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8일 수요일

“통일운동 자신감을 얻었다”

<기고> 남북공동응원단 활동과 앞으로의 통일운동
이하나 통신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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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8  16: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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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나 통신원(남북공동응원단 홍보팀장,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정책국장)


평창올림픽이 ‘평화’올림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평창에서 전국으로 울려퍼진 “반갑습니다” “우리는 하나다” “다시 만납시다” 외침들. 이 현장에 ‘남북공동응원단’이 있었다.
평화올림픽이 국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순간을 목도한 우리는 통일운동에 자신감을 얻었다. 남북공동응원단이 느낀 평창올림픽의 의미와 소감을 전한다. /필자 주

우리는 왜 평창으로 향했나 - 단일기가 물결이 되었을 때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내내 낮이나 밤이나 단일기를 든 환영이 계속됐다. [사진 - 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평창올림픽이 시작될 때를 돌이켜보면, 자칫 아찔한 장면들이 있었다. 만경봉호가 남북의 바닷길을 열며 묵호항에 도착하는 순간, 항구에는 북측 국기를 불태우며 “돌아가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민들의 염원과 동떨어진 일부세력의, 말 그대로 ‘난동’이었는데 이를 처음에 막지 못한 것이 통일운동가 한 사람으로서 가슴 아팠다.”
​김병규(응원단 운영팀장, 한국진보연대 반전평화위원장)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을 앞둔 강릉아트센터 앞에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북측 국기를 태우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개막식 현장에서도 곳곳에 평화올림픽 ‘반대’ 집회가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올림픽이 진행되면서, 평화올림픽을 반대하는 이들의 소동은 맥을 못 추고 가라앉았다. 남북공동응원단의 ‘장외’ 응원이나 다름없는 환영활동과 이에 호응한 국민들 덕분이었다.
응원단은 평창과 강릉 등지를 단일기로 뒤덮었다. 대학생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에서 단일기를 들고 통일노래를 부르며 환영분위기를 만들었고, 개막식 날에는 전국에서 모인 평화통일 활동가들이 단일기 거리를 만들었다.
어느새 평창에서는 관중들은 물론 자원봉사자들도, 버스 기사도, 관계자들까지도 모두가 자연스럽게 단일기를 들었다. 우리가 들기 시작한 단일기가 하나의 물결이 되는 것을 본 순간, 우리는 ‘평화올림픽을 원하는 것은 국민들의 마음’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응원도, 평화도 우리 힘으로
  
▲ 남북공동응원단은 경기장 관중들 앞에 서서 응원을 지휘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남북공동응원은 생각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시작했다. 응원단 좌석은커녕 입장권을 구하는 것조차 어려워 단일팀의 첫 경기에는 고작 11명만이 입장할 수 있었다. 이후 경기마다 응원단은 새벽부터 줄을 서가면서 간신히 표를 개별 구매해 입장해야 했다.
단일기를 공급하는 것도 ‘일’이었다. 아이스하키 경기마다 4-5천장의 단일기가 필요해 준비한 단일기는 금새 동이 났다. 특히 ‘독도가 있는 단일기’를 달라는 시민들의 성원이 대단했고, 경기가 끝나도 버려지는 단일기가 단 한 장도 없었다.
긴급 모금을 통해 단일기를 제작해야 했다. 개막식에는 미처 단일기를 충분히 배포하지 못했는데 개막식 공동입장의 순간 관중석 가득 단일기가 나부꼈다면 그것이야말로 평화올림픽 시작의 선언이 아니었을까. 못내 아쉬운 장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북의 만남을, 감동을 만들었다. 경기장에서 처음 만났지만 같은 구호, 같은 박자로 응원소리를 맞추어내고 단일기 파도타기를 만들었다.
22일 북측응원단이 강릉 정동진에서 ‘깜짝’ 공연을 하던 날, 전농 회원들은 진행 중이던 행사를 축소하고 달려가 눈물의 공연을 만들었다. 24일 원주체육관 북측 응원단의 마지막 공연에는 6천명의 시민들이 체육관을 가득 채우고 박수를 보내며 화답했다.
주어진 것은 없지만 갖은 노력 끝에 만들어 낸 남북의 만남. 남북관계의 현 주소를 드러내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응원도 평화올림픽도 저절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시민들이 외치는 ‘우리는 하나다’를 보며

  
▲ 경기장 앞에서 응원단이 나눠준 단일기를 들고 입장하는 시민들. [사진 - 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이 출전한 경기장 곳곳에는 어김없이 '우리는 하나다' 현수막이 내걸렸다. [사진 - 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아이스하키 경기장에 가득했던 수천명의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는 하나다!”를 외칠 때의 그 소리!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고윤혜(응원단, 부산대학생겨레하나)

남북공동응원단 활동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은 경기장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목소리다. 관중들은 숨죽이며 경기를 지켜보다가도 한 목소리로 응원을 했다.
14일 일본과의 경기에서 마침내 첫 골이 터졌을 때는 경기장이 터져나갈 듯 했다. 20일 단일팀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경기장 3층 구석에서부터 ‘힘내라’ 함성이 시작되면 경기장 전체 관중들이 한마음으로 단일팀을 응원했다.
시민들의 한 목소리를 이끌어낸 것은 관중 앞에 서서 응원을 지휘한 남북공동응원단이었다. 응원단 좌석이 보장되지 않았지만, 응원단은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전체 응원단이 지휘자가 되어 관중들과 함께하는 응원을 만들어냈다.
“관중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누가 앞에 서서 응원하자고 하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 않나. 그래서 ‘우선 신뢰를 주자’고 마음먹었다. 경기 시작 전에 먼저 단일기를 나눠주며 자기 소개와 인사도 하고, 응원구호를 연습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내 앞의 관중들이 온 몸과 표정으로 응원에 동참하는 것을 보면서, 매 순간 감동받았다”
권순영(응원단 서울팀장, 서울겨레하나 운영위원장)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만든 통일응원이라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관중들이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국민들이 단일팀을 믿고 지지하는 마음을, 응원으로 만들어 낸 것이 자랑스럽다.”
​전기훈(응원단 기획팀장, 부산민중연대 선전국장)

20대 통일의식이 걱정이라면? 민족을 만나게 해야
  
▲ 북측응원단의 모습. 남북 20대 응원단이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사진 - 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남북공동응원단의 대다수는 20대 대학생들이었다. 북측 사람을 만나는 것이 처음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통일을 책으로, 역사로 배운 학생들. 이들에게 응원단 활동은 남다르고 값진 경험이었다.
처음 북측응원단과 마주치자 수줍어하며 ‘하이파이브’를 위해 손을 내밀던 학생들. 북측 응원단이 손뼉을 마주쳐주자 폴짝폴짝 뛰며 기뻐하던 학생들. 20일 단일팀의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까지 모두 빠져나간 경기장. 마지막으로 떠나는 북측 관계자에게 “다시 만납시다”라고 인사를 건네는 대학생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북측응원단 200여명의 연령대는 17세에서 30세이고, 20대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남측응원단에도 대학생 100여명이 있었다. 이들은 같은 곳에서 10여일을 보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다.
이 젊은 20대들이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 대화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단일팀 선수들이 친한 언니 동생이 되었던 것처럼 20대 남북응원단 사이에도 그 못지않은 정과 민족애가 싹틀 수 있지 않았을까.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단일팀 논란과 20-30대에서의 부정적 반응에 대해 ‘요즘 20대 통일의식이 걱정’이라는 말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말 젊은 세대의 통일 의식이 걱정된다면 해결방안은 쉽다. 우선 만나게 해야 한다. 직접 만나고, 대화하는 것만큼 통일의식이 달라지는 계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다음세대를 위해 우선 해야 할 일이다. 남측응원단과 북측응원단이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응원 현장에서, 통일운동 자신감을 얻었다”
  
▲ 남북공동응원단의 최대 성과는 ‘자신감’이다. [사진 - 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남북공동응원단 활동을 마치고 응원단이 가장 크게 얻은 성과는 ‘자신감’이다. 스무 살 대학생부터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을 생생히 경험했던 사람까지. 다양한 세대의 응원단은 시민들과 호흡하며 ‘우리가 힘을 합치면 다시 통일시대를 열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대학생들은 “시민들이 통일을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들 너무 좋아해주셨다”고 고백하고, 보다 나이 많은 세대는 “2000년대에 비해 마음의 벽이 크지 않을까 했는데, 아직 뜨거운 통일열망이 살아있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고 말한다.
“응원단을 준비하며, ‘시민들이 얼마나 호응할까?’하는 걱정도 있었다. 남북교류가 멈춰있던 시기, 종북몰이에 우리 스스로 위축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관중들 표정과 몸짓에서 마음속에 살아있는 통일열망을 확인했고, 그 에너지가 발산되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구나’ 통일운동의 자신감을 가장 크게 얻었다.”
​이원규(응원단 응원팀장, 6.15부산본부 사무처장)

평창 이후 민간통일운동의 역할을 고민한다
  
▲ 남북공동응원단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 통일뉴스 이하나 통신원]
27일, 판문점에서는 패럴림픽 실무회담이 열렸다. 판문점을 오가는 남북이 벌써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통일대교 앞에서의 ‘소동’은 여전했고 앞으로도 남북관계는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고민은 본격적으로 열릴 화해시대 ‘민간통일운동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로 이어진다. 평창올림픽에서 남북공동응원단 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경험과 교훈을 준 생생한 현장이었다.
연초부터 매우 빠르게 또 조심스럽게 준비된 평창올림픽이었다. 오랜만에 열린 남북대화에서 과제는 산적했고, 정부도 안정적으로 ‘관’이 주도하는 올림픽을 치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평화올림픽은 결국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완성되었다.
그 과정에 민간이 만들어낸 응원이 톡톡한 역할을 했다. 올림픽에 방문한 김영남 상임위원장, 김여정 제1부부장이 “우리는 하나다”에 감동받았다 말하고, 문재인 대통령도 “공동응원이 전 세계에 감동을 줬다”고 언급한 것처럼 말이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남북이 신중하게 열어낸 길에서, 남북공동응원단은 남북을 잇는 뜨거운 환영열기를 만들어 냈다. 이는 고스란히 평화올림픽의 밑거름이 되었고 앞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동력이 될 것이다. 남북관계 복원이 본격화되는 만큼 앞으로는 보다 원활한 민관협력을 당부하고 싶다. 민간 통일운동은 이번 남북공동응원처럼 남과 북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안내자로서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이연희(6.15남측위 기획위원장,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사무총장)

남북관계가 열리고 많은 기회의 장이 열릴 것이라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어떤 기회도 저절로 찾아오지는 않았다. 경기장 사람들의 손에 단일기를 쥐어주기까지 넘어야 했던 산, 그렇게 우리가 건넨 단일기가 큰 파도와 물결을 만들어낸 장면을 기억하며, 우리는 이번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다음 통일운동을 준비한다.

3월 1일에 세운 소녀상 할머니는 한을 풀지 못했다

18.03.01 12:06l최종 업데이트 18.03.01 12:06l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지금도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필자만의 평화적인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 사회의 여러 노력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평화의 소녀상 답사를 넘는 지역 답사의 의미도 갖게 됨을 의미한다) - 기자 말 
당진 평화의 소녀상  당진 평화의 소녀상은 다른 일반적인 소녀상과 달리 꼿곳이 서서 하늘과 새를 바라보고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당진 평화의 소녀상은 다른 일반적인 소녀상과 달리 꼿곳이 서서 하늘과 새를 바라보고 있다.
ⓒ 홍윤호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심훈, <그날이 오면> 일부 

1930년 3월 1일, 고향인 충남 당진에 터 잡았던 시인이자 소설가 심훈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감격을 되살리며 독립의 염원을 담아 지금도 마음을 절절하게 뒤흔드는 이 시를 썼다. 생전에는 발표하지 못했던 이 시는 해방 이후인 1949년에야 발표된다. 

<상록수>로도 잘 알려진 심훈.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고 퇴학당한 학생, 신문사 기자이자 영화배우에 감독이기도 했던 청년, 그리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검열에 걸렸던 일제의 감시 대상, 고향 당진에서 농민문학을 개척한 계몽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그날'을 보지 못하고 35세의 짧은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 갔다. 

심훈이 1930년 3월 1일, 감격에 겨워 <그날이 오면>을 쓴 그날로부터 86년 뒤인 2016년 3월 1일, 그의 고향 당진시는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앞 광장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저항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 당진
심훈  시 <그 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고향인 당진에서 필경사를 짓고 살다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 심훈 시 <그 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고향인 당진에서 필경사를 짓고 살다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 홍윤호
심훈을 통해 알 수 있듯 당진은 저항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이다. 1919년 3월 10일, 16세의 원용은 학생이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와 고향인 면천(현재 당진시 면천면)에서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면천의 만세운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학생 주도의 3.1 운동'이었다.  

당진은 이웃한 서산과 함께 천주교가 가장 먼저 뿌리내린 고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당진 출신이고, 100년을 넘긴 천주교회가 여럿인 고장이다. '천주 앞의 평등'을 내세우는 바람에 서슬 퍼런 박해가 이어진 조선말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새롭고 진보적인 사상과 종교를 빠르게 흡수하고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역사에 일관된 흐름을 남긴 당진. 지금은 아산만과 바다로 이어지는 제철 산업 단지가 거대한 공단의 긴 띠를 형성하였고, 그 배후도시가 되면서 인구가 늘어나 2012년 '군'에서 '시'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시내가 크게 변모하고 있지만, 조금만 벗어난 시골에서는 기지시줄다리기 같은 민속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고장. 그만큼 변화가 빨라 좀 어지럽게도 보이는 당진시내에 들어서면 변화를 반영하듯 구도심과 신도시가 뚜렷하게 구별된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뒷모습  당진 시가지가 확장되어 소녀상 앞에는 상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소녀상의 새는 그 위를 날아가려 하는 것 같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뒷모습 당진 시가지가 확장되어 소녀상 앞에는 상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소녀상의 새는 그 위를 날아가려 하는 것 같다.
ⓒ 홍윤호

그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당진종합버스터미널도 15년 된, 비교적 근래의 시설이고 주변에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아침에 일찍 가니 도로 건너편의 고층 빌딩들이 소녀상에 그늘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수도권의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가 단지들이다. 그래서 이 소녀상을 잘 보려면 그늘이 없는 한낮에 찾는 것이 좋다. 

당진종합버스터미널 광장 한쪽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당진 평화의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1002명의 시민과 34개 시민단체의 힘을 모아 6천만 원의 성금으로 세웠다. 이 소녀상은 다른 고장의 일반적인 소녀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우선 한복을 입은 소녀상은 앉아 있지 않고 우뚝 서 있다. 13~16세 정도의 소녀 형상이라 한다. 오른팔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었는데, 그 손 위에는 한 마리 새가 놓여 있으며, 소녀의 시선은 새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새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당진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오른손 위에 놓여 있는 새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 평화의 소녀상 오른손 위에 놓여 있는 새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 홍윤호

소녀상을 만든 배효남 작가는, 소녀가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은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고, 손 위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새는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미래 세대에까지 민족의 아픔과 슬픔, 역사적 교훈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바닥을 잘 들여다보니 할머니의 그림자와 평화를 상징하는 나비 그림도 있다. 

소녀상 옆 바닥에는 평화의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새긴 글이 있다. 

"일제에 의하여 꽃다운 나이에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인권과 평화가 넘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당진시민이 마음을 모아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합니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아래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있고, 그 파장 위로 할머니 그림자와 나비가 그려져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아래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있고, 그 파장 위로 할머니 그림자와 나비가 그려져 있다.
ⓒ 홍윤호

당진은 충남 지역의 마지막 위안부 생존자 이기정 할머니의 고향이다. 1925년 당진(송산면 당산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8세 때 위안부로 끌려가 싱가폴과 미얀마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뒤 해방 후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위안부 후유증으로 결혼 후에도 불임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고, 중풍으로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갔다. 2017년 11월 11일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나셨고, 당진시청에서 시민장을 치른 후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소녀상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소녀상의 시선과 손과 새가 모두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기정 할머니가 고통과 한으로 점철된 이 세상의 육신을 떠나 넋이나마 자유롭게 유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한을 품고 가신 할머니께 소녀상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소녀상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새와 손과 소녀상의 시선이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소녀상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새와 손과 소녀상의 시선이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다.
ⓒ 홍윤호

하지만 새삼 이렇게 또 한 분의 할머니를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괴감일지 모른다. 그분들이 생전에 원했던 것이 이루어졌나.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진정한 사과, 여성 인권과 명예 회복, 한일위안부 합의 파기, 이 말들이 아직도 허공을 떠돌고 있는 듯하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그날이 오면' 두개골이 깨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겠다는 심훈의 지극한 열망. 이미 그날이 온 지 73년째가 되어가지만 '그날'의 열정과 감동은 그저 역사 속의 박제물로만 남은 건 아닌가. 

2018년 3월 1일을 앞두고 2016년 3월 1일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보며 묻게 된다. 

심훈이 1919년 3월 1일에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 3월 1일에 노래한 그 해방, 우리는 삼각산이 일어나고 한강물이 뒤집힌 그날에 얻은 해방으로부터 몇 걸음이나 더 앞으로 나가 있는가. 

※ 답사 정보 

*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IC에서 나와 32번 국도 당진, 서산 방향으로 가면 당진에 닿는다. 평화의 소녀상은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앞 광장 서쪽에 세워져 있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이용해 당진에 가면 터미널 정문으로 나오자마자 오른쪽에 위치한다. 차를 가지고 가면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주차 공간이 넓고 주차비가 저렴하다. 

* 당진은 시내와 북쪽 해안의 공단 지대를 제외하면 전통적인 시골 풍경이 남아 있는 고장이다. 시간이 되면 송악 기지기줄다리기박물관에 가보거나 심훈 생가인 필경사에 들러보면 좋다. 필경사는 심훈이 직접 설계해서 지은 집으로, 1935년 <상록수>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라면 합덕의 솔뫼성지에 가보면 좋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의 부조  농촌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했던 민속놀이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의 부조 농촌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했던 민속놀이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 홍윤호

3월 1일에 세운 소녀상 할머니는 한을 풀지 못했다

18.03.01 12:06l최종 업데이트 18.03.01 12:06l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지금도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필자만의 평화적인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 사회의 여러 노력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평화의 소녀상 답사를 넘는 지역 답사의 의미도 갖게 됨을 의미한다) - 기자 말 
당진 평화의 소녀상  당진 평화의 소녀상은 다른 일반적인 소녀상과 달리 꼿곳이 서서 하늘과 새를 바라보고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당진 평화의 소녀상은 다른 일반적인 소녀상과 달리 꼿곳이 서서 하늘과 새를 바라보고 있다.
ⓒ 홍윤호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심훈, <그날이 오면> 일부 

1930년 3월 1일, 고향인 충남 당진에 터 잡았던 시인이자 소설가 심훈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감격을 되살리며 독립의 염원을 담아 지금도 마음을 절절하게 뒤흔드는 이 시를 썼다. 생전에는 발표하지 못했던 이 시는 해방 이후인 1949년에야 발표된다. 

<상록수>로도 잘 알려진 심훈.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고 퇴학당한 학생, 신문사 기자이자 영화배우에 감독이기도 했던 청년, 그리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검열에 걸렸던 일제의 감시 대상, 고향 당진에서 농민문학을 개척한 계몽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그날'을 보지 못하고 35세의 짧은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 갔다. 

심훈이 1930년 3월 1일, 감격에 겨워 <그날이 오면>을 쓴 그날로부터 86년 뒤인 2016년 3월 1일, 그의 고향 당진시는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앞 광장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저항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 당진
심훈  시 <그 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고향인 당진에서 필경사를 짓고 살다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 심훈 시 <그 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고향인 당진에서 필경사를 짓고 살다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 홍윤호
심훈을 통해 알 수 있듯 당진은 저항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이다. 1919년 3월 10일, 16세의 원용은 학생이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와 고향인 면천(현재 당진시 면천면)에서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면천의 만세운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학생 주도의 3.1 운동'이었다.  

당진은 이웃한 서산과 함께 천주교가 가장 먼저 뿌리내린 고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당진 출신이고, 100년을 넘긴 천주교회가 여럿인 고장이다. '천주 앞의 평등'을 내세우는 바람에 서슬 퍼런 박해가 이어진 조선말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새롭고 진보적인 사상과 종교를 빠르게 흡수하고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역사에 일관된 흐름을 남긴 당진. 지금은 아산만과 바다로 이어지는 제철 산업 단지가 거대한 공단의 긴 띠를 형성하였고, 그 배후도시가 되면서 인구가 늘어나 2012년 '군'에서 '시'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시내가 크게 변모하고 있지만, 조금만 벗어난 시골에서는 기지시줄다리기 같은 민속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고장. 그만큼 변화가 빨라 좀 어지럽게도 보이는 당진시내에 들어서면 변화를 반영하듯 구도심과 신도시가 뚜렷하게 구별된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뒷모습  당진 시가지가 확장되어 소녀상 앞에는 상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소녀상의 새는 그 위를 날아가려 하는 것 같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뒷모습 당진 시가지가 확장되어 소녀상 앞에는 상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소녀상의 새는 그 위를 날아가려 하는 것 같다.
ⓒ 홍윤호

그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당진종합버스터미널도 15년 된, 비교적 근래의 시설이고 주변에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아침에 일찍 가니 도로 건너편의 고층 빌딩들이 소녀상에 그늘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수도권의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가 단지들이다. 그래서 이 소녀상을 잘 보려면 그늘이 없는 한낮에 찾는 것이 좋다. 

당진종합버스터미널 광장 한쪽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당진 평화의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1002명의 시민과 34개 시민단체의 힘을 모아 6천만 원의 성금으로 세웠다. 이 소녀상은 다른 고장의 일반적인 소녀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우선 한복을 입은 소녀상은 앉아 있지 않고 우뚝 서 있다. 13~16세 정도의 소녀 형상이라 한다. 오른팔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었는데, 그 손 위에는 한 마리 새가 놓여 있으며, 소녀의 시선은 새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새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당진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오른손 위에 놓여 있는 새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 평화의 소녀상 오른손 위에 놓여 있는 새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 홍윤호

소녀상을 만든 배효남 작가는, 소녀가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은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고, 손 위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새는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미래 세대에까지 민족의 아픔과 슬픔, 역사적 교훈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바닥을 잘 들여다보니 할머니의 그림자와 평화를 상징하는 나비 그림도 있다. 

소녀상 옆 바닥에는 평화의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새긴 글이 있다. 

"일제에 의하여 꽃다운 나이에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인권과 평화가 넘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당진시민이 마음을 모아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합니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아래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있고, 그 파장 위로 할머니 그림자와 나비가 그려져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아래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있고, 그 파장 위로 할머니 그림자와 나비가 그려져 있다.
ⓒ 홍윤호

당진은 충남 지역의 마지막 위안부 생존자 이기정 할머니의 고향이다. 1925년 당진(송산면 당산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8세 때 위안부로 끌려가 싱가폴과 미얀마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뒤 해방 후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위안부 후유증으로 결혼 후에도 불임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고, 중풍으로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갔다. 2017년 11월 11일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나셨고, 당진시청에서 시민장을 치른 후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소녀상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소녀상의 시선과 손과 새가 모두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기정 할머니가 고통과 한으로 점철된 이 세상의 육신을 떠나 넋이나마 자유롭게 유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한을 품고 가신 할머니께 소녀상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소녀상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새와 손과 소녀상의 시선이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소녀상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새와 손과 소녀상의 시선이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다.
ⓒ 홍윤호

하지만 새삼 이렇게 또 한 분의 할머니를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괴감일지 모른다. 그분들이 생전에 원했던 것이 이루어졌나.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진정한 사과, 여성 인권과 명예 회복, 한일위안부 합의 파기, 이 말들이 아직도 허공을 떠돌고 있는 듯하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그날이 오면' 두개골이 깨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겠다는 심훈의 지극한 열망. 이미 그날이 온 지 73년째가 되어가지만 '그날'의 열정과 감동은 그저 역사 속의 박제물로만 남은 건 아닌가. 

2018년 3월 1일을 앞두고 2016년 3월 1일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보며 묻게 된다. 

심훈이 1919년 3월 1일에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 3월 1일에 노래한 그 해방, 우리는 삼각산이 일어나고 한강물이 뒤집힌 그날에 얻은 해방으로부터 몇 걸음이나 더 앞으로 나가 있는가. 

※ 답사 정보 

*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IC에서 나와 32번 국도 당진, 서산 방향으로 가면 당진에 닿는다. 평화의 소녀상은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앞 광장 서쪽에 세워져 있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이용해 당진에 가면 터미널 정문으로 나오자마자 오른쪽에 위치한다. 차를 가지고 가면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주차 공간이 넓고 주차비가 저렴하다. 

* 당진은 시내와 북쪽 해안의 공단 지대를 제외하면 전통적인 시골 풍경이 남아 있는 고장이다. 시간이 되면 송악 기지기줄다리기박물관에 가보거나 심훈 생가인 필경사에 들러보면 좋다. 필경사는 심훈이 직접 설계해서 지은 집으로, 1935년 <상록수>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라면 합덕의 솔뫼성지에 가보면 좋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의 부조  농촌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했던 민속놀이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의 부조 농촌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했던 민속놀이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 홍윤호

마음은 벌써 번식지에, 화사한 깃털 뽐내는 황여새

윤순영 2018. 02. 28
조회수 594 추천수 1
산수유 마을 '잔칫상'에 몰려들어 열매 포식
참빗으로 빗은 몸매에 형광빛 꼬리 깃털 눈길

크_포맷변환_YSY_1943_00001.jpg» 참빗으로 빗어내린 것처럼 고운 깃털의 황여새.

입춘이 지나면서 우리나라를 찾아와 겨울을 난 새들의 생활과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유난히 추웠던 올겨울 추위는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겨울철새들은 혼인색을 띤 채 번식지로 돌아갈 준비로 분주하다. 번식를 향해 북상하면서 먹이가 풍부한 곳으로 찾아든다. 힘든 번식을 앞두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크기변환_YSY_2022.jpg» 산수유 열매를 따먹는 황여새.

크기변환_YSY_2007.jpg» 열매를 통째로 삼키고 나중에 씨앗만 배설한다.

2월 초순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향리천 주변의 산수유나무에 황여새 무리가 몰려들었다개군면은 산수유 마을로 새들에게는 잔칫상이나 마찬가지다황여새는 바짝 마른 산수유 열매를 즐겨먹는다. 인근 향리천 보에는 얼지 않고 흐르는 물이 있어 마른 목을 축이고 소화를 돕기에 제격이다. 물 찾아 먹이 찾아 번거롭게 멀리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크기변환_YSY_4417.jpg» 황여새는 나무꼭대기가 가장 편한 안식처다.

기변환_DSC_3821.jpg» 개군면 상자포리 향리천 양 방향을 따라 산수유 열매가 풍성하게 열렸다.

기변환_YSY_4330.jpg» 황여새는 은백양나무 꼭대기에서 주변을 살피다 안전을 확인한 후 먹이를 찾아 나선다.

황여새는 대개 나무꼭대기 가까이 앉는다이곳 은백양나무 꼭대기도 예외가 아니다무리를 지어 주변을 한참 살피다 한 마리가 날아오르자 무리 전체가 산수유나무로 달려든다안전이 확보된 것이다황여새는 산수유나무에 매달려 급하게 열매를 쪼아 먹는다열매를 쪼아먹다 또다시 한마리가 날아오르면 일제히 날아올라 순식간에 은백양나무 꼭대기로 돌아간다.

크기변환_YSY_2620.jpg» 산수유나무로 달려드는 황여새.

크기변환_YSY_2645.jpg» 산수유나무에 앉자마자 열매를 먹기 시작한다.

물을 마실 때에도 같은 행동을 보이며 이를 하루 종일 반복한다황여새 무리는 조직적인 체계와 질서 아래 움직인다새들은 열매를 따먹을 때와 물을 마실 때 무방비 상태가 된다개군면 면소재지는 차량과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번잡한 곳인데 황여새가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이 마을을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기변환_YSY_3983.jpg» 산수유나무는 황여새의 풍요로운 밥상이다.

크기변환_YSY_2470.jpg» 황여새가 열매를 따먹는 모습이 익숙하고 솜씨가 좋다.

크기변환_YSY_2044_01.jpg» 그렇지만 아무 열매나 먹지 않는다. 질 좋은 산수유 열매를 골라 목을 길게 뻗는다.

황여새가 무리를 지어 민첩한 행동을 하는 것은 맹금류의 습격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맹금류는 작은 새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그러나 맹금류는 인가와 사람을 기피한다맹금류의 생활방식을 아는 새들은 천적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려고 사람 쪽으로 다가서는 선택을 했다

크기변환_YSY_1964.jpg» 산수유 열매를 물고 잽싸게 날아가는 황여새.

크기변환_YSY_2565.jpg» 집중해서 열매를 따먹다가도 주위 낌새가 이상하면 재빨리 자리를 피한다.

크기변환_YSY_2704.jpg» 황여새는 이런 행동을 하루 종일 반복한다. 생존 본능이다. 뒤로 꼬리 끝이 붉은 홍여새도 보인다.

작은 새들은 매우 다양한 환경에서 생활하지만 특히 무리를 짓는 겨울철새들은 시골 민가 근처도심 정원공원 등 사람과 인접한 곳에 정겹게 찾아와 감고염향나무 열매회화나무 열매찔레 열매꽃사과 열매를 비롯한 나무 열매와 새순을 먹는다.

 황여새가 물 마시는 연속 동작

크기변환_YSY_3070.jpg» 주변의 안전부터 살핀다.

크기변환_YSY_3094.jpg»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부리를 깊숙이 물에 담그는 황여새.

크기변환_YSY_3072.jpg» 황여새는 물을 마실 때 아래부리를 두레박처럼 이용해 넘치게 퍼올려 삼킨다.

크기변환_YSY_3095_01.jpg» 황여새는 3회 정도 빠르게 물을 먹는다. 나무열매를 따먹을 때도 바쁘게 움직인다.

크기변환_YSY_3273.jpg» 곧바로 자리를 뜬다.

크기변환_YSY_3096.jpg» 물을 적당히 마시지 않으면 메마른 열매 표피가 벗겨지지 않고 씨앗과 함께 그대로 배설된다.

황여새의 겨울나기는 녹록하지 않다향리천의 텃새 직박구리가 방해한다직박구리는 까치만큼이나 영역에 대한 애착이 강해 자기 영역에 들어온 황여새가 못마땅하다전국을 떠도는 황여새는 어디를 가나 낯설어하고 텃새가 텃세를 부리는 힘은 막강하다.

두 마리의 직박구리가 황여새 무리를 쫒아 다니며 심통을 부리는 바람에 열매를 따먹기가 순조롭지 못하다그나마 수적으로 우세하여 직박구리 두 마리가 텃세를 부리기엔 역부족이지만, 황여새는 계속해서 직박구리의 눈치를 봐야 한다.

크기변환_YSY_4101.jpg» 황여새를 괴롭히는 향리천 텃새 직박구리.

크기변환_YSY_3281.jpg» 박새도 산수유나무를 찾는다.

황여새는 나는 모습이 몸에 비해 짧아 보인다날개를 매우 빠르게 퍼덕이며 오징어처럼 추진력을 이용해 날아가는 듯한 모양이 특이하다한국에는 전국적으로 찾아와 겨울을 나는 겨울철새이나 규모는 해에 따라 불규칙하다.

보통 1030마리때로는 50~100마리더 큰 무리는 200여 마리가 넘는 경우도 있다무리를 지어 주로 나무 위에서 생활하고 땅 위에는 목욕과 물을 마시기 위해서만 내려오지만 뛰어다니다 땅에 떨어진 나무열매를 주워 먹기도 한다.

크기변환_YSY_1948.jpg» 급하게 산수유 열매를 따먹는 와중에도 좋은 열매를 고르는 황여새.

크기변환_YSY_2413.jpg»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는 곳을 찾아온 황여새. 첫 번째와 두 번째 날개깃 무늬가 탈처럼 보인다.

몸길이는 20㎝이고 다른 새와 달리 특징적으로 멋진 긴 머리 깃이 있다머리와 몸 윗면은 흐린 분홍색을 띤 회갈색의 질감 있는 깃털이 비단결처럼 느껴진다꼬리 끝 부분은 검고 꼬리 끝에는 굵고 선명한 노란색 띠가 형광색처럼 두드러진다눈에는 길고 검은 선이 있고 멱은 검은색이다첫째 날개깃은 검은색이나 첫째 날개덮깃 윗면의 흰 줄과 날개 끝은 노란색이다.

크기변환_YSY_2645_01.jpg» 황여새는 화려하면서도 지나침이 없다. 꼬리 끝에 노란 띠가 있으면 황여새고 붉은 띠가 있으면 홍여새다.

크기변환_SY3_0305.jpg» 꼬리 끝에 붉은 띠가 있는 홍여새.

둘째 날개깃 끝 부분은 흰색이고 끝에 돌출된 붉은 깃털도 형광색처럼 눈에 띈다아래꼬리덮깃은 붉은색이고 배는 회갈색이다약한 소리로 찌리리리리’ 하고 반복해서 운다.

흔하지 않지만 겨울이면 우리 주변으로 정겹게 다가오는 새다스칸디나비아 북부에서 캄차카에 이르는 유라시아대륙 중부북미 북서부에서 번식하고유럽 중부와 남부소아시아중국 북부북미 중서부에서 월동한다.

·사진 윤순영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한겨레 환경생태 웹진 '물바람숲' 필자촬영 진행 이경희김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