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5일 화요일

[기고] 소녀상이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

박근혜 정부도 소녀상 이전을 바라나?
[기고] 소녀상이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

어처구니없는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친일반민족'이라는 상투적 비판을 스스로 입증해가는 참으로 일관된 정부다. 건국절 주장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호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50년 전 한일협정문에 금빛 테두리를 달아주는 이번 위안부 합의까지 성사시켰다. 역사적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이 값싼 동정에 기초한 보상이 아니라 가해자가 응당 죄의 대가를 치루는 배상이라는 기본원칙은 이제는 더 이상의 거론조차 진부하다. 그것은 1990년대 이래 우리사회의 지난한 '과거사 청산' 노력을 통해 도출된 사회적 합의요 상식이다.  

이번 '외교 참사'를 평가함에 있어 법적 배상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소녀상 철거 문제다. 100억 원도 채 못 되는 돈에 민족적 자존심을 팔아넘길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대사관 주위에 자리잡은 소녀상은 그곳에 일상적으로 출입하는 일본인 대사관 직원과 외교관들에게는 분명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것이다. 충격과 부끄러움, 절망과 원한이 지극히 명징한 모습을 띤 채 마주보고 있으니 말이다. 말없이 버티고 앉아있는 소녀상을 어떻게 대면할지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향후 관계를 가름하는 시금석이다.

양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과거의 악연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을 치워버리자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소녀상 앞에서 바로 그 은발의 소녀들이 20년 넘게 "수요집회"를 이어왔다. 서울 종로구 소재 일본대사관 건너편의 소녀상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 사라진 문화재도 재건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렇지만 나는 광화문 앞을 위시하여 도처에 유사한 동상을 세우자는 세간의 주장 또한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단지 현장성이 중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녀상의 철거와 확대는 상반된 의견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과거를 독점하려는 욕망이다. 한쪽은 불편한 과거를 지워버리려는 반면, 다른 한쪽은 과거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려한다. 그 어느 쪽도 타인의 아픔을 자신들이 원하는 논리 안으로 편입시키려든다. 

소녀상이 대변하고 있는 것은 실존인물로서의 소녀가 아니라 역사적이면서도 현존하는 고통 그 자체이다. 그것은 피해자 개인의 체험을 넘어 집단적 경험의 응축물이다. 따라서 그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다. 실제의 피해자 할머니들과는 마음껏 공감할 수 있더라도 소녀상만큼은 낯선 타자로 우리를 응시한다. 여럿이 시위할 때라면 몰라도 나 홀로 대면하기에는 실로 부담스럽다.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누구도 소녀의 모습으로 육화된 고통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역사의 무게 앞에서 지금 내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바로 이러한 불편한 감정이야말로 사실은 소중한 것이다. 어두운 과거를 임의적으로 처분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이다. 상생을 위한 화해라는 명분으로 과거사를 서둘러 수습하려드는 행태를 가리켜 재일 조선인 작가 서경식은 "균질적이고 획일적인 시간에 자기를 맡기려는, 시간축의 전제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다. 

사과한다는 것은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약속이다. 이번 "합의"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선언은 참으로 기막히지 않은가. 세상에 불가역성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사과도 있는가? 법적인 효력 여부를 떠나 타인이 겪은 고통을 제3자가 대신 용서해준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설령 외교적 합의가 둘도 없는 호조건으로 성사되어 법적인 배상뿐만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기로 했다손 쳐도 이미 입은 피해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실로 '불가역적'인 것은 외교적 합의가 아니라 고통의 경험이다. 

▲ '불가역적'인 것은 고통의 경험이다. ⓒ프레시안 최형락

기념비의 상징성에 맞서 

소녀상은 매우 독특한 기념비다. 기념비란 본래 정치적 선전도구의 성격을 지닌다. 우리 주변에 흔한 전쟁기념비들이 여실히 보여주듯이, 한 사회나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나 집단 또는 역사적 사건을 지속적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전사의 검이나 승자의 월계수, 혹은 무명용사의 탑이나 유서깊은 오벨리스크가 하늘높이 치켜세워진다. 19세기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역사적 사고방식의 한 유형으로 "기념비적 역사"를 거론하면서 이를 비속한 사건들은 망각하고 "위대한 것이 하나의 연쇄를 형성"하는 역사라고 설명했던 것은 참으로 시사적이다. 그렇지만 소녀상은 이와 같은 기념비의 전형과는 판연히 다르다. 소녀의 자태는 우리를 불멸의 위대한 세계로 고양시키기는커녕 어두침침한 고통의 심연으로 끌어내린다. 

영광이 아닌 고통을 환기시키는 기념비에 있어서 독일에 산재하는 홀로코스트 관련 기념비들은 최상의 모델을 제공한다. 그다지 영광스럽지 못했던 20세기의 민족적 경험이 기념비 문화의 융성을 낳았다. 그렇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어떠한 기념비를 만들 것인지는 끊임없는 논란거리다. 따라서 우리가 참조할 것은 기발한 착상이나 조형언어가 아니라 오랜 논란의 과정 중에 표출되었던 심도 깊은 고뇌와 문제의식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기념비 문화의 특징은 자기민족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타민족의 고통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른바 "경고비(Mahnmal)"라 불려온 서독의 홀로코스트 기념비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추념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으로 통합시켜내고자 고뇌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들 기념비는 어느덧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씻을 수 없는 죄업이 추상화되고 예술적으로 상징화되어 더 이상 불편한 느낌을 주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승리의 영광을 자축하는 관례적인 기념비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더 이상 보행객을 성가시게 만들지 못한다.  

베를린의 최고 중심부에 1만9000평방미터의 드넓은 부지를 떡하니 차지한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는 독일 기념비 문화의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예술적 상징화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색다른 면모도 보여준다. 2002년 공사에 착수해서 2005년 완공된 이 초유의 추모시설은 독일 국내 모든 홀로코스트 추모시설의 사령탑에 해당하며 독일이 통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과거를 반성하겠다는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구축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로 연방의회가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대해 의결하는 진기록도 남겼다. 이처럼 철저히 관주도의 기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념비 군상의 형태는 참으로 이색적이다. '해체주의 건축'의 선구자인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n)이 설계를 맡았는데, 격자형 부지에 총 2711개의, 서로 다른 높이를 지니고 아무런 표식이 없는 콘크리트 기둥들이 마치 물결치듯 늘어서 있는 이곳에서 보행자는 자신의 신체와 기둥의 변화하는 관계를 통해 리듬감을 느끼며 마치 홀로 묘지 속으로 빠져든 듯 편치 않은 기분 속에서 나름의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부지의 남동쪽 지하에는 800평방미터에 달하는 정보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에는 독일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이른바 '반()-기념비(countermonument)'의 정신이 스며들어있다. 기념비 특유의 체제순응적 성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과정에서 등장한 이 기념비 아닌 기념비는 예술적 상징화를 거부하고 어떠한 정연한 논리와 의미망 안으로도 편입되지 않으려한다. 그것은 고정되어있기보다는 일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아이젠만의 이른바 '해체주의 건축'은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기념시설을 거부하고 거대한 규모와 공공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가능성으로 열린 새로운 장소를 탄생시켰다. 물론 이와 같은 거대시설이 과연 국가가 마련한 의미망에 포섭되지 않고 그것을 진정으로 '해체'할 수 있을지는 가히 의문이다. 비판자들은 이런 종류의 시설이야말로 기억을 실제적인 장소에서 유리시킴으로써 독일인들로 하여금 쉽사리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민족의 죄과에 대한 고백이 새로운 자긍심으로 전화되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의 사례는 기념비의 가치와 한계에 대해 반추해보도록 만든다. 멋진 기념비와 추모시설을 완공시킴과 더불어 우리는 그만 기억의 짐도 벗어던지려하지는 않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기념비의 참된 가치는 과거를 환기시키는데 있다. '반기념비'는 기념비가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는 '매체'임을 입증하고자 스스로를 기꺼이 소멸시킨다. 기념비는 우리를 자극하고 일깨울 때만이 가치가 있으며, 한낱 상징물로 전락하여 우리를 타성에 젖게 만들 때 본연의 가치를 잃는다. 

세월호 침몰로 학생을 잃은 단원고 교실을 떠올려보자. 이 교실의 존치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당국의 입장에서는 이미 타협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학교 입장에서도 학교 안에 위령시설을 두는 것이 여러모로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인 해결방안을 강구할 사안이 아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 번듯한 시설을 만들어 한데 몰아 추모하자는 것은 이제는 그만 잊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 소중한 생명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어찌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계속 분노해야한다. 계속 미안해야한다. 끊임없이 불편해야한다.

예술이 나서야할 자리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은 확실히 독특한 면모를 지닌다. 옛 소녀들을 대변하는 듯 하지만 구체적인 그 누구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저 고통을 환기시킬 뿐이다. 걸상에 손을 꼭 쥐고 앉아 있는 맨발의 소녀는 확실히 민족적 수난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통상적인 기념비처럼 예술적 풍모를 띠지 않는다. 단발머리에 순진무구하고 앳된 얼굴이지만 무표정하기 이를 데 없으며, 조각처럼 아름답다는 상투적 표현에 맞지 않는 평범한 서민층의 용모이다. 절제되다 못해 급작스럽게 돌로 굳어버린 듯한 형상은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자신을 호락호락 열지 않는다. 이 무뚝뚝한 소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증언하면서도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 대신 옆에 의자를 비워두어 우리를 낯선 과거로 초대한다. 부산외대 인도학부 이광수 교수가 페이스북을 통해 주장한바 있듯이, 소녀상의 미학은 "여백의 미"이다. "예술의 힘은 독자(관람자)가 머무를 수 있는 여백에 있다." 

이 만만치 않은 소녀와의 대면은 우리로 하여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효과적인 처방을 얻기 위해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 서적을 뒤적여본다. 이미 학계에서 다각도로 논의된 바 있는 '애도와 멜랑콜리'의 이론은 우리가 과거의 고통과 대면하는 두 가지 방식을 거론한다. 양자는 상관적이면서도 상이하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우리는 충격에 빠진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인정하기보다 부재하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다른 대상으로 관심을 옮겨가야함에도 강박적 집착이 반복될 때 우리는 흔히 '우울'로 번역되는 멜랑콜리의 상태에 빠져든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라진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다시금 "자유롭고 장애없이" 살 수 있다. 이른바 애도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상실된 대상을 집착의 대상이 아닌 온전한 기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예컨대 학문적 설명이나 예술적 상징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아픔을 "승화"시킨다. 

멜랑콜리란 확실히 병적인 상태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태도이다. 내가 그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어찌 쉽게 정리하고 잊을 수 있으랴. 상생을 운운하는 손쉬운 화해의 제스처야말로 내 아픔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닌가. 사과를 했으니 이제는 용서하라고? 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하라는 말인가? 더구나 용서받으려면 사과하는 측이 불가역적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상실을 받아들이는 용서야말로 시간의 '불가역성'을 넘어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은 우리를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아니 그래야한다. 소녀상은 반드시 일본 대사관 건너편에 그대로 놓여 있어야한다. 그래야 제대로 불편하기 때문이다. 만약 유사한 동상을 도처에 세운다면 마치 교회의 십자가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어 우리를 타성에 젖게 만들 것이다. 소녀상은 그 자체로 진실을 대변한다기보다는 진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애타는 마음들이 만나는 장소이다. 외교적, 이데올로기적, (통상의)예술적 접근을 거부하는 예술의 참된 저력이 효력을 발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끝날 줄 모르는 집착이 현명하지 않다면, 그냥 현명하지 말도록 하자. 우리가 과거로부터 울려나오는 절규에 귀를 막고 거짓 화해로 손을 내미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가해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득세하게 될 것이다. 이미 한 세기 전에 독일 사상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성찰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고인이라도 승리한 적으로부터 안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적은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독자가 프레시안을 지키는 힘입니다

[추모]독고탁의 아버지 이상무

[추모]독고탁의 아버지 이상무

2016.01.0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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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개의 빨간 모자>라는 만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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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형제원’이라는 시설에 있는 야구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형제원이 고아원인지 소년원인지 분명하지 않다. 주인공 독고탁이 “쓰레기들이 모인 곳”이라고 일갈했던 걸 보면 비행 청소년 수용소 같은데, 독고탁을 제외하면 큰 사고뭉치가 없었으니 그저 당시에 흔했던 고아원 같기도 하다. 

형제원의 교사는 패배의식과 자기비하에 빠져 살던 독고탁과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야구에 몰입한다. 여기에 으레 독고탁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고아원장 아들 준과 그 여동생 숙, 그리고 또 하나의 캐릭터인 봉구가 있다.

준은 고교 야구 최고의 강타자이며 부잣집 도련님이다. 그는 ‘쓰레기’들이 야구를 한다는 것에 한껏 경멸을 드러내며 아이들의 자존심을 짓밟는다. 물론 준이 가장 적개심을 보이는 건 역시 사고뭉치 독고탁. 독고탁은 숙이를 좋아한다. 야구로 성공하여 숙이와 결혼하는 게 꿈이고, 숙이만 떠올리면 그늘진 얼굴의 사고뭉치에서 해사한 웃음의 순진한 소년으로 바뀐다. 그는 이 사실을 뒤늦게 시설에 들어온, 정체가 애매한 소년 봉구에게 털어놓는다. 자신의 비밀까지 터놓을 수 있는 친구라고 믿은 거다.

사실 봉구는 원래 재벌가의 자제로, 인생 수업을 하러 시설에 들어온 거였다(이 부분 기억이 희미하다. 알려 주시길). 또 숙이는 탁이 아닌 봉구에게 호감을 느낀다. 자기 세계로 돌아간 봉구는 숙이와 사귀는데, 독고탁은 여기서 망가진다. 속았다는 분노, 놀림감이 된 것 같은 절망감, 사랑을 빼앗은 철벽의 암담함, 그 모든 감정 속에서 독고탁은 오로지 봉구에게만 불같은 강속구를 퍼부어 무안타로 돌려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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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야구공으로 숙이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난 뒤 뇌까린다. 

“그 녀석을 잡은 공이야.” 

이 말을 하던 독고탁의 표정과 피가 뚝뚝 떨어지던 손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다지 정교하지 않은 선 몇 개로 그려진 만화였으되 어린 마음에도 ‘광기’가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깨우쳐 준 컷이었다. 독고탁은 다시 시설을 탈출했고, 경기 도중 야구공에 맞아 정신이 나가버린 시설 아이 한 명은 계속 야구를 하며 놀고, 나머지 아이들은 과거로 돌아간다.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주인을 잃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이상무 선생의 최고작이라고 본다. 일본인 장군의 아들이 말에서 떨어져 기억 상실에 걸린 후 갑자기 독립군으로 변신(아니 조선말을 언제 배웠지?)하는 <흙바람>이나, 말도 안 되는 드라이브볼을 던지는 <달려라 꼴찌>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그리고 약간은 억지스런 해피엔딩이었던 <비둘기 합창>과는 다른 레벨의 작품이었다는 뜻이다.

<응답하라 1988> 이전의 시대에는 한 동네에 으리으리한 정원과 풀장까지 있는(정규 풀장은 아니고 시멘트로 막아 만든) 집과 판잣집이 공생하며 그 아이들이 함께 다방구 하고 놀았지만, 실지로 여름에 풀장에서 놀았던 아이들과 동화되지도 못했고 생활고 끝에 빚에 쪼들린 나머지 연탄을 피워 놓고 집단자살을 기도한 아버지 때문에 죽다 살아난 친구와 정서를 공유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그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불행과 가난의 위력, 빈부와 신분의 경계, 사람이 사람에게 가할 수 있는 모멸과 차별 그리고 배신과 동정을 느끼게 해 준 것이 <아홉개의 빨간 모자>였다. 국정 사회 교과서, 장밋빛 미래와 모범적인 사람들로 그득했던 국민학교 교과서 나부랭이보다는 백 배 더 영양가 있었던 만화였다.

2016년 1월 3일, 나에게 <아홉 개의 빨간 모자의 사연>을 안겨 주었던 이상무 선생이 돌아갔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도 돌아간다. 채 위에 물을 부으면 당연히 아래로 쏟아지듯이. 하지만 무엇인가는 채에 걸리고 남을 것은 남는다. 그 물방울과 티끌들이 모이면 역사가 되는 거겠지. 이상무 선생은 가셨지만 독고탁은 남는다. 그 까까머리 또는 까치 머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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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빈다.


P.S: 내용에 오류가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란다. 점점 기억이 엷어지는 게 슬프다.


산하
트위터: @sanha88

"박근혜, 영구집권 프로젝트 진행 중이다"


16.01.05 21:34l최종 업데이트 16.01.05 21:34l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여년. 우리 현대사는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와 '반(反)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는 뒤틀린 우리 역사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촉구하는 기획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 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 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 1987.01.17, 김중배 칼럼.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의 고문사에 "저 죽음을 응시하라"고 외쳤던 대기자(大記者) 김중배. 언론인들의 영원한 선배이자 우리 사회의 '어른'이다. 1983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그게 이렇지요-김중배 세평'(1985년 이후에는 '김중배 칼럼')은 독재의 서슬이 퍼런 시절, 그나마 숨통을 틔워준 명칼럼으로 회자됐다. 

1990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지만, 한 해 뒤 이제 언론이 독재의 총칼을 걱정해야할 때가 아니라 자본의 힘을 우려해야 할 시대가 왔다며 사표를 던졌다. 그 뒤로 <한겨레> 사장, 문화방송 사장을 지냈고, 참여연대와 언론개혁시민연대, 언론광장 대표를 맡으며 언론개혁에 힘썼다. 올해 83세가 되는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이 정력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김중배 선생은 2015년 출범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공동대표 7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시대를 관통한 촌철살인을 쏟아내던 그는 오늘의 시대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굴욕적인 한일협상이 시대를 넘어 반복된 지난 2015년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종각역 인근에 위치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박정희는 급성 쿠데타, 박근혜는 만성 쿠데타"
기사 관련 사진
▲ '대기자' 김중배 1980년대 '김중배 칼럼'으로 억눌린 시대에 대한 촌철살인을 쏟아내던 김중배는 언론계의 어른으로 꼽힌다. 고령의 나이에도 민주주의와 언론개혁을 위해 활발할 활동을 펼치고 있다.
ⓒ 김소망

- 요즘도 바쁘게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2015년 한해를 정리한 감회가 어떠십니까?
"2015년 연말에 언론계 후배들과 송년회를 했어요. 여러 단체가 모였는데 격려의 말을 해달라고 하니까 문득 '패션(Passion)'이라는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이게 흔히 '열정'으로 번역하는데, 사실 예수가 고난을 겪으며 십자가까지 가는 길을 패션이라고 불렀어요. 

나는 크리스찬은 아니지만 속된 사람으로서 번역을 해보면, 고난과 고통 속에서 열정이 피어나고 거기서 출구를 찾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올해) 고난과 고통을 겪었으니 당연히 새해에는 패션의 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말을 했어요."  

- 고난과 역경이 넘쳤던 2015년이라지만, 선생님께는 좋은 일도 있었습니다. 11월에 심산상을 수상하셨는데 2006년 리영희 선생님 이후 8년 만입니다(2007년부터 2014년까지는 수상자가 없었다). 
"그것 참, 이게 무슨 노벨상도 아니라서 거부할 수도 없는 건데... 상을 받자니 내가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일 심산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앉은뱅이가 되면서, 그렇게 고통 받으면서, 가꾸고자 했던 나라가 과연 이런 나라였습니까?'하고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막상 심산 선생님은 '야 이놈아, 너도 이런 세상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냐?'라고 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도 상을 받았으니 참 뻔뻔하지요(웃음)." 

김중배 선생은 지난해 11월 13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1879.07.10.~1962.05.10.) 선생의 뜻을 기리는 '심산상'을 수상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시절, 유학자였던 심산 김창숙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33인 중 유학자가 한 명도 없음을 통탄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망명길에 올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나석주 열사의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폭탄 투척 사건의 배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성균관대학교 설립을 주도했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거해 세 번이나 하야 권고문을 발표했던 지사(志士)형 선비였다. 결국 자신이 세운 성균관대학교에서마저 쫓겨난 심산은 영업용 택시 기사로 일하던 아들이 주는 돈으로 궁핍하게 살다 1962년 사망했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86년 제정된 심산상은 송건호 <한겨레>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고 김수환 추기경과 백낙청, 강만길 교수 등 독재시절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인사들에게 상을 수여했으며, 김중배의 수상은 2006년 리영희 선생 이후 8년만이다. 심산 김창숙연구회는 김중배가 80년 초·중반 '김중배 칼럼'을 통해 독재정권에 펜으로 맞서면서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일깨운 것을 선정사유로 제시했다. 

- 뻔뻔하다는 말씀은 지나친 겸손 아닌가요? 
"내가 그래도 평생 글을 써온 사람인데, 모국어가 이렇게 훼손되고 왜곡되고, 심지어 전복되고 있는 이 시점에 이런 상을 받아도 되나 싶어요. '비정상의 정상화'에서부터 시작해서 '혼이 비정상'이라는 말도 나오잖아요? '어떤 사람'은 '언어 해석기'까지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참담합니다. 정치와 민주주의가 말로 소통하는 것인데 단어의 뜻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이 되겠습니까? 모국어가 이 지경이 된 상황에서 평생 글을 써온 사람이 이런 상을 받으니 뻔뻔한 거지요."

-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자가 소통능력이 없다는 건 상당히 치명적인 문제네요.  
"정치권력만 그런 건 아니에요. 언론으로 한정해서 보면 종편하고 조·중·동, 그리고 <한겨레>와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이 쓰는 언어는 서로 의미가 달라요. 이런 게 만성화되어 있어요. 일각에서는 진영 대결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예전에는 입장이 달라도 최소공약수적인 개념과 지적인 권위가 있었어요. 규범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가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나 준거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무너진 느낌이에요."

- 개념이나 준거를 잡아주는 것은 학계의 역할일 텐데, 학계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처럼 대학교수를 명예롭게 생각하는 나라가 드물어요. 심지어 의학박사들이 종편이 나와서 의사가 아니라 교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종편에 나오는 교수라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 작태를 날마다 보고 있어요. 입장이 달라도 최소한 공유할 수 있는 근거는 있어야 하잖아요? 

예전에는 서로가 공유하는 기본적인 근거가 있어서 이걸 토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지금은 (이게 없으니까) 서로 말도 안 통하는 상황까지 왔어요. 저널리즘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학계에서 지적인 분들이 뭔가 좀 체계를 잡아줘야 하지 않겠나 싶어요."  

- 어쩌면 지금은 소통만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조건마저 사라진 시대 같습니다. 정말 심산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통탄하실 것 같습니다. 
"심산은 독립운동하면서 앉은뱅이가 되었고, 이승만이 선거부정으로 영구집권을 하려고 하니까 세 차례에 걸쳐 하야 권고문을 발표했어요. 심산상 수상 강연에서 '만일 심산이 오늘날 그랬다면 종북좌빨로 몰렸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역사의 진전이 이렇게 없는가, 역사의 지체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민주주의 퇴행 아니다, 완전한 '반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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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월 1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 말씀하신 것처럼 최근 세상이 급변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민주화 이전으로 되돌아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요즘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유신으로의 회귀다' 같은 표현들이 회자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에는 좀 정밀하지 못한 것 같아요.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이 좀 더 정확한 것 아닌가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전교조 법외 노조화, 통합진보당 해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법 개악, 민주노총 무력화, 국회 무시 등등... 이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어요.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굳이 표현 하자면 급성(急性) 쿠데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만성(慢性) 쿠데타가 진행 중인 것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교수는 소프트 쿠데타가 진행 중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게 꼭 소프트웨어적인 것만도 아니에요. 민중총궐기 때 백남기 선생이 저렇게 쓰러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참가자들도 폭도로 몰고, 소요죄를 들고 나오고... 이건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완전히 반동적인 행위예요. 헌법은 말할 것도 없고, 하위법인 형법을 의도적으로 오남용하고 있어요." 

- 박근혜 정부의 성격이 '반동'이라면, 2015년에는 역사 문제에서 특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과서 국정화도 그렇고 최근의 한일 위안부 협상 문제도 그렇습니다. 
"박근혜 정권은 접근법 자체가 샤머니즘(어떤 현상이 신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면서 무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신앙 - 기자 말)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면서 '어떤 대목이 문제냐'고 질문하면 '그런 기운이 돈다', '혼이 비정상이다' 이렇게 대답해요. 진짜 샤머니즘을 하시는 분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데, 굳이 말하자면 '선무당'쯤 될까? 샤머니즘 역시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이 정권에서도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프로그램이 착착 진행 중이라는 심증이 있어요." 

- 일각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장기집권 프로젝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치권력의 장기집권을 넘어서 영구집권을 의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요. 이를테면 사이비 애국주의에서 시작해서 세월호 참사에서도 보듯이 허울뿐인 국가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이라고 할까? 효율성이라는 우상을 떠받들고 있어요. 민주적이고 절차적인 정당성은 나중 문제로 치부하고 효율성만 중시하는 인간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거예요. 세월호도 경기가 나쁘니까 빨리 정리하자고 하고, 노동법도 통과 안 되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거라고 하고, 낙오자가 발생해도 개의치 않아요. 저는 이게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아니라 '인간 대 반(反)인간'의 대립구도라고 봐요. 

- 이런 결과가 벌어지고 있는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큰 것 같습니다.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오셨는데, 오늘날 언론의 모습은 어떻게 보십니까? 
"난 자유언론이라는 말보다 '민주언론'이라는 말을 써요. 현재 언론 자유를 가장 많이 만끽하고 있는 것이 누굽니까? 종편이에요.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란 것은 한 우리에 늑대와 병아리를 넣어 두고 서로 경쟁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그게 자유언론의 실체예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저널리즘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습니까? 이런 노력조차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건 대단히 비과학적인 겁니다."

- 선생님도 서슬 퍼런 독재시절에 그런 노력을 기울이신 대표적인 언론인이셨습니다. 날카로운 칼럼으로 많은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셨지만, 고초도 많이 겪으셨습니다.  
"나야 뭐... 그때는 죽은 사람도 많았고, 나보다 더 혹독하게 당한 사람도 있는데요, 뭘. (김)근태도 그때 너무 혹독하고 잔인하게 당해서 나보다 훨씬 젊은데도 벌써 죽었잖아요."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배후조종 혐의로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잔인하게 고문당했다. 1995년 정계에 입문해 활발할 활동을 펼쳐왔으나 2011년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뇌정맥혈전증으로 사망했다. 인터뷰를 한 12월 30일은 고 김근태 전 장관의 4주기였다.

"우리가 언론사 생활할 때는 통제가 일상적이었어요. 박정희 정권 때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아예 편집국에서 살았어요. 기자들이 모여서 '중정 요원 출입금지'라고 써붙여 놓으면 좀 잠잠하다 또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때는 보도해야 할 것을 보도하지 못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는 시대였어요. 그래도 편집국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공유되어 있었어요. '언젠가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게 길을 열어 놔야지'하는 생각으로 매일 술 먹으면서 참고 버텼지요." 

- 선생님도 요주의 인물로 집중 감시 대상이셨을 것 같은데요?
"우리가 중정이나 안기부를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거기서 나온 사람들도 저널리즘과 김중배를 연구했어요. 제가 매주 칼럼을 썼는데, 칼럼 패턴하고 주요 사건을 쭉 연구해서 내가 다음 주에 뭘 쓸지 예측해서 연락을 해요. 전화해서 '뭐 쓸 거지요?' 이러는데, 맞출 때가 많았어요. 철저하게 연구한 거지요. 난 또 거짓말 하면 안 되니까 '맞다. 그거 쓴다'고 하고..." 

- 그렇게 감시를 받으셨으면서도 할 말은 꼭 하셨습니다. 
"그때는 비겁하게 썼지요. 우회해서. 예를 들면 '바둑을 두다가 잘 안 되면 판을 엎어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웃음) 그러니까 안기부 사람들이 '이거 세상 뒤집자는 거 아니냐'고 찾아오고. 저도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서 군복도 입어보고, 엄청 맞기도 했어요. 내가 잡혀가면 회사에서 직원들이 농성하면서 기다리니까, 끌고 갔다가 집으로 데려다 줘요. 마누라가 두들겨 맞았다고 울면 괜히 '안 맞았다'고 거짓말하고 그랬지요. 나를 끌고 가서 때리는 건 참을 수 있었는데, 가족한테 그러는 건 정말 못 참겠더라고요."

- 가족까지 협박했습니까? 
"가장 가슴 아픈 게 그거예요. 제 자녀가 2남 1녀에요. 전에 2층 집에 살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가 눈이 퉁퉁 불어 있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너희 애비 어미는 물론이고 너희들까지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더군요. 게다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까지... 그건 정말... 내가 당하는 건 참으면 되는데, 정보기관이라는 곳에서 가족까지 협박을 하니까... 딸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때도 '민주 대 반 민주'가 아니라 '인간 대 반 인간'이었어요. 감히 인간이 못할 짓을 그렇게..."

- 그런 협박을 이겨 내고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시작된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언론에 대한 자본의 통제를 비판하면서 1년 만에 사표를 쓰셨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해보니까 광고주의 압력이 막강하다는 걸 느꼈어요.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터졌는데, 관련된 업체가 신문사 대광고주였어요. 광고주가 소속된 회사를 공격할 수 있느냐는 말이 노골적으로 나왔어요.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자본의 압력은 영구적이고 원천적일 것 같아요. 민주화 이후 자본에 종속된 언론은 자유를 얻었을지 몰라도, 그게 민주언론은 아닌 거죠. 광고주라는 협소한 지형만이 아니라 기업 일반, 경제 동향과 연동해 보면, (이제 언론이) 권력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어도 자본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 아닌가 해요. 씁쓸하죠." 

"회개하는 마음으로 반헌법행위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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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배 선생은 박근혜 정부가 박정희의 급성 쿠데타와 달리 만성쿠데타를 진행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을 떠받드는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것이다.
ⓒ 김소망

오랫동안 몸담았던 <동아일보>를 박차고 나온 김중배는 1992년 <한겨레> 이사, 1993년 <한겨레> 사장, 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1999년 참여연대 공동대표, 민주방송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2000년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공동대표, 2001년 문화방송 사장, 2004년 언론광장 상임대표 등 언론개혁과 민주주의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민간인 학살, 고문, 간첩조작, 부정선거 등 진짜 우리 헌법을 유린해온 이들을 기록하자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 2015년에 출범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으셨습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반헌법행위자열전이 기록하려는 게 바로 내가 살았던 시대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자로서 회개록을 쓰는 것이라고 할까요. 참회록이 아니라 회개록입니다. 속죄라는 건 참회하면 그만이지만, 회개는 참회한 것을 고쳐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살던 시대의 죄책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자로) 살았을 때 누더기가 된 헌법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눈을 감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지금도 '회개'를 요구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다 반(反)헌법적인 행위들 아닙니까? 아이들을 포함해서 304명이 죽었어요. 생명과 인간의 존엄, 행복하게 살 권리가 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데 국민에게 주권을 위임받은 정치권력이 지켜 줬습니까? 교육도 (헌법에는)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교과서 국정화로 훼손했고, 노동문제도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을 쉽게 함으로써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을 지켜주지 않는 거잖아요?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사명을 다하겠다고 선서를 했어요. 우리 헌법 조항에서 대통령 선서 부분이 유일하게 경어체로 되어 있어요.(헌법 제69조에는 대통령 선서의 문구가 적시되어 있다. 이 부분은 헌법 조문 중 유일하게 '엄숙히 선서합니다'로 끝나는, 경어체로 되어 있다. - 기자 말) 그런데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그래서 권력을 가지고 우리 헌법을 파괴해온 사람들을 기록하는 일은 과거사면서도 현재의 일이고, 또 미래의 일입니다."

- 열전에 기록될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해봤자 회개는커녕 속죄라도 할지 의문이라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전에 국사편찬위원장을 하셨던 이만열 선생님이 '공자가 춘추를 쓰니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했다'고 하시면서 이 열전이 나오면 반헌법행위자들이 두려움에 떨게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춘추를 보고 두려워할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죠. 그것보다는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확장성을 가진 시민의 역량으로 힘을 보여줄 것인가? 그게 중요한 질문 같아요.

반헌법행위자들을 기록하는 일은 나같이 나이든 분들, 나보다는 나이가 적지만 세월을 오래 사신 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온 시대에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잔인무도한 이들이 많았다는 걸 생각해서 우리가 우리 후손만큼은 그런 일을 다시 겪지 않도록 벽돌 한 장씩 쌓는 심정으로 해야 해요. 물질적으로 기여하기 어려운 젊은이들도 여기에 뜨거운 정신과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어준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 '벽돌 한 장'보다 '선생님의 글 한 편'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안 쓰셨는데, 다시 펜을 잡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사실 지난해(2014년)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10여 년 동안 글을 안 쓰다 보니 늙어서 기력도 없고, 지적인 시스템이 붕괴되었는지 몇 번을 시도해도 잘 안 되더라고요. 그렇지만 계속 노력 중입니다. 진심으로 쓰고 싶습니다." 

올해 83세의 나이에도 수많은 곳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이슈에 대한 직격탄을 쏟아내고 있는 영원한 대기자 김중배.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이들이 여전히 그의 옛 칼럼을 꺼내 읽는 이유는 당시의 정론과 직필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그의 말처럼, 2016년은 고난과 역경을 견딘 후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열정(passion)의 해가 될 것인가? 

"때문에 나는 거듭 깨어 있으면서, 거듭 말하고자 한다. 
민초(民草)여, 끝내 새벽은 열린다. 
희망을 상실하면, 희망의 새벽은 열리지 않는다. 희망이 깨어 있으면, 희망의 새벽은 열리고야 만다."
- 1984년, 김중배 <민은 졸인가> 책머리 글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반헌법행위자열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학살, 고문, 간첩조작, 부정선거 등 국가권력을 활용해 헌법을 파괴해온 이들을 기록하려는 작업입니다. 열전은 시민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후원계좌(국민은행. 006001-04-198120. (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한참 잘못된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 관행

소신 있는 장관, 공무원은 모두 죽었나 한참 잘못된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 관행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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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5  1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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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통일부가 분주합니다.
남북대화 구상 때문에? 통일교육 준비 때문에? 탈북민 지원 때문에?
땡!!! 모두 틀렸습니다.
연말부터 통일부는 단 하나,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 준비에 매달려 있습니다.
오는 22일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4년차 통일외교안보 분야 연두 업무보고를 받습니다. 지난해 대통령 업무보고가 경제혁신-국가혁신-통일준비-국민행복이란 명칭으로 나누어 진행됐고, 통일부는 외교부, 국방부, 국가보훈처와 함께 ‘통일준비’ 업무보고에 참여했습니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각 부처의 연간 업무계획을 보고받고 지시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꼭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업무보고를 준비하는 장관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다들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단지 밝지 않은 정도를 넘어 곤혹스러움과 짜증이 배어있습니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럴만도 합니다.
공무원 사회는 유난히 행정절차나 요식행위가 많고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꽉 짜인 틀이 옥죄고 있습니다. 더구나 대통령 앞에서,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장관들이 업무보고에 나서는 경우, 가장 전형적인 요식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감히 어떤 장관이나 기관장이 자기 방식대로 토론거리를 만들어 보고할 수 있을까요? 뻔한 순서에 따라 뻔한 내용으로 매끄럽게 보고하고, 지적사항 최소화, 칭찬 최대화를 이끌어내는 것 외에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그 뻔한 보고서를 ‘폼나게’ 만들기 위해 각 부처 공무원들이 대부분 한달 이상을 목매달다시피 매달리고 있는 모습은 한마디로 안쓰럽습니다. 회의를 주재하는 대통령은 짜여진 보고를 청취하는 인내력을 발휘할 뿐입니다. 토론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순서대로 돌아가며 ‘허공에 대고 한마디씩 하는’ 수준입니다. 대통령은 미리 써온 엄숙한 결론을 통보하고 마무리합니다.
  
▲ 지난해 '통일준비' 업무보고 모습.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국가보훈처가 합동 업무보고를 했고, 통일부는 당시 류길재 장관이 보고자로 나섰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청와대도 이런 문제점을 알았던지 지난해 업무보고가 끝난 뒤 ‘국민행복’ 업무보고가 잘 됐다며 특별히 ‘비하인드 스토리’를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처들의 업무보고를 꼼꼼히 들으며 궁금한 점을 직접 질문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원을 당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하인드 스토리’에 나온 내용을 보면 실소만 나옵니다. 박 대통령은 ‘대학교육의 구조적 문제 해결’로 “기업이 필요한 인재를 대학에서 교육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을 추진한다면,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이러한 지시사항으로 청년 일자리가 늘어났다는 소식은 듣지 못 했습니다.
더구나 업무보고 마무리 발언으로 “오늘 보고한 과제들과 토론한 내용대로 정책이 잘 추진이 된다면, 올 연말까지 우리 국민들께서 연말에는 행복지수가 높아졌다 하는 것을 체감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고 말했지만 연말을 지난 지금 행복지수가 높아졌음을 체감하는 국민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나마나한 매년 되풀이되는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에 공무원들이 흥이 날 이유가 없고, 야근이나 주말근무까지 더해지게 되면 짜증과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업무보고에서도 뭔가 새로운 보여줄 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장관과 고위 공무원들은 안절부절 못 합니다. 통일부 장관은 4일 신년인사차 기자실에 들러 좋은 사업거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기자들에게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통일부가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데 무슨 새로운 사업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실제로 장관의 요청에 기자들이 금강산관광 재개나 남북 철도 연결 문제를 제기하자 장관은 아무런 대답도 못 했습니다.
금강산관광을 재개하면 남북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풀 수 있고 현 정부가 그렇게나 내세우고 있는 이산가족 문제의 진전도 비로소 여지가 생길 것입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을 비롯한 남북경제협력이야말로 남과 북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길임은 심지어 새누리당과 전경련, 대한상의까지 제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를 앞두고 DMZ 세계평화공원이니, 새로운 사업거리니 타령만 늘어놓아야 하는 장관의 처지가 참 안 돼 보입니다. 그 뒷받침을 하기 위해 행정고시라는 어려운 관문을 거쳤고 남북관계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엘리트 공무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도 참 딱해 보입니다.
안 하니만 못한 대통령 연두 업무보고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대통령도 장관도, 공무원들도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자조는 적어도 장관이나 고위직 공무원들은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목민관의 덕목으로 율기(律己, 자신을 다스림)와 더불어 봉공(奉公, 공을 받듦)과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을 꼽았습니다. 대통령의 레이저 눈빛을 맞지 않는 것보다 국민과 역사 앞에 충실한 공복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2018년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을 추가적인 환경파괴나 재정투입 없이 북한 마식령스키장을 이용해 분산개최해 보자는 소신 제안을 대통령 앞에서 당당하게 펼칠 장관도 공무원도 진정 없단 말입니까?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

[항일연제.17]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반일조직의 확대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17)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6/01/06 [08:14]  최종편집: ⓒ 자주시보

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17)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6.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반일조직의 확대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이 선포되었다앞서도 여러 번 언급을 했듯이 당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치밀하게 준비를 한 다음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것이다여기에는 우선 가장 중요한 유격대원들이 손에 들고 적들과 맞서 싸울 무장장비를 준비하고또 동북만주와 남만을 무대로 투쟁을 할 때 유격대원들의 투쟁을 도와줄 백성들이 조직적으로 묶여져 있어야 한다동북만주는 중국의 영역이었기에 유격대가 원활하게 투쟁하기 위해서는 반일사상을 가진 중국인들과의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했다마지막으로 유격대를 묶고 투쟁하는 것이 일회성이라거나 단시일 내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장기전을 해야 하고드넓은 만주광야에서 강력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한 두 개의 유격대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주 각지에 조직적으로 연대를 해서 싸울 유격대를 창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치밀한 준비를 하지 않고는 당시 세계 최강국에 속하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맞서 가열 차게 유격투쟁을 벌일 수가 없다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이전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향의 항일투쟁을 준비하던 젊은 조선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정확히 인식을 하였다.

이에 따라 유격대창건에 앞서 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공작하고 투쟁을 벌였다유격대를 창건하고 본격적으로 유격투쟁으로 넘어가기 전에 필요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동시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었다심지어 목숨을 던지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이러한 준비가 갖추어진 후에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것이다.

반일인민유격대를 묶는데 필수요소인 유격대원들이 무장하기 위해 무기를 획득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전 장들에서 살펴보았다이번 장에서는 유격대를 묶기 전 유격대원들의 유격활동을 후원하고 원호할 일반백성들을 조직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백성들을 유격활동을 후원하고 원호할 수 있는 조직성원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대 말 이전 이미 만주 각지에는 민족주의계열을 독립운동단체들이 있었고 또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다물론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벌여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다따라서 당시로서는 젊은 층에 속하는 반일·항일세력들이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 새로운 조직을 내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더구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젊은 조선인들이 받아들인 새 사조 즉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세력에게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버금가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에서는 자신들과 같은 민족이면서 반일·항일투쟁의 길에 나선 공산주의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반일의 길에 나선 것 자체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는 것으로서 자신들과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에서는 반일·항일의 일념으로 투쟁에 나선 동족들을 대상으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백색테러를 감행했다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서러운 일인데 자신들과 같은 지향을 가진 동족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만주각 지역과 북부조선일대에 반일·항일유격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길은 이처럼 험난하였다비단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 무장을 하는 것만이 목숨을 내대는 것이 아니었다한편으로는 적과 투쟁을 해야 하고 또 다른 편으로는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당하는 백색테러와도 투쟁을 벌여야 했다.

백성들 사이에 유격투쟁을 지원해줄 조직을 묶어낸다는 것이 이렇게 험난하였다하지만 당시 젊은 조선인들은 가는 길이 위험하다고 물러서지 않았으며험난하다고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바로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젊은 조선인들은 백성들 사이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하면서 설득하고 때로는 함께 노동을 하면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이렇게 가열차고 치열하게 노력을 했기에 백성들은 점차 젊은 조선인들이 지닌 민족주의사상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방향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나중에는 백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젊은 조선인들의 투쟁을 도와 나섰으며때로는 유격대원들과 한 전호 속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무기를 들고 싸우기까지 하였다.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지대에 사는 백성들을 하나의 반일조직으로 묶어내기 위해 젊은 조선인들이 얼마나 간고한 투쟁과 노력을 기울였는가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자신의 조상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얼마나 간고한 투쟁을 벌였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악랄하고 야수적인 탄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그런 후라야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일 정신대문제 합의와 같은 얼빠진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하지만 남쪽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이런 매국적이며 배족적인 합의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무려 35.6%나 된다니 필자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이에 대해 보도한 오늘자 뷰스엔 뉴스의 소식을 아래에 간단히 올려준다.

5일 <중앙일보>에 따르면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전국 성인 1천명을 상대로 지난해 12월 29~30“‘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며 재단 기금에 정부 예산을 투입하기로 한 것은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본다는 정부 입장에 동의하느냐고 물어본 결과 동의한다가 47.6%, “동의하지 않는다가 47.9%로 팽팽했다. “모르겠다가 4.5%였다.
……
정부의 위안부 협상 결과에 대해선 불만족스럽다(‘매우 불만족한다’ 또는 약간 불만족한다’)는 응답이53.7%로 만족한다는 응답(35.6%)보다 많았다.

정부 발표 중 일본 정부가 합의사항을 이행한다는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는 응답(58.2%)이 동의한다”(37.3%)보다 많았다.

참으로 할 말이 없는 현재 배달겨레 반쪽이 살고 있는 남쪽의 현실이다위와 같은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40년간 이 나라를 빼앗고 세계사에 있어본 적 없는 악랄한 방법으로 식민지지배와 수탈을 한 역사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민족반역자들의 후손들이 권력과 재부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틀어쥐고 자신들의 직계조상의 반민족 반역행위를 숨기기 위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일본의 만행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오늘의 남쪽 현실에 대해 후세들은 과연 뭐라고 역사적 평가를 내릴 것인지 두렵기만 하다.

오늘자 새 소식을 올려준 것은 필자가 현재 연재를 하는 것도 기록으로 남아 후세들에게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또 연재를 하는 내용과 직접 관련을 가지고 있기에 인용을 해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젊은 조선인들이 동북만주와 남만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

젊은 조선인들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동북만주와 남만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될 수 있으면 자료를 전면 개제를 한다투쟁과정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또 증언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 먼저 오래 된 기념비를 가보았다한자리에 두 개의 기념비가 쌍둥이처럼 세워져있는데 앞쪽것은 화강암으로 다듬은 석비이고 한자쯤 뒤에 세워진 기념비는 오래된 목비였다석비엔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 약수동항일기념지 화룡인민정부 198561이라는 조한문으로 된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
1930년 5월 27일 이곳에서 동북에서의 첫 번째 쏘베트정부가 성립되였다. 1930년 6월 10일 중공약수동지부가 성립되고 서기로서는 리봉삼이였다. 1930년 7월 10일 중공평강위워원회가 성립되고 서기는 주현갑조직부장은 리주헌선전부장은 황룡문비서는 윤준걸유일환이였다아래에 12개 지부가 있었다평강구위는 선후로 약수동-어랑촌-마고령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에 전부 파괴되였다. 1930년 8월 13일에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성립되고 서기로는 김창일조직부장은 정만준선전부장은 한별,군사부장은 박윤세였다. 1932년 음력 11월 4일에 항일녀영웅 김순희와 호조회장 정태준 등 13명 동지들이 이곳에서 희생되였다.

약수동쏘베트정부 탄생

1930년 5월에 진행된 붉은 5월 투쟁은 5월 23일부터 부분적 농촌에서 토지혁명투쟁에로 넘어갔다.약수동투도구달라자삼도구 등지의 농민들은 공산당조직의 령도밑에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와 토호렬신을 청산하고 소작료계약서와 고리대문서를 불살라버렸다그들은 또 지주토호렬신 및 친일주구들의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1930년 4월말 황포군관학교출신인 조선족공산당원 신춘(申春)을 혁명군중기초가 좋은 약수동일대에 파견하여 토지혁명을 전개하도록 했다. “붉은 5월 투쟁속에서 약수동의 농민들은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여 지주의 장원으로 쳐들어가 지주의 고리대문서를 태워버리고 량식과 재물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0년 5월 27일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농민군중들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다약수동 상촌의 팔간집마당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신춘은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창립되였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이는 동북에서의 첫 민중정권의 탄생이였다그것도 일제치하와 봉건통치배들의 코앞에서 벌어진 력사적장거였다.
신춘은 쏘베트정부의 창립대회에서 약수동쏘베트정부창립의 력사적의의와 그 사명에 대하여 얼음에 박밀 듯 피력했다신춘의 열정적인 연설은 대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가슴에 뜨거운 물결을 일으켜주기에 족했다대대손손 착취와 빈궁의 멍에에 짓눌려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온 가난한 무권리 농민들로 놓고보면 이건 크나큰 경사였다군중들은 쏘베트정부의 성원들을 선출하고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군벌정부를 타도하자!”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농들에게 나누어주자!”
토지혁명을 실행하자!”
쏘베트수립을 옹호한다!”
수백명 군중들은 목터져라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약수동학교의 소선대원들은 붉은넥타이를 날리며 행진하였다구호와 노래소리가 삽시에 약수동 하늘가를 진감하였다.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어서 빨리 나가자
제국주의 군벌들은 죽기를 재촉코
강탈과 학살은 여지없이 하노라

시위대 군중들은 지주와 일제주구놈들의 집앞에서 더 힘차게 구호를 웨치면서 단결된 힘을 과시했다.시위는 사흘동안 계속되였다분노한 군중들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일제주구 몇놈을 붙잡아 처단했다그리고 고리대금업자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자들의 고리대문서와 소작료계약서를 들춰내여 불태워버렸다리경천 등 10명으로 조직된 농민적위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찰하면서 농민들의 시위투쟁을 보위하였다.
약수동의 농민들은 쏘베트정부창립대회의 결의에 따라 “5.30”폭동의 거세찬 투쟁에 뛰여들었다폭동후 일제경찰들은 약수동에 덮쳐들어 100여명의 청년을 체포하였다약수동쏘베트정부는 일제의 련속부절한 탄압으로 활동을 전개할수 없게 되었다하여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창립되여 3일만에 부득불 지하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
쏘베트정부의 수립은 연변에서의 하나의 큰 사변이 아닐수 없다그러나 이것은 필경 중국공산당의경로선의 산물이였다이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 ‘붉은 5월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여 일으킨 첫 번째 반제반봉건투쟁입니다이 운동을 통하여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비록 성숙되지 못한 투쟁이였지만 이번 투쟁은 거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조선인군중가운데 파급시켰습니다이번 투쟁을 거친후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쏘베트정권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이 투쟁의 교훈은 경이였습니다경황없는 상황에서 진행하였기에 리론과 실천을 결부시키지 못한 오유를 피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

약수동은 또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가 열렸던 고장이기도 하다.
……
1930년 7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인 왕경(조선인)은 중공만주성위 비서장 료여원과 함께 연변으로 되돌아왔다료여원은 성당위의 파견을 받고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원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을 심사하러 왔던 것이다료여원과 왕경은 친히 각 현에 가 원 조선공산당원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흡수하는 사업을 하였다이리하여 당시 연변의 중공당조직은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이런 토대에서 7월하순 료여원과 왕경은 연길현 의란구 남동에서 중공연화중심현위건립준비사업에 관한 회의를 소집하였다회의는 6일간 열렸는데 도합 15명이 참석했다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동북에서의 조선인농민투쟁과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할데 관한 지시정신을 학습하고 구당위를 건립하고 당원대표대회를 선거하는 등 문제들을 연구하였다회의후 회의에 참석했던 당간부들은 각지에 내려가 연화중심현위의 건립을 위한 준비사업을 하게 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은 친히 약수동에 내려가 평가구당원대표회의를 열고 주현갑을 서기로 한 중공평강구위를 건립하였다공산당조직에서는 약수동을 당사업의 토대가 매우 좋아 당의 회의를 열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지목하고있었다.

1930년 8월 13각지에서 온 당원대표들은 약수동 웃마을에 모였다대표대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의 책략과 총로선을 관철할데 대한 조치를 세우고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중공당원으로 흡수한 사업을 총결하였으며 7명의 위원과 2명 후보위원으로 구성된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를 선거하였다이들가운데는 원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마준원 조선공산당 당원이였던 김성도한별리용국의 전(양말제조로동자), (건축로동자), (빈민)씨 성을 가진 당원대표도 있었다중공연변연화중심현위 위원회 부서와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았다.

서기 왕경(조선인), 조직부장 마준(조선인), 선전부장 한별(조선인), 군사부장 박윤서(조선인), 청년부장 리용국(조선인), 녀성부장 김여신(조선인)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산하 직속인 연변에서의 공산당의 최고기관이였다중심현위 산하에는 개산툰구위 등 10개 구당위와 61개 기층당지부가 있었으며 당원은 도합 480명 있었다.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농민운동을 힘껏 발전시키였으며 공산당조직과 공청단조직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농민협회 등 대중단체를 결성하여 토지혁명을 실행하였다그리고 적위대유격대 등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혁명위원회를 건립하여 지방폭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였다이리하여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연변지구의 당산당원공청단원들은 근 천여명이나 되었고 여러 대중단체들에는 5000여명의 군중이 참가하였으며 이런 조직영향하의 군중들은 5만여명에 달하였다.

(김철호연변항일사적지연구)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젊은 조선인들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김일성 주석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하였는데인용문은 유격대창설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사업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다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당시 동북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일반조선인들을 반일 항쟁에 나설 수 있도록 활발하게 조직사업을 벌인 조직은 새 형의 투쟁방향을 설정한 젊은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인용문에도 언급이 있듯이 약수동 소비에트정권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거의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물론 인용문에는 조직사업을 중공당에서 발기하고 조직했다고는 하지만 성원들 대다수가 조선인들이다당시 조선인들이 조선의 독립을 떠나 어떤 투쟁을 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더구나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사상을 통해 혁명정신을 높이고 이를 통해 항일투쟁을 강력하게 벌임으로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 선거에 참석한 사람들이나 선출된 사람들 모두가 조선인들이다물론 인용문은 1931년에 있었던 5·30 폭동8·1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에 조직된 기구로서 위에서 언급된 조직원들은 당시 중공당에 입당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여기서는 이들이 저지른 좌경모험주의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이들이 조직에 가담을 하는 것은 자신들 개인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지향을 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이었다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어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게 된 투쟁가도 있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이들 가운데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원 조선공산당 당원 이었다라고 언급된 김성도이다김성도는 반민생단투쟁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였다그는 반민생단투쟁을 이끌면서 수많은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을 처형하였다그가 주도하여 처형한 항일혁명투사들은 유격대간부들도 많았으며 심지어 작식대원으로 있는 조선인 여투사들도 민생단원이라고 몰아붙여 처형을 하였다결국 김성도 자신도 민생단 혐의자로 몰려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본 내용은 이송덕 선생이 답사 길에 반민생단투쟁을 이야기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 이다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 와서 투쟁을 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동족인 공산당 간부에게 아무런 죄도 없이 모략을 받고 처형을 당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 인용문은 당시 항일혁명투사들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들어가 조직사업을 하고그 사업이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물론 후일 조직성원들과 백성들을 폭동으로 내몰아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조직이 혹심하게 파괴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서는 논하지 않는다다만 초기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조직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만 참고를 하면 될 듯하다더해서 당시 만주지역에서 치열하게 투쟁을 하던 조직성원들은 거의 조선인들이었다는 점이다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

후일 젊은 조선인들은 5·30 폭동8·1폭동의 오류를 심각하게 고찰을 하였으며이를 토대로 다시는 이전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조직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이제 젊은 조선인 항일투사들이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일반백성들을 상대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한 남쪽의 자료를 보도록 하자.


2) 조직구성에 대한 남측자료

남측에는 체계적으로 항일유격대 창건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 북부국경 일대에 반일조직을 꾸리고조직 확대를 위해서 투쟁을 한 사실에 대해 정리된 자료가 거의 없다앞서 참고자료로 활용을 했던 이종석 전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의 논문이나 한양대 신용하 교수의 논문에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해 만주지역과 조선북부 지역에 반일조직을 내온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물론 항일유격대를 연이서 창설을 하여 치열하게 항일전을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다.

이렇게 남쪽 빈약한 남쪽 자료의 한계로 인해 본 문제에 대한 분석대상으로 인용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다만 이전 장들에서도 인용을 하였지만 필자가 소유한 자료 중 유일하게 서적자료 한 가지만 이에 대해 간략히 기술이 되어 있기에 인용을 한다아래에서 이에 대한 자료를 인용하기로 한다.

❝ …항일유격대가 결성되는 데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광범한 민중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튼튼한 대중적 토대를 닦는 것이었다.

유격전은 본질상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가를 전제로 하는 민중전쟁이다민중의 적극적인 참가와지지 ·성원은 유격대의 끊임없는 확대 · 강화와 유격전의 승리를 보장하는 기본 조건이다유격대는 튼튼한 대중적 지반을 쌓고 민중과의 혈연적 연계를 강화할 때만 장기간의 간고한 투쟁에서 부딪치는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은 대중과의 연계를 무시하고 유격활동을 단순한 군사활동만으로만 인정하려는 군사모험주의적 경향을 배척하면서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민중과의 연계를 밀접히 하며 그들과의 사업을 강화하였다.

(항일무장투쟁사남혀우대동신서. 1988년 8월 29. 135)

비교적 간략히 언급이 되어있지만 정확한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당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 북부국경일대에 반일조직을 내오는 구체적 사례를 거론했다거나 그 수행과정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위성과 의미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분석하였다.

유격대가 유격투쟁을 벌이는 지역의 백성들과 광범위하게 그리고 혈연적으로 유대를 맺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유격대가 백성들과 혈연적 유대를 가짐으로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유격투쟁에 필수불가결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

첫째유격대원들을 끈이지 않고 보충할 수가 있다새로운 유격대원들이 보충이 되지 않는다면 초기 창설된 유격대원들이 영활무쌍하고 연전연승을 한다 해도 그 유격투쟁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단기간의 유격투쟁을 한다면 몰라도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데 유격대원들을 보충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지 않고는 장기간의 유격투쟁에 대해서는 생각 할 수 없다따라서 당시 유격대를 창건하려던 젊은 조선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였으며, 본격적인 유격투쟁에 들어가기 위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주요한 사업으로 정하고 치밀하게 조직사업을 벌였다.

둘째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의 북부국경일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반일조직을 꾸리고 그 조직을 부단하게 확장해나가는 것은 넓은 지역에서 반일·항일유격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는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인 일본관동군과 조선주둔 일본군이 유격대토벌에게는 매우 어려운 장애가 된다유격대가 넓은 지역에서 투쟁을 벌이게 되면 아무리 많은 수의 군대를 가졌다 해도 군사력에 분산을 가져옴으로서 효율적인 토벌을 할 수가 없다이는 결국 유격대 토벌의 실패를 가져오게 되며 그 결과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이 한 낮 개꿈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다.

또 유격대가 일부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면 그 유격대는 우세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대병력을 거느린 일본군에게 쉽게 토벌을 당할 위험이 대단히 높다따라서 광범위한 지역에 유격대를 조직하고 유격투쟁을 벌이는 것은 필수이다이를 위해 넓은 지역에 유격대를 창설하고 투쟁을 해나가는데 지역 백성들과 치밀한 연계를 맺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셋째유격대가 유격활동을 하는 지역의 주민들과 혈연적 관계로 맺어지면 유격활동에 필요한 후방지원이나 원호물자를 일정 정도 조달을 할 수 있다물론 여기에는 이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들처럼 나라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듯이 강제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징수하는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 절대 아니다.철저히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하였다때로는 유격대원들이 백성들의 살림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활동도 하였다유격대원들은 유격구내의 주민들과 한 집안 식구처럼 함께 농사도 짓고 연료문제도 해결하고 농경지도 개간을 하는 등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에 맞서 투쟁을 하면서도 끈임 없이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즉 실천 속에서 백성들과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적들에 대한 비밀자료를 정탐해내는 등 정보자료를 획득할 수 있는 통로도 되었다일본제국주의 침략 군대들이 주둔하고 있는 각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적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을 하였으며그 사실을 즉시로 유격대에 통보를 하였다물론 당시 유격대가 적들의 움직임을 포함한 적의 정보자료를 주민들에게만 전적으로 의존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유격대가 획득할 수 있는 정보와 백성들이 전해준 정보자료를 종합하여 적들과 맞서 유리한 상황에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다섯째백성들을 반일조직에 내세워줌으로서 나라를 잃고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 이주해와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조국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는 것이다이는 조선인들에게 조국해방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유격대와 한 전호 속에서 싸울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뒷 장들에서 다루겠지만 유격대와 백성들이 한 전호 속에서 싸워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들을 물리치고 연전연승을 거둔 사례는 수없이 많다이미 다루었던 유격대의 내도산 전투도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여섯째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짧은 기간에 벌이는 유격투쟁이 아니기에 전투를 벌이는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하나로 뭉치는 연계관계는 필수적이다장기간 벌이는 유격투쟁에서 지역주민들과 혈연적 관계로 연계가 되는 것은 유격대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공급하는 물 원천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위에서 이미 예를 든 것처럼 장기간 유격투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유격대원들이 끈이지 않고 보충이 되어야 하며비록 그것이 크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후방지원과 원호물자의 끈임 없는 지원은 일정한 기간을 정하지 않고 장기간 투쟁을 하는 유격대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유격대를 창설하기 전에 그 준비과정으로 백성들 사이에 반일조직 사업을 적극적으로 내밀었던 이유가 바로 위와 같은 것들이다바로 남측 자료는 비록 짧기는 하지만 위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3) 반일조직 사업에 대한 북측 자료

이제 반일조직 사업에 대한 북측 자료를 보기로 하자.

❝ 우리는 무장대오를 꾸리는데서 사람과 무기를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필수적요소로 보았다그런데 우리한테는 이 두가지가 다 부족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란 군사정치적으로 준비된 인간을 의미한다우리한테는 정치를 알고 군사를 아는 사람조국과 인민을 위해 장기간 무장을 들고 싸울 준비가 되여있는 그런 청년들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한해반사이에 조선혁명군의 골간들을 거의다 잃어버리였다김혁김형권최효일공영리제우박차석과 같은 혁명군의 주력이 한해사이에 모두 전사하거나 감옥행을 한데다가 1931년 1월에는 중대장으로 활약하던 리종락이마저 조선혁명군과 관련된 소책자를 가지고 무기공작을 하러 가다가 김광렬장소봉박병화와 함께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였다군사물계에 밝은 김리갑도 감옥에 끌려갔고 백신한은 전사하였다최창걸과 김원우는 어떻게 되였는지 소식조차 알길이 없었다.

혁명군의 나머지력량가운데 군사경험이 있다는 대원들은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는 정도였는데 얼마 안되는 그 대원들마저도 군중정치공작에 돌리다보니 무장대오에 망라시킬수 없었다내가 안도에서 유격대를 내오느라고 바쁘게 뛰여다닐 때 내곁에 있은 조선혁명군출신의 청년은 차광수 한사람뿐이였다.

국가권력을 쥐고있는 사람들 같으면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으로 필요한 군사인원들을 손쉽게 충당할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집할수 없었다법적장치나 물리적힘으로써는 대중을 혁명에 동원시키지 못한다한때 상해림시정부는 모든 국민들이 납세병역징발에 응할 의무를 지닌다는 조문을 헌법에 박아넣었지만 인민들은 그런 법이 채택되였다는것조차 모르고있었다국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남의 나라 조계지 한구석에 앉아 국권을 행사하는 망명정부의 법이나 지령이 효과를 낼수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리치이다.

식민지민족해방혁명에서는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적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총을 메울수 없다이 혁명에서는 혁명을 령도하는 수령과 선각자들의 호소가 법을 대신하며 매개 사람들의 정치도덕적자각과 전투적열정이 참군을 결정하게 된다대중은 그 누구의 요구나 지령이 없어도 자기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총을 멘다이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여있는 인민대중의 본성적행위이다.

우리는 이런 원리에 기초하여 안도와 그 주변에서 유격대에 망라시킬 대상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적위대소년선봉대로동자규찰대지방돌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에는 참군을 요구하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추수춘황투쟁의 폭풍속에서 반군사조직들은 급속히 확대되였고 그 폭풍의 한복판에서 청년들도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

우리는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인민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튼튼히 준비시키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수적요구였으며 광범한 대중이 자각적으로거족적으로 동원되는 여기에 바로 최후승리의 담보가 있었다.

1930년의 전례없는 흉작과 그에 따르는 혹심한 기근은 우리가 동만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릴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우리는 추수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군중의 투쟁기세를 늦추지 않고 일제와 친일지주들을 반대하는 새로운 춘황투쟁을 벌리도록 하였다춘황투쟁은 지주에게 쌀을 꾸어달라는 차량투쟁으로 시작되여 일제와 친일지주들의 량곡을 몰수하는 탈량투쟁으로일제의 앞잡이들을 청산하는 폭력투쟁으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춘황투쟁의 불길속에서 동만지방인민들을 혁명화하는 사업은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하였다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공세가 그처럼 악랄해지고있는 환경속에서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인내성있게 그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였다대중단체들은 관문주의의 틀을 마스고 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부단히 단련시키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어디서나 순풍에 돛단것처럼 그렇게 헐하게 진행된것은 아니였다한 마을을 혁명화하는 과정에 여러명의 혁명가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수모와 불신을 당하면서도 자기가 혁명가라는것을 밝히지 못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푸르허마을에서 겪은 체험도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다.
…… (푸르허 마을에서의 머슴꾼 노릇에 대한 자료는 이미 올려주었기에 여기서는 인용하지 않는다.)(세기와 더불어 중에서 푸르허마을 혁명화)

혹 위의 자료를 참고하고자 하면
[항일연재 8]반일조직 구성을 위한 푸르허에서의 "머슴살이일화를 보기 바란다.

북측 자료에 인용된 내용 중에서 추수·춘황투쟁에 대해서도 이미 [항일연재3] 1930년 "5.30폭동""8.1폭동"이 조선인들에게 끼친 참혹상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항일연재3]을 보지 못한 독자들은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인용문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그나마 어렵게 꾸려왔던 조직은 1931년 극단적 좌경모험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 사적 목적 실현을 위하여 조선백성들을 5·1폭동과 5·30폭동》 그리고 8·1폭동을 내몰게 됨으로서 혹심하게 파괴되었다조직을 이끌던 지도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철창 속에 갖히었으며 다행히 잡히지 않은 조직원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도망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렇게 혹심하게 파괴된 조직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지도자가 걸었던 길은 얼마이며 위험을 무릅쓴 사지판을 넘나든 것은 또 얼마였던가위 인용문은 이를 그저 함축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았다또 그 과정에서 희생된 항일혁명동지들은 몇이었던가물론 인용문에는 김혁김형권최효일공영리제우박차석 … 리종락” 등 주요인물에 대해서만 언급을 했지만 실제 혁명의 길에 나섰던 반일·항일투사들의 희생을 어찌 한 두 마디의 필설로서 다 나열을 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위에 든 예 가운데 박차석과 리종락은 중도 배신을 하고 후일 김일성 주석이 투항할 것을 회유하기 위해 일제의 개가 되어 사령부에 침투를 하였다박차석은 그나마 자신의 잘 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를 하였지만 리종락이는 끝내 자신의 반역죄를 합리화 하면서 끝까지 김일성 주석을 회유하려고 하였다이에 격분을 한 유격대원들에 의해 처단을 당하고 만다물론 세기와 더불에는 처단을 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유격대원들이 격분하여 처리를 하였다고 하여 민족의 반역자 리종락이를 처단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리종락이와 박차석은 김일성 주석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화전에 설립한 화성의숙을 다닐 때 함께 수학을 하던 동료이자 1926년 10월 17일에 있었던 《ㅌ·ㄷ》의 성원이기도 하다또 리종락이와 박차석은 독립군에서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출신이기도 하다이러한 자들이 민족을 배신을 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개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이와 같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그 준비과정은 대단히 험난했다적들과의 직접적인 싸움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을 당했으며일부는 일본 영사관 경찰들에게 체포를 당하였고게 중에는 일시적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들에게 투항을 하고 예전의 동료들에게 총을 들이대는 배신자들로 나왔다얼마나 간고했던가에 대해 굳이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우리는 한해반사이에 조선혁명군의 골간들을 거의다 잃어버리였다김혁김형권최효일공영리제우박차석과 같은 혁명군의 주력이 한해사이에 모두 전사하거나 감옥행을 한데다가 1931년 1월에는 중대장으로 활약하던 리종락이마저 조선혁명군과 관련된 소책자를 가지고 무기공작을 하러 가다가 김광렬장소봉박병화와 함께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였다.”라고 하여 그 과정이 얼마나 간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앞에 주저앉을 젊은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대중은 그 누구의 요구나 지령이 없어도 자기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총을 멘다… 우리는 이런 원리에 기초하여 안도와 그 주변에서 유격대에 망라시킬 대상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적위대소년선봉대로동자규찰대지방돌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에는 참군을 요구하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추수춘황투쟁의 폭풍속에서 반군사조직들은 급속히 확대되였고 그 폭풍의 한복판에서 청년들도 몰라보게 성장하였다.”라고 하여 당시 젊은 조선인 반일·항일투쟁가들은 부딪히는 어려움과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끈임 없이 가열 차게 조직을 내오기 위하여 투쟁을 벌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1931년 가을과 1932년 봄에 벌어졌던 추수·춘황투쟁에서 고양된 백성들을 반일의 대오에 묶어 튼튼한 유격대지지 세력으로 키워나갔다이에 대해 인용문은 우리가 동만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릴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우리는 추수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군중의 투쟁기세를 늦추지 않고 일제와 친일지주들을 반대하는 새로운 춘황투쟁을 벌리도록 하였다.”고 하여 백성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투쟁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이는 곧 유격대창건에 필수 요소인 일반백성들의 반일단체조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을 반일조직에 묶어 세울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유격대원들 스스로 실천하는 실천투쟁에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을 하였다인용문은 인민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튼튼히 준비시키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수적요구였으며 광범한 대중이 자각적으로거족적으로 동원되는 여기에 바로 최후승리의 담보가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반백성들이 유격대와 혈연적으로 묶여질 조건은 그들에게 그 어떤 강압을 쓴다거나 회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격대원들 스스로 그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하고 하나가 되는 실천투쟁을 함으로서 유격대에 망라되는 것이 자신을 지킨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바로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 김일성 주석 푸르허 마을에서 머슴살이 일화인 것이다이 말은 대중을 혁명화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푸르허 마을을 혁명화 하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지도자가 직접 머슴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주민들을 반일·항일혁명화를 했겠는가.

푸르허 마을 혁명화 과정에 대한 자료를 보면 마치 단편소설 한 편을 보는 듯하다그것도 웃음을 자아내는 그러나 웃음 보다는 눈물이 먼저 앞을 가리는 간고한 투쟁을 형상화 한 단편 희곡 소설 같다우리 조상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간고한 투쟁을 했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일화이다필자는 푸르허 마을 혁명화 과정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웃음눈물비장함이 동시에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인용문은 푸르허 마을 하나의 예만 들었을 뿐이지 나머지 지역을 혁명화 하는데 그만한 어려움이 없었겠는가결코 아니다이미 앞선 답사기에서 다루었지만 흥륭촌을 일치된 하나의 반일조직으로 묶어세우는데도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이렇듯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 반일조직을 내오는 것은 간고한 투쟁이었다.

당시 젊은 조선인들이 백성들 사이에 내온 반일 조직으로는 아동단소년단공청반일부녀회적위대,소년선봉대노동자 규찰대지방 돌격대 등이 있었다그 조직은 나이와 종사하는 분야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다이와 같이 다양한 조직이 성장을 하면서 항일유격대를 지원하고 원호하였으며유격대원을 공급하는 풍부한 원천이 되었다.

→ 《계속

자료제공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이 창기 기자




※※※애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그동안 주2회씩 하던 [항일연재]를 필자 개인사정으로 인해 주 1회(수요일)만 연재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2015년 1월 5
이 용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