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8일 일요일

진선미, 주말 9시간 밤샘 투혼…"테러 방지법 '디톡스'"


필리버스터 113시간째…23번째 토론자 이학영 이어가
곽재훈
기자
| 2016.02.28 14:53:51
정의화 국회의장과 새누리당의 테러 방지법 직권상정을 막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진행하고 있는 무제한 토론, 즉 필리버스터가 28일 정오 113시간째를 맞았다. 현재 23번째 토론자인 더불어민주당 이학영 의원이 연설 중이다.

지난 23일 더민주 김광진 의원의 토론으로 시작된 필리버스터는 금요일인 지난 26일, 김용익 의원(☞관련 기사 : 김용익 "국정원, 성생활도 들여다볼 수 있어")에 이어 배재정 의원이 밤 10시 30분께까지 3시간 40분간의 연설을 하며 14명째 발언자까지 토론을 마쳤다. 

배 의원에 이어 전순옥(3시간 31분), 추미애(2시간 35분), 정청래(11시간 40분) 의원이 연단에 올랐고, 이 가운데 정 의원은 앞서 은수미 의원이 최장 시간 연설 기록(10시간 18분)을 경신하며 특유의 입담을 과시해 SNS 등 온라인 공간에서 화제가 됐다. (☞관련 기사 : '참서비스인' 정청래 영상 화제 "정문헌이 누구냐면…") 

정 의원의 연설이 길어지며 본회의장 의석에서 장시간 대기해야 했던 진선미 의원도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새벽까지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9시간 14분 동안 연설을 끌어 갔다. 통상 토요일 오후는 정치 현안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이 저조한 시간대다. 하지만 오후 4시 22분께 연단에 오른 18번째 토론자 진 의원은 일요일 새벽 1시 37분까지 밤샘 투혼을 선보였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진 의원은 헌법 10조·17조·18조의 기본권 보장 내용을 강조하며 "사생활의 자유"가 테러 방지법으로 인해 침해받을 소지가 있다고 강조했다. 진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실시간으로 달리는 지지자들의 댓글 내용을 연설에서 그대로 소개하기도 했다. 

진 의원 다음으로는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을 따르는 더민주 내 정파 모임 '민평련(민주평화연대)' 회장이자 4선 중진인 최규성 의원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최 의원은 2시간 53분 동안, 그 다음 주자인 20번째 토론자 오제세 의원은 2시간 6분 동안 연설 릴레이를 이어 갔다. 일요일 아침 6시 44분께부터는 더민주 박혜자(2시간 37분), 국민의당 권은희(2시간 59분) 의원이 차례로 연단에 올랐고, 더민주 이학영 의원은 정오를 약간 넘긴 시각부터 연설을 시작했다. 

특히 권은희 의원은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관이었고, 외압으로 수사를 그만둬야 했다는 논란 때문에 시선을 모았다. 

권 의원은 "무제한 토론은 언젠가 끝나겠지만, 국민들께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오만한 질주를 포기하게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다. 권 의원의 소속 정당인 국민의당의 안철수 상임공동대표는 "필리버스터만으로는 (테러 방지)법 통과를 막을 수 없다. 필리버스터가 끝난 순간 바로 통과되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28일 새벽 국회 본회의 무제한 토론 발언자로 나서 연설을 이어가고 있다. 진 의원의 표정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연합뉴스

이종걸 더민주 원내대표 성명 "의회 민주주의 새 역사 쓴 100시간"
전날 밤 11시께, 진선미 의원의 차례에서 무제한 토론 시간이 누적 100시간을 넘어서자 이종걸 더민주 원내대표는 성명을 발표해 의미를 기렸다. 이 원내대표는 "참여하시는 의원님들도, 지켜보시는 국민들도, 보도하는 언론들도 지칠 법도 하건만 관심과 열기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며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시작할 때 이렇게 호응을 받을 줄 몰랐다"고 했다. 

이 원내대표는 "(23일 낮) 제가 필리버스터에 대한 생각을 복안으로 간직하고 마지막으로 국회의장과 접촉을 시도하려고 할 때 TV 화면에는 '의장이 직권상정을 결정했다'는 자막이 떴었다"며 "오후 2시경부터 (더민주) 의원총회를 시작하고, 직권상정으로 올라올 새누리당의 테러 방지법에 대해서 무제한 토론을 걸자고 제안을 드리자 의원들의 현실적 우려가 많았다"고 술회했다. 

"'준비가 부족한 채로 나가면 국민들에게 오히려 실망을 줄 수 있다', '언론 환경이 불리한 상황에서 장시간 발언하다 보면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은데, 2시간 발언하면 종편 뉴스 프로그램에 1주일치 공격감을 제공할 것이다'라는 지적이 많았다"라며 그는 "저도 비슷한 걱정을 했다. 의총 당시에는 필리버스터 제도와 그 폭발력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스스로 의원들의 능력을 불신했던 측면도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럼에도 무제한 토론 신청을 결정한 배경에 대해 "테러 방지법이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에 악영향을 미칠 독소 조항이 많은 법임이 분명하고, 국민들은 그 사실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알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을 들며 "저의 정치적 운명을 걸었다는 비장한 심경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당과 지지자들께도 조금은 면목이 서게 되었다"며 "우리 당이 제340회 임시국회 제7차 본회의에서 시작한 새누리당 테러 방지법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테러 방지법 독소 조항 제거를 위한 '디톡스 필리버스터'"라고 강조했다.

시진핑 주석에게 고한다


양탄일성(兩彈一星) 조선을 우습게 보지 마라
김갑수 | 2016-02-29 08:31:4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보아하니 당신은 미국으로 하여금 사드를 철회시키는 대신 조선 제재에 미국과 이면 합의를 이룬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조선에 배신을 때린 것이다. 이미 당신은 사드를 놓고 환구시보를 통해(당신의 집무실에 늘 있는 신문이다) 한국을 협박하다가 여의치 않으니까 미국에 외교부장을 보낸 것으로 안다.
시진핑 주석,
나는 개인적으로 당신네 나라 지도자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선배 마오와 주은래는 캐틱터가 다르긴 해도 각각 불세출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나는 최근 중국의 지도자들 중에서 당신을 가장 좋아했다. 이것은 내가 당신을 중국 현대사의 또 다른 거목인 등소평보다 더 좋아했다는 뜻도 된다.
당신은 지도자로서의 외형적인 자격을 두루 갖추었다.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와 좋은 부인을 두었다. 무엇보다 당신 자신의 삶이 지도자가 되기에 한 점 흠결이 없다. 당신은 공장 노동자의 삶을 체험하면서도 중국 최고의 대학 청화대에서 학업을 했다. 나는 당신이 청소년 시절 하교(下敎)하여 6년 동안이나 머물렀던 양가하촌(梁家河村)의 토굴을 둘러보면서 우리의 초라한 지도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행색을 떠올리기도 했다.
당신은 지난 2014년 방한,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한중우호 ‘인물소략전’을 펼치기도 했는데, 참으로 교양적인 강연이라고 생각 들었다. 나는 중국이 분명히 미국과는 다른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은 270년밖에 안 된 문화 신생국이지만 중국은 5,000년 역사를 축적한 문화 교양국이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
당신은 동의할 것이다.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두 사람은 누가 뭐래도 마오와 주은래라는 것을. 이 두 사람은 무엇보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분쇄하고 인민혁명을 통해 자주적인 신중국을 창업했다.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자 미국과 수교하면서 이후 등소평이 개방으로 가도록 하는 데 가교 역할까지 하고서 생을 마쳤다. 특히 마오는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
당신에게 하나만 질문한다. 당신네 나라의 혁명은 위대했지만, 만약 조선이 없었더라면 가능했을까? 구체적으로 말해서 1945년 8.15 이전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조중연합 반일투쟁이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물론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잘 아는 당신이기에 하나만 더 질문하겠다. 8.15 이후 열세의 국공내전에서 7만에 달하는 조선민주연군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때 동북만에서 당신네 군대가 장개석 군대에 의해 동서 양단되어 누란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조선의 대대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도 과연 당신네 군대가 장개석 군대에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뿐 아니라 조선인은 대륙 도처에서 당신네 군대와 함께 싸우지 않았던가? 제남에서, 양자강에서, 남경에서, 상해에서, 심지어 해남성 전투에서도... 아, 1944년 태항산에서 죽음의 위기에 몰린 등소평을 탈출하도록 도와주고 몰사한 군대가 조선의용군이 아니었던가?
“중국 오성홍기의 별들에는 조선인의 피가 배어 있다.”
이것은 당신이 존경하는 주은래가 남긴 말이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거나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조선인 군대는 중국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위기마다, 고비마다 중국군을 결정적으로 도왔다. 나는 만약 조선인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좌절되었거나 예측 불가능한 수준으로 늦추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시진핑 주석,
당신이 숭상하는 마오의 말을 기억할 것이다.
“많은 동지들이 출병을 반대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인민과 당의 동지들은 우리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다. 조선은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들이대도 바뀔 수 없는 혈맹이다.”
시진핑 주석,
1958년 조선의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당신네 1등 신문 <인민일보>가 내 놓은 사설을 다시 읽어 보아라.
“중국 인민은 북벌의 전화(戰火) 속에서, 장정(長征)의 길에서, 항일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중국인민과 공동투쟁을 했으며, 자기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혁명과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원조한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시진핑 주석,
당신이 조선 제재에 동참한다는 것은 일종의 배은망덕이자 당신네 인민혁명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처사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조상 공자의 말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당신이 진실로 위대한 지도자면 모두의 호평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공자 말대로 ‘좋은 사람은 좋다고 하고 나쁜 사람은 나쁘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이것을 감수한 지도자는 당신이 숭상하는 마오였다. 나는 당신이 마오와 버금가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조선 제재가 중국에도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진핑 주석, 오늘의 중국을 만든 핵심이 뭐라 보는가? 왜 미국이 당신네 나라에 접근했는지를 당신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양탄일성(兩彈一星), 즉 원자탄과 수소탄 그리고 위성이 아니었던가? 조선도 이제 엄연한 양탄일성의 나라다. 조선을 우습게 알지 마라. 일찍이 당신네 나라 수(隨)는 고구려를 우습게 알다가 엎어졌다는 역사를 기억하라.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4&table=c_booking&uid=284 

"강성국가건설의 속도를 내라"


[친절한 통일씨] '70일전투'로 본 북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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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29  00:3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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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서평양기관차대가 '70일전투'를 학습하고 있다. [사진출처-조선의오늘]
"강성국가건설의 최전성기를 열어나가기 위한 투쟁에로, 당 제7차 대회를 앞두고 충정의 70일전투를 벌릴 것을 호소한다."
북한 당 중앙위원회가 지난 24일 오는 5월 열리는 제7차 당대회를 앞두고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70일전투'를 호소했다. 북한 김정은 시대 들어 경제건설의 속도전으로 '70일전투'가 주창된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경제건설과 이를 위한 정치사업을 위해 '70일전투', '150일전투', '100일전투' 등의 속도전을 제시해왔다. 해당 '전투'들의 성과여부를 떠나 이러한 속도전은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경제경쟁운동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김정은 시대의 '100일전투', '70일전투'와 김일성 시대 '70일전투', 김정일시대 '150일전투', '100일전투'는 무엇이며 북한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북한의 속도전, 사회주의건설의 기본전투형식
'70일전투', '150일전투' 등은 북한의 대표적인 속도전 운동으로, 북한은 "모든 사업을 전격적으로 밀고 나가는 사회주의건설의 기본전투형식"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전투형식으로 최단기간에 질과 양을 함께 보장하고, △혁명 발전의 합법칙적인 사업전개의 원칙으로, △전격전과 섬멸전의 방법에 의해 담보되며, △사상.기술 혁명, 옳은 조직지도사업의 기본으로 규정한다.
또한, "혁명과 건설의 전진운동을 저해하는 소극과 보수, 침체와 답보를 배격하고 혁명과업을 가장 빠른 기간 내에 완수하게 하는 사회주의건설의 기본전투형식이며, 혁명적인 사업전개원칙"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속도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최단 기간 내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해 사회주의제도의 본성과 인민의 혁명적 지향에 맞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과업수행을 위한 침체나 사소한 중단, 답보를 허용하지 않는 '전격전'과 우선순위를 가려 사업 역량을 집중해 완수하는 '섬멸전'의 방식을 활용한다. 여기에 김정은 시대 들어 강조되는 부패척결도 속도전 방식에서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속도전 성과를 위해서는 조직지도사업이 중요한데, 북한은 사상혁명을 확고히 하고 기술혁명을 추진시키며, 조직지도사업을 뒷받침해야 속도전이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 2009년 '150일전투'에 이어 실시된 '100일전투' 구호. [자료사진-통일뉴스]
1970년대 1.2차 '100일전투', '70일전투'
'평양속도', '비날론속도', '강선속도' 등으로 1950, 60년대 사회주의 경제생산성 향상과 생산기간 단축이라는 대중운동을 벌인 북한에서 기간을 정한 속도전이 첫 등장한 것은 1971년 '100일전투'이다.
6개년 계획이 시작되던 1971년 1월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천리마 희천공작기계공장을 현지지도한 것을 계기로 '100일전투'를 전개했는데, '석탄공업을 앞세우면서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새로운 혁명적 양양을 일으켜 6개년 계획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투쟁'으로 정했다. 
이는 석탄공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북한이 국가적 차원에서 처음으로 기간을 정한 속도전을 시행했다는 데 의미가 있으며, 이는 1974년 '70일전투'의 모티브가 됐다.
북한은 1974년을 맞아 6개년 계획(1971~1976)을 앞당겨 수행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사회주의 대건설이 시작되는 해이자 6개년 계획 수행의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 1974년 북한은 경제성장 둔화 상황에 빠졌다.
김일성 주석이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경제건설의 10대 전망목표'를 제시하며 1975년 당 창건 30돌까지 완수할 것을 지시했지만 성과달성이 쉽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1974년 후반까지 그 해의 성과조차도 달성하기 힘든 상황이 보이자 '요령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김정일은 1974년 10월 '전당이 동원되어 70일전투를 힘있게 벌리자'라는 연설을 통해, 인민경제계획 부분의 수행이 잘 되지 않는 데 당 조직지도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며, 비상조치 일환으로 '70일전투'를 제시했다.
"당 조직과 지도일꾼들은 확고한 사상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계획수행을 위한 투쟁을 적극 벌리지 않고 있다"는 연설내용처럼, 그는 요령주의, 형식주의, 보신주의, 보수주의를 배격하고 행정경제사업의 당적 지도를 강화해 사회주의경제 건설사업을 효과적으로 일으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북한은 70일전투 지휘부를 설치하고, 각 지방과 생산단위에 지도소조를 파견했으며, 70일전투지도소조에 모든 경제사업을 맡아 지도할 권한을 위임했다. 또한,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 구호로 사상전을 병행했다.
결과, 북한의 공업총생산은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148%(11월), 152%(12월) 증가했으며, 전체적으로 전년 대비 공업생산이 17.2% 늘어났다. 또한, 석탄 164%, 강재생산 140%, 시멘트 135%, 공작기계 163%, 비날론 181%가 생산됐다.
북한은 '70일전투'로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속도전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올랐으며, 일대 비약과 혁신이 연이어 창조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 북한은 1978년 제2차 7개년 계획(1978~1984)이 시작되던 해인 1978년 그 해 목표를 앞당겨 달성하자는 의미로 두 번째 '100일전투'를 실시했다. 또한, 이는 건국 30돌을 성대히 맞이하자는 취지이기도 했다.
1980년대 3차 '100일전투, 1,2차 '200일전투' 
1980년대들어 북한은 3차 '100일전투'에 돌입했다. 제6차 당 대회를 앞두고 북한은 '승리자의 대축전'을 목표로 1980년도 계획달성을 1개월 앞당기기 위해 '100일전투'를 전개했다. '100일전투 과제를 25일 동안에', '소대가 중대의 몫을', '하루과제를 매일 2배로' 등의 구호 속에서 당시 북한은 '100일전투' 결과 공업생산이 전년에 비해 142% 성장했다.
1988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과 건국 40돌을 앞둔 북한은 2월 주요 시설공사를 기한내 완공시키기 위해 '200일전투'가 제시됐다. 이어 같은 해 9월 '전국영웅대회'에서 1차 '200일전투'를 총화한 뒤 2차 '200일전투'가 전개됐다. 기존 '200일전투'가 다음해인 1989년 4월로 연장된 것이다. 
결과, 북한은 평양축전에 관련시설 완공와 함께,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1단계 공사, 사리원카리비료연합기업소 1단계 공사, 발전용량 1백kW 내외의 중.소형 수력발전소 건설, 김책제철확장공사 등의 성과를 거뒀다.
  
▲ 2009년 '150일전투'가 실시된 시기 평양에 걸린 구호판과 경쟁도표. [자료사진-통일뉴스]
2000년대 '150일전투', '100일전투'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북한은 '200일전투'(1998년)를 실시해 경제성장을 꾀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북한은 당 창건 60돌을 맞는 2005년 당 창건 60돌을 맞아 농업과 전력, 석탄공업, 경공업, 수도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한 '100일전투'에 돌입했다. 특히, 고난의 행군시기를 지났다는 점에서 식량문제 해결에 총력을 기울였다.
2009년 북한은 김일성 주석 생일 100년인 2012년을 앞두고 '강성대국건설의 역사적 분수령'을 이루기 위해 '150일전투'에 돌입했다.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생산을 정상화하고 최고 생산년도 수준을 돌파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 대혁신, 대비약을 일으키기" 위해 수령결사옹위, 자력갱생, 집단주의 등이 강조됐다.
신의주방직공장 6명의 여공이 50일만에 1년 생산계획을 달성하고, 정주기관차대는 1천5백만km 무사고 주행목표를 돌파했으며, 강선제강소, 득장지구탄광연합기업소, 희천발전소건설장 등에서도 성과를 거뒀다.
'150일전투' 결과 공업생산은 전년대비 120%, 전력공업은 전년대비 150%, 기계공업은 계획대비 130%, 철도운수 계획대비 118%, 경공업 계획대비 157%, 축산부문 전년대비 1.5배 각각 성장했다.
2009년 종료된 '150일전투'에 이어 북한은 '100일전투'를 다시 전개했다. '100일전투'는 당 창건 65돌인 2010년을 앞두고 2012년을 강성대국의 문을 열기 위한 도약대로 삼기 위한 의미였다. 즉, 2009년은 '150일전투'에 이어 '100일전투'까지 한 해가 '전투의 해'였던 셈이다.
김정은시대 '70일전투'
김정은 시대 들어 '단숨에', '마식령속도' 등의 속도전은 제7차 당대회를 앞두고 제시된 '70일전투'로 대표될 전망이다. 김일성 주석 생일 100주년(2012년)은 김정은 시대의 성과라기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으로 '150일전투', '100일전투'의 결산이었다.
2015년 당 창건 70돌을 앞두고 '100일전투'가 전개됐다는 일부 대북소식통들의 전언이 있었지만, 북한이 공식 발표한 바 없다.
  
▲ 북한 거리에 '70일전투'를 독려하는 구호가 걸렸다. [사진출처-rafwober 인스타그램]
그렇기에 '70일전투'는 김정은 시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도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수소탄 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등으로 국제사회의 제재 움직임이 이는 가운데, 자강력제일주의를 통한 경제 안정이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가늠케 하는 '전투'가 되는 셈이다.
북한은 1970년대 '70일전투'를 두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중심으로 한 '미더운 대오의 탄생'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70일전투,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창조의 거장이신 우리 원수님(김정은)의 슬하에서 조국과 인민은 또 얼마나 몰라보게 성장할 것인가"라며 기대하고 있다. 
또한, 제7차 당 대회를 강성국가건설의 최전성기로 강조하며, "김일성-김정일주의를 혁명의 원동력으로, 일심단결을 백승의 보검으로, 최강의 핵억제력을 강성번영의 담보로 하여 신심 드높이 전진하는 위대한 김정은시대 주체조선이 어떤 기적을 또다시 안아오는가를 온 세계가 똑똑히 보게 하여야 할 것"이라며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도자 면모를 위한 내부결속을 독려하고 있다. 
즉, 1970년대 '70일전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중운동 지도를 통해 권력장악을 넘어선 '지도자'로서 우뚝 서고, 권력의 정당성과 대중적 지도자로서의 검증, 카리스마의 창출을 동시에 가능케 했듯이, 2016년 '70일전투'는 단순한 경제운동이 아니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제7차 당 대회에서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느냐의 70일이 될 전망이다.

박정희, '아내 죽인' 조총련의 모국방문 수용한 까닭


16.02.28 19:41l최종 업데이트 16.02.28 19:41l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역사(1961~1980)는 박정희 정권의 18년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목적 자체가 "혁명(5.16 군사쿠데타)을 보위할 악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을 지낸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중정 창설 배경을 "혁명 과업을 뒷받침하려면 무서운 존재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5·16 혁명의 성공으로 나는 '혁명 설계자'의 임무는 마쳤다. 이젠 혁명정부를 뒷받침하는 보조자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국가 개조라는 큰일을 이루려면 악역(惡役)도 필요하다. 혁명 정신, 궐기의 뜻을 아는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해야 한다. 남들은 해(害)가 돌아올까 두려워서 주저했다. 내가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초대 부장이 된 이유다."(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5 : 한국판 CIA의 출범, 중앙일보, 2015. 4. 3)

중앙정보부는 '한국판 CIA'가 아니라 '한국판 KGB'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를 모델로 한 '한국판 CIA'를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CIA와 FBI(연방수사국)로 분리된 미국과 달리 중앙정보부는 비밀정보기관이 수사권까지 가졌다는 점에서 구소련 비밀정보기관 KGB의 권능을 본뜬 '한국판 KGB'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일하고 양지(陽地)를 지향한다'는 부훈도 김종필이 직접 지었다. 그는 부훈에 담은 원칙과 철학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앙정보부는 근대화 혁명의 숨은 일꾼이어야 한다. 정보부원은 자꾸 나타나려고 하면 안 된다. 숨어서 정부를 뒷받침해야 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그 성과여야 한다. 응달에서 묵묵히 일하는 걸 몰라줘도 좋다. 우리가 만든 정보를 국정 책임자가 사용해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면 그게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다."(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5)

음지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모든 비밀정보기관의 숙명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비밀이 해제되면 그 성과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다. 1975년 재일총련(조총련) 모국방문은 국정원이 자랑하는 중앙정보부의 대표적 성과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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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당시 육영수 피격 모습을 담은 현장 영상
ⓒ 국가기록원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께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7발의 총성이 울렸다. 4발은 저격범이 쏜 것이고 3발은 경호원들이 쏜 총알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대통령 부인 육영수에게 맞았다. 정부 당국은 사건 발생 불과 이틀만에 북괴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대학(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던 22살의 박근혜 대통령(아래 박근혜)은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어느날 어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니 급히 짐을 싸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받는다. 박근혜는 탑승 수속을 받던 파리 공항에서 신문 1면에 실린 '암살'이라는 글자와 어머니 사진을 보고서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면서 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 당시의 심경을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날마다 어머니의 죽음이 일일 드라마처럼 수시로 방영된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범인은 일본 여권을 가진 간첩 문세광으로 밝혀졌다. 배후세력에는 조총련이 도사리고 있으며 북한의 지령에 의한 범행이었다."(박근혜,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위즈덤하우스, 2007년)

박근혜, "'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

'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 같은 표현에서 박근혜의 북한에 대한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박근혜는 이후 학업(유학)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의 길을 걷는다. 박근혜는 자서전에 이때의 '정치수업'에 대해 "아버지가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면 아버지를 수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기록했다. 또한 "'국익 최우선'이라는 아버지의 정치신념은 확고했다"면서 "화가를 아버지로 둔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미적 감각을 습득하는 것처럼, 나는 대통령인 아버지를 통해 외교감각을 익히고 다른 나라의 정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노하우를 배웠다"고 기록했다.

70년대는 김일성이 통일전선전략을 펼치는 가운데 남북한이 극심한 체제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75년 4월30일 월남이 북베트남에 패해 베트남전이 종결(당시는 '베트남 공산화')되자 인도차이나 사태로 인한 안보 위기가 고조되었다. 고위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김일성은 베트남 통일에 고무되어 남한 민중의 호응에 의한 통일을 낙관했다고 한다. 육영수 저격으로 시작된 '북괴 규탄 안보궐기대회' 같은 관제데모는 '베트남 공산화'로 더 빈번하게 열리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중앙정보부는 북한과 재일총련(조총련)과의 연계를 끊을 본질적 해법으로 제시한 '조총련계 모국 방문단 사업'을 두고 갑론을박했다. 조총련계 모국 방문단 사업은 문세광 사건 이후 74년말 정보부 차장보를 하다가 주일공사로 간 조일제(10-11대 국회의원 역임)의 아이디어였다. 조일제의 아이디어는 '참신'했지만 정보부로서는 '혁신적'인 그 내용을 차마 청와대에 건의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렵(75. 5. 21) 박정희는 김영삼을 청와대로 불러 "내자(內子)가 없으니 꼭 절간에 있는 것 같아요. 나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오래 할 생각 없어요"라고 말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대통령의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정보부로서는 영부인을 저격한 조총련계의 모국방문을 건의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대통령의 이런 사정을 잘 알기에 정보부가 '채홍사' 역할까지 담당한 사실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시해한 10.26 사건의 법정 재판에서 드러난 바 있다.

모국 방문사업, 조일제 아이디어→김영광 건의→박정희 재가

김영삼과의 영수회담 이후 어느 날 박정희는 청와대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과 김영광(14대 국회의원 역임) 중정 판단기획국장, 그리고 박경원 내무부장관 등을 불렀다. 함께 국수를 먹으면서 환담을 하던 박정희는 아무 말 않고 듣기만 하는 김영광에게도 "좋은 생각 있으면 얘기 해보라"고 말을 시켰다. 이때 박정희와 김영광 사이에 오간 대화는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폴리티쿠스, 2012년 개정증보판)에 자세히 나와 있다.

"각하, 작년의 문세광 사건 이후 재일 조총련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보이고 각하의 영도력을 보인다면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 대통령은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조총련이라는 말에 눈빛이 달라지면서 역겨운 기색이었다. 좌중은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고 김영광은 후회했다. 남산에 돌아온 신직수 부장은 김 국장을 질책했다. "왜 각하께 조심하지 않고 그런 말을 불쑥하오. 그쪽(조총련)은 영부인을 살해한 가해자인데 '가해자의 손을 잡고 각하 가슴에 품으시라'고?"

며칠 후 신 부장은 (김 국장의) 사표를 받은 대신 말했다. "각하께서 김 국장 의견을 세부 게획까지 짜서 보고하라고 하십니다." 박 대통령은 그걸 결심하면서 "근혜도 반대했어. 하지만 내가 대통령이기에 결심한 거야.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해서 좋은 성과를 얻어야 해" 하고 말했다.(<남산의 부장들>, 618~619쪽)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박근혜가 반대 입장을 취한 것이 눈에 띈다. 갑작스레 어머니를 흉탄에 잃은 23살의 나이를 감안하면 반대의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2007년 대통령선거에 나서면서 낸 자서전에도 '간첩 문세광'과 '조총련이 도사리고'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때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테러방지법은 '음지의 괴물에 날개 달아주는 격'

이후 조총련계 신문들이 연일 "총련계 모국 방문사업이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짓이다"고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이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정은 공작적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야당의 대표적 여성 정치인 박순천에게 환영사를 하도록 기획했다. 그해 9월 15일 조총련계 제1차 모국 방문단 700명이 방문하자 그는 환영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몽매에도 그리워하던 고국에 오신 동포 여러분! 일본으로 돌아가실 땐 고국의 흙 한줌씩을 봉투에 담아가셔서 이 땅을 생각하고 일본에 묻힐 땐 그 흙과 함께..."

'여당보다는 야당, 남자보다 여자 연사'를 내세운 중정의 기획은 방문단의 심금을 울리는 대성공이었다. 당시는 재일총련에서 만경봉호에 재일동포 조국 방문단을 경쟁적으로 태워 보내던 시절이었다. 결국 국정원이 자랑하는 조총련계 모국 방문 공작은 주일공사 조일제의 아이디어와 판단기획국장 김영광의 보고, 그리고 대통령 박정희의 '국익 최우선' 결정이 어우러져 성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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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필 전 총리가 2015년 11월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한 뒤 슬퍼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김종필은 5.16 쿠데타 후 구성된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중앙정보부법 입법 취지를 설명할 때 "수사권은 혁명정부 기간에만 잠정적으로 갖는 겁니다. 민간정부가 정식 출범한 뒤엔 수사권은 법무부 수사국에 환원시킵니다"라고 한시적 권한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뒤늦게 고해성사를 했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63년 1월 정보부장직을 내놨다. 그해 12월 민정으로 이양했지만 정보부는 수사권을 유지했다. 그 후 후임 부장들 일부는 정보부의 기본 임무와 역할을 망각했다. 정치적 상황에 편승해 때로는 월권과 남용으로 국민의 지탄과 원성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수사권을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음지와 양지'의 정신도 훼손됐다. 나는 정보부 창설자로서 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5)

수사권을 가진 비밀정보기관은 김종필의 의도와 달리 '음지의 괴물'이 되어 버렸다. 권력기관은 한번 만들면 바꾸기 힘든 속성이 있다. 냉전의 해체와 남북교류협력으로 간첩 잡는 '일감'이 줄어들자 국정원의 수사권은 탈북자 간첩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는 용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박근혜는 테러방지법을 만들어 모든 테러 용의자의 사생활-계좌-통신의 추적 권한까지 부여하려고 하고 있다.

테러방지법은 '음지의 괴물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개성공단 폐쇄 이후 벌어지는 '국정 역주행'은 40년 전 조총련 모국 방문사업을 재가한 박정희의 '고독한 결단'을 기억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데자뷔’…?, 지난 선거에 ‘20대 총선’ 결과 있네


등록 :2016-02-28 16:18수정 :2016-02-28 22:29
4·13 총선 전망. 김영훈 기자
4·13 총선 전망. 김영훈 기자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막전막후 62]
역대 선거에 비춰본 2016년 총선 전망
1988년부터 2012년까지 7차례 국회의원 선거
1995년부터 시작된 기초단체장 선거 살펴보니
‘1여다야’, ‘민심’보다 ‘구도’라면 야권 참패 불보듯
데자뷔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시감(旣視感)이라고 번역합니다. 최초의 경험인데도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의미합니다. 4월13일 치러질 예정인 20대 국회의원 선거의 양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거 몇몇 선거와 무척 닮았습니다. 어느 선거인지는 조금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선거에는 변하지 않는 한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표가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선거의 구도가 중요합니다. ‘1여 다야’ 구도에서는 여당이 유리하고, ‘다여’ 구도에서는 야당에 기회가 있습니다.
현행 국회의원 선거의 기본 틀은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도입된 소선거구제입니다. 당시 소선거구제 도입은 ‘민주화’라는 시대적 명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국회의원 선거는 1구2인 중선거구제였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유정회와 중선거구제를 도입했습니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중선거구제를 승계했습니다. 국회 안정 의석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중선거구제가 확실히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신민당 돌풍’이 거세게 불었던 1985년 2·12 선거에서 민정당은 35.2%의 득표율에 그쳤는데도 전체 의석(276석)의 과반인 148석을 차지했습니다. 1구2인 중선거구제와 제1당이 전국구 3분의 2를 차지하도록 한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뒤 소선거구제 도입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중선거구제는 ‘유신 잔재’였던 것입니다.
소선거구제의 특징은 선거구마다 표를 가장 많이 받은 1명만 당선된다는 것입니다. 득표율은 당선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정당의 전국 지지율이 의석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습니다. 이변과 파란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30년 동안 우리나라 정치는 격동의 연속이었습니다. 5년마다 치러지는 대통령 직선제, 4년마다 치러지는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또 국회의원 선거와 엇갈리게 4년마다 치러지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다양한 조합으로 대한민국 정치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1988년 13대부터 2012년 19대까지 치러진 일곱 차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살펴보겠습니다. 또 1995년부터 시작된 전국동시지방선거의 기초단체장(시장·군수·구청장) 선거 결과도 살펴보겠습니다. 기초단체장 선거는 소선거구제라는 선거제도뿐만 아니라 선거구 개수와 크기가 국회의원 선거와 닮았습니다. 수도권 민심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전국 선거 결과에 서울·인천·경기 선거 결과를 붙였습니다.
<국회의원 및 기초단체장 선거 결과>
1988년 4·26 13대 총선
전체 299/민정당 125/통일민주당 59/평민당 70/신민주공화당 35/한겨레민주당 1/무소속 9
서울 42/민정당 10/통일민주당 10/평민당 17/신민주공화당 3/무소속 2
인천 7/민정당 6/통일민주당 1
경기 28/민정당 16/통일민주당 4/평민당 1/신민주공화당 6/무소속 1
* 13대 총선의 특징은 민정당의 참패와 평민당의 ‘황색돌풍’이었습니다. 평민당의 색깔이 노란색이었습니다. 대선 패배의 책임으로 위기에 몰렸던 김대중 총재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통일민주당은 전국적으로 평민당에 비해 많은 표를 획득하고도 의석에서 밀렸습니다.
1992년 3·24 14대 총선
전체 299/민자당 149/민주당 97/통일국민당 31/신정당 1/무소속 21
서울 44/민자당 16/민주당 25/통일국민당 2/신정당1
인천 7/민자당 5/민주당 1/무소속 1
경기 31/민자당 18/민주당 8/통일국민당 5
* 민자당은 1990년 3당합당을 했지만 14대 총선에서 149석에 그쳤습니다. 야당인 민주당과 통일국민당은 약진했습니다.
1995년 6·27 1회 지방선거(기초단체장)
전체 230/민자당 70/민주당 84/자민련 23/무소속 53
서울 25/민자당 2/민주당 23
인천 10/민자당 5/민주당 5
경기 31/민자당 13/민주당 11/무소속 7
* 최초의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조순 서울시장 후보를 앞세워 서울에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충청에서 자민련 돌풍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1996년 4·11 15대 총선
전체 299/신한국당 139/국민회의 79/통합민주당 15/자민련 50/무소속 16
서울 47/신한국당 27/국민회의 18/통합민주당 1/무소속 1
인천 11/신한국당 9/국민회의 2
경기 38/신한국당 18/국민회의 10/통합민주당 3/자민련 5/무소속 2
* 15대 선거에서 야당은 분열했고 여당인 신한국당은 개혁공천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여당이 승리했습니다. 충청에 기반을 둔 자민련은 세를 대구·경북까지 확산시켜 무려 50석을 획득했습니다.
1998년 6·4 2회 지방선거(기초단체장)
전체 232/한나라당 74/국민회의 84/자민련 29/국민신당 1/무소속 44
서울 25/한나라당 5/국민회의 19/자민련 1
인천 10/국민회의 9/자민련 1
경기 31/한나라당 6/국민회의 20/자민련 2/무소속 3
*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짐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가 지방선거에서도 대승을 거뒀습니다.
2000년 4·13 16대 총선
전체 273/한나라당 133/새천년민주당 115/자민련 17/민국당 2/한국신당 1/무소속 5
서울 45/한나라당 17/새천년민주당 28
인천 11/한나라당 5/새천년민주당 6
경기 41/한나라당 18/새천년민주당 22/자민련 1
* 김대중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해 1당을 노렸지만 패배했습니다. 자민련은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습니다.
2002년 6·13 3회 지방선거(기초단체장)
전체 232/한나라당 140/새천년민주당 44/자민련 16/민주노동당 2/무소속 30
서울 25/한나라당 22/새천년민주당 3
인천 10/한나라당8/새천년민주당 2
경기 31/한나라당 24/새천년민주당 4/자민련 1/무소속 2
*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에 치러진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뒀습니다. 그런데도 2002년 12월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이 패배했습니다.
2004년 4·15 17대 총선
전체 299/한나라당 121/새천년민주당 9/열린우리당 152/자민련 4/국민통합21 1/민주노동당 10/무소속 2
서울 48/한나라당 16/열린우리당 32
인천 12/한나라당 3/열린우리당 9
경기 49/한나라당 14/열린우리당 35
*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사태로 한나라당이 몰락하고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획득했습니다.
2006년 5·31 4회 지방선거(기초단체장)
전체 230/열린우리당 19/한나라당 155/민주당 20/국민중심당 7/무소속 29
서울 25/한나라당 25
인천 10/한나라당 9/무소속 1
경기 31/열린우리당 1/한나라당 27/무소속 3
* 노무현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분열로 한나라당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2008년 4·9 18대 총선 전체 299/통합민주당 81/한나라당 153/자유선진당 18/민주노동당 5/창조한국당 3/친박연대 14/무소속 25
서울 48/통합민주당 7/한나라당 40/창조한국당 1
인천 12/통합민주당 2/한나라당 9/무소속 1
경기 51/통합민주당 17/한나라당 32/친박연대 1/무소속 1
* 한나라당이 2007년 대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압승했습니다. 친박연대가 14석으로 약진했습니다. 무소속 25명 가운데 12명이 친박무소속연대였습니다.
2010년 6·2 5회 지방선거(기초단체장)
전체 228/한나라당 82/민주당 92/자유선진당 13/민주노동당 3/국민중심연합 1/미래연합 1/무소속 36
서울 25/한나라당 4/민주당 21
인천 10/한나라당 1/민주당 6/민주노동당 2/무소속 1
경기 31/한나라당 10/민주당 19/무소속 2
*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이반과 야당의 선거연대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집권세력은 천안함 사건으로 안보를 쟁점화했지만 역풍이 불었습니다.
2012년 4·11 19대 국회의원 선거
전체 300/새누리당 152/민주통합당 127/통합진보당 13/자유선진당 5/무소속 3
서울 48/새누리당 16/민주통합당 30/통합진보당 2
인천 12/새누리당 6/민주통합당 6
경기 52/새누리당 21/민주통합당 29/통합진보당 2
* 선거 전에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과 야당의 선거연대로 여당의 고전이 예상됐습니다. 그러나 유력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경제민주화를 승부수로 내세워 과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2014년 6·4 6회 지방선거(기초단체장)
전체 226/새누리당 117/새정치민주연합 80/무소속 29
서울 25/새누리당 5/새정치민주연합 20
인천 10/새누리당 6/새정치민주연합 3/무소속 1
경기 31/새누리당 13/새정치민주연합 17/무소속 1
* 김한길 대표와 안철수 대표가 전격 합당했고 세월호 참사가 터졌습니다. 그런데도 야당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후 7·30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이 크게 승리하면서 야당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보수 집권세력 민심이반, 1992·2012년 총선과 비슷
야권 분열은 2006년 지방선거 상황과 닮은꼴
어떻게 보셨습니까? 2016년 4·13 선거는 역대 어느 선거와 가장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수 성향 집권세력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각하다는 점에서는 1992년 총선, 2012년 총선과 닮았습니다. 그러나 민심이반만으로 보수세력이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놓친 경우는 없었습니다. 딱 한번 현직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예외가 있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지역구도 때문입니다. 영남의 의석은 호남·충청·강원·제주를 합친 의석과 같습니다. 영호남 대립이라는 지역구도가 살아있는 한 영남에 기반을 둔 보수세력이 총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민심’보다 ‘구도’가 선거 결과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야권은 선거연대에 성공한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선전했습니다.
반면에 현재의 야권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분열했던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참패했습니다. 2006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호남에서 각축을 벌였습니다. 지금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호남 민심을 붙잡기 위해 다투는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김완주 전북지사 1명만을 당선시킬 수 있었습니다. 광주시장 당선자는 민주당의 박광태, 전남지사 당선자도 민주당의 박준영이었습니다.
기초단체장은 어땠을까요? 전북의 기초단체장(14명)은 열린우리당 4, 민주당 5, 무소속 5였습니다. 광주는 구청장 당선자 5명이 모두 민주당이었습니다. 전남(22명)은 열린우리당 5, 민주당 10, 무소속 7이었습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호남을 놓고 다투는 사이에 영남은 물론이고 수도권과 충청·강원 등 ‘중원’은 한나라당이 차지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안상수 인천시장, 박성효 대전시장, 이완구 충남지사, 정우택 충북지사, 김진선 강원지사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은 서울의 25개 구청장을 몽땅 다 한나라당에 빼앗겼습니다. 인천에서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고, 경기도에서 박영순 구리시장(열린우리당) 한 사람을 겨우 당선시켰습니다.
야권 입장에서 보면, 2006년과 비슷한 두 가지
호남의 문재인 거부감과 박근혜가 상대라는 것
이번 4·13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바로 그 2006년 열린우리당-민주당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겨우 28석의 호남 의석을 놓고 다투느라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새누리당에 어부지리를 안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얘깁니다.
야권의 시각에서 보면 2006년과 2016년은 호남의 분열이라는 선거구도 이외에도 두 가지 비슷한 점이 더 있습니다.
첫째,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호남의 거부감입니다.
2006년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전 청와대 수석이 부산을 방문해 “대통령도 부산 출신인데, 부산 시민들이 왜 (현 정부를) 부산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발언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전 수석의 발언을 민주당은 이른바 ‘부산정권’ 발언이라며 선거에 적극 활용했습니다. 호남에서 문재인 전 수석과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크게 일었습니다.
호남에서는 지금까지도 문재인 전 대표의 당시 발언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 호남 출신 학자들이 영남패권주의 논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것도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호남의 거부감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상대가 ‘선거의 여왕’이라는 점입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박근혜 대표는 얼굴에 칼을 맞았습니다. ‘대전은요’ 한마디로 대전시장 판세를 뒤집었습니다. 그 선거의 여왕이 지금 대통령 자리에 올라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니까 노골적인 선거운동은 못할 것이라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곧 현직 대통령이 선거법을 피해 가면서 어떻게 고도의 선거운동을 하는지 기막힌 묘기를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치학자들은 대통령 선거는 인물을 보고 찍기 때문에 ‘전망 투표’라고 하고, 국회의원 선거는 정권에 대한 평가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회고 투표’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박근혜 대통령의 3년에 대한 평가와 심판의 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와 외교 분야 양쪽에서 다 실패하고 있습니다. 북한 핵실험과 로켓(미사일) 발사 직후 주한미군 사드 배치, 개성공단 폐쇄를 덜컥 결정했습니다. 정부가 안보 위기를 조장하면서 여론은 박근혜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론은 냉정을 되찾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국민들에게 국회와 야당 때문에 국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으며 그런 국회와 야당을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른바 ‘국회심판론’ ‘야당심판론’이라는 신종 프레임입니다. 말이 안 되는 주장이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강하게 밀어붙이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정권 심판론’과 ‘야당 심판론’을 지지하는 수치가 엇비슷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억지가 이처럼 통하는 이유는 허약한 야당, 유권자 고령화, 편향적 언론 환경 등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여 다야’의 선거구도를 바꾸지 않는 한 여당의 무난한 승리와 야당의 참패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선거는 쟁점보다 구도에 의해 결판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역대 선거 결과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