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9일 금요일

국정교과서는 친일 교과서다

<기고> 정해랑 21세기민족주의포럼 대표
정해랑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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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09  23: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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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21세기민족주의포럼 대표

국정교과서에서 검인정교과서로 바뀐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한국사 교과서를 다시 국정교과서로 바꾸겠다는 정부의 방침 때문에 역사학계, 교육계 등이 시끌벅적하더니 드디어 정치권에서도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논란에 대해 아마 대다수 국민들은 다소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이기에 이렇게 시끄럽게 만들어야 하는가? 정부 여당은 왜 국정화를 밀어붙이려고 하고,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왜 그토록 반대하고 나서는 것일까?
정부 여당이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려고 하는 이유는, 겉으로 내세우는 것만 보면 여러 가지 견해로 역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 때문이다. 그것이 시험을 보는데도 지장을 준다는 것이 곁들여지는 명분이 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 과목 이외의 어떠한 과목도 검인정교과서로 가르치기 때문에 시험에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그럴 듯하게 만든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한다는 좀 더 솔직한 이유는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가 대부분 좌편향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당 대표는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가 산업화 성공을 노동자 착취라고 가르쳐서 기업가 정신이 거세된 학생들을 만들고, 학생들에게 민중혁명을 가르친다고까지 극언을 하고 있다. 이런 말은 사실과도 맞지 않는 선동이고, 과연 그가 정치인인지조차 의심스럽게 하지만, 여하튼 현재의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가 정부 여당의 말대로 좌편향이라고 해도 그것이 필진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정부 여당과 같은 정당이 집권하던 이명박 정권 시기에 교육부가 제시한 지침에 따라 쓴 것이고, 그것에 대한 검정을 거쳐서 발간된 것이라는 점을 알기만 한다면 이들의 이러한 행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행동들일 뿐이다.
역시 이러한 이해 안 되는 모든 행동의 원인은 바로 최고 권력자의 집념 혹은 집착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이렇듯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분열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원인인 것이다. 말로는 국민을 분열시키지 않고, 좌편향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해 올바른 역사관이 담긴 교과서를 만든다고 하면서 ‘통합 교과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국정교과서로 바꾸는 문제야말로 국민을 분열 속에 몰아넣는 ‘분열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특정인의 개인적 성향이 낳은 결과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저변에 깔려 있는데 지금부터 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것은, 자신들의 역사관 이외의 것은 좌편향이라고 생각하는 획일주의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양한 역사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인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생각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러한 생각으로 이른바 뉴라이트라는 학자들과 손을 잡고 대안교과서라는 것을 만들기도 하였고, 작년에는 교학사 교과서를 통해서 자신들의 생각이 담긴 검인정교과서를 만들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도 저도 안 되니까 그들이 갖고 있는 정치권력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생각만을 담은 획일적인 역사 교과서를 만들고, 다른 생각이 담긴 역사 교과서는 모두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21세기에, 국가가 획일적인 역사 교과서로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발상, 이것이야말로 다양화된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 퇴행적 사고이다. 유신 정권의 부활을 꿈꾸는 박근혜 정권다운 행태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이 이러한 획일적인 역사 교육을 통해서 노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획일적인 역사 교육을 통해서 가르치려고 하는 내용, 그것을 우리는 진짜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한국사를 검인정교과서로 가르친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일이다. 2007년에 개편된 교육 과정에서 결정되었고, 2010년부터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제 국정교과서로 바뀐다면 학생들은 고작 7년 정도 검인정교과서로 배우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한국사 과목은 국정교과서로 가르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서른 살 이상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국정교과서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가 원래부터 국정교과서였던 것은 아니다.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교과서가 된 것은 1974년부터이다. 이때가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자. 유신 헌법이 선포되고,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모든 국민들의 입과 귀를 얼어붙게 하던 때이다. 유신 시대를 순기능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사회에는 물론 있겠지만, 그것이 지금 시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 당시부터 1990년대까지 국정교과서로 한국사(그 당시는 국사)를 배웠던 사람들은 기억을 떠올려 보라. 교과서에서 ‘친일파’를 배운 적이 있는가? 바로 그것이다. 백보 양보해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쿠데타인 5.16을 조국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혁명이라고 하고, 단군 이래 최대의 부패 공화국이었던 5공화국을 정의사회구현을 실현하는 정부라고 한 것은,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이들은 친일파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들이 친일파 그 자체이고, 또 친일파를 계승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또 국민 대다수가 친일파를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파를 가르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국정교과서 발행 주체인 교육부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르쳐야지 비극의 역사를 가르쳐서야 되겠냐고 변명한 적이 있다. 궤변일 뿐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친일파의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수십 년 동안 교과서 이외의 책에서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 바로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생기고부터이다. 7차 교육과정에서부터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생겼는데, 이 과목을 신설한 의도는 현대사 교육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자 국사로부터 분리시켜 내서 선택과목으로 만들려고 하는 꼼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아무튼 그래서 근현대사는 본격적으로 친일파 문제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최초의 과목이 되었다.
그런데 소수에게 선택과목으로만 가르쳐 보겠다고 하던 교육당국의 의도와는 달리 근현대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상당수에 이르렀고, 그 내용의 깊이라든지 범위가 확대되자 수구세력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는 참여 정부 때였는데,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기획기사를 싣고,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발언을 하면서 근현대사 교과서를 공격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특히 금성교과서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은 살벌한 느낌이 들 정도였고, 마침내 정부가 바뀌면서 수정 명령까지 내려졌다.
그리고는 드디어 정권이 바뀌자마자 교육과정을 개편하여 근현대사라는 과목을 없애기에 이른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을 신설하였다. 결국 이들은 한국 현대사에 대해 가르칠 자신도 없고, 이것이 적나라하게 교육되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들과 이들이 계승한 세력이 바로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라는 것이 온 국민에게 교육되는 상황이 오기를 이들은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서 시대의 변화 추세에 따라 국어, 국사, 윤리 등이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국정에서 검인정으로 바뀌고, 근현대사에서 배우던 것이 한국사 과목으로 들어가자 이들은 검인정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트집을 잡아가면서 자기들의 역사관을 담은 검인정교과서를 교학사를 통해 출판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우리가 그토록 언론을 통해 비판하던, 일본의 극우 교과서인 후소샤 역사 교과서와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것은 많은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진 바이다. 그런데 그것이 학교와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자 결국 국정교과서를 만드는 것으로 방침을 정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정부 여당이 만들려고 하는 국정교과서는 한마디로 친일파의 죄악을 은폐하고, 교묘하게 두둔하는 친일 교과서이다. 획일적인 역사관을 강요하는 시대착오적인 교과서이고, 독재를 은폐하고 유신시대를 미화하려는 독재 옹호 교과서인데,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바로 친일 교과서라는 점이다.
여기서 잠깐 ‘친일’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친일’은 그저 단순히 일본이라는 나라와 친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국과 친하거나 중국과 친한 사람들을 친미니 친중이니 하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설사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그 말이 그런 사람들에게 비판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인 것은 아니다. ‘친일’은 역사적인 개념이고, 대중적으로 확실하게 인식된 개념으로서, 그 자체가 ‘반민족’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친일’이라는 것이 ‘친미’, ‘친중’, ‘친영’, ‘친러’ 등과 달리 쓰이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으로 실재했고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는 반민족세력을 가리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이 진부하거나 너무 감정적인 말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 속에 각인된 개념은 어느 학술 이론으로 정립된 개념보다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이 대중 속에 정립되게 된 것은 일본제국주의 및 친일파와 싸워온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 청산을 위해 싸워온 무수한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친일파의 후예들은 이러한 상황을 없애 보려고 친일파 청산을 외치고 실천하는 이들을 독재권력을 통해 억압해 왔다. 결국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독재권력은 친일파의, 친일파를 위한, 친일파에 의한 권력이었던 것이다. 유신 시대에 국사 교과서가 국정교과서가 된 것, 유신으로 회귀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현 정부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만들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독재권력이 민주화투쟁에 의해 약화되면서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전면으로 부각된 것 역시 역사의 필연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역사 교과서의 국정교과서화 문제가 국민 대다수의 먹고 사는 문제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친일파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확실한 사실은 그들이 우리 국민 대다수의 경제적 삶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천문학적인 혈세를 낭비하고, 부자들만 감세를 해주고, 경제를 어렵게 만들면서 아무런 대책이 없는 가운데 검은 돈을 서로 나눠 갖는 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역사관, 국민 대다수의 일자리를 위태롭게 만들면서 아무런 비판도 못하게 만들려는 역사관, 그것이 바로 친일 역사관이고, 그것을 가르쳐서 아무런 비판 의식 없는 ‘신민’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국정교과서로 바꾸겠다는 가장 확실한 저의인 것이다.
사악한 자들은 착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먹고 산다!!!

주체.선군.김일성-김정일주의 국가건설

<특집③> 정책으로 본 조선노동당 70년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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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08  16: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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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 창건 70돌 특집>
북한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이 오는 10일 창건 70주년을 맞는다. 건국보다 창당이 2년이나 앞선 셈이다. 당 우위의 국가인 북한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조선노동당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 할 수 있다.
<통일뉴스>는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이 당이 걸어온 길을 규약과, 인물, 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김정은 시대의 조선노동당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연재 순서>
1. 당 규약으로 본 조선노동당 70년
2. 인물로 본 조선노동당 70년
3. 정책으로 본 조선노동당 70년
4. 김정은 시대의 조선노동당
북한 조선노동당이 10일 창건 70년을 맞는다. 북한은 당 우위 국가라는 점에서 당이 결정한 정책은 국가의 방향을 좌우한다.
초기 조선노동당은 당과 국가건설이라는 목표가 최우선이었기에 정책도 일제잔재 청산와 함께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틀을 잡는데 집중됐다. 그리고 오랜 고립과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을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사회주의권 몰락과 냉전체제 해체는 북한의 대남정책에 영향을 줬고, 이는 대외정책과도 맞물려 당의 정책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당 규약에 맞춰 주체사상과 선군사상,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심화시키기 위한 사회 내부정책도 변화됐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시대의 조선노동당 정책 70년 역사를 경제, 대남, 대외 분야별로 살펴보자.

경제정책, 사회주의 국가건설에서 국방.경제병진, 핵.경제 병진으로
  
▲ 1959년 곽흥모 작, '동무는 천리마를 탔는가?' 선전화. '천리마운동'을 강조하는 작품으로 북한식 경제건설을 대표한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1946년 제1차 당 대회는 해방 후 사회주의 국가건설과 일제잔재청산에 방점을 찍었다. 당시 당 대회에서 구체적인 경제정책은 공표되지 않았지만 당 규약에 △민족반역자 및 지주들의 소유토지 몰수 및 무상분배, △공장, 광산, 철도, 운수, 체신기관, 기업소 및 문화기관 국유화, △금융기관 국유화 등이 담겼다.
이에 맞춰 같은 해 '북조선토지개혁에 관한 법령'(3월 5일), '산업.교통.운수.체신.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8월 10일)이 발표됐다.
그리고 1947년 제1차 1개년 인민경제계획을 발표, △기업소 복구조업, △국영상공업 확대, △생산의 급속한 증대와 생활개선 등의 과업을 중심으로 공업총생산 2배, 곡물수확고 30만t 증산을 목표치로 제시했다.
1948년 제2차 당 대회 내용을 보면 제1차 1개년 인민경제계획 시행 결과, 공업총생산에 있어 국영생산 83.2%, 민영생산 16.8%, 광업생산 100%, 국영임업생산 71.6%, 민영임업생산 28.4%의 성과를 달성했고, 곡물수확고는 17만t 증산에 그쳤다.
이를 토대로 제2차 당 대회는 제2차 1개년 인민경제계획을 발표, △공업의 편파성 극복, △생산품의 품질제고 및 원가절하의 과업과 함께, 공업총생산 41% 증가, 곡물수확고 13.5% 증산목표를 제시했다. 결과 공업총생산 260% 증대, 곡물수확고 280만 8천562t 확보를 달성했다.
1956년 제3차 당 대회는 전후복구사업 결과를 토대로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주력했다.
한국전쟁 전 수준으로 경제를 복구한다는 '전후복구 3개년 계획'(1954~1956)은 1953년 대비 국민소득 160%, 공업총생산 2.8배 증가, 1946년 대비 곡물수확고 126%의 결과를 낳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조선노동당은 제1차 5개년 인민경제계획을 발표, △공업화의 기초구축, △의식주문제 기본적 해결의 과제로 국민소득 2.2배, 공업총생산 2.6배, 노동생산 성장률 196%, 곡물수확고 376만t의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중공업를 중심으로 농업과 경공업을 발전시키는 국방-경제 병진노선의 시초가 됐다. 또한, 공업분야를 금속, 기계, 전력, 석탄, 화학, 임업, 경공업, 수산, 운수 및 체신으로 세분화해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1957년부터 5년을 내다본 경제정책은 1958년 제1차 당 대표자회에서 중간점검을 통해 1959년에 종결짓고 1960년을 완충기로 설정됐다. 이는 국민소득 2.2배, 공업총생산 3.5배, 노동생산 성장률 140%, 곡물수확고 380만 3천t의 결과로 목표를 조기달성했기 때문이다.
종파투쟁을 종식하고 '김일성의 당'으로 자리매김한 1961년 제4차 당 대회는 경제에 집중하는 자리였다. 북한은 1961년을 사회주의공업화가 14년만에 실현된 해라고 강조한다.
△중공업 발전, △경공업.농업의 동시발전, △전국적 기술혁신, △국방.경제병진이라는 과업을 제시한 '제1차 7개년 인민경제계획'에서 국민소득 2.7배, 공업총생산 3.2배, 곡물수확고 6백~7백t 확보의 목표가 설정됐다.
특히, 북한의 대표적인 경제건설운동인 '천리마 운동'이 보다 강조됐다. '천리마 운동'은 1956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계기로 일어났는데, 제4차 당 대회에서 '천리마 작업반 운동'으로으로 제안, 경제분야에서의 사회주의적 경제운동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쿠바사태, 중.소분쟁 등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변화가 일고 북한의 경제건설에도 영향을 받자 1966년 제2차 당 대표자회에서 기존 계획을 3년 연장하는 조치를 내렸다. 연장결과 공업총생산 3.3배, 노동생산 성장률 147.5%의 성과를 얻었지만 국민소득과 곡물수확고 결과는 발표되지 않았다.
1970년 제5차 당 대회는 10년의 7개년 계획을 마무리하고 제1차 6개년 인민경제계획을 준비하는 자리였다. 특히, 기존 경제항목을 중공업, 경공업, 수산업, 공업제품의 질 고양, 농촌경리, 운수 및 체신, 건설, 교육 및 문화, 과학, 인민생활, 국방건설로 세분화했다.
여기서 국방건설이 추가된 부분이 눈길을 끄는데, 군수공업을 통해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강화하고 이는 김정은 시대 '핵.경제 병진노선'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6개년 인민경제계획'은 △사회주의 물적.기술적 토대 견고화, △산업설비 근대화, △기술혁명 촉진, △노동자들의 힘든 노동에서 해방이라는 과업으로 국민소득 1.8배, 공업총생산 2.2배, 곡물수확고 700~750만t 목표를 설정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제1위원장이 북한의 대표적인 기업소인 2.8비날론연합기업소를 함께 찾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김정일 후계구도를 선언하고 주체사상을 심화발전시킨 1980년 제6차 당 대회는 '사회주의 경제건설 10대 전망목표'로 시설 확대나 증강없이 기존시설을 이용하는 지난 경제계획이 아닌 대규모 경제투자를 선언한 자리가 됐다.
이는 197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6기 1차회의에서 채택된 제2차 7개년 인민경제계획을 중간점검하면서, 경제발전을 일부 조정하고 전기, 석탄, 강철, 금속, 시멘트, 화학비료, 천, 수산물, 곡물, 간석지 개간 등에 주력하기로 한다.
1984년 마무리된 제2차 7개년 인민경제계획 결과 공업총생산 2.2배, 전력생산 성장률 168%, 철강생산 생산률 185%, 공작기계생산 성장률 167%, 곡물수확고 1천만t, 시멘트.합성수지.직물생산 목표달성의 성과를 거뒀다.
1994년 김일성 사후 김정일 시대 조선노동당은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했고, 공식적인 당 행사가 한 차례 열렸을 뿐으로, 경제정책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이나 내각 결정을 통해 발표됐다.
김일성 시대 마지막으로 열린 1993년 당 중앙위원회 제6기 21차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및 외국인 투자법 등이 포함된 '3대 제일주의 혁명적 경제전략'을 중심으로 2002년 '7.1경제관리개서조치', 2001년 경제관리제도 개선지침, 2009년 화폐개혁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선군경제 건설노선의 길을 걸으며 국방공업을 우선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본격적인 김정은 시대를 맞이한 조선노동당은 2012년 제4차 당 대표자회, 2013년 3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핵.경제 병진노선'을 채택했다.
북한은 이를 두고 "선대 원수님들의 병진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심화발전시킨 노선"이라며 핵 무력 강화가 혁명발전의 합법칙적 요구이고 경제 건설도 동시에 병행해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경주한다.
또한, 2013년 5월 경제개발구법을 제정한데 이어 중앙급 경제개발구(특구) 7개와 지방급 경제개발구 17를 잇달아 지정하는 등 해외투자 유치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대남정책, 남조선 해방에서 '우리 민족끼리'로
  
▲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전, 박정희 대통령과 북측 박성철 제2부수상이 청와대에서 만났다.[자료사진 - 통일뉴스]
46년 제1차 당 대회는 당.국가건설이 최우선 과제였다는 점에서 뚜렷한 대남정책이 발표되지 않았다. 그러다 48년 제2차 당 대회를 통해 유엔 감시하 총선거 반대와 미.소 양군 동시철수를 논의하면서 △남북조선 대표자 연석회의 소집, △민족통일전선 지지 등이 발표됐다.
하지만 구체적인 대남정책이 발표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열린 56년 제3차 당 대회부터이다. 당시 당 규약에서 외곽단체 부분이 신설되면서 대남정책과 관련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48년 남북연석회의를 지지했다.
'반당 종파분자' 척결이 중심이던 58년 제1차 당 대표자회를 거쳐 '김일성의 당'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61년 제4차 당 대회는 남한의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 정세를 반영해 '미국에 의한 남한의 경제적 착취와 퇴보 및 인권유린'을 이유로 남조선 해방이 대남정책의 뼈대를 이뤘다.
또한, '어떠한 외세의 간섭도 없이 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한 전 조선 자유선거를 통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외세배제 통일원칙이 천명됐다.
그리고 66년 제2차 당 대표자회에서 남조선 혁명역량 강화와 미 제국주의 세력 축출이라는 대남원칙을 재확인했다.
70년 11월 제5차 당 대회는 남한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를 차지했지만 80년 제6차 당 대회는 1974년 7.4공동성명 채택과 1970년에 발표된 조국통일 기본강령인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을 강조했다.
이를 기반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과 '10대 시정방침'을 통일정책으로 수립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은 남북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연방제 형태로 통일하고 비동맹중립노선을 대외정책으로 표방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10대 시정방침'은 고려연방공화국이 실현되었을 때 시행한다는 내용으로 △자주성 견지, △민주주의 실시, △민족경제 자립적 발전 보장,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 △평화애호적인 대외정책 실시 등을 담고 있다.
이후 남북의 국력이 역전되면서 공세적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은 수세적인 연방제안으로 내용적 변화를 겪었으며,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 당시 4.2공동선언에서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합의됐고,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문구가 등장했다.
이어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6.15남북공동선언이 채택돼 '우리 민족끼리' 정신을 토대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결과 채택된 10.4선언은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구축 등에 합의하고 서해평화협력지대 등 구체적인 경제협력사업들도 명기됐다. 그러나 남측의 정권교체 등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대외정책, 사회주의 국가 연대이후 북핵을 둘러싼 대미정책으로
  
▲ 2000년 10월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가 군복차림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다. 이를 통해 '북미 공동코뮈니케'가 발표됐다.[자료사진 - 통일뉴스]
46년 제1차 당 대회는 당.국가 건설상황을 반영해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사회주의 국가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당 규약에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투쟁하는 인방과 평화를 애호하는 각 국가 각 민족들과 튼튼한 친선을 도모한다"고 명시했다.
48년 제2차 당 대회에서는 2차 대전 이후 국제정세와 한반도 상황 인식을 반영해 소련군 진주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소련을 지지하는 입장이 나왔다.
56년 제3차 당 대회는 소련 후르시쵸프의 스탈린 비판연설을 언급하고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와 제국주의자들의 경쟁구도에서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61년 제4차 당 대회는 중.소 갈등의 국제사회 변화에 따라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주체성을 확립하려고 꾀했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등의 사회주의 운동과 친선을 강조하고 일본과 미국을 제국주의로 비판하는 대외정책을 선언했다.
70년 제5차 당 대회, 80년 제6차 당대회에서는 공산주의와 연대를 강조했다.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 90년대부터는 북핵문제가 대두돼 1994년 북미 제네바기본합의에 이어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 2005년 6자회담 9.19공동성명이 채택됐으며, 미국과의 관계정상화가 대외정책의 기본축을 이뤘다.
2010년 제3차 당 대표자회, 2012년 제4차 당 대표자회에서는 당 차원에서 외교정책이 발표되는 대신, 외무성을 중심으로 북핵과 관련해 대미정책에 치중했고, 2013년 3월 31일 23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분명히했다.
한편, G2로 부상한 중국과의 관계가 새로운 중요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북한은 대중국 정책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전통적인 '당 대 당' 외교 방식을 선호하고 '자주성'에 방점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