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우아함의 결속이 마침내 인류를 구하리

낭만(浪漫)은 글자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현실이 아닌 어딘가를 향해 물처럼 흐르는 감상적인 마음이다. 요즘 떠오르는 ‘신낭만주의’는 어느 그룹의 곡 제목처럼 ‘절대적 존재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흐르는 것은 향수처럼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일상과 취향이 브랜드화 되어 가는 요즘, 낭만은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이나 누리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그 예의 ‘낭만’이 실제의 삶에서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히들 얘기하는 ‘라떼’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설레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낭만은 설레임이다. 설레임은 상상하고, 기대하며, 꿈꾸게 한다. 설레임은 기다릴 수 있을 때 기쁨이 배가 된다. 일상 속에서 설레임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말꼬리를 살리고 말의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자신감이 없거나 마음이 급해지면 말꼬리가 흐려진다. 흐려진 말꼬리는 신뢰감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매력도 설레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대화하는 중에 추임새를 넣는 것, 아~ 아, 네에~, 그렇겠네요오~, 맞아요오~ 한마디를 하더라도 부드럽게 여운을 남기는 것. 이것이 낭만의 시작이고 설레임의 출발이다. 상대방의 말에 대한 기대, 혹은 내 말에 대한 반응에 대한 기대가 서로의 시너지가 되어 자신의 생각과 꿈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준다.
‘부드러움’과 ‘사랑’과 ‘상상’으로 ‘증오’ 이겨낸 살만 루슈디
낭만성은 사소한 호기심과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상상을 하려면 마음의 활력이 있어야 한다. 활력은 다름 아닌 건강한 마음이다. 호흡이 짓눌려서 나오는 것이 한숨인 것처럼, 마음이 짓눌리면 우울해지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어둡고 무거운 마음은 상상하기를 두려워한다. 낭만적인 사람은 사람과 사물을 온 마음으로 대하므로 확고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인도의 작가 살만 루슈디는 작가가 되기 전 유명한 광고 회사의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는데 그 중에서도 부드러움에 대한 예찬을 모든 광고 카피 시리즈에 쓴 것으로 유명하다. 카피의 첫 머리를 ‘부드러운’으로 시작한 것이다. 살만 루슈디는 종교적인 신념을 다룬 역작 <악마의 시>란 소설로 인해 수십 년 간 살해위협을 받고, 급기야 영국의 보호 아래 도피생활을 하다가 야외 강연장에서 극단주의자에게 피습을 당하고, 결국 한쪽 눈을 실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 피습사건을 다룬 회고록 ‘나이프’를 써 내려갔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자 여기서 내가 전하려는 이야기의 본질은 사랑이 증오에 응답하고, 이긴다는 것이다.” (칼은 증오의 은유다)

결국 죽음에 직면하게 된 상황에서도 그는 낭만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상상하고,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는 “피습이 책의 앞장에 엎질러진 커다란 붉은 잉크 얼룩처럼 보기 싫었지만 망가지지는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고 계속 나아가면 되었다”며 작가로서의 의지를 보여준다. 원망과 복수심에 차오를 법도 한 그의 운명을 이끈 것은 ‘부드러움’과 ‘사랑’과 ‘상상’이었다. 신화와 역사를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그린 그의 또 다른 작품 <한밤의 아이들>은 ‘부키 오브 부커스’에 선정되었다. 신화적 상상력. 이것이 살만 루슈디 작품의 뿌리다. 그러나 이 신화적 상상력이 세계적인 작가에게만 요구되는 것일까.
서두를 필요 없어, 우리에겐 여운이 필요해
빠르게 유통되는 정보와 지식을 습득할 틈도 없이 속도전을 치닫는 일상과 AI의 한계 없는 능력을 체감하며 사는 세상에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낭만성이다. 세련된 감각과 취향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에 머지않아 낭만성이 개인적인 능력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우리가 커피를 좋아하는 것은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도 얼마간 남아있는 잔향 때문이다. 커피뿐인가! 말에도 여운이 있고, 음악에도 잔여음이 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여운으로 본다면 여운은 언제나 사물과 장소와 사람이 이어진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친밀감’이다. 그것이 그 자리에 있지 않지만 여운으로 인해 아직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빨라지고, 정보가 포화상태가 되다 보니 모든 것이 축약되고, 리셋된다. 영화를 3분의 1로 줄여서 보여주는 유튜브가 유행이다. 매운 음식이 대세다. 자극적이지 않은 맛은 ‘맛 없음’으로 치부된다. 도파민에 중독된 사람에겐 상상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여운은 지루함의 끝일 뿐이다.
사실 내게는 여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이십여 년 전 파리에서 재즈피아노 수업을 들을 때였다. 교수님은 내게 피아노 한 음을 치게 한 뒤 눈을 감고 공명(resonance)을 느껴보라고 하셨다. 순간 나는 그때까지 피아노를 치면서 한 음을 누르고 나서 진지하게 오래도록 잔여음을 느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가에 내리비친 햇살이 나의 붉어진 얼굴을 가려주길 바랐지만 오히려 나의 당혹감을 직면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교수님은 말을 이었다. “음보다는 잔여음이 더 중요해. 내가 피아노를 어떻게 치고 있는지 바로 알려주니까. 언제든 서두를 필요가 없어.” 이 말은 나에게 화두처럼 다가왔다. 서두르는 습관도 바로 고쳐졌다.
스스로의 장송곡을 여운처럼 연주한 셜리 혼
그리고 얼마 후 손꼽아 기다리던 셜리 혼의 파리 공연을 보게 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재즈연주자이자 재즈보컬인 셜리 혼은 클래식 공부를 기반으로 시작한 풍부한 사운드의 재즈피아노알토의 독보적인 음색으로 1960년대 대중의 인기와 음악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세계적인 재즈뮤지션이다. 평소에도 셜리 혼 음반을 즐겨 들어 이날의 공연은 내게 무척 의미가 있었다.
무대가 열리고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셜리 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젊은 피아니스트가 나와서 인트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느린 템포로. 몇 분이 지나자 무대 뒤에서 셜리 혼이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시는 내 딛을 수 없는 듯이 걸음을 내딛고는 힘겹게 피아노 의자에 앉아 인트로를 이어서 치자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당뇨 합병증으로 움직임조차 힘든 그녀에게 이 콘서트가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연주된 첫 곡은 <what are you doing the rest of your life>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을 향해 낮고, 느리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공연 내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때가 왔음을 알고 스스로를 위해 장송곡을 연주하는 뮤지션. 그로부터 일주일 후, 셜리 혼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내게 들려준 것은 진정한 의미의 여운이였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얘기한 건 아니었을까.

늘 서두르는 것을 경계했는데 요즘은 일상에서의 템포 제어력이 예전 같지 않다. 전에는 급한 마음이 들 때 쉽게 릴렉스가 되고 오히려 느리게 다시 템포를 잡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마음이 급해지면 서두르기 일쑤다. 생각해보니 언젠가부터 내 삶에도 여운이 많이 사라져버렸다. 빠르고 간단한 것, 바로 결과나 반응을 알 수 있는 것에 익숙해진 삶. 이제 다시 비워낼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상상력도 활기를 잃었다. 프루스트가 과제로 삼았던 “삶에서 마주쳤던 사물들에 충실하기”를 삶에 적용할 시간이다. 다행히 연습할 때의 집중력은 그대로다. 비법은 하나다. 매번 연습한 그 음을 처음 부르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그러면 천 번을 노래해도 지루하지 않다.
‘여운’ 속 오순도순 손잡고 있는 부드러움, 배려, 친절함, 다정함
이제까지 작업한 모든 음반의 컨셉이 고시조나 시가 많아서 보컬도 연주자도 적은 음을 가지고 깊은 사운드를 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느리지만 결코 느리지 않고, 공명(여운)이 주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낭만성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음반 프로젝트의 컨셉이다.
부드러움, 배려, 친절함, 다정함은 모두 여운을 지니고 있다. 이 단어들은 따뜻하고 둥글며 또 지속된다. 이 아름다운 연대의 단어들을 영화나 영상이라는 비현실로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각자가 로맨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몸에 힘을 주면 호흡이 짧아지는데 상상은 호흡이 길고 여유 있을 때 발휘된다. 상상은 낭만의 핵심이다. 낭만성을 기르려면 일상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여운을 남기기 위한 습관을 가지는 것도 괜찮다. 조용히 문 닫기, 물 세게 틀지 않기, 지나치게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끊지 않기, 부사를 지나치게 많이 쓰지 않기 (너무 너무, 네네네네 등).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에 관한 최고의 단어는 우아함이다. 낭만과 우아함, 이 부드러운 결속이 마침내 인류를 구원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