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해외동포의 평양-서울 나들이①(92-08년) -오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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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초 로스앤젤레스로 이사온 뒤 사회문제에도 눈떠 LA교향악단 이사, California Club 회원 등 주류사회에서 활동하던 중 1990년, 미국한인동포사회의 정치력 신장을 위해1.5세 청년들이 시작한 Korean American Coalition(한미연합회) 이사장으로 봉사하던 중 1992년 4.29 LA흑인폭동도 한인단체들과 함께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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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재미한인의사회장단의 권유에 따라 학술교류단원으로 평양에 갔다. 고려호텔에서 인공관절치환수술 강연 뒤 인공관절기, 수술기구, 시청각교육자료와 논문들을 평양의학대학병원에 기증했다. 이어 북의 역사 사적지와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과 원산과 금강산도 돌아보고 귀국했다.
“우리 일행의 송별의 밤, 우리는 마치 통일을 이룬 기분이었다. 술이 거나해진 나는 리정호 동무의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리 동무, 나 내일 평양 못 떠나는 거 아냐?” 물으니, 곧 그가 “무슨 말……?”, “아, 내가 북에 심한 말 많이 했잖아. 강연 때 CIA다, 안기부다 떠들어대고, 의사들이 치료하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해야할 말 못하면 되겠느냐, 훈장을 주렁주렁 가슴에 단 혁명원로들 데리고 병정놀이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위대한 수령께선 이제 좀 쉬셔도 된다…… 이러다간 나 아주 공화국 품에 안기는 거 아니냔 말이야?” 했더니 그가 곧, “아따, 오 선생, 떨리기는 떨리는 모양이구먼. 공화국에는 떠는 사람 둘 자리 없이요” 모두들 한 바탕 웃고 또 마셨다.
밤이 깊도록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내일이면 헤어져야 할 아쉬움의 마지막 정을 쌓았다. 이들이 정말 우리가 그토록 미워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던 사람들이란 말인가?”(오인동, 『평양에 두고온 수술가방』, 창비, 2010)
북에 다녀온 뒤 LA 한국문화원에서 분단역사를 읽던 중, 강대인 박사로부터 김대중 야당 총재의 인공엉덩이관절 수술 의뢰를 받고 1995년, 서울에서 주치의들과 함께 진단하고 수술 결정을 했다. 식사 끝에 부인 이희호 여사가 조용히 나를 한편으로 데리고 가서, “선생님, 저 양반은 의사가 처방한 약도 음식도 제대로 따르지 않으니 이번 수술뒤엔 아주 단단히 주의를 주셔달라”고 하기에 어쩜 아내 말 듣지 않는 나와 똑같아 속으로 웃었죠.
수술은 미국서 하기로 했는데 얼마 뒤 남에서 해야겠다고, 그러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해야겠다고 하던 중 정치계의 여러 상황변화로 인해 연기되다가 선거가 다가오며 취소되었다. 김 총재가 건네준 책 『3단계 통일론』도 읽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미국 주류사회의 남과 북 Korea 관련 회의들에 참여해 통일문제에 대해 발언하며 토론도 하다보니 분단된 Korea 문제 미국 전문가들과도 가깝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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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편은 92년 첫 방문 때 만났던 북 보건성 최창식 부부장과 98년 1월 재회, 재미한인의사회의 제 2차 평양 의학학술교류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아래 오른편은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 박동근 교수. 남북 두 지도자에 전달한 조국통일 정책 건의서 내용에 대해 논의했다. [사진제공 - 오인동]](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1/201025_81625_2810.jpg)
![1998년 1월 Korea-2000의 「남북 두 지도자에 드리는 통일정책 건의서」를 서울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평양에서 김정일 총비서에 전달했다. 서울에서 임동원 총재, 평양에서 통일전선부 최승철/신병철 통전부 국장과 만났다.위는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 아래는 김일성대학 리학수 철학 교수와 윤병철 참사.북의 정치이념과 사상과 사회주의 제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사진제공 - 오인동]](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1/201025_81630_4740.jpg)
1998년 1월, 서울서 임동원 총장을 만나 ‘건의서’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중국서 김현환 박사와 평양에서 통일전선부 신병철/최승철 국장을 만나 김정일 총비서에 전했다. 한편, ’92년 방문 때 만났던 보건성 최창식 부상과 재회하니 평양의대병원과 의학교류에 대한 논의도 했다. 그리고 김일성대학 리학수 철학교수와 윤병철 참사가 찾아와 북의 정치이념과 사회제도에 대한 얘기들을 나눴다.
그리고 ‘건의서’를 읽은 김일성대학 박동근 정치경제학 교수와 만나 대화하며 역사박물관도 돌아보며 밤늦게까지 보드카 마시며 토론했다. 유럽동포 사회에서 강연한 적이 있는 그는 ‘건의서’에 동의한다며 실행여부는 내가 만난 통전부(통일전선부) 간부들에 달렸다고 했다. 그는 민족통일연구실장이며 김정일 총비서의 대학시절부터의 스승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임동원 총장이 권했던 김용순 비서는 만나지 못했다.
남북분단 뒤 70년대까지 북의 경제는 남보다 우월했으나 공산권 붕괴 뒤 90년대 후반, 북은 ‘고난의 행군’에 시달렸다. 그 춥던 겨울, 평양 거리에 걸린 “가는 길 험해도 웃으며 가자”는 표어를 봤다. 난방이 안 된 평양대극장에서 내일의 북을 이어갈 중학생들에게 보여주는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 공연도 보았다. 호텔로 가는 길에 본 표어 “나중에 웃는자가 더 행복하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했다.
서울에 들려 임동원 총재와 만나 경과를 알려드리고 귀국했다.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서울에 다녀 온 뒤, Korea 통일관련 미국논단 PCIP, WAC 등에 참여하며 Nautilus 논단에 기고하고 <NYT>, <LA Times> 신문 등에 기고도 했다.
![2006년 광주 6.15공동선언 기념대회에 최승철이 북 대표단장으로 왔다. 필자와 임동원, 최승철. 98년 1월 평양에서 Korea-2000의 ‘건의서’를 최 국장에 건네고 임동원 총재의 남북대화 계획도 전했다. [사진제공 - 오인동]](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1/201025_81626_298.jpg)
![2006년 광주 6.15공동선언 기념대회. 왼편부터 문정인 교수, 하나 건너 이종석 장관, 오인동, 임동원 장관, 북 최승철 대표단장,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 [사진제공 - 오인동]](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1/201025_81627_298.jpg)
![2007년 10월, 정상회담 차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자 북측에서 맞이하는 최승철. [사진제공 - 오인동]](https://cdn.tongilnews.com/news/photo/202101/201025_81628_299.jpg)
2000년, 김대중/김정일 6.15공동선언으로 남북 교류·왕래가 시작되고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남.북.해외측위원회가 발족되어 많은 활동도 시작되었다. 2006년, 광주 6.15 기념대회에서 8년전, 북에서 만났던 최승철이 북 대표단장으로 내려왔다. 그가 내 이름을 또렷이 부르며 손을 잡았다. 승진한 최창식 보건상도 왔다며 그 식탁에 가니 3번째 만나는 우린 너무나 반가웠다.
“그동안 왜 공화국에 와주지 않았냐”기에 곧, 농조로 “한 번 초청이라도 해봤나?” 했더니 대답을 못해요. 곧 “아냐, 농담이야! 농담… 남녘 의사들도 꽤 방문했다던데?”하며 분위기를 바꿨죠. 북 동년배 인사들과는 이런 걸쭉한 대화도 해요. 백낙청 6.15남측위 상임대표가 안경호 북측위원장을 소개했다.
2007년, 노무현/김정일 10.4 남북평화번영선언을 했으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시작되어 6.15공동선언 기념 금강산 민족공동행사에서 북측 해외동포위원회 김천희 부국장과 만나니 평양 의대병원선생들이 나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다는 얘기에 가슴이 뜨끔했다. 10월, 6.15미국위는 워싱톤에서 유럽, 호주 등 6.15해외지역위원들과 통일토론회를 마친 뒤 박소은, 이행우 위원장들과 뉴욕 북 유엔대사관 신선호 대사/박성일 참사관을 만나 통일촉진 대화를 나눴다.
그 뒤 박 참사가 관절염으로 고통받고 있는 친척의 치료에 자문해 주다보니 2006년 광주에서 최 보건상을 당황케 했던 일과 김천희 부국장의 말이 되살아 왔다. 박 참사에게 인공관절수술을 돕기 위해 평양방문을 주선해 달라 했다. 마침,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오~ 필승Corea!’ 함성을 들은 뒤 연구하기 시작한 모국의 로마자 국호 『꼬레아Corea, 코리아Korea』의 연원에 대한 역사서를 서울에서 출판했다. 그 책 몇 권을 북 사회과학원과 문영호 언어학연구소장에 전해 달라고 박성일 참사에게 건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