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7일 금요일

"정규직 안 돼도 좋으니 더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정치인, 지식인, 혹은 스타들의 목소리만 넘쳐나는 속에서 진짜 이 사회의 주인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살려내고자 합니다. 노동자 개인의 삶을 인터뷰하면서, 어릴 적 꿈과 직장을 구하는 과정, 일터에서의 보람, 힘든 점,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의식의 변화 등을 중심으로 진솔한 삶을 기록합니다.[기자말]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김용균 사망 소식 전하는 이태성씨 2018년 12월 11일, 이태성씨는 태안화력에서 김용균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비정규직 대표 100인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막 열릴 참이었다. 이씨는 이 자리에서 김용균 노동자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김용균 사망 소식 전하는 이태성씨 2018년 12월 11일, 이태성씨는 태안화력에서 김용균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비정규직 대표 100인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막 열릴 참이었다. 이씨는 이 자리에서 김용균 노동자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 이태성
    
"2014년에 친한 동생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어요. 태안화력에서 함께 일하다가 승진해서 보령화력으로 갔는데, 거기서 그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나기 일주일 전에도 통화를 했는데... 조금 있으면 딸이 백일이 되니까 보령에 와서 술 한잔하자고 했어요. 그때 그 동생 나이가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노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노조는 그런 사망 사고가 나면 사실을 알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싸워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고작 위로금이나 걷고 있었어요."

한국발전산업노조 한전산업개발 발전본부 사무국장 이태성씨, 그가 이렇게 긴 직함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전력공사의 복잡한 하청구조와 관계 있다. 한전은 효율성 제고라는 명분으로 1990년대부터 발전소 설비정비, 운전 업무를 외주화하기 시작했다. 그가 근무하는 한전산업개발은 발전사의 9개 하청 업체 중 하나다.

하청업체들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공개 입찰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회사는 입찰에서 떨어질까 봐 산재가 발생할 때마다 사고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사고 원인을 노동자 개인의 과실로 돌렸다. 하청노동자들은 회사가 입찰에서 떨어지면 직장을 잃는다는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기에, 2014년 동료의 죽음 앞에서도 이태성씨와 노조는 무력했다.

"제가 1998년도에 입사했는데, 20년째 작업 환경이 변하지 않았어요. 저와 동료들이 일하는 작업장은 초속 5m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고 석탄 가루로 앞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한 곳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4km 정도의 거리를 왕복하며 안전 점검을 하고 탄가루 치우는 일을 하고 있어요. 컨베이어 벨트가 도는 속도가 빨라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위험이 있기에 접근 방지 펜스와 자동제어 스위치를 달아줄 것과, 시야 확보를 위해 조도를 높여달라고 계속 요구했지만 회사는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년 전인 2018년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에야 펜스와 조명이 설치됐습니다."
  
▲ 태안화력 발전소 내부
ⓒ 이태성
 
3년마다 입찰을 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태성씨가 근무하는 동안 실제로 태안화력에서 공개 입찰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3년마다 재계약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회사는 비용 절감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위험한 근무 환경은 20년 이상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2016년 12월 31일에 태안화력에서 처음으로 입찰이 나왔다. 노조의 반대를 우려해서 어수선한 연말연시에 입찰을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한전산업개발은 이 공개 입찰에서 떨어졌다. 태안화력에서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 전원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낙찰받았던 기업들이 숙련된 인력을 다 채울 수가 없어서 차례로 낙찰을 포기했다. 결국 3순위였던 한전산업개발이 다시 낙찰을 받고 직원들은 회사에 남았다.

"발전소는 1급 보안시설로 폐쇄된 공간이에요. 발전소 출입을 위해서는 신원확인을 하고 서약서를 써야 할 정도로 출입도 통제되죠. 전쟁 나면 타격 1번이 될 만큼 국가의 존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 기간산업입니다. 국민의 생명 안전과도 직결되고요. 그런데 여기에 민간기업의 이윤추구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와 민영화와 외주화를 한 겁니다.

노동자가 안전하지 않은 일터에서, 안정적인 전기 공급이 가능할까요? 외주화 결과 20년 30년씩 노후된 시설이 안전 설비도 없이 방치되고, 근무 조건이 열악해서 수많은 산재가 발생했고요. 더 심각한 것은 그런 현실을 '입찰에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숨겨왔다는 거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도 받아왔고요."

  
한전산업개발 발전노조는 2016년 입찰을 저지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소 민영화의 문제점을 지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2017년 11월에 태안화력에서 또 보일러 밸브에 머리가 끼여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담당자들은 태안화력방재센터에 사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다친 노동자는 구급대원의 안전조치 또한 받지 못했고, 구급 차량이 아닌 협력 업체 소장의 차로 이송됐다. 입찰에서 감점 요인으로 작용하는 산재 사고를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로 인한 죽음 막아야
  

산업사회에서 '공기'와 같이 필수적인 '전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비용절감과 효용성 제고라는 명목 아래 다치고 죽어가는 하청 시스템은 반드시 바뀌어야만 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발전분야 비정규직 연대회의'가 만들어졌다.

발전 노동자들은 이정미 정의당 의원과의 국회간담회를 시작으로 기자회견과 국회의원 면담을 이어나가며, 정규직화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이태성씨는 노조 사무국장으로 이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그리고 2018년 12월 11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기다리던 그는 전날 밤 태안화력에서 김용균 노동자가 산재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비정규직 대표 100인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막 열릴 참이었다. 이씨는 이 자리에서 김용균 노동자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관련기사: "취임 초 문 대통령 행보에 펑펑 울었는데 지금은..." http://omn.kr/1exkg)
  
 1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이태성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한전산업개발 발전지부 사무처장은 "오늘도 또 동료를 잃었다"라며 울먹였습니다.
▲  2018년 12월 1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서 이태성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한전산업개발 발전본부 사무국장은 "오늘도 또 동료를 잃었다"라며 울먹였습니다.
ⓒ 민주노총
   
"저는 오늘 동료를 잃었습니다. 정규직 안 돼도 좋으니 더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했는데 꽃다운 젊은 청춘이 또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용균은 12월 10일 밤, 혼자 일하다가 석탄을 이송하는 설비에 끼어 사망했으며 발견되기까지 4시간 동안 방치됐다. 2019년 작성된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7년까지 화력발전소에서 사망한 노동자 수는 39명이고, 부상을 포함한 사고 발생 건수는 428건에 이른다. 그리고 2018년 이후 현재까지 사망 사고만 3건이 더 발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산재 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약했으나, 최근 5년간 산재 사고의 97%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김용균 사망 이후 올해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었어요. 28년 만에 처음으로 개정되었습니다. 개정된 법안에 '위험 작업은 2인 1조'라는 조항이 담겼지만, '위험 작업'의 기준이 명시되지 않아서 여전히 혼자 일하는 곳도 있고요. 이 법은 재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 12월 12일 '당정 발전산업 안전강화 방안 발표'로 한전산업개발을 공기업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한전의 상시적 업무인 발전소 설비정비, 운전 업무를 원청이 직접 관리하고 책임지도록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이 요청이 있은 지 7개월이 지나고 있는 현재 시점까지 현실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태성씨는 김용균 노동자가 사망한 지 570일이 넘어가는 현재에도 김용균의 동료들은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덧붙여 집권 여당이 약속을 지키고, 노동자가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김용균 사망 이후 하루하루 날짜를 세면서 천막농성부터 일인 시위까지 노동자들은 아직도 거리를 지키고 있다.
  
당당하고 차별받지 않는 노동을 위하여
  
“가족의 힘이 없었더라면, 사실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힘들어하는 이태성씨의 모습에 안타까워 하면서 노조활동을 반대했던 가족들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했다. 딸들은 집회현장에도 함께 하고 아빠를 존경한다며 위로한다. 아내도 "열악한 노동현장을 알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발전소 현장이 바뀌고 있다"며 신뢰를 담은 응원을 해주고 있다.
▲ “가족의 힘이 없었더라면, 사실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힘들어하는 이태성씨의 모습에 안타까워 하면서 노조활동을 반대했던 가족들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했다. 딸들은 집회현장에도 함께 하고 아빠를 존경한다며 위로한다. 아내도 "열악한 노동현장을 알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발전소 현장이 바뀌고 있다"며 신뢰를 담은 응원을 해주고 있다.
ⓒ 이태성
 
태안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엔 어촌 특화사업을 해보고 싶어 했던 이태성씨는 1992년 태안에 건설된 화력발전소에 1998년 12월 한전산업개발로 입사해 화력발전소 운전 분야에서 일해 왔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나 학창 시절에는 막연히 '노조는 과격하고 불온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그는, 비정규직의 부조리를 겪고 동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변해갔다.
   
2019년 이태성씨는 '허위사실을 무차별적으로 언론에 유포해서 회사의 명예를 실추했다' 하여 원청 정규직 노조 관련자로부터 명예 훼손 혐의로 고발당했다.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경찰서에 가서 몇 시간씩 조사받고 마음고생을 했다. 조사 결과 '기소 의견 없음'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관련 기사: "노동자가 김용균 대책위 노동자 고발... 의도가 다분하다" http://omn.kr/1j8rl)

"가족의 힘이 없었더라면 사실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힘들어하는 이태성씨의 모습에 노조 활동을 반대했던 가족들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했다. 딸들은 집회 현장에도 함께 하고 아빠를 존경한다며 위로한다. 아내도 '열악한 노동 현장을 알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발전소 현장이 바뀌고 있다'며 신뢰를 담은 응원을 해주고 있다.
   
"정규직은 위험한 일을 시켰을 때 거부권이 있지만, 비정규직은 없어요. 이것도 변해야 합니다. 사람을 소모품처럼 다뤄서는 안 되죠. 노동자의 목숨이 깃털은 아니거든요. 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법 제정으로 기업들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나 '비정규직 사용제한법' 같은 것들이 제정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기업은 엄히 처벌해야 하고, 비정규직이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쓰는데 악용되는 일도 막아야 합니다."

이태성씨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무임승차'라고 비난하는 시선에 대해, 특히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들은 지금 당장 거부감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규직화는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일임을 알아줄 것을 당부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90%는 노동하는 사람들인데, 왜 어떤 노동의 가치는 천박하게 인식되는 걸까요? 특히나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생산직 노동을 더 그렇게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우리나라도 노동교육을 의무화하고 어릴 때부터 노동은 소중하고, 나는 기업이 주는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내 당당한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기업과 노동자는 평등한 계약관계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데, 노동자가 마치 기업의 소유물처럼 인식되고 있으니 이건 아주 잘못된 거죠. 우리나라는 10년째 OECD국가 중 산재 사망률이 1위라고 해요. 경제 대국인 나라에서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미군 세균전’에 ‘부산 폭로전’으로 맞선다

  • 기자명 선현희 기자
  •  
  •  승인 2020.07.17 18:38
  •  
  •  댓글 0
    •   
  • <h4 class="subheading"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 0px 0px 1.875rem; padding: 0px 0px 0px 0.75rem; font-weight: bolder; text-rendering: optimizelegibility; line-height: 1.25; font-size: 1.25rem; letter-spacing: -0.075em; border-left: 3px solid rgb(174, 174, 174); word-break: normal; overflow-wrap: break-word;">18일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을 위한 전국연석회의와 부산시민 원탁회의 열려</h4><article id="article-view-content-div" class="article-veiw-body view-page font-size17" itemprop="articleBody" style="box-sizing: inherit; font-size: 1.063rem; letter-spacing: -0.05em; margin-bottom: 5rem;">
    ‘부산 8부두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하라’는 목소리가 전국에 퍼진다.
    오는 18일 미군 세균전부대 추방을 위한 전국연석회의와 부산시민 원탁회의가 연달아 개최된다.
    3시 전국연석회의에서는 미군 세균전 계획을 꾸준히 추적한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가 ‘미군 세균전계획’을, 소파협정 전문가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미군 세균전계획과 소파협정’에 대해 발제할 예정이다.
    또한 부산 8부두 미군기지에 맹독세균샘플을 반입한 주한미군 사령관을 검찰에 고발한 것과 관련된 보고가 이뤄지며, 2015년 탄저균 밀반입을 겪은 경기도 평택의 단체대표를 통해 경험과 현황을 청취한다.
    이날 회의에서 오는 8월 15일 미 대사관 앞 항의 기자회견과 9월 UN총회 미국 제소 등 향후 투쟁계획을 확정하게 된다.
    7시 부산시민 원탁회의에서는 장마와 코로나19의 여파로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된다.
    회의결과는 ‘부산시민 원탁회의 결정문’으로 발표되며 ▲하반기 대규모 ‘추방 궐기대회’ 결의, ▲9월까지 주한미군 사령관 고발인단 1천인 모집, ▲풀뿌리 소모임까지 관련 교육 확대, ▲규모있는 선전홍보진행 등을 논의 의결할 예정이다.
    [세균전부대 추방 부산시민 화상 원탁회의 참가안내]
    장마로 인한 불확실한 기상조건과 코로나19 부분확산에 대한 우려에 따라, 7월 18(오후7시 백운포에서 개최 예정이던 부산시민원탁회의를 아래와 같이 화상(온라인)회의로 전환하여 진행됨을 알려드립니다.

    1. 소속단체로 참가신청하신분 자신이 속한 테이블 조장이 별도로 안내해 드린 회의장소로 오후 7시까지 모여주세요.
    2. 온라인으로 개인참가 신청하신분 오후 7시 노동복지회관 2층 대강당
    구글로 참가신청을 하신 개인에 한 함. (현장 참가자 접수는 없습니다)
    3. (참관유투브주소 https://youtu.be/LbonuZPX_vs
    </article><article id="article-view-content-div" class="article-veiw-body view-page font-size17" itemprop="articleBody" style="box-sizing: inherit; font-size: 1.063rem; letter-spacing: -0.05em; margin-bottom: 5rem;">

열 여섯째 이야기, 사드 가고 평화 오라(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35)
정해랑  |  jhr13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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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18  01: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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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경복궁역에서 청와대 앞 분수대로 가는 길을 가면서 신돌석씨는 촛불시위가 한참이던 2016년 겨울의 마지막 토요일을 떠올렸다. 그날 세월호 참사 피해자 유가족들이 시위하는 군중에게 노상에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거기까지 오는 데도 참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0월 말부터 11월까지에는 경찰에 막혀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계속 가처분신청을 내면서 한발 한발 앞으로 전진했다. 그 과정을 보면서 신돌석씨는 이렇게도 역사가 진전하는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느꼈었다.
그렇게 시위 등의 압력과 합법적인 절차를 병행하는 전술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도 신돌석씨 주위에는 많았다. 특히 8-90년대의 거친 상황을 지나오면서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래봤자 저들이 굴복하냐고 하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러한 전술은 어떤 개인이나 조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것을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집단지성이 창출해낸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었다.
그때 불만을 말한 사람들은 막상 박근혜가 탄핵이 되자 별 말이 없다가 그 뒤 새 정부 들어서 적폐청산이 더디게 되자 다시 비판의 칼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그때 국회를 해산시켰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런 전략 전술에 대해서 명쾌하게 이야기할 지식도 부족하고 논리력도 없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그때 국회를 해산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었는데도 안 했단 말인가?
청운동 동사무소를 지나서 사랑채에 갔다.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도 들어갈 때 발열체크를 하고 이름을 썼다. 나와서 보니 분수대 앞에는 벌써 자리를 차지하고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11시 10분 전에 도착해서 한번 죽 둘러보았다. 작년에 했을 때 보았던 신천지 피해자 가족이라는 사람은 아직도 있었다. 동일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딸이 집을 나갔는데 신천지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작년에만 해도 좀 황당하게 생각했는데 코로나19 이후 신천지에 대해 보도가 많이 되면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11시 정각이 되자 장선우가 피켓을 들고 왔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전쟁의 불씨 사드 배치 문재인 정부 규탄한다’ 라는 구호가 적힌 것들이었다. 부근의 시민단체에 피켓을 갖다 놓고 매일 시위할 때마다 가지고 왔다가 가져가는 모양이었다. 보통 1인 시위는 1시간을 하는데 이번에는 두 시간을 하였다. 바람이 좀 세차게 불었다. 피켓이 자꾸 날아가려고 하였다. 그것을 꽉 붙들고 있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였다.
여기서 보면 촛불혁명 뒤에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한눈에 보였다. 바로 옆에 여자 두 사람이 있었는데, 방위비 인상 반대와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사드반대와 가장 가깝게 느껴졌는지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역시 세월호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참사피해 유가족들이 노란 점퍼를 입고 서 있었는데 7명이 와 있었다. 이곳에 터줏대감이라고 장선우가 소개한 사람은 전교조 조합원이었다. 교직에서 은퇴한 뒤 전교조 합법화를 요구하며 여기서 살다시피 한단다. 아예 의자를 갖다 놓고 가림막도 쳐 놓은 사람은 ‘이석기 전의원 석방’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다 아는 주장들인데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잘 모르던 요구사항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돈 농가의 피해를 보상하라는 것과 토지강제수용을 하지 말라는 요구도 있었다. KT 전 회장 황창규를 구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에 1인 시위했던 사진을 내걸고 있었다. 억울한 관청 피해에 대해 호소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이런 사람들의 피켓일수록 작은 글씨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제일 특이한 사람은 신돌석씨의 왼쪽에 있는 사람인데 라엘 오르그라는 프랑스인의 방한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말을 걸어오기에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후쿠시마에 있다가 오키나와로 옮긴 사람인데 1983년에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서 한국에 못 들어온다고 하였다. 오키나와에서도 주일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단다. 거기까지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가 UFO를 보았고, 그것이 후쿠시마 지진도 유발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1인 시위의 요구가 꼭 진보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19를 우한 폐렴이라고 하면서 중국인을 막지 않은 문재인이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현수막이 서 있었다. 그런데 이곳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이들이 몰려와서 시위를 할 가능성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코로나19 이전에 이곳에서 죽치던 성조기 부대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면 정말 민주주의는 죽 쒀서 개 주는 것 아닐까?
장선우가 먼저 가고 남아서 1시까지 1인 시위를 하고, 피켓을 들고 다시 청운동 주민센터 쪽으로 나왔다. 피켓이 두 개를 이어 붙인 것이라서 들고 가기에 쉽지 않았다. 장선우는 한 정류장 정도 거리이니 버스를 타고 가라고 했는데 그것도 뭐해서 그냥 들고 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보곤 하였다. 이전에는 부자들이 살던 동네였지만, 이제는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이 사람들은 아마 정치적 구호에 꽤 익숙하리라. 온갖 시위가 다 이곳에 와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 어딘가에 외할머니가 살았었다. 베트남에서 전사한 외삼촌을 여의고 며느리인 외숙모와 손주들과 사셨다. 주로 아니 거의 대부분 외할머니가 찾아왔지 신돌석씨 형제가 외할머니한테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신돌석씨에게는 항상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면서 어머니를 옥죄는 사람이라는 양면적 이미지가 있었다. 그 외할머니도 세상을 뜬 뒤에는 외숙모나 외사촌들과는 경조사 때나 보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사진을 찍고 나서 조금 있다 보니 상황실장이 왔다. 올 때마다 보는 사람이었다. 대구에서 평화와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인데 벌써 4년째 이곳에서 먹고 살면서 상황실장을 하였다. 처음 오던 때 그의 안내에 따라 기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달마산에 올랐었다. 걸어서 가기에도 좁게 보이는 산길을 그가 운전하는 경차를 타고 갔다. 어느 지점에 가서 내린 뒤 걸어 올라갔는데 그는 빨치산이 연상될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비탈진 산을 올라갔었다.
  
▲ [삽화-백소(白笑)]
사드가 배치되고 해가 바뀐 2018년 지방선거가 있던 6월 13일이었다. 신돌석씨는 장선우와 지역 문화 단체 활동가인 최운영과 함께 소성리에 내려갔다. 그때는 최운영이 가져온 차를 타고 갔다. 그래도 명색이 그랜저였는데 오래 되어서 기름값이 너무 많이 든다고 최운영이 투덜대었다. 그래서 좀처럼 타지 않는데 장거리를 가야 하니 몰고 간다는 것이었다. 지방선거라 공휴일인데도 길은 그렇게 막히지 않았다. 그래서 2시간 조금 넘어서 소성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전해에 있었던 기습 배치 이후에 매주 토요일에 김천역 앞에서 집회가 있었고, 소성리에서는 수요일마다 집회를 하였다. 수요 집회 주관을 공동행동에 소속된 여러 단체가 돌아가면서 하였다. 그날은 신돌석씨의 지역에서 하기로 했는데 막상 갈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신돌석씨와 최운영이 가게 되었다. 집회를 주관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소성리 지역 대책위원들, 현지의 상황실과 원불교 성지 수호 대책위원들이 다 준비해 놓았다.
가자마자 집회에 참석하였다.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 커다란 차양이 쳐져 있었다. 들어서 옮길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주민들이 앞자리에 앉았다.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이 동네 할머니들이었다. 경북 지역의 개신교나 천주교 목회자 활동가들, 지역에서 평화운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왔다. 집회에 참석한 인원이 40여 명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 동네는 100가구가 안 되고, 인구 수도 200명 안 된단다. 사실상 마을 주민 모두가 사드반대 투쟁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발언을 시켰다. 장선우나 최운영더러 하라고 했는데 굳이 신돌석씨가 가장 연장자니까 해야 한단다. 그래서 나가서 발언을 했다. 오늘이 지방선거 날이다. 지방자치를 잘 하자고 선거를 하는 날이다.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고 있는 사드를 왜 엉뚱한 동네 사람이 결정해서 하려고 하냐? 한 마디 묻지도 않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잘 한다고 박수를 쳤다. 장선우도 최운영도 말 잘 했다고 하면서 이제 기회만 되면 하란다. 신돌석씨는 손사래를 쳤다.
그날은 1박하기로 하고 가서 집회가 끝나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교무의 안내로 원불교 성지를 둘러보았다. 원불교 사원이 있는 곳과 2대 종사인 정산송규종사의 생가는 좀 떨어져 있었다. 사드만 아니면 평온하기 그지없는 곳일 듯하였다. 신돌석씨 일행을 안내한 교무는 원불교 내에서도 사드 반대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성지를 수호한다는 뜻에서 출발했다가 이제 사드 배치 자체가 교리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반대를 한다고 하였다.
저녁 5시 반이 되자 부대 앞으로 이동하였다. 마을회관에서 진밭교까지 10분 정도 걸었고, 거기서 부대 앞까지는 걸어서 가기에는 꽤 멀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돌석씨 일행도 걸어가다가 도중에 상황실장의 차가 와서 거기에 동승해서 갔다.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져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드 기지는 미군 기지임이 분명한데 우리 군이 지키고 있단다. 그것도 최정예부대의 하나라고 하는 특공대 장병들이 지킨다는 것이다. 한미상호방위협정의 어느 조항에 우리 군이 미군부대를 지켜 주기로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상황실장은 이야기하였다. 법이나 규정이 별 소용이 없는 것이 한미관계인 것 같다.
원불교 교무의 사회로 진행된 집회는 낮에 있었던 집회와는 달리 참석한 사람들이 플랭카드를 들고 부대 앞에서 노래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참석한 사람 모두가 짧게라도 연설을 하거나 구호를 선창하였다. 오는 도중에 보았던 가지각색의 현수막에 적혀 있는 구호가 소리가 되어 나오는 듯하였다. 전국의 모든 운동단체들이 다 현수막을 내건 것 같은데 왜 저지할 힘이 되지는 못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집회를 끝낸 뒤에는 진밭교로 내려와서 공사하는 사람들의 차량을 막았다. 여기서도 약식으로 집회가 있었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 차량에 탄 사람들은 기다렸다. 매일 있는 일이라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경찰들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서로 암묵적으로 약속이 되었는지 약식 집회가 끝나고 그들을 향해 우리 민족을 위험에 빠뜨리고 미국의 이익만을 위한 사드기지공사를 하지 말라고 한 뒤 길을 터주었다. 일단 이 사람들은 명분상 사드기지공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지 내 장병들을 위한 편의시설 공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밤에는 주민들이 마련해준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마을회관에서 잤다. 세 사람과 상황실장이 함께 잤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상황실장이 차려 준 아침 식사를 한 뒤 진밭교에서 하는 예배를 드리러 갔다. 아침마다 거기서 개신교 목사 집도로 예배를 본다고 하였다. 어제 저녁과는 달리 진밭교에는 경찰 수십 명이 와 있었다. 할머니들인 주민들 10여 명과 상황실장, 원불교 교무, 개신교 목사 그리고 거기서 잔 신돌석씨 일행 세 명이 전부였다. 경찰의 절반도 안 되는 수였다. 경찰을 보자 신돌석씨는 갑자기 긴장감이 느껴졌다.
예배가 시작되었다. 찬송을 부르고, 목사의 기도가 있고, 설교가 있었다. 7시 40분쯤부터 차들이 오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에 퇴근한 사람들이 다시 공사장에 출근하려는 것이었다. 입구를 막고 예배를 보고 있는데 차들은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 7시50분이 되자 경찰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입구를 열어 달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끝까지 막고 싸워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켜 주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외부에서 온 사람이 싸우자 말자 하기도 뭣하였다.
원불교 교무가 귀띔을 해주었다. 그냥 일어설 수는 없고 경찰이 옮겨 줄 테니 거기에 몸을 맡기시라고 했다. 지휘관이 지시를 내리자 경찰 세 명이 일조가 되어 의자채로 들어서 옆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특별한 저항을 하지 않고 ‘사드 가고 평화 오라’라는 노래를 계속 불렀다. 어찌 보면 형식적인 싸움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비참한 현실이기도 하였다. 저항을 해봤자 들려 나가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였다.
  
▲ [삽화-백소(白笑)]
상황이 종료되고 상황실장에게 물으니 공사를 우리가 막고 있다는 것을 아침 저녁으로 보여준다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해는 되었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렇다고 신돌석씨에게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더 말하기도 어려웠다. 예배가 끝나고 마을회관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는데 상황실장이 기왕 오셨으니 시간이 되면 달마산에 한번 가보자고 하였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사드 기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란다. 그래서 그의 차를 타고 달마산에 가게 되었다. 상황실장이 운전하느 경차를 타고 마을 밖으로 나가서 산을 빙 돌아서 갔다.
그러다가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차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을 한참 올라갔다. 차를 세워 놓고도 걸어서 산길을 타고 올랐다. 세 사람은 상황실장을 따라가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이럴 때 자주 나오는 말이 나왔다. 운동 좀 해야 하는데. 산에만 가면 중년의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산만 내려가면 다시 잊어버리고 음주에 찌들어 버리곤 했다. 상황실장은 산을 잘 타는 것뿐만 아니라 이 산에 아주 익숙한 듯 평지에서 뛰듯이 올라가다가 뒤돌아보고 기다려 주곤 하였다.
정상에 올라 너럭바위 위에 앉으니 정말 기지가 한눈에 보였다. 상황실장은 망원경을 들고 갔다. 매일 한 번씩 여기에 올라와서 상황을 체크한단다. 사진도 여러 장을 찍었다. 신돌석씨도 핸폰으로 몇 장 찍었다. 헬리콥터가 오르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반대쪽에 출입구가 없다고 한다. 출입구가 이쪽에만 있는데 우리가 막고 있으니 병사들의 부식 등을 헬리콥터로 나르는 것 같다고 한다.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기지 내 도로를 따라 차들이 이동하는 것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정지된 느낌을 주었다.
달마산에서 본 기지는 정말 천혜의 요새였다. 어떻게 산 꼭대기에 그런 평지가 있는지 희한하게 느껴졌다. 롯데에서 이 땅 내놓기가 아까웠을 것도 같다. 어쩌면 더 큰 것을 받아내기 위해 알아서 준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쉽게 주기에는 아깝게 보였다. 원래 그 자리에 목장이 있었는데 롯데가 사들여서 골프장을 운영한 지 얼마 안 돼서 사드 기지로 낙점되었다고 한다. 상황실장이 망원경을 건네주면서 저게 바로 문제의 사드니 잘 봐두라고 하였다. 저게 무엇이기에 이 마을 주민들을, 우리 국민들을 괴롭게 하는 것일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코로나19 때문에 마을회관이 폐쇄되어서 어디서 묵고 있냐고 물었더니 상황실장은 웃으면서 소성리가 다 자기 집이라고 하였다. 대구에서 평화운동, 통일운동을 하다가 이곳에 파견되어 왔던 이 사람은 벌써 햇수로 5년째 여기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 사람처럼 말없이 헌신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쉽게도 오늘은 대구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하였다.
점심때가 되니 할매들이 점심 먹기 위해 나타났다. 진밭교를 지키던 사람들과 할매들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장선우가 오늘은 마을회관도 닫히고 해서 빵으로 점심을 때우자고 했는데 뜻밖에도 갈비탕이 점심으로 왔다. 함께 둘러앉아서 갈비탕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이지만 여러 번 오니 낯이 익은 할매들도 많았다. 그 중 한 할매가 지난 번 경찰의 침탈 이야기를 하면서 성주경찰서가 괘씸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장선우가 술 마시다 간 날도 이 조그마한 동네에 무려 4천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그것도 의경들이 아니라 기동대 소속인 듯 거구들만 모였단다. 순식간에 마을회관부터 통제해서 진밭교로 못 올라오게 하고, 진밭교에 이중으로 진을 쳐서 장비를 진출입시켰다고 한다. 분을 못 삭이며 이야기를 하는 할매는 지방선거 이기고, 국회의원 선거 이기면 뭐하냐고 하면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을 몇 번씩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