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의 우리 어원 나들이] 말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일
정진명 시인, 우리말 어원 고찰 연재 '32-말의 뿌리’
- 입력 2024.09.26 09:14

[굿모닝충청 김종혁 기자] 지금까지 꽤 긴 기간 동안 우리는 말의 뿌리를 캐는 데 생각을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캐낸 말의 뿌리들은 무엇을 드러냈을까요? 이런 의문이 든다면 이제 우리는 이 긴 여행을 마무리해야 할 단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말의 뿌리를 캐는 일은 말의 질서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일이고, 말의 질서가 드러나면 생각의 버릇이 함께 드러납니다. 생각의 버릇이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현상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생각에서 규칙성과 합리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여기서 ‘철학’이란 말이 떠올랐다면 여러분은 이 글을 따라온 가장 훌륭한 독자입니다.
철학은 ‘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제가 쓰는 말을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철학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제 말로 하지 않는 철학은 제대로 된 철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철학은 철학이라기보다는 생업에 가깝습니다. 지난 세월 우리를 스쳐 간 불교와 성리학과 근현대철학을 돌이켜보면, 우리말로 된 철학은 거의 없었습니다. 보편성이라는 핑계로 남의 말로 우리의 생각과 삶을 설명해 왔죠. 우리는 우리다운 철학을 한 적이 없는 셈입니다. 그동안 안 어울리는 남의 옷을 입고 잘난 체하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하하하.
철학은 인간 사유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학문이라는 말로 이 현상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철학은 반드시 언어를 통해 사유의 자취를 드러냅니다. 그가 쓰는 언어에 사유의 전부가 들었고 슬기가 있으며 사랑이 있습니다. 철학이 그리스말 ‘philosophy’이고 이것은 ‘앎’과 ‘사랑’이라는 말이 합쳐진 것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철학을 설명할 때 이렇게 어원을 이용하여 설명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철학’이란 우리말로 무엇일까요? ‘앎 사랑’이라고 할까요? 슬기 사랑이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인가요? 이런 번역어는 죽도 밥도 아닙니다. 이에 관해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하는 건,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말의 뿌리를 캐는 일은, 우리말에 서린 우리 겨레의 사고와 철학을 추려내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한 적이 없는 작업이 우리 앞에 드러났습니다. 우리말의 뿌리에 실린 우리 겨레의 사유를 따라가면, 다른 겨레에게서는 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철학이 드러날 것입니다. 과연 이게 가능한 작업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원을 탐구하는 일이 다다라야 할 마지막 자리는 바로 그곳임이 분명합니다. 연재를 시작한 날부터 주어진 운명이었습니다. 이제 그 운명을 용감하고 정직하게 마주할 시간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논의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연히 사람이 먼저일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보여주는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본 다음에, 사람에게 인드라망처럼 얽혀든 관계와 그에 따른 관념들을 하나씩 들춰보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에게 미친 사회와 세계의 작용이 우리말에 어떤 방식으로 드러났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우리말에 철학이 있기는 한 걸까요? 이 물음이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답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밑져야 본전이니.
198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잡음이 일었습니다. 한 교수가 신성 모독으로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종교계의 이런 소란은 낯선 게 아니어서 대부분 더러운 권력 투쟁의 산물이기에 ‘종교정치’의 일환에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없어 그냥 지나치기 마련인데, 이 사건은 좀 독특했습니다.
한 교수가 기독교를 논하는 논문에서 불교 용어인 대승과 소승이라는 말을 썼고, 그것이 신성 모독에 해당되며,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결과, 제 기억에 의하면 파면으로 귀결되었던 듯합니다. 제 일이 아니다 보니 40년 전의 일을 이 정도로 기억한다면 저의 기억력도 대단한 것이라고 자평합니다.
마침 『한철학』(1985)이라는 책을 사서 읽은 적이 있는 저는, 이듬해 나온 『한사상』을 마저 사서 읽었습니다. 기독교의 성격을 불교와 비교하고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제안 비슷하게 쓴 글이더군요. 그런 게 신성 모독으로 징계위에 회부된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식이면 우리나라 기독교를 기독교가 아니라 전통 무교라고 일관되게 서술한 연세대학교의 유동식 교수는 진작에 모가지가 잘렸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유 교수는 성직자가 아닌 학자이기에 그런 광기의 칼날을 피해갔고, 학문 연구의 자율성을 지켜준 연세대학교의 학문 윤리 덕에 우리는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라는 정말 좋은 책을 아주 손쉽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 교수와 달리 김상일 교수는 엉뚱하게도 용어 하나로 망나니의 칼날 앞에 내몰린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민족주의는 그전의 민족주의와 달리 국수주의로 치닫는 형국이었고, 실제로 그것은 철학 없는 민족주의가 다다른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우선,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내부에 ‘철학’이 없고, 잔뜩 부풀린 역사만 있었습니다. 생각은 없고 덩치만 큰 공룡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만주가 우리 땅이라느니, 수메르가 우리 조상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전 세계를 우리의 발아래 놓으려는 의도가 또렷했습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 겨레의 철학과 사상이 어느 범주까지 닿아야 하는지 구획정리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오직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무한 증식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독특하고 신선하게 나타난 작업이 김상일의 ‘한철학’이었습니다. 특히 기독교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과정철학’에 조예가 깊어 그것으로 우리 민족의 사상과 철학을 풀어보려는 독특한 시각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의 작업이 이룬 성과와 상관없이 민족주의가 내실을 갖출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생각을 하고 제 궁색한 쌈짓돈을 털어 『한밝문명론』까지 구해 읽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걷는 자가 맞닥뜨려야 할 모색의 어려움이 그대로 드러났고, 당시 국수주의로 기울던 연구자들이 맞닥뜨린 원천 자료의 한계 때문에 철학화 논리의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이런 한계를 보면서 ‘민족’에 갇히면 오히려 제대로 민족을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했습니다.
우리말의 실뿌리가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 철학’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한겨레의 구성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내가 쓴 말 속에 담긴 사유의 자취를 찾아 나서기 전에 앞서간 이의 자취를 한 번 되돌아보는데, 유독 김상일이라는 이름이 떠올라 여기 적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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