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8일 토요일

‘백남기 밀’ 수확 날, 콤바인도 부재를 알아차렸다


등록 :2016-06-18 13:39수정 :2016-06-18 14:10
백남기의 ‘마지막 밀’
경찰 물대포에 쓰러지기 이틀 전 파종
홀로 자라 야윈 밀알이 국가폭력 증거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농부 백남기(69)씨가 뿌린 ‘마지막 밀’이 수확됐습니다. 우리밀살리기운동에 헌신해온 그가 이 땅에 던진 메시지이자 ‘한국 농업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2500여평의 밀밭에서 1.3t의 알곡이 나왔습니다. 40㎏ 가마니로 32가마입니다. 평소 백남기씨는 그 밭에서 50~60가마를 거뒀습니다. 씨앗을 뿌린 농부가 국가 폭력에 쓰러진 뒤 혼자 자란 밀의 생육이 야윈 수확량에 그대로 반영됐습니다. 그의 후배들이 이 안쓰러운 밀의 보존·확산을 추진합니다. ‘백남기 밀’ 보존 프로젝트에 힘이 돼주시길 권합니다.
초록이 지나간 것들 사이로 아직 초록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누렇게 익은 밀보다 밀 틈에 끼어든 푸른 사료작물이 웃자랐다. 초록에 찔리는 밀을 쓰다듬으며 박경숙(63)씨가 수확을 하루 앞둔 밭에 있다. 지난해 11월12일 남편 백남기(69)씨는 그 밀밭에 직접 손으로 씨앗을 뿌렸다. 이틀 뒤 그는 서울에서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그가 7개월째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동안 그의 밀은 주인 없이 홀로 자라 야위었다. 수확기가 지난 밀밭에서 밀 아닌 것들이 밀을 굽어보는 상황도 7개월 동안 관리되지 못한 밀밭의 처지를 말해준다. 이튿날 오후 콤바인 한 대가 백남기씨의 마지막 밀을 수확했다. 밀을 거둘 기운도 의욕도 없던 아내는 “형님의 마지막 밀을 방치할 수 없다”는 남편 후배들의 권유에 힘을 냈다. 그 후배들을 위해 박경숙씨는 밀이 깎여나간 밭을 가로질러 새참을 내왔다. <한겨레> 토요판은 지난 12일과 13일 이틀 동안 백남기씨의 마지막 밀 수확을 취재했다. <한겨레>는 최근 한 달간 백남기씨 가족·대책위원회와 밀 수확 일정 및 판매·보존 방법을 논의해 왔다. 국가 폭력이 꺾어버린 한 농부의 꿈을 기사로써 지원한다. 전날 비를 뿌리던 하늘이 수확 당일엔 해를 내보냈다. 보성/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셋째)씨가 남편의 후배들과 그가 남긴 ‘마지막 밀’을 수확하고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셋째)씨가 남편의 후배들과 그가 남긴 ‘마지막 밀’을 수확하고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콤바인이 밀밭 한가운데서 멈췄다.
“아따 풀이 많아 부러요.”
콤바인을 몰던 남편 후배가 바퀴 사이에 걸린 초록색 식물을 빼내며 말했다. 밀보다 웃자란 사료작물이 콤바인 기계에 끼어 바퀴를 세웠다.
“이탈리안 라이그래스 때문에 그래요.”
박경숙(63)씨가 밀밭에 주저앉아 포대 자루의 입을 벌렸다. 콤바인에서 쏟아지는 밀알들을 손으로 긁어 자루 안에 밀어 넣었다. 남편이 남긴 밀을 한 알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쇠붙이인 콤바인도 남편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그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밀 아닌 것들이 콤바인을 세울 만큼 밀밭에 끼어들진 못했을 것이다.
쿠르르르릉, 엔진이 다시 끓었다. 푸드드드덕, 새들이 날아올랐다.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69)의 ‘마지막 밀’이 콤바인 안으로 쓸려 들어갔다.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둘째)씨가 남편의 ‘마지막 밀’ 수확을 도와준 후배들을 위해 새참을 내왔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백남기씨의 아내 박경숙(왼쪽 둘째)씨가 남편의 ‘마지막 밀’ 수확을 도와준 후배들을 위해 새참을 내왔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쓰러지기 이틀 전 파종한 밀밭
“남편의 손길”이 밀밭 전체에 묻어 있었다. 그가 경찰의 직사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기 이틀 앞서 파종(2015년 11월12일)한 밀밭이었다. 214일 전 백남기는 2500여평의 밭을 오가며 직접 손으로 씨앗을 뿌렸다. 평소 기계로 파종하던 그가 지난해엔 유독 손 파종을 고집했다. “힘들게 그러지 말고 기계로 하라”는 말에도 남편은 “운동도 되고 좋다”고 했다. 자신의 온기를 땅에 남겨두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아내는 생각했다.
쾌재쟁 쾌재쟁 쾌재재재쟁….
아내의 귀에서 꽹과리가 울었다.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가 걱정될 때마다 남편은 꽹과리를 치며 밀밭을 돌았다. 새벽에도, 해 질 녘에도, 잠에서 깬 직후에도 꽹과리를 들고 밀을 지켰다. 고구마를 파먹던 멧돼지가 자신을 피해 밀밭으로 질주했다며 남편은 꽹과리를 치고 돌아와 이야기했다. ‘그날’(지난해 11월14일) 이후 꽹과리는 입을 다문 채 집 툇마루에 엎드려 소리를 잃었다.
하루와 하루가 쌓여 7개월을 채웠다는 사실이 박경숙씨는 현실로 감각되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병원으로 실려간 남편(외상성 경막하 출혈)은 계절이 세 번 바뀔 때까지 죽음의 곁을 벗어나지 못했다. 수술한 두개골은 아직 열려 있었고, 췌장 기능 약화로 인슐린을 투약받고 있으며, 5월초엔 감염수치가 치솟아 고비를 맞기도 했다. 패혈증을 우려해 자제하던 항생제도 의료진이 최고 단계로 처방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남편을 간호하던 아내가 밀 수확을 위해 내려와 있었다. 백수를 누린 친정 큰어머니의 장례에도 다녀왔다. “그렇게 수명대로 살다 가시는 게 순리”였다. “감기약 한 알 안 먹을 만큼 건강했던 양반이 생죽음을 맞고 있는” 상황을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날들”을 버텨오며 그는 혼자서 밀을 거둘 자신이 없었다. 1989년 밀 농사를 시작한 이래 남편 없는 수확은 처음이었다. “형님의 마지막 밀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후배들의 말을 따라 어렵게 날을 골랐다. 남부 지방에서 밀은 10월말~11월 중순 파종해 이듬해 6월 중순께 거뒀다. 한 주 뒤 장마가 예고되고 있었다. 콤바인을 빌릴 수 있는 날짜는 13일뿐이었다. 국가 권력이 칠순을 앞둔 농부를 때린 지 만 7개월에서 하루가 빠지는 날이었다.
낮 12시50분 콤바인이 밀밭에 진입했다. “빗물과 이슬이 말라 밀이 고슬고슬해질 때”를 기다려 수확은 시작됐다. 콤바인이 밀밭 가장자리를 돌며 크게 원을 그렸다.
밀밭으로 오르는 길마다 “백남기를 살려내라”는 펼침막(지난달 14일에 진행된 ‘밀밭 걷기’ 때 부착)이 출렁였다. 수십 년 전 보성읍내에서 생필품을 짊어지고 활성산(보성읍·웅치면·회천면을 잇는 해발 465m의 산)을 넘던 보부상들은 그 길을 지나 회천면 녹차밭에 닿았다.
밀밭은 본래 산이었다. 부부가 마을에 정착(1982년)하고 1년 뒤 밭(5천여평)으로 일궜다. 그해 솔껍질깍지벌레가 창궐했다. 군청은 농가마다 공문을 보내 소나무 벌목을 요구했다. 나무를 베고 뿌리를 캐냈다. 베어내지 않은 몇 그루의 소나무가 튼튼하게 자라 밭(2500여평)과 밭(2500여평)을 나누는 ‘운치 있는 경계’가 됐다.
물대포 맞기 이틀 전 파종한 밀밭
거무스름해지도록 수확 시기 넘겨
밀밭 전체에 묻은 백남기의 손길
살아도 산 것 아닌 시간 버틴 아내
후배들 도움 받아 ‘마지막 밀’ 거둬
1989년부터 우리밀 재배에 헌신
전국 돌아다니며 종자 구해 전파
‘보성 1호 농민’ 돼 주민들 설득
자택 공간 열어 수매까지 도맡아
광주·전남 우리밀살리기운동 개척
‘보성군 1호 우리밀 농민’ 백남기씨가 1990년대 초 자신의 집(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우리밀을 수매하고 있다. 수매 경로가 확보되지 않았던 우리밀살리기운동 초기 그는 자택 한편에 공간을 마련해 직접 수매 역할까지 맡았다.  박경숙 제공
‘보성군 1호 우리밀 농민’ 백남기씨가 1990년대 초 자신의 집(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우리밀을 수매하고 있다. 수매 경로가 확보되지 않았던 우리밀살리기운동 초기 그는 자택 한편에 공간을 마련해 직접 수매 역할까지 맡았다. 박경숙 제공
“지붕이 날아가 위가 뚫린 느낌”
부춘(富春)은 농민들의 ‘가난한 꿈’이었다. 보성 선씨와 수원 백씨가 그 꿈을 붙들고 부락을 이뤄 살았다. 춘궁기에도 넉넉하고 싶은 소망을 마을 이름에 담아 불렀다. 결혼(1981년 11월) 3개월 뒤 백남기 부부는 부춘마을(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에 신혼살림을 풀었다. 할아버지 작고 이후 10여년간 비어 있던 낡은 집이었다. 도시로 나가기 위해 공부하던 시대였다. 도시에서 공부한 아들이 비만 오면 지붕이 새는 집으로 들어간 ‘사태’를 아들의 부모(당시 광주광역시 거주)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최소 1700년대부터 9대가 그 집에서 삶을 물려주고 물려받았다. 부부는 그 집을 생명으로 가득 채웠다. 분홍빛 낮달맞이꽃과 보랏빛 솔잎국화가 마당을 채색했고, 촘촘히 솟은 대나무숲이 집의 등을 받치며 울타리가 돼줬다.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듬직하고 우뚝했으며, 소나무·감나무·동백나무가 어울려 마당의 풍경을 구성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온갖 새들이 제 소리를 터뜨리며 날아다녔다. 낯선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오이삼’(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날짜로 이름 지은 개)과 ‘팔일팔’(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일)은 열심히 짖었다.
각자의 기운대로 힘써 살아온 그 집의 일상에서 백남기만 빠져 있었다. 집주인은 돌아오지 않는데 제비는 올봄에도 찾아와 새끼를 까서 데리고 나갔다. 처마에 붙은 빈 제비집 하나가 제비의 자리를 기억하며 다음 봄을 기다렸고, 아내가 깨끗하게 씻어둔 하얀 고무신이 마루 밑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남편과 33년을 함께한 집에서 홀로 남을 때마다 아내는 “지붕이 확 날아가 위가 뚫려버린 듯” 황망했다.
콤바인이 밀을 삼키며 지나갔다. 기계엔 감정이 없었다. 백남기의 마지막 밀을 콤바인은 예년과 다름없이 빨아들였다. 기계는 탈곡된 밀알만 머금고 밀알을 잃은 지푸라기들은 뱉어냈다.
그 밭에서 부부는 1989년(당시 백남기는 가톨릭농민회 광주·전남연합회장)부터 우리밀을 재배했다. 백남기에게 우리밀은 ‘그저 여러 작물’ 중 하나가 아니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이 수매를 중단한 뒤 우리밀(자급률 0.2%)은 문자 그대로 씨가 말랐다. 농민들은 밀 재배를 포기했고 토종밀은 밭에서 사라졌다. 수입 밀이 우리밀을 멸종시킨 뒤 벌어질 일을 그는 우려했다.
그는 후배들과 우리밀 종자를 찾아 전국을 돌았다. 차도 안 다니는 시골길을 걸어다니며 촌로들이 약으로 남겨둔 씨앗들을 한 줌씩 얻었다. 2년 동안 모은 이름 모를 종자 24㎏을 다시 각 지역으로 내보냈다. 벼와 보리를 이모작하던 농가를 설득해 보리 대신 밀을 심게 했다. 백남기도 보성군의 ‘우리밀 1호 농민’이 됐다. 초기엔 그의 집 마당에 밀 가마니를 쌓으며 수매 일까지 도맡았다.
“동네 어르신들한테 밀을 심어보셨냐고 물었더니 당신들 부모가 심은 것은 봤지만 나는 안 심어봤다고 하세요. 그분들 연세가 70~80대셨는데도요. 그러면 기억을 더듬어보자 해서 밭에 쟁기질을 해서 퇴비를 놓고 골을 팠어요. 거기에 밀을 뿌리고 기다려봤어요. 그랬더니 나오더라고요.”(2013년 <광주평화방송> 대담)
1994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 때 그는 공동의장이 됐다. 광주·전남은 현재 전국 우리밀 생산량(올해 경작지 3만평·수확량 3만5천t·자급률 2% 목표)의 50%를 차지한다. 백남기는 맨 앞에서 운동을 개척했다.(최강은 광주·전남본부장)
콤바인이 운동장에 트랙을 만들듯이 밀밭을 깎아나갔다. 콤바인이 밭을 따라 돌수록 길은 넓어지고 밀은 줄어들었다. 밀알을 잃은 밀짚이 퇴비가 되기 좋게 절단돼 길 위로 뿌려졌다.
가뭄이 심했던 2000년 5월5일 백남기씨가 호스로 밀밭에 물을 주고 있다. 박경숙 제공
가뭄이 심했던 2000년 5월5일 백남기씨가 호스로 밀밭에 물을 주고 있다. 박경숙 제공
“농민은 사람 아니랍니까”
백남기의 책장은 농기구 창고 안에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책들이 삽, 낫, 톱, 망치 옆에서 그가 공부한 역사와, 갈등한 사회와, 고민한 농촌을 끌어안았다. <한국민중사> <영국노동운동사>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국 농업·농민 문제 연구> 등이 <갈멜의 산길>(가톨릭 영성에 관한 책)과 이웃하며 치열했던 한 농부의 시간을 요약했다.
‘농자’는 한 번도 ‘천하지대본’이었던 적이 없었다. ‘부춘’은 바라지도 않았다. 대통령의 쌀값 인상(80㎏ 21만원) 공약이라도 그는 지켜지길 바랐다.
“언제는 정치가 농민을 대접했답니까. 재벌은 부채 탕감도 잘 해주고 보조도 잘 해주면서 농민은 생계유지도 못하게 만들었어요. 농민이 아무리 숨죽이고 산다고 어떻게 20년 동안 쌀값이 제자리걸음(15만원 안팎)일 수 있답니까. 농민은 사람 아니랍니까. 남편이 왜 서울까지 올라갔겠어요.”(박경숙)
후배 농민 최영추(64·전 보성군농민회장)가 콤바인이 흘린 밀 한 가닥을 주워 들었다. “낫으로 직접 벨 땐 까시락(보리나 밀의 깔끄러운 수염·전라도 방언)이 모가지와 겨드랑이를 찔러서 고생 많았제.”
지난해 11월14일 백남기는 보성 주암호에서 열리는 ‘자연지킴이 걷기대회’에 참가할 계획이었다. 전날 그를 만난 최영추가 서울 ‘민중총궐기’에 가자고 권했다. 당일 웅치면에선 백남기만 버스를 탔다. 경찰이 물대포를 쏠 때 보성군 버스는 돌아갈 채비를 했다. 형님을 찾을 수 없었던 최영추가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아침 박경숙씨는 남편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휴대전화가 없는 남편에게 최영추와 첫째 딸의 번호를 적어주며 일행과 떨어지면 공중전화를 찾아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럴 일 없을 것이네.” 남편은 말했었다.
최영추의 두 번째 전화는 남편이 병원으로 실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형님을 찾아 헤매던 그는 구급차로 옮겨지는 한 남자를 봤다. 남자의 가슴에 형님이 달고 다니던 가톨릭농민회 배지가 있었다. 형님이 예정대로 주암호로 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날 이후 최영추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콤바인이 탈곡한 밀알을 모아 곡물적재 트럭에 쏟아부었다.
밀이 잘려나간 밭을 가로질러 박경숙씨가 새참을 내왔다. 권용식(52·현 보성군농민회장)이 트럭을 몰고 가 머리에 인 새참을 받아 실었다. 사건 당일 그는 백남기를 태운 구급차에 올라 서울대병원까지 동승했다.
삶은 감자와 고구마, 달걀, 고추, 막걸리, 수박을 담은 빨간 고무대야 주위로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지난해 일 터지지 전에 수확한” 고구마와 앞집 밭에서 얻어온 감자가 더위 속에서 따뜻했다. “내가 뭔 정신으로 감자를 심고 있겄소.” 박경숙씨가 새참을 차릴 때 말했다. 지난해 가을부터 일상의 농사는 중단됐다. 밭에선 잡초가 채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랐다.
남편과 형님이 좋아했던 멸치젓을 삶은 달걀에 올려 먹으며 아내와 후배들은 굳이 그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날로 뛰는 농약값을 이야기했고, 헐값에 넘긴 매실을 이야기했으며, 우렁이를 활용한 친환경농법을 이야기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떨칠 수 없는 그의 부재가 텅 비어가는 밀밭처럼 휑했다. 콤바인이 밀밭 중앙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감정 없이 알곡 빨아들이는 콤바인
밀 이삭 아래 뾰족이 돋은 잡초들
밀밭에 끼어들어 웃자란 사료작물
돌봄 못 받고 자란 안쓰러운 곡식
기계 멈춰 세우며 밭주인 부재 증거
7개월 키워 3시간 못돼 텅 빈 밀밭
평소 비해 크게 못 미치는 소출량
‘백남기 밀’ 종자 보존·보급 추진
판매 수익금은 기념사업회 종잣돈
“그의 뜻 많은 분께 가닿길 소망”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씨의 쾌유를 바라는 펼침막 너머로 콤바인 한 대가 밀을 수확하고 있다. 그는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기 이틀 전(지난해 11월12일) 이 밭에 씨앗을 뿌렸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13일 농부 백남기씨의 쾌유를 바라는 펼침막 너머로 콤바인 한 대가 밀을 수확하고 있다. 그는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기 이틀 전(지난해 11월12일) 이 밭에 씨앗을 뿌렸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의 부재가 텅 빈 밀밭처럼
콤바인이 다시 멈췄다. 이탈리안 라이그래스가 콤바인의 진격을 방해했다. 라이그래스는 바람을 타고 씨앗으로도 번졌지만, 퇴비로 뿌려진 소똥에서도 싹을 틔웠다.
주인의 부재는 밭에 정확히 새겨졌다. 수확 시기를 넘긴 밀은 불에 그슬린 것처럼 거무스름했다. 누렇게 익은 단계를 지나 거뭇해진 밀 이삭 아래로 초록의 잡초들이 뾰족했다. 빛깔도 때를 알아야 생육과 결실을 반영했다. 때를 모르는 초록은 싱그러움이기보다 누군가의 심장에 박힌 푸른 멍울 같았다.
작황이 좋지 않았다. 매년 2월 중순마다 치르던 ‘밀밭 밟기’도 올해는 건너뛰었다. 날씨가 풀려 들뜬 땅을 늦지 않게 밟아줘야 뿌리가 잘 붙고 수확량이 늘었다. 퇴비를 먹지 못한 밀알은 끼니를 거른 아이처럼 말랐고, 뽑아주지 못한 잡풀이 땅의 부족한 양분을 빼앗았다.
마을 후배 문영제(64)는 형님의 밀밭 밑에서 고구마를 키웠다. 가끔 형님 밭에 올라가 밀을 살피면 주인 잃은 밭의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어서 오소” 하며 그의 귀농을 독촉하던 형님이 정작 귀농 뒤엔 “저래 돼버렸”다. 문영제는 “혼자 자란 밀밭”을 볼 때마다 울화를 삼켰다. 그의 밭과 밀밭 사이에서 형님 부모와 조부모의 산소가 들꽃과 잡초로 무성했다.
“시신경을 다쳐 생존해도 앞을 볼 수 없대요. 호흡도, 체온도, 혈압도 스스로 조절을 못해요. 다시 일어나 돌아올 거라 생각 안 해요. 손이라도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아내는 “수도 없이 정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농사지을 기운도 재미도 바닥”이 났다. 박경숙씨가 짓는 밀농사도 올해가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논은 가을에 식량을 받는 조건으로 동네 주민에게 경작하도록 내줬다.
우리밀 농사가 돈을 벌어다 준 적은 없었다. 40㎏ 한 가마당 3만3천~3만5천원을 받았다. 종자값과 퇴비값, 기계값 등을 제하면 수익이 빠지지 않았다. 돈벌이를 생각해선 계산이 안 서는 밀 농사를 백남기는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남편과 밀을 수확하고 나면 아내는 그 자리에 콩을 심었다. 남편은 “도덕성은 100점이었지만 경제력은 0점”이었다. 콩을 거둬 담근 유기농 된장으로 아내는 부족한 생활비를 벌었다. 1984년 ‘소값 파동’(전두환 정권 당시 무분별한 소 수입으로 소값 폭락) 때 진 빚을 아직도 다 갚지 못했다. 빚의 정확한 액수도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을 털어내며 아내는 ‘남편 없는 삶’을 맞고 있었다.
콤바인이 남은 한 줄을 밀고 있었다. “형님이 지켜온 밀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할 거인디.” 최영추가 말했다. “오늘 수확한 밀을 가져다가 ‘백남기 밀’(상자기사)로 만들 거예요. 이 밭을 계속 일궈서 형님 이름의 밀로 보존하고요.” 최강은이 설명했다. “좋은 생각”이라며 권용식이 반겼다.
고령이 되면서 백남기는 밭의 절반 면적에만 밀을 뿌렸다. 그는 그루밀(국수용), 은파밀(국수용), 백중밀(국수용), 금강밀(빵용) 등을 재배하며 종자별 특성과 수확량을 검증해왔다. 그가 지난해 마지막으로 파종한 씨앗은 백중밀이었다. ‘백남기 밀 보존사업’도 그 백중밀에서 시작될 것이었다.
오후 3시30분 콤바인이 밀 수확을 끝냈다. 7개월을 자란 밀을 거두는 데 2시간40분이면 족했다. 백남기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농사의 흔적은 그렇게 정리됐다. 밀밭에 더는 밀이 없었다.
지난해 11월17일 가족과 대책위원회는 강신명 경찰청장 등 7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다. 한 달 뒤 고발인 조사를 한 검찰은 사실상 수사를 중단했다. 백남기의 씨앗이 싹을 얻고,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이 될 때까지, 국가 폭력의 책임자 중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야당은 ‘백남기 청문회’를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이 상시청문회법(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셨다지. 내가 미치지 않고 버티는 게 이상할 지경이에요.”
40㎏짜리 32가마
탈곡된 밀이 마을의 곡물 건조기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쏴아아아 소리를 내며 밀알은 수분 함량 12%(정부 기준)에 맞춰 말라갔다. “착잡하고 서운해요.” 건조 과정을 지켜보던 박경숙씨가 말했다. 밀의 수분이 마르더라도 그와 가족이 흘린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었다.
건조된 밀은 이튿날 주식회사 우리밀식품(대표 최강은)으로 운반돼 가공에 들어갔다. 수확 물량은 1.3t이었다. 40㎏짜리 32.5가마에 그쳤다. 백남기가 쓰러지기 전 소출량은 50~60가마였다. 밀은 몸무게를 크게 줄여 그의 빈자리를 증거했다.
남편의 마지막 밀을 거둔 아내는 다시 서울행 채비를 했다. 마당에서 하얀 나비가 너풀너풀 날았다.
보성/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그의 밀’을 지켜주세요
‘백남기 밀’ 보존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그의 아내 박경숙(63)씨와 후배 농민들은 13일 1.3t 분량의 밀을 수확했다. 지난해 11월14일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의식을 잃기 이틀 전 백남기(69)씨가 파종한 밀밭 2500여평에서 얻었다. 그가 이 땅에 남긴 마지막 농사의 결실이며 흔적이다.
“우리밀을 지켜온 형님의 사명감을 존중하고 그 의미를 기리는 쪽으로 판매·보존하려고 합니다.”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장은 설명했다.
우리밀은 정부가 수매하지 않는다.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국산밀산업협회,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이 수매해 생활협동조합이나 제분·가공업체 등에 유통한다. 그동안 백남기씨가 수확한 밀은 보성농협과 우리밀농업협동조합에서 수매했다.
그의 마지막 밀은 수매 절차를 밟지 않고 최강은 본부장이 전량 인수했다. 그는 광주·전남본부가 주주로 참여하는 ‘우리밀식품’(제분·면류 가공업체)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 정선된 씨앗은 오는 가을 백남기씨의 밭에 다시 뿌려진다. 보성군농민회가 주축이 돼 경작·재배한 뒤 ‘백남기 밀’이란 이름으로 종자를 보존·보급할 방침이다. 혼자 밀 농사를 이어가기 힘든 아내 박경숙씨는 사료작물 재배 농민에게 밀밭을 임대할 계획이었다.
알곡은 제분·가공해 밀가루와 국수·냉면으로도 판매한다. 제품엔 “백남기 농민이 파종했던 우리밀을 수확해” 만들었으며 “수익금은 백남기 농민 관련 기금(기념사업회 종잣돈 등)으로 사용된다”는 문구가 붙는다. 매년 수확되는 백남기 밀을 지속적으로 제품화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쓰러진 지 6개월째 되는 날(5월14일) 채취한 밀 이삭은 푸른빛을 유지한 상태로 보존처리했다.
박경숙씨는 남편의 이름을 딴 밀을 통해 그의 뜻이 전해지길 희망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계산하지 않고 우리 땅과 농촌, 먹거리를 살리는 데 헌신하신 분이에요. 그의 마음이 많은 분들께 가닿았으면 좋겠어요.”
백남기씨는 2013년 우리밀을 아껴달라며 이렇게 호소했다. “6월이 돼 비가 (많이) 오면 풀이 밀을 덮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밀을) 수확을 해서 세상에 내놓으니까 믿고 드셔주신다면 우린 더욱 힘을 얻을 겁니다. 유기농이다 친환경이다 뭐다 하지 않고 진짜 그대로 우리밀을 생산할 테니까, 소비자 여러분들이 우리 것을 많이 이용해주시면, (저희는) 신나는 우리밀 농사를 짓겠습니다.”(가톨릭농민회 광주대교구연합회 창립 40주년 기념 대담)
‘백남기 밀’ 주문: 우리밀식품 1588-6208, woorimil@hanmail.net
이문영 기자

미국반전단체 앤서대변인 미대사관앞1인시위 ...

  • 미국반전단체 앤서대변인 미대사관앞1인시위 ... 미대사관·박<정부>탄압 148일째
  • 임진영기자
    2016.06.18 21:33:03
  • 18일 코리아연대(자주통일민주주의코리아연대)는 미대사관, 청와대, 서울구치소 앞에서 393일째<박근혜퇴진,미군떠나라> 1인시위를 진행했다.

    미대사관앞에서의 합법적인 1인시위에 대한 탄압은 148일째 계속됐다.

    미대사관앞 1인시위현장에서 평화와통일을위한국제포럼에 참가를 위해 서울에 방문한 외국인사들이 코리아연대의 1인시위에 연대와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도 경찰들의 폭압적 탄압은 계속됐다.

    현장을 보고 있던 미국반전단체 앤서의 대변인 데렉 포드는 직접 코리아연대의 플래카드를 빌려 들고 미대사관앞에 1인시위를 전개했다. 

    경찰은 외국인도 강압적으로 밀어냈다. 데렉 포드는 굴하지 않고 건널목 건너편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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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대사관앞에서의 합법적인 1인시위에 대한 탄압은 148일째 계속되고 있다.

남북대화는 회복불능 국면, 북미 막후협상마저 깨진다면...

남북대화는 회복불능 국면, 북미 막후협상마저 깨진다면...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6/19 [01:06]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김정은 당위원장은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이 땅 우에 기어이 존엄높고 번영하는 통일강국을 일떠세우고야말 것"이라고 말하며 조국통일을 향한 자신의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천명하였다. 특히 지금처럼 군 당국 사이의 모든 대화가 중단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며 시급히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와와 안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7차대회 이후 북은 즉각적으로 여러 부문에서 연이어 남북대화를 제의해왔다.     ©자주시보

북이 "대화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며 그간의 전략을 바꿀 가능성을 내비쳤다.

17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북의 민족화해협의회 대변인은 같은 날 담화를 통해 "박근혜가 우리와 마주앉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린다면 굳이 대화를 청할 생각이 없다"면서 "박근혜가 아니더라도 우리와 손잡고 나갈 대화의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고 밝혔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고 한다.

대변인은 "우리의 대화 제의가 제재와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면전환용'이라는 것은 온 겨레가 염원하는 북남관계개선을 끝까지 기피하려는 대결광증의 집중적발로"라고 덧붙였다.

민족화해협의회 대변인은 또 "우리의 핵 개발이 북남관계 개선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은 가장 파렴치한 흑백전도의 극치"라며 "우리의 핵 보유는 자기의 존엄과 자주권, 운명과 미래를 사수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자위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는 핵 능력을 질적, 양적으로 강화하고 태평양 건너의 미국본토까지도 날려 보낼 수 있는 최첨단 전략 핵 타격 수단들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면서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에 대한 응당한 자위권행사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도발로 매도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는 북은 전날에도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를 통해 "세계 최대의 열점 지역인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가장 최선의 방도는 우리의 자위적 핵 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하는 것"이라며 핵 개발의 당위성을 강조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결국 북의 핵억제력은 미국의 핵위협에 대응하여 북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측이 반대한다고 포기할 문제가 아니며 이것을 문제 삼아 남측이 북과 대화를 거부한다면 더는 박근혜 정부와 대화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 2011년 2월 8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린 군사당국회담을 위한 실무회담 모습, 문상균 대령(국방부 북한정책과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리선권 대좌(대령급, 왼쪽에서 두 번째) 북은 최근에도 군사당국자 회담과 그 준비를 위한 이런 실무회담을 하자며 날짜까지 제안하는 등 연속적인 대화제의를 해왔었다.    ©

하지만 연합뉴스 인용보도만으로는 '박근혜 정부가 아니어도 대화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의 의미가 남측의 차기정권을 의미하는 것인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의미하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인터넷을 검색하여 그 전문을 살펴보니 차기정부가 아니라 남측이 아니어도 북이 교류협력을 진행할 나라들은 많이 있다는 의미, 더불어 박근혜 정부가 대화에 나서지 않는다면 남측은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한 채 미국 등과 직접대화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풀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특히 미국과 결산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박근혜가 아니더라도 우리와 손잡고 나갈 대화의 상대는 얼마든지 있다.   
희세의 대결*녀가 날로 숨이 꺼져가는 제 처지도 모르고 분별없이 날뛴다면 우리 역시 미국과 침략의 한배를 타고 반민족적망동에 광분하는 반역의 무리들과 최후의 계산을 할것이며 다시는 이런 얼간망둥이들이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매장해치울것이다.   
박근혜는 세치 혀로 불러들인 화가 얼마나 엄청난것인지 머지않아 몸서리치게 깨닫게 될것이다.]-17일 북 민화협 대변인 담화 중에서

북의 민화협이라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남북교류행사를 진행하는 북측 기관의 한 축이었는데 그런 기관에서 극단적인 어투로 가장 수위가 높은 비난 단어들을 선택하여 시종일관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고 있었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일부 단어는 삭제해서 인용하였다.
그리고 남측에 대한 북 기관의 담화 치고는 그 길이가 거의 비망록 수준으로 길었다.

최근 북이 연이어 남측에 대화를 제의한 배경과 의도가 무엇인지 구구절절히 설명하면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도 북의 입장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었다.

특히 북은 박근혜 정부가 기어이 대화를 거부하고 북에 대한 강경대결정책 일변도로 나간다면 미국과 최후의 계산을 할 때 함께 계산할 것이라는 경고도 담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통일을 위한 자체의 시간표와 계회표를 만들어놓고 그 실현을 위해 하나하나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북이 조선노동당 제7차대회에 남북대화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회가 끝나자마자 연이어 대화제의를 했던 것도 시간표 구현의  일환으로 제기한 것이지 꼭 남측이 받아줄 것이라고 확신해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전문에서는 한반도 문제의 본질적 해결은 미국과의 대화로 보고 있지만 남과 북이 서로 힘을 합쳐 한반도 위기 문제를 히결하고 통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세계 앞에 가장 떳떳한 방법이기에 그를 위해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보겠다는 차원에서 제기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미 북미 막후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해외언론과 전문가들의 의견도 많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 북미 대화마저 깨진다면 그 다음 시간표가 무엇일지는 그간 북의 행보를 놓고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이번 북 민화협 담화에서도 밝혔듯이 강력한 대미 핵억제력 과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연합뉴스의 관련 보도에서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앞으로 우리 정부를 배제한 채 국제사회와 더욱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면서 "조심스럽긴 하나 저강도의 무력 시위나 대남 심리전을 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는데 일리가 있는 분석으로 판단된다.

다만 과연 저강도에서 끝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이미 올해 초 보여준 북의 무력시위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으며 전례없이 강력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보다 약한 후속 무력시위가 과연 무슨 효과를 가져올 것이며 다음 수순, 다음 시간표로서 의미가 있겠는지 하는 의문이다.

남북대화는 이대로라면 사실상 물건너 가고 있다. 막후에서 진행 중인 북미대화라도 잘 풀리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마저 결실없이 끝난다면 그 다음 수순은 생각하기조차 두렵다. 올해 초 공개한 북의 핵억제력만 해도 그 내용을 따져보면 정말 무시무시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총선 당선, 국민에 의해 ‘삼성X파일’ 무죄 확정 받은 것”


[이영광의 발로GO 인터뷰 67]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이영광 기자  |  kwang3830@hanmail.net
지난 2005년 검찰과 삼성의 유착 관계를 폭로한 ‘삼성X파일' 사건 때문에 2013년 의원직을 상실한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경남 창원 성산을 지역구로 해 지난 4.13총선에서 당선,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20대 국회 정의당의 첫 원내대표로서 노회찬 의원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그는 국회 청소노동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우선적으로 대변해야 할 분들이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라면서 “국회 청소노동자들의 현실과 그에 따른 어려움을 함께 풀어나가자는 취지에서 그 분들을 우선적으로 만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 분들은 내가 일하는 직장 동료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노회찬 의원은 3당의 원 구성 협상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날짜만 당겨졌을 뿐 원 구성을 이루는 과정은 원내교섭단체들끼리 자리를 나눠 먹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국회의 운영이나 구성에 필요한 국회 개혁이나 혁신은 하나도 다뤄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개원연설에 대해서도 “국회와 소통하고 협치 하겠다는 내용 자체는 좋은 얘기다. 하지만 그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추는 대통령이 꿰어야 한다”면서 “‘노동법 개악’을 ‘노동 개혁’이란 이름으로 추진하려는 시도가 선거를 통해 평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추진하려는 점은 실망스럽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 15일 정의당 노회찬 의원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 이영광 기자
“총선 당선, 국민에 의해 ‘삼성X파일’ 무죄 확정 받은 것”
- 국회에 3년 만에 돌아오셔서 2주가 지났어요, 어떻게 보내셨어요?
“지역구가 창원 성산이라 서울과 창원을 오가다보니 열흘 동안 비행기를 10번 타기도 했어요.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아주 바쁘고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 19대 때와 달리 20대 국회, 달라진 게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19대 국회 때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의원직을 대법원 판결로 박탈당했기 때문에 저는 이번 당선이 대법원에 의해 유죄 선고 난 ‘삼성X파일’ 사건이 국민의 선고를 통해서 무죄로 확정되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 20대 국회는 19대와 달리 여소야대기 때문에 제가 19대 때에도 당선됐지만, 여소야대 국회에서 일 하게 되어 훨씬 상황이 다르고 많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 17대는 비례대표였고 19대는 서울 노원병이었지만 20대는 경남 창원으로 멀어졌는데 어떠세요?
“아무래도 19대 때는 서울 노원병이었지만 20대에서는 경남 창원이다 보니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가는 어려움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19대 때나 20대에 지역 활동과 더불어서 전국적 사안을 다룬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17대에서는 비례대표로 4년 동안 법사위에서 활동했는데 이번에도 상임위가 법사위라는 점에서 17대 때의 국회 활동을 조금 더 발전적으로 연장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가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의원식당에서 국회 청소노동자들과 만나 오찬 전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국회 청소노동자들은 직장 동료…어려움 해결 앞장설 것”
- 개원하자마자 국회 청소부 노동자를 만났는데.
“어느덧 전통이 돼버렸어요. 제가 17대 국회 때도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국회 내의 청소노동자를 만났거든요. 저는 노동자들은 전국 어디에나 있지만, 국회라는 같은 공간에서 제가 일하는 직장 동료기도 할뿐더러 또 제가 늘 우선적으로 대변하고자 노력하는 분들이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17대 국회에서도 국회의원으로는 처음으로 청소노동자들과 같이 간담회와 식사를 같이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앞장서겠다고 다짐했어요. 19대 때도 마찬가지였고 20대 국회에서 원내대표가 되어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청소 노동자들과의 간담회였고 그분들이 부딪힌 현실 속에서 어려움을 함께 풀어나가자는 취지로 만났습니다.”
- 방을 같이 쓰자고 제안하셔서 화제가 되었어요.
“처음에 저는 몰랐지만 국회 내 청소노동자들과 간담회를 가지는 과정에서 그분들이 쓰던 노조 사무실과 휴게소가 국회 내의 정당들이 많아져서 방을 배정하는 과정에서 방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안 좋은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공간이 옮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공간이 공간대로 확보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설령 여의치 않아서 잘 안 풀리면 그때는 정의당이 쓰는 국회 내 공간이라도 함께 쓰겠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어요. 그리고 ‘정의당 국회의원은 여러분을 직장 동료로 생각해서 정의당이 국회에 있는 한 청소하시는 분들이 어려워하는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반응은 어땠나요?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이고 너무 당연한 일인데 작은 일에서도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일이 많고 권력이나 재산이 많거나 갑의 위치에 있는 경우에 그런 횡포가 아직까지 심하잖아요. 정의당도 국회 내에서는 자기 사무실도 제대로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하는 약자의 위치에 있어요. 그래서 정의당이라는 약자가 노사관계에서 약자인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의미도 있어서 많은 분이 관심을 가지신 것 같아요,”
“기득권 타파, 국회 개혁의 첫걸음”
- 정의당 원내 대표를 맡으셔서 어깨가 더 무거울 것 같아요.
“힘없는 정당의 원내대표를 맡다 보니 어깨가 무거울 정도가 아니라 부서질 정도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또 지금 국회가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은 20석 이상이기 때문에 2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원내 주로 문제를 다루는 데에 참가도 못 하는 상황이예요.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국회 내에서 기득권을 타파하는 것이고 국회개혁의 첫걸음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그럼 어느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세요?
“지금 3% 이상의 지지와 5석 이상의 의석을 가진 당들에게는 국민의 세금으로 이뤄진 국고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내교섭단체도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지난주 원 구성 협상이 마무리되었잖아요. 어떻게 평가하세요?
“원 구성이 빨리 이뤄진 것은 다행입니다, 그러나 날짜만 당겨졌을 뿐 원 구성을 이루는 과정은 원내교섭단체들끼리 자리를 나눠 먹는 방식으로 이뤄졌어요, 또한 국회의 운영이나 구성에서 필요한 국회 개혁이나 혁신은 하나도 다뤄지지 않은 채 문제가 많다고 지적된 국회를 자리만 나눠서 개원이 빨라졌다고 생각합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오전 제20대 국회 개원식이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으로 개원연설을 위해 입장, 의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소통과 협치? 박근혜 대통령이 첫 단추 꿰어야”
-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개원 연설을 했는데.
“ 국회와 소통하고 협치를 하겠다고 하셔서 말씀 자체는 좋은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첫 번째 단추는 대통령이 꿰어야 한다는 거죠. 그동안 대통령은 소통을 제대로 못 하고 말로만 협치 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안팎에서 많았는데 대통령이 변하지 않고서는 그동안의 불통 대통령 이미지는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에서 한 얘기가 실천될 수 있도록 대통령이 먼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그날도 ‘노동악법’을 이른바 ‘노동개혁’이란 이름으로 ‘노동법 개악’을 하려고 하는 시도가 이번 선거를 통해서도 냉혹한 평가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해서 추진하려는 의지를 가진 점은 몹시 실망스러운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朴 거부한 상시청문회법, 20대 국회서 재의결 가능”
- 19대 마지막에 상시청문회법이 통과됐지만,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잖아요. 이 문제는 끝난 건가요?
“전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는 19대에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 이른바 상시 청문회 법이 국회에서는 의결이 됐지만, 대통령에 의해 거부 됐기 때문에 20대 국회에서 재의결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권성동 법사위원장은 19대 국회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자동폐기 된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19대 국회에서 의결되지 못한 법안은 20대 국회로 넘어가지 못하지만 19대 국회에서 의결 되었는데 공표하지 않은 법안들은 20대에서 대통령이 공표하면 됩니다. 이건 과거에도 전례가 있습니다. 따라서 19대에서 의결됐지만, 대통령이 거부해서 재의결을 기다리는 법안은 재의에 부쳐서 상임위로 갈 필요 없이 국회 본회의에서 재의결하면 됩니다.”
- 19대와 20대 의석수가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오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19대에서 의결된 법안이고 공표를 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1차 거부권 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 거부권에 대해 19대 국회는 이미 해산되어 없으니까 지금 국회에서 처리하면 되죠.”
  
▲ 무소속 윤종오 의원(울산 북구)이 15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최근 상임위 배정 관련 입장발표 기자회견을 한 뒤 정의당 추혜선 의원의 농성장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뉴시스>
- 언론 전문가로 국회에 들어온 추혜선 의원의 상임위가 외통위로 결정 나서 문제가 되는데 어떻게 풀어갈 생각이세요?
“추 의원이 이틀째 농성 중이고 비교섭단체 의원들의 상임위 배정 권한을 가진 국회의장이 상임위 정수를 늘려서라도 추 의원이 원래 희망했던 그리고 어떤 경합도 아닌 상황에서 미방위를 신청했는데 미방위에 배속되도록 촉구하고 있어요.”
“세월호‧백남기‧역사교과서 국정화 중지에 역점 둘 것”
- 20대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그래서 우선순위를 두고 순차적으로 해결해야 될 것 같은데 정의당은 어디에 중점을 두실 생각이신가요?
“정의당은 무엇보다도 19대 국회가 해결하지 못한 여러 현안, 세월호 특조위나 백남기 농민 문제에 대한 청문회 실시, 역사교과서 국정화 중지에 역점을 둘 것입니다. 그리고 20대 국회에서 새롭게 고용문제를 비롯한 구조조정과 관련된 실업으로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들과 많은 자영업자 등 민생문제에 역점을 둘 생각입니다.”
“정의당 위기? 젊은층 지지율 상승…가능성 보여준 것”
-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은 의석 6개를 확보하는데 그쳤다. 정의당의 위기라는 지적이 나오는데.
“정의당이 원내 3당에서 4당으로 밀린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정의당이 목표했던 의석에 한참 미달하는 의석을 얻어서 선거 결과가 몹시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정의당이 위기나,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보진 않아요.
선거 후 정의당의 지지율이 8%를 넘어서고 젊은 층에서 정의당의 지지율이 높아지는 상황도 정의당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정치혁신을 위해 정의당의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9대와 마찬가지로 20대에서도 여전히 원내 제4당과 유일한 진보정당으로서의 위치를 저희가 무겁게 받아들이고 정치 발전과 혁신을 위해서 정의당이 해야 할 몫을 제대로 찾고 무엇보다도 민생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정의당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야권공조 통한 공약실현, 야권연대 기반 다지는 것”
- 야권 연대라는 말은 선거 때 많이 나오잖아요. 하지만 20대 국회에서 의정활동이야말로 야권 연대가 절실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난 선거에서 야당들이 20대 국회가 열리면 어떤 일을 할지 공약한 일이 많아요. 그중에는 공통적인 부분도 꽤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세월호 특조위 문제라거나 여러 가지 공통으로 공약한 부분이 많아요. 야권연대는 구체적으로 야당들이 국민에게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약속한 내용에서 공통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선거 때만 약속하고 선거 후에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게 그것을 실현해 내는 모습을 야권 공조를 통해 해내겠다는 겁니다.
야권이 공조하면 여소야대 국회에서 그런 약속들을 실제 가시화시켜서 현실로 만들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야권연대가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 없이 공통으로 공약한 부분이라 국민에 대한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야권공조를 통해 공약을 실현하는 것부터 야권연대의 기반을 다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이 있잖아요.
“울산에서 윤종호 의원과 김종훈 의원이 당선됐습니다. 다행스러운 결과고 저는 그분들과도 여러 차례 만나고 당연히 공조를 같이해야죠, 야권 연대 차원에서 힘을 모아야 할 때 함께 모아야 하고 특히 그분들은 진보적인 노선을 가진 분들로서 앞으로 정책적으로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 마지막으로 <GO발뉴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GO발뉴스> 독자 여러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리고 이상호 기자님 힘내시고요. 열심히 해서 <GO발뉴스>가 추구하는 바와 정의당이 추구하는 바가 더 많이 실현될 수 있도록 앞장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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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홍 잠수사 보내는 박주민의 다짐


"어제 울었지만, 오늘 밥 다 챙겨먹었다"

16.06.18 22:14l최종 업데이트 16.06.18 23:3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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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민간 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추모식에서 김 잠수사의 부인이 딸을 위로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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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민간 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추모식에서 김 잠수사의 부인이 딸과 함께 분향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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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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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민간 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추모식에서 김 잠수사의 부인이 아들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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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문객에게 인사하는 김관홍 잠수사의 딸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민간 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추모식에서 김 잠수사의 큰 딸이 엄마와 함께 조문객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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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어린 두 딸과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모셔야 할 부모님들이 생겼습니다."

전명선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고 김관홍 잠수사의 가족들을 바라보며 "세월호 참사 당시 우리 아이들을 부모의 품에 안겨준 세월호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전 위원장은 18일 오후 7시 김 잠수사의 추모식(세월호 의인, 고 김관홍 잠수사 추모의 밤)에 참석해 "김 잠수사를 우리의 은인이자 영웅, 의인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항상 은혜를 생각하며 김 잠수사의 가족들을 모시겠다"라며 흐느꼈다.

김 잠수사는 17일 아내와 아들딸 세 명, 그리고 부모님을 남겨둔 채 먼저 세상을 떠났다(관련기사 : '세월호 수습' 김관홍 잠수사 숨진 채 발견). 시민 500여 명은 김 잠수사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추모식이 열린 서울특별시 서북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의 빈소가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노래 <잊지 않을게>가 울려 퍼졌다. 

가슴 치며 오열한 어머니, 두 딸 끝까지 자리 못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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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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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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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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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참석한 세월호 유가족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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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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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추모식에 참석한 김 잠수사의 어머니는 박래군 4.16가족협의회 상임운영위원, 전 위원장, 잠수사 동료 김상우씨,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석태 세월호 특조위원장(박종운 특조위원 대독)의 추모사가 이어지자 가슴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우린 어떻게 사냐, 어떻게"라고 외치는 어머니의 오열에 김 잠수사의 아내도 눈물을 쏟아냈다. 

생전 김 잠수사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나오자 어머니와 아내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동영상에 김 잠수사가 힘들어 하는 모습이 나오자, 아내를 다독이며 눈물을 애써 참던 아버지도 더 이상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전까지 오히려 할머니의 등을 토닥이던 김 잠수사의 9살 둘째 딸도 울음을 터뜨렸고, 11살 첫째 딸은 엄마의 손을 잡은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김 잠수사의 두 딸은 결국 추모식을 끝까지 보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자리를 떠나는 누나들의 모습에 김 잠수사의 7살 막내아들은 아직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는지 "누나들 어디가?"라며 두리번거렸다. 막내아들은 할아버지 품에 기대 아버지가 나오는 동영상을 보며 눈만 깜빡였다.

이날 추모식에는 김 잠수사와 함께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를 위해 헌신했던 민간잠수사 동료들도 참석했다. 대표로 추모사를 낭독한 민간잠수사 김상우씨는 "관홍이는 (세월호 참사 구조) 현장에서도 부상을 좀 많이 입었었다"라며 "그럼에도 자기가 빠지면 다른 잠수사들이 힘드니까 몸 사리지 않고 씩씩하게 일했던 동생이다"라고 김 잠수사를 추억했다.

생전에 김 잠수사는 고 이광운 잠수사의 죽음과 관련해 검찰이 공우영 잠수사를 기소하자, 이를 부당하다고 여겨 민간잠수사의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씨는 "김 잠수사가 생전에 우리 민간잠수사와 함께 너무나 원했던 일이 있었다"라며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 여기에는 민간잠수사들의 명예회복과 치료를 위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끝까지 김 잠수사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시민 500여 명 일어나 '잊지 않을게' 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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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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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변호사 출신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민간 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하기 앞서 분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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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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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이날 추모사를 읽은 박주민 의원은 "김 잠수사에게 절실했던 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제 (김 잠수사의 소식을 듣고) 엄청 울었다. 최근 들어 그렇게 많이 운 적이 없다"라며 말을 잇지 못한 박 의원은 "그러나 오늘부터는 슬프지만 꼬박꼬박 잘 먹고 있다. 아침도 먹었고, 점심도 먹었고, 그리고 저녁도 먹었다"라며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박 의원은 "오늘 여기 모인 우리의 가슴엔 그 어떤 물로도 끌 수 없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라며 "이 불을 지키고 들불로 만들어 김 잠수사가 꿈꿨던 사회를 꼭 만들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유가족을 대표해 김 잠수사의 사촌동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나치가 공산주의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로 시작해 "그들이 나를 잡아갈 때 나를 위해 항의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로 끝나는 니묄러의 <그들이 처음 왔을 때> 일부를 인용하며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세월호 참사 등 그게 우리 가족 일이 아닌 줄 알았다. 근데 이제 우리 가족에게 왔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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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로 구조 활동에 헌신한 김관홍 잠수사의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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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홍 잠수사 가족에게 인사하는 박주민 세월호 변호사 출신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8일 오후 서울 은평구 서울서북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민간잠수사 고 김관홍씨의 추모식에 참석해 유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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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관홍이형이 날 보면서 '어, 왔냐?'라고 거들먹거리는 게 눈에 선하다"라며 "너무 보고싶어, 형. 잘가요"라고 하늘을 보며 흐느꼈다. 이에 이날 추모식 사회를 맡은 유경근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세 아이를 건사하고 지내다보면 내 옆 집, 내 이웃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하게 지내는 모습도 너무나 미울 겁니다"라며 "저희와 함께 이겨냅시다. 세월호 유가족, 시민들과 함께 살아냅시다. 김 잠수사가 원했던 그 삶을 남은 가족들이 꼭 살 수 있도록 함께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추모식은 4.16합창단과 이소선합창단의 공연으로 마무리됐다. 두 합창단의 공연이 이어지자, 추모식 현장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추모식에 참석한 모든 시민들이 일어나 노래 <잊지 않을게>를 제창했다. 이후 시민들은 추모식 현장에 마련된 김 잠수사의 영장 앞에 국화꽃을 놓았다.

김 잠수사의 발인은 19일 오전 8시 30분 엄수된다. 장지는 벽제승화원이다. 경찰은 사인을 가리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을 의뢰하는 한편 추가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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