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6일 토요일

대북선제타격론자의 등극


<분석과전망>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부 장관의 의미
한성 자유기고가 
기사입력: 2014/12/06 [22:25]  최종편집: ⓒ 자주민보

미국의 애슈턴 카터 전 국방부 부장관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5일 새로운 국방장관으로 지명받았다. 
전문가들이 그에게서 주목해야되는 것은 특히 두 가지이다.  

대북 선제타격론자였던 카터 국방부장관 지명자 

그의 대북관이 최고의 적대성과 대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카터 지명자는 북한 핵시설 선제타격론자였다. 
지난 200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하고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했을 때 그는 영변 핵시설을 타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소리방송(VOA)의 6일자 보도에 따르면 당시 공영방송인 ‘P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면서 한 말이다. 그때 그가 제기한 것은 정밀타격이었다. 옛 소련의 체르노빌처럼 심각한 방사선 노출을 야기하지 않을 정도의 정밀타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울러 그 정밀타격에 대해 북한이 결코 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까지도 내놓았다. 북한의 무력 대응은 곧 ‘정권의 종말’을 야기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근거로 내세웠다. 북한이 설령 무력대응을 한다하더라도 미국이 북한군과 북한을 ‘파괴’하는 데에 몇 주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혔다. 

카터 지명자는 북한 미사일 기지에 대해서도 선제타격을 주장했었다. 
2006년 ‘워싱턴포스트’신문에 페리 전 국방장관과 공동으로 기고한 글을 통해서였다. 당시 부시 행정부에 미사일 기지 선제타격 의지를 북한에 과시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이 미 본토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의 북핵시설 선제타격론과 북미사일기지 선제타격론은 당시 북핵위기로 인한 북미전쟁론의 핵심이었다. 당시 적잖은 호응을 받기도 했었다. 그의 이력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는 이른바 ‘호전적 군인’이 아니다. 학계와 관계에서 오랫동안 국방 분야를 다룬 전문가인 것이다. 하버드대학 교수를 거쳐 빌 클린턴 대통령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에 이어 오바마 행정부에서는 국방부 차관과 부장관을 지내 국방 분야 이론과 실무에 정통한 것이다. 

특히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지난 1998년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과 함께 북미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북핵 문제의 포괄적 해법을 담은 페리 보고서를 공동 작성했다는 것은 그의 대북선제타격론에 설득력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두 번이나 방북 했다는 것도 비슷한 비중으로 작용을 했다. 

그러나 그의 핵미사일 선제타격론은 미행정부에 영향력을 주지는 못했다. 이는 그 주장이 과격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의 핵미사일능력이 미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해 있다는 것은 이를 잘 확정해주고 있다. 그가 스스로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2011년 상원 군사위원회의 국방부 부장관 인준청문회에서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는 미 본토와 미국의 동맹국들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라고 말을 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장관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강경한 대북관을 어떻게 발휘하게 될지 지켜보아야하는 이유를 구성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무기 도입은 더 증가하게 될 것인가 

카터 지명자에게서 주목해보아야할 대목으로 다음으로는 그가 국방부 예산과 무기 획득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이다. 미국 주요 언론들이 그에 대해 `국방 무기체계와 예산, 국제 군사 분야에 해박한 전문가'라고 평가를 하는 이유이다. 
특히 한국의 전문가들이 주목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귀환정책으로 인해 한미동맹 강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작권 반환 연기에서 동두천 용산 등 미군사기지 이전계획 부분 폐기 등에서 또렷하게 확인된다. 

한미동맹 강화에 우리나라의 무기도입 역시도 중요한 비중으로 포함되어있다는 것은 특별한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미국의 동맹국들에 대한 무기판매가 미국 군사패권 유지 비용을 동맹국들에게 전가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하려는 움직임에서도 확인된다. 항상 그렇듯 미국은 북한에게서 그 명분을 찾는다. 북한 핵미사일 억제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지난해 2월 열린 청문회에서 북한의 핵 개발을 언급하면서 미국의 핵 억제력 강화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VOA의 6일자 보도에서 확인된다. ‘북한 정권의 핵무기 개발을 고려할 때 미국은 안전하고 확실하며 신뢰할 수 있는 핵 억제력을 보유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것들은 미국이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카터 내정자가 한국에 무기도입을 더욱 강하게 주문하게 될 것임을 시사해준다. 그가 우리나라를 여러차례 방문을 해 우리나라를 잘 안다는 것도 이와 연동되는 중요 대목이다. 

대북강경론자가 미군의 수뇌자리에 올라섰다는 것은 오바마행정부가 말기의 대한반도 정책에서 북한에 대해서는 더 강한 대결정책을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무기구입 요구를 높이는 것을 비롯해 한미동맹을 강화하는데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해주는 것으로 된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세월호는 '인권침해' 사건


14.12.06 13:57l최종 업데이트 14.12.06 13:57l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업의 탐욕이 안전장치들을 마구 풀고 있는 지금, 언제 누가 재난과 참사의 희생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생명의 존엄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와 방향을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과 안전위원회에서는 '생명의 존엄과 안전을 위한 인권선언' 운동을 시작합니다. 많은 시민들이 함께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인권선언 운동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기획연재를 진행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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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문화예술인행동 '세월호, 연장전(延長戰)'이 11월 15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문화예술인대책모임, 세월호참사국민대책위, 세월호희생자·실종자·생존자가족대책위 공동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익숙해지지 않는 슬픔이다.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월호 참사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글을 읽으며, 참으려 해도 비집고 나오는 눈물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은 아직, 잔혹하다. 슬퍼서 뭐라도 해야 했다. 화가 나서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 힘에 제압당하기도 했다. 뭐라도 하도록 부추기는 힘도 그것이었으나,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묻기 시작했다. 왜 슬픈가. 

죽은 이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의 슬픔은 실체 없는 허기는 아닌지. 이국의 어딘가에서 폭격으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슬픔과 분노는 이국에 머물렀을 뿐, 내 안에 이렇게 켜켜이 쌓이지는 않았는데. 억울한 죽음들은 인권이 언제나 감당해야 하는 운명 같은 것, 그렇게 나는 알지 못하는 이들의 죽음을 잊는 방법도 알고 있는데. 그러다가 더 이상 묻기를 그만뒀을 때 이른 결론은 이것이다. 사람인 까닭에.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있어서는 안 될 일'

"끝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누구나 한 번쯤은 입 안에서 곱씹어보았을 말이다. 그러나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따라붙어야 한다. 4월 16일이라는 숫자나, 대형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망각에 맞서, 조금 큰 '사고' 정도로 기억시키려는 힘에 맞서,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기억은 언제나 투쟁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사고'일 뿐이라는 말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누군가의 실언처럼 언급되던 말이 어느 순간 하나의 입장이 되었다. 세월호 특별법 태스크포스팀에 참여하는 국회의원이 대놓고 주장하기도 했다. 없었더라면 좋았겠으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이름 붙이기'야말로 '사고'였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적당한 보상이 쟁점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사고일 수 없다. '있어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한 소설가가 말하듯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화재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이 났을 때 소방차가 진입할 수 없는 건물에 건축 허가를 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불이 났을 때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119에 전화도 할 수 없는 사람이 홀로 방치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익사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수영도 못하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도 입히지 않은 채, 더 깊은 곳으로 가라고 내몰기만 하는 명령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배는 침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빼앗긴 권리... 국가가 너무 태연하다

생명에 대한 권리, 너무나 당연하게 들려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말이기도 하다. 죽음의 위협에 내몰린 순간 구조를 요구할 권리가 있고, 구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구조하지 못하고 국민을 수장한 국가가 너무 태연하다.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서비스이기는 하나, 서빙하는 사람의 불찰로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는 정도의 모습이다. 사과도 했고 책임도 지겠다고 했으나, 지배인이 흔히 그러듯 서빙하는 사람을 심판할 뿐이다. 검경 합동수사와 감사원의 감사, 1심을 마친 재판 결과가 그렇다. 그래서 '지배자'라 부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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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문화예술인행동 '세월호, 연장전(延長戰)'이 11월 15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문화예술인대책모임, 세월호참사국민대책위, 세월호희생자·실종자·생존자가족대책위 공동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세월호 침몰로 희생된 이들의 죽음을, 인권이 침해된 사건으로(도) 기억해야 한다. 국가가 생명에 대한 권리를 박탈한 사건으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분명히 선언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침해라는 말이 낯설 수도 있다. 구조'하지 않음'과 같은 부작위는 인권침해로 잘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가 물에 빠뜨린 것은 인권침해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지 않은 것은 그냥 '잘못한 일' 정도가 된다. 누구나 생명을 지키고 보살필 권리를 갖는다면, 두 가지는 다르지 않다. 서비스는 제공할 수 있지만 의무를 지고 싶지 않다는 국가가 권리를 부정하려 들 뿐이다. 죽인 것과 죽게 내버려둔 것은 다르지 않다. 책임지는 방법은 다를 수 있으나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부작위도 작위들로 이루어진다. 해경이 인명 구조를 위한 훈련과 장비에 예산이든 인력이든 크게 배정하지 않은 것은, 국경의 경비에 훨씬 많은 인력과 예산을 배정하는 의지의 이면이다. 그러면서 지원을 하려는 해군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선박 연령을 규제하지 않고 과적을 단속하지 않은 것은, 기업이 수익을 더 올릴 수 있도록 조력하고 획책한 결과다.

온 국민이 안전한 사회를 바랄 때조차, 안전산업을 육성하고 보험사에서 더욱 많은 안전 상품을 개발하도록 하는 것을 대책으로 내놓는 정부에게, 안전이 권리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생명과 안전은 주는 대로 받거나 돈을 내는 만큼 받는 서비스가 아니라, 우리의 권리다. 의무는 권리에 뒤따르는 것이고, 의무의 내용은 권리주체인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위한 질문... 모욕당해도 되는 죽음은 없다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의 목소리로 밝혀야 한다. 권리를 밝히는 길은 진실을 밝히는 길이기도 하다.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이유는 그저 아직 모르는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와 나의 가족, 우리가 처한 운명을 알기 위해서다. 그리고 책임을 구성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운명을 알 권리조차 협상의 대상인 것처럼 특별법에 딴죽을 걸었던 정부와 여당에게 분명히 말해야 한다.

우리는 결론을 궁금해 하는 추리소설의 독자가 아니다. 무책임한 국가가 소설을 끝내려고 할 때에도 진실을 함께 써갈 작가다. 특별법에 미처 다 담지 못한 우리의 권리가 흩어지기 전에 다시 원칙을 세우고 나아가야 한다.

사람인 까닭에 우리가 느낀 슬픔과 분노에, 사람인 까닭에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밑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인권침해 사건으로 기억하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빼앗긴 권리를 밝혀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9·11테러'가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던 때, 철학자 쥬디스 버틀러는 이런 질문을 제안했다.

"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으로 중요한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적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부인되어야 할 삶은 없다. 모욕당해도 되는 죽음은 없다. 이것이 인권이 기초로 삼은 인간의 존엄을 위한 원칙이다. 여기에서부터 진실을 밝히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권리를 밝혀나가야 한다. 4·16 생명의 존엄과 안전에 관한 인권선언을 제안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이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