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6일 월요일

왜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표결에 불참했는가

‘양심을 팔아야 산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생존기

임병도 | 2015-07-07 09:48:49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국회법 개정안이 투표 불성립으로 자동폐기 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7월 6일 국회 본회의는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돌아 온 ‘국회법 개정안 재의결 안건’을 상정했습니다. 그러나 130명만이 표결에 참석, 의결 정족수 미달로 처리되지 못했습니다.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은 표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국회에 남아 있다가, 19대 국회가 끝나는 내년 5월말이면 자동으로 폐기되게 됩니다. 만약 여, 야가 합의해서 다시 재의결하면 통과될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법안을 투표로 통과시키는 국회에서 아예 표결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굉장히 충격적입니다. 왜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표결에 불참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이탈표를 막기 위해 표결을 원천봉쇄한 새누리당’
새누리당이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에 불참한 가장 큰 이유는 새누리당 내부에 있는 이탈표 때문입니다.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재적의원의 과반수가 표결에 참여해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19대 국회의원은 총 298명입니다.1 재적의원 과반수인 149명이 최소한의 재의 표결 가능 숫자입니다. 재적의원 과반수가 참석하고 출석 의원 3분 2 이상이 찬성하면 국회법 개정안은 통과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아예 표결 자체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새누리당이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만약 14명 정도의 새누리당 이탈표가 발생했다면, 국회법 재의안이 표결까지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새누리당 소속 의원 중 표결에 참여한 사람은 정의화 국회의장과 정두언 의원뿐입니다. 이외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압박을 반대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기명투표로 표결에 참여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새누리당은 아예 이탈표를 막기 위해 '표결 불참'을 당론으로 정하고, 표결 자체를 원천봉쇄한 것입니다.

‘야당 때문이야, 야당 때문이야. 국회법 개정안 무산은 야당때문이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이 무산되자, 국회에서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무성 대표는 ‘국회법 개정안이 오늘 본회의에서 투표 불성립으로 사실상 폐기된 데 대해 과정이야 어찌 됐든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습니다.2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국회법 개정안 내용과 관련해 새누리당은 강제성이 없다고 해석했지만, 야당이 강제성이 있다고 계속 주장함으로써 갈등과 혼란이 지속돼 왔다’면서 이번 사태의 책임이 오히려 야당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무성 대표의 말은 38일 전 본인을 비롯한 새누리당 의원 96명이 찬성표를 던진 국회법 개정안을 뒤엎는 발언입니다.3 만약 강제성이 있고 없고를 판단하려면 여야 대표가 모여 다시 논의하던지, 표결을 통해 새누리당의 입장을 보여주면 됐습니다.
자신들이 표결에 동참조차 하지 않고, 야당 때문이야를 외친 김무성 대표의 말이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헌법의 가치를 확인? 법안은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국회에서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이 무산됐다는 소식이 나오자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오늘 국회의 결정은 헌법의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라는 논평을 냈습니다.
민경욱 대변인이 기자들에게만 보낸 ‘국회법 개정안 무산이 헌법의 가치를 확인했다’는 메시지는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4
현재 국회법 개정안은 정족수 미달로 인한 ‘투표 불성립’이지 ‘국회법 개정안’이라는 법안은 여전히 국회에 남아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다시 재의를 요청하고, 정의화 국회의장이 찬성하면 또다시 표결할 수 있습니다.
국회법 개정안이 진짜 위헌이었다면 정당하게 표결을 통해 ‘부결’ 여부를 결정하여 제대로 폐기하면 됩니다. 새누리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갈 수 없으니 표결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헌법의 가치를 확인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자체가 헌법을 무시한 발언입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돼5 국회에 들어가 ‘국회의원’ 선서를 합니다. 국민의 뜻에 따라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다짐과 약속입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국회의원의 직무를 양심에 따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국회의원 선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 표결에 불참한 이유는 국가이익도, 국회의원 직무 때문도 아닙니다. 오로지 청와대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말에 따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양심을 팔아서라도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인지,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의원인지 헌법재판소에 묻고 싶을 지경입니다.

1. 대한민국 국회, 국회의원 현황
http://www.assembly.go.kr/assm/memact/congressman/memCond/memCond.do
2. 국회기자회견,’국회법 개정안 관련 새누리당 입장 발표 브리핑’
http://w3.assembly.go.kr/multimedia/jsp/press/pressPop.do?cmd=pressPop&p_idx=36227
3. 진선미 의원의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 찬성토론 2015년 7월 6일
4. 靑 “헌법가치 재확인” 연합뉴스tv 2015년 7월 6일.
http://www.yonhapnewstv.co.kr/MYH20150706014900038/
5. 비례의원직을 승계하는 경우도 포함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851 

전염병과 전쟁


<기획> 세균전의 나라 미국
곽동기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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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06  17: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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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기 /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연재를 시작하며]
주한미군으로의 탄저균 반입이 뜨거운 논란이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이고 이를 위한 수단에는 제한이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인간에게 치명적인 세균을 사용한다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발상이다.
세균무기는 오늘날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불리고 있지만, 원래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되었다. 이번에 벌어진 주한미군 탄저균 논란도 미국이 어떠한 입장과 목적에서 살아있는 탄저균을 이 땅에 반입하였는지 철저히 규명해야 할 것이다.
탄저균 반입 사건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세균전의 나라 미국>이라는 연재를 준비하였다. / 필자 주
<차례>
1. 전염병과 전쟁 
2. 일본 731부대의 세균실험
3. 6.25와 세균
4. 쥬피터 프로그램이란?
5. 끝내 터진 사고
6. 세균, 방어용인가? 공격용인가?
7. 진화하는 세균전
8. 불안한 한국사회
9. 대안은 무엇인가?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무력으로 관철시키는 행동이다. 전쟁에는 역사적으로 인류에 커다란 피해를 끼쳐왔던 세균이 개입되었다. 세균이 규명되고, 바이러스성 질환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인간은 세균을 정복하고 제압하였으며, 이를 무기화하였다.
역사적으로 세균은 침략무기로 사용되었다. 전염병은 언제나 한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전투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세균은 가장 혐오스런 공격무기이며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적군과 아군도 가리지 않으므로 눈이 없는 공격무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이런 치명적 세균의 덕을 가장 많이 보았는가? 바로 제국주의 침략세력들이었다.
세계를 휩쓴 전염병들
전염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병원체에 의해 감염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옮아가는 질환이다.
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염병이 걸린 환자는 따로 모아놓고 사망하면 사체를 불사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방역대책은 없었다. 전염병에 대한 예방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기 이전, 인간이 목숨을 잃는 사망원인 중 1위는 단연코 전염병이었을 것이다.
전염병은 특히 한번 창궐하면 그 일대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염병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기 165년경에는 로마제국에서 변방이었던 시리아 지역에서 근무하던 병사들이 근무지에서 돌아오면서 이른바 안토니우스 역병이 창궐하였다고 한다. 이 역병의 정체는 오늘날 아시아와 무역 과정에서 옮은 천연두로 짐작된다는데 이 때로부터 15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어 541년부터는 이집트에서 전파된 유스티아누스 역병이 창궐하였는데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하루에 1만 명이 죽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페스트로 추정된다.
14세기에 유럽대륙을 휩쓴 페스트는 1347년부터 4년 만에 유럽인구 2500만 명을 사망케 하였는데 이는 전 유럽인구의 1/3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페스트는 쥐벼룩에 의해 감염되는데 환자의 피부가 검게 변하면서 사망한다고 해서 흑사병이라고도 불린다. 유럽에서는 페스트가 창궐해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유럽대륙의 노동력 감소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최근에 인류에게 심각한 피해를 야기한 전염병은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이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2년 동안 전 세계에 걸쳐 2500만에서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추정되고 있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병영에서 환자가 발생하였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병사들이 귀환하면서 스페인 독감은 미국 전체에 퍼졌다. 1918년에 총 50만 명의 미국인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스페인 독감은 식민지 조선에도 창궐하여 대략 14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추정된다.
전염병은 우리 역사에도 공포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역사서는 대체로 나라에 망조가 들면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공통적으로 역병이 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염병을 줄인 말이 바로 염병이다. “이런, 염병할!”이란 말에서 볼 수 있듯 전염병은 우리 문화에서도 함께하기 싫은, 매우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통용되었다.
전쟁과 전염병
전염병이 특히 기승을 부릴 때는 바로 전쟁 상황이다.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보건위생은 아무래도 뒤쳐질 수밖에 없다. 적군이 몰려오는 위급한 상황인데 물을 끓여 마실 시간은 없다. 전사한 적군을 땅에 묻어 줄 여유도 없다. 집단생활을 하는 군대에서 빨래와 샤워를 정기적으로 하면서 싸우는 것은 21세기 현대에도 힘든 일이다. 하물며 고대와 중세기, 근대의 전쟁은 이루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철이면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전쟁터에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세균이 증식하고 이들이 군인들의 신체를 감염시키는 것은 다반사이다.
역사적으로 전염병에 의해 전쟁이 좌우되었던 사례는 기원전 430년경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있었다. 당시 아테네가 이끌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가 이끌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간의 싸움이 한창이었는데 기원전 430년과 429년, 427년에 걸쳐 아테네에서 역병이 돌았고 이 역병으로 당시 아테네 군인과 민간인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역병으로 약해진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패하게 된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환자의 증상에 미루어볼 때 당시 역병은 장티푸스였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전쟁과정에서 전염병은 때로는 교전보다 훨씬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그 대표적 전염병이 바로 티푸스이다. 티푸스는 벌레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리케차에 의해 감염되는데 바로 이와 쥐벼룩, 빈대 등에 의한 감염이다. 온 몸에 붉은 점이 나타나는 발진티푸스가 가장 흔한 병종인데 머리를 감지 못해 생기는 이와 위생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서식하는 쥐에 의해 일파만파로 감염되었다.
1489년, 유럽 스페인에서 무슬림을 몰아낼 당시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서는 마지막으로 항거하는 무슬림에 대한 그리스도교도들의 최후의 공격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그리스도교도 진영에 티푸스가 창궐했고 이로 인해 1만 7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고 퇴각길에 올랐을 때, 정작 프랑스 군대를 전멸시킨 것은 바그라티온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도 있었겠지만 주된 요인은 동장군과 더불어 프랑스 군대 내에서 만연했던 티푸스였다.
이런 티푸스는 포로수용소와 같이 위생시설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 창궐하곤 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였던 1918년에서 1922년 사이, 티푸스는 300만 명의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하고 2차 대전 당시 유태인들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티푸스에 의해 죽어갔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수용소에서 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을 휩쓴 유럽인들의 세균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건너 온 전염병에 의해 인디언의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예로부터 대규모 전염병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16세기에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려 들어가면서 대규모 전염병이 줄을 이었다.
사실 무기의 파괴력이 극대화되지 않은 16세기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제 아무리 발군의 전투력을 보인다 하더라도 수십만, 백만에 육박하는 인디언을 모두 도륙하고 정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518년 멕시코에 상륙한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 휘하의 부하는 고작 8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3년 후 인구 30만 명의 도시 테노츠티틀란을 침공했을 때에는 전투가 아니라 그들이 옮긴 천연두에 의해 무려 15만 명의 인디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6세기에는 카나리 군도의 전 인구가 천연두로 전멸했으며, 히스파뇰라에서는 원주민의 절반이 천연두로 죽었다고 한다.

호주지역의 원주민들도 영국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 균에 원주민 중 50%가 죽었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이 있는 북미대륙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북미대륙의 뉴잉글랜드 지역에 유럽인들이 정착하였을 때에는 인디언은 백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륙에서 함께 건너온 각종 병원균들에게 인디언족들은 전혀 무방비상태였고 전염병의 지속적인 창궐로 인디언 인구는 계속 감소했다고 한다.
북미대륙 전체에 걸쳐 1000만 명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인디언들이 오늘날 수십만 명에 불과한 채로 미국정부가 규정한 보호구역에 사실상 갇히게 된 것도 미국이 자행한 수많은 인디언 토벌정책도 원인이겠지만 기본은 유럽인들이 안고 들어온 병원균에 의한 감염과, 또 하나의 원인은 인디언들의 주된 식량원천이었던 아메리카 들소를 백인들이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것이었다.
식량원천을 없애고 역병을 계속 퍼뜨리니 인디언들이 남아날 재간이 없었다. 살아남은 인디언에게는 이주를 명령하고, 저항하는 인디언은 도륙하였다. 지구상의 한 대륙에서 인디언이라는 인종이 사실상 멸종하게 된 데에는 전염병이 하나의 커다란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백신 덕택에 무기로 연구된 세균
인간이 전염병에 대해 과학적으로 대응한 첫 사례는 1798년 제너가 종두법으로 천연두를 예방한 것이다. 당시 제너는 종두에 걸린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민간의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추적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종두로부터 천연두를 예방하는 백신을 얻어 접종하였으며 백신을 접종한 아이는 천연두를 접종해도 발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나아가 파스퇴르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병원균이란 것을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밝혔다. 각종 발효식품에 파스퇴르란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가 그가 이 업적으로 지금까지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기 때문이다. 파스퇴르는 1885년, 광견병 병원균을 다른 토끼에게 수차례 감염시켜 그 감염력을 현저히 떨어트린 후에 사람에게 주사하여 광견병을 치료하였다. 그는 1880년 무렵에 탄저균을 연구하기도 하였는데, 오늘날처럼 세균무기로 개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인간에게 치명적인 탄저균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파스퇴르가 세균성 전염병의 정체를 완전히 규명하고 백신으로 이를 퇴치한 이후로 전염병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질환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암과 뇌졸중 같은 병을 중증질환으로 두려워하지 장티푸스, 콜레라, 결핵에 감염되었다고 절망하지 않는다. 이는 전적으로 초기 미생물학자들의 연구 덕택이다.
이제 인간이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인간은 전쟁무기로 세균을 본격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 경우가 일제 관동군 휘하 731부대가 벌였던 끔찍한 세균전 실험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료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민족 외세군대 미군 능욕,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이민족 외세군대 미군 능욕,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5/07/07 [00: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주권방송 동영상 보기:http://www.615tv.net/?p=1262

▲ 주권방송과 미군 탄저균 사고 관련 대담을 진행하고 있는 우희종 교수     © 자주시보

서울대 수의대 우희종 교수가 3일 주권방송과의 대담에서 미군 생 탄저균 배달사고의 심각성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약학 박사이기도 한 우희종 교수는 먼저, 백신 개발은 살아았는 균주가 아닌 죽어있는 균주로도 DNA를 추출하여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 살아있는 탄저균을 한국에 보냈다면 명백하게 방어용 백신개발이 아니라 공격용 생물무기를 개발하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탄저균 생물무기는 그 파괴력이 핵무기보다 열배 백배 더 강한 무기로 군인만이 아니라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절대 개발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미국도 그 생물무기개발 금지 협약에 가입되어 있는 상태이다. 미국 내에서도 방어를 위한 백신 개발 등도 완전히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도록 법으로 엄격히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탄저균은 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보호막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100년이 지나도 죽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매우 무서운 균이다.

이라크 후세인이 전 세계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 탄저균무기를 포함한 생화학무기 개발 즉, 대량살상무기 개발이었다. 물론 그 증거를 찾지 못하기는 했지만 그랬을 것이라는 의심만으로도 공격을 했던 것이다. 우희종 교수는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탄저균을 이용한 무기 개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전 세계가 연합군을 만들어 우리나라를 공격해도 할 말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만큼 탄저균무기개발은 국제적으로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 탄저균에 감염된 코끼리 코, 석탄처럼 살이 까맣게 썩어가게 하는 균이라고 해서 탄저균이다.     ©자주시보

▲ 위쪽 사진은 탄저균을 전자현미경을 통해 촬영한 것이고, 아래쪽 사진은 탄저균감염증에 걸린 사람의 팔이 패혈증으로 괴사되는 상처부위     ©자주시보

다음으로 우희종 교수는 페덱스라는 민간배달업체를 통해 그 생탄저균이 왔다는 점이 문제가 아니라 그 민간배달업체가 왜 우리 정부에 생탄저균 배달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는지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된 균주의 경우 그게 살아있는 것이건 죽어있는 것이건 무조건 우리 정부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는데 정부가 전혀 페덱스로부터 신고를 받지 못했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10KG의 분말만으로 9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치사율 90%의 이 위험한 탄저균이 우리 정부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유통된다는 것은 국가의 검역 안전 주권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기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페덱스에서 왜 신고하지 않았는지 정부는 반드시 조사하고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엄중한 법적 처벌을 가해야 함에도 정부에서 페덱스에 대해 어떤 조사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우희종 교수는 주한미군이 국내에 생 탄저균을 반입한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했다면 주권국으로서 당연히 그 생 탄저균을 얼마나 들여왔으며 그것으로 무슨 실험을 했는지, 폐기는 어떻게 했는지 등등을 우리 정부에서 당연히 철저히 검사하여 그 내용을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확고한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함에도 우리 정부는 미군으로부터 어떤 답도 듣지 않았음에도 조사 요구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는 주권포기 행위이며 국민의 생명을 미군에게 내 던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심각한 우려 표명인 것이다.

우희종 교수는 결론적으로 미군이 우리나라 용산과 같은 수도의 한 복판에서 생 탄저균을 가지고 생물무기개발을 해도 정부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한미행정협정은 전면 재검토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한미행정협정 즉, 소파를 개정한다고 해서 과연 이런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자국에서도 하지 못하는 생 탄저균을 이용한 무기개발을 우리나라에서 몰래 자행한 주한미군에게 국방을 의지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내 맡기는 일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국제관계에는 공짜란 없다.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우리 국민이 죽건 말건 결코 상관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에서 인민군이 민간복장을 하고 피난민에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 아이와 할머니들임을 눈으로 보고도 비행기와 기관총을 동원하여 무리로 학살했다. 노근리 쌍굴다리에서는 지금도 그 원한의 총탄자욱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빨치산이 의거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원도에서 경상도, 전라도로 이어지는 태백산맥 노령산맥 주변의 마을을 닥치는대로 폭탄을 퍼붓고 캘리버50 기관총 몰사격을  가해 초토화시켰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주민들이 우글우글 생활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무지막지하게 포탄을 퍼부어댔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고엽제를 마구 뿌려대어 밀림을 초토화는 과정에 수많은 주민들에게 고엽제 중독을 일으켜 온갖 질병으로 죽어가게 했고 헤아릴 수 없는 기형아 등 피해액을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야기했다.
이라크전쟁에서는 자녀들 보는 앞에서 엄마를 집단 윤간하고 그 엄마를 죽이고 초등학생 딸까지 집단 윤간하는 등 차마 금수도 고개를 돌리 악마와 같은 짓은 수도 없이 자행하였다.

미군에게는 어제도 오늘도 오직 태평양에서 자국 이권을 지키기 위해 한반도 땅이 필요한 것뿐이다. 미군 기지와 양공주가 필요할 뿐이다.

어서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통일을 이루어 이런 외세 군화발에 유린당하는 치욕을 하루라도 빨리 씻어내야 할 것이다. 외세 군대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치욕스럽고 우리 민족에게 온갖 만행을 가해온 미군에게 정부차원에서 항의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금도 미군 주둔비를 매년 섬겨바치는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린다.

‘배신자 박근혜’의 탄핵을 얘기하자

정운현 | 2015-07-07 08:53:41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정치권에서 때 아닌 ‘배신자’ 논란이 일고 있다. 발단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국민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 정치” “배신의 정치에 대한 국민 심판” 등 과격한 표현을 쏟아냈다. 이날 국무회의 참석했던 모 인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오싹했다”고 분위기를 전한 바 있다. 배신자에 대해서는 응징과 복수가 이어지는 법이니 장차 정치권에 피바람이 불 지도 모를 일이다.
대통령도 사람일진대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는 있다. 문제는 때와 장소다. 메르스 사태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이 마당에 메르스 책임자에 대한 국민심판도 아닌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혹자는 박 대통령이 겪은 ‘배신 트라우마’가 과도한 집착으로 이어져 복수심으로 발전한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자칫 국가적으로 위험한 사태를 초래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와 여야를 비판하며 굳은 표정으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 대통령이 배신자로 지목한 사람은 ‘여당의 원내사령탑’, 즉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다. 유 원내대표는 한 때 박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 불리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두고 박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는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며 유 대표의 지역구인 대구 유권자들이 내년 총선에서 그를 떨어뜨려 줄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현역 정치인에게 이보다 더한 저주와 복수는 없다.
박 대통령의 입에서 ‘배신의 정치’라는 말이 나온 걸 두고 말이 많다. 진짜 배신자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아니라 박 대통령 그 자신이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집권 3년 차를 맞고 있는 박 대통령의 그간의 행적을 보면 수긍이 간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는 ‘국민행복시대’ ‘경제민주화’ ‘복지’ 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국민들의 환심을 샀다. 여기에 국정원 등 공권력 동원에 박정희 후광까지 입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 박 후보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됐다. 이룰 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장밋빛 공약들은 모두 휴지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대표적 복지공약인 기초연금제는 원안에서 대폭 축소됐으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공약도 파기됐다. 또 진보진영 공약을 베껴 내놓았던 ‘경제민주화’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끝나버렸으며, 이를 주도했던 인사들은 모두 ‘팽’ 당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최근 “석고대죄라도 해야 할 판”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던 취임선서는 ‘아몰랑’이 되고 말았다. 야당의원 시절인 2004년 7월 김선일 씨 피랍 사건이 발생하자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우리 국민 한 사람을 못 지켜낸 대통령은 자격이 없으며 나는 용서할 수 없다”며 핏대를 세웠던 그였다. 그러나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나 금년에 메르스 사태를 맞아 그가 보인 태도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무능과 무대책, 무반성 ‘3무’였다.
이런 마당에 대체 누가 누구를 두고 배신자라 목소리를 높이는가? 진짜 배신자는 애당초 실천의지도 없는 공약을 남발하여 국민을 속이고 또 공권력을 동원해 불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가? 정상적인 국가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이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발생했다면 새누리당은 벌써 ‘탄핵 카드’를 들고 나왔을 것이다. 국회와 국민들은 이제 ‘배신자 박근혜’를 응징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박근혜 탄핵’을 얘기해야 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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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 신영복 교수 등 올해 만해대상 수상


조현 2015.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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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대상 신영복 교수, 청전 스님 등 6명 수상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자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의 뜻을 기리는 올해 만해 대상에 청전 스님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등 6명이 올해 수상자로 선정됐다.

5일 만해축전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5월 일본군 위안부 등에 대한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역사학자들의 성명 발표를 주도한 알렉시스 더든(46) 미국 코네티컷대 역사학 교수가 평화대상을 수상한다. 일본의 역사지우기를 정면 공격하는 더든 교수의 주도로 세계적 학자들이 동참해 아베 총리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직후 발표된 이 성명엔 5월말 현재 참여자가 460명으로 늘어났다.

만해대상 실천부문상은 27년간 히말라야 오지 마을에서 빈민구제활동을 해온 청전 스님(62)과 광주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룹홈 활동을 해온 아일랜드 출신 천노엘 신부(83)가 이끄는 무지개공동회가 공동수상자로 결정됐다.

또 문예대상엔 오래 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인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74)와 가야금 명인인 황병기(79)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정현종 시인(76)이 공동수상하게 됐다.

만해대상은 시상식은 만해축전 기간 중인 12일 오후2시 강원도 인제 하늘내린린센터에서 열린다.

지금까지 만해대상은 넬슨만넬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달라이 라마 티베트불교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 두봉주교, 김성수주교, 함세웅 신부, 법륜 스님, 리영희 선생 등이 수상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cho@hani.co.kr

이번 수상자들의 공적 사유는 다음과 같다.
 

◇평화부문대상:알렉시스 더든(46세. 미국 코네티컷대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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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야만적 성착취 시스템 하에서 고통을 겪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일본과 다른 국가의 역사교과서 기술을 억압하려는 기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2015년 2월 미국 역사학자 19명은 일본 아베 정권의 미국 역사교과서 왜곡시도를 고발하는 집단 성명을 발표했다.
이때만 해도 역사학자들의 움직임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여겼다. 특히 일본 정부는 그랬다. 그렇지만 일본의 아베 총리가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인 2015년 5월, 이번에는 187명의 세계적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다시 한번 성명을 발표했다. 내용은 역시 종군위안부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세계의 저명 역사학자 187명이 ‘일본 역사학자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이란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참가자들의 면면은 2월 성명과 질과 양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태평양전쟁에 히로히토 일왕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내용을 다룬 ‘히로히토 평전-근대일본의 형성’으로 퓰리처상(2001년)을 받은 허버트 빅스 빙엄턴대 명예교수, 전후 일본의 변화와 성장을 규명한 ‘패배를 껴안고’로 역시 퓰리처상(2000년)을 받은 존 다우어 MIT명예교수, ‘넘버원일본’이란 저서로 유명한 아시아연구의 대가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 ‘한국전쟁의 기원’의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등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학자들이 나섰다. 일본계 학자들도 33명이나 참여했다. 미국 외에도 캐나다 영국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호주 싱가포르 등의 역사학자들도 동참했다. 2015년 5월말 현재 460여명으로 참여자가 늘어난 이 성명 역시 주도자는 더든 교수였다.

역사학자들의 잇따른 성명을 이끌어낸 주인공은 미국 코네티컷대 알렉시스 더든 교수이다.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시카고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더든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독도,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 열도 분쟁에 얽힌 역사적 실체와 국제조약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일본 릿교대와 게이오대, 한국의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 한국과 일본 모두에 대해 정통하다. 그의 연구실에는 독도 사진이 걸려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독도를 두 차례 방문하기도 한 그는 독도를 “너무도 아름다운 섬”이라고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과 일본 모두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다. 그랬던 더든 교수가 한일간에 첨예하게 인식차이를 보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놓고 역사학자들의 서명까지 이끌어낸 것은 학자적 양심 때문이다.

더든 교수는 역사학자들이 뭉치게 된 이유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미 논쟁거리가 아니라 전 세계가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일본 정부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바꾸거나 역사에서 지우려 한다”며 “특히 일본 정부가 미국 역사교과서에 대해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은 학문 자유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역사학자들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실천부문대상:청전 스님(62세. 히말라야 빈민구제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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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에서 빈민구제활동을 하는 청전스님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승려다. 1953년 전북 김제시에서 태어난 스님은 처음에는 교사가 되려 교육대학(전주교대)에 다녔다. 그러나 10월유신에 연류돼 12월 자퇴하고 1973년에는 가톨릭 신부가 되려 대건신학대를 다녔다. 가톨릭신부 수업을 받던 중 인생에 대한 의문이 생겨 송광사로 출가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에게 1978년 사미계를, 1979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생긴 것은 1987년 5월엔 동남아시아로 불교 순례길에서였다. 인도에서 가톨릭 테레사 수녀를 만난데 이어 그 해 8월 1일 히말라야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당시 35살이었던 그는 히말라야 기슭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되어 인도에 정착한 이후 그곳에서만 27년간 수행해오고 있다.

그는 조계종 소속 승려이고, 달라이 라마의 제자로서 티베트불교 수행자이지만, 히말라야 오지인들에겐 ‘산타 멍크’(산타클로스 스님)로 불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도에 머물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한 해도 빼지 않고 히말라야 오지들을 다니며 보시행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로 가는 지역은 인도와 중국(티베트쪽) 접경 지역인 라다크와 잔스카르, 스피티 지역이다. 이 고을들은 각자 예전에 한 왕국이 있었을 만큼 지역적으로 넓다. 그러나 워낙 고지대에 있는 척박한 땅이어서 거주자는 많지 않다. 그 지역 대부분이 해발 3천~5천미터 고지대에 있고 마을이 수킬로씩 떨어져 있어서 병원도 약국도 학교도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아이들은 동자승이 되어 절에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들은 1년 중 절반가량이 눈과 얼음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산다. 날이 풀리는 여름이면 청전 스님은 지프차를 빌려 한 차 가득히 한국에서 보시 받은 영양제인 삐콤과 치료제 등 약품, 돋보기와 시계 등 생활필수품을 싣고 오지로 떠나 한 달 간 보시 순례를 한다. 오지에서 아무런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은 매년 한차례씩 청전 스님이 오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청전 스님은 각 마을에서 스님과 주민들 한 명 한 명의 병명을 듣고 거기에 맞는 약품을 전해준다. 시력이 약한 노인들에겐 돋보기와 시계를 준다. 청전 스님의 그런 보시 여행이 연차를 거듭해가면서 그 지역에선 청전 스님이 약을 주면 모두 낫는다는 믿음까지 생겨서 더욱 더 청전 스님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벌써 20여년이다.

오지마을 학교 학생들도 영양 결핍으로 고통 받기는 마찬가지다. 오직 학교에는 보통 10~30명의 학생이 있는데, 한 학교에 젖소 한마리만 있으면 전교생이 그 젖소에서 짠 우유로 영양 문제가 크게 개선된다고 한다. 현지에서 젖소 한 마리는 한국 돈으로 1백만 원 가량이다. 라다크와 잔스카라, 스피티에 동자승 학교가 있는 곳 중에 스님이 젖소를 사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그의 보시는 다른 자선단체와 달리 정부나 기관의 지원을 받는 법인이나 재단을 설립하지 않고, 개인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는 조직을 만들면 보시도 자칫 사업이 될 수 있다며 조직을 만들지 않고 개인 차원에서 보시행을 이어가고 있다. 청전 스님이 1년에 보시 받거나 인세 수입 등을 모두 합쳐 연간 총 수입은 6천만원가량이다. 다람살라에 달라이 라마의 법문을 들으러 온 이들이 통역을 한 그에게 보답한 것이거나 한국의 도반과 소수의 지인들이 십시일반 보태준 보시금이다. 그의 보시 여행엔 늘 한국에서 간 순례자들이 적게는 2~3명, 많게는 4~5명이 매년 동행해왔는데, 동행자들은 청전 스님이 보시 받은 돈을 대부분을 이웃에게 보시에 사용하는데 놀라곤 한다. 동행자들이 특히 놀라는 것은 한국인 한명의 연봉에 불과한 그 돈으로 우리나라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는 방대한 지역 오지인들 대부분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동행자들은 청전 스님이 한 수행자의 노력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이 나의 부처’라고 여기면서, “10년 수행하면 20년 봉사할 수 있고, 20년 수행하면 40년 봉사할 수 있다”는 스승 달라이 라마의 말대로 수행과 봉사의 삶이 둘이 아닌 하나로 회통되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실천부문대상:무지개공동회(발달장애인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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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 천노엘 신부(83)가 대표인 무지개공동회는 광주광역시를 기반으로 국내에서 최초로 발달장애인을 위한 그룹홈을 시작하면서 발달장애인을 우리 사회 안에서 떳떳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운 단체이다.

무지개공동회 대표인 천 신부는 장애인을 위해 한 일로 상을 받는 것을 극도로 거부한다. 1990년대부터 여러 차례 장애인단체, 인권단체 등에서 상을 수여하려 했으나 “나는 그들과 친구”라며 수상을 거부했다. 2014년 포스코청암상도 그래서 무지개공동회 이름으로 받았다.

그러나 무지개공동회의 활동을 천 신부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천노엘 신부는 아일랜드 출신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사제. 1957년 처음 한국에 온 천 신부는 20여년간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일반 성당 사목을 했다. 그랬던 그가 당시엔 정신박약자로 불리던 발달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9년 한 무연고 발달장애인 소녀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성당 신자들과 가끔 봉사활동을 가던 광주 무등갱생원에서 만났던 당시 19살짜리 ‘김여아’라는 아이가 갑자기 위독하게 됐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 임종한 것. 그가 손을 잡아주자 김여아는 어눌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졌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장례를 잘 치러드릴 테니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해달라”고 했다. 그는 “19년 동안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살다가 떠난 여아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해 거절하고 광주 양산동 천주교 묘원에 매장했다. 지금도 그가 세운 비문에는 “사회를 용서해주시렵니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천 신부는 요즘도 매년 명절 때면 김여아의 묘를 찾아 벌초를 하면서 초심을 되새긴다.

천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수용시설이나 집안에서만 살아온 발달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결심한다. 알코올중독자나 다른 신체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의사표현할 수 있지만 발달장애인은 그마저도 쉽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헌신을 다짐한 것이다.

그는 1981년 유엔이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에 안식년을 얻어 유럽과 호주, 미국, 캐나다 등을 다니며 발달장애인 돌봄의 현장을 확인했다. 결론은 “장애인도 산 속의 대규모 시설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광주대교구에 사제가 부족한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천 신부는 당시 윤공희 대주교의 허락을 받아 특수사목을 시작하게 됐다. 첫 결실은 1981년 광주 시내 주택가를 빌려서 문을 연 그룹홈이었다. 장애인시설에 있던 무연고 여성과 봉사자와 함께 그룹홈을 열자 여기저기서 “미쳤다”고 했다. “장애인은 시설에 있는 게 가장 좋다”고도 했다. 그러나 천 신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역사회 안으로 데려와 ‘거주, 여가, 직업’을 함께 하도록 이끌어낸다.

현재 무지개공동회는 광주 시내 6곳 아파트에 위치한 그룹홈과 엠마우스복지관, 엠마우스산업, 유치원에까지 이른다.
그렇게 시작한 살림이 하나씩 늘어 현재 그룹홈 6곳에 복지관, 산업체, 유치원에까지 이른다. 특히 1991년 하남산업단지에 입주한 엠마우스산업은 40여명의 발달장애 근로자가 화장지와 양초를 생산하며 자립을 꿈꾸는 사회적 기업이다. 양초는 연간 10만개를 생산해 국내 각 교구의 성당에 전례용으로 공급되며, 화장지는 2년 연속 인천국제공항에 납품하고 있다.

만 35년간 그룹홈에서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고 현재도 20~60대 장애인 4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천 신부의 꿈은 더 크다. 장애인들이 그룹홈에서도 독립해 직장생활하면서 자립하는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배드민턴, 축구, 볼링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것, 엠마우스복지관 등 출신 130여명이 하남공단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반 공장에서 일하는 것 등이 그에겐 자랑거리다.

 
◇문예부문대상:황병기(79세. 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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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명인 황병기(79)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중학교 때 처음 접한 가야금을 필생의 업(業)으로 삼아 명인의 경지에 이른 우리 창작음악의 1세대다.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있다가 2001년 정년퇴임했고,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다.

황 명인의 업적은 우선 가야금 연주와 창작 분야에서 빛난다. 스승에게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으로 알았던 가야금 음악을 익힌 후, ‘숲’ ‘영목’ ‘고향의 달’ ‘미궁’ ‘산운’ ‘하마단’ ‘침향무’ ‘비단길’ 등 수많은 가야금 레퍼터리를 짰다. 1974년 유럽 공연을 앞두고 신라 음악을 되살린 ‘침향무’와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유리그릇에서 영감을 얻은 ‘비단길’, 백제가요 ‘정읍사’에서 소재를 딴 2007년 작 ‘달하 노피곰’까지 그의 작품을 들어보면
우리 소리의 유산을 껴안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걸작들이다.

작년에도 여섯번째 창작 음반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를 낼 만큼,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한다. 황 명인의 스승인 김윤덕 선생이 1946년 정남희(1905~ 1984)에게 배운 47분짜리 가야금 산조를 바탕 삼아 황 명인이 다스름,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 등 8부분으로 구성한 곡이다. 보통 가야금 산조의 2배 가까운 70분 분량이다. 여섯 장의 창작 음반을 낸 황 명인은 “내 작품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자기 복제는 하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한다.

황 명인은 국악계의 간판스타로 국악을 세계에 알리는 데도 앞장서왔다. 1965년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예술제’에서 초청받아 연주했다. 이 때 호놀룰루 심포니와 협연하고 녹음한 음반(LP)에 대해 음악전문지 ‘스테레오 리뷰’는 ‘하이스피드 시대의 현대인에게 정신적 해독제와 같은 음악’이라고 극찬했다. 이를 시작으로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 미국, 영국, 네덜란드,핀란드,일본,중국,프랑스,알제리,이탈리아,스위스 등 전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연주활동을 펼쳤다. 1990년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 통일 음악회에 남측 대표로 참가했으며,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송년 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문예부문대상:정현종(76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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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1939~ ) 시인은,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50년 동안 한국 시의 사유와 감각에 신생의 탄력을 부여해온 한국 문단의 대표적 시인이다. 시인은 그 특유의 철학적 사색과 섬세한 감각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형성해왔는데, 그 세계는 육체성에 대한 발견과 생명에 대한 매혹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유와 감각을 밀도 있게 결속해온 그만의 영역이라 할 것이다.

그는 첫 시집 《사물의 꿈》(1972) 이래 《고통의 축제》(1974) 《나는 별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에서 인간적 비극의 결핍 상태 곧 죽음이라든가 실존적 비극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천착을 노래해왔다. 

정현종 시인은 ‘꿈’과 ‘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사실, 시인의 꿈꾸기에 대한 욕망이 그치지 않는 한 사물들은 살아 움직이고 그 꿈이 다하면 사물들도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생명력에 대한 갈망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섬〉)라는 절창으로 이어진다. 이때 우리는 ‘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명시적으로 따진다는 것이, 마치 만해(萬海)의 ‘님’이 무엇인가를 산문적으로 따지는 것만큼 공허한 일임에 상도한다. 말하자면 그리움의 대상(“섬”)보다는 그리움 자체(“가고 싶다”)가 중요하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 획득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꿈이라는 것을 시인이 에둘러 강조한 것임을 알게 된다.

시인은 삶의 불모성과 비극성을 푸는 방법론으로 ‘육체에 기반을 둔 사랑’ 곧 에로스의 시적 발견에 힘을 쏟았다.
그 후 1990년대 들어서 발표한 시집들에 줄곧 담긴 명징하고도 구체성 있는 생명의 시편들은 그의 시 안에 담겨 있는 철학성의 본질을 새삼 되묻게 만들었고, 그 결과는 한국 시의 자기 전개 과정에서 빚어진 의미 있는 진경이라는 평가를 불러왔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후기 시편들에서 집중적인 생태적 상상력을 낳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그의 후기시는, 시적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지식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데 있다는 것이라는 착상에서 비롯하여, 그것을 두루 실험하고 완성하는 구체적 실감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만큼 그의 시편들은 우리로 하여금 감관(感官)을 자극하게끔 하고 인지적, 정서적 충격과 반응을 풍부하게 가지게끔 하는 ‘언어의 샘’이 되어주었다. 그 점에서 정현종은 우리 문학사에, 생명의 황홀을 노래하는 우주적 상상력의 참모습을 보여준 범례로 길이 남을 것이다.
  

◇문예부문대상:신영복(74세. 교육자, 성공회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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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는 오래 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며 삶의 좌표를 가다듬었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또한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진 글씨와 그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박한 일상 속에서 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서화작가이기도 하다.

신영복 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20년 20일 동안 영어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88년 가석방된 신영복교수는 주변 친구들의 배려 속에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교수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1998년 사면복권되면서 정식으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가 되었고 2006년 정년퇴임한 후 현재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글과 강연으로 많은 사람을 각성시키고 감동을 주었다.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책이다. 그는 감옥에서의 신산한 삶을 오히려 따뜻한 위로와 성찰의 메시지로 담아 가족들에게 전했고 1988년 이 편지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지금도 꾸준히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이 책은 신영복이 현실과 민중을 만나며 창백한 지식인의 관념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식과 삶을 재구성하며 낮지만 깊은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신영복 교수는 두 번에 걸쳐 국내와 국외 기행기를 신문에 연재한 바 있는데 그 결과로 나온 책이 국내 여행기인 <나무야 나무야>(1996)와 해외 여행기인 <더불어 숲>(1998)이다. 이 두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깊은 역사의식과 창의적 상상력으로 역사 속의 인물과 장소를 ‘지금 현재’의 역사성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그 의미를 포획하는 놀라운 지적 통찰의 기록이다.

신영복 교수가 쓴 또 하나의 명저는 <강의>(2004)다. 나의 고전독법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그가 오래 동안 강의해 온 동양고전들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이 담겨 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사회과학자가 오랜 수형 생활 속에서 새롭게 동양 고전을 공부하고 사유하며 이루어낸 장강과도 같은 지혜가 이 책 속에 있다. 유려하고 짧은 단문으로 마치 화두를 던지듯 쓰여진 그의 글들은 긴 여운을 남기며 끊임없이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신영복 교수의 지혜와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단지 그의 책들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짧지만 놀랍도록 함축적인 지혜가 담긴 그의 글씨와 그림은 그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또 하나 중요한 매개체다. 신영복 교수는 어릴 적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물론 그가 좀 더 깊은 공부를 한 건 감옥에서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어깨동무를 한 듯 기대고 있는 그의 독특한 글씨는 시민단체들의 현판과 벽을 장식하고 있다. ‘처음처럼’ ‘더불어 숲’ 등 평범하고 단순해 보이는 문장에 특유의 통찰과 지혜를 담아내는 그의 서화작품들은 시민들
에게 평화와 민주, 생명과 공존, 화해와 연민의 메시지를 전하는 잠언들이다. 신영복 교수는 탁월한 강연자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그는 전국의 수많은 지역과 단체, 학교에서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많은 시민들에게 낮고 고요하지만 치열하고 풍요로운 성찰과 희망의 언어를 전하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사상은 ‘더불어 숲’이라는 글귀에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힘과 대결, 경쟁과 승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공존과 평화의 의미를 전하는 그의 언어는 책을 통해, 강연을 통해 이 시대의 등대가 되어주고 있다.

신영복 교수는 우리 사회가 급격한 자본주의화로 잃어버린 공동체성을 회복하도록 일깨워주면서, 공동체적 삶을 조용히 실천해왔다. 몇 번의 서화전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또 ‘처음처럼’이란 소주 글씨를 써주고 받은 1억원을 대학에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지난 2008년 청명문화재단이 제정한 임창순상을 받았는데 당시 청명문화재단은 선정이유를 “다양한 개인과 계층과 문화가 서로를 살리고 북돋우는 사랑과 화합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신영복의 따뜻한 분노가 우리 사회에서 더욱 큰 울림과 더욱 넓은 어울림으로 번져 가리라 믿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