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일 목요일

코로나 백신·치료제 개발 어디까지 왔나

 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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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의 이미지. www.bioworld.com

코로나바이러스의 이미지. www.bioworld.com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전염병 대유행에 세계 각국은 백신·치료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8월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백신을 승인한 데 이어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두 번째 백신 등록 절차에 들어갔다고 밝혔고, 미국의 글로벌 제약사 리제네론과 일라이릴리는 항체치료제 임상 3상을 진행중이다. 하지만 백신이나 치료제 모두 안전성과 효과가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만큼 개발 과정을 더욱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코로나19 백신 안전한 접종, 빨라야 내년

백신은 바이러스 항원에 맞서 싸우는 항체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물질을 인체에 투여해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약물로, 가장 근본적인 코로나19 방지책이 될 수 있다. 관건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병원성은 제거하면서 면역체계를 형성하도록 유도하는 물질은 살려내는 것이다.

백신은 개발 방식에 따라 크게 핵산 백신, 바이러스 벡터 백신, 불활화 백신 등으로 나뉜다. 핵산 백신은 바이러스 대신 바이러스가 인체 정상세포와 결합해 침투하도록 돕는 ‘스파이크 단백질’의 유전물질인 핵산을 인체에 넣어 항체 형성을 유도한다. 바이러스 스파이크 단백질의 유전자(DNA)가 직접 투입되거나 세포 밖 유전정보 전달 물질인 메신저RNA(mRNA)가 활용된다. 세계 최초로 코로나19 백신 인체 투여 실험을 했던 미국 제약사 모더나, 국내 제약사 제넥신이 개발 중인 백신이 핵산 백신이다.

바이러스 벡터 백신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항원(항체를 형성하도록 하는 단백성 물질)을 인체에 해가 없는 다른 바이러스에 끼워넣어 인체에 투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재조합 바이러스 매개체는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위해성이 적다. 영국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가 옥스퍼드대와 함께 개발 중인 백신 물질 AZD1222, 러시아가 세계 최초 승인 백신으로 내세우는 스푸트니크V가 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불활화 백신은 화학 또는 열처리로 병원성을 제거한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것으로 기존의 백신 개발 방식과 같다. 중국 제약사 시노백이 이 방식으로 백신을 개발 중이며 브라질, 인도네시아 등에서 임상 3상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35개의 백신 후보물질이 인체 대상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중 상용화 직전 단계인 임상 3상에 돌입한 것은 9개다. 국내 제약사 가운데 가장 앞서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업체는 제넥신으로 카이스트, 포항공대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백신 후보물질 GX-19를 개발 중이며 지난 6월 임상 1·2상을 승인받아 진행하고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이달 초 임상 1상을 신청할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안전성이 확실히 입증된 백신은 나오지 않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이 백신 개발 선두주자라고 했던 아스트라제네카마저 영국 임상시험 도중 부작용을 발견하고 지난달 8일 개발 절차를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이 회사는 지난달 12일 각국 규제 기관 승인을 거쳐 영국,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임상을 재개했지만 미국은 임상 중단을 해제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빨라야 내년 중반쯤에야 안전한 백신이 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과학자료 분석업체인 에어피니티 자료를 인용해 임상 3상 중인 백신 후보들이 모두 개발에 성공해도 세계 인구의 61%는 적어도 오는 2022년까지 백신 접종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백신 공급 부족 상태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본 것이다. 앞서 WHO는 지난 5월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등에 대한 공정한 유통 및 접근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항체치료제도 바이러스 변이엔 속수무책

백신 개발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치료제의 신속한 개발이 코로나19 저지에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국립보건원에 따르면 지난 3월 3건에 불과했던 코로나19 혈장치료제 임상시험은 지난달 132건으로 44배나 늘었다.

혈장치료제는 회복기 환자 혹은 완치자의 혈장에서 다양한 항체가 들어 있는 면역단백질을 정제·농축해 만드는 약물이다. 인체에서 유래하고 같은 원리를 적용한 제품이 많은 만큼 국내에서도 임상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GC녹십자가 혈장치료제로 개발 중인 ‘GC5131A’는 지난 8월 임상 2상을 승인받고, 지난달 처음으로 코로나19 환자에게 투여됐다. GC녹십자를 비롯해 BPL, CSL, 다케다 등 글로벌 혈액제재 기업들인 참여한 코로나19 혈장치료제 개발 연합체 ‘얼라이언스’는 미국에서 임상 3상을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19 감염 뒤 체내에 형성된 항체를 분리·배양해 만드는 항체치료제 개발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9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단일클론항체치료제만 최소 50건의 임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단일클론항체치료제란 특정 항원 부위 하나와 결합할 수 있도록 분리·배양한 것이다. 여러 항체를 섞어 만든 항체칵테일치료제까지 더하면 70건 이상의 임상이 진행되고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항체치료제는 항체가 체내에 존재하는 수주동안 바이러스 감염 예방효과도 있어 백신이 나오기 전 의료진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코로나19 항체치료제 개발에 가장 앞선 곳은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와 리제네론이다. 두 회사 모두 지난 8월 임상 3상에 돌입했다. 일라이릴리는 지난달 16일 452명 대상으로 진행한 임상시험에서 항체치료제 LY-CoV555를 접종받은 코로나 감염자의 입원률이 72% 감소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항체칵테일 치료제를 개발 중인 리제네론은 지난달 1000명 환자 중 275명이 유의미한 회복 증세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항체치료제를 개발 중인 셀트리온 연구진이 항체치료제 후보 물질의 동물 투여 경과를 관찰하고 있다. 셀트리온 제공

코로나19 항체치료제를 개발 중인 셀트리온 연구진이 항체치료제 후보 물질의 동물 투여 경과를 관찰하고 있다. 셀트리온 제공

국내에서는 셀트리온이 가장 앞서 있다. 셀트리온은 지난달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코로나19 항체치료제 ‘CT-P59’의 국내 경증 및 중증환자 대상 임상시험계획(IND)을 승인받고 본격적인 임상 2·3상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개발 중인 코로나19 혈장·항체치료제도 백신처럼 안전성과 효과가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고, 안정적인 공급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혈장치료제는 면역단백질 분리시 인체에 부작용을 일으키는 다른 물질까지 섞여들어올 위험성이 있다. 또 회복기 환자들이 각기 다른 항체를 만들 뿐만 아니라 농도도 제각각이어서 동일한 효과를 재현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도 어렵다.

혈장치료제는 완치자의 대규모 혈장 공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량 생산도 불가능하다. 세계에서 혈장매매가 가능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이에 GC녹십자는 지난 8월 보건당국, 적십자 등과 협력해 채혈기관을 기존 4곳에서 전국 46곳 ‘현혈의 집’으로 확대했다.

항체치료제는 백신과 마찬가지로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키면 소용이 없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2개 이상의 항체를 섞는 항체칵테일 체료제도 개발 중이지만 현재까지 중증환자에게서 치료효과를 보인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항체치료제의 높은 가격은 대량 공급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연구자선단체 웰컴트러스트는 미국에서 암과 같은 질병 치료에 드는 비용의 중위가격은 최소 1만5000달러에서 많게는 20만달러에 달한다.



원문보기: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2010020856011&code=920501#csidx4910f4e2f43b898805fac008e15cbd1 


네덜란드인 하멜이 본 17세기 조선의 추석

 [역사 속 추석①] '조상 숭배'로 점철된 그의 기록...11년 귀양생활 영향 적지 않아

20.10.01 11:50l최종 업데이트 20.10.01 11:50l


조선시대 추석을 조선인들만 쇤 것은 아니다. 북쪽 유목지대 사람들도 조선을 자주 방문했고 남쪽 유구왕국(오키나와) 사람들도 방문했으므로, 이들도 조선의 추석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저 멀리 서쪽 유럽에서 온 사람들 중에도 그런 경험을 한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헨드릭 하멜(1630~1692)이다. <하멜 표류기>의 저자인 그는 추석을 비롯한 조선의 풍속을 자신의 기록에 담았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등극한 지 7년 뒤인 1630년, 하멜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무살 때 아시아 무역 독점권을 가진 동인도회사에 입사하고, 이듬해인 1651년 자카르타 본사에 도착했다. 본사가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것은, 유럽 최대 인기상품 중 하나인 동남아산 향료(후추·클로버 등)의 확보 및 판매에 회사가 명운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까지 오게 된 것은 1653년에 나가사키 지점으로 발령을 받고 항해하다가 폭풍우와 조우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대만(타이완)을 거쳐 일본으로 향한 때는 태풍이 불기 쉬운 8월 초였다. 그를 포함한 64명을 태운 배는 5일간의 비바람을 견디다 못해 부서지고 말았다. 64명 중 36명이 살아남아 제주 남부에 표착했다. 하멜과 조선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조선에서 열세 번 추석 보낸 하멜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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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는 <하멜 일지>와 <조선국에 관한 기록>을 통칭한다. 전자는 하멜이 조선에서 작성한 것이고, 후자는 조선을 떠난 뒤에 집필한 것이다. <하멜 일지>에 따르면, 하멜 일행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8월 16일이고 이들이 현지인들의 눈에 띈 것은 다음날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현지인들이 일본인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야판(Japan)!"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에야 일등항해사가 이곳이 북위 33도 32분이며, 야판이 아닌 '켈파르트'(제주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멜 일행은 전라·충청·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이송된 뒤 효종 임금의 경호부대에 배속됐다. 하지만 2년 뒤 일행 중 두 명이 사고를 쳤다. 청나라 사신단에 구명을 요청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이들은 전라도로 쫓겨나 남원·순천·여수에 분산 배치됐다. 일종의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

하멜은 그런 모든 상황을 일기에 담았다. 기록에 대한 그의 열정이 <하멜 표류기>라는 역사적인 작품의 탄생으로 연결됐다. 그런데 그가 열심히 일기를 쓴 데에는 매우 현실적인 동기가 있었다. 그는 꽤 멀리 내다보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사라진 뒤로 회사에서 봉급을 더는 계산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본사로 돌아가도 손을 내밀 명분이 없으리라는 예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것은 '회사의 조선 진출을 위한 시장조사를 했다'는 근거를 남기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허송세월하지 않고 회사를 위해 일했으니 밀린 봉급을 달라고 청구하기로 한 것이다. 훗날 돈을 받을 목적으로 집필했을 뿐 아니라 회사 사람들이 기록을 검증할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으므로, 그가 상당한 집중력과 관찰력을 갖고 <하멜 일지>를 썼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멜이 표착한 1653년의 추석은 양력 10월 6일이었다. 그는 그해 추석에 조선에 있었다. 조선을 떠난 날은 13년 뒤인 1666년 9월 5일이다. 이날은 추석 8일 전이었다. 따라서 그가 조선의 추석을 보낸 횟수는 열세 번이었다.

네덜란드인이 본 추석... 키워드는 '무덤'
 
 지난 20일 광주 북구 영락공원 묘지를 찾은 추모객이 이른 차례를 지내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
▲  지난 20일 광주 북구 영락공원 묘지를 찾은 추모객이 이른 차례를 지내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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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은 한가위를 조상 숭배의 시각에서 바라봤다. <조선국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죽은 조상에 대한 의례적 행위라는 차원에서 추석을 이해했다. 이 점은 그가 장례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추석 명절을 언급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추석이 조상 숭배의 날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런 관점으로만 추석을 대한 것은 아니다. 이날은 꽤 경쾌한 페스티벌의 날이기도 했다. 이 점은 정조(재위 1776~1800) 때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실학자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도 나타난다.

풍속학 서적인 이 책에서 유득공은 추석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신라 때 서라벌 여성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팔월대보름까지 한 달 동안 길쌈 대결을 한 뒤 패한 쪽이 술과 음식을 대접한 일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때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다했다"고 자기 시대의 추석 분위기를 묘사했다.

1849년에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 역시 비슷하다. 홍석모는 "신라 때부터 있었던 풍속으로 지방 농가에서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명절로 생각한다"고 한 뒤 "황계(黃鷄)와 백주(白酒)로 온 동네가 취하고 배부르게 즐긴다"고 추석 분위기를 설명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람들이 추석을 조상 숭배 겸 축제의 날로 인식한 데 반해, 하멜은 주로 조상 숭배 특히 무덤과 관련해서 이해했다. 그는 <조선국에 관한 기록>에서 "무덤은 보통 4내지 5, 6피트 높이로 흙을 조그맣게 쌓아 올리고 정성껏 손질한다"며 "고관들의 무덤에는 비석과 석상이 세워지는데, 비석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 집안의 내력 그리고 경력 등이 새겨진다"고 한 직후에 이렇게 서술했다.

"8월 15일에는 무덤의 풀을 베고 햅쌀로 제사 지낸다. 이 날은 그들에게 설날 다음으로 큰 명절이다."

<하멜 표류기>는 17세기 중반의 조선에 관해 꽤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예컨대, 당시 사람들이 서양 문화에 깊은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다는 점도 알려준다. <하멜 일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스님들과의 사이가 가장 좋았는데, 그들은 매우 관대하고 우리를 좋아했으며 특히 우리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의 풍습을 말해주면 좋아했다. 그들은 외국 사람들의 삶에 대해 듣기를 좋아했다. 만약 그들이 원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밤을 새도록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또 효종 임금과 지방관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이 조선 사람들은 외국의 풍물에 대해 호기심이 몹시 많으며 듣고 싶어했다"는 문장이 나온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역사책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외부세계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서양이 조선의 문호를 노크하기 약 200년 전에 조선을 방문한 하멜은 위와 같이 정반대의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하멜은 여타 분야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주면서도, 추석 명절을 포함한 일부 문제에 대해서는 폭넓은 관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일지까지 쓰면서 조선을 세밀히 관찰하고 추석을 열세 번 보낸 사람치고는 추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관점을 내놓지 못했다.

<하멜 표류기>에 '추석이 설날 다음으로 큰 명절'이라고 쓴 것을 보면, 하멜 역시 추석의 축제적 성격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관점의 한계를 보인 것은 아무래도 이방인인 데다가 11년간 사실상 귀양생활을 하다 보니 인식의 확대에 제약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노래하고 춤추는 추석'보다는 '무덤의 풀을 베고 햅쌀로 제사지내는 추석'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게 각인됐을 수도 있다.

이방인들은 현지인들이 벌이는 축제 같은 '즐거운 행사'에는 쉽게 참여할 수 있지만, 장례식 같은 '슬픈 행사'에 참여하는 데는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지의 '즐거운 행사'에 대한 이해력과 '슬픈 행사'에 대한 이해력이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멜이 신기해 한 풍경...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하멜기념관에서 만난 하멜표류기 복제본. 조선을 유럽에 처음 소개한 자료가 됐다.
▲  하멜기념관에서 만난 하멜표류기 복제본. 조선을 유럽에 처음 소개한 자료가 됐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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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에 관한 기록>을 읽다 보면, 하멜이 '슬픈 행사'를 분석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의 이해력에 한계가 많았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장례식에 관한 글에서 그는 "상중에 있는 사람은 몸을 거의 씻지 못하므로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흡사 허수아비의 모습 같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친척들은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곡을 한다."

효를 강조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실제의 슬픔보다 훨씬 더한 슬픔을 표현해야 했던 고민을 하멜이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유족들이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는 표면적인 현상만 포착됐을 가능성이 있다.

발인 전날 풍경은 하멜을 더욱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허수아비 같은 몰골로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기분이 '업'돼 있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인 전날 밤에는 밤새도록 유쾌하게 떠들어대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관을 운구한다. 운구하는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 반면, 고인의 친척들은 울고 곡을 하며 관 뒤를 따라간다. 장례 지낸 3일 뒤에 친척과 친구들은 다시 무덤에 가서 제사 지내고 즐겁게 보낸다."

발인 전날 밤뿐 아니라 그 전에도 문상객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떠들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멜의 눈에는 발인 전날 밤부터 그런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또 발인 전날 밤을 관찰하는 그의 눈에는 유족과 문상객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그때부터 유쾌해진 것으로 비쳤을 수 있다. 

하멜의 눈에는 장례식 초기만 해도 울고불고 하던 사람들이 발인 전날 밤부터 유쾌한 모습을 보이고, 다음날에는 그중 일부가 춤추며 노래하고 나머지 일부가 울며 곡을 하다가 3일 뒤에는 다 같이 모여 즐겁게 보내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장례식을 모호하고 알쏭달쏭한 행사로 묘사한 직후에 '8월 15일이 되면 조상 무덤에 가서 풀을 베고 제사한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추석의 성격을 파악했던 것이다.

만약 그가 귀양 가지 않고 한양에서 계속 경호원 생활을 했다면 추석의 축제적 측면을 조금 더 많이 접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추석에 관한 그의 기록도 유득공이나 홍석모의 글처럼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풍겼을지도 모를 일.

'조선 교역 어때?'... 동인도회사의 선택은?

이처럼 정확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는 일지를 하멜은 13년간 열심히 썼다. 1666년에 밀항을 통해 일본을 거쳐 동인도회사로 복귀한 그는 일기장을 내밀며 13년 치 봉급을 요구했다. 지난 13년을 표류기간이 아닌 시장조사 기간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월급을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퇴직금을 지급했다. 조선에서의 13년을 근무한 것으로 쳐주되, 봉급은 주지 않고 퇴직금만 주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하멜 일지>는 36세가 된 하멜이 퇴직금을 받아내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동인도회사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과의 통상에 관심을 표출했다. 하지만 일본과 청나라가 딴지를 걸었다. 조선과의 교역을 반대한다는 인상을 내비쳤다. 조선과 서양의 접촉을 이런 식으로 견제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과 네덜란드의 교역은 하멜의 시대에 성사되지 못했다.

만약 하멜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동인도회사가 조선시장에 진출하고 조선에 지점을 세웠다면, 조선 지점의 네덜란드인들은 팔월 추석 때마다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멜 선배'의 기록에 따르면 추석은 경쾌하기보다는 의례적인 날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세계지질공원 한탄강 망치는 댐, 두고만 볼 건가

 [함께 사는 길] '한탄강 지킴이' 이우형 현강문화연구소 소장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 한탄강 화적연(禾積淵). 강 가운데 볏짚을 쌓아 올린 듯한 화강암이 자리한 이곳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3호로 지정될 만큼 풍광이 좋아 평소 관광객 발길이 이어지던 곳이다. 그러나 홍수가 지난 다음 사람들을 맞이한 건 걸을 때마다 발목 높이로 푹푹 빠지게 하는 짙은 황갈색 진흙이었다. 며칠 전 내린 비는 한탄강을 황톳빛으로 넘치게 했고, 이때 밀려온 진흙은 화적연 진입로 일대를 두껍게 덮어버렸다. 한 주민은 뻘밭 상태를 '머드 축제'라 비유하며 혀를 찼다. 그는 "사람 손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라며 "(포천)군에서 포클레인을 보내줘야 정리가 될 것"이라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8월 7일 지역 역사문화 전문가인 이우형 현강역사문화연구소 소장과 함께 홍수 후 한탄강을 찾았다. 올해 40일 넘게 지속된 중부지방 장마는 기후위기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지만, 한탄강이 겪고 있는 비극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그 원인이 바로 2016년 준공된 한탄강댐이다. 이우형 소장은 "한탄강이 이렇게 침수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특히 한탄강이 침수되면서 진흙이 굉장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한탄강 명승과 관광지 전체가 이런 뻘밭으로 변한 상태다. 이 지역은 접경지라는 특성 때문에 쉽게 정리할 수도 없다. 폭우에 지뢰가 유실될 수 있기에 군부대가 우선 탐사를 해야 한다. 더욱 큰 문제는 한탄강댐으로 한탄강 절경지 전체가 침수에 따른 영향을 받게 되지만, 수자원공사나 지자체가 관리할 수 있는 지점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 경기도 포천 운산리 운산천 하류 구라이현무압협곡 '큰가마소'. ⓒ이우형

▲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93호로 지정된 화적연 일대가 진흙으로 뒤덮였다. ⓒ함께사는길(이성수)

용암대지 흐르는 한탄강, 세계지질공원 지정


 

한탄강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용암대지에 형성된 강이다. 27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철원평야를 비롯해 포천, 연천 등지로 용암이 쏟아졌다. 오랜 시간 동안 물줄기는 용암대지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면서 물길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한탄강은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현무암 절리(주상절리, 판상절리)가 발달했고,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란 말처럼 깎아지른 절벽의 협곡 지형 절경을 갖게 됐다. 한탄강 상류 지역은 휴전선과 민간인 통제지역으로 사람 왕래가 제한되면서 천연기념물과 역사·문화 유적, 생태계 등이 비교적 잘 보전된 지역이다. 또 지질학적으로는 선캄브리아시대부터 신생대까지 지층을 볼 수 있는 지질학의 보물 창고다.

 


한탄강의 가치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지난 7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09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한탄강 일대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했다. <경향신문> 등 언론보도에 따르면 "세계지질공원은 미적, 고고학적, 역사·문화적, 생태학적,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 곳을 체계적으로 보전하며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정하는 구역"이다. 한탄강 일대는 비둘기낭 폭포, 포천 아우라지 베개 용암, 재인폭포, 직탕폭포, 고석정, 철원 용암대지 등 총 26곳이 지질 명소로 지정됐다. 앞서 2015년 환경부는 한탄강·임진강 유역 주요 지점을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했다.


한탄강의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정은 한탄강의 가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국가적 경사다. 또 1990년대부터 한탄강 보존을 외쳤던 지역 전문가와 환경단체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결과다. 그러나 이우형 소장과 같이 지난 20여 년 넘게 한탄강댐 문제점을 지적해온 이들은 세계지질공원 지정에 대해 우려 섞인 시선을, 정확히는 한탄강댐과 세계지질공원이 병립 가능한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이우형 소장은 한탄강이 세계적 문화유산이 될 거라 가장 먼저 알렸던 사람임과 동시에 이 지역에 댐이 들어서게 되면 세계적 유산이 훼손된다고 경고했던 사람이다.


수십만 년 동안 자연 그대로 흐르던 한탄강에 위기가 찾아온 건 1990년대 말부터였다. 한탄강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데, 1996년 등 세 번에 걸쳐 임진강 하류 파주 등에서 홍수 피해가 발생했다. 1999년부터 정부는 홍수 피해 방지와 수도권 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다목적댐 건설을 추진했다.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발이 확산되고 강원도청이 공식 반대를 밝히는 등 한탄강댐 추진은 쉽지 않은 일이 됐지만, 최종적으로 국무총리실 주관 임진강 유역 홍수대책특별위원회는 2006년 8월 홍수조절댐으로 확정했다. 지역 대책위는 2007년 3월 한탄강댐 건설 기본계획 고시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2년 넘게 진행된 소송에서 한탄강댐의 부당성과 대안 비교의 허구성을 지적했지만, 1심(2008. 6)과 2심(2008. 12)에 이어 대법원(2009. 5)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선고됐다.


 

▲ 경기도 포천 관인면 중리 한탄강 '멍우리협곡'. ⓒ이우형

▲ 한탄강구정초(포천구절초). ⓒ이우형

세계지질공원이 지질학적 가치가 없다고? 


한탄강댐은 2000년 동강댐 백지화 이후 확정된 유일한 대형 댐이란 점에서 찬반 모두 사활을 걸었다. 반대 측은 한탄강댐의 홍수량과 경제성이 조작되는 등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댐이 들어서게 되면 한탄강 일대의 절경지가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댐 반대 운동의 중심에 섰던 이우형 소장은 "한탄강댐 수몰 예정지가 생태적, 지질적 핵심지"라고 말했다. 2009년 10월 국무총리실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이진복 국회의원은 임진강특위 회의록 분석을 통해 '한탄강댐 추진을 결정한 임진강특위 등이 편파적이었고, 댐 건설을 목적에 두고 움직였다'라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러나 건교부와 수공 등은 '담수를 하지 않는 홍수전용댐이기 때문에 영향이 미미하다'라며 반대 측 문제 제기를 수용하지 않았다. 더욱이 댐 추진을 위해 한탄강의 가치를 왜곡했다. 이우형 소장은 "많은 답사 프로그램과 토론회에서 한탄강의 가치를 수없이 얘기해 왔다"라면서 "1, 2심 소송 현장 검증을 하면서 현재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명소를 다 답사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정부 측 전문가는 '한탄강에는 가치 있는 게 별로 없다'라고 주장했다. 실제 한탄강댐 1심 소송에서 정부 측 대리인은 2007년 10월 '한탄강홍수조절용댐 행정 소송 변론요지 환경, 문화재 및 보상 쟁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서울대 등 지질전문가 8인의 현지 조사와 자문 결과 한강탄 유역에는 현무암 특이 지형으로 철원 순담 계곡이 있지만, 댐 수몰지 내에는 현무암 지형지질 특성 발달이 미약하고 희귀성이 높지 않다. 둘째, 2001년 10월 문화재청의 지질광물 문화재 자원조사 결과 보존이 요구되는 주상절리는 대교천 주상절리뿐으로 200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셋째, 2002년 5~6월 환경영향평가 협의 시 다른 주상절리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 없었고, 그 외 다른 지역에 대한 문화재 지정 여부에 대한 원고 측의 견해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한탄강 가치에 대한 댐 반대 측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는 이후 환경부 국가지질공원을 넘어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정받았다. 한탄강댐 추진 당시 국가의 논리대로라면 한탄강 세계지질 공원 지정은 어불성설이다. 댐 반대 측이 한탄강댐을 "토건족과 거기에 기생하는 전문가 집단의 협작이자 국가 사기"라고 규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천시 문암동 전망대는 한탄강 수직 주상절리 절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가을철이면 절벽을 따라 붉게 단풍이 지면서 장관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일행이 현장에 갔을 때 전망대로 이어지는 곳은 장화 없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뻘층이 깊게 쌓여 있었다. 여기서 만나 한 주민은 "살면서 한탄강에 이렇게 물이 차오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무서울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원래 한탄강은 큰 여울(漢灘)의 강이란 명칭처럼 홍수 때는 바닥에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유속이 빨랐다. 또 수위도 낮았다. 1996년 상류 철원에 1000mm가 넘는 비가 왔을 때도 강물은 30여 m 높이 문암동 수직 절벽의 3분의 1도 채우지 않고 흘렀다. 그러나 한탄강댐이 들어선 이후인 올해는 그보다 적은 양의 비가 왔음에도 수직 절벽의 거의 꼭대기까지 수몰됐다. 포천시 관인면 영로대교에서도 댐 건설 전후 홍수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96년 홍수 시 강물은 한탄강 협곡의 4분의 1(옛 영로교)을 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는 협곡 윗부분까지 누렇게 색을 바꿔놓았다.


 

비둘기낭이나 재인폭포 등 진입로에 쌓인 진흙과 쓰레기는 어떻게든 정리가 된다 해도 폭포를 둘러싼 수직 절벽 등 U자형 협곡 지형은 진입로 자체가 없어서 장비가 들어갈 수조차 없다.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절벽에 찌든 진흙과 쓰레기를 씻겨내야 하는데, 조금만 많이 와도 또 침수되는 악순환이 우려되고 있다. 현무암 주상절리 한 덩어리가 붕락하는데 자연 상태에서 보통 70년이 걸린다는 게 이우형 소장의 말이다. 여기에 찌든 이물질은 동결과 해빙 과정을 거치면서 주상절리를 더 빠르고 더 많이 붕락시키는 원인이 된다. 더욱이 주상절리 수직 절벽은 수리부엉이의 둥지가 있는 곳이며, 한탄강구절초(포천구절초) 등 특이 식생의 주요 서식지이기도 하다. 목도리담비 등도 협곡 지형에 살고 있고, 강에는 어름치, 쉬리 등이 한반도 고유종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현무암 협곡 지형에 적응해 살아왔지만, 한탄강댐으로 침수가 된 이후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우형 소장은 절벽 식생이 죽어 하얗게 변해버리는 백화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한탄강 망치는 댐 두고만 볼 건가


 

중국 러산시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러산대불이 홍수에 일부 잠겨 훼손이 우려된다는 외신 보도가 있지만, 정작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이 침수되는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조차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한탄강댐으로 인한 세계지질공원 침수가 현실이 된 상황에서, 한탄강댐과 세계지질공원은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


 

▲ 경기도 포천시 문암동 전망대 일대까지 물이 차올라 고추밭 일대를 뒤덮었다. ⓒ함께사는길(이성수)

▲ 한탄강댐 수문 안에 이번 집중호우 때 떠밀러 온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함께사는길(이성수)

한탄강 역사·문화 산증인의 탄식


 

이우형 현강문화연구소 소장의 삶은 한탄강과 불가분이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한탄강에 댐을 지으려 하자 이를 막아낸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 소장 또한 평생을 한탄강 지킴이이자 이 지역 역사문화의 산증인으로서 살아왔다.


 

1990년대 말 이 소장은 고향 선배인 이철우 전 국회의원과 함께 철원·연천·포천 지역 인사들과 한탄강네트워크(이하 한타넷)를 결성했다. 한타넷은 정부의 한탄강댐 추진에 맞서 댐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이 소장은 임진강 하류 지역 홍수 방어를 위해 한탄강에 댐을 만든다는 정부 논리는 가당치도 않았다. 한탄강은 임진강 유역의 15%밖에 되지 않아 홍수 방어 효과가 떨어진다. 효과를 떠나 한탄강이 가진 독특한 인문생태지질학적 가치를 생각하면 댐 건설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홍수전용댐이라는 논리로 댐을 강행했다.


 

10여 년 가까이 이어진 치열한 댐 반대 운동 내내 주민들은 권력과 돈으로 협박당하고 회유에 시달렸다. 더 많은 보상을 수 있다는 온갖 편법과 불법이 횡행하고 이 소장이 관리하던 한타넷 홈페이지에 누군가 고의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일도 있었다. 한탄강댐 건설을 둘러싼 주민 갈등은 이 소장에게 "100년 지나도 아물지 않을 상처"가 됐다.


이 소장은 수많은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한탄강의 가치를 알리고, 각종 토론회와 법원 현장실사에도 참여해 한탄강 지역이 가진 가치를 설명했다. 그의 주장은 2020년 유네스코가 한탄강을 세계지질 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증명됐지만, 불행히도 한탄강댐 건설을 막진 못했다. 이 소장은 "토건족에 종속된 전문가 집단의 문제점"을 댐 건설의 원인으로 꼽았다. 2004년 철원 대교천 현무암 협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인 모 교수는 한탄강 다른 지역에 대해선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한탄강 소송 현장 검증에서 정부 측 전문가로 참여한 한국지질자원연구소 모 박사는 그에게 "세상에 이런 데가 있어요?"라며 놀라면서도 "밥줄 끊긴다."라며 정부 측 주장을 되풀이 했다. 지질자원연구소 모 박사는 MB 정부 시절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발탁됐다고 한다. 이우형 소장은 "그들의 제자들이 현재 문화재 판을 점령하고 있다."라면서 "4대강사업 당시 문화재 지표 조사를 날림으로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의 카르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한탄강댐 건설 전후로 한탄강 수위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댐이라는 인공구조물이 흐름을 방해하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대규모 현무암 협곡 침수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따른 치명적인 악영향이 예상되지만,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탄강댐과 세계지질 공원이 과연 공존 가능한가?" 이 소장의 질문에 정부는 이제라도 답해야 한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92811360362388#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