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8일 토요일

민주노총. 반전평화 대규모 민족통일대회 개최

통일선봉대 전국 누비며 통일열기 활활
민주노총. 반전평화 대규모 민족통일대회 개최
이정섭 기자 
기사입력: 2015/08/09 [10:53]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민주노총 통일선봉대는 강복 70주년을 맞아 전국을 누비며 탅균. 사드배치 반대 등 반미 자주화와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광복 70주년을 맞아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가 통일의지를 북돋우며 전국을 누빈다.

노동운동의 통일의지 실천을 대표했던 민주노총 노동자통일선봉대가 16기 활동에 나선다.
노동자통일선봉대 234명은 9일(일)부터 15일 광복절까지 6박 7일 일정으로 전국을 누비며 통일의지를 방방곡곡에 불러일으킬 예정이다.

통선대는 9일 오후 2시 첫 공식일정으로 지축역 차량기지 대강당에서 발대식이 열린게 되며 둘째 날인 10일에는 미국 대사관 앞에서 투쟁선포식(10시)을 갖는다.

이후 대전, 군산, 전주, 대구, 경산, 평택 등을 돌며 민주노총 투쟁사업장을 지원하고 분단에서 파생된 탄저균, 사드, 민간인 학살 역사 등과 더불어 일본 재무장 문제도 전국에 알린다.

일정 마지막 날이자 광복절인 15일에는 잇따라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

14시 대학로에서 민주노총은 5천여 명 규모로‘광복 70년 분단 70년 8.15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하고, 이어 15시에는 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주최로 민족통일대회가 이어지며 16시30분부터는 최대 1만 5천 명 규모로 ‘8.15 반전평화 범국민대회’가 열린다.
 
한편 민주노총 통일위원회는 11일(화) 프란치스코 교육화관에서 “일본의 역사왜곡, 군국주의 부활과 대응 방안”을 주제로  대규모 토론회도 개최한다. 토론회에서는 △일본 역사왜곡과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문제점(김승은 / 민족문제연구소), △한일협정 50년 체제의 반성과 새로운 관계 설정 (장완익 / 태평양전쟁피해보상추진협의회), △정부 대일정책 평가와 과제 (이신철 /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 연대)에 대한 발제가 이뤄질 예정이다.

이번 16기 노동자통일선봉대의 투쟁기조는 △주한미군 탄저균 불법반입 규탄, 실험실 폐쇄, 세균전 부대 추방,  △사드 도입 반대! 한미일 군사훈련(을지프리덤 가디언) 중단, △일본 재무장 반대! 과거사 규명과 사죄.배상 촉구, △미.일 전쟁동맹 반대! 2015년 12월 전시작전권 반환 촉구 △대북적대정책 폐기! 5.24조치 해제!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성사 촉구  △박근혜 정부의 반노동 정책‘노동시장구조개악’ 저지 등이다.
 
2000년 6.15공동선언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민주노총 중앙통일선봉대는 그동안 평택 대추리, 매향리 등 미군기지 투쟁을 이끌었고 자본가와 정권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들을 지원하고 연대해왔다.

또한 노동운동 내에 평화와 통일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 간부들을 육성하는 실천적 교육의 장이라는 역할을 해왔다.
 
 
□ 16기 노동자통일선봉대 세부 일정

① 1일차(8월9일 일요일) : 서울
14:00 ~ 중통대 교육 및 내부 발대식

② 2일차(8월10일 월요일) : 서울
10:00 투쟁선포식 (미대사관 앞) / 행진 : 미대사관 ~ 일본대사관
11:00 일본 재무장 규탄 집회 (일본대사관 앞)
12:00 기아차 비정규직 고공농성 연대집회 (국가인권위 앞)
15:00 민주주의 파괴 주범, 국정원 해체 결의대회 (국정원 앞)

③ 3일차(8월11일 화요일) : 대전, 군산
08:00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 골령골 교육 답사
15:00 미국반대! 탄저균 규탄 집회 (군산 미군기지앞)

④ 4일차(8월12일 수요일) : 전주, 대구
08:00 외세와의 전쟁, 동학혁명지 교육 답사
16:00 사드반대 반전평화 투쟁(대구지역 미군기지 일대)

⑤ 5일차(8월13일 목요일) : 경산, 평택
08:00 민간인 학살지, 경산 코발트 교육 답사
14:00 미국반대! 탄저균 규탄 투쟁(평택 오산미군기지 일대)
19:00 쌍용자동차 해고자 농성장 연대투쟁(쌍용차 농성장)

⑥ 6일차(8월14일 금요일) : 평택
09:00 평택일대 선전전
14:00 탄저균 규탄 및 세균전 부대 폐쇄 투쟁(평택 오산미군기지 일대)
19:00 탄저균 규탄 문화제(평택역)
21:00 통선대의 밤

⑦ 7일차(8월15일 토요일) : 서울
11:00 미국반대! 탄저균 규탄 투쟁(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14:00 8.15 전국노동자대회(대학로)
15:00 8.15 민족통일대회(대학로)
16:30 8.15 반전평화 범국민대회(대학로)
18:00 행진 투쟁 후 통선대 해단식


□ 기타 일정 및 15일 주요 집회

① 광복70돌 기념 합동 토론회
제목 : 일본의 역사왜곡, 군국주의 부활과 대응 방안
일시 : 2015년 8월11일(화) 오후2시~
장소 : 프란치스코 교육관 220호 (서울 정동)
주최 : 광복70돌 6.15공동선언15돌 민족공동행사 남측 준비위원회
주관 : 민주노총, 한국노총, 민족문제연구소, (사)평화디딤돌
발제1 : 일본 역사왜곡과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문제점 (김승은 / 민족문제연구소)
발제2 : 한일협정 50년 체제의 반성과 새로운 관계 설정 (장완익 / 태평양전쟁피해보상추진협의회)
발제3 : 정부 대일정책 평가와 과제 (이신철 /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토론1 : 강제노동 배상에 대한 ILO권고와 대법원의 판결 (김민철 / 민족문제연구소)
토론2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현황과 과제 (윤명숙 / 충남대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원)
토론3 : 홋카이도 조선인 유해 반환 (김현태 / 일본 리츠칸 대학 연구위원)
보고 : 일제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 합동 추모제 사업 현황과 의미 (한용문 / 민주노총 전통일위원장)

② 광복70 분단70 8.15 전국노동자대회
일시 : 2015년 8월15일(토) 오후2시
장소 : 서울 대학로
주최/주관 : 민주노총

③ 광복70돌 8.15 민족통일대회
일시 : 2015년 8월15일(토) 오후3시
장소 : 서울 대학로
주최/주관 : 광복70돌, 6.15공동선언발표 15돌 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

④ 8.15 반전평화 범국민대회
일시 : 2015년 8월15일(토) 오후 4시30분
장소 : 서울 대학로
주최/주관 : 8.15반전평화범국민대회추진위원회

국정원은 국가 정보 ‘포르노 배급사’인가


등록 :2015-08-07 18:57수정 :2015-08-09 10:11
정보기관의 정보 과시 욕망과 권력의 정치적 이용이 중단되지 않으면 정보의 비정상적인 누설은 계속될 것이다. 200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와병설이 남쪽에서 계속 보도된 가운데 북한이 그해 4월 기록영화를 통해 ‘현지지도’ 동영상을 공개했다. <조선중앙티브이> 화면 갈무리
정보기관의 정보 과시 욕망과 권력의 정치적 이용이 중단되지 않으면 정보의 비정상적인 누설은 계속될 것이다. 2009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와병설이 남쪽에서 계속 보도된 가운데 북한이 그해 4월 기록영화를 통해 ‘현지지도’ 동영상을 공개했다. <조선중앙티브이> 화면 갈무리
[토요판] 김종대의 군사
정보기관의 정보 유통법
국가정보원 기술정보국에서 이탈리아 업체 ‘해킹팀’의 기술로 국내 민간인을 사찰했느냐 여부는 끝내 규명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으면 논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껏 국정원은 수없이 많은 정치적 추문의 당사자였다는 점에서 민간인 사찰의 진실과 관계없이 국민의 불신은 수그러들지 않을 모양이다. 국정원이 국가안보에 관한 한 오직 국민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하는 반듯한 자세만 보여주었다면 이렇게 논란이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권이 교체되는 역사의 단층마다 정보기관에 대한 불쾌한 기억은 빠짐없이 박혀 있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각하는 핵심 정보를 갖고 하시는 말씀이야”
사례 1.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지 한달여가 지난 1994년 8월19일. 평양 대동강 남쪽 외교단지에 “김정일 타도하자”는 삐라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외신을 타고 전해졌다. 많은 전문가들은 누가 뿌렸는지 알 수 없는 이 삐라의 정체가 확인되기 전까지 북한 내에서 조직적 저항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청와대는 달랐다. 며칠 뒤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일전의 삐라 사건에 대해 국가안전기획부가 수집한 정보를 김영수 민정수석이 보고하자 박관용 비서실장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드디어 시작됐구만”이라며 반색을 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각종 공·사석에서 “통일은 새벽처럼 온다” “북한은 길어야 3년”이라는 말을 장마철의 소나기처럼 쏟아냈다.
수석비서관회의에는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이 부재중이어서 통일원에서 파견된 정세현 통일비서관이 대리로 참석했다. 정 비서관이 며칠 뒤 정 수석에게 “그 삐라가 남쪽에서 살포한 것인지도 모르니 확인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정 수석에게 되레 면박을 당했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 전에는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거나 다른 수단으로 망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고, 김 주석 사망 이후에는 북한은 저절로 망할 것이라고 믿었다. 삐라 사건은 그러한 확신을 갖게 한 확실한 증거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정세현 통일비서관은 1995년에 유종하 안보수석에게 작심하고 한마디 했다. “각하께서 어디서 일방적인 정보만 듣고 북한이 곧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더 들을 것도 없이 유종하 수석은 “유(you)가 뭘 알아. 각하는 핵심 정보를 갖고 하시는 말이야. 통일원 사람들이 뭘 안다고. 그건 틀려”라고 일축했다. 그 뒤 정 비서관을 비롯하여 청와대 사람 누구도 북한이 곧 망할 것이라는 데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각하의 ‘핵심 정보’의 제공자인 안기부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만 갔다.
사례 2.
2008년 12월 국내 한 보수 월간지에는 그해 8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 위원장의 뇌 사진이 프랑스 의사에게 전송된 사실이 공개됐다. 기사에서는 위성을 통한 감시와 감청, 외국에 전송된 뇌 사진을 우리 정보기관이 중간에서 가로챈 방식, 파일에 걸린 암호를 푸는 데 걸린 시간, 프랑스 의사의 행적까지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친절하게도 기사는 “김정일 통치 길어야 5년”이라는 국정원의 보고서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는 우리 내부 정보까지 소개되어 있다. 얼마 뒤인 2009년 3월 국정원의 대북정보를 담당하는 한기범 3차장이 해임된다. 시중에는 이 월간지에 보도된 내용을 발설한 당사자는 청와대라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핵심 대북정보를 담당하는 국정원 차장이 대신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더해졌다. 한 차장은 이후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에 몸을 담았다가 2013년에는 국정원에서 대북정보를 담당하는 1차장으로 복귀한다. 그가 바로 남북정상회담 당시 대화록을 국회 정보위원에게 갖고 와 공개한 장본인이다. 앞의 월간지 기사의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지도자의 유고로 곧 망할지도 모르는 북한은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연평도 포격사건이 벌어지기 사흘 전인 2010년 11월20일. 국정원 보고서 한 편이 또 청와대로 올라왔다. 역시 김정일 건강 이상으로 유고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다. 그 영향으로 사흘 뒤인 11월23일의 연평도 포격사건 당시 청와대 일부 핵심 관계자는 북한 내부에서 김정일 신변에 이상이 생겨서 북한 지도층이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도발을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했다. 그리고 12월초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임기 1년의 위원장으로 연임된 고건 전 국무총리와 위원들이 2기 업무보고를 했다. 이 가운데 역점사업인 ‘북한에 나무 심기’를 보고하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북한 곧 망할 건데 나무는 심어 뭐합니까?” 평소 북한 녹화사업에 지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동분서주하던 고 전 총리는 이 말에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이튿날 그는 “위원장직을 사임한다”며 미련 없이 물러났다.
김일성 사망설, 김정일 건강이상설…
대통령 눈 흐리고 정책 일관성 막아
북한 무인기가 찍었다는 서울 사진
보수언론 공개하면서 괴담 퍼져
최근엔 확인 안된 ‘인민군 망명설’까지
정보기관이 주는 ‘모르핀’은
객관적 태도 오염시키며 정치에 악용
국가기밀이어도, 확인되지 않아도
선정적 부분만 무책임하게 보여주면
유통망 구성원은 이득을 얻을 테고…
사례 3.
북한의 무인기가 서울에 출몰하여 문제가 된 2014년 4월2일에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무인기가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라”는 기자들의 요구에 “그걸 공개하면 무인기의 영상 확보 성능을 북한에 다 확인해주는 꼴이 된다”며 “국가안보상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튿날인 4월3일 <조선일보>에는 북한 무인기가 촬영한 청와대 전경 사진을 1면에 보도하였다. 이적행위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사이에 <조선일보>는 정치권력 또는 정보기관과 유착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 공개를 강행했다. 사진을 관리하고 있던 국정원의 모 차장은 이후에 서울시 간첩조작에도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 해임되었다. 이 사진 공개가 얼마나 심각했던지 뒤이어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새누리당 국방위원조차 기무사령관에게 “조선일보를 압수수색하라”고 다그쳤다. “수사하겠다”던 기무사는 흐지부지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 사진 공개로 인해 “북한 무인기가 청와대까지 들어왔다”, “아파트 빌딩 사이로 우리를 다 엿보고 다닌다”, “생화학무기를 싣고 와 떨어뜨리면 서울 방어에 대책이 없다”는 괴담이 마구 퍼졌다. 후에 이 무인기 사건은 국정원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남재준 원장의 짧은 사과 성명에도 등장했다. “북한 무인기로 초래된 엄중한 안보정국”이라며 국민에게 국정원의 증거조작에 대한 양해를 부탁했던 것이다.
사례 4.
2015년 5월30일 국가정보원을 비밀리에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은의 공포정치로 인해 북한 체제가 더 불안해지고 있다”며 “내년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발언 이후 <조선>, <동아> 등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총살당한 이후 공포정치에 불안을 느낀 북한 고위 외교관과 군 장성의 망명이 이루어졌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들 언론은 “북한 고위 장성이 망명하여 서울에 있다”고도 했고, 그 수가 “100명이 넘는다”고도 했다. 북한의 정치체제가 와해 직전이라는 의미였다. 북한은 남한에 망명했다는 박승원 인민군 상장이 “지금 마식령 스키장 건설사업에 복무하고 있다”며 “이건 명백한 인권유린이자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한달여 뒤인 7월10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여기서 박 대통령이 한달여 전 국정원을 방문해서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무지를 정치로 바꾸는 모르핀
정치 지도자들이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안기부에서 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으로부터 어떤 계시와 같이 “북한은 곧 망할 것”이라는 파국의 메시지를 전달받기만 하면 태도가 달라진다. 이것은 정보기관이 대통령에게 주사 놓는 일종의 ‘모르핀’이었다. 이 주사를 맞으면 이상하게 북한에 대한 현실감각이 사라지고 북한은 이 지구상에서 땅속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북한에 관해 무지한 정권의 지도자들은 안기부와 국정원의 주사약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매혹적인 약물은 권력층만 누리기에 너무 아까워서 보수 성향의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도 전달된다. 여기서 국가정보는 안보를 위한 공공의 가치가 사라지고 북한을 포르노로 재편집하여 상영하는 포르노 제작소가 된다. 보수언론과 종합편성과 같은 매체들은 이를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욕하면서 보게 되는 이런 B급 영화, 그러나 대중은 쉽게 중독되었다.
곧 망한다던 북한은 아직 망하지 않고 있음에도 망할 것 같은 역겨운 존재인 북한, 국가가 아닌 북한이 대중에게 전시된다. 이 상영관들을 채우기 위해 그동안 국정원과 국방부의 비밀정보들은 보수언론을 통해 무수히 빠져나왔다. 그렇게 빠져나오는 만큼 우리의 정보 역량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됨은 물론이고 일선 군인들의 생명까지 위험해진다. 2009년 2월에 우리 군이 서해에서 대비하는 군사기밀을 담은 국방부의 비밀보고서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된 지 불과 사흘 만에 유력 보수언론들에 빼돌려져 그 핵심 내용이 공개됐다. 우리 해군의 대형 초계함과 구축함이 서북 해역에 전진배치된다는 작전계획이 보수언론에 보도된 것이 어쩌면 1년 후 천안함 사건으로 연결된 지점은 없을까? 북한이 정말로 천안함을 폭침시킨 것이라면 왜 북한이 그런 작전을 기획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보수언론들의 기념비적인 특종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기밀 누설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이상희 전 국방장관이 “기밀은 고위층에게서 빠져나가고 있다”며 지휘관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이를 한탄했을 정도다. 천안함 사건 직후에 새누리당 국방위원장인 김학송 의원이 언론에 우리 군의 북한 잠수함 추적에 대한 특수정보(SI)를 공개하여 대혼란이 초래된 적도 있다. 우리의 대북 군사정보 수집 양상이 확연히 드러나는 이적행위에 가까웠다.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한 당사자도 보수 정치권력이었다. 이번에 국정원 해킹 내용을 언론에 상세히 브리핑해서 문제가 된 당사자도 새누리당 정보위 위원이다.
북한이 갖고 있는 포르노적인 전시된 이미지가 국내정치에서 안보와 무관한 정치적 효과가 있다면 이런 기밀 누설은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다 정치권력과 정보기관이 자신의 정보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해진다. 이제껏 기밀 누설이 주로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경유해 보수언론에 의해 완결된 것은 과도한 노출증으로 이어지는 신경병리학적 현상이었다. 북한을 빈틈없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우리의 우월성을 과시하면서 북한을 겁주겠다는 충동이 더해진 것이다. 일선의 우리 장병이 희생되고 엄청난 비용이 투입된 국가정보력이 무력화되는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얻는 이익도 있었다. 국가안보를 통해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국민을 엄청나게 겁주어야 한다. 그래서 기밀도 공개하고 심지어 ‘북한군 상장이 망명했다’는 식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과 같이 적당한 조작도 필요하다. 내일 북한 무인기가 쳐들어온다는 상상력도 동원되어야 한다. 여기에 엄청나게 많은 군사평론가들이 가세하여 제법 밥 벌어먹고 산다. 그래서 인기있는 평론가는 국민에게 겁을 잘 주는 포르노 해설가가 되어야 한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결합된 형태로서 북한을 소비하는 구조가 존재하고 정보기관이 여기에 복무하는 이 거대시장 없이 지금의 언론은 생존을 꿈꿀 수도 없다. 저명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는 <왜 리더는 거짓말을 하는가?>에서 냉전 초기 미국의 소련에 대한 공포 조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1940년대 후반, 미국 국민이 소련의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진실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중은 그가 이 위협에 대처하는 데 필요하다고 여긴 조치들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길거리를 오가는 보통 사람들을 속이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교육받은 엘리트들까지 겨냥했다. … 공포 조장의 본질은 케말 아타튀르크의 유명한 말에 표현되어 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의사에 반하더라도.’”(82~83쪽)
정치에 오염돼 유통되는 국가정보
한때는 북한에 대한 공포를 일깨우기 위해 정보기관의 고급 정보를 활용하던 바로 그 언론이 지금은 국정원의 해킹 의혹에 대한 자료 공개를 규탄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사실 지금까지 기밀을 언론에 뿌려댄 당사자는 야당이라기보다 여당, 보수언론이었다. 국가정보가 과연 안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내정치적 이점을 노린 것인지 일반 시민으로서는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언가 지금의 국가정보가 그 자체로 정치논리에 오염되어 있다는 정황이 존재한다면 국정원 해킹 의혹 규명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 이전에 이미 정략적인 이유로 국가의 정보 관리는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화된 국가정보는 그 자체로 국가안보와는 거리 먼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번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의혹은 더 철저하게 규명돼야 한다. 이런 논란이 있다는 것 자체가 왜곡된 국가정보를 견제하여 국가안보의 본질에 집중하게 해주는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 의혹을 규명하는 것이 무슨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인지 아리송한 일이다.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 김종대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할 말은 하는 군사전문가. 1993년부터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실 보좌관과 청와대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국방부 장관 정책보좌관 등으로 활동하면서 국방정책이 결정되는 과정과 별들의 암투를 지켜봤다. 권력과 군대가 독점하는 안보가 아닌 ‘진짜 안보’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 군사전문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이다. ‘김종대의 군사’는 한 달에 한 번 연재된다.

"미국과 중국에만 사과했는데 가만히 있는 한국, 아베와 한편이냐"


15.08.08 18:58l최종 업데이트 15.08.08 20:31l




최근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기업 미쓰비시(三菱) 머티리얼(전 미쓰비시 광업)이 미국과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잇따라 사과와 보상을 하면서, 유독 한국인 피해자에 대해 '강제징용이 아니다'라며 외면하고 있다.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광주·86) 할머니는 지난달 21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강제징용 갔을 때보다 더 속이 뒤집어져 잠을 잘 수 없다"라며 울분을 토했다(관련기사 : "미국 사람만 사람이냐... 속 뒤집어져 잠도 못자").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강제징용 사죄와 배상' 운동을 29년째 벌이고 있는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73)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아래 나고야 소송 지원회)' 대표의 심정은 어떨까.

한국만 외면한 미쓰비시... "안타깝지만 근로정신대 해결 전환점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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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시민공회당에서 열린 '피폭 70주년 추모식'에 참석한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 지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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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저녁 일본 아이치현(縣) 나고야시 한 식당에서 만난 다카하시 대표는 "한국만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 마음이 좋지 않다"라며 "안타깝다"고 말했다. 다카하시 대표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일희일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의 차분한 반응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징용에 대한 미쓰비시 그룹의 사죄와 보상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한국인 여자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낙관적 전망 때문이다. 

다카하시 대표는 "미쓰비시 그룹은 그동안 (강제징용에 대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은 아니지만 중국과 미국에게 사과했다"라며 "과거에 비해 진전된 태도로, 미쓰비시 중공업 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해결하는데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됐다"라고 평가했다.

다카하시 대표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향해 "식민지 지배는 부당한 것"이라고 강조한 뒤 "'큰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는 말이 있는데, 그 바위에 계속 계란을 던질 것이고 결국 미쓰비시도 언젠가는 깨질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한국만 배제된 미쓰비시 그룹의 강제징용 사과 행보 이후 한국 정부를 향한 비판 여론도 만만치 않다. 지난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성사된 전범기업 니시마츠건설과 중국인 피해자의 화해·보상 뒤에는 중국 정부의 영향력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손해배상 소송 등에 대해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며 원론적 입장만 피력해 왔다.

이에 대해 다카하시 대표는 "화가 많이 난다"라고 일갈했다. 그는 "한국 정부도 아베 정권과 똑같은 것이냐, 아베 정권과 친구냐, 아베 정권과 한편이냐고 묻고 싶다"라며 "한국 정부가 아베 정권에게 강제징용, 여자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에 대해 더 강하고 확실하게 요구해야 한다"라고 질타했다.

그는 한국 대법원에 계류 중인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 3건(2건 미쓰비시 중공업 상고·1건 신일본주금 상고, 심리 중)을 언급하며 '원고 승소 확정 판결'을 강하게 요구했다. 혹시 모를 의외(파기환송)의 판결을 경계한 것이다. 그는 "우리는 대한민국 대법원이 미쓰비시 중공업 측에 '한국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하라'고 최종 판결할 것이라 믿는다"라며 "대법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대법원은 미쓰비시보다 못한 곳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한국 대법원, 배상판결 안 하면 미쓰비시보다 못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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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아이치현 지역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한국인 여자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다카하시 마코토(高橋信·73) '나고야 소송 지원회' 대표. 그는 피해 사실마저 감추려 했던 양금덕 할머니 등 피해자들을 설득해 1999년 3월 나고야 지방재판소 미쓰비시 중공업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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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티리얼이 미국 전쟁 포로에게 공개 사과했고, 3일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 등을 공식 발표하고 화해했다.
"머티리얼이 강제징용에 대해 사과와 보상 등 화해에 나선 것은 아주 좋은 일로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진전된 태도다.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 여자근로정신대 등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이번 합의가 실마리가 될까.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사죄와 배상) '운동'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동안의 투쟁에 비해 더 쉽게 전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쓰비시에 대해 더 강하게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중국과 미국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을 하면서 왜 한국 피해자에게는 하지 않느냐'라고 따져 물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 지난 7월 31일 금요행동(매주 금요일 도쿄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 벌이는 투쟁)에서 계속 이 주장을 펼쳤다. 배포한 전단지에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 정작 사과와 배상을 요구받은 미쓰비시 중공업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머티리얼이 머리를 숙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무엇이 머티리얼을 움직였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부지만 그동안 일본 (전범)기업들이 중국과 한국인 피해자와 화해한 사례가 있다. 2000년 후지코시가 한국인 여성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에게 보상을 지급했고, 2002년 카지마건설(전 카지마구미)은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 986명과 화해했다. 니시마츠건설은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인 강제징용자 피해자들과 사과·보상을 통해 화해했다. 2009년에는 히로시마현에 강제징용 당한 피해자(360명), 2010년에는 니가타현 강제노동에 동원된 피해자(186명)와 화해했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머티리얼의 사과와 보상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머티리얼은 정부와 상의했다고 들었고 정부가 동의했다. 또 머티리얼이 미쓰비시 그룹 30개 계열사가 모인 자리에서 '사과해도 되는지' 물었고, 미쓰비시 중공업도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머티리얼은 미국, 중국에 사과하는 것이 시장 진출에 유리하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 과거 화해 사례는 거의 모두 중국인 피해자들이다. 가장 오랫동안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 온 한국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답답한 상황이다.
"미쓰비시는 그동안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은 아니지만 중국과 미국에게 사과했다. 미국, 중국에 사과하면서 한국만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러나 미쓰비시 여자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투쟁에 전환점이 마련됐다. 그래서 낙관적이다. 중국과 미국 피해자들에게 사죄하지 않았던 상황보다 더 좋아질 것이다. 다만 한국인 피해자들이 '왜 한국에게만 사과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심정,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안타깝다."

- 한국은 국제적 위상은 물론 국내 상황이 미국이나 중국과 다르다.
"그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잘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우리는 대한민국 대법원(미쓰비시 중공업 상고 2건·신일본주금 1건 상고, 심리 중)이 미쓰비시 중공업 측에 '한국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 하라'고 최종 확정 판결할 것이라 믿는다. 대법원이 원고 승소 판결을 하지 않는다면, 그 대법원은 미쓰비시 중공업 보다 못한 곳이 될 것이다."

"한국 국민들 더 투쟁해 줬으면... 강제징용 용서해선 안 돼"

- 미쓰비시와 일본 정부는 '한국은 중국, 미국과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거나 '당시 국민총원동령에 의해 자국민(한국인)을 동원한 것으로 법적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이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고,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식민지 지배는 부당한 것이다. 이미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부당하다며 사과했다. 무라야마 담화를 처음으로 부정한 게 아베 정권이다.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쓰비시가 강제노동을 시키고 급여조차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지만, 급여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 미쓰비시 중공업이 피해자들에게 사과·배상해야 할 명확한 이유는 없다.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증거 서류가 있다.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두 청산해 개인청구권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논리일 뿐이다."

-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 '한국 정부의 미온적 태도가 문제다'라는 비판이 많다.
"한국 정부에 화가 많이 난다. '한국 정부도 아베 정권과 똑같은 것이냐, 아베와 친구냐, 아베 정권과 한편이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아베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 안보법안 추진으로 여론이 악화됐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 정부가 아베 정권에게 강제징용, 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해결하라고 더 강하고 확실하게 요구해야 한다. 한국 국민들도 더 투쟁해 줬으면 좋겠다."

- 1986년 아이치현 지역의 강제징용 피해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한국인 여자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에 나선 지 29년째다. 16년째 법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 명확하다.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일본에 가면 공부를 더 할 수 있다'고 속였다. 그렇게 데려와 강제노동을 시키고 임금도 지불하지 않았다. 말처럼 공부도 할 수 없었다. 일종의 큰 배반이다. 이런 행위는 용서 못한다.

29년을 돌이켜 보면, '어린 소녀들을 속여 강제노동에 동원한 행위는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운동을 벌여 왔다. 내 딸이 1972년생이다. 29년 전(1986년) 근로정신대 피해 실태조사를 벌이던 당시 내 딸의 나이가, 피해 할머니들이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제작소에 강제징용 당할 때의 나이와 같았다. 내 딸이 할머니들과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어땠을까, 그 심정으로 운동을 벌였다. 내 딸은 나고야 소송 지원회 활동을 많이 이해하고 응원해 주고 있다.

2003년 3월 나고야 지방재판소에서 15번째 심리가 열렸을 당시 나는 1시간 45분여 동안 어린 소녀들에게 가해진 강제징용 등 과거 미쓰비시와 일본 정부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 했다. 당시 여러 신문에 기사가 크게 실렸다. 이후 졸업한 제자들이 연락해 응원해 주었고, 꽃다발을 보내기도 했다. 이것이 내 '힘의 원천'이다. 법정에서 피해 원고들과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여자근로정신대 할머니를 위해 뭘 할까 생각한다. 나의 신념과 서로 주고받는 응원이 힘이 된다."

일본 안보법안 논란... "일본이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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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아이치현 지역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한국인 여자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 소송 지원회' 대표. 그는 최근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미국과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보상에 합의한 것에 대해 "한국인 여자근로정신대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라고 평가하며 "끝까지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하겠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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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
"(웃으며) 없다. 한 가지는 있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에서 함께 활동하는 회원들이 고령인데다 중병에 걸리기도 한다. 더이상 활발한 활동을 못하는 분들이 생긴다는 점이 힘들다. 가끔 일본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마음 아프다. '(여자근로정신대 문제가) 거짓말이다, 한국 사람에게 속아서 그러는 것 아니냐, 한국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이런 일을 벌이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마음이 아프지만 신념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양금덕 할머니, 김성주 할머니, 김중권씨 등 피해 할머니와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금요행동' 할 때, 피해 할머니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감정 억제가 안 된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울컥한다. 당연한 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햇볕이 뜨겁고 매우 더웠지만 할머니들이 나를 위로해 주고 있어서 힘이 나고, 그렇기 때문에 운동을 벌일 수 있다."

- 안보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한 이후 아베 정권에 대한 민심이 악화된 것 같다.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중학생, 고등학생 등 청소년, 대학생, 30, 40대 여성들이 평화헌법 수호와 '전쟁법안' 반대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도쿄의 시부야에서는 중학생, 고등학생 등 젊은이 5000명이 집회를 했고, 국회 앞에서는 7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나고야에서도 여성들이 전쟁법안을 용서하지 않겠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도쿄, 나고야, 훗가이도, 히로시마, 도야마 등 7개 현(縣) 시민들이 모여서 큰 집회를 하고 시민선언을 발표했다.

아베 정권이 추진하려는 전쟁법안이 평화헌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잘못됐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난 6월 4일, 국회에서 자민당과 야당이 추천한 헌법 학자 3명 모두 '전쟁법안 헌법 위반이다'고 의견을 냈다. 자민당이 추천한 학자는 일본에서 유명한 헌법학자로 (반대 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헌법 학자 뿐 아니라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마쓰까와 히데또시 역시 아베 정권의 행보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지식인들의 반대 입장 표명 이후 수만 명이 평화헌법을 지키자는 서명에 합류했다."

- 안보법안은 참의원에서 심의 중이다. 어떻게 예상하나.
"참의원은 지난달 27일부터 심의를 시작했다. 반대 여론에 폐기될 가능성과 통과될 가능성이 5대 5다. 9월 25일이 참의원의 심사 시한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베 때문에 여름휴가가 없어졌다'는 말이 생겼다. 국민들이 아베 정권 때문에 휴가를 못 가고,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뜨겁고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고야에서도 연일 집회가 열리고 있다. 도쿄 집회에는 어린 아이들을 안고 집회에 참여한 젊은 엄마들이 많다. 전국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일본은 확실히 불타고 있다."

- 한국인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여자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요구가 이뤄질 때까지 투쟁할 것이다. '큰 바위에 계란 던지기'라는 말이 있다. 그 바위에 계속 계란을 던질 것이다. 결국 미쓰비시도 언젠가는 깨질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그 기간이 1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대법원이 미쓰비시의 배상 판결(원고 승소 확정)을 하고, 미쓰비시가 그 판결에 따라 피해 할머니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는 그날까지 함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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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3박4일 동안 나고야에서 열린 '한일청소년평화교류' 행사에 참여한 광주광역시 소재 고등학생들에게 여자근로정신대의 실상과 순직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 소송 지원회' 대표. 평화교류단이 4일 방문한 순직비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항공우주시스템제작소 오에 공장 안에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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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와 인터뷰 통역을 맡아주신 채일혜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북에서도 남에서도 제 인간성은 파괴됐어요"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⑥] 대북 풍선 살포 운동 이민복 씨

그는 주머니 속에 손바닥 만한 '삐라'를 늘 넣고 다닙니다. '대북 삐라를 보고 탈북을 결심했었다'던 그는 남풍이 부는 날이면 풍선에 '삐라'를 실어 남몰래 북한에 띄웁니다.

탈북자 출신으로, 현재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을 맡고 있는 이민복 씨. 언론에 잘 알려진 그의 주력 사업은 대북전단 살포지만, 남한 정착 초기엔 탈북자 인권 운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국가 정보기관 폭력 피해자'였습니다.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지난 회 주인공 1970년대 대성공사 가혹행위 피해자 김관섭 할아버지에 이어, 이번에는 1990년대 피해자 이민복 단장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민복 씨. ⓒ프레시안(최형락)

"네 나라 거쳐 왔는데…" 폭행에 추행까지

1995년 2월 18일, 김포공항에 내렸습니다. 목숨을 건 탈출이었습니다. 북한을 떠난 뒤 네 국가를 경유해 돌고 돌아온 길, 이제 고단한 여정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체 모를 세 명의 남자가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한에 온 걸 환영합니다"

환영 인사는 짧은 이 한마디가 다였습니다. 세 남자는 그의 팔을 붙들고 척척 걸어가더니, 공항 앞에 대기시켜놓은 차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한 시간가량을 달려 서울 시내 어딘가에서 내렸습니다. 이미 중국, 러시아 공안기관을 드나들었던 그는 이곳이 탈북자들을 신문하는 곳임을 직감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끌려간 곳은 건물 지하의 어느 조사실. 문이 열렸습니다. 열댓 명이 앉아있었습니다. 그중엔 안기부와 기무사 직원도 있었고, 관상쟁이도 있었습니다. 인사를 꾸벅하자, 반말부터 날아왔습니다.

"야 이 새끼야. 여길 왜 왔어. 북한이 싫으면 북한에서 싸울 것이지."
"아닙니다. 북한 사람들도 반항하고 있습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만 20만 명입니다. 여기(남한) 학생들은 말 한마디 잘못한다고 잡혀가지 않습니까? 북한 정부는 대중정치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막 잡아가진 않습니다. 그런데도 20만 명이 정치범이라는 건 여기(남한)보다 더 반항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탈북 자체도 반항입니다. 저는 저와 제 가족의 목숨을 걸고 왔습니다."

따박따박 대답을 하고 있자니, 뒤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덩치가 산 만한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총책임자 서진하다. 이 새끼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이 말을 끝으로 천장이 빙글 돌았습니다. 귀싸대기를 세게 얻어맞은 탓이었습니다.

"제가 여태 묻는 말에만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뭐이 새끼가?"

서진하는 이번엔 멱살을 잡아 올렸습니다. 주먹을 위로 말아쥐더니 명치 쪽으로 있는 힘껏 내리꽂았습니다. 그는 바닥을 굴렀습니다. 서진하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바지춤을 잡았습니다.

"네놈이 임질이 있나 확인하겠다"

열댓 명이 보는 앞에서, 그는 바지며 속옷이며 홀딱 벗겨졌습니다. 서진하는 그의 성기를 훑어보더니, 여기저기 만지기도 했습니다. 수치스러움에 눈물이 날 뻔했지만, 꾹 참았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김관섭' 이후 20년, 달라진 것 없었다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북한 보위부, 소련 보호감호소와 똑같았어요. 반말하고 고함치고, 때리고, 옷 벗기고. 겁주고 욕보여서 기를 죽이고 보는 거죠."

1화~4화의 주인공이자 대성공사 고문 피해자 김관섭 할아버지가 귀순했던 해는 1974년이었습니다. 워낙 엄혹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민복 단장이 귀순한 건 그로부터 21년 후였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대성공사 내 가혹행위는 그대로였습니다. 20년 넘도록 끔찍한 관행이 이어져 왔던 셈입니다.

"(대성공사) 밖에서는 민주화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안은 바뀐 게 없던 모양이었어요. 군사 정권 때 습성이 그대로 남은 거죠. 정보기관 안을 감시할 사람이 없으니 폭력이 아주 비일비재했죠."

'모욕주기'식 조사는 다행히 첫날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수용 생활은 감옥 생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 열흘 정도는 침대와 화장실만 덜렁 있는 독방 안에 온종일 갇혀있었습니다. 밥도 방 안에서 조사관들이 날라다 주는 것만 먹었습니다.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복도에는 헌병이 서 있었습니다. 문 밖에선 어디선가 '퍽퍽' 맞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성공사. ⓒ프레시안(최형락)

대성공사 나가서도 협박, 폭행… "제 인간성은 파괴됐어요"

입소 후 6개월 만에야 지옥 같던 대성공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나가서도 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민간 사회에 정착하고 지내던 어느 날, 집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네, 이민복입니다."
"너 왜 신문사에 글을 올리나."
"언론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아직 정신 못 차렸구먼. 한번 죽어볼래?"

전화는 뚝 끊겼습니다. 며칠 전 그가 신문사에 보낸 기고가 화근이었습니다. 남북관계에 관한 글로, 딱히 정부에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협박 전화'의 목적은 한 가지였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정보기관의 승인을 받고 하라는 것.

한 차례 경고 전화면 끝나겠거니 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대성공사 퇴소 후 그의 담당 형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와 함께 안기부에 가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안기부에 가면 당할 일은 훤했습니다. 형사는 '제가 죽는다'며 제발 한 번만 가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1997년 2월 12일, 하는 수 없이 내곡동에 있는 안기부 청사로 갔습니다. 안기부 직원이 손님방으로 그를 안내했습니다. 높이가 무릎 께까지 올라오는 낮은 탁자가 있었습니다.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끼익'. 방문이 열렸습니다. 덩치 큰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대성공사 입소 첫날, 그를 욕보였던 서진하였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서진하는 발로 탁자를 쳤습니다. 그대로 뒤로 밀려난 탁자는 그의 무릎을 퍽 하고 쳤습니다. 무릎을 감싸 쥘 새도 없이 그를 일으켜 세운 서진하는, 대성공사 입소 첫날처럼 가슴이며 배며 사정없이 두들겨 팼습니다.

"대성공사에서 눈을 뜰 때마다 서진하의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악감정을 만들게 하면 안 됩니다. 이 나라에 온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폭력을 쓸 수가 있습니까. 저는 목사가 무척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요. 전 이제 인간성이 파괴됐습니다. 사람답지 못한 대접을 북한에서도 받고, 남한 와서도 받아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우리를 통일역군으로 대해달라"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대성공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감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무리 간첩 의심이 든다 해도, 인격체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탈북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다른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혹행위를 당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간쓰레기', '국적이 없으니 화장하면 아무 문제 없다'는 등 폭언은 기본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며 조사관에게 구둣발로 채인 사람, 북한에서 배운 격술 시범을 시켜 동작을 했다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이유로 몽둥이찜질을 당한 사람, 안마 요구와 같은 모욕적인 행위를 강요당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1998년 12월 탈북자 인권단체 '자유북한인협회'를 꾸렸습니다. 탈북자들이 자율조직을 꾸린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1970년대 한국 앰네스티 창립을 주도한 윤현 목사를 찾아 '인권 운동'의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윤현 목사의 조언에 따라, 우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찾았습니다. 이 단장을 포함해 9명이 원고가 되어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로 했습니다. 변호사들은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했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은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고 했습니다. 여론을 호의적으로 이끌어내야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소장을 제출하기 전에 기자들도 불러 모았습니다. 1999년 1월 15일 서울 카톨릭회관에서 '자유북한인(탈북자) 인권침해 방지 및 생활 정착을 위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안기부의 탈북자 인권침해 사례를 공개했습니다. 9명의 원고를 포함한 탈북자들은 "우리 탈북자들을 통일역군으로 대하고 폭행, 폭언을 중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탈북자들이 자발적으로 안기부의 행태를 언론에 공개하고, 국가배상소송을 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처음 터져 나온 탈북자들의 문제 제기는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안기부는 즉각 성명을 냈습니다. "탈북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반말을 하는 등 거친 행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구타 등 가혹행위는 하지 않았다", "정착지원금을 적게 받은 일부 탈북자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라며 사건을 축소하려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송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2심까지 갔지만 법원은 결국 '증거 부족'으로 소를 기각했습니다. 법정 싸움에선 졌어도 여론전을 통해 성과를 얻었습니다.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이 그해 7월 개원했습니다. 하나원 체제로 전환되면서 지하실, 독방이었던 대성공사 수용 기간은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습니다.

▲1999년 1월 16일 자 <한겨레> 19면

"탈북자 주제에, 너 잘못하면 직업 뺏는다"
변호사들의 말대로였습니다. 국가, 특히나 정보기관을 상대로 벌이는 투쟁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탈북자들이란 산들바람에 꺾이는 갈대처럼 국가 앞에서 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 부당한 일을 겪어도 감히 말을 못했습니다. 안기부가 굉장히 힘이 있었거든요. 직업을 쥐어주고 외국 보내는 걸 국정원이 다 통제했어요. 여권 발급을 잘 안 해주는데, 해준다 해도 단수 여권만 줬어요. 그러니 다들 얻어터지고도 눈치만 보고 있었죠."

용감한 사람 몇 명만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단체를 꾸리고 탈북자 인권운동 전면에 섰던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특히 공사에 다니거나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국가 녹 먹는 사람이 국가를 공격하느냐"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한때 동지였던 탈북자들은 어느새 적으로 돌아섰습니다. 활동가 수가 줄어들면서 탈북자 인권 운동은 예전과 같은 활기를 잃었습니다. 이제 이들의 활동을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습니다.

"아쉬워도 이해는 해요. 어쩔 수 없죠. 탈북자들이 남한에 잘 살려고 온 거잖아요. 그런데 나라에서 '탈북자 주제에 너 잘못하면 직업 뺏는다'고 개입하고 협박을 하니 버틸 수 있나요."

ⓒ프레시안(최형락)

"국가가 탈북자들 때린 건 몰라요. 환영만 한 줄 알지."

이 단장은 "사람들이 저를 대북 삐라 날리는 사람으로만 알지만 탈북자 인권 문제를 들고 최초로 싸운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국가가 탈북자들을 때린 건 몰라요. 귀순용사들 왔다고 환영만 한 줄 알지. 유우성 씨 사건 정도 돼야 조금 심각한가 보다 하고 알죠. 법원이 간첩 의심 받는 사람한테 그냥 무죄를 주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겪어봤으니 알잖아요? 그럴 만도 해요. 국정원이 아직도 옛날 습성을 못 버렸어요. 때리면 다 되는 줄 아는 겁니다."

언론에서 '이민복'이라는 이름을 접했던 분들이라면, 기사를 읽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습니다. 대북 전단 살포 활동과 탈북자 인권 운동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풍선 날리는 일은 '우쪽'이 좋아하고, 인권 운동은 '좌쪽'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진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좌우를 떠나서 진실 그 자체를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문제를 그렇게 보려고 합니다. 북한이 싫어 남한에 왔지만, 여기서도 북한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제가 당했지 않습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죠."

▲대북 '삐라'.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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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의 방북, 이어진 6.15정신 멀어진 남북관계 개선

이희호 여사의 방북, 이어진 6.15정신 멀어진 남북관계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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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8.09  05: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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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3박 4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치고 8일 돌아왔습니다. 이 여사는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민간 신분인 저는 이번 방북에 어떠한 공식 업무도 부여받지 않았다”면서도 “6.15정신을 기리며 키우는데 일조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고 의미심장하게 밝혔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서 이 여사와 김정은 제1위원장과의 면담이 이뤄지지 않은 것을 두고 이번 방북의 의미를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이 여사의 방북이 지난해 12월 김 제1위원장의 친서 초청을 통해 추진됐다는 점에서 면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상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 대통령을 숙소인 백화원까지 안내하면서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다”고는 “제가 나이가 어리고 하니 내일 찾아와서 대통령님을 만나겠다”라고 한 ‘예의바른’ 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김 제1위원장이 이 여사를 만나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까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면담 불발은 이 여사의 방북 때부터 예정돼 있었습니다. 단순히 현 시기 경색된 남북관계 때문만은 아닙니다. 원래 이 여사의 방북 건은 오래 전부터 북측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남겨둔 카드였습니다. 북측이 초청을 했으며 이 여사의 방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측의 허락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사가 귀국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북은 박근혜 대통령의 배려로 가능했으며,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편안하고 뜻있는 여정을 마쳤다”고 말한 것은 그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 여사의 방북은 남과 북이 관계개선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카드가 생활력을 갖기 위해서는 박 대통령이 북으로 향하는 이 여사를 만났어야 합니다. 만나서 대북 메시지를 건넸으면 좋았을 것이고, 적어도 고령인 이 여사의 건강과 장도를 비는 정성이라도 보였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김 제1위원장은 이 여사를 흔쾌히 맞이했을 것입니다.
북측으로서는 구순이 넘은 노(老)여사를 멀리 보내면서 만나지도 않고 아무런 메시지도 주지 않은 남측에 서운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측 당국은 이 여사의 방북을 ‘개인 자격’이라고 선까지 그었습니다. 북측은 뻔한 기회마저 살리지 않는 남측에 대해 대화를 원치 않는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판에 김 제1위원장이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사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대남 화해 메시지를 던지는 것인데 남측이 화답할 리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나온 묘안이 제3자를 통한 안부와 배려입니다. 김대중평화센터가 밝힌 바에 따르면, 김 제1위원장이 이 여사와 모든 일정을 함께한 맹경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통해 ‘이희호 여사님 평양 방문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전하면서 ‘이희호 여사님은 선대 김정일 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6.15선언을 하신 고결한 분이기에 정성껏 편히 모시고, 여사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해드리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김 제1위원장은 제3자를 내세움으로써, 초청자로서의 면을 세워 이 여사에게 최대한의 배려와 정중함을 보이면서도 남측 당국한테는 ‘남측이 원하지 않기에 우리도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이 여사의 방북으로 6.15공동선언의 정신은 이어졌지만, 박근혜 정부에서의 남북관계 개선은 요원해졌음이 확인됐습니다.

[현장] “세월호 진실 감추려 자, 진실 찾는 국민 두려워 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국민참여 특별위원회 발족…“진상규명 과정 지켜볼 것”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예산이 이르면 내주부터 집행돼 특조위가 본격 활동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초 요구했던 예산안의 절반 규모에 해당하는 활동비 등을 지급받게 돼 설립 목적대로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특조위가 외압 등에 휘둘리지 않고 진상규명에 모든 역량을 결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4월16일의 약속 국민연대’ 부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국민참여 특별위원회’(이하 특별위원회)가 8일 발족됐다.
특별위원회는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발족식을 갖고 “특별조사위가 어떻게 진상규명에 다가가는지 지켜보고 함께 할 것”이라며 발족을 선언했다.
  
▲ ⓒ go발뉴스 (송현석)
이들은 “정부의 예산삭감은 특조위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정부자료나 검토하고, 기존 정부 조사결과를 되풀이하라는 의미”라면서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활동과 대안을 마련하는 특조위에 주어진 과제의 수행을 박근혜 정부는 원하지 않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이제 첫발을 뗀 만큼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든 국민들이 어깨를 걸어 함께하고, 때로는 매서운 눈의 감시자로 나서야 한다”면서 “진실을 감추려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을 찾는 노력을 하는 시민들”이라며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호소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만약 진실을 가리려는 자들의 방해로 특별조사위원회가 가동되지 못할 경우에는 직접조사기구로 전환하여 독자적인 진상조사활동을 진행하겠다”면서 “시민들과 함께 416진실모니터단을 만들어 진상규명의 과정을 함께 참여하고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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