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0일 토요일

내 막걸리 잔에 반응한 소나무... 눈물이 났다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왜곡된 기억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24.02.10 18:40최종 업데이트 24.02.10 18:40
눈이 내린다. 세상에 뭔가가 또 더해지려나 보다. 하나를 더해 2024년을 만든 숫자는 여지없이 내 나이에도 하나를 더해 놨다. 그런데 내 맘속에는 더하기 대신 빼기만이 요란하다. 

눈이라도 맞아볼까, 조심조심 도서관을 나서는데 문득 두 개의 추억이 번개처럼 스쳐 간다. 벌써 재작년이 돼 버린 오마이뉴스에서 누린 18주간 연재의 감동과 기쁨 그리고 눈 내리던 며칠 전의 기억. 갑자기 내 맘속도 더하기로 바뀌었다.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연재를 마치며 힘들었다고 핑계 대고 요란스럽게 감사 인사까지 했지만, 언제나 그리웠던 그때가 아니었던가. 조금 뻔뻔할지 몰라도 다시 한번 용기를 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그리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으니 며칠 전 그 이야기로 감히 다시 나서본다.

한 송이 두 송이 기분 좋은 눈꽃을 맞으며 도서관으로 향하던 그날 아침, 갑자기 사나운 일단의 목소리가 그 눈꽃들을 날려 보냈다. 

말다툼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봤는데, 어디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

나도 몰래 고개가 그 목소리를 좇았다. 시력을 잃은 지 이미 10년이 넘었건만, 여전히 이 버릇은 나아질 줄 모른다. 발걸음을 멈춘 채 보지도 못하는 눈을 껌뻑이는데 좀 전의 그 목소리에 질세라 더욱 앙칼진 목소리가 뒤따랐다.

"도대체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날 내가 여기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에요."
  

▲ 말다툼 기억이란 건 때론 내가 본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한 것일 수도... ⓒ 김미래/달리

 
무슨 일로 아침부터 저렇게 열을 낼까 싶어 귀를 기울이는데 도우미님이 잡은 팔에 힘을 주며 끌어당겼다.

"그냥 가요. 아무래도 주차 문제 같은데,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감정싸움하는 것 같네요."

점점 멀어지면서도 끈질기게 뒤통수를 쫓아오는 그들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들으면서 걷다 보니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사람들의 확증 편향이 어떤 때는 기억조차 왜곡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사건을 목격한 목격자들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정반대의 진술을 하는 것도 그런 예 중 하나라고 했다. 이젠 희미해진 두 사람의 목소리도 바로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 맘이 무거웠다.

"에이, 저 두 사람, 그동안 뭔가 쌓인 게 있었나 보네. 아침부터 별것 아닌 걸로 저렇게 열 내는 거 보니까."

씁쓸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도서관에 거의 다다를 때는 눈송이가 제법 커져 있었다. 손등으로 받아 보니 살짝 차가운 무게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불현듯 왜곡된 기억이 나쁜 건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나처럼 중도에 시력을 잃은 사람은 다른 감각 기관이 상실한 시각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마치 보는 것처럼 끊임없이 영상을 만들고 장면을 그리고 있다. 

시력을 잃기 전에도 나는 기억력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그런 소리를 더 자주 듣는다. 그래서 머릿속 영상과 장면을 재현해서 신나게 기억을 풀어갈 때가 많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됐다. 아주 생생하게,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는 장면인데, 가만히 따져보니까 그건 내가 시력을 잃은 후의 일이었다. 분명히 볼 수 없었던 장면이 마치 방금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반대의 경우도 그랬다. 분명 볼 수 있었을 때의 기억이지만, 개연성도 떨어지고 증명할 수도 없는데 장면 장면이 너무도 또렷했다. 만든 기억이 분명한 거 같은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그렇게 만들어진 기억은 대부분 좋은 것들이었고, 그로 인해 낭패를 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기분도 좋아지고, 비록 눈물을 흘릴지언정 삶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한 적이 많았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에서 떠오른 추억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가족 모임이 있어서 남한산성에 갔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뭔가 내 볼에 와 닿았다. 차가웠지만 느낌이 좋았다. 혹시 하는 사이 이마에도 콧잔등에도 기분 좋은 차가움이 와 닿았다. 

"눈이 오나 보네?"

몇 년 만에 미국에서 친정을 찾은 사촌 여동생이 내 손을 잡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면서 답했다.

"응. 막 내리기 시작했어."

찻집에서 두 시간 남짓 즐겁게 수다를 떨고 나오는데 눈발이 더 세졌다. 지난번 내린 눈인지 지금 쌓인 눈인지 내 발자국이 제법 크게 뽀드득 소리를 냈다. 문득 머릿속에 아련히 멋진 영상이 펼쳐지면서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나무에 건배를

나는 남한산성을 무척 좋아한다.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진로를 찾지 못한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남한산성 8킬로미터 성곽을 따라 달려 보았다. 좋았다. 마음도 달래고 기분도 나아지고. 하루, 이틀, 매일 달리다 보니 엉뚱하게도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다. 심장이 터지도록 빗물처럼 땀을 흘리면서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한 달쯤 지났을까. 결국 비탈에서 굴러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뒤에야 달리기를 멈췄다.

겨울의 남한산성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눈만 오면 배낭을 짊어진 적도 있었다. 배낭에는 두툼한 방석과 그것을 넣고도 남을 커다란 비닐 주머니, 펄펄 끓는 물을 담은 보온병에 사발면 하나와 종이컵 몇 개 그리고 막걸리 한 병이 늘 함께했다.

지금은 남한산성 성곽이 잘 복원돼서 성곽을 따라 쉽게 걸을 수 있지만, 그때는 달랐다. 특히 남문에서 동문을 지나 북문까지 이르는 길은 성곽도 많이 무너져 있었고, 길이라 할 수 없는 위험한 곳도 제법 있었다. 

그래도 난 주로 눈 쌓인 이 길을 걸었다. 인적도 드물었고, 경치는 물론 운치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길에는 사발면에 막걸리 한 잔이라는 내 나름의 멋부리기와 딱 어울리는 곳이 많았다.

몸에 열도 좀 나고, 뱃속도 출출함을 호소하면 나는 길을 벗어나 배낭을 내려놓았다. 비닐 주머니에 담긴 방석을 깔고 앉아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면이 익는 그 몇 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종이컵 한 잔 가득 막걸리를 따른 뒤, 눈 덮인 소나무 숲이나 무너진 성곽에 건배를 청했다. 아, 거의 30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군침이 돌고 가슴이 설렌다.

그곳 길이 험하기는 했지만 주말이나 휴일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대부분은 그냥 길을 따라 나를 지나쳐 갔지만, 가끔 길을 벗어나 내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네기만 해도 나는 그분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재빨리 종이컵을 꺼내 막걸리 한 잔을 가득 부었다.

"막걸리 한 잔 하실래요?"

다음 순간 난 훌륭한 젊은이로 불렸고 때론 흥을 아는 보기 드문 멋쟁이가 되어 있었다. 아, 진짜 딱 한 분, 아니 중년의 부부라고 하는 게 맞겠는데, 다른 좋은 자리 다 놔두고 굳이 별로 편하지도 않은 내 등 뒤에 앉아서, 지지리 궁상이고 음주 산행은 절대 안 된다며, 내가 사발면에 막걸리를 다 비울 때까지 계속 혀를 찼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던 곳은 남장대 터를 지나 동문으로 가는 내리막길 근처나  동문을 지나 장경사에서 동장대 터에 이르는 깔딱 고개 근처였다. 어느 날 이 두 장소를 모두 지나쳐 북문까지 간 적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눈이 엄청 많이 내렸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해 살짝 불안했던 날로 기억한다.

지금은 복원 공사로 완전히 해체됐지만, 그때 북문은 성문 위에 기와 누각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나는 누각으로 들어가 처마 밑 주춧돌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발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늦은 만큼 서둘러 막걸리를 따랐다. 늘 그랬듯 건배를 청하려 종이컵을 치켜들고 내가 온 길을 바라봤다. 내 발자국이 어느새 눈에 덮여 희미해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소나무가 저마다 눈 모자를 쓰고 멋진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정말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요 기쁨이었다. 나는 가장 멋있고, 제일 크고 최고로 당당해 보이는 소나무를 향해 잔을 들어 보이며 평소 하지 않던 윙크까지 해 보였다. 

그리고 막 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놀랍게도 그 나무가 내게 맞장구를 치는 게 아닌가. 커다란 소나무의 가장 높이 뻗은 가지에서 눈덩이가 툭 떨어지면서 살짝 가지가 치켜 올라갔다. 그건 분명 잔을 치켜 올리며 내 건배에 호쾌하게 응하는 멋진 친구의 모습이었다. 나무는 계속 가지를 흔들면서 보석 같은 눈꽃들을 사방으로 날려 보내기까지 했다. 

기억의 왜곡이고, 너만의 착각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환상적이고도 몽환적인 장면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설레는 느낌으로 남아 있다. 
  

▲ 소나무에 건배 진실로 아름다운 나만의 추억은 꼭 진실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 김미래/달리


나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그때의 감동을 사촌 여동생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동생이 내 팔을 잡고 주차장까지 함께 오는 동안 남한산성에 관한 찬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마구 잘려 나가던 우리 소나무를 여기 남한산성 주민들이 힘을 합쳐 지켜낸 역사도 유명하지만, 눈 덮인 소나무가 그려내는 한 폭의 수묵화도 빼놓을 수 없거든."

혹시 내가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게 내 팔을 잡고 안내하면서도 여동생은 내 말에 연방 감탄과 맞장구를 쳐 주었다. 하지만 주차장은 너무나 가까웠고, 내 말을 뒷받침하기에 그날의 날씨는 그때와 너무 달랐다. 

"아, 그랬구나. 근데, 오빠, 지금은 나무에 눈도 별로 안 쌓였고, 눈이 녹아서 길이 너무 진창이야. 조심해야 해. 자, 이제 차에 다 왔어."

결국 시각이란 엄청난 놈은 여동생의 눈을 통해, 아름다운 나만의 환상을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현실로 야멸치게 바꿔 버렸다. 눈꽃을 휘날리며 내게 인사하던 그 나무는 그렇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흙과 섞여서 진창이 돼 버린 조금은 지저분한 현실이 차지해 버렸다.

늦은 밤, 비록 왜곡된 나만의 환상일지라도, 모처럼 다시 떠오른 이 소중한 추억을 글로 남기려 자판을 두드리는데 문득 눈 내린 남한산성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눈모자를 쓴 그 소나무에게 다시 건배를 청하고 싶었다. 눈물이 났다. 몸도 살짝 흔들렸다. 창피해서 소리 내지 않으려 입을 앙다무니 몸이 더욱 떨렸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 기억과 함께하고, 그 기억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눈물이 나고 몸이 떨렸다. 그런데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이재용 무죄 선고 재판부가 쓴 ‘트릭’들

 


민변·참여연대 판결 분석 좌담회…“승계 목적 맥락 파악 않고 사건 쪼개서 봐”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민생경제위원회 주최로 열린 “이재용 1심 판결 내용과 앞으로의 과제” 삼성물산 불법합병 1심 판결 분석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02.07 ⓒ민중의소리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불법승계 관련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법원 판결이 ‘트릭’을 사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이 회장 승계라는 주된 목적 아래 추진된 정황을 배제한 채, 사건을 쪼개 개별 범죄 혐의의 위법성을 판단했다는 설명이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민변 민생경제위원회·참여연대는 지난 7일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삼성물산 불법합병 1심 판결 분석 좌담회’를 열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박정제 지귀연 박정길 부장판사)는 지난 5일 이 회장의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결심 공판에서 이 회장에 대해 징역 5년과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이 회장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최소비용으로 경영권을 승계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삼성 미래전략실과 공모해 각종 부정행위에 관여한 혐의로 2020년 9월 기소됐다.

재판부는 이 회장이 연루된 19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라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사건을 종합적으로 보지 않고, 범죄 혐의를 세분화해 별도 행위의 위법성을 고려하면서 왜곡된 판결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 이동구 변호사는 “재판부는 일련의 과정을 보지 않고, 사건을 쪼개서 봤다”며 “트릭을 사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범죄 혐의를 쪼개서 보면 그 자체로는 범죄 행위가 잘 성립되지 않는다”며 “그 행위들이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하고, 그 행위들로 이득을 얻는 자가 있고, 그자가 행위들을 주도·사주했으면 범죄 행위가 성립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어떤 행위에 대해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불법성과 타당성을 판단하면 법원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일갈했다.

합병 전후 삼성 주요 계열사 지분구조를 보면, 이 회장이 합병의 최대 수혜자라는 점이 드러난다. 합병 전 이 회장은 제일모직 지분 23.2%를 보유했으나,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지분은 없었다.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을 4%가량 보유했다. 이 회장 입장에서는 합병 과정에서 제일모직 가치를 높이고 삼성물산 가치는 낮추는 게 유리했다. 합병을 거치면서 이 회장은 합병회사 지분을 16.4% 확보해 최대주주에 올랐다. 합병 후 이 회장의 삼성전자 간접 지분은 크게 늘었다. 합병 전 제일모직을 통한 삼성전자 간접 지분이 0.32%였는데, 합병 후에는 삼성물산의 삼성전자 지분이 더해지면서, 삼성전자에 대한 간접 지분이 0.91%로 올라갔다.

“승계만을 위한 합병 아니라면 불법 용인한다는 것인가”

검찰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이 회장 승계라는 주된 목적하에 추진됐다고 봤으나,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승계가 합병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는 게 재판부 설명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보도자료에서 “합병에 합리적인 사업상 목적이 존재하는 이상 합병에 지배력 강화 목적이 수반됐다고 하더라도, 합병 목적이 전체적으로 부당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본질을 회피한 판결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민병 민생경제위원회의 김종보 변호사는 “합병의 가장 큰 목적이 이재용의 지배력 확보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승계가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거나 약탈적 합병이 아니라면서 무죄를 선고한 건 본질을 회피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이동구 변호사는 “재판부도 승계작업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면서 “합병이 승계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고 했는데, 판결의 핵심이 되는 논거”라고 짚었다. 이어 “승계작업만을 위한 게 아니라면 관련한 모든 불법이 용인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면서 “(국정농단 사건)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정면 반박하기 어려우니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 재판부 판단은 앞선 판결과 모순된다. 합병의 성격은 이미 국정농단 사건에서 규정된 바 있다. 국정농단 사건 대법원 전원합의체와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이 회장이 승계작업을 도와달라고 청탁하며 박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씨 측에 뇌물을 건넸다고 인정해, 이 회장에게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2019년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승계작업이란 이재용이 최소한의 개인자금을 사용해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이라고 규정하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승계작업 일환으로 진행된 현안”이라고 판시했다.

삼성 내부 문서는 이 회장 승계가 합병의 주된 목적이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2012년 작성된 ‘프로젝트-G’ 문건을 보면, 합병 목적으로 ‘물산 지배력 확대’를 명시했다.

합병 발표 직전인 2015년 4월 작성된 ‘M사 합병 추진(안)’에도 합병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사업성 필요에 따른 것이라는 내용이 전혀 없다고 김 변호사는 짚었다. 그는 “삼성그룹의 지배력 확보에 관한 내용만 있다”며 “제일모직이 물산을 흡수합병하는 이유는 의결권 지분 확대였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프로젝트-G 문건에서 말하는 ‘물산 지배력 확대’는 총수일가의 지배력 확대를 의미한다”며 “합병에 관해 ‘회장님’, ‘사모님’, ‘부회장님’, ‘BJ(이부진)’, ‘SH(이서현)’의 지분율이 명시돼 있다”고 짚었다.

M사 합병 추진(안)에 대해서도 “건설·상사·바이오·레저 등 사업상 목적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이, 합병 주체에 대해서만 고민한다”며 “사업상 합병이 필요했으면, 삼성물산이 제일모직 흡수합병해도 된다. 사업을 구조조정하거나 삼성물산이 다른 기업과 합병해도 됐다”고 지적했다.

합병에 삼성물산의 사업적 목적도 포함돼 합병 목적의 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재판부 판단에 대해, 주객이 전도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회장 승계를 주된 목적으로 합병을 추진하는 와중에 부수적으로 사업성을 고려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는 설명이다.

김 변호사는 “총수일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합병을 하는데, 이왕 합병하는만큼 사업상 시너지를 궁리해 보자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며 “재판부는 주된 목적과 부수적 목적을 구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삼성물산이 경영상 위기를 극복할 여러 방안을 고민한 끝에 제일모직과 합병을 최선의 방법으로서 추진했다는 점이 입증되지 않은 채 합병의 승계 목적을 부인하는 건 무리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관련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4.02.05 ⓒ민중의소리

“재판부 논거는 총수 이익이 주주 이익이니 범죄 눈 감으라는 것”

재판부는 합병비율이 이 회장에 유리하게 산정됐다는 검찰 공소사실에 대해, 합병 비율이 부당하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비율은 1:0.35로 산정됐다. 참여연대는 제일모직 가치를 부당하게 부풀린 요인을 보정한 적정 합병비율이 1:1.18이라는 분석 결과를 낸 바 있다. 이 회장이 취한 부당이익 규모는 2조~3조 6천억원으로 추산했다.

합병비율의 불공정성은 다수 판결에서 인정된 바 있다. 합병 당시 삼성물산의 주요 주주였던 일성신약이 합병비율 산정에 있어 삼성물산 가치가 낮게 평가됐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합병비율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국정농단 사건 판결도 합병비율이 불공정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은 박 전 대통령 지시를 받아 삼성물산 주주인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불공정한 합병비율에 따른 국민연금공단 손해를 막아야 할 임무를 위배했다는 판단이었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도 삼성물산 주주로서 합병에 반대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 해결절차(ISDS)에서 국정농단 판결을 근거로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이동구 변호사는 합병 당시 삼성물산 영업이익은 약 6,500억원으로, 제일모직(2,100억원)의 세 배에 달했다고 짚으며 “삼성물산 가치를 제일모직의 3분의 1로 잡은 합병비율이 어떻게 부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했다.

합병비율 부당성에 대한 재판부 판단은 총수일가를 회사와 동일시하고 승계를 위한 사익추구가 다른 주주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재벌 논리를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재판부는 “합병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 및 경영권 안정화는 물산 및 주주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대주주의 이익이 곧 주주의 이익이라는 논리는 회사법의 기본 원리에서 벗어난 생각”이라며 “총수와 대주주가 잘 되는 게 회사와 주주가 잘 되는 것이니, 기업인으로서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 눈 감으라는 논리과 다름 없다”고 지적했다.

합병비율의 부당함이 부정되면서, 삼성물산의 국내 주주가 불법성을 주장하기 어렵됐다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제기됐다. 엘리엇이 한국 정부로부터 손해를 보전받을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해 차별적인 결과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김종보 변호사는 “향후 민사에서는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으나, 이번 판결에 따르면 합병에 아무런 불법성이 없다는 취지인 것으로 이해된다”며 “이 경우 오히려 해외투자자가 국내투자자 보다 더 보호되는 문제로 이어진다”고 짚었다. 이어 “엘리엇은 한국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갈 수 있게 됐는데, 주주는 누구를 상대로 소송해야 하는가”라고 한탄했다. 또한 “한국은 무슨 죄인가. 왜 이재용과 박근혜 때문에 국가 재정이 피해를 봐야 하는가”라고 했다.

좌장을 맡은 한상희 참여연대 공동대표(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결국 국민 호주머니를 털어 엘리엇에 돈을 주고, 그 이득은 이재용이 취하게 됐다”고 했다. 김은정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손해배상 청구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번 판결이 왜곡된 지배구조에 기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총수일가 사익편취를 용인하면서 한국 시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는 지적이다.

김 사무처장은 “이번 판결에 따르면, 사업적 목적이었다고 하면 모든 의사결정이 용인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업이 지배구조를 개선할 이유가 없다”며 “그간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으로 지목된 문제”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다른 재벌그룹이 합병을 머뭇거리면서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다”며 “이번 판결은 재벌 2·3세들이 자기 돈으로 주식을 취득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얻은 작은 회사를 통해 거리낌없이 그룹의 주요 회사를 지배하게 되는 걸 용인한다는 신호를 준다”고 말했다.

한 공동대표는 “언론은 삼성의 사법 리스크 해소라고 하는데, 이재용의 사법 리스크 해소다. 삼성과 이재용은 다른 존재”라며 “한국의 사법 리스크는 더 커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법질서와 정의가 일거 무너졌다”며 “경제적으로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주축을 이루고, 한국의 사회 구조에 대한 신뢰가 붕괴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구도 한국의 경제질서에 신뢰를 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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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도, 압박도 안통하는데 '북한 나빠요'만 외치는 윤석열 정부


'자유의 북진' 추진하겠다는 통일부…북한 비판만 하면 납북자 돌아오나

 이재호 기자  |  기사입력 2024.02.11. 05:18:17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설 연휴를 맞아 이산가족들과 합동 차례를 지내며 이산가족 문제에 북의 호응을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질적인 남북 접촉이 없는 상황에서 통일부의 이러한 촉구가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8일 통일부는 "김영호 장관은 (사)통일경모회에서 주최하고 통일부가 후원하는 '제40회 망향경모제'에 참석하여 이산가족들과 함께 합동 차례를 지낼 예정"이라며 "이 자리에서 격려사를 통해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임진각을 찾은 이산가족들을 위로하고, 이산가족 문제는 천륜과 인륜의 문제로서 북의 호응을 촉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통일부는 김 장관이 "국군포로와 납북자, 억류자 가족들에게 위로의 인사를 전하며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강조할 것"이라고 전했다. 

망향경모제는 고향을 찾아갈 수 없는 실향민 및 이산가족들이 임진각 망대반에 합동차례상을 마련하고 함께 차레를 지내는 행사로, 매년 설에 개최되고 있으며 올해로 40번째를 맞이했다. 

이제까지 행사에 참석했던 통일부 장관들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언급했지만, 실제 이산가족의 전면적 생사확인, 서신 교환, 정례적인 상봉 등은 여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2018년 8월 마지막 이산가족 상봉이 실시됐으니, 관련 행사가 열리지 않은지도 5년 반이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이산가족과 같은 인도적 사안이 분단 80년이 가까워오는 세월 동안 해결되지 못한 데에는 북한의 폐쇄적인 태도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꺼리는 여러 이유가 있다고 분석했다.

핵심적인 이유로는 남북 간 국력의 차이로 인해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점인데, 오히려 이를 감추기 위해 북한의 가족들은 보통 상봉 때 자신이 받은 훈장 등을 들고 나와 "수령님 덕분에 잘 살고 있다"는 말을 반복하곤 한다는 게 정 전 장관의 설명이다. 실제 상봉장에는 각 가족들마다 마치 누가 맞춰주기라고 한 것처럼 비슷한 모양의 종이액자에 사진을 끼워 넣고 나오기도 하는데, 이 역시 '보여주기'의 일환이다. 

정 전 장관은 기술적·행정적 측면에서도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전했다. 한국은 이산가족 명단이 전산화 돼있지만 북한은 이러한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아, 남쪽에서 찾는 북쪽 가족이 누군지 알아보고 찾는 것에도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고 한다. 

가족 중에 월남한 사람이 있어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북한 가족이 이산가족 상봉을 주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이산가족 상봉은 남한 입장에서는 인도주의적인 문제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행사인 셈이다.

따라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해결하려면 북한의 태도를 변화시킬 유인책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남북 간 접촉은커녕, 물리적으로 연결돼 있는 통신선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상봉을 치러내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이산가족뿐만이 아니다. 통일부가 추진하겠다는 다른 사업들도 북한과 접촉이 있어야 가능하다. 지난 5일 김영호 장관은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통일부 장관-4대 연구원장 신년 특별좌담회'에서 "정부는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새해 들어 우리 정부는 자유의 북진 정책을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자유의 북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김 장관은 △핵전쟁 공포로부터의 자유 △연대의 자유 △종교, 언론의 자유 등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의 자유 △헌법 제4조에 명시된 자유민주질서 입각한 통일 등을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의 국정철학을 네 가지 자유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이 언급한 추진 과제들을 북한이 받아줄 가능성은 매우 낮으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북한이 남북관계를 사실상 단절하고 나섰다는 데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개의 국가관계이며 전쟁 중에 있는 두 개의 교전국가간 관계"로 규정하고 올해 들어 남한과 관련된 기관 및 단체, 법령, 합의서 등을 폐기했다. 

▲ 12월 31일 북한 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가 지난 26일부터 30일까지 당 중앙위원회 본부에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회의에서 올해 각 부문 사업을 총화하고 내년 당 및 국가사업의 발전 방향을 확정해 발표했다. ⓒ로동신문=뉴스1

만나지 않겠다는 상대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호응을 끌어내기 보다는 북한에 대한 압박을 적절한 대북 정책이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회담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북한을 비난하고 미국과 함께 또는 독자적으로 북한에 대한 제재를 쏟아내는 것만 보더라도 북한과 접촉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압박을 통한 행동변화는 현 상황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남한의 압박이 효과가 있으려면 남한이 북한에 영향을 주는 존재여야 하는데, 지금은 개성공단 가동도, 금강산 관광도 모두 중단된 상태다. 북한이 남한에 소위 '아쉬울 것'이 없는 상태에서 압박이 통할 리가 없다. 

압박을 통한 행동 변화가 어렵다면 북한 지도 체제를 붕괴시키는, 즉 북한의 정권 교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역시 쉽지 않다. 한반도를 둘러싼 대외적 환경이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심화된 미국과 러시아,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북한의 숨통을 틔워줬다. 북한에 대해 어떠한 국제적 합의도 이뤄내지 못하면서, 핵 고도화를 비롯한 북한의 행동이 제어되지 못한 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북한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시험 발사가 안보리의 결의안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의안'(Resolution)은 커녕 중간 단계 수준인 '의장 성명(Presidential statement)'도, 가장 낮은 수준인 '언론 성명(Press Statement)'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북한은 미국과 관계 개선을 후순위로 미룬 듯하다. 북한이 미국과 수교를 추진하는 이유는 안보리 및 미국 제재를 해제하고 세계 경제에 편입되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인데, 북한 입장에서는 현재와 같은 강대국 간 대립이 유지된다면 미국과 어렵게 관계개선을 하는 것보다 특정 진영에서 핵 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더 편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북한과 접촉할 계획도 없고, 압박은 통하지 않고, 붕괴시키기도 어려운 환경이라면 최소한 북한에 영향력이 있는 국가와 관계를 강화해 간접적으로라도 북한의 행동을 제어하고 영향력을 투사시켜야 하는데 이 또한 여의치 않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중, 한러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한러 양측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신경전을 벌였다. 지난 3일 외교부는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의 발언은 일국의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으로는 수준 이하로 무례하고 무지하며 편향되어 있다"며 이례적으로 강하고 직접적인 어조로 외교 상대국 대변인을 비난하는 입장을 내놨다. 

외교부가 이처럼 원색적인 비난 입장을 발표한 이유는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이 지난 1일(현지시각)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노골적으로 편향돼 있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1월 31일 윤 대통령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중앙통합방위회의에서 "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인 집단"이라며 북한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였는데, 자하로바 대변인은 이에 대한 입장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위와 같은 답을 내놨다. 

결국 윤석열 정부는 스스로 내놓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방안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 지금 정부가 북한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하는 것은 '북한 나빠요'를 외치는 것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7일 KBS에서 방영된 대담에서 북한을 비이성적인 집단이라고 규정하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든 안 하든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톱다운 방식은 곤란하고, 실무자 간 교류와 논의가 진행되며 의제도 만들고 결과를 준비해 놓고 정상회담을 해야지, 그냥 추진한다고 해서 끌고 나가는 것은 아무 결론과 소득 없이 보여주기로 끝날 수가 있다"며 회담 자체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윤 대통령이 회담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과 대조적으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아무리 입장이 다른 대상이라도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최소한 일본처럼 접촉에 나서겠다는 의지라도 보여야 한다. 소득 없는 '보여주기식'의 회담이라도 그 회담이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덧붙여, 정부는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윤석열 정부가 북한 문제에서 국민에게 밝힌 가장 큰 약속은 북한 인권 개선, 납북자 문제 해결이다. 북한 정권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이 문제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패션쇼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 해결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시행해야 한다. 정부는 이념적 '주장'을 하는 것만으로 존재의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 지난해 7월 27일 정전협정체결일에 각각 기념행사에 참석한 윤석열(왼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