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북, 각종 수소탄 이미 미사일에 장착 주장

북, 각종 수소탄 이미 미사일에 장착 주장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3/06 [09: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조선이 시험 발사한 신형 대구경 방사포는 파편 지뢰탄, 지하 침투탄, 산포탄에 의한 여러 가지 사격 방식의 무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로켓 발사 후폭풍만 봐도 이 대구경 방사포가 얼마나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위력적인 로켓포인지 한 눈에 알린다.     ©이정섭 기자

▲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와 대담을 나누고 있는 북 정기풍 교수     © 자주시보

북이 1월 6일 수소탄 시험을 전격 단행하여 성공했다고 발표하고 2월 7일 광명성-4호 위성까지 발사하자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대북제재움직임이 강화되고 이에 강력하게 북이 반발하는 등 한반도 정세가 긴장국면으로 접어들자 북 현지취재의 길에 나선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가 최근 페이스북에 올린 북 김철주 사범대 정기풍 교수 대담 기사에서 정 교수는 인민군 장령의 말을 인용하여  "북이 이미 소형화, 표준화, 규격화된 탄도로케트장착용 수소탄까지 완전무결하게 완성되여 장비되여있으며 다종의 핵탄들을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제한없이 운반할수 있는 최첨단타격수단들이 그쯘히(거뜬히) 장비되여있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면서 "털어놓고 말해서 수소탄을 보유한 우리의 코앞에서 미군과 남조선군이 파철더미같은 미국제 무기들을 끌어다놓고 우리를 반대하는 전쟁연습이라는것을 벌려대고있는것을 보면 가소로움을 금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최근 북 국방위원회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인민군대에 300mm 대구경 방사포 시험발사 현지지도 당시 언제든 핵무기를 쏴버릴 수 있게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북의 보도가 나왔는데 그 핵무기가 바로 각종 미사일에 장착된 수소탄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같은 북의 보도에 대해 미국에서는 북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실전배치했다는 어떤 증거도 아직 보여준 것이 없다며 빈말일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정기풍 교수는 대담에서 핵무기도 계속 개발 강화하면서 경제발전도 동시에 추진하는 핵-경제 병진 노선을 추진하는 의도도 밝혔다.

그는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시킬데 대한 우리 당의 노선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물려주신 핵무력을 강화발전시켜 나라의 방위력을 철벽으로 다지면서 경제건설에 더 큰 힘을 넣어 우리 인민들이 사회주의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는 강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략적 노선입니다.》라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3월전원회의 연설 내용을 언급하면서 병진 노선의 첫번째 의도는 "미제와 추종세력의 핵위협을 핵으로 맞받아 쳐갈기고 우리의 사회주의제도를 수호하자는것"이며, 다음으로는 "미제와 추종세력의 제재, 봉쇄도 핵위력으로 짓부시고 강성대국건설위업을 완성하자는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정 교수는 "다시말하면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의 핵위협과 무분별한 침략책동을 꺽어버릴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핵무력으로 조국의 안전을 확고히 지키자는것이며 핵무력을 담보로, 기초로하여 경제건설의 평화적환경을 마련하고 과학기술발전, 동력, 자금조성, 투자확대 등의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경제강국건설을 다그치자는것이다."고 언급하였다.

결국 강력한 핵무력으로 경제건설의 평화적 환경을 마련하여 해외투자 등도 적극 유치하여 경제강국건설을 다그치겠다는 것으로 그간 지속적으로 잠수함발사 대륙간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당창건 70돌 기념 열병식의 최첨단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 공개 등 미 본토까지 도달할 수 있는 핵무기 운반 수단을 공개한 것도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미국과 국제사회가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장면, 수소탄이 터지는 장면 등도 공개하지 않아 이를 믿지 않고 있어 지금까지는 북이 완벽한 핵억제력을 구축하여 누구나 투자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만들었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여전히 국제사회에서는 북은 미국에게 아직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어제도 친미국 필리핀에서 유엔대북결의안에 따라 북 선박을 몰수하는 조치까지 취했던 것이다.  

북도 이를 익히 알고 있어 최근 신형 대전미사일과 300미리 대구경 방사포가 목표를 명중시키는 시험발사 장면을 공개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멀지 않아 강력한 위력의 수소탄 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시험도 공개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된다.

실제 정기풍 교수는 "국가과학원의 한 책임일꾼은 우리 과학자, 기술자들은 지리적조건의 제한이 없고 영토만 넓다면 미국땅 전체를 일시에 없애버릴 몇백Kt급, Mt급수소탄까지 연거퍼 터뜨릴 기세에 충만되여있다고 당당히 선언했다."고 언급하여 북이 중국과 같은 거대한 사막이 있다면 수소탄 지상 폭파 시험도 단행할 의지가 있음을 알렸다.

북 내부에서는 영토가 좁아 그런 시험을 할 수는 없겠지만 태평양 공해상 등지에서 사전 공개 후 시험을 단행할 수도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수소탄은 원자폭탄을 기폭장치 즉, 방아쇠로 이용하기 때문에 방사능 오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폭발력에 비해 오염 정도가 매우 약하다. 특히 북은 핵폭탄을 기폭장치로 사용하지 않는 특수한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고 지난 1월 6일 그것을 시험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실제 폭발력을 놓고 보았을 때 핵폭탄을 기폭장치로 사용한 것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약한 폭발력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핵시험임은 지진파 분석을 통해 구분할 수 있어 북이 무슨 핵폭탄인지는 몰라도 소형 핵폭탄을 터트렸다는 점만은 명백하게 확인된 상황이다. 방사능 오염 문제를 없애기 위해 분열핵폭탄을 기폭장치로 사용하지 않고 핵융합만을 이용하는 순융합폭탄을 미국 등에서 개발하고 있는데 아직 실전배치했다는 소식은 없는 상황이다.

북이 그런 종류의 방사능 오염이 없는 수소폭탄을 만들었다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핵무기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된다. 실제 북이 수소탄 핵시험을 단행한 후 유의미한 방사능물질을 어떤 나라도 아직 포집했다고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북에서는 환경적으로 안전한 수소탄 시험이었음이 증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따라서 북이 핵분열탄을 기폭장치로 이용한 구형 수소탄 시험이 아닌 방사능 오염이 없는 신형 수소탄 시험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이는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 지상 시험을 통해 보여줄 때만 완전하게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을 것이다. 정말 방사능 오염문제가 없는 수소탄 개발에 성공한 것이라면 지상 폭발시험도 곧 단행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혈맹국인 중국과 러시아마저 대북제재에 나서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현 상황에서는 지하 수소탄 시험만으로는 경제발전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북이 많은 경제특구를 지정하고 국제사회의 투자를 받기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번 7022유엔대북제재결의안으로 해서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견된다. 이는 정기풍 교수가 밝힌 환경조성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대북투자가들의 안전을 확고하게 담보할 수 있는 힘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조치가 이후 북에서 연이어 단행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국민은 '진짜 변화'를 원한다

필리버스터의 교훈…야권 총선 승리하려면?
[주간 프레시안 뷰] 국민은 '진짜 변화'를 원한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 2016.03.04 17:41:35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정치>)

20대 총선 레이스의 서막을 가장 강력하게 열어젖힌 '필리버스터'가 멈췄습니다. 38명의 야당 국회의원들이 펼친 무려 192시간 25분의 대장정이 막을 내렸습니다. '국회로 온 나꼼수'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 등 20-40을 중심으로 필리버스터는 하나의 현상이었습니다.  

시민들은 야당 국회의원들의 '존재 증명'을 기꺼이 시청하고 퍼날랐습니다. 이 현상은 소셜 미디어의 울타리를 넘어 술집에서도 주요 이슈였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정치사에 이런 강력한 메시지 폭풍이 또 있었을까요?  
테러 방지법을 반대하기 위한 이번 필리버스터 대장정은 단순히 의사진행 방해 발언을 넘어 하나의 운동으로 승화됐습니다. 젊은이들에겐 또 하나의 거대한 정치 페스티벌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한계에 도전하는 정치 스피치 리얼리티 쇼를 관람하면서 '한국의 야당에게도 이런 국회의원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지난 2월23일 오후 7시6분에 시작해 3월2일 오후 7시31분에 종료된 필리버스터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돌연한 직권상정 방침이 빚어낸 우연의 산물이었습니다. 사전에 기획된 퍼포먼스가 아니었던 것이죠. 필리버스터가 국회선진화법의 규칙을 넘어 하나의 현상으로, 새로운 운동으로 발전해 간 것도 그것의 자연발생성,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는 과감한 헌신성, 국민의 기본권 침해 우려가 상당한 테러 방지법 반대라는 정의로운 목적성, 고루한 국회TV를 소셜 미디어로 퍼나르고 참여의 공간을 넓혀낸 강력한 소통성 등이 융합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파장은 강력했습니다. 선두타자 김광진이 안타를 치고 문병호가 번트를 쳤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폭발력을 가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필리버스터 현상으로 만든 것은 은수미였습니다. 10시간 18분 동안 이어진 은수미의 필리버스터에는 테러 방지법을 막아야 한다는 진정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사람들은 그 진정성에 마법처럼 빨려들었습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쓴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모든 사람에게 기적을 부르는 요정이 찾아온다고 했었죠. 그 영감을 받아 외화시키는 것은 행운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요정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지만, 준비된 사람에게만 발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아직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은수미에게 테러방지법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공포였을 겁니다. 그리고 정부여당의 테러방지법은 거의 무제한 개인 사찰이 가능한 법이었구요. 정의화가 직권상정을 결정했을 때 은수미는 선거의 유불리를 떠나 국민의 기본권이 파괴될 수 있는 테러방지법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것은 의원총회에서 '테러방지법을 막을 순 없더라도 국민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리고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는 필리버스터라도 하자'는 의견으로 이어졌고 이종걸 원내대표가 이를 전격 수용하면서 거대한 정치 록페스티벌이 시작된 것입니다.

필리버스터 10시간을 넘긴 은수미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TV나 소셜 미디어 앞에 몰려들었습니다. 은수미는 가누기조차 힘든 몸을 연단에 기댄 채 마지막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영상 앞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엔 매우 복잡한 의미, 젊은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열정과 오랜 투옥생활, 아주 미흡하다고 느낀 4년 간의 국회의원 생활, 그가 대변하려고 했던 비정규직을 비롯한 '을'들의 고단한 삶, 청년들의 절망, 나아가 혼신을 다해 무제한 토론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 방지법을 막을 수 없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뒤섞여 있었을 겁니다. 발밑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광속으로 오가는 회한과 연민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시민들에게도 전달됐습니다. 은수미의 길고 긴 필리버스터의 흔적인 국회속기록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발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물론 저는 대한민국 국민을 믿습니다. 이 법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또 누군가 고통을 당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덜 고통을 당할 수 있는 방법을, 좀 덜 고통받는 방법을 제발 정부 여당은 좀 찾읍시다. 이것은 저는 사람을 위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정치에는…여당도 야당도 없고, 보수도 진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국민을 위해서 생각하고요." 

지난 2월23일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4일까지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 미디어에서 필리버스터를 언급한 글은 무려 338만8766건이 검색됐습니다. 정말 놀라운 숫자입니다. 이 같은 언급량은 2014년 4월16일부터 열흘 동안의 세월호 언급량 214만5028건을 웃도는 폭발력입니다. 은수미가 활약한 지난 2월24일 하루 언급량만 83만5218건을 기록해 최고점을 찍었습니다. 세월호 일일 최다 언급량을 기록했던 2014년 4월17일엔 33만3312건이었습니다. 인물 연관어 분포에서도 은수미가 압도적 1위를 차지해 가장 강력한 '필리버스타'임을 증명했고 김광진, 박원석, 정청래, 신경민, 박영선, 이종걸, 강기정, 홍종학, 김용익, 이학영, 문병호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24일 은수미 하루 언급량은 50만 건을 돌파해 소셜 빅데이터 관측사상 일일 최다 인물 언급량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기존 기록은 2012년 대통령선거가 임박했던 12월16일의 박근혜 43만 건과 문재인 36만 건을 훨씬 웃도는 수치입니다.

ⓒ유승찬

필리버스터는 정치 의제로는 보기 드물게 긍정어 분포가 부정어 분포를 압도한 것도 특징이었습니다. 긍부정 연관어를 살펴보면 합법적 반대, 응원, 중요하다, 필요하다, 잘하다, 기막힌, 좋은 같은 단어들이 상위권에 대거 포진했습니다. 다소 길게 필리버스터가 어느 정도의 크기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를 몇 가지 데이터를 곁들여 살펴보았습니다. 필리버스터는 한국 정치사에 가장 뜨거운 한순간으로 기록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필리버스터 현상을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돌연 필리버스터 중단을 결정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담대한 마음으로, 테러 방지법을 막겠다는 각오로 필리버스터를 더 진행했다면 판을 완전히 뒤흔들 수 있었는데 말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할 겁니다. 혹자는 앞서 인용한 베버의 열정(필리버스터)을 제어할 균형감각(중단)을 발휘한 것이라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균형감각이 아닙니다. 역풍을 우려했다는 소리도 들리고, 안보 프레임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보수언론의 협박성 프레임 말고는 뚜렷한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중단을 결정한 더민주 지도부의 논리였습니다. 그들은 중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경제 프레임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거에서 역풍이란 이기고 있는 정당이 두려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야권분열 이후 1여다야 구도가 형성됐고 새누리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은 가운데 야당은 판을 흔들 모멘텀을 일부러라도 찾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민주 지도부는 새누리당의 일방독주를 막을 수 있는 기적 같은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은 균형감각이라기보다 두려움의 소산이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정의로운 결정이라기보다 비대위 지도부의 권력체계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19대 국회 들어 거의 처음 주도권을 쥔 더민주가 전투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일부러 내준 기이한 결정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령 김종인 비대위는 문재인 안철수 갈등의 화근이었던 혁신안마저 버리고 당무위 권한까지 위임받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체계를 완성했습니다. 혁신안을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반대여론조차 형성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필리버스터가 권력의 수렴청정 흐름에 원심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늘(4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정례 여론조사는 필리버스터가 더불어민주당의 존재감을 상당히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더민주 지지율이 지난 주 대비 4%포인트 급등한 23%를 기록했고 새누리당 지지율은 4%포인트 급감한 38%를 기록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이어갔다면 이 같은 추세는 더 가파르게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알려지면서 20~40세대와 특히 여성층이 크게 움직였습니다. 20대 지지율은 새누리당의 경우 전주(27%) 대비 10%포인트가 줄어든 17%를 기록했고 더민주는 전주 대비 5%포인트 증가한 31%를 기록했습니다. 30대 지지율도 새누리당은 전주 대비 7%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 국민의당, 정의당은 각각 3%포인트, 4%포인트, 3%포인트 증가했습니다. 40대와 50대 초반에서도 지지율 이동이 감지되는데 특히 40대 새누리당 지지율은 8%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각각 5%포인트씩 상승했습니다. 새누리당 콘크리트 지지율을 보이는 60대 이상에선 의미 있는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경우에도 움직임이 뚜렷했습니다. 새누리당 여성 지지율은 42%에서 37%로 5%포인트 감소했고, 더민주 여성 지지율은 19%에서 26%로 7%포인트나 껑충 뛰었습니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찬반 여론도 반대 39%, 찬성 51%로 나타났고 박근혜 대통령 국정지지도도 30%대로 미끄러졌습니다. 필리버스터가 테러방지법에 대한 국민 여론을 실제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했습니다.  

필리버스터는 테러 방지법의 위험성을 알리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에 대한 우려를 국민적으로 확산시킨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이렇게 강렬한 정치 퍼포먼스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도 더민주 지도부가 '안보 프레임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낡고 단순하며 수세적인 프레임에 갇혀 끓어오르는 대중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입니다.  

물론 선거에서 경제 이슈는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불평등 문제와 청년실업, 경제민주화 등의 이슈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제기된 문제, 즉 국민의 사생활 침해 위험성이 매우 큰 법안을 회피하는 정당이 경제 이슈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테러 방지법은 단지 안보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성들이 여론조사 데이터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핸드폰과 계좌를 뒤질 수 있다는 공포는 상존합니다. 최근 텔레그램으로의 이주 현상이 다시 나타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지는 대중의 관심의 크기에 따라 전파됩니다. 총선을 앞두고 공천을 비롯한 내부 시스템 정비 문제가 시급한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판을 뒤엎을 수도 있었던 거대한 흐름을 역동적으로 껴안지 못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버스터가 불러일으킨 극적 깨달음은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회 안의 필리버스터 정신을 국회 밖에서 창조적으로 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매우 담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대중의 패배주의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새로고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권이 이번 총선에서 집권여당의 공세를 뚫고 승리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강한 열정을 조직하며,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가령 "주 40시간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샌더스의 공감과 "캐나다 국민들이 변화를 원하면, 세상의 모든 자본도 변화를 멈춰세울 수 없다"는 트뤼도의 열정, 연두연설에서 최저시급 '텐텐법안'을 발의한 버락 오바마의 프래그머티즘을 구현할 수 있다면 아직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필리버스터 운동'이 보여줬듯이, 국민들은 '진짜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일도 스물여덟, 영원히 위대한 서정시의 탄생


등록 :2016-03-04 22:10수정 :2016-03-05 16:25
시인 윤동주(1917~1945). 사후에 단 한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윤동주의 시는 내일도 스물여덟살이다. 빼앗긴 시대, 괴로워하던 스물여덟이 괴로우나 괴로운 줄 모르는, 괴롭다고 고백할 수 없는 오늘날에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시인 윤동주(1917~1945). 사후에 단 한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윤동주의 시는 내일도 스물여덟살이다. 빼앗긴 시대, 괴로워하던 스물여덟이 괴로우나 괴로운 줄 모르는, 괴롭다고 고백할 수 없는 오늘날에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특집 / 동주가 돌아왔다
▶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윤동주의 장례가 1945년 3월6일 뒤늦게 치러졌습니다. 올해는 윤동주 서거 71주기입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이 지난 2월24일~3월1일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4위에 올랐고, 시인의 일대기를 그린 저예산 영화 <동주>도 조용한 흥행몰이 중입니다. 몰락한 시대, 끝없이 부끄러워했던 윤동주의 시가 어깨 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의 시가 다시 불어오는 것은 부끄러움을 잊고 사는 탓일까요.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둘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羊)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흰 그림자’, 1942.4.14.-
이름 잃은 사내가 빛 잃은 거리를 서성이다 모퉁이 속으로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바라본다. 사랑하는 그림자를 어둠 속에 소리 없이 보내고 뒷골목을 돌아 찾아온 방. 시들어간 귀를 안고 황혼으로 물드는 작은 방에 앉는다. 양처럼 풀포기를 뜯자. 그제야 소리 없이 중얼거린다. 이름 잃은 사내는 히라누마 도주(25). 시인 윤동주.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역 근처에 자리한 릿쿄대학 영문과 선과(先科) 1학년 윤동주는 1942년 4월14일 일본인들 사이를 서성이다 돌아와 시를 쓴다. 12일 전 입학한 신입생은 어쩐지 괴롭고 그립다.
태극기 날리는 간도 명동소학교
잃어버린 조국 밖의 조국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나라 잃은 설움에도 꿋꿋했다
몽규와 동주는 문학을 사랑했다
열일곱 몽규가 신춘문예 등단
동주는 시에 날짜를 적기 시작했다
몽규는 열여덟에 무장투쟁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동주가 남았다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이 그립다
시 ‘십자가’ 육필 원고.
시 ‘십자가’ 육필 원고.
흐르는 거리
윤동주는 1942년 1월29일 이름을 잃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1월10일 총독부 제령 19호로 ‘창씨개명’을 공포하고 참여가 저조하자 소설가 이광수 등을 동원해 1940년 8월 창씨율을 79.3%로 끌어올린다. 1941년 11월 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에게 제재조치를 공표한다. ‘자녀는 학교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행정기관은 모든 민원 사무 취급을 안 한다.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해 경찰 수첩에 기입해 철저히 사찰한다….’ 윤동주는 1942년 1월29일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에 제출한다.
유학을 결심한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선 일본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창씨개명계를 제출하기 닷새 전 그는 한 편 시를 원고지에 적는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 1942.1.24.-
그가 ‘참회록’을 쓰고 원고지 아랫부분 왼쪽에 끄적거려본다. ‘詩人의 告白’(시인의 고백). 연필이 쉬이 그를 놓지 않는다. 그 아래 적는다. ‘渡航 證明’(도항 증명). 일본으로 떠나는 도항을 증명한다. 시는 길을 일러주지 않는다. 그가 종이 위에 답한다. ‘詩란 不知道’(시란 부지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동주는 1942년 고종사촌 송몽규와 일본행 배를 탔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는다. 교토제대 사학과에 입학한 송몽규, 릿쿄대 영문학과생 윤동주는 미리 유학와 있는 당숙 윤영춘을 만난다. “나는 둘의 손목을 잡고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를 내 집 뜨락처럼 쏘다녔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서 (…) 시와 조선이라는 이름은 말버릇처럼 동주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왔다.”(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나라사랑> 23집 1976년 여름호)
넉넉한 집안의 아들 동주는 대학노트를 끼고 강의실에 들어간다. 어느 밤 바닥에 그려진 낯선 그림자처럼 부끄러움이 그를 길게 따라다닌다. 그런 밤 동주는 잠이 들지 않고 원고지에 자신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밤비가 속살거린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1942.6.3.-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8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원한경이 교장으로 재직하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의 탄압 정책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자유로운 학풍 가운데 공부하고자 했다. 윤동주는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새로운 길’)을 잠시 그려보지만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다시 수난의 시간을 맞는다. 1941년 3월 조선어가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데 이어 이듬해 4월 문학잡지 <문장>과 <인문평론>이 폐간된다. 윤동주가 존경한 한글학자 최현배 교수는 1938년 11월 강제 해직됐다가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된다. 연희전문은 이제 수탈된 조국에서 숨을 트는 호흡기가 아니다. 대학 4학년 가을, 시인은 잃어버린 길 위에 섰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1941.9.31.-
꿈은 깨어지고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윤동주는 중국 만주 간도의 명동마을에서 자랐다. 1917년 12월30일 명동마을에서 태어나 1945년 2월16일 일본에서 옥사하기까지 그는 본토를 떠나 타지로 갔다. 만주 간도에서, 경성으로, 다시 일본으로. 그가 태어나고 자란 명동마을을 고 문익환 목사는 1976년 4월 <월간중앙>에서 이렇게 기억한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안수길의 ‘북간도’를 읽어보면, 한국인들은 북간도에서 중국인들에게 행패를 당해 망국민의 설움을 톡톡이 당한 것처럼 되어 있다. 물론 그런 곳도 적지 않았고 그런 사건도 있었다. 명동만은 그렇지 않았다. 명동에서 이야기된 일이 밖으로 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전 주민이 민족애로 뭉쳐 있었다. (…) 동주와 내가 졸업하던 1931년까지 명동학교는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렀다. 작문시간에는 어떤 제목이 나오든 조선독립으로 결론을 끌고 가지 않으면 제대로 점수를 못 받았을 정도였다. 망국의 울분을 짓씹으면서도 우리는 조국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느낌이었다. 거기는 우리 선조들이 쌓았던 성터가 남아 있었고 땅속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쓰던 활촉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절구 같은 생활도구들이 땅을 가는 보습에 걸려 나왔다. 거기는 남의 나라가 아니었다. 거기만은 조국이 살아 있었다.”
윤동주의 아버지는 중국 베이징에 유학을 다녀온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의 외삼촌은 김약연 목사. 김약연 목사는 1918년 한일병합 이후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 중 한 명이다.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안중근이 명동마을 뒷산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 두 명의 주인공이 출연한다.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와 윤동주. 둘은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학교, 일본 유학,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함께했다. 시인과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달랐지만 그 길 끝은 죽음이었다. 둘은 문학을 사랑했다. 명동소학교 동급생인 시인 김정우의 기억에 따르면 윤동주와 송몽규는 5학년 때 잡지 <새 명동>을 몇 호 발간했다. 몽규는 동주보다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1934년 12월 은진중학교 3학년, 열일곱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으로 당선된 것. 몽규가 당선된 그해 12월24일부터 동주는 시에 날짜를 기록한다. “동주는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지’라는 말을 가끔했다. 몽규를 의식하는 말이었다.”(고 문익환 목사, 1976년 4월 <월간중앙>)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세 사람은 은진중학교에서 한 명의 은사를 만난다. 동경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명희조 선생. 명희조 선생은 유학 시절 일본인에게 돈을 주지 않으려 전차를 타지 않았다. 명희조 선생은 몽규를 눈여겨봤다.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은진중학교는 교실마다 태극기를 걸고 삼일절과 단군 기념일을 지켰다.
“명 선생이 몽규를 중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끝내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 중국으로 갔었는지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몽규는 몹시 고생했고 기어이 은진중학교를 못 마치고 같은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마치고 연전(연희전문)으로 올라온다. 일본 경찰은 동주보다 몽규를 주목하고 있었으리라.”(문익환)
송몽규는 1935년 4월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난징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반으로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김구 선생이 반일 민족독립전쟁에 나서려는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명희조 선생의 소개였다. 몽규는 신춘문예 당선으로 열린 출세의 길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1935년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는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3월에 윤동주는 용정중앙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문익환은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숭실중학교로 먼저 편입했다. 당시 연희전문 같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4년제 중학교를 나오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불리했다. 송몽규는 중국으로 떠났다.”(김응교, <처럼>, 문학동네, 2016)
윤동주는 문익환보다 늦은 1935년 9월 편입시험을 보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민족애국주의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은 침략된 조국의 좌절을 처음 맞닥뜨린다. 당시 기독교는 신사 참배파와 반대파로 갈등을 겪었고 1935년 12월4일 숭실중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해산했다.
“학생들은 모두 와카마쓰 신학교 앞에 모였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다음으로 크고 장엄하게 지었다는 평양신궁은 모란봉 산정 부근에 위치했다. 신궁에 올라가기 위해서 가파른 돌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돌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이미 참배를 마친 다른 학교 학생들이 찡그린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숭실학교는 참배 대열의 맨 꼴찌였다. 계단의 한가운데쯤 올라갔을 때였다. 당시 5학년이었던 학생장 임인식 형이 갑자기 ‘제자리에서’ ‘뒤로돌아’ 고함쳤다. 학생들은 마치 일시에 전류가 통한 듯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그대로 돌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말았다. 그것은 이심전심의 무서운 결속이었다. 이 일로 숭실학교의 조지 S. 매퀸 교장(한국명 윤산온)은 다음해인 1936년 1월20일 파면됐다. 그 며칠 후 2월 초였다. 윤 교장의 파면 소식을 듣고 학생들이 두 명씩 세 명씩 교정에 모여들었다. 새로 학생장이 된 유성복 형의 인솔로 교장을 내놓으라며 데모가 시작됐다. (줄임) 이 일로 인해 숭실학교는 무기 휴교가 되고 나를 포함한 주동 학생들이 피검되었다. 당시 급우였던 애국 시인 윤동주는 광명학교로 옮겨야 했다.”(김두찬, ‘혹독했던 신사참배 강요’, <동아일보> 1982년 8월16일)
열아홉 윤동주는 깊은 겨울밤 불 꺼진 화독을 품에 안았다. 재만 남은 가슴으로, 문풍지 소리에 떠는 가슴으로 시를 쓴다.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드려보오
그래 봐도 후-
가-는 한숨보다 못하오.
-‘가슴 1’, 1936.3.25.-
불 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가슴 3’, 1936.7.24.-
윤동주와 문익환은 1936년 3월 평양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간도의 용정으로 돌아온다. 둘은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된 광명학원 중학부에 입학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학생들이 조선인의 황국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고 문익환 목사는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회고한다. 한달 뒤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지난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된 송몽규는 일본 경찰 블랙리스트에 기록된다. 함경북도의 어느 교도소에 투옥된다. ‘이런 날에는/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부르고 싶다.’(‘이런 날’, 1936.6.10)
자유로운 학풍, 연희전문에 입학
곧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고
암흑의 시기에 오래 침묵한다
시인은 창씨개명계를 내고
‘참회록’ 시로 부끄러워한다
동주는 시집을 출간하려다
원고를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후배는 시집을 어머니에게 부탁하고
땅속 항아리에서 기다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무서운 시간
1938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는 기숙사와 하숙 생활을 번갈아 했는데 1940년 두 학년 아래인 정병욱을 기숙사에서 만난다. 윤동주가 4학년, 정병욱이 2학년으로 진급하던 1941년 봄, 기숙사를 떠나기로 하고 누상동 마루터기에 있는 하숙방을 구했다. 한 달이 지나고 하숙집 사정으로 떠나야 할 신세가 되어 새 하숙을 구하러 길을 나선다.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 전신주에 우연히 ‘하숙 있음’이라는 광고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씨 바로 그분이었다. 1941년 5월 그믐께 우리는 소설가 김송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송씨의 부인 조성녀 여사는 성악가로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우리에게 가끔 들려 주셨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청마루에서 홍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정병욱은 1942년 4월 윤동주가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건네받은 자필 시고를 고향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시집은 1948년 윤동주 사후에 출간된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정병욱은 1942년 4월 윤동주가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건네받은 자필 시고를 고향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시집은 1948년 윤동주 사후에 출간된다.
동주의 시집 제1부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1941년 5월과 6월에 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비록 쓸모는 없어도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이 곁에 있었고 우울한 세태 속에서 환대하는 하숙집 주인 내외분을 만난 기쁨 가운데 시를 쓸 수 있었다. (…) 빈틈없고 알찬 일상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요시찰 인물로 되어 있었던 김송씨가 함흥에서 서울로 옮겨온 지 몇 달이 지난 후인지라 일본의 고등계(지금의 정보과)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숙집 주인이 요시찰 인물인데다가 그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무시로 찾아와서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가고 고리짝을 뒤지고 편지를 빼앗아가는 법석을 떨었다.”(정병욱,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 집문당, 1980)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1941.11.5.-
두 사람은 1941년 가을학기가 시작될 때 소설가 김송씨의 집을 나와 북아현동의 하숙집에 살았다. ‘별 헤는 밤’은 이때 쓰인 시다. 윤동주는 정병욱에게 시를 보였다.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윤동주는 정병욱의 말을 듣고 마지막 네 줄을 썼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현재 시집의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서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더 넣어주는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이 마지막 넉 줄을 덧붙인 것이 과연 이 시를 살렸는지 사족이 되게 하였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려니와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존중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동주의 너그러운 아량에 다시금 머리가 수그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정병욱, 위의 책)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은 자필 시고 3부를 만들었다. 한 부는 이양하 선생에게,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한 부를 본인이 가졌다. 이 시집의 이름은 ‘병원’으로 지으려다 바뀐 것이다.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여서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이양하 선생은 검열에 통과할 수 없다며 출판 보류를 권했다.
윤동주가 194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된 후 반년이 지나 정병욱도 학병으로 끌려갔다.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시집을 맡기며 “나나 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잘 간수”해 달라고 부탁한다. 혹시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면 시집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꼭 알려달라는 유언이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전남 광양시 망덕리 집 마루 아래에 흙을 파내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싼 시집을 묻었다. 땅속에 오래도록 묻힌 시집은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왼쪽 끝)와 고종사촌 송몽규(오른쪽 끝). 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왼쪽 끝)와 고종사촌 송몽규(오른쪽 끝). 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슬픈 족속
윤동주는 릿쿄대학을 자퇴하고 1942년 10월1일 교토의 도시샤대학에 입학한다. 송몽규와 윤동주의 집은 걸어서 4~5분 거리. 1942년 겨울 윤동주를 만난 당숙 윤영춘의 기억이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이 깊도록 시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했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것을 퍽이나 염려했다. 6조 다다미방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새벽 두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 이것이 거의 그날그날의 과제인 모양이다.”(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이듬해 여름 일본 경찰은 두 사람을 체포했다. 체포된 시기는 송몽규 1943년 7월10일, 윤동주 7월14일. 둘을 포함해 같은 공부 모임에 있던 학생 7명이 체포됐다. 죄명은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 체포된 윤동주는 교토경찰서 형사의 지시로 자신의 원고를 일어로 번역했다.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판결은 이러하다.
“소무라 무케이(송몽규)와 소화 18년(1943) 4월 중순경 같은 사람의 하숙집으로부터 교토시 사교쿠 시타시라가와 히가시히라이초 60번지 시미즈 에이치 댁에서 회합을 하고 같은 사람에겐 조선 만주 등에 있는 조선 민족에 대하여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하면서 서로 교환하며 논쟁과 비난을 격렬히 하면서 함께 조선에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서로 비판하며(…) 위 사람과 찬드라 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대해 논의하고….”
윤동주의 독립운동 혐의가 어느 층위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송몽규와 주도한 것인지, 몽규의 모임에 참석만 한 것인지는. 해방을 앞둔 1945년 2월16일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당숙 윤영춘이 형무소를 찾아갔다.
“죽은 동주는 후에 찾기로 하고 산 사람부터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몽규를 먼저 찾았다. (…)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가 흐려졌다. 물론 이때는 우리말로 주고받은 것이다. (…) 일본 청년 간수 하나가 따라와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 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운명했다’며 동정하는 표정을 보였다.”(윤영춘, 위의 책)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3년 64명,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이 옥사했다. 윤동주가 죽은 열흘 뒤인 3월7일 송몽규도 숨졌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일경(일본 경찰)은 이 남의 나라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거지? 이렇게 물었을 테고 동주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고 죽은 것이 아닐까? ‘너는 유태인의 왕이냐?’ 하고 묻는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맞다’고 하고 십자가를 진 예수의 모습이다. 빌라도가 예수의 대답에 담긴 깊은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듯 일경도 동주의 말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동주가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했을 때 그는 일차원적인 고향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고 문익환 목사)
윤동주의 장례는 1945년 3월6일에 치러진다. 윤동주는 가장 몰락한 시대에 서정시를 썼다. “서정시는 가장 외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시인 윤동주의 죄는 끝없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서시’)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기사는 <처럼>(김응교, 문학동네, 2016),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정병욱, 집문당, 1980), <월간중앙>(1976년 4월호)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소제목은 윤동주의 시 제목을 차용하였습니다.

시민평화대회 “한반도 긴장 고조 전쟁 연습 안돼”

장대 빗 속 “한미 전쟁연습 중단” 함성
시민평화대회 “한반도 긴장 고조 전쟁 연습 안돼”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6/03/05 [23: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시민사회평화연대가 장대 빗 속에서도 한미 전쟁 연습을 중단하라는 집회를 열었다.     ©이정섭 기자


장대비가 쏟아지는 속에 시민 사회단체들이 한.미 양국이 진행 예정인 한미연합 키리졸브 전쟁연습과 독수리훈련, 쌍용훈련이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 시킬 수 있다며 훈련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시민사회평화연대회의는 5일 오후 3시 서울역에서 집회를 열고 오는 7일부터 4월 30일까지 두 달 가량 사상 최대의 규모, 최대의 핵전력이 배치되는 이번 훈련은 ‘평양진격훈련’. ‘김정은(김정은 제1위원장) 참수작전’등이 진행되는 등, 호전성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며 이로 인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더욱 고조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단체들은 “존 C 스테니스 항모전단과 로널드 레이건호 항모전단 예하 일부 선단 및 병력이 참여한다.”면서 “미국이 핵 항모 전단을 2개나 운용하는 가운데 예년보다 5천700여 명이 증원된 미군병력, 전투기 45대 추가 투입, 스텔스 전투함을 이끌고 한미 해병대 훈련에 참가하는 미 본토 해병대 등 역대 최대의 규모의 전력이 한반도에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 집회 참가자들은 이번 훈련은 방어훈련이라는 허울 바져 벗어 던진 전쟁연습으로 한반도 전쟁 위기를 고조 시킨다며 전쟁연습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그러면서 “훈련의 내용으로는 선제공격의 성격이 전면 강화된 작전계획 5015를 기반으로, 미군 최강의 특수부대라고 불리는 네이비 실과 델타포스를 참가시켜 ‘평양진격훈련’. ‘김정은(김정은 제1위원장) 참수작전’훈련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은 또, 한미연합 상륙훈련에서 중형 항모급 기동상륙지원선(MLP·Mobile Landing Platform)을 동원하여 수십 척의 상륙함을 동원하지 않고도 최단시간에 대규모 상륙작전이 가능한 차세대 상륙작전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진행하겠다.”고 밝힌 사실을 전했다.

단체들은 “이는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표방했던 방어훈련'의 허울조차 던져버린 극단적이고 도발적인 무력시위”라고 규탄했다.

또한 북이 지난 23일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성명을  통해 “한미 군 당국의 특수작전무력과 작전장비들이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보이는 경우 그를 사전에 철저히 제압하기 위한 선제적인 정의의 작전수행에 진입할 것”이라며, 키리졸브와 독수리훈련을 북에 대한 적대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직접 사전에 제압하겠다고 밝힌 사실을 상기했다.

이어 지난 3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이른바 참수작전과 체제붕괴와 같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마지막 도박에 매달리고 있어 현 정세가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는 험악한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이제는 적들에 대한 우리의 군사적 대응방식을 선제공격적인 방식으로 모두 전환시킬 것"이라 경고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일촉즉발의 충돌위기가 심각한 전쟁의 참화로 비화될 수 있는 심각한 국면”이라면서 “이런 국면 속에 박근혜 정부의 ‘북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에 기반한 대북적대정책, 제출 11년 만에 국회에서 통과 된 북인권법 사례에서 보여지는 야당의 태도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는 방향이 아닌, 한층 더 악화시키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전쟁이 아닌 평화를 요구하는 정치권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다.”고 현 정부와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했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벌이는 위험천만한 전쟁훈련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국민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집회참가자들은 ‘전쟁연습 중단!’, ‘평화가 민생이다’, ‘평화정책 실패, 박근혜정부규탄’, ‘평화협정체결’등의 구호 현수막을 펼치며 빗속 시위를 이어갔다.

한편 시민사회평화연대는 오는 12일 진행되는 호전적인 상륙훈련에 대응하여, 전쟁연습중단과 평화를 요구하는 평화버스가 훈련예정지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개성공단 폐쇄.남북관계 파탄, 홍용표 통일부장관 사퇴하라!"

민권연대 통일부앞서 기자회견, '통일부 존재가치 의문' (전문)
백남주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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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05  15: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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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권연대는 4일 통일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홍용표 통일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백남주 통신원]
3월 7일,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을 앞두고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는 4일 오전 11시 통일부가 있는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홍용표 통일부 장관 사퇴를 촉구했다.
민권연대는 한반도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는 위기관리 능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현재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전쟁위기는 더욱 고조되었으며, ‘한반도 리스크’가 증가하고 증시가 불안정해지는 등 국내경제도 타격을 입고 있다고 민권연대는 주장했다.
민권연대는 통일부의 존재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마지막까지 남북 간 대화채널을 유지하고 평화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할 통일부가 오히려 남북관계 파탄과 전쟁위기 고조에 앞장서는 행동들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최근 미국과 중국 등이 UN제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한과의 대화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지만 남북 간 모든 대화채널을 막아 버린 통일부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민권연대 원로들도 직접 행동에 나섰다. 왼쪽부터 윤한탁 민권연대 명예의장,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 홍갑표 민권연대 고문. [사진 - 통일뉴스 백남주 통신원]
특히 얼마 전 명확한 근거 제시 없이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핵과 로켓 개발에 유용되었다는 주장을 펴며 개성공단 폐쇄에 일조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홍용표 통일부 장관에 대해서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일부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해 책임을 져야하며, 개성공단 가동 중단 결정 과정에서 보여준 홍 장관의 말 바꾸기로 인해 이미 홍 장관의 신뢰는 바닥을 쳤다는 것이 민권연대의 주장이다. 그런 인사에게 민족의 대업인 통일사업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3월, 한반도 전쟁위기는 최고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3월 박근혜 정부가, 특히 통일부가 어떤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기자회견문 (전문)>
개성공단 폐쇄, 남북관계 파탄. 홍용표 통일부장관 사퇴하라!
오는 3월 7일 키리졸브-독수리 훈련이 시작된다.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될 예정인 이번 훈련에 전략핵무기를 비롯해 최첨단 군사장비들이 동원된다고 한다. 특히 선제공격에 이어 북한 지도부를 제거한다고 하는 작전계획 5015, 일명 '참수작전'을 훈련예정이라 북한이 강력반발하고 있어 전쟁위기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높다.
어떠한 경우라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막아야한다. 한반도 전쟁은 승자없는, 우리 민족의 공멸로 마무리 될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의 유일한 길은 남북간 대화와 협력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남북관계와 한반도 전쟁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특히 통일부는 마지막까지 남북간 대화채널을 유지하고 평화통일의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 통일부는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은커녕 오히려 남북관계 파탄과 전쟁위기 고조에 앞장서는 행동들을 벌이고 있다.
특히 통일부의 수장인 홍용표 장관은 근거도 없이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핵과 로켓개발에 유용되었다는 주장을 펴며 개성공단을 폐쇄하는데 앞장섰다. 개성공단 폐쇄는 북측에 대한 제재효과는 없이 남측 기업들에게만 악영향을 주며, 우리 안보에도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었음에도 홍 장관은 듣지 않았다.
그로인해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전쟁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한반도 리스크’가 증가하고 증시가 불안정해지는 등 국내경제도 타격을 입고 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도산위기에 처해있고, 해당기업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되어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 개성공단 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노동자 2000여명 중 80~90%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더구나 정부는 개성공단 입주기업과 노동자들의 보상요구마저 묵살하고 있다. 정부는 각종 대책을 내놓는 것처럼 여론몰이를 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보상은 없다. 관련 기업들은 보상이 어렵다면, 피해구제나 손실보전이라도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정부는 법적 규정이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통일의 징검다리가 되어왔던 관련 기업들의 이익을 옹호해 줘야할 통일부는 실질적인 대책은 없이 생색내기에만 급급하다.
남북간 모든 대화채널을 막아 버린 통일부의 행동은 통일부의 존재가치를 의심스럽게 한다. 해외언론에서는 북한과 미국과의 협상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미국과 중국에서 UN제재의 목적이 북한과의 대화개시를 위한 것이라는 등의 말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그에 대한 아무런 영향력도 없을뿐더러 제대로 된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앞 뒤 가리지 않고 대북압박만을 이야기 할 뿐이다.
통일부가 남북간 마지막 대화통로가 되고 남북관계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함에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이렇게 통일부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고 제 역할을 못하게 만든 책임자인 홍용표 장관은 직접 책임을 져야한다.
특히나 홍용표 장관의 경우 개성공단 자금이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전용됐다며 개성공단 폐쇄에 앞장서다가 ‘확증은 없다’고 말을 바꾸기까지 했다. 야권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도 홍 장관 사퇴의 목소리가 크다. 이미 홍 장관의 신뢰는 땅에 떨어져있다. 이런 인사에게 어떻게 앞으로 통일사업을 신뢰하고 맡길 수 있단 말인가.
허위사실로 개성공단을 폐쇄시키고 남북관계 파탄에 앞장선 홍용표 통일부장관은 사퇴해야 한다.
2016년 3월 4일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