 책들도 과도한 찬미나 지나친 비판을 하지 않는 게 올바른 처사겠다.
정약용 숭배자들이 괜히 흥분하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