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31일 토요일

한반도에서 유엔 헌장 정신을 구현하라 ②

대화를 통한 해결의 의의와 그 가능성
김종익 | 2018-04-01 08:18:2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 글은, 북한 핵 문제의 근본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합니다. 북한이 왜 핵 개발에 목을 매고 있는지, 그런 북한의 의도가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알게 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청일 전쟁, 한국 전쟁, 북한 핵 개발 이후, 한반도는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또 하나의 고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고비를 제대로 이해하고, 슬기롭게 넘어가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감춰진 ‘역사’를 보는 느낌입니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3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우메바야시 히로미치梅林宏道
1937년생. 도쿄대학 수물리계數物理系 박사(磁性물리학). 태평양 군비 철폐 운동 결성 및 대표 취임. 저서로는 『저항의 과학 기술』(1982년), 『재일 미군』(2002년), 『미군 재편 - 그 목적은』(2006년) 등이 있다.

역사를 날조하는 여론 형성
북한은 예사로 거짓말을 하는 국가이며, 교섭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호소한 지난해 9월의 아베 수상의 유엔 총회 연설은, 안보리 결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연설 자체의 내용에서도 엄격하게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가 통감하는 것은,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북한은 핵, 미사일 개발을, 단념할 의도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화란, 오히려 북한에게는 우리를 기만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2017년 9월 2일, 아베 수상 유엔 총회 일반 연설)
이렇게 단언한 아베 수상의 연설은, 어떠한 史實로 입증되고 있는 것일까. 한반도와 겨우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직접적인 당사국,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인 일본이라는 국가의 수상이 국민을 대표해 행한 이 연설은, 나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심사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것은 역선전Demagogie에 의한 선동이 아닐까. 
아베 수상이 증거로 내건 것은 두 가지 ‘史實’이었다. 하나는,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 다음해의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설립부터 2002년에 KEDO가 기능을 정지하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또 하나는, 6자 회담이 2005년 9월 19일에 한반도의 비핵화에 합의한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그 실시 단계로 걸음을 내딛고, 북한이 핵 실험을 반복해 2009년 6자 회담에서 탈퇴하기에 이른 과정이다.
먼저 KEDO 프로세스부터 생각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북미 합의를 유린하고, 이 프로세스를 붕괴시킨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다. 게다가 이 역사는 미국에서 케케묵은 이야기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논쟁이 이루어져 온 것이며, 미국 공화당의 보수 강경파가 우라늄 농축 문제를, KEDO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용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일본 수상이 유엔 총회에서, 새로운 정보도 아닌, 북한을 계략에 빠뜨리기 위해 들고 나오기에는 부끄러울 정도의 화제였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얄궂게도 아베 수상의 유엔 총회 연설 3일 후, 미국의 『The Nation』지에, 저명한 저널리스트 팀 쇼락Tim Shorrock이 KEDO 붕괴의 역사를 검증한 장문의 기사를 쓰고 있다. 이하는 다양한 문헌, 자료에 기초한 내가 요약한 KEDO 붕괴의 역사이다.
KEDO 프로세스는, KEDO가 북한에 2기의 경수로를 제공하고, 그 가동에까지 연결되는 重油를 제공하는 한편, 북한이 그때까지의 플루토늄 生産爐였던 黑鉛爐와 건설 중인 2기의 대형 흑연로 계획 등 관련 활동을 모두 동결하고, NPT에 잔류하는 것과 함께 IAEA 감시하에 둔다. 또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 사용 위협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한다고 한 내용의 합의였다.
이 과정은, 북한의 스파이 잠수함 좌초 사건, 金昌里 지하 핵 시설 의혹 사건, 북한의 대포동 발사, 회의의 저항에 따른 미국의 중유 공급 정체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거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 클라이맥스는 2000년 가을, 클린턴 정권 말기에 찾아왔다. 10월, 북한 권력 서열 2위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회담했다. 거기에서 양국 관계의 개선 원칙에 대해 “상호 적의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획기적인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새로운 관계로 나가는) 중요한 첫걸음으로, 양국은 어느 쪽 정부도 상대에 대해 적대적 의도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고, 과거의 적의에서 자유로워진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앞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고 서약했다. …양국은 불신을 없애고 상호 신뢰를 구축해 중요한 불안 사항을 건설적으로 협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것과 관련해 양국의 관계는, 상호 상대의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 원칙에 기반을 둔 것임을 재확인했다…”
10일 후에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답례 방문했다. 올브라이트는 회고록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인상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뭔가를 아는 총명한 남자” “고립되어 있었지만 정보통이다. 나라가 비참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고뇌도 보이지 않는, 자신에 차 있어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 핵 문제만이 아니라 KEDO 프로세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미사일 문제도 집중해 협의가 지속되었다. 클린턴 대통령 특별보좌관이었던 웬디 셔먼은 퇴임 후 곧바로 뉴욕 타임스에 「미사일 협의도 합의에 접근했다」는 제목의 글을 게재한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하고 부시(아들) 정권이 탄생한 시점에서도, 클린턴 정권이 달성한 북미 관계의 도달점은 차기 정권으로 인계될 예정이었다. 부시 정권의 첫 국무장관이 된 콜린 파웰은 2001년 1월 상원에서의 인증 공청회에서 그 방침을 진술했다. 
그러나 체니 부통령, 럼스펠트 국무장관 이하 모든 네오콘 세력은, 강경한 북한 적대 정책을 주장하고, 그 영향은 노골적으로 표면화해 갔다. 먼저 2001년 말에 의회에 제출된 「핵 태세의 재검토(NPR)」는, 북한과 이란을 “만성적인 군사적 불안”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거나 숨겨 주거나 하며, 대량 파괴 무기 및 미사일 계획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고 지명하며 핵 공격 대상임을 시사했다. 이것을 안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발표해 “미국은 8년간 준수되어 온 양국의 합의를 깔아뭉갰다”고 비판했다.
“상호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2002년 1월 말에 이루어진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 연설에서, 더욱 공공연하게 깨졌다. 주지하듯이 연설은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부르며, “북한은 국민을 굶주리게 하면서 미사일과 대량 파괴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정권”이라고 평했다. 다짐이라도 하듯이, 3월에는 서울을 방문해 “인민을 해방하지 않는 한, 저 남자, 김정일에 대한 생각은 변함없다”고 적의를 드러냈다. KEDO의 이행을 통해 도달한 관계 개선이라는 북미 합의는, 이렇게 하여 미국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우라늄 농축 문제의 진상
여기까지의 경과에 의해 우라늄 농축 문제를 꺼낼 필요도 없이, 미국 정권이 이데올로기적으로 KEDO 과정을 파괴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후, 부시 정권은 미국 정보기관이 입수한 우라늄 농축 계획에 관한 정보를 이용해, 북한의 합의 위반을 국제적으로 선전, 일본, 한국을 끌어들이면서 KEDO를 완전하게 매장했다.
당시 미국이 입수한 북한의 우라늄 농축에 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수준의 것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뭔가 시험적인 연구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시는, KEDO가 제공하는 경수로는 아직 콘크리트 다지기가 막 시작된 단계이며, 원자로의 노심 반입 단계로 과거의 활동을 포함한 검증이 시작되는 긴 여정의 초반에 불과했었다.
북한이 핵무기 계획을 포기한 후를 예측한 NPT가 허용하고 있는 원자력에 관한 기초 능력 유지를 고려하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혹은 협상 소재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기초 기술 확보를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긴 역사를 가진 상호 불신을 불식시키면서 관계 개선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라늄 농축 의혹에 관한 해명은, 미국 입장에서도 북한 입장에서도 극복해야 할 외교 과제로 파악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2년 10월, 국무 차관보 제임스 켈리가 평양을 방문해 우라늄 농축 문제를 북한에 내밀었을 때, 그에게는 어떠한 외교도 허용되지 않는 제한이 걸려 있었다. 당시 안전 보장 문제의 대통령 보좌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조차 회고록 속에서 우라늄 농축 문제를 외교 문제로 삼지 않았던 부시 정권의 사정을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짐(켈리 국무 차관보)에 대한 지시가 매우 융통성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것이 우라늄 농축 계획을 테이블에 올리는 단서가 될 것인가, 그것을 충분히 탐색할 수 없었다. 그는 상황을 워싱턴에 타전했다. 그것은 바로 누설되었다. 나로서는, 어떠한 교섭의 길도 끊어 버리는 강경파가 전보를 누설한 것이 뻔히 보였다. 북한이 분노해서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렸기 때문에, 강경파는 성공했다.”
당시의 일본 신문은, 북한이 비밀 우라늄 농축 계획을 인정했다는 큰 제목으로 도배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당사자들의 증언을 모두 읽어도, 북한은 우라늄 농축 계획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대표단은 북한의 책임자였던 강석주 제1외무 차관과의 회담 후,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협의했다. 그 결과, 우라늄 농축 계획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라고 미국은 해석했다. 실제 중요한 것은, 강석주는 이 건에 대해 “서로 의논해 가자”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앞으로도 염두에 두어야 할, 북한 외교의 특징에 관한 중요한 교훈이 시사되고 있다. 북한은, 상대국이 강하게 집착하는 문제를 재료로 삼으면서 자국에 유리한 교섭 결과를 끌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 냉정한 교섭자라는 점이다. 당시 미국이 KEDO 프로세스를 유지하면서 우라늄 농축 문제를 협의하는 길을 선택했다면,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나가는 利點을 찾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1001&table=ji_kim&uid=90 

박춘남 북 문화상 "형제끼리 마주앉은 것 같다"

평양 공연단, 고려호텔 도착...예술단, 공연 리허설
평양공연 공동취재단/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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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31  23: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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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남측 공연단 대표들이 공항 귀빈실에서 환영나온 북측 대표들과 마주앉았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앞으로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서 통일의 새 장을 써나가는 데서 한번 우리가 기수가 되고, 힘을 합쳐봅시다. 그러면 못해 낼 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술단과 태권도 시범단을 이끌고 31일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맞이한 박춘남 북한 문화상은 “형제끼리 마주앉은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오전 10시 33분 이스트항공 ZE2815편으로 김포공항을 이륙한 예술단과 태권도 시범단 본진 120명은 한 시간 만에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해 북한 땅을 밟았다.
단장을 맡은 도종환 장관과 부단장 김상균 국가정보원 2차장,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윤상 수석감독은 공항 귀빈실로 이동해 북측 박춘남 문화상, 현송월 단장, 김순호 부단장의 환영을 받았다.
  
▲ 평양 공연단 단장인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오른쪽)이 환영나온 박춘남 북한 문화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윤상 수석감독(왼쪽)이 북측 현송월 모란봉관현악단 단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실무회담 남북 대표로 만난 바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측 모란봉관현악단을 이끌고 왔던 현송월 단장은 “반갑다. 평양에 오니 우리가 기대가 크다. 유명한 가수들도 많이 오고, 성의껏 준비해 오니 기대가 크다”며 “빨리 만났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반겼다.
도종환 장관은 “꽃이 피었냐”고 묻고 “우리가 공연을 통해 만나면서 남북의 교류와 화해와 평화의 꽃도 활짝 피게 되길 바라겠다”고 인사했다.
박춘남 문화상은 남북정상회담 계획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중국 방문 등을 거론하며 “세계의 이목이 지금 평양으로 쏠리고 이런 때 또 한핏줄 한겨레인 도 선생 일행이 직접 예술단을 인솔하시고 평양에 왔으니까 정말 기회가 왔고 아주 도 선생은 행운이 깃든 분”이라며 “얼마나 좋냐”고 화답했다.
평양 공연단 일행은 려명거리와 김일성광장 등을 거쳐 숙소인 고려호텔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마친 뒤 예술단은 다음날 공연을 위해 동평양대극장에 리허설을 하러 갔다.
  
▲ 가수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해, 2005년 공연 당시 안내원을 다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16년만에 다시 평양을 찾은 가수 윤도현 씨는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2002년 MBC 평양 공연 이후 16년 만에 다시 평양을 찾은 가수 윤도현 씨는 “가슴이 벅차다”며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제일 크다. 16년 전과 지금 관객 반응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가장 궁금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2003년 처음으로 육로로 방북해 공연했던 가수 이선희 씨는 “다들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남측 공항에서 오히려 더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지금 긴장이 풀렸다”며 “잘하고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환대에 감사를 표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멤버들은 2005년 단독 공연 때 안내원을 다시 만나 반갑게 대화를 나눴고, 기타리스트 최희선 씨는 안내원에게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날 도착한 공연단 본진 120명을 포함해 방북단은 총 186명이고, 대표단 4명, 가수 11개 팀 총 25명, 태권도 시범단 22명, 정부지원단 17명, 기자단 10명 등으로 구성됐다.
  
▲ 고려호텔에서 내려다 본 평양 거리 풍경.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오랜 만에 남측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긴 평양 사람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오랜만에 남측 취재진이 확인한 평양거리는 차량이 많지 않았고, 일반 승용차보다 택시가 더 많았다. 또한 평양국제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계속혁신, 계속전진’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방중의 뜻을 이어받자는 내용의 선전문구들도 눈에 띄었다.
‘봄이 온다’를 주제로 진행되는 ‘남북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은 4월 1일 오후 5시(이하 평양시간) 동평양대극장에서 단독공연으로, 3일 오후 4시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남북 합동공연으로 펼쳐진다.
태권도 시범단은 4월 1일 평양 태권도전당에서 단독공연을, 2일 평양대극장에서 남북 합동공연을 갖는다.
 
  
▲ 걸그룸 레드벨벳이 고려호텔 직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숙소인 고려호텔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한 남측 공연단이 북측 언론의 요청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삼성미디어 제국 징검다리는 중앙일보

[삼성 연재기고 (12)] CJ그룹과 지분 공유 삼성 출신, 중앙일보 의사결정 과정 참여 외국자본과 적극 협조

김춘효 자유언론실천재단 기획편집위원 media@mediatoday.co.kr  2018년 04월 01일 일요일
한국 경제의 최대 권력이 삼성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한국 미디어의 최대 권력은 누구에게 있는가? 저자는 이건희로 대표되는 삼성 오너 일가라고 단언한다. 삼성은 한국 최대의 미디어 집단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은 광고, 협찬 등으로 한국 언론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의 미디어 통제력은 이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나온다. 삼성의 미디어 권력은 근본적으로 미디어를 둘러싼 제도 장악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삼성의 성장史,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 이병철의 제국 통치 방식, 삼성家와 한국 파워 엘리트, 이건희의 범 삼성家 확장, 삼성 미디어 제국,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한국 미디어 (신문, 유료방송, 광고, 영화) 시장 구조와 삼성의 미디어 검열 영향력 등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성 권력은 자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한국 미디어의 구조 장악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에 대한 삼성의 지배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성의 경제력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력의 뿌리가 되는 미디어 통제력을 정밀 분석할 때 비로소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이에 저자는 미디어오늘·자유언론실천재단과 함께 한국 미디어 통제 체제와 나아가 한국 사회 지배 체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삼성의 한국 미디어 통제에 대한 심층 연구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 편집자주 
목차는 다음과 같다. 
(01) 왜 삼성미디어 정치경제학인가 
(02) 삼성 제국과 내부 통제 라인 
(03) 이병철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한국 파워 엘리트 
(04) 한국 매스컴 속의 삼성 미디어史 
(05) 금융 자유화와 이건희의 범 삼성계 
(06) 누가 한국 신문 시장을 지배하는가 
(07) 누가 한국 광고 시장을 통제하는가 
(08) 누가 한국 영화 시장을 지배하는가 
(09) 누가 한국 유료 방송 시장을 통제하는가 
(10) 삼성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1) CJ 그룹의 미디어 소유 구조와 이사회 
(12)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 구조와 이사회 
(13)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과 2005년 X-파일 
(14) 범 삼성가의 미디어 검열 방식 
(15) 누가 미디어 자유화의 최대 수혜자인가 
(16) 삼성 없는 한국 미디어를 위하여 

[ 미디어오늘 Beta Sit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삼성과 대한민국 미디어 ]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8·15 해방직후 신문사를 경영 한 적이 있다. 당시 대구지역 사업가들의 친목단체 ‘을유회’ 소속이었던 이병철은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민보’를 인수했다 (삼성비서실, 1988년 215쪽). 하지만 그는 이 신문사를 오랫동안 경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업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이병철은 사업 본거지를 대구에서 서울로 옮겼다. 효성 창업자인 조홍제와 엘지 창업자인 구인회와 공동으로 ‘삼성물산’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들면서 언론사와의 인연은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1963년 이병철은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을 포함하는 언론사업 진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언론사업 청사진을 이승만 정권 때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와 함께 그렸다. 그 결과 1964년 5월 ‘라디오 서울’을 개국했고 같은 해 12월 동양방송국(TBC)을 개국했다. 삼성은 1년 뒤인 1965년에 중앙일보를 창간했다. 사실 이병철은 1961년 중앙일보 창간을 위해 삼성 비서실에 신문창간 기획안 마련을 지시했다. 그는 특히 중앙일보 창간에 앞서 일본 3대 신문사인 아사히·마이니치·요미우리 신문사를 직접 방문하고 경영과 편집시설 등 신문제작 전반을 시찰한 후 중앙일보를 창간했다(삼성비서실, 1988년 225~226쪽). 중앙일보 창간 당시 이병철은 대표이사직을 홍진기는 부사장직, 이병철의 둘째아들인 이창희는 이사직을 갖고 경영에 참여했다. 중앙일보는 이렇게 ‘이병철-홍진기’ 통제 아래 종합 일간지로서 성장해갔다.
▲ 1965년 9월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 1965년 9월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중앙일보는 사실 이병철 삼성 그룹의 중핵기업이다. 오너 일가가 직접 소유지분을 갖고 있고 경영에도 직접 참여한다. 이병철 셋째아들이자 홍진기 사위인 이건희는 1970년 초반부터 중앙일보 경영에도 참여했다. 이건희 부인인 홍라희는 1980년 초반까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에서 미술 등 문화관련 기사를 작성했다. 특히 홍라희 큰 동생인 홍석현이 1994년부터 중앙일보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홍석현이 명실공히 중앙일보 최대 실력자가 된 것은 그 후 5년이 지난 1999년, 삼성그룹에서 분리하면서 부터다. 삼성그룹을 이어받은 이건희가 그의 형제와 삼성 중핵기업들이 갖고 있는 중앙일보 지분을 홍석현 등 홍씨 일가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일보 통제라인이 ‘이병철-홍진기’에서 ‘이건희-홍석현’으로 전환됐다는 걸 의미한다. 즉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가문과 정치 엘리트인 홍진기 가문이 창간 단계에서부터 공동 기획·운영한 가족 미디어 기업이다. 그 전통은 2018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9년, 불안한 중앙일보 독립 
중앙일보는 1965년 창간 이후 2000년대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표1’에서 보듯 중앙일보가 관여하는 미디어 사업은 종합일간지 등을 포함하는 인쇄매체, 종합편성 케이블방송 등의 방송, 영화 투자와 제작 등의 영상 매체 그리고 광고 제작과 유통 등이다. 
▲ 표1) 중앙일보 연혁
▲ 표1) 중앙일보 연혁
중앙일보는 이병철과 홍진기의 통제 아래에 있던 1987년까지는 신문과 방송 사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신문과 방송 겸업을 금지하면서 방송 사업은 접어야했다. 그 뒤 이병철과 홍진기는 신문 등 인쇄사업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건희가 삼성그룹을 인수 한 다음 중앙일보는 1996년 일본 다국적 광고회사인 덴츠와 50:50 지분으로 종합 광고대행사인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해 한국 10대 광고대행사로 성장시켰다. 그 뒤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한 1999년 이후 중앙일보는 인쇄매체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 등 영상 제작과 유통 그리고 영화관 사업까지 확장했다. 2005년 중앙일보 계열사는 79개에 달했다. 그 뒤 중앙일보가 광고회사와 반도체 장치 그리고 리조트와 편의점 사업 등을 묶어 보광그룹으로 분할하면서 중앙일보 계열사 숫자는 40개 내외로 줄었다.
중앙일보는 1999년 4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몇개의 반도체와 LCD 제작 기업, 제2금융기업, 편의점, 레저 스포츠, 광고와 케이블 등 미디어 사업 등을 넘겨받았다. 사업을 넘겨받음과 동시에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표2’에서 보듯 홍석현은 1998년 중앙일보 최대주주였지만 중앙일보를 혼자서 경영할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지분을 제외할 경우 삼성 총수인 이건희와 그의 통제 아래에 있는 범 삼성가의 지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홍석현은 중앙일보를 CJ그룹 계열사와 2010년까지 공동 소유하고 있다. 유민재단은 그의 부친인 홍진기를 기념하는 재단이다. 특이하게도 2016년 지분에서 보듯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홍석현 지분보다 더 많다. 이 회사는 2011년 중앙일보 유상증자를 통해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한 중앙일보 미디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다.
▲ 표2) 중앙일보 대주주 변동
▲ 표2) 중앙일보 대주주 변동
하지만 1999년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가혹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탈세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중앙일보가 삼성에서 분리될 당시 증여세와 법인세 등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백병규, 1999년 77쪽). 세금 탈루 혐의에 연관 된 기업들은 지난 1983년 홍진기가 설립한 텔레비전브라운관 부품업체와 반도체 장비기업들, 종합 레저시설, 1990년 일본 세이유 그룹과 제휴해 설립한 ‘훼밀리 마트’ 등이었다. 최대주주의 구속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최대 위기였다. 오너가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재벌의 경영방식에 비춰보면 오너의 부재는 통제라인 부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뒤 중앙일보를 제외한 광고와 반도체 제조, 리조트, 편의점, 금융사업을 묶어 그의 형제들에게 사업을 분리해 줬다. 그 기업의 이름이 보광그룹이다. 중앙일보 그룹이 2005년을 두 개의 재벌기업으로 분할했다.
기업사냥, 중앙미디어 제국 발판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이후 중앙일보를 복합 미디어 제국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지분을 투자했다. ‘표3’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무료 신문사업, 방송 제작업, 영상 투자사업, 경제 신문, 연극과 뮤지컬 등 공연 투자사업, 종합편성채널 획득, 온라인 신문 등에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이들 투자기업들은 중앙일보가 영상 사업 분야로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한다. 
▲ 표3) 중앙일보 주요 타법인 출자 시기
▲ 표3) 중앙일보 주요 타법인 출자 시기
중앙일보도 CJ 그룹처럼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미디어 제국을 완성해 갔다. 이는 금융자유화 이후 재벌들이 미디어 사업 확장을 위해 사용한 ‘우회상장’ 기법과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우회상장이란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장된 중소기업을 인수한 다음 사업 내용에 미디어 사업을 추가하고 이름을 바꿔 재상장하는 수법을 말한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bond with warrant)는 새로운 주식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된 신 금융기법이다. 하지만 재벌 오너들이 세금을 적게 내고 그룹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등 그의 자녀들에게 그룹을 상속하기 위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 SDS 그리고 제일기획 등 중핵기업을 상속 통로로 활용했다.
중앙일보는 계열사인 제이콘텐트리에서 우회상장과 BW 기법을 활용했다. 사실 중앙일보가 이 기업을 인수할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이 신문은 사실 종합일간지 시장에서 중앙일보 경쟁사였던 한국일보가 소유한 스포츠와 연예소식을 주로 보도하는 대중지였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경영이 악화된 한국일보는 피혁제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상장사인 한길무역 지분을 획득한 다음 회사이름을 일간스포츠로 변경했다. 그뒤 사정은 ‘표4’에서 보듯, 이 회사 이름은 일간스포츠-아이에스플러스코프-제이콘텐트리로 개명했다.  
▲ 표4) 제이콘텐트리 연혁
▲ 표4) 제이콘텐트리 연혁
‘표5’에서 보듯, 이름이 변할 때마다 최대주주가 바뀌었다. 이 회사는 2001년에는 한국일보 소유였다. 2003년에는 한국일보사, 중앙일보사 그리고 매일경제신문가 공동소유했다. 그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중앙일보사는 2007년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1년 뒤인 2008년 회사이름이 아이에스플러스코프 개명했다. 그뒤 중앙일보가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로 지정하면서 다시 이름을 제이콘텐트리로 바꿨다.
▲ 표5) 제이콘텐트리 대주주 변동 현황
▲ 표5) 제이콘텐트리 대주주 변동 현황
‘표6’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최대주주로 확정된 2005년 이후 영상과 영화 그리고 공연관련 사업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대주주 변동이 있었던 2000년 초반 이 기업은 미디어 기업을 확대하지 않았다. 피혁회사가 소유할 당시에는 미디어 투자 기업이 아예 없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매일경제신문이 공동으로 이 기업을 소유할 당시에는 아예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상장된 중소기업이 미디어 투기 자본의 돈놀이터임을 암시한다.  
▲ 표6) 제이콘텐트리 타 미디어법인 출자
▲ 표6) 제이콘텐트리 타 미디어법인 출자
중앙일보는 제이콘텐트리를 영화 상영관 사업 확장 통로로 활용했다. 이 회사는 2007년 중소형 독립 영화 상영관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씨너스를 인수한 다음 영화 상영관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2010년 씨너스는 한국 3대 영화 상영관인 매가박스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해 2012년 완결했다.
▲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중앙일보 제공
▲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중앙일보 제공
또한 홍석현의 중앙일보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과 협력해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휘닉스커뮤니케이션과 터너브로드캐스팅 그리고 팍스스포츠 채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외국 기업들과 지분을 공동투자하고 이사회 의사를 공유하지만 후자는 느슨한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중앙일보의 선택적 사항이기 보단 외국 자본의 속성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미디어 시장에 진출해 있는 외국인들은 광고시장을 제외하곤 한국 시장에 자본을 투자하기보다 국내 파트너와 사업적 협력만을 유지하고 있다.
‘표7’에서 보듯,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한국 광고시장이 완전 개방된 1996년 설립된 이후 2003년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그 뒤 지속적으로 다국적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휘닉스가 협력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은 광고를 대행보단 광고 제작에 더 치중해 있다. 오프라인 매체보다는 온라인과 모바일 광고에 집중하고 있다.
▲ 표7)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연혁
▲ 표7)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연혁
‘표8’에서 보듯, 다국적 기업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2014년 소유지분을 다른 기업에게 매각했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부터 유지하고 있던 동일 지분 비율이 201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홍석규가 2014년까지 지분을 보유했다. 그 이후 그의 지분은 보이지 않는다.  
▲ 표8) 대주주 변동 현황
▲ 표8) 대주주 변동 현황
중앙일보는 삼성과 무관한가?
지금까지 중앙일보의 미디어 사업 확장 현황과 주요기업의 소유구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중앙일보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홍석현이 소유지분과 경영권한 행사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2012년 이후 중앙일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등장하면서 홍의 권한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 지주회사에 대한 정보가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2016년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권을 분석해 보면 신문과 잡지 등 인쇄 매체를 총괄하는 중앙일보(32.86%), 영화 제작과 영화관사업을 통제하는 제이콘텐트리(21.39%), 방송사업을 총괄하는 JTBC(21.39%), 온라인 미디어 선두기업인 조인스(100.0%), 미디어 서비스를 책임지는 중앙판교개발(72.82%)가 최대주주이다. 즉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대한 지분 정보는 공개돼 있지 않다. 
▲ 2016년 중앙일보 통제 라인. 그래픽=안혜나 기자
▲ 2016년 중앙일보 통제 라인. 그래픽=안혜나 기자
사실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는 2008년 중앙일보가 영어신문과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기 위해 중앙일보가 설립한 자회사다. 그런데 2010년 중앙일보사가 자산 약 6547억 원과 부채 5583억 원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넘긴다. 그리고 2011년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이때 중앙일보와 CJ의 지분이 일부 줄어들었는데 그 뒤 2012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가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1995년 삼성에버랜드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2011년 중앙일보에서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중앙일보는 홍씨 가문의 것인가라는 점이다. 서류상으로는 홍석현과 CJ그룹이 공동소유하고 있다. CJ그룹은 이재현이 통제한다. 그러므로 중앙일보는 홍석현과 이재현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최대주주는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다. 홍석현과 이재현의 공조관계는 케이블 방송 회사인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와 ‘에이스토리’에서도 발견된다. 홍석현은 오리온시네마네크워크 지분을 2012년 매각했다. 이로인해 CJ와 사업적 협력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3년 에이스토리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양쪽 집안의 협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2013년 지분 비율을 보면 중앙일보(8.32%)와 제이콘텐트리(8.32%) 그리고 CJ E&M(16.64%)이다. 2015년에는 2013년 지분에 보광 18호 콘텐츠조합(3.4%)과 보광 20호 청년창업투자조합(3.4%) 등이 더해진다. 즉 중앙일보와 CJ는 여전히 미디어 사업 협력자이다. 
▲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시찰하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사진 오른쪽),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사진 왼쪽), 이건희 회장(이병철 회장 뒤), 이재용 사장(사진 가운데). 사진=삼성그룹
▲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시찰하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사진 오른쪽),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사진 왼쪽), 이건희 회장(이병철 회장 뒤), 이재용 사장(사진 가운데). 사진=삼성그룹
마지막으로 중앙일보가 삼성그룹과 무관하다고 확언하기 어려운 점이 중앙일보 중핵기업 이사진 명단에서 발견된다. CJ도 2000년대 삼성 비서실이나 구조본부 출신들이 CJ 미디어 계열사 경영 총괄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중은 2010년이 넘어가면서 줄어들었다. 이와 달리 중앙일보는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건희 삼성 회장의 고등학교 동창생이자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이 홍석현 회장 측근에 배치돼 있다. 또한 재정을 감사하는 이사도 중앙일보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에서 분리할 당시 중앙일보에 배속됐다가 보광그룹으로 분할해 나간 휘닉스커뮤니케이션 등기 이사들이 삼성의 중핵기업 이사들이다. 이처럼 삼성맨들이 2010년 이후까지 중앙일보 주요기업 이사로 등재돼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중앙일보는 온전히 홍씨 가문의 것으로 확인할 수 없다.
즉 중앙일보는 1965년 이병철-홍진기가 협력해서 창간하고 기반을 구축했다면 2018년 이 회사는 이건희-홍석현이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공동 소유 운영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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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철수, 지금 최적기다!

주한미군 철수, 지금 최적기다!
김영란 기자 
기사입력: 2018/04/01 [11:1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 3월 31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한미군사훈련 중단, 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는 집회를 열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국민주권연대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 3월 31일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미군영구주둔 반대의 내용으로 집회를 열었다.

4월 1일은 평창올림픽으로 연기되었던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시작된다집회 참가자들은 평화와 통일의 바람이 불러오는 한반도에 한미합동군사훈련 완전 중단하라.’, ‘이 땅을 강점하고 있는 주한미군을 반대한다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의 내용으로 연설과 다양한 문화행사로 미 대사관 앞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먼저 집회는 5명이 연설자가 나와 한미합동군사훈련 반대미군은 이 땅을 떠나라 등의 내용으로 연설을 했다.
  
▲ 31일 집회에서 연설을 하는 현유진 대학생당 대학생문제해결팀장, 양희원 강원대학생, 박민아 동덕여대학생, 윤태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교육국장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현유진 대학생당의 대학생문제해결팀장 연설에서 평창올림픽으로 연기되었던 한미연합군사훈련이 4월 1일부터 시작된다비록 규모와 일정은 축소되고 일부 전략무기들이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미연합훈련을 해도 되는가아무리 축소해도 북을 적으로 하는 군사훈련이며선제폭격의 성격을 띠고 있어 위험하다이것은 언제든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봄과 함께 평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한미연합훈련은 흐름을 역행하고 있다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남북북미정상회담 개최는 어느 때보다 대화를 통한 화해의 가능성이 높아진 지금한미연합훈련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평화협정 체결과 관련해서 강원대 양희원 학생이 연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65년간 바뀌지 않는 정전협정이 있다수구보수 세력은 정전협정을 방패삼아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들에게 많은 피를 강요해왔다빨갱이종북과 같은 말로 국민들을 탄압했다정전협정은 도구 삼아서 그들의 집권을 유지해온 수구적폐 세력에게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 국민들의 새로운 뜻을 4~5월 보여줘야 한다그리고 북미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집회 참가자들이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하라','미군의 영구주둔 반대한다'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세 번째 연설자로는 동덕여대 노래패 놀해랑의 박민아 학생은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기간 싸늘했던 남북관계가 따끈따끈하게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오고 있는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는 것이 있다바로 대북제재이다북은 양보해서 비핵화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는데트럼프는 북에게 여전히 최대의 압박과 제재로 유지겠다며 대북제재를 고집하고 있다미국의 행위는 옳지 않다남북북미 교류사업 활성화를 해야 할 것이며미국은 당장 대북제재를 해제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연설했다.

이어 윤태은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교육국장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미국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자로 내용으로 연설했다.
분단 78년이다우리 민족끼리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것은 미국이며, 78년 간 온갖 해를 끼쳐왔다그러나 이제 분단의 끝이 보인다민족이 만나고얼굴을 맞대니 그 어떤 외세도 두렵지 않다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에 우리 민족끼리 철석같이 손을 잡고 누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보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민족단결을 강조했다.

▲ 가극단 미래가 '주한미군 철수, 지금이 최적기다'라는 격문을 낭독하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마지막 연설은 가극단 미래가 주한미군 철수지금이 최적기다라는 격문을 낭독했다.
  
▲ 청춘의지성 소속 시사콩트 동아리 '퀵'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주제로 시사콩트를 선보였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문예공연을 보면서 함께 즐기는 집회 참가자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집회 2부는 미군철수, 제주4.3, 한반도의 평화통일 등을 주제로 대학생들의 시사콩트 노래패 악단 씽, 동덕여대 노래패 '놀해랑', 대학생노래패연합, 한국대학생노래패연합 '내일'이 노래공연을 선보였고, 청춘의 지성 율동패 '흥'의 율동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로 채워졌다. 

문화공연을 보는 집회참가자들은 흥겹게 박수도 치고노래도 부르며 함께 군사훈련 중단, 미군철수의 의지를 다졌다.
  
▲ 청춘의 지성 율동패의 공연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집회참가자들이 문예공연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이날 투쟁에는 노세대부터 젊은세대,아이들까지 함께 참여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노래악단 '씽'이 제주 4.3을 주제로 한 노래, '누가'를 부르고 있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들어라 양키야'이 노래와 율동공연. 미국은 한미연합군사훈련 완전 중단하고, 이 땅을 떠나야 한다.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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