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5일 일요일

정권 명운 걸린 ‘3대 과제’…직접 페달 밟는 문 대통령



뉴스분석 - 국정 전면에 왜? 
정권 명운 걸린 ‘3대 과제’…직접 페달 밟는 문 대통령
부동산 안정, 민심 서둘러 진화
한반도 평화, 인사 통해 재정비
검찰개혁, 공수처 출범에 박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부동산 정책에 대한 긴급 현안보고를 받았다. 3일에는 청와대와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을 대폭 교체하며 북·미 중재자 행보 재개를 위한 진용을 갖췄다. 그에 앞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시한 내 출범을 여러 번 촉구하며 검찰개혁 제도화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문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3대 이슈로 부상한 부동산 안정, 한반도 평화, 검찰개혁의 전면에 나섰다. 현 정부 아킬레스건(부동산), 정체성(한반도 평화), 적폐청산 상징(검찰개혁)에 해당하는 이들 이슈는 정권의 성패와 직결된다. 안정(부동산), 대반전(한반도 평화), 가속화(검찰개혁)를 통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발등의 불은 부동산이다. 정부가 6·17 대책을 내놓았지만 집값은 잡히지 않고, 대출 제한으로 내 집 마련 문턱만 높아졌다는 실수요자의 볼멘소리가 크다. 청와대와 정부 고위 공직자 상당수의 다주택 보유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본질은 우연을 가장해 모습을 드러낸다. 청와대 내부 의사소통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강남 아파트 처분 번복 해프닝은 ‘강남불패’ 신화가 현 정부 고위 공직자들에게 얼마나 내면화되어 있는지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손색이 없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 방향은 문 대통령이 제시했다. 다주택자와 고가 주택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인상,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을 돕기 위한 물량공급 확대와 세부담 완화 등이다. 국토부는 부처 간 협의를 거쳐 문 대통령의 지시를 구체화한 추가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여당은 종부세법 개정안을 7월 임시국회에서 밀어붙일 공산이 크다. 부동산 입법을 둘러싼 여야 대치가 예고돼 있는 셈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노영민 비서실장의 ‘다주택 해소’ 권고를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이 이행할지 여부다. 시한으로 제시한 이달 말까지 권고가 이행되지 않을 경우 인사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로 누군가 옷을 벗는 초유의 사태가 현실화할 경우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들의 기강과 청와대 내부 갈등의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이 지난 3일 단행한 외교안보 라인 개편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내정이다. 박 내정자는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19대 대선, 20·21대 총선에서 문 대통령의 정적이었다. 그런 박 내정자를 깜짝 발탁한 것은 남북관계 경험과 정치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박 내정자, 서훈 국가안보실장 내정자, 임종석·정의용 외교안보특보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들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 내정자는 통일운동을 전면화한 86세대 중추다. 민주화 이후 세 차례 민주정부에서 쌓은 남북관계 역량, 통일운동 역량의 총집결인 셈이다. 오는 11월 미 대선 전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현 정부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현실적 판단도 깔려 있다.
검찰개혁 전선은 두 갈래다. 하나는 공수처 출범을 위한 입법 전선이다. 문 대통령은 법 부칙에 적힌 대로 이달 중순 공수처를 출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출범 시점, 공수처장 후보자 추천 등을 놓고 여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국정 전면에 나서는 문 대통령 
다른 하나는 법·검 갈등이다. 윤석열 검찰총장 측근인 한동훈 검사장 관련 수사를 놓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 총장이 연일 충돌 중이다. 사태가 봉합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누구의 손을 들어주건 정치적 부담이 작지 않다. 절반의 인사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과 검찰개혁은 내치 영역이다. 문 대통령의 무기는 국회 다수 의석이다. 다만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한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이다. 한반도 평화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문 대통령이 외교안보라인 교체를 통해 북측에 대화 메시지를 던진 다음날,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북·미 대화 가능성을 일축했다.

북한도 코로나19 재확산?..."자만 안돼, 비상 방역 더 강화"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시 이행 차원...코로나 19 경계 강화 주문
북한 당국이 코로나 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없다고 자만해서는 안된다며, 방역에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5일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1면 사설을 통해 지난 2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주재한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14차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코로나 19 방역이 주로 논의됐다는 점을 상기한 뒤 "오늘의 방역 형세가 좋다고 자만 도취되어 긴장성을 늦추지 말고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전염병 유입 위험성이 완전히 소실될 때까지 비상 방역 사업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신문은 "세계적으로 악성 비루스(바이러스)의 전파가 날로 확대되고 있는 조건에서 사소한 방심과 방관, 만성화된 사업태도나 서뿌른(섣부른) 방역조치의 완화는 상상할 수도, 만회할 수도 없는 치명적인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며 "국가의 안전과 인민의 안녕을 백방으로 보장하고 담보하자면 정치국 확대회의 결정대로 이미 이룩된 방역성과를 부단히 공고화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문은 "세계적인 규모에서 악성전염병의 재감염, 재확산 추이가 지속되고 있고 그 위험성이 해소될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방역전초선이 조금도 자만하거나 해이됨이 없이 최대로 각성, 경계하여야 한다"며 "방역 사업을 재점검하고 비상방역체계를 엄격히 유지하기 위한 보다 세밀하고 적실한 대책들을 강구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신문은 "우리 당은 세계적인 대유행병의 발생초기에 벌써 선견지명있는 영도력을 발휘하여 악성비루스의 경내침입을 막기 위한 철저한 조치를 취하였다"며 지난 6개월 간 방역과관련해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했다.

▲ 3일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날인 2일 제7기 제14차 정치국 확대회의를 주재했다고 보도했다. ⓒ로동신문

이와 함께 신문은 평양 종합병원 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건축공사가 일정계획대로 추진되는 데 맞게 시공 부문, 자재보장 부문, 운영준비 부문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해야 평양 종합병원이 우리 당의 인민관이 완벽하게 구현된 로동당(조선노동당) 시대의 기념비적 창조물로 일떠서게 된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건설에 동원된 시공단위들에서는 당이 바라는대로 기념비적창조물을 최상의 수준에서 완공하기 위한 충성의 돌격전, 과감한 전격전을 벌려나가야 한다. 성, 중앙기관들과 공장, 기업소들에서는 세멘트(시멘트)와 철강재, 연유와 목재 등 공사에 필요한 자재와 설비들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여야 한다"고 말해 병원 건설을 위한 자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신문은 "이번 정치국 확대회의야말로 인민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인민을 위하여 멸사복무하는 우리 당의 인민대중제일주의정치를 철저히 구현해나가는데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리정표(이정표)"라며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14차 정치국 확대회의 기본정신을 철저히 구현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앞서 김 위원장은 2일 열린 확대회의에서 "6개월간에 걸치는 국가적인 비상 방역 사업 실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분석"했다며 "최근 주변나라들과 인접 지역에서 악성전염병의 재감염, 재확산 추이가 지속되고 있고 그 위험성이 해소될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방역전초선이 조금도 자만하거나 해이됨이 없이 최대로 각성경계하며 방역사업을 재점검하고 더 엄격히 실시할 데 대하여 지적"했다고 북한 관영 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70514051119281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영원한 비밀은 없다

[개벽예감 402] 영원한 비밀은 없다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07/06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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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긴급작전회의 소집한 미국 육군 소령
2. 하우스만이 취한 두 가지 긴급행동
3.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했을까? 
4. 미국공산당 당원과 조선공산당 당수의 비밀회동
5. 미육군 방첩대가 구축한 재북간첩망


1. 긴급작전회의 소집한 미국 육군 소령

2020년 6월 29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를 집필하던 나에게 수수께끼 같은 의문이 생겼다. 나는 그 글에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 백선엽의 회고록에 들어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인용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 있었던 그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전화를 당일 오전 7시경에 받았다고 한다. 누가 백선엽에게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백선엽은 누가 자기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주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의문은 백선엽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을 왜 밝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자료를 뒤진 끝에 나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백선엽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왜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하우스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하우스만이 백선엽에게 긴급작전회의에 나오라는 소집통보전화를 걸었기 때문이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소집해야 하는 긴급작전회의를 왜 하우스만이 소집했을까 하는 의문을 풀려면, 하우스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1995년 서울에서 출판된, 하우스만의 회고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따르면, 그는 1946년 7월 말 춘천지구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8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1개월 근무했다. 그는 국방경비대 연대장에서 국방경비대 집행국장으로, 국방경비대사령관 고문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당시 국방경비대사령관 고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한국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일개 미국 육군 대위의 손에서 창설되었다는 치욕의 역사는 하우스만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철수를 완료하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군사고문단이 설치되었던 1949년 7월 1일 하우스만은 소령으로 진급하고 미국군사고문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미국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육군 준장 윌리엄 로벗츠(William L. Roberts)는 도꾜와 워싱턴으로 출장을 가서 머무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참모장 하우스만이 단장의 직무를 대행하면서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대령급 또는 중령급 미국군사고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하우스만이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들을 통해 한국군 전체를 지휘통제했음을 말해준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채병덕과 같은 방에서 나란히 책상을 놓고 근무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직접 (한국군의) 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을 뿐 아니라, “조직 및 작전과정의 운용을 위한 지원 및 감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돼 있었다”고 했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매주 한 차례 군사안전위원회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미국측에서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와 참모장 제임스 하우스만이 참석했고, 한국측에서 대통령 이승만,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참석했다. 하우스만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을 자기 방처럼 드나들었는데, 이승만은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에 누구를 임명하면 좋겠는가 하는 고위급 인사문제까지 하우스만에게 물어보고 결정했다. 이런 사정은 이승만이 하우스만의 꼭두각시였고, 채병덕은 하우스만의 허수아비였음을 말해준다.  

하우스만은 극악무도한 반공광신자였다. 토벌대사령관 백선엽은 사살당한 남조선인민유격대 지휘관의 목을 20리터들이 휘발유통에 넣어 하우스만에게 보냈고, 하우스만은 휘발유통 속에서 얼굴이 퉁퉁 부어 누군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된 피살자의 목을 건져 올려 자신이 직접 신원을 확인하는 잔인성을 드러냈다.  

하우스만은 6.25 전쟁 중인 1951년에 미국 국방부 코리아정보과로 잠시 전근했다가 이듬해 주한미국군사단 고문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1956년 3월에 주한미국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8년에 전역하면서 주한미8군사령관 특별고문에 임명되어 1981년까지 그 직위에서 한국군을 사실상 지휘통제했다. 

한국군을 지휘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의 내부사정을 파악해야 6.25전쟁 개전상황에 그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알 수 있는데, 하우스만이 회고록에 서술한 미국군사고문단의 내부사정은 다음과 같다.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는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 전역명령을 받은 그는 1950년 6월 22일 일본 도꾜종합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던 아내를 퇴원시키고 아내와 함께 미국행 수송선에 올랐다. 한국군을 지휘통제하는 미국군사고문단 단장은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수송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전역한 단장의 빈자리를 채워 한국군을 지휘통제해야 할 미국군사고문단 부단장(육군 대령) 스털링 라이트(W. H. Sterling Wright)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가족을 바래주기 위해 1950년 6월 25일 일본 도꾜에 있었다. 

위에 서술한 사정을 보면, 하우스만이 한국군을 지휘통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의 운명은 일개 미국 육군 소령의 손에 놓여 있었다. 

하우스만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중대한 정보를 어떤 경로로 파악했을까? 1950년 6월 24일 밤 미국군사고문단 장교들과 한국군 고위지휘관들은 한국군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사교춤을 즐기다가 각자 집에 돌아가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하우스만은 예외였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폐결절에 걸려 도꾜종합병원에서 치료받던 그의 아내 버트가 1950년 6월 11일에 퇴원하여 남편을 만나기 위해 서울행 C-54 수송기를 탔는데, 이륙하기도 전에 고장이 나는 바람에 수송기를 고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녀가 긴급수리를 받은 수송기를 타고 김포비행장에 내린 때는 1950년 6월 24일 오후였다. “아직 약기운이 가시지 않은 아내를 집에 데리고” 간 하우스만은 한국군 장교구락부 연회에 나갈 수 없었다. 하우스만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5시쯤 한국군 육군본부에서 걸려온 긴급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그가 자기 집에서 약 100m 떨어진 육군본부 청사로 달려갔더니,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채병덕의 직속상관인 국방장관 신성모는 어디에 있는지 전화연락이 되지 않았고, 채병덕의 작전참모인 육군 대령 장창국은 집을 이사하는 바람에 새 주소를 알지 못해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한국군 최전방 전투부대 지휘관들은 무선통신을 통해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채병덕에게 무질서하게 보고했다. 공식보고체계에 따라 제대로 보고하려면,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단 정보고문이 전황보고를 취합, 정리하여 하우스만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미국군사고문들은 서울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난장판에서 하우스만이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9년 9월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연설하는 장면이다. 단상에는 미국군 지휘관들이 앉아있다. 사진에서 맨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제임스 하우스만이다. 그는 당시 미국 육군 소령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세워진 이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서 매주 한 차례 군사안전위원회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미국측에서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와 참모장 제임스 하우스만이 참석했고, 한국측에서 대통령 이승만, 국방장관 신성모,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참석했다. 하우스만은 미국군사고문단 참모장으로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하우스만은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무력충돌이 국지전으로 확전되자,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일본 도꾜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개전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의 운명은 일개 미국 육군 소령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2. 하우스만이 취한 두 가지 긴급행동

1950년 6월 25일 오전 7시경 하우스만은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접경지대에서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으로 판단했다가, 약 3시간 뒤에는 초기판단을 수정하여 조선인민군이 “전면적인 공격으로 보이는”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한 하우스만은 두 가지 긴급행동을 취했다. 

1) 하우스만이 취한 긴급행동은 미국군사고문단을 일본 도꾜로 철수시키는 일이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백선엽과 함께 경기도 파주에 나가 전황을 파악하던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이드 로크웰은 급히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전선을 떠나 서울로 돌아갔다. 하우스만이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철수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하우스만은 미국군사고문단에게 왜 도꾜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이 의문을 풀어줄 해답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에서 찾을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군사고문단은 즉시 도꾜로 철수하라는 미국 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의 명령이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하달되었다고 한다. 이런 정황은 맥아더가 6.25전쟁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이미 알았고, 전쟁에서 한국군이 패주할 것이라는 정보도 이미 알았음을 말해준다. 맥아더가 그런 정보를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하는 문제는 개전전황을 파악하는 데서 중요하므로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주한미국대사관은 서울에 체류하는 미국인들을 급히 일본 도꾜로 대피시켰는데,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미국군사고문단도 함께 대피시키려고 했다. 서울에 체류하는 미국인 2,000여 명은 수송기 또는 수송선을 타고 이틀에 걸쳐 일본으로 대피했다. 

그런 와중에서 하우스만은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John J. Muccio)와 상의한 끝에 미국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남아있는 것이 한국군의 사기를 위해 필요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한국군에 남기를 자원하는 군사고문은 남아도 된다고 명령했다. 그렇게 되어 미국군사고문단 소속 장병 487명 중에서 약 32명이 남았다.   

2) 하우스만이 취한 또 다른 긴급행동은 개전전황을 상부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긴급작전회의를 소집한 하우스만은 그 자리에 주한미국대사 무쵸도 불렀다. 개전전황을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하우스만은 급한 김에 개전전황을 자기가 아는 대로 무쵸에게 설명했다. 하우스만의 설명을 들은 무쵸는 당일 오전 10시경 워싱턴에 있는 미국 육군성에 긴급히 타전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하우스만은 왜 무쵸를 통해 상부에 개전전황을 보고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 의문을 풀어줄 해답은 하우스만의 회고록에서 찾을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1949년 6월 30일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주한미국군 제5보병연대가 하와이로 철수한 직후, 미국군사고문단은 독자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주한미국대사관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사정이 그렇게 바뀌었으므로, 하우스만은 자기가 직접 육군성에 보고하지 않고 무쵸를 통해 보고한 것이다. <사진 2>

▲ <사진 2> 이 사진은 제주도인민유격대가 무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던 1948년 6월 18일 미국군사고문단 단장 미국 육군 준장 윌리엄 로벗츠가 제주도토벌사령부를 시찰하는 장면이다.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윌리엄 로벗츠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개전 직전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군복을 벗었다. 전역명령을 받은 그는 1950년 6월 25일 자기 아내와 함께 미국행 수송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가 떠난 미국군사고문단에서 참모장인 제임스 하우스만은 단장의 직무를 대행했다.   

3.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했을까? 

서울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한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8일 오전 서울 전역을 점령했다.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한 그들은 진격을 멈췄다. 2020년 6월 29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나의 글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에 서술한 것처럼, ‘서울해방작전’은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10일 동안 ‘해방’하고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은 한강도하장비를 가져오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부산으로 진격하려고 했다면, 한강, 금강, 낙동강을 건널 도하장비를 가져왔어야 한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경 한국군 공병부대는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조선인민군은 서울에서 진격을 멈추고 한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한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패주하면서 인도교를 폭파해 엄청난 인적, 물적 손실을 자초했다. 그런데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폭파되지 않은 한강 철교의 철로 위에 널빤지를 깔면 조선인민군 전차부대가 얼마든지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작전계획에 따라 서울을 점령한 후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서 3일을 보냈다.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은 3일 동안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맥아더가 한강방어선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하우스만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용기를 타고 도꾜를 출발한 맥아더가 경기도 수원비행장에 내린 시각은 1950년 6월 29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내리자마자 곧장 군용차를 타고 북상하여 한강방어선으로 나갔다. 그의 참모들은 한강방어선 시찰이 매우 위험하다고 만류했으나 맥아더는 듣지 않았다. 한강방어선에 도착한 맥아더가 언덕을 오를 때, 주변에 포탄이 떨어졌다. 낙탄각도가 조금 더 예리했으면, 맥아더는 즉사했을지 모른다.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긴다. 맥아더는 포탄이 날아오는 한강방어선에 왜 위험을 무릅쓰고 나타난 것일까?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시찰이 백전로장의 용감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맥아더는 겁쟁이였다. 이를테면, 태평양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942년 3월 11일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자, 마닐라에 있던 맥아더는 어뢰정을 타고 이틀에 걸쳐 민다나오로 꽁무니를 뺏고, 민다나오에서 다시 B-17 폭격기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으로 달아났다. 맥아더가 제 목숨을 건지려고 멀리 도망치는 바람에 약 70,000명에 이르는 미국군과 필리핀군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런 겁쟁이 맥아더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것은 결코 용감성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맥아더는 패주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군의 사기를 올려주려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한 것도 아니었다. 맥아더의 한강방어선 시찰은 은밀한 행동이었으므로, 한국군 전투부대들은 그가 한강방어선에 다녀갔는지 몰랐다. 

1950년 6월 27일 오전 맥아더는 육군 소장 존 처치(John H. Church)를 전선사령관으로 임명해 경기도 수원에 보냈다. 처치는 ‘전방지휘연락단(Advanced Command and Liaison Group)’이라는 명칭의 전선사령부를 수원에 설치하고 전쟁을 지휘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도꾜 집무실에 앉아서 전선사령관 처치로부터 수시로 전황보고를 받아보면서 작전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맥아더가 굳이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왜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 그 까닭은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 나는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군사고문단이 도꾜로 철수하라는 맥아더의 대피명령이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내려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맥아더가 전쟁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미리 알았다고 서술했는데, 거기에 더하여 맥아더는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까지 알았던 것이다. 

당시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를 아는 조선의 최고위급 인사들은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다. 조선의 최고위급 인사들만 아는 극비정보를 맥아더가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간첩망이 조선의 최고위층에 침투해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맥아더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대북간첩망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47년 9월 18일에 창설된 미국 중앙정보국은 적국에 독자적인 간첩망을 구축할 능력을 아직 갖지 못했고, 따라서 1950년 6월 당시에는 정보분석에 집중하고 있었다. 2007년에 기밀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의 2급 비밀문서 ‘비밀공작사(Clandestine Service History)’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국이 독자적인 간첩망을 북에 구축하기 시작한 때는 1950년 9월 말경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1950년 5월 15일에 작성한, ‘북조선 정권의 현재 능력’이라는 제목의 비밀보고서(ORE 18-50)는 조선인민군이 38도선에서 무력을 증강하고 있다는 정보에 근거하여 그들이 서울을 점령하는 제한적이고, 단기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이것은 조선인민군의 ‘서울해방작전’을 예측한 중요한 정보였지만, 중앙정보국을 신뢰하지 않는 맥아더가 그들이 작성한 비밀보고서를 보고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를 맥아더에게 알려준 간첩망은 따로 있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6.25전쟁 중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간 미원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와 담화하는 장면이다.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용기를 타고 도꾜를 출발하여 경기도 수원비행장에 도착해 곧장 한강방어선으로 나갔다. 그의 참모들은 한강방어선 시찰이 매우 위험하다고 만류했으나 맥아더는 듣지 않았다. 맥아더가 위험을 무릅쓰고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모험을 감행한 까닭은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이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극비정보를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를 아는 조선의 최고위급 인사들은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였는데, 그런 극비정보를 맥아더가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간첩망이 조선의 최고위층에 침투해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4. 미국공산당 당원과 조선공산당 당수의 비밀회동

1945년 12월 어느 날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꾜에서 날아온 수송기 한 대가 착륙했다. 수송기 탑승자들 중에서 유난히 시선을 집중시킨 사람은 미국 육군 소위 군복을 입은 조선여자였다. 조선여자가 미국 육군 군복을 입고 서울에 나타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현미옥이고, 미국 이름은 앨리스 현(Alice Hyun)이다. 당시 미국의 점령지였던 남조선에서 현미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녀가 장차 엄청난 사건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국 육군 소위 현미옥은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에 배속되었다.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 정보참모부 지휘관은 미국 육군 대령 쎄실 니스트(Cecil W. Nist)였다. 그의 밑에는 미국 육군 장교 10명과 사병 16명, 육군성 군속 45명, 조선인 군속 363명이 있었다. 정보참모부는 행정과, 남조선과, 북조선과, 군사실, 정치부, 평양연락사무소를 두었다. 정보참모부 관하에는 방첩대분견대(Counterintelligence Corps Detachment)와 민간통신검열단(Civil Communication Intelligence Group)이 이었다. 

방첩대(CIC)분견대는 비밀공작과 간첩활동을 수행했는데, 1946년 4월 제971방첩대분견대로 개편되었다. 제971방첩대분견대는 서울에 있는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관하 부대이면서도 도꾜에 있는 미원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의 지휘를 받았다. 다시 말해서, 맥아더는 제971방첩대분견대가 구축한 간첩망을 통해 남북조선의 내부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점령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던 1949년 5월 미점령군에 속한 제971방첩대분견대도 철수했지만, 맥아더는 서울에 특수조사부(Special Investigation Section)와 코리아연락실(Korea Liaison Office)을 설치하고 공작망과 간첩망을 계속 운영했다. 현미옥이 배속된 민간통신검열단은 남조선에서 오가는 우편물과 전보를 검열하고, 전화통화를 도청하는 민간사찰부대였다. 그런데 현미옥은 누구인가? 

현미옥은 재미동포 1세들이 사탕수수농장에서 고된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던 1903년 미국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현순(1880~1968)은 1911년 가족을 데리고 하와이에서 서울로 돌아갔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현순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19년 4월 이동녕, 손정도와 함께 임시정부수립에 동참했다. 사회주의성향을 지닌 독립운동가인 현순은 1919년 9월 김철훈을 중심으로 로씨야 이르꾸츠크에서 창당된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청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에 머물던 현미옥은 초기 임시정부에 참가한 사회주의성향의 청년들이었던 박헌영, 여운형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26년 현미옥은 가족과 함께 미국에 돌아가 조선독립운동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사회주의운동이 전성기를 맞았던 1930년대 중반 미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대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영향을 받은 재미독립운동가들이 미국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45년 12월 미국 육군 소위 군복을 입고 서울에 나타나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 배속된 현미옥은 미국공산당원이었다. 서울에서 현미옥은 1920년대초 상하이에서 친분을 쌓았던 박헌영을 남몰래 찾아갔다. 1945년 8월 24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당수였다. 기록에 의하면, 현미옥은 1946년 1월 11일부터 박헌영을 여러 차례 만났다. 미국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 당수의 특이한 만남이었다. 현미옥은 박헌영에게 미국공산당에 소속된 재미동포당원들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조선공산당 일지’에 따르면, 1946년 3월 2일 현미옥은 미점령군에 배속되어 서울에 체류하던 미국인 미국공산당원 3명과 함께 박헌영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미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연대협력문제를 협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미옥은 박헌영이 자기 직속상관인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의 비밀지령을 받는 제971방첩대분견대 소속 거물간첩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헌영이 제971방첩대분견대에 포섭된 거물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아래에서 다시 논한다.

1946년 8월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는 현미옥이 민간통신검열단에 배속된 이후 통신검열이 급격히 하락했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현미옥이 민간통신검열단에서 근무할 조선인 통역자와 번역자를 고용하는 일에 개입하여 공산주의자들을 고용시킴으로써 민간통신검열단 임무를 “파괴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고 하면서, 현미옥을 “제거했다”고 말했다. 제거라는 말은 민간통신검열단에서 축출하고, 강제전역시켰다는 뜻이다. 강제전역을 당한 현미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다. 1946년 말부터 현미옥을 비롯한 재미동포 미국공산당원들은 체스꼬슬로벤스꼬 프라하에 체류하는 고고학자 한흥수를 통해 북과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미국에는 광란적인 반공선풍이 몰아쳤다. 1947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르먼(Harry S. Truman)은 연방정부 공직자들의 사상을 검열하는 대통령행정명령을 발동했다. 광란적인 반공선풍 속에서 수많은 미국공산당원들이 ‘소련의 간첩’으로 몰려 형벌을 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1940년대 말에서 1951년까지 기간에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미국공산당원 약 1,500명을 공갈, 협박하여 자기들에게 협력하는 첩자로 만들었다.   

한흥수를 통해 북과 연락하던 재미동포 미국공산당원들이 광란적인 반공광풍 속에서 무사할 리 없었다. 미국 연방수사국은 현미옥에게 미국공산당에서 탈당하고 자기들에게 협력하면 석방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공갈, 협박했던 것이 뻔한데, 불행하게도 현미옥에게는 형벌을 받더라도 자기의 사상을 지키려는 신념과 의지가 없었다. 저들의 공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현미옥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거쳐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간첩망에 인입되었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194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된 현미옥의 가족사진이다. 안경을 쓴 사람이 현미옥의 아버지 현순이고, 맨앞쪽에 앉은 사람이 현미옥의 동생 피터현이다. 사회주의성향을 지난 항일독립운동가였던 현순은 1948년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감리교 목사였고, 현미옥과 피터현은 미국공산당원이었다. 현미옥의 미국 이름은 앨리스 현이다. 현미옥은 1945년 12월 미국 육군 소위로 서울에 들어가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관하 민간통신검열단에 배속되었다. 미국공산당원인 그녀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과 여러 차례 접촉했다. 현미옥과 박헌영은 1920년대 초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에 가깝게 지냈었다. 현미옥은 자기가 서울에서 다시 만난 박헌영이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관하 제971방첩대분견대에 포섭된 거물간첩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현미옥은 박헌영과 첩촉한 것이 발각되는 바람에 강제전역을 당하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미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체스꼬슬로벤쓰고 프라하에 체류하는 고고학자 한흥수를 통해 북과 연락하고 있었다. 1947년 미국에 몰아친 광란적인 반공선풍 속에서 수많은 미국공산당원들이 체포되어 형벌을 받거나 해외로 추방되거나 미국 연방수사국의 첩자로 전락했다. 재미동포 미국공산당원들도 해외로 추방되었다. 현미옥도 미국 연방수사국의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저들의 공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현미옥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거쳐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간첩망에 인입되었다.   

5. 미육군 방첩대가 구축한 재북간첩망

1946년 9월 4일 미군정청은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다. 하지만 박헌영 체포령은 그를 평양에 침투시켜 제971방첩대분견대의 재북간첩망을 활성화하려는 자작극이었다. 미군정청은 박헌영 체포령을 내렸으나, 제971방첩대분견대는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잠적했던 박헌영은 1946년 10월 6일 미점령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지휘관 쎄실 니스트의 월북지령을 받고 강원도 홍천에 있는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들어갔다. 

박헌영이 월북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1946년 11월 12일 서울에서는 한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 제13차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박헌영이 체포망을 뚫고 월북한 것을 막지 못한 책임을 추궁당한 장택상은 이렇게 말했다. (장택상은 미군정청 경무총감실 부총감 겸 수도관구 경찰청장이었다.) “나는 박헌영 체포명령을 받지 못했는데, 니스트 대령으로부터 박(헌영)을 찾으라는 명령은 받았다. 그런데 하지(미점령군사령관)는 니스트 대령이 하는 일에 결코 관여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1946년 당시 미군정청 검찰총장이었던 이인은 1967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남로당 간부 80여 명을 검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하지는 다른 사람이야 (검거해도) 괜찮은데 박헌영(을 검거하는 것)은 잠시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말하고, 4~5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가 박헌영 체포를 보류하고 있었던 기간에 박헌영은 체포망과 경계망을 뚫고 월북했다. 

평양에 침투한 박헌영은 1948년 6월 자기 하수인 서득언(남로당 경기도당 조직부장)을 통해 니스트의 비밀지령을 받았다. 니스트는 비밀지령에서 현미옥을 비롯해 몇 사람을 유럽을 통해 북에 들여보내겠으니, 그들의 입국을 보장해주고, 입국한 뒤에는 간첩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건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1949년 1월 현미옥은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침투지령을 받고 평양에 가기 위해 프라하에 도착했다. 이경선이 동행했다. 이사민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이경선도 현미옥처럼 미국공산당원이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크게 고무된 이경선은 1948년 11월 15일 미국공산당 조선인 당원대표의 명의로 김일성 수상(당시 직책)과 박헌영에게 비밀서신을 보냈다. 이경선은 비밀서신을 서울에 가는 남궁요설에게 주면서, 임화에게 전해달고 부탁했다. 박헌영의 추종자였던 임화는 좌익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기획실장이었다. 

그런데 미육군 방첩대가 1949년에 작성한 비밀문서에 따르면, 임화는 이강국과 함께 제971방첩대분견대에 포섭된 간첩이었다. 임화처럼 박헌영의 추종자였던 이강국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이었다. 임화를 통해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에게 비밀서신을 보내려던 이경선은 임화가 제971방첩대분견대 소속 간첩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화는 1947년 8월 자기에게 내려진 체포령을 피해 잠적한 척하다가 1947년 11월 20일 월북했기 때문에 전달자가 이경선의 비밀서신을 임화에게 전해주려고 서울에 갔던 1948년 11월 임화는 서울에 없었으나,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평양에 전해졌다. <사진 5>   

▲ <사진 5>이 사진은 1950년 6월 28일 오전 조선인민군 전차부대와 모터싸이클부대가 서울에 진입하는 장면이다. '서울해방작전'을 완료한 그들은 진격을 멈췄다. 38도선 이남전역을 '해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10일 동안 '해방'하고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6.25전쟁 전 미육군 방첩대는 거물간첩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삼은 재북간첩망을 구축하고 북의 비밀정보를 빼냈다. 재북간첩망이 빼낸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도 맥아더의 손을 거쳐 미국 육군성에 전해졌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되었다.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내전이 임박하였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들이 계속 나타났는데도, 트루먼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더라도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서울해방작전'의 극비정보를 알았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미국 연방수사국은 워싱턴주 씨애틀에서 미국공산당원 이경선을 체포했다. 현미옥과 마찬가지로 이경선도 중형을 받더라도 자기의 사상을 지키려는 신념과 의지를 갖지 못했다. 저들의 공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한 이경선은 미국 연방수사국을 거쳐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간첩망에 인입되었다. 

1949년 1월 미육군 방첩대의 대북침투지령을 받고 평양에 가기 위해 프라하에 도착한 현미옥과 이경선은 체스꼬슬로벤스꼬 정부당국에 북조선에 망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체스꼬슬로벤스꼬 국가안전기관은 망명동기가 분명하지 않은 그들을 의심했다. 조선의 사회안전성은 현미옥과 이경선의 망명동기가 분명하지 않다는 체스꼬슬로벤스꼬 국가안전기관의 통보를 받고 그들의 입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헌영은 사회안전성의 입북불허결정을 무시하고, 외무상 직권으로 그들에게 입국사증을 내주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되어 현미옥과 이경선은 프라하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입북했다. 평양에 활동거점을 마련한 현미옥은 박헌영의 후견을 받아 조선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 배치되었다. 박헌영은 현미옥의 직속상관이었다. 박헌영의 후견을 받은 이경선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부터 1968년까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부국장으로 근무했고, 1980년대 중반에 탈북, 입남한 신경완은 평양에 들어간 현미옥과 이경선이 프라하에 자주 편지를 보냈고, 단파라디오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신경완의 회고담에 따르면, 재일본조선인총련맹에서 활동하던 조창영이 아내와 함께 1949년 11월 중국 베이징을 거쳐 입북했다고 한다. 박헌영의 후견을 받은 조창영은 대외문화련락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조국보위후원회로 옮겨갔다. 박헌영은 조창영을 여러 차례 만났고, 조창영은 자기보다 약 한 달 전에 입북한 현미옥과 이경선을 2~3차례 만났다. 그런데 심경의 변화를 겪은 조창영은 1950년 3월 사회안전성에 자수하여 자신이 미육군 방첩대의 입북지령을 받고 귀국했다고 자백했다. 

1950년 3월 현미옥과 이경선은 사회안전성을 찾아가 동유럽을 다녀오려는데 해외여행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사회안전성은 해외여행을 허가해주지 않았다. 

1950년 7월 현미옥과 이경선은 평양에 있는 이강국의 집에서 두 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간첩활동을 모의했다. 1950년 가을 어느 날 박헌영은 현미옥과 이경선에게 동유럽여행을 허가해주도록 사회안전성에 요청했다. 사회안전성 요원들은 그 두 사람을 미행하다가 경유지인 모스크바공항에서 그들의 짐을 수색했다. 그들의 짐에서는 군사기밀자료를 비롯한 비밀자료들이 나왔다. 

6.25전쟁 이전 미육군 방첩대는 거물간첩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삼은 재북간첩망을 구축하고 비밀정보를 빼냈다. 박헌영이 재북간첩망을 통해 수집하여 미육군 방첩대에 보고한 비밀정보들 중에는 ‘서울해방작전’에 관한 극비정보도 있었다. 그 극비정보는 맥아더의 손을 거쳐 미국 육군성에 전해졌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보고되었다.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내전이 임박하였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들이 계속 나타났는데도, 트루먼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더라도 한강을 건너 진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서울해방작전’의 극비정보를 알았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 대신 트루먼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중국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해방작전’에 돌입할 것을 우려했다.

박지원 국정원장 ‘깜짝 발탁’ 막전막후 “오로지 대통령의 결정”

“국정원장이라고 역할 특정하거나 한정할 수 없어”...대북 소통 창구 역할 주목
최지현 기자 cjh@vop.co.kr
발행 2020-07-05 17:51:39
수정 2020-07-05 17: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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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정의철 기자  

청와대는 5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깜짝' 발탁된 배경에 대해 "박 후보자를 낙점한 것은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의 결정"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박 후보자의 경우 다양한 경로로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이 박 후보자를 낙점하게 된 시기는 대략 6월 17일에 있었던 청와대 초청 원로 오찬 이후였다고 한다. 당시 문 대통령은 대북전단 살포를 계기로 급격히 경색된 남북관계 문제를 풀기 위해 전직 통일부 장관 등 외교안보분야 원로들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는데, 그때 박 후보자도 초청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렇다고 원로 오찬이 (박 후보자 발탁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기자실에서 박 후보자 발탁 소식에 탄성이 나올 정도로 인사 보안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박 후보자 본인"이라고도 평가했다.
박 후보자는 여권 인사가 아닐뿐더러 문 대통령과도 그간 각을 세웠던 이력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내부 정보를 긴밀히 알 수 있는 국정원장이라는 중직을 맡게 된 것을 두고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를 두고 박 후보자 발탁 자체가 적극적인 대북 유화 메시지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박 후보자가 김대중 정부 당시 대북특사로 활약하며 지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주역 중 한 명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에 박 후보자는 이번에도 국정원 본연의 역할을 하면서도 북한과의 긴밀한 소통 창구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도 "외교·안보 라인은 콕 집어서 역할을 특정하거나 한정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며 "예를 들어 안보실장, 통일장관, 국정원장 역할이 서로 가능한, 교차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박 후보자의 경우 어떤 역할로 추천이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한 자리, 한 역할이었겠느냐"며 "어쨌든 대통령은 (박 후보자를) 국정원장 후보자로 가닥을 잡으신 것"이라고 부연했다.
아울러 청와대 관계자는 박 후보자와 문 대통령이 과거 불편한 관계를 맺었던 일을 두고 뒷말이 나오고 있는 데 대해 "이번 인사로 대통령께서는 '지난 일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대통령께서는 선거 때 일어났던 과거사보다는 국정과 미래를 생각하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015년 2월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문재인 신임 당대표가 최고위원 당선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박지원, 이인영 당대표 후보 곁을 지나치고 있다. 자료사진.
지난 2015년 2월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문재인 신임 당대표가 최고위원 당선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박지원, 이인영 당대표 후보 곁을 지나치고 있다. 자료사진.ⓒ양지웅 기자
박 후보자는 문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이 공포된 뒤 특검 수사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2015년 민주당 당권 경쟁 과정에서 박 후보자는 문 대통령을 '부산 친노', '패권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2017년 대선 때는 국민의당 소속으로 거의 매일 문 대통령을 비난해 '하루를 문 대통령 비판으로 시작한다'는 뜻의 '문모닝'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박 후보자가 국정원장으로 내정됐다고 청와대에서 발표한 직후 온라인상에서는 2015년 2월 8일 전당대회 당시 사진이 올라와 재조명되기도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이 45.3%로 당시 박지원 후보(41.78%)와 이인영 후보(12.92%)를 꺾고 당 대표에 당선됐는데, 이번 인사에서 박 후보는 국정원장으로, 이 후보는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돼 한배를 타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게 됐다.
문 대통령은 당시 전당대회 마지막 연설에서 "박지원 후보의 관록과 경륜, 이인영 후보의 젊음과 패기를 모두 다 업고 함께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후보자는 이번에 국정원장으로 내정된 뒤 페이스북 글을 통해 "역사와 대한민국 그리고 문 대통령을 위해 애국심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박 후보자는 또 "앞으로 제 입에서는 정치라는 政(정)자도 올리지도 않고 국정원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며 국정원 개혁에 매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 후보자는 이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문 대통령의 재가로 최종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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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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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그림으로 남긴 가해자들의 얼굴


 2005년 심진구씨가  자신을 고문한 수사관들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고 있다.
▲  2005년 심진구씨가 자신을 고문한 수사관들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심진구는 1980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6월 군에 입대해 1984년 1월 제대했다. 제대 후 그는 서울 구로에 있는 삼립식품에 근무하면서 1985년 11월부터 1986년 2월까지 넉 달 동안 서울대 제적생인 김아무개와 함께 자취했다. 심진구는 고교시절부터 철학과 역사책을 즐겨 읽어 웬만한 대학생들과 시국, 역사, 철학 등에 관해 토론해도 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고 지식 수준이 매우 높았다.

심진구는 1986년 11월 결혼했다. 결혼 한 달밖에 안 된 그해 12월 10일 오후 5시경 그의 인생에 날벼락이 내려쳤다. 서울 구로구 시흥동 대로에서 아내와 동네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안기부 수사관들이 영장도 없이, 연행 이유도 말해주지 않은 채 수갑을 채우고는 남산 안기부로 그를 강제로 끌고 갔다.

심진구의 아내는 지난 2010년 악몽과 같은 그 당시 상황에 대해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1986년 12월 초쯤 크리스마스 카드를 안양상가에서 팔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집 근처에서 까만 자동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쫓아와서 남편을 잡더니 집을 뒤져 남편 군대 사진을 챙겨서 아무 설명도 없이 남편을 끌고 갔다.
 
심진구는 1986년 12월 10일 안기부에 연행된 뒤 그해 12월 30일 구속영장이 집행될 때까지 21일 동안 불법 구금 되었다. 그리고 변호인의 접견을 차단당한 채 안기부 요원들로부터 가혹한 고문 조사를 받았다.

안기부 요원들은 왜 똑똑하고 착실한 신랑 심진구를 어느 날 갑자기 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연행해 구금하고 무지막지한 고문 조사를 자행했던 것일까?

심진구의 문제(?)는 고졸 학력의 공장 노동자인 그가 서울대 법대생들과 토론모임을 해도 그들을 논리적으로 전부 제압할 정도로 해박하고 똑똑했다는 데 있었다.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 사이엔 국내에 주체사상 이론을 처음 소개한 <강철서신>으로 불리는 6편의 팸플릿이 인기가 많았다. 심진구는 <강철서신>중의 1편인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라는 팸플릿을 직접 써서 운동권 대학생들을 놀라게 한 시대의 문장가였다.

이런 심진구의 뛰어남 때문에 안기부는 그를 공장에 위장취업을 한 북한 공작원으로 의심했던 것이다. 안기부의 굳은 머리로는 어떻게 일개 고졸 출신 공장노동자가 날고뛰는 운동권 대학생들을 놀라게 할 정도의 대표적 문건을 쓸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안기부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1987년 6월 5일 공판에 출석한 심진구는 법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저는 대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대학생들보다 더 심한 고문을 안기부에서 자유의사를 박탈당할 정도로 받았습니다. 안기부에 1986년 12월 10일 구속되어 1987년 1월 30일까지 매일 매를 맞다시피 했습니다. 안기부에서 거의 한 달 동안 심한 고문을 받고 많은 허위진술을 한 채 검찰로 송치되었습니다. 검찰 조사 시 안기부 직원이 구치소로 몇 차례 찾아와 사실대로 진술하라고 해서 안기부에서의 공포심으로 검찰에서 제대로 진술하지 못했고, 구치소에서 안기부 직원의 주선으로 KBS, MBC 기자, 안기부 조사관이 있는 가운데 인터뷰를 하게 했습니다.
 
 2004년 12월 20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할 때 심진구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손이 심하게 붉고 가끔 손을 떨기도 했다. 심씨가 손을 보여주고 있다.
▲  2004년 12월 20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할 때 심진구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손이 심하게 붉고 가끔 손을 떨기도 했다. 심씨가 손을 보여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2004년 12월 20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심진구씨는 고문과정에서 몽둥이로 허벅지를 집중적으로 가격당했으며 밟히기도 했다고 말했다. 허벅지가 붉은 색에 가까우며 핏줄이 서 있다.
▲  2004년 12월 20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심진구씨는 고문과정에서 몽둥이로 허벅지를 집중적으로 가격당했으며 밟히기도 했다고 말했다. 허벅지가 붉은 색에 가까우며 핏줄이 서 있다.
ⓒ 오마이뉴스
 
"야전침대 자루로 성기를 내려치면서 웃어댔다"
 

또한 심진구는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1986년 12월 안기부에 불법으로 끌려가 고문 받던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안기부 지하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으라고 해서 알몸 상태가 되자 수사관들이 달려들어 무조건 두들겨 팼다. 2시간 정도 실컷 때리고 나서 수사관이 '여기가 국회의원도 잡아다가 패는 데야. 옛날 중정 알아? 여기가 안기부야'라고 해서 안기부에 잡혀온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너, 강철 시리즈 알아?', '엔엘피디알(NLPDR)이 뭔지 알아?'라고 물어서 모른다고 하자 거짓말을 한다며 사정없이 몽둥이로 때렸다. 그렇게 영어가 나올 때마다 맞았다.

어느 날 정형근(검사 출신으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을 거쳐 한나라당 국회의원 역임)이 나타나서 '간첩이라고 불 때까지 더 족쳐'라고 수사관에게 지시하고 가기도 했다. 정형근이 왔다 간 후부터 고문은 더욱 심해졌다. 성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내려치고 몽둥이로 목을 조르기도 했다.

안기부에서 조사 받는 동안 한 두 시간 정도밖에 잠을 재우지 않았고 나머지는 고문의 연속이었다. 피가 흘러나와 바닥에 고이면 고인 피를 마대 걸레로 닦아 내 손으로 짜야했다. 6명의 고문 수사관들이 야전 침대 자루로 목 조르기, 비틀기를 하고 발 바닥, 머리, 가슴 등 온몸을 밤새도록 구타해서 온몸에서 피가 나고 살이 찢겨져 심문실 바닥이 피범벅이 된 일도 있었다. 특히 계장이라고 하는 사람과 대머리에 눈이 치켜 올라간 수사관이 책상 모서리에서 야전 침대 자루로 성기를 수차례 내려치면서 서로 마주 보고 웃어대기도 했다.

안기부 수사관이 검찰에 가기 전에 안기부에서 말한 대로 하라고 했는데, 구치소로 가기 전에 검찰에 들러 검사 조사 받는데 안기부의 수사관들과 함께 있어서 겁을 먹어 안기부에서 시키는 대로 허위 진술한 진술서였지만 어쩔 수 없이 지장을 찍었다. 구치소 있는 동안에도 안기부 수사관들이 찾아와 검찰에서 사실을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 사건을 담당한 신아무개 검사에게 안기부에서의 고문 사실에 대해 말하자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며 묵살 당했고, 검찰 주사보도 '빨갱이 좌경분자는 더 맞아야 해'라며 거들었다.<br /><br />또한 구치소에 있는 동안 안기부로 끌려가 반나절 정도 조사를 받았는데 다시 구치소로 돌아가지 못할까 겁을 먹었고, 수사관들의 협박으로 시키는 대로, 알려주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했다.<br /><br />재판 직전 간수가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법정에서 무조건 다 인정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 사실을 밝히려고 하거나 말 한 번 잘못 하면 감옥에서 영영 썩게 된다고 해서 겁을 먹었는데 법정에 안기부 수사관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공포심에 안기부에서 진술한 대로 해야 되는구나 싶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다리가 부어서 평소의 두 배가 될 정도"
 

안기부에 끌려가서 정형근 등에게 야만적인 고문을 받은 것은 심진구만이 아니었다. 그의 대학생 친구들도 역시 불법으로 안기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심진구의 친구 서울대생 김아무개는 1987년 5월 29일 열린 서울지법 5차 공판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안기부에서 주로 당한 고문은 각목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물고문은 나중에 당했다. 거의 매일 각목으로 얻어맞았다. 단단하고 가벼운 각목으로 다리를 집중적으로 구타해서 다리가 부어서 평소의 두 배가 될 정도였다. 다리를 때릴 수 없는 정도가 되자 왼팔, 오른팔, 어깨, 발바닥 등을 번갈아 가면서 때렸고, 입고 있던 군복에 피가 배어 오를 정도로 심하게 얻어맞았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각목을 X자로 끼어놓고 구둣발로 짓밟고, 벽에 십자로 2시간 정도 탈진할 때까지 세워놓고 책상 밑에 처박고 구둣발로 무차별 구타하고, 구두를 벗어 그것으로 뺨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심한 기합을 받았다.<br /><br />마지막으로 물고문을 받았는데, 고개를 쳐들게 하고 뒤에서 머리칼을 움켜잡고 코와 입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퍼붓고, 물을 담아 놓은 그릇에 실신할 정도가 될 때까지 얼굴을 거꾸로 처박았다. 조서 작성할 때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안 하면 많은 기합을 받았다. 고문 수사로 자유 의사는 완전히 박탈당했고 그래서 자술서도 수사관이 쓰라는 대로 작성했다.<br /><br />검찰 조사 때는 심한 위축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안기부에 있을 때 '검찰청 15층도 여기와 같은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시설이 있다. 너 같은 중요 공안사범의 진술태도가 좋지 않으면 거기에 데려간다. 공범도 있고 진술태도가 안 좋으면 여기 남아 있는 심진구, 하아무개가 고생한다'며 협박을 해 검사 조사 시 심리적 위축상태였다. 특히 상당히 안면이 있는 안기부 직원이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들락날락했다.

당시 심진구의 또 다른 친구 서울법대생 김아무개는 지난 2010년 진실위에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부산에서 안기부 수사관에게 붙잡혀 서울 남산분실로 와서는 바로 군복으로 갈아입히더니 심리적 굴욕감을 주려고 벽타기 등을 하게 했다. 구학련 배후와 북한과의 연계가 있는지 물어봐서 그런 것이 없다고 하니 고문이 시작되었다. 한 달간 고문을 심하게 당했는데 야전침대봉으로 맞고, 물고문도 당했다. 정형근도 종종 조사실로 내려와 같은 서울대 법대 동문이라며 배후를 이야기하라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 검찰로 송치될 때 안기부 수사관이 동행, 배석해 검사에게 인정신문을 받았다.

심진구의 친구 하아무개도 진실위에서 1986년 안기부에서 고문조사 받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안기부에서 신고식이라면서 매질을 당했고 욕조 물에 머리를 박게 하고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수사관이 밟았다. 야전침대봉이 3개 부러질 정도로 계속 매질을 당하다가 가슴 명치를 맞아 숨을 쉴 수가 없어 쓰러졌다. 수사관들이 야전침대에 눕혀놓았는데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 세 네 번 왔다. 수사관들이 필동 병원까지 데려가서 의사진찰을 받게 했으나 의사는 엑스레이 찍고 허벅지가 매질로 까매진 것을 보고 붕대만 감아주었다.<br /><br />안기부로 돌아와 그 날 밤은 그냥 잤으나 이후에 조사 받을 때 조사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기 좋은 게 있네' 하면서 허벅지에 감긴 붕대를 풀어 손목을 의자에 묶고서 구타를 했다. 수사관이 후배랑 만나기로 한 쪽지를 발견했는데 시간을 틀리게 적어 놓은 것을 모르고 몇 번 허탕을 치고 와서는 '이제 조사할 필요 없다. 다른 팀 교대시간까지 13시간 남았는데 그때까지 때리기만 하겠다'며 실제로 13시간 동안 계속 매질과 기합을 가했다.<br /><br />검찰 조사를 받을 때에도 안기부에서 최, 서 수사관과 함께 검찰에 가서 잠깐 조사를 받았는데 수사관이 있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강압상태에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허벅지를 밟았다"
 

심진구의 친구 박아무개도 진실위에서 1986년 안기부에서 받은 고문을 이렇게 진술했다.
 
안기부에 연행되어 수사관들로부터 몽둥이로 구타를 당했고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허벅지를 밟았다. 물고문도 당했는데 책상 위에 눕혀 놓고 얼굴에 수건을 놓고 물을 부어 죽을 것 같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사관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을 했다. 송치될 때 안기부 수사관이랑 우선 검찰에 들러 짧게 조사를 받았다.

1986년 심진구에 대한 검찰 조사에 참여한 검찰주사보 안 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에 안기부에서 조사받고 왔으면 고문 받고 온 것은 당연하다. 피의자한테 살아서 온 게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피의자가 부인하거나 증거가 없거나 조사내용이 더 필요하면 검사가 수사관에게 연락을 해 피의자를 다시 조사하기도 한다.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 수사관이 데리고 가서 고문하든지 해서 자백을 받아가지고 오는 일도 있다.
 
위와 같은 가혹한 고문조사를 거쳐 1987년 1월 15일 심진구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된 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1987년 4월 20일 심진구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되었다.

안기부의 불법 구금과 무지막지한 고문 이후 심진구 삶은 철저히 망가졌다. 박영진 열사(1986년 노동3법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신흥정밀 노동자)와 함께 '구로독산지역 선진노동자회'를 이끌었던 심진구는 1987년 집행유예로 출소한 뒤엔 노동운동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했다. 그가 고문에 못 이겨 안기부 수사에 협조했다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또한 출소 후에 심진구는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병원을 들락날락했고 심한 불면증과 불안 증세에 시달렸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건강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쉽지 않고 본인이 뜻한 대로 살지 못하니 굉장히 괴로워했다. 불운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심진구가 그린 정형근
▲  심진구가 그린 정형근
ⓒ 진실위 자료
 
 
 심진구가 그린 안기부 고문수사관들의 몽타주 그림
▲  심진구가 그린 안기부 고문수사관들의 몽타주 그림
ⓒ 오마이뉴스
 
심진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석방 후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지난 2004년 정형근 전 국회의원(1986년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을 그림으로 그려 독직폭행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지만 기각됐다.

심진구의 아내는 "남편이 정형근 초상화를 그릴 때 거의 열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 먹고 그림만 그렸다. 기억을 떠올리는 게 너무 괴로워서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한편 심진구 사건을 조사한 진실위는 지난 2010년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신청인 심진구가 안기부에 영장 없이 불법연행 된 후 21일 동안 불법구금 된 상태에서 고문 및 가혹행위를 받고 허위자백에 의해 일부 범죄 사실이 조작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안기부가 신청인 등을 영장 없이 불법 연행 하고, 구속 영장이 집행될 때까지 불법구금 했으며, 조사과정에서 구타 등 가혹행위를 가한 것은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감금죄, 제125조 폭행, 가혹행위죄에 해당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안기부는 자백 외에 증거가 없음에도 신청인이 이적표현물을 취득했다고 일부 범죄사실을 조작했다.
 
위와 같은 진실위 결정을 근거로 심진구는 재심을 청구했고 지난 2012년 1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26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판사는 이날 판결문에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과 증인들의 법정 진술 등에 비춰보면 지난 1986년 심씨가 불법구금을 통해 고문을 받음으로써 허위자백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1986년 심진구를 고문했던 전 안기부 수사관 구아무개는 2012년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서 "심진구를 고문한 적이 없다. 인간적인 훈계차원의 가벼운 꿀밤 정도만 때렸다"라고 주장했다.

그 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린 심진구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40여 일이 지난 2014년 11월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올해 6월 24일 지난 2012년 '심진구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심진구를 고문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던 전 안기부 수사관 구아무개는 위증죄로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구속되었다. 안기부에서 고문을 한 가해자가 구속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었다. 하지만 법원이 책임을 물은 건 구아무개 수사관의 고문이 아니라 그의 위증이었다.
 
 2004년 생존시 심진구씨
▲  2004년 생존시 심진구씨
ⓒ 오마이뉴스
  
"가해자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이 세상을 활보하고"
 

이날 재판 결과에 대해 심진구의 아내는 이렇게 감회를 밝혔다.
 
남편이 못 보고 떠나셨어요. 구아무개 전 안기부 수사관이 굉장히 뻔뻔하게 재판에서 진술하고. 남편이 분노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저 사람 처벌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셨는데...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시면서도 눈을 못 감고... 감겨도 자꾸 뜨고... 잔혹한 고문을 하고도 가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가면서 이 세상을 활보하고... 고문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더 중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위증죄로만 판결을 해서 조금 아쉽네요.
 
심진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기를 고문한 안기부 요원들의 몽타주까지 그리면서 진실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공소시효 때문에 수사와 처벌이 불가능했다.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는 반인륜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없이 가해자를 처벌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는 왜 국가폭력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률을 아직도 제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구아무개 전 안기부 수사관은 심진구나 그 유족에게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번 판결에 불복해 "처벌이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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