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벽예감284] 미국의 굴복, 50년 만에 재연되는가? | |||||||||||||||||||||||||||
| 기사입력: 2018/01/29 [13:4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
<차례>
1. 50년 뒤 세상에 알려진 놀라운 사실들
2. 지하기지 밖으로 나온 ‘금성’의 원조
3. 지하기지 밖으로 나온 ‘번개’의 원조
4. 1968년 조선이 공개한 최강의 무기
5. 그들의 해석은 빗나갔다
6. 미국이 전쟁연습 중단하고 굴복할 때까지
1. 50년 뒤 세상에 알려진 놀라운 사실들
2018년 1월 22일과 23일 웹싸이트 ‘조선의 오늘’에 ‘텔레비죤기록편집물 - 조선중앙방송은 세상에 전한다’ 제1부와 제2부가 현시되었다. 2017년 여름 조선에서 방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영상물은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68년 1월 23일부터 12월 23일까지 11개월 동안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전해준다. 그것은 조선에서 반미대결전의 첫 승리로 기념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세계정치사에는 푸에블로 위기(Pueblo Crisis)라고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다.
올해 푸에블로 위기 5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과 미국에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각각 공개되었다. 이 글은 최근 공개된 사실들에 기초하여 푸에블로 위기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다.
미국 해군 소속 895톤급 전자정찰선 푸에블로호(USS Pueblo)는 1968년 1월 23일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조선 영해를 8.2km나 침범하여 조선에서 발신되는 각종 무선교신과 전파신호를 포착하는 불법정탐활동을 벌이던 중 현장에 긴급출동한 조선인민군 해군 소속 경비함 1003호와 어뢰정에 나포되었다. 푸에블로호는 당시 미국이 보유한 최첨단 전자정찰선 세 척 가운데 한 척이었다. 조선인민군은 그런 전략정찰자산을 해상나포하여 원산항으로 끌어갔고, 그 전자정찰선에서 근무하는 장교와 사병 82명을 생포하여 평양으로 압송하였다. 원래 푸에블로호 승조원은 모두 8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명은 함선무기고 철문을 열려고 하다가 조선인민군 경비함이 발사한 직격탄을 맞고 즉사하였다. <사진 1>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백악관은 경악실색하였고, 전 세계는 충격으로 들끓었다. 미국은 자기들이 당한 사상 최악의 치욕을 씻어보려고 몸부림치며 보복전을 준비하였다. 당시 미국이 획책하였던 보복전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2018년 1월 20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이 기밀해제된 비밀문서들을 인용하여 보도한 바에 따르면, 1968년 당시 미국 국방부 전쟁기획자들은 보복전 작전계획을 12개나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조선 영해 안으로 미국 해군 군함을 또 다시 진입시켜 조선인민군을 무력충돌로 유인하는 방안, 조선의 군사기지들과 비행장들을 폭격하는 방안, 조선의 주요항만들에 기뢰를 투하하여 해상교통로를 봉쇄하는 방안 등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CNN> 보도에 따르면, 당시 미국 국방부 전쟁기획자들이 꾸며놓은 전쟁도발각본에 따라, 항공모함 3척과 전함 25척으로 편성된 초대형 함대를 동해작전수역에 출동시킨 ‘포메이션 스타 작전(Operation Formation Star)’이 전개되었고, 그와 동시에 각종 전투기 및 폭격기 등 200대 이상으로 편성된 방대한 공습편대들을 주한미공군기지들과 주일미공군기지들에 집결시킨 ‘컴뱃 팍스 작전(Operation Combat Fox)’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미국은 조선이 푸에블로호 선체와 승조원 전원을 석방, 송환하지 않으면 군사보복을 단행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선제타격준비태세를 갖추었다. 1968년 2월 한반도에는 그야말로 일촉즉발 전쟁위험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그처럼 전쟁광기를 부리며 협박과 공갈을 들이대었으나, 조선은 움츠러들거나 놀라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미국에게 ‘3As’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3As’라는 것은 미국이 조선영해침범을 시인하고(admit), 조선에게 공식 사죄하며(apologize), 재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라(assure)는 뜻이다.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미국은 동해에 집결시킨 항공모함 3척 가운데 세계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함(USS Enterprise)을 주축으로 편성된 항모타격단을 원산항에서 불과 24km 떨어진 인접수역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국제법적으로 영해선은 해안선으로부터 22.2km 떨어진 해상에 그어졌으므로, 엔터프라이즈함 항모타격단은 조선 영해선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해안에서 100m 고도에 올라서면 36km 밖 해상까지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으므로, 당시 원산 시민들이 언덕에 올라서면 엔터프라이즈함 항모타격단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1968년 당시 조선에는 핵무기가 한 발도 없었고, 미국은 1958년 1월 29일 주한미국군기지에 핵무기를 반입하였다고 발표한 이후 푸에블로 위기가 발생한 1968년까지 10년 동안 수많은 핵무기들을 주한미국군기지에 반입, 배치하였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핵무기정보분석가 핸스 크리스텐슨(Hans M. Kristensen)이 2005년 9월 28일에 발표한 논문 ‘남코리아에서 전개된 미국 핵무기 역사’에 따르면, 1960년대 말 미국은 8종의 전술핵무기를 약 950발이나 주한미국군기지에 집중배치해두었다고 한다. 그 전술핵무기들은 전략핵무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폭발위력이 발생하도록 설계되었으므로, 선제핵타격에 사용될 실전무기들이었다.
1968년 2월 세계는 매우 불안한 시선으로 조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핵무기가 한 발도 없는 조선이 전술핵무기 950발을 한반도에 집중배치한 미국의 핵공격을 받으면, 다시 일어서기 힘든 핵참화를 입게 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국제사회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미국의 가공할 핵공격위험 앞에서 조선의 운명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이 엔터프라이즈함 항모타격단을 원산항 코앞으로 들이밀면서 엄청난 핵공격위협을 가하였던 그 날은 조선에서 건군절 20주년을 맞은 1968년 2월 8일이었다. 미국은 일부러 조선의 건군절에 맞춰 핵공격위협을 시작했던 것이다. <사진 2>
그런데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전 세계가 핵공격위협에 직면한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던 바로 그 시각, 평양의 풍치수려한 대동강변에서 조선인민군 장병들의 우렁찬 박수갈채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창건 2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경축연회가 옥류관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원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미국의 핵공격위협과 평양 옥류관에서 벌어진 조선의 건군절 경축연회, 그것은 세상을 놀라게 한 극적이고, 경이로운 대조였으며, 1968년 1월부터 11개월 동안 지속된 치열한 조미대결전에서 결국 누가 승리할 것이고, 누가 패배할 것인지를 예고해준 전조였다.
김일성 주석은 1968년 2월 8일 옥류관에서 진행된 건군절 20주년 기념 경축연회에서 연설하였다. 푸에블로 위기와 더불어 세계정치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인 연설이다.
“우리 인민과 인민군대는 미제국주의자들의 <보복>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세를 격화시키며 끝끝내 전쟁의 길로 나간다면 이번에는 그들이 더 큰 참패를 당하리라는 것을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세계가 모르고 있었다. 조선이 푸에블로호 나포보다 더 큰 참패를 미국에게 안겨줄 것이라는 김일성 주석의 경고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세계는 미처 알지 못했다. 아마도 전쟁이 닥쳐온 대결국면에서 의례히 나오는 통상적인 경고발언으로 여겼을 것이다.
김일성 주석이 조선인민군 건군절 20주년 경축연설에서 미국에게 보낸 경고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었는지는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세상에 알려졌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중앙텔레비죤 기록편집물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건군절 경축연회를 마친 뒤 조선인민군 고위급 지휘관들에게 “미국놈들이 푸에블로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떠드는데, 비밀에 붙여오던 지상대해상로케트와 지상대공중로케트를 공개하여 우리의 보복선언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어 원쑤들을 전율케 하시오. 저들만 로케트가 있는 줄 알고 우쭐대는 저 미국놈들의 눈알이 뒤집히게 어디 한 번 로케트를 보란 듯이 공개하시오”라고 명령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 조선의 군사력에 대한 외부세계의 몰이해와 편견을 무너뜨리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은 1968년 이전에 벌써 지대함미사일과 지대공미사일을 실전배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지하기지 밖으로 나온 ‘금성’의 원조
“미국놈들의 눈알이 뒤집히게 공개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명령에 따라 지하기지 차폐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지대함미사일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조선이 소련에서 도입하여 실전배치한 P-15 터밋(Termit) 대함미사일이었다. 무게가 454kg에 이르는 고폭탄두를 장착한 이 대함미사일은 해수면 위 25~100m 고도를 마하 0.95의 속도로 순항비행하면서 80km 밖에 있는 적함을 타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대함미사일이었다.
조선이 그런 최첨단 대함미사일을 1960년대에 실전배치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17년 7월 8일 영상자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날 평양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모란봉악단, 청봉악단, 공훈국가합창단, 왕재산예술단이 총출연한, ‘대륙간탄도로케트시험발사 성공기념 음악무용종합공연’이 성대히 진행되었는데, 공연무대 뒤에 설치된 초대형 배경화면에는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를 받으며 전개되어온 미사일개발사 50년을 보여주는 사진영상 190편이 연속 펼쳐졌다. 여기에 실린 <사진 3>은 김일성 주석이 1960년대 후반 어느 날 P-15 터밋 대함미사일을 살펴보는 장면이다.
원래 그 대함미사일은 고속정 또는 3축6륜 차량에서 쏘는 것이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조선인민군 건군절 20주년 경축연회 직후 지상대해상로케트를 공개하라고 명령한 것을 보면 당시 조선에서는 P-15 터밋을 3축6륜 차량에 탑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군이 그런 비장의 무기를 겨누고 있는 줄 모르고 조선을 얕잡아본 미국은 항모타격단을 원산항에서 24km 떨어진 인접수역까지 바짝 들이밀었으니, 사거리가 80km인 대함미사일 사정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다. 1968년 2월 어느 날, 지하기지에서 출동하여 작전구역으로 신속히 이동한 조선인민군 3축6륜 차량들에서 P-15 터밋 대함미사일이 동시에 집중발사되면, 84,000톤급 핵추진 항공모함을 격침시키지는 못해도 항모사령탑과 비행갑판을 파괴하여 완전한 작전불능상태에 빠뜨릴 수 있었다. 각종 레이더들, 무선교신장치들, 항법장치들이 파괴되어 꼼짝하지 못하고, 비행갑판이 파괴되어 함재기들마저 이착륙하지 못하게 된 핵추진 항공모함을 향해 고속으로 돌진하는 조선인민군 어뢰정들이 중어뢰를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집중발사하면 엔터프라이즈함은 나자빠진 공룡처럼 거대한 물거품을 내뿜으며 동해에 가라앉게 될 판이었다.
조선의 50년 미사일개발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조선의 국방과학자들은 P-15 터밋을 바탕으로 개발한 기술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대함미사일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금성-1 대함미사일이다. 지금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금성 계열 대함미사일들 가운데 금성-1밖에 알지 못하지만, 지난 수 십 년 동안 기술혁신에 힘써오는 조선의 국방과학자들은 최근 작전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금성-4를 시험발사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으니, 그 날은 2017년 6월 8일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밑에 조선국방과학원에서 새로 개발한 금성-4 지대함미사일이 성공적으로 시험발사되었던 것이다.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차에서 발사된 최신형 지대함미사일 금성-4는 작전기동력, 타격정밀도, 순항비행능력, 발사조종능력, 사거리연장 등에서 기술혁신을 이룩한 최첨단 지대함미사일이다.
3. 지하기지 밖으로 나온 ‘번개’의 원조
푸에블로 위기가 날로 격화되어 일촉즉발 전쟁위험이 한반도에 몰려들던 1968년 2월 초, 김일성 주석의 명령을 받은 조선인민군은 지대함미사일과 함께 지대공미사일도 공개하였다. “미국놈들의 눈알이 뒤집히게 공개하라”는 김일성 주석의 명령에 따라 지하기지 차폐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지대공미사일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조선이 소련에서 도입하여 실전배치한 2단형 지대공미사일 S-75 드비나(Dvina)였다. 고체연료와 액체연료를 사용하고, 8축16륜 견인차량에 실려 이동하는 S-75 드비나는 사거리 76km, 요격고도 30km, 비행속도 마하 3의 작전성능을 지닌 당시로서는 최첨단 지대공미사일이었다. <사진 4>
위에서 언급한 조선중앙텔레비죤 기록편집물에 따르면, 1968년 2월 10일 한반도 상공 20여 km 고도에서 정찰비행을 하던 미국 중앙정보국 소속 U-2 고고도정찰기는 새벽 4시경 황해북도에서 지대공미사일과 “류사한 것으로 판단되는” 물체를 발견하고 이를 공중촬영하였으며, 그 영상자료를 중앙정보국 본부에 보냈다고 한다. 그들이 작성한 정보문서에는 지대공미사일과 비슷하게 생긴 물체가 나타났다고 기록되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읽어보면, 그 물체는 당시 황해북도 지역에 실전배치된 S-75 드비나 지대공미사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푸에블로 위기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던 1968년 10월 20일, 조선의 국방과학자들은 S-75 드비나를 바탕으로 첫 지대공미사일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바로 번개-1 지대공미사일이다. 오늘날 조선이 독자적으로 생산하는 번개 계열 지대공미사일들의 원조는 1968년 전쟁위기 속에서 태어난 무기인 것이다.
조선은 1987년부터 1988년까지 기간에 4개 대대를 무장시킬 S-200 베가(Vega)를 소련에서 수입하였다. 통상적으로, S-200 베가는 1개 대대에 6발씩 배치되므로, 24발을 수입한 것이다. <사진 5>
조선의 50년 미사일개발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조선의 국방과학자들은 S-200 베가를 바탕으로 개발한 기술을 가지고 독자적인 장거리지대공미사일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번개-4다. 사거리가 300km이고, 마하 4의 속도로 날아가는 번개-4는 B-52, B-1B, B-2 같은 미국 공군 전략폭격기를 전문적으로 요격하는 장거리지대공미사일이다.
번개-4는 2012년 4월 15일 태양절 100주년 경축 열병식 중에 5축10륜 견인차량에 실려 모습을 드러냈다. 번개-4가 세상에 공개된 때는 2012년 4월이었으나, 조선은 이미 1990년대에 번개-4를 350발이나 생산하여 실전배치하였고, 잉여생산분 20발을 미얀마에 수출하였다.
번개-4를 만들어낸 조선의 국방과학자들은 기술혁신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작전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번개-5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는데, 그 날은 2017년 5월 27일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 밑에 조선국방과학원에서 새로 개발된 번개-5 지대공미사일이 성공적으로 시험발사되었던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 날 번개-5 시험발사를 현지지도하면서 “저 무기체계는 개발의 첫 자욱부터 장군님께서 하나하나 품들여 이끌어오시던 유복자무기체계”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번개-5를 완성하기까지 약 10년이 걸렸음을 의미한다.
4. 1968년 조선이 공개한 최강의 무기
1968년 푸에블로 위기 속에서 조선이 미국에게 공포를 안겨준 지대함미사일이나 지대공미사일보다 훨씬 더 위력적인 최강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인민군과 조선인민이 6.25전쟁의 불길 속에서, 그리고 전후복구의 열정 속에서 이룩해놓은 군민단결이라는 최강의 무기였다. 군대와 인민이 단결하여 싸우는 전쟁을 군민총력전이라고 하는데, 조선에는 외부세계에서 알지 못하는 군민총력전 전투역량이 있었다. 물론 그 전투역량은 푸에블로 위기 이후 50년 동안 더욱 강화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무력침공을 당할 위기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민병대가 조직되어 정규군의 익측역량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지난해 미국의 무력침공위협에 맞서 90만 명으로 조직된 베네수엘라 민병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진 6>
하지만 푸에블로 위기가 발생하였던 1968년, 조선의 민간무력은 다른 나라 민병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조선인민은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조선소년단 등에 망라되어 손에 총을 잡았다. 주목되는 것은, 1968년 당시 조선인민 누구에게나 미국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6.25전쟁 중에 부모처자와 형제자매의 목숨을 빼앗아간 ‘철천지 원쑤 미국놈들’과 반드시 싸워 피의 결산을 볼 최후결전을 벼려온 붙같은 복수심이었다. <CNN> 2018년 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1968년 1월 23일 해상에서 나포되어 원산으로 끌려간 푸에블로호 승조원 82명은 그들을 평양으로 압송할 열차에 오르기 위해 원산역으로 가고 있었는데, ‘미국놈들이 붙잡혀왔다’는 소식을 듣고 삽시에 모여든 군중들은 두 눈을 천으로 가린 채 끌려가는 ‘미국놈들’에게 침을 뱉거나 그들을 때리면서 격렬한 반미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조선인민의 대미복수심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말해주는 장면이다. 6.25전쟁 3년 동안 조선의 도시와 마을들, 산업시설과 경작지가 미국의 무차별 폭격만행으로 파괴되었고, 조선인민 292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처절했던 6.25전쟁경험 속에서 솟구쳐 오른 복수심이 조선인민 전체를 거대한 반미결사전으로 이끌어갔다. <사진 7>은 1968년 푸에블로 위기 당시 조선소년단 아이들, 턱수염을 기른 할아버지들, 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들까지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손에 총을 잡고 반미결사전에 용약 떨쳐나섰음을 보여준다. 핵무기로 무장한 미국과 운명을 건 싸움, 준엄한 최후결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1968년, 조선 전역에 구축된 수많은 전투진지들, 생산현장들, 건설장들에서 가장 널리 불린 혁명군가는 1967년에 창작된 노래 ‘수령이시여 명령만 내리시라’였다.
푸에블로 위기가 발생하였던 때로부터 어언 반세기가 지났다. 세월은 그처럼 멀리 흘러갔어도, 대미복수심과 반미결전의지는 조선의 후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로동신문> 2017년 9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7년 9월 21일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라는 특별성명을 발표한 직후 6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남자 348만명, 여자 122만명이 반미결전의지를 안고 입대와 복대를 탄원하였다고 한다. 이들 470만명은 군사복무경험을 가진 제대군인들 또는 평소에 민간무력부대들 소속되어 전투훈련을 받아온 사람들이므로, 전투훈련을 따로 받지 않아도 정규군에 곧바로 편입될 수 있었다.
<연합뉴스> 2017년 5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총병력수는 2017년을 기준으로 128만명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470만명이 편입되면 조선의 정규군은 598만명으로 급격히 증원되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정세를 오판하여 조선에게 선제타격위협을 또 다시 가하는 경우, 조선의 600만 대군은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혁명군가 ‘수령이시여 명령만 내리시라’를 부르며 최후결전으로 달려갈 것이다.
5. 그들의 해석은 빗나갔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미국의 전문가들은 푸에블로 위기 속에서 미국이 왜 조선을 침공하지 못하였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두 가지 해답을 제시하였다. 그들이 내놓은 해답은 1968년 당시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미국에게는 한반도에서 제2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을 침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내놓은 또 다른 해답은 1968년 당시 미국이 조선을 침공하는 경우 소련이 즉각 개입하여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무력개입과 세계대전을 우려한 미국이 조선을 침공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해답들은 한낱 억측이었다. 1968년 당시 미국에게는 한반도와 베트남에서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전쟁수행력이 있었고, 실제로 2개의 전쟁전략을 견지하고 있었다. 미국 국방부가 2개의 전쟁전략을 재고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때는 2009년 3월이었고, 그들이 2개의 전쟁전략을 포기하였다는 사실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때는 2012년 1월이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1968년 당시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미국이 한반도에서 제2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을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해석은 억측이다.
또한 1962년 10월 쿠바미사일위기를 겪으면서 핵전쟁공포에 사로잡힌 소련과 미국은 자기들의 무력충돌로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1964년 10월 소련에서 니끼타 후르쇼브(Nikita S. Khruschev)가 실각한 뒤 집권한 레오니드 브레즈네브(Leonid I. Brezhnev)는 미국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이른바 긴장완화(détente)를 추구하였고, 미국도 그에 적극 화답하였다. 그 무렵 두 핵강국은 제한적 핵시험 금지조약 체결(1963년 8월), 우주조약 체결(1967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 체결(1968년 7월), 전략무기감축협상 시작(1969년 11월) 등 일련의 긴장완화조치를 연속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푸에블로 위기 속에서 미국은 소련의 무력개입과 세계대전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1968년 당시 미국이 조선을 침공하는 경우 소련이 즉각 개입하여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무력개입과 세계대전을 우려한 미국이 조선을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해석은 억측이다.
위에서 자세히 서술한 것처럼, 1968년 당시 미국이 조선을 침공하지 못한 까닭은 조선이 지대함미사일과 지대공미사일 같은 강력한 타격수단들을 갖추어놓고, 군민단결로 반미결사전을 벌일 총력전 준비태세에 돌입하였기 때문이다. <사진 8>
그러나 미국은 조선이 항모타격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강력한 타격수단들과 군민총력전 준비태세를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조선에게 굴복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텼다. 푸에블로 위기 속에서 미국은 제22차부터 제26차까지 비공개로 진행된 판문점 조미군사회담에서 말이 되지 않는 억지를 부리며 계속 버티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조선은 가장 강력한 압박책을 들이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압박책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미국이 조선에게 공식 사죄를 하지 않으면, 생포한 82명 승조원 전원을 간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장교 6명은 총살하고, 나머지 사병 76명은 20년 징역형과 10년 징역형으로 엄벌에 처하겠다고 통보한 것이었다. 억지를 부리며 시간을 질질 끌던 미국은 바로 그 마지막 통보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에게 굴복하였고, 조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반미대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미국은 울릉도 주변해역에 대기시킨 방대한 해군무력을 은밀히 철수하기 시작하더니,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에서 진행된 비공개 군사회담에서 조선이 ‘미제의 항복서’라고 부르는 미국 정부의 공식 사죄문을 조선에게 바쳤던 것이다.
6. 미국이 전쟁연습 중단하고 굴복할 때까지
조선이 1968년 반미대결전에서 승리한 때로부터 어언 50년 세월이 흘렀다. 세대는 바뀌었고, 정세는 변화하였다. 조선이 1968년 반미대결전에서 승리한 때로부터 50년이 지난 2018년 1월 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완성되었음을 공식 선포하였고, 그로써 지난 25년 동안 지속되어온 조미핵대결이 조선의 승리와 미국의 패배로 종식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조선과의 핵대결에서 패색이 짙어진 2017년 11월까지만 해도, 자기들이 패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핵무력 완성을 저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영국 언론매체 <가디언> 2017년 12월 4일 보도에 따르면, 2017년 11월 마지막 주간에 존 볼튼(John R. Bolton)이 영국 런던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볼튼은 부쉬행정부에서 극우파 외교관리로 악명을 떨친 사람이다. 위의 보도에 따르면, 그가 런던을 방문한 목적은 마익 팜페오(Mike R. Pompeo) 중앙정보국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 전역을 타격할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프로그램을 중단시킬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보고하였다는 중요한 정보를 영국의 정관계 인사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볼튼이 그 정보를 갖고 런던에 나타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고도의 핵공격력을 실물로 입증하였다. 2017년 11월 28일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프로그램을 중단시킬 시간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였던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의 정보보고는 엄중한 판단착오였다.
2018년 1월 7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BS> 대담프로그램 ‘페이스 더 네이션(Face the Nation)’에 출연한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은 조선이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언제쯤 갖게 되는가를 물은 대담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 “확실하게 말하지는 못하겠다”고 얼버무렸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팜페오 중앙정보국장은 엄중한 판단착오를 저질렀으므로, 입이 열 개라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이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을 중단시킬 방도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화성-15형의 등장으로 하여 중단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을 비핵화하려던 미국의 전략은 화성-15형 시험발사성공으로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완성된 이후 완전히 파탄되었고, 미국에게 남겨진 선택방안은 조선에게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및 지하핵시험을 동결하라고 요구하는 이른바 핵동결(nuclear freeze)로 좁혀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미국은 조선을 비핵화하기 위해 그 무슨 ‘최대 압력’을 가한다는 큰 소리를 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과의 핵대결에서 패한 자기들의 초라한 몰골을 가려보려는 허장성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미국이 조선의 비핵화를 포기하고 조선에게 핵동결을 요구하려면, ‘키리졸브/독수리’ 전쟁연습부터 중단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아직까지도 그 전쟁연습을 중단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 미국의 태도는 2018년 1월 2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태평양사령부 청사에서 진행된 제임스 매티스(James N. Mattis) 국방장관과 송영무 국방장관의 회담에서 드러났다. <아사히신붕> 2018년 1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매티스-송영무 회담에서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이 끝나는 3월 18일 직후 ‘키리졸브/독수리’ 전쟁연습을 시작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사진 9>
만일 미국이 ‘키리졸브/독수리’ 전쟁연습을 중단하면, 조선에게 굴복한 것으로 되고, 최근 시작된 남북관계개선을 더욱 촉진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백악관은 오는 3월 하순 그 전쟁연습을 강행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이 ‘키리졸브/독수리’ 전쟁연습을 강행하면, 한반도 정세는 또 다시 긴장상태에 빠질 것이며, 남북관계개선도 중지될 것이다. 긴장완화와 남북관계개선을 반대하는 미국은 ‘키리졸브/독수리’ 전쟁연습을 강행하여 정세를 격화시키고 남북관계개선을 가로막으려는 것이다.
1968년 푸에블로 위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미국은 조선과의 대결에서 패하였는데도 승복하지 않고 11개월 동안 시간을 끌면서 버티다가 결국 조선이 생포한 82명 승조원 전원을 간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하여 장교 6명은 총살하고, 나머지 사병 76명은 20년 징역형과 10년 징역형으로 엄벌하겠다고 통보하였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굴복하였다. 조선이 미국을 굴복시키는 방도는 충격과 강압밖에 없었던 것이다. 푸에블로 위기 이후 50년이 지난 오늘도 조선이 미국을 굴복시킬 다른 방도는 없다.
2018년 1월 22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결정서를 발표하였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50주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2월 8일을 조선인민군 창건일로 의의있게 기념할 데 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서다. 결정서는 김일성 주석이 조선인민군을 창건한 1948년 2월 8일을 조선인민군 창건일(2.8절 또는 건군절)로 제정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한 1932년 4월 25일을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로 제정한다고 하였다. 조선인민군 창건일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을 구분한 까닭은, 핵무력을 완성하여 강력한 전략군을 가지고 있는 정규군의 위용을 더욱 과시하려는데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인민군은 2017년 11월 말부터 평양 외곽에 있는 광장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의 위성사진분석가들이 조선의 열병식 준비현장을 촬영한 상업위성사진을 보았더니, 각종 군사장비들을 제외하고 참가인원을 수송하는 버스만 400대나 동원되었다고 한다.
건군절 70주년을 맞이한 조선이 그처럼 엄청난 열병식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는 2월 8일 평양에서 진행될 건군절 70주년 열병식에는 최신형 전략무기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포하였으므로, 건군절 열병식에 최신형 전략무기들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는 2월 8일 조선은 자기의 완성된 국가핵무력을 실물로 전 세계에 과시할 것이다. 이것은 ‘키리졸브/독수리’ 전쟁연습을 강행하여 남북관계개선을 가로막으려는 미국을 정조준한 대응조치로 된다. 조선의 충격과 압박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굴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50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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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8일 일요일
미국의 굴복, 50년 만에 재연되는가?
‘안철수 정계 은퇴’를 권고한다
[김종철 칼럼] ‘KBS 적폐’ 두둔만으로도 지도자 자격 없음 입증해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cckim999@naver.com 2018년 01월 29일 월요일
지난 1월26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발언은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처참하게 무너진 공영방송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1월22일 KBS이사회가 고대영 KBS 사장 해임 제청안을 의결한 데 따라 문재인 대통령이 이튿날 해임 결재를 한 것을 두고 ‘새로운 방송 적폐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내각 구성에 6개월 넘게 걸리고 공기업 경영진 교체 등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무척 기다렸던 듯하다”며 “여권 편향 방송이 차고 넘치는데 공영방송 경영진까지 자기 사람을 심겠다는 것”이라고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안철수의 이런 주장은 사실 왜곡과 자가당착의 표본으로 보인다. 그 까닭을 짚어보자.
안철수는 2013년 11월28일, 새정치추진위원회 출범을 알린 뒤 이듬해 3월 당시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제3지대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같은 달 26일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을 창당하고 1기 공동대표로 취임했다. 그러나 2014년 7월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참패하자 두 사람은 대표직을 사퇴했다. 그 뒤 민주당 대표로 선출된 문재인이 12월 초순 문·안·박(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체제로 지도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으나 안철수는 거부했다. 그는 혁신전당대회를 열자고 문재인에게 역제안을 했다. 문재인이 그것을 거부하자 안철수는 역제안을 거듭한 끝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같은 달 13일 새정연을 탈당한 뒤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안철수는 새정연을 떠난 김한길, 천정배와 함께 2016년 2월2일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맡은 김종인이 국민의당에 통합을 제의하자 안철수는 거절했다. 그러나 국민의당은 4월 총선에서 모든 여론조사가 무색하게 호남을 휩쓸어 38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 지형을 양당체제에서 다당체제로 바꾸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고대영 사장은 지난해 말 해임당한 김장겸 MBC 사장과 함께 공영방송 적폐세력의 ‘대표’로서, 사내에서는 부당노동행위를 일삼고, 매체를 통해서는 청와대나 국가정보원의 블랙리스트와 ‘지침’에 따라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피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정부기관들이 저지른 ‘댓글사건’ 등에 관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보도를 기피함으로써 국민의 공공재인 전파를 사유물처럼 악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KBS 본부(새노조)와 MBC 본부의 언론노동자들은 사장과 이사장을 퇴진시키기 위해 지난해 9월4일부터 기나긴 파업을 벌였다. MBC가 72일, KBS는 무려 142일이었다. 안철수는 KBS의 파업이 승리로 끝난 지 나흘 뒤에 위와 같은 주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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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9월1일 열린 방송의날 축하연 당시 고대영 KBS 사장(왼쪽)과 김장겸 전 MBC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
안철수는 지난해 8월31일, KBS 1TV ‘뉴스집중’에 출연하러 서울 여의도 사옥에 간 자리에서 성재호 새노조 본부장이 “이번 주부터 KBS 본부 노동자들이 제작 거부하는 거 아시죠? 다음 주에는 총파업을 합니다”라고 말하자 “알고 있습니다. 잘 살펴보고 국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잘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많은 언론매체가 안철수의 ‘총파업 지지 의사’를 보도했다. 같은 해 11월 안철수는 국회의장, 국무총리 등과 함께 포항 지진 피해 모금을 위해 특별 편성된 KBS 프로그램에 나와 성금을 전달했다. “재난 피해 모금 방송은 고대영 없는 KBS에서” 등 피켓을 든 새노조 조합원들이 안철수에게 “우리는 지금 파업 중”이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그는 KBS 파업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방송 적폐’의 시작이라며 오히려 고대영 해임을 재가한 문재인에게 화살을 날렸다. 게다가 그는 “여권 편향 방송이 차고 넘친다”는 극단적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말 김장겸 MBC 사장과 그리고 올해 들어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해임당한 뒤 정상화의 길로 접어든 MBC, 근자에 사내 혁신에 부분적으로 성공한 SBS, 종합편성방송인 JTBC, TV조선, 채널A, MBN 등 가운데 어느 곳이 ‘여권 편향 방송’이라는 말인가? 안철수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어디가 비교적 공정한 방송이고 어디가 상대적으로 불공정한 방송인지를 구체적으로 예시했어야 한다. 그는 최근 퇴출당한 ‘KBS의 적폐사장’을 두둔한 것만으로도 정치지도자의 자질이 없음을 입증했다.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동안 갈수록 심해진 공영방송의 적폐에 관한 인지(認知) 부조화도 그의 현실 파악 능력이 한참 모자람을 여실히 보여준다.
안철수는 2013년 4월24일 실시된 서울 노원 병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므로 그의 정치 경력은 올해로 5년밖에 안 된다. 그런데 지난 5년을 살펴보면 안철수는 어느 당에 가든지 화합이나 공존과는 거리가 먼 노선을 달려왔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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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1월26일 오전 국회 당 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박근혜가 파면당한 뒤 지난해 5월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나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에도 뒤져 3위로 낙선한 안철수는 이렇다 할 반성이나 자기성찰도 없이 정치 일선에 복귀해 다시 국민의당 대표가 된 뒤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 등 호남 출신 의원들과 갈등 관계에 빠졌다.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바른정당과 통합하기 위해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와 대화를 거듭하며 ‘찰떡 궁합’을 과시하더니 마침내 지난 18일 공동으로 ‘통합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낡은 지역주의를 극복하여 동서가 화합하고 통합된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인지, 안철수와 유승민은 호남과 영남을 함께 방문하며 ‘건전한 개혁보수와 합리적 중도의 힘’으로 ‘구태정치를 결연히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겠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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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왼쪽)와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가 1월18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통합을 선언하는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소속 의원이 9명으로 줄어든 바른정당이 정치적 생존을 위해 국민의당 통합파와 손을 잡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호남과 김대중 정신 계승’을 열심히 외쳐온 안철수가 반대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그런 정신과는 거리가 먼 바른정당과 통합하려는 것은 호남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의 주권자들이 보기에도 그릇된 정치적 행태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호남은 역사적으로 지배권력의 압제와 핍박에 시달려 왔다. 조선왕조 시대에 자주 일어난 민중봉기들 중에서도 특히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은 호남 정신을 대변하는 사건이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김대중은 1950년대에 정계에 발을 내디딘 이래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앞장서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가 하면, 1980년 5월에는 전두환 일파의 신군부가 조작한 ‘내란음모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은 바 있다. 정계 입문 이전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적이 전혀 없는 안철수가 김대중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설득력이 없다. 특히 김대중은 집권 기간에 공과가 아울러 있지만, 2000년에 이루어낸 ‘6·15 남북 공동선언’으로 민족의 화합과 공존을 위한 길을 활짝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안철수의 최근 행보를 보면 그가 ‘6·15 선언’과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안철수는 주권자들에게 생산적 정치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런 저런 정당에서 분열과 갈등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드러났다. 그에게서는 진취적 역사의식이나 인문·사회과학에 관한 이렇다 할 만한 지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특히 요즈음에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음으로써 극우보수언론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생산이 아니라 파괴를 일삼는 인물이 정치지도자로 특정세력을 이끌려는 것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더 늦기 전에 안철수가 정계에서 은퇴하기를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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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보면 코끼리 ‘벌벌’, 농민과 코끼리 상생 길 텄다
꿀벌 보면 코끼리 ‘벌벌’, 농민과 코끼리 상생 길 텄다
아프리카 이어 아시아코끼리에서도 억제 효과 확인
민감 부위 쏘일까 달아나, 농민은 꿀과 가루받이 소득
» 성난 꿀벌 소리를 들은 아시아코끼리가 불안해하며 동료의 입속에 코를 대면서 상황을 확인하려 하고 있다. 아시아코끼리가 꿀벌 소리를 무서워한다는 실험 결과가 처음으로 나왔다. 쉐르민 드 실바 제공.
상아를 노린 밀렵만이 코끼리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넓은 지역을 이동하는 습성이 있는 코끼리의 서식지가 워낙 움츠러들고 조각나는 바람에 잦아진 코끼리와 지역주민 사이의 충돌도 매우 중요한 위협이다. 특히 숲 속의 화전이나 작은 마을은 걸핏하면 코끼리의 습격을 받아 농작물이 몽땅 망가지거나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반드시 보복에 나서기 때문에 코끼리의 죽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코끼리와 가난한 농민의 비극적 충돌을 막을 방법이 없을까. 루시 킹 영국 옥스퍼드대 동물학과 연구원은 케냐에서 현지연구를 통해 꿀벌을 이용해 코끼리와의 충돌을 피하고 농민에게 소득을 안기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농경지와 마을 둘레에 10m 간격으로 꿀벌 벌통을 매다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 케냐에 설치된 코끼리 퇴치 꿀벌 울타리. 적은 비용에 설치할 수 있고 효과가 큰 것으로 밝혀졌다. 루시 킹 제공.
아프리카코끼리는 큰 덩치에도 아프리카꿀벌을 아주 무서워한다. 피부가 약한 눈, 코뒤, 귀밑 등에 쏘일까 봐 성난 벌이 내는 ‘붕붕∼’ 소리를 들으면 혼비백산 달아난다. 이 방법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코끼리 피해를 막았을 뿐 아니라 벌통에서 채취한 꿀을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0m 길이 경계선에 벌통을 설치하는 비용은 800달러(약 80만원)에 불과했다. 그동안 주민들은 별 성과 없이 고춧가루를 뿌리거나 가시덤불을 치고, 아니면 횃불을 밝히고 냄비를 두드리며 밤을 새워야 했다(▶관련 기사: 코끼리, 꿀벌만 보면 덩칫값 못하고 ‘벌벌’).
» 녹음된 성난 꿀벌 소리를 틀어주자 뒤로 물러나 전전긍긍하는 아프리카코끼리 무리. 루시 킹 제공.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효과를 낸 꿀벌 퇴치 기법을 아시아코끼리에 쓸 수는 없을까. 아시아코끼리의 상황은 아프리카코끼리보다 훨씬 심각하다. 아시아코끼리의 서식지는 지난 100년 동안 95%가 사라졌다. 개체수는 90%가 줄어 3만 마리만 남았는데, 그곳에 인류의 20%가 산다.
서식지는 잘게 쪼개져 농민과의 충돌이 빈발한다. 2012년 인도에서 300명이 코끼리 때문에 사망했고 스리랑카에서도 60명이 숨졌다. 충돌 과정에서 코끼리 250마리도 죽었다.
» 아시아코끼리 무리. 아프리카코끼리보다 더 심한 멸종위험에 놓여 있고, 서식지가 잘게 쪼개져 농민과 충돌도 잦다. 쉐르민 드 실바 제공.
킹 박사 등 연구자들은 아시아의 토종벌과 아시아코끼리 사이에도 아프리카에서와 같은 효과가 나타날지 시험해 보기로 했다. 스리랑카의 우다 왈라웨 국립공원은 아시아코끼리의 주요 서식지인데 밭과 농가가 공원경계를 빙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최적의 연구장소였다.
킹 박사는 “아시아는 인간과 코끼리의 충돌이 아프리카보다 훨씬 심하고 아시아코끼리는 아프리카코끼리보다 약 10배는 더 큰 멸종위험에 놓여 있다”며 “만일 이 연구결과를 코끼리와 살아가는 아시아 농촌에 적용해 마을 기반의 벌통 울타리 시스템을 수립하게 한다면 아시아코끼리 보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옥스퍼드대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 스리랑카에서 꿀벌 소리로 아시아코끼리의 반응을 연구하는 모습. 루시 킹 제공.
실험 결과는 긍정적이다. 연구자들은 28곳에서 아시아코끼리 120마리에게 녹음된 성난 꿀벌 소리를 들려주고 반응을 기록했다. 꿀벌 소리를 들은 코끼리는 자연적인 배경소음을 들은 코끼리보다 더 자주, 더 멀리 물러났다. 단독생활을 하는 수컷은 암컷보다 말썽을 많이 일으키는데, 물러나는 거리가 더 길었다. 꿀벌 소리를 들은 코끼리들은 또 불안감을 표시하며 코를 옆 코끼리의 입에 대 확인을 요청하는 행동을 자주 했다.
현재 스리랑카에서는 벌통 울타리로 코끼리와 마을 주민의 상생을 도모하는 시험 프로젝트가 10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킹 박사는 “벌통 울타리가 코끼리의 침입을 완전히 막아주지는 못하겠지만 꿀벌은 농민에게 꽃가루받이 서비스와 꿀과 밀랍을 파는 지속가능한 수익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 케냐에서 생산되고 있는 ‘코끼리 친화적 꿀’이라는 상표를 단 꿀. 루시 킹 제공. 스리랑카에서도 비슷한 상품이 나올 예정이다. 루시 킹 제공.
이미 꿀이 생산되고 있으며, 주민에게 양봉 지식과 꿀 따는 기법을 전수하는 워크숍도 열렸다. 스리랑카 말고도 타이, 인도, 네팔 등 다른 아시아코끼리 서식지에서도 벌통 울타리 협력사업이 추진 중이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 22일 치에 실렸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King, L., Pardo, M., Weerathunga, S., Kumara, T.V., Jayasena, N., Soltis, J. and de Silva, S. (2018) Wild Sri Lankan elephants retreat from the sound of disturbed Asian honey bees. Current Biology 28, R51-R65, January 22.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친한 판사 동료가 내 뒷조사를...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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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나리 변호사(전 판사)가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대법원이 일선 판사들의 성향을 분석한 문건을 작성한 것에 대해 “국정원이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을 관리하듯이 관리됐다는 느낌이 들었다”라며 “법원에서 같은 판사들끼리 그렇게 생각할 게 있나”고 말했다. | |
| ⓒ 유성호 | |
윤나리 변호사는 지난해 2월 판사 생활을 정리했다.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금 답답하다는 개인적인 이유였다. 지난 1월 22일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공개한 '법관 사찰 문건'에 그런 윤 변호사의 이름이 올랐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직설적인 면은 있으나 선을 넘는 편은 아니다"라고 규정돼 있었다. 윤 변호사는 "화가 나기보다는 슬펐다"라고 말했다.
앞서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을 뒷조사하고, 이들의 성향을 분류해 기록한 문건이 다수 발견됐다고 공개했다. 이 문건은 현직 판사들이 운영하는 포털 사이트 카페에 올라온 게시글과 댓글을 분석하기도 했다. 또 박근혜 청와대와 대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과 상고심을 두고 서로 교감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건도 공개됐다(관련 기사 : '판사 블랙리스트' 사실로... "선동가 기질 있다" 판사 뒷조사도).
윤 변호사는 26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동료 판사들의 말에 의하면 (나에 대한) 그 평가가 상당히 정확하다고 한다. 정확하다면 저랑 가까이 지냈던 동료나 선후배가 (법원행정처에 정보를) 올린 게 아니겠나"라며 "판사는 외부 접촉이 금기시되기 때문에 동료애가 진한데, 그 동료 중 한 명이 나를 그렇게 평가해서 올렸다고 생각하니 슬펐다"라고 말했다.
이번 추가조사위가 공개한 문건에는 법원행정처가 특별 관리한 핵심판사 21명의 명단, 소위 '판사 블랙리스트' 외에도 '사법행정위원회 위원후보자 검토' 등 판사들의 동향과 각종 개인정보를 적어둔 문건이 다수 있었다. 윤 변호사는 위원회 위원후보자 검토 문건에 포함돼 있었다.
윤 변호사는 자신의 이름이 담긴 문건을 가리켜 "블랙리스트도 아니고, 화이트리스트도 아닌 회색분자 리스트로 일종의 꼼수 리스트"라고 표현했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관료 등 문제가 터져 나오자 대법원이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처럼 위원회 외관을 형성하기 위해 정리해둔 문건"이라며 "법원행정처 방향에 크게 반기를 들지 않을 판사들인데 제가 그런 사람으로 포함돼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윤 변호사는 "법원행정처가 주목하는 몇 명 판사들에 대한 보고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추가조사위 발표 문건은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자세했다"라고 말했다. 예상보다 법원행정처의 법관 사찰 규모가 컸다는 얘기다. 그는 "이 정도까지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국정원이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을 관리하듯이 (판사들이) 관리됐다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법원에서 같은 판사들끼리 생각의 방향과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같은 동료들을 배제하고, 배척하고 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나"라고 비판했다.
다음은 윤 변호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내부 전쟁 같은 느낌... 상상도 못 했다"
-추가조사위 문건에 이름이 올라왔다. 심경이 어땠나.
"저는 법원에 없으니까 그 리스트를 먼저 보지 못했다. 동료 판사들이 카카오톡으로 '자유분방하고 직설적이지만, 선은 지키는 윤 판사'라고 말하더라.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리스트에 제 이름이 있다고 했다. 평가 자체는 나쁜 평가가 아니라 법원 생활을 그렇게 못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리스트 자체는 기분 나쁜 리스트였다. 일종의 회색분자 리스트, 꼼수 리스트다. '사법행정위원회 위원후보자 검토 문건'은 법원행정처가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처럼 외관을 형성하면서 실질적으로 행정처가 원하는 방향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은 판사들의 리스트였다. 기분이 나빴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그 평가가 상당히 정확하다고 한다. 평가가 정확하다면 저랑 가까이 지냈던 동료, 선후배가 (법원행정처에) 올린 것 아니겠나. 되게 슬펐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펐다.
법원에 있을 때 동료 판사들에 대해 애정이 컸다. 판사들은 워낙 외부 접촉이 금기시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판사들끼리 친하다. 동료끼리 매우 친한데 그 동료 중 한 명이 나를 그렇게 평가해서 올렸다고 하니까 슬펐다."
윤 변호사는 자신의 이름이 담긴 문건을 가리켜 "블랙리스트도 아니고, 화이트리스트도 아닌 회색분자 리스트로 일종의 꼼수 리스트"라고 표현했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관료 등 문제가 터져 나오자 대법원이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처럼 위원회 외관을 형성하기 위해 정리해둔 문건"이라며 "법원행정처 방향에 크게 반기를 들지 않을 판사들인데 제가 그런 사람으로 포함돼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윤 변호사는 "법원행정처가 주목하는 몇 명 판사들에 대한 보고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추가조사위 발표 문건은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자세했다"라고 말했다. 예상보다 법원행정처의 법관 사찰 규모가 컸다는 얘기다. 그는 "이 정도까지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국정원이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을 관리하듯이 (판사들이) 관리됐다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법원에서 같은 판사들끼리 생각의 방향과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같은 동료들을 배제하고, 배척하고 그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나"라고 비판했다.
다음은 윤 변호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내부 전쟁 같은 느낌... 상상도 못 했다"
-추가조사위 문건에 이름이 올라왔다. 심경이 어땠나.
"저는 법원에 없으니까 그 리스트를 먼저 보지 못했다. 동료 판사들이 카카오톡으로 '자유분방하고 직설적이지만, 선은 지키는 윤 판사'라고 말하더라.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리스트에 제 이름이 있다고 했다. 평가 자체는 나쁜 평가가 아니라 법원 생활을 그렇게 못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리스트 자체는 기분 나쁜 리스트였다. 일종의 회색분자 리스트, 꼼수 리스트다. '사법행정위원회 위원후보자 검토 문건'은 법원행정처가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처럼 외관을 형성하면서 실질적으로 행정처가 원하는 방향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은 판사들의 리스트였다. 기분이 나빴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그 평가가 상당히 정확하다고 한다. 평가가 정확하다면 저랑 가까이 지냈던 동료, 선후배가 (법원행정처에) 올린 것 아니겠나. 되게 슬펐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슬펐다.
법원에 있을 때 동료 판사들에 대해 애정이 컸다. 판사들은 워낙 외부 접촉이 금기시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판사들끼리 친하다. 동료끼리 매우 친한데 그 동료 중 한 명이 나를 그렇게 평가해서 올렸다고 하니까 슬펐다."
-핵심판사 관리문건 등 법원이 이런 문건을 작성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저는 법원행정처가 주목하는 몇 명 판사들에 대한 보고서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근데 이 정도까지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광범위하고 자세했다. 무엇보다 그 태도가 놀라웠다. 국정원이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을 관리하듯이 관리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법원이 잘 돼야 하고, 판사들이 제대로 재판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법관 독립이 필요하다. 그 생각에 대한 방향과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같은 동료들을 배제하고, 배척하고 이 사람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게 너무 놀라운 거다. 같은 판사이지 않나."
-사실 동료 판사들을 뒷조사했다는 '거점 법관'이라는 용어도 없었던 단어 아닌가.
"이번 문건에 왕당파, 거점 법관, 핵심판사 등 재밌는 용어가 많았다. 그 리스트 전에는 그런 용어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 전에야 잘 나가던 판사나 보통 판사 정도였다. 사실 이건 적이나 프락치, 내 편 이런 식으로 나눈 거다. 내부 전쟁 같은 느낌이다. 상상도 못 했다."
"판사 동향 파악한 뒤 리스트 이용했을 것"
-핵심판사 21명 중 2010년부터 7년 동안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부에 배치된 판사는 단 한 명이었다는 MBC 보도도 있었다. 실제 대법원이 이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건 아닌가.
"그 말은 옛날부터 파다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부는 지금도 국정농단 사건 등 모든 중요 사건이 몰리는 곳이다. MB 정부 때도 촛불 재판이 있지 않았나. 형사부는 단독 판사 자리도 중요하고, 합의부 자리도 중요하다. 그래서 믿을 만한 판사들을 보낸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믿을 만하다는 건 물론 실력도 실력이지만, 대세를 거스르지 않을 순치된 판사들을 보낸다는 뜻이다. 소위 말하는 튀는 판결, 소신껏 재판하는 판사를 보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를 무죄로 판결하지 않을 판사, 촛불 재판을 위헌제청 하지 않을 판사다.
기존 판례를 뒤집지 않을, 관례대로 할 판사들을 보낸다는 뜻 아니겠나. 입증된 바는 없으나 그럴 위험이 있는 판사들을 (형사부에) 배제한다는 말은 파다했다. 실제로 핵심판사 중 몇 분은 자격요건이 되고, 1순위로 지망했는데도 다른 곳으로 배치됐다는 보도를 봤다. 그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법원행정처의 판사 인사 개입은 재판 개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 이제는 누가 판사한테 전화해 '이렇게 결론 내달라, 저렇게 내달라' 이런 시대는 아니다. 단정할 순 없지만 대부분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포스트(위치)에 주류에 거스르지 않을 것 같은 순치된 판사를 미리 보내놓을 순 있다. 골이 안 새도록 골키퍼처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예전에는 문제 되는 재판을 시스템적으로 일부 믿을 만한 판사들에게 몰아주기 배당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촛불 재판 때 문제가 되면서 100% 전자배당으로 바뀌었다. 그 후엔 더 철저하게 판사들의 성향을 파악해 튀는 판결이 안 나오도록 할 필요성이 생겼을 수 있다.
솔직히 밥을 지을 땐 먹으려고 짓지, 보려고 짓진 않는다.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했으면 뭔가 그걸 이용하려고 하지, 이용하지 않으려고 했을 리 없다. 그런 애먼 고생을 왜 하나. 아직 열지 않은 파일 760개 중 수상한 이름이 많은데 제일 의심스러운 문건이 하나 있다. '국제인권법연구회(인사)'다. 인사와 관련된 파일 아니겠나."
-재판부 인사개입은 재판을 받는 시민에게도 영향을 준다.
"판사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게 정상이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판사들도 있다. 그러나 그분들 논리는 딱 인공지능(AI)이 판결하게 하자는 거다. 사회가 다양해졌으니 다양한 의견이 있는 거다. 그래서 재판도 하급심이 있고, 중간이 있고, 상급심이 있는 거다. 그 과정을 거친 뒤 지금 현상에서 하나의 의견으로 모이는 거다.
이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식으로 관리할 게 아니라 다양하게 생각하는 판사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수용할 부분은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절충하는 단계로 갔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도 사법부는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식적으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 의견들을 절차로 소화해내는 게 건강하다."
"이명박-박근혜 악행 그대로 답습한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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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나리 변호사(전 판사)는 “사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우리 시스템이 많이 무너졌다. 이 정도는 우리가 민주화 이뤄냈으니까 물러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많이 깨졌다”라며 “정치가 무너지니까 방송, 공공분야가 무너지고 사법부도 이 모양이 됐다. 정치 후퇴로 인해서 싹 다 후퇴됐다. 다시 이전으로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 |
| ⓒ 유성호 | |
-청와대와 대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댓글 사건 관련 재판을 두고 교감한 문건도 공개됐다.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가 이 자체로 굴러간 게 아니라 정치랑 엮어서 함께 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특징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무언가를 지시하는 정권이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틈나는 대로 법원을 길들이고, 재판을 못 하게 하고, 사법부에 지시하고 뭘 요구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정권이었다.
원칙적으로 이런 요구하지 말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법원행정처도 블랙리스트를 똑같이 하시지 않았나. 그런 걸 보면 청와대에 어쩔 수 없이 방어만 한 건 아닌 것 같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하던 이상한 관행, 악행 등 소위 말하는 적폐를 상당히 유사하게 답습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나.
"안 그래도 예전에 계시던 판사님들에게 이전에도 이랬느냐고 여쭤봤다. 그분들이 이전엔 없었다고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우리 시스템이 많이 무너졌다. 민주화를 이뤄냈으니까 이 정도는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많이 깨졌다.
정치가 무너지니까 방송, 공공분야가 무너졌고, 이제 드러났지만, 사법부도 이 모양이 됐다. 정치 후퇴로 싹 다 후퇴됐다. 다시 이전으로 회복해야 한다. 제가 알기론 지금은 전혀 커넥션(법원-정부 사이의 소통)이 없다고 알고 있다. 그게 정상 아닌가. 앞으로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확실히 이 선은 넘지 않아야 한다."
-검찰 수사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너무 이르다. 추가조사위가 조사하지 못한 암호 파일 760개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PC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그냥 덮을 수 없는 문제라는 건 모두 다 알고 있다. 법원도 그걸 알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까.
제 생각엔 법원에 그 기회를 한 번 더 줬으면 한다. 1차 조사위 이후에 1년 동안 이 문제를 묵히지 않고 여기까지 밝혀낸 건 판사들의 힘이었다. 결국엔 비밀번호를 건 사람들이 그냥 암호를 알려주면 된다. 그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으면 비밀침해죄 우려가 커져 법원 내에서 하기 힘들 수 있다.
법원은 국민의 신뢰를 먹고 사는 기관이다. 법원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견제하는 곳인데 검찰은 행정부이지 않나. 검찰이 압수수색 영장 등을 청구하면 또다시 그걸 법원이 판단해야 한다. 한번 손상된 권위, 신뢰가 빨리 회복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추가로 내부 기구를 꾸리겠다고 언급했는데.
"법원 내부 인사로만 구성하기는 조금 힘들지 않겠냐는 생각도 한다. 사법 개혁에 대한 외부 바람들이 많지 않나. 법원은 법원의 것이 아니다. 국민의 것이다. 국민이 지금 여기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마 외부인도 관여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법원 외부나 내부에서 서로 믿을 수 있는, 양쪽 다 합의할 수 있는 분이 1~2명 더 들어오지 않을까.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기구를 꾸려야 한다. 최소 760개 파일, 임종헌 전 차장의 PC는 열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국민 여러분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조금만 시간을 갖고 지켜봐 주시면 사법부는 진정으로 거듭날 것이다. 촛불시민 덕분에 우리 사회가 더 맑아졌듯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법원도 더 맑아지고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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