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8일 금요일

이누이트와 피그미처럼, 인류의 진화는 계속될까

이누이트와 피그미처럼, 인류의 진화는 계속될까

조홍섭 2015. 09. 18
조회수 673 추천수 0
최근의 잇단 화석 발견, "인류를 종착점으로 한 진화란 없다"
문화적 영향, 기술발전, 기후변화로 미래 인류진화 방향은 미궁에

호모 날레디 상상도.jpg»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두개골 화석을 토대로 복원한 호모 날레디의 상상도. 인류의 직접 조상인지 여부는 아직 논란거리이다.사진=요하네스버그/AP 연합뉴스
 
인간은 외로운 동물이다. 사람은 포유동물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호모)에 속한 유일한 종(호모 사피엔스)이다.
 
사람과에는 침팬지속, 오랑우탄속, 고릴라속, 사람(호모)속이 있는데, 사람속을 빼고는 모두 2종이 있다. 침팬지속만 해도 침팬지와 보노보가 있다. 사람의 친척은 모두 멸종했다.
 
보통 1속 1종만 남은 동물은 미선나무처럼 멸종 위험이 커 보호를 받는데, 사람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2008년 평가에서 “워낙 널리 분포하고 적응력이 뛰어나며 개체수가 증가하고 있어” 보전등급은 ‘최소 관심 종’이다.
 
고아처럼 남아서인지 인류의 조상 찾기 열정은 남다르다.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연구자들이 발표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고인류 ‘호모 날레디’ 화석도 그런 예다.
F1_large.jpg» 호모 날레디의 뼈 화석. 1990년 이후 세계에서 발굴된 모든 고인류 화석을 합친 것보다 많을 만큼 풍부하다. 사진=<이라이프>
 
깊은 동굴 속에서 적어도 15구에 해당하는 1500여 점의 완벽한 뼈 화석이 나와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발견됐다”라는 보도가 잇따랐다. 그러나 흥분이 가라앉자, 연대 측정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석의 주인공을 호모속으로 단정한 것이 성급했다거나 오히려 멸종한 고인류인 직립원인에 가깝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호모속 특징이 혼재한 것 등에 비춰 인류의 진화 경로가 알려진 것보다 복잡했을 것이란 추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분명한 건, 현생 인류가 필연의 단선적인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게 아니란 사실이다.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데 월은 15일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강이 흐르다 보니 바다로 간 것이지 바다로 가기 위해 흐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류는 지적인 도약을 이룬 진화의 종착점이 아니고, 지금도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
Rosino_-Homo_floresiensis_cave.jpg» 호빗의 두개골 화석이 발견된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 섬 량바오 동굴. 사진=Rosino
 
1990년대 이후 어떤 고생물학자도 인류 진화의 경로를 깔끔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통념을 깨는 발견도 잇따른다. 2003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에서 1만 8000년 전 살던 키 1m의 새로운 인류 ‘호빗’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단일종인 인류의 ‘순수함’도 흔들린다. 현생 인류가 지금은 멸종한 또 다른 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등과 섹스를 하고 형질을 나눴다는 사실도 유전자 연구 결과 분명해졌다.
 
2010년 이들의 게놈(유전체)을 분석한 결과 약 4만년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유럽인과 아시아인에게 유전물질의 2~4%를 물려준 것으로 밝혀졌다. 그 영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우울증, 비만, 피부질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Neandertaler_reconst.jpg» 인류와 같은 종 또는 아종으로 분류되는 네안데르탈인의 복원 상상도.현생인류와 같은 장소에서 한동안 살았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비슷한 시기에 시베리아에 살았던 데니소바인은 특이하게 태평양 멜라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에게 5%의 유전자를 남겼다. 아시아의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데니소바인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티베트인은 물려받은 유전자 덕분에 4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도 적혈구 수가 늘어나 피가 끈적끈적해지는 고산병을 겪지 않는다.
  
인류는 홀로 남았지만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특별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증거가 잇따라 나온다.
 
마테오 푸마갈리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생물학자 등 국제 연구진은 17일치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서 그린란드에 사는 이누이트가 지방과 단백질로만 이뤄진 식단으로 생존하는 비결은 지방 대사를 조절하는 유전자 변이 덕분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주식은 물범과 고래인데, 지방산이 농축된 이런 음식을 먹고도 심혈관질환에 걸리지 않는 것은 불포화화 효소의 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 몇 개가 돌연변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돌연변이는 빙하기로 베링해가 육지로 이어졌던 2만년 전 북극에 살던 시베리아 원주민에게서 처음 발생했는데, 이누이트 모두와 유럽인 2%, 중국 한족 15%에도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Malik Milfeldt_s.jpg» 이누이트가 1000년 전부터 살아온 그린란드의 마을. 이곳에 이주해 오기 2만년 전 시베리아 북극쪽에서부터 과도한 지방섭취의 부작용을 막는 돌연변이가 일어났다. 사진=Malik Milfeldt

이 밖에도 인류의 최근 진화 사례는 많다. 유럽인의 젖당(락토스) 분해 능력은 널리 알려진 예이다. 성인이 돼도 우유 속 당분을 소화시키는 능력을 간직하는 이런 돌연변이는 7500년 전 유럽에서 나타나 퍼졌다.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도록 적혈구가 낫 모양으로 바뀐 아프리카와 인도의 겸상적혈구도 그런 예이다. 최근에는 아프리카와 동남아 열대우림에 사는 수렵채취인들이 모두 키가 작은 까닭이 열대우림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유전적 변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인류 전체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해 나갈까. 지난 연말 영국의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비비시>에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는 너무 느려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인공지능이 인류의 종말을 부를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로봇이 인간을 능가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자연 선택과 문화적 요인이 뒤섞여 진화의 효과를 가려내기도 쉽지 않다. 의학과 유전공학의 발달, 빈부 격차 등도 불확실성을 높인다.
 
예를 들어, 수렵채취인보다 현대인은 확실히 두뇌를 덜 쓰기 때문에 뇌가 작아질 수 있다. 반대로  제왕절개 시술로 인류의 두뇌가 무한정 커지는 걸 가로막던 골반을 우회하는 길도 열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인류는 이제까지의 진화 경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것이란 점이다.
 
인류는 지난 80만년 동안 겪지 못한 수준으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높여 빙하기 도래를 늦추고 있고, 바다 산성화는 지난 3억년 동안 보지 못했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구의 생명질서는 대격변을 맞고 있다. 이제 인류는 처음으로 진화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동물이 될지도 모른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유치원생부터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


어른들의 삐뚤어진 권력욕을 위해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의 모습
임병도 | 2015-09-19 09:58:26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새정치민주연합 강기정 의원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지난 6월 4일 기획재정부에 요구한 예산안에서 나라사랑교육 관련 예산으로 무려 5,484억 4,800만 원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올해 관련 예산인 20억 3,500만 원의 269.5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국가보훈처가 ‘나라사랑교육’ 예산으로 하려고 하는 일들을 보면 유치원부터 초중고,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사상교육을 시키겠다는 의도가 명백합니다.
△전국 유치원의 10%를 나라사랑 꾸러기 유치원으로(106.34억)
△전국 초중고의 3%를 나라사랑 연구학교로 (87.1억),
△전국 초중고의 10%를 나라사랑 실천학교로 (137.3억),
△전국 대학의 10%를 나라사랑 특성화 대학으로 (41.3억),
△전국 초중고교에 호국안보 전담교사를 배치(3,422억 4,000만 원),
△현재 120명인 나라사랑 전문강사단을 2,000명으로 (240억),
△올해 600회(계획)의 나라사랑교육 횟수를 95,000회까지


‘한국보훈안보단체연합회 신년교례회(2013.1.9. 중앙보훈회관)’ 강연 동영상에서 박승춘 처장은 “국방부는 군사 대결 업무를 하지만, 이념 대결 업무는 어디서 합니까?” 라고 묻고, “지금 우리 정부 부서에 이념 대결에 대한 업무를 하는 부서가 불분명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제가 2년 동안 국가보훈처가 우리 국민의 안보 의식을 함양시켜서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제 보훈정책을 추진하는 업무를 했는데, 제가 알아보니까 국가보훈처가 이 업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부서입니다.” 라고 하고, “본부가 있고, 지방청, 지청을 가지고 있어 가지고 전국적으로 이 업무를 할 수 있다.” 라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강기정 의원 등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국가공무원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지만, 아직도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 의원은 “2년 전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의 대선 개입 때 그대로 나라사랑교육을 계속하겠다는 것” 이라며 “총선을 앞두고 이런 생각으로 나라사랑교육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것은 총선개입을 더 하겠다는 것” 이라면서, “국가보훈처가 내년 나라사랑교육 예산을 올해 대비 100배 넘게 편성했는데 이를 예산 심사에서 전액 삭감할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른들의 삐뚤어진 권력욕을 위해 유치원생부터 대학생까지 사상교육을 하겠다는 국가보훈처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한국이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인지, 반공시대로 후퇴하고 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진실의길. 기고 글&기사제보 dolce42@naver.com]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906 

미군철수 박근혜퇴진 1인시위 탄압을 규탄한다.


미국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 한다는데 왜 막습니까?
이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5/09/18 [15:19]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우리사회연구소 권오창 이사장이 발언에 앞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집회장 뒤로 미국 대사관 건물이 보인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9월 16일 광화문 미국대사관 건물이 바라보이는 KT 광화문지사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코리아연대(이하 코리아 연대)가 “미 대사관, 청와대, 종로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를 열었다.

 코리아연대 김대봉 회원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집회에서 권오창 우리사회연구소 이사장이 발언에 앞서 “주한미군 몰아내고 조국통일 앞당기자!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통일하자!”라고 구호를 외쳤다.

이어진 발언에서 “우리 민족끼리 통일해서 남과 북 해외동포가 어울려서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서 살아보자. 젊은 학생들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발언을 하였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민통선 평화교회 이 적 목사가 발언하고 있다. 집회장 뒤로 미국 대사관 건물이 보인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두 번째 발언자로 나선 민통선 평화교회 이 적 목사는 미국이 이 땅에 들어온 지 분단 70년이 되었고 미군 맥아더는 자기 스스로 이 땅에 점령군으로 왔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점령군의 모습이 70년이 지났어도 변하지 않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이 적 목사는 또, 얼마 전 보안수사대에서 조사에 받은 내용 중에 보안수사대는 반미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미국을 욕한 것에 대해 국가보안법으로 옭아매려 한다고 성토하며  “내가 미국을 욕하는데 내 나라를 욕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 이 땅을 수탈하는 모습을 참기가 힘들어서 이 땅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외치고 있는데 왜 그 말들을 못하게 합니까?
이 땅에 있는 미국 대사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한다는데 왜 미 대사관이 막습니까?
이 땅의 국민이 스스로 자주권이 있다면 경찰 여러분은 왜 일인시위 하는 것을 막습니까?
일인시위는 코리아연대 단체의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이 땅의 해방과 이 땅의 통일을 위해서 외치고 있는 우리 백성들의 대표적 함성입니다.“라고 일갈하였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미국은 정체를) 숨기지 말고 미국은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더 이상 이 땅의 자주권을 침탈하지 말고 미국은 이 땅을 떠나야 합니다. 경찰 여러분은 미국의 꼭두각시놀음하지 말고 쇠침을 놓아서 일인시위 하는 자주 국가 국민을 탄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제의 꼭두각시놀음을 했던 순사가 있었듯이 종미의 꼭두각시놀음을 하는 경찰이 아니기를 바랍니다.”고 미군철수를 촉구하며 발언을 마쳤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에서 코리아연대 회원이 미국 대사관 앞 1인 시위 자리에 경찰이 쳐놓은 접근 방지선과 차량 돌진 방지용 쇠침판 사진을 들고 경찰의 방해를 규탄하고 있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이어진 발언자들은 1인 시위 방해 조치의 배후에는 <청와대의 상전 미국 대사관>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 방해 증거사진을 제시하였다.

마지막 순서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성명의 주된 내용 중에 평화적 반미시위를 탄압한다면 “평화적 반미 시위의 도수를 결정적으로 높여 나갈 것이며 그 실천적 조치의 범위 안에는 미국 대사관 진입이 포함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집회 참가자는 “만악의 근원 분단의 원흉 미군은 이 땅을 떠나라!”라고 구호를 외치며 광화문 세월호 광장을 거쳐 정부 서울 청사 앞까지 거리행진을 하였다.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 후 거리행진 중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 연대를 표하고 있는 집회 참가자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 광화문 KT 앞에서 열린 <미대사관, 청와대, 종로경찰서 1인 시위 탄압 규탄 및 박근혜 퇴진, 미군철수 촉구 집회> 후 정부 서울 청사까지 행진하고 마무리 집회를 하고 있다. 2015. 9. 16.     © 자주시보 이성원 기자

관련 성명 전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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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미대사관과 청와대, 종로서는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 코리아연대의 집회·시위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라 !

이 사회에 표현의 자유가 있는가. 말로는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실제 무슨 자유가 있고 민주주의가 있는가. 표현의 자유가 있기는 있다, 손톱만큼! 이 자유를 누리려면 이 손톱위에서 엄지발가락으로 서는 발레리나의 고난도 예술적 기교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연대는 자주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한 표현에서 이 손톱만큼의 합법성도 소중히 여기고 그에 충실하였다.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코리아연대회원들은 지난 1년간 합법적으로 1인시위를 하던 인도에서 차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무슨 봉을 보호하는 해괴한 폴리스라인이 쳐지더니 심지어 차량돌진방지용쇠침들까지 놓여졌다. 도대체 누가 이곳을 향해 차를 몰고 돌진하겠는가. 이렇게 해서 지난 1년간 허용되던 손톱만큼의 표현의 자유마저 철저히 유린되었다. 종로서경찰들이 확인해주는대로 이 모든 황당하고 악랄한 조치의 배후에는 미대사관이 있다는데 우리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늘 <청와대의 상전 미대사관>이라고 주장하던 사실이 또다시 입증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미대사관은 역사적으로 있어온 모든 군사쿠데타와 대선부정, 남북대결책동, 북침군사연습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이땅의 실질적인 지배자이다. 군사와 경제의 명맥을 장악한데 기초해 정치적으로 청와대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곳이다. 그래서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코리아연대의 조용한 1인시위조차 이처럼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이고 평화적인 반미시위에도 저리 두려워 떠는 것이다.
코리아연대가 지난 7월 4일 4가지요구사항을 내걸고 4가지투쟁을 선포하였지만 모두 철두철미 평화적인 방식으로 일관하였다. 오직 이 사회의 <성역 중의 성역>인 미대사관을 향해 민심을 담아 할말을 하며 당당히 나아갔을 뿐이다. 이는 당연히 헌법이 보장한 집회·시위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한다. 허나 미대사관의 조종을 받는 청와대, 그 청와대의 하수인인 종로서는 시종일관 가혹한 탄압으로만 나왔다.
심지어 지난 9월8일 9차때는 촬영하는 두 여기자와 그 차의 운전자까지 연행·구금하였다. 이는 지난 7월27일 6차때 남성·여성 두명의 촬영자를 연행한 데 이은 파쇼적 폭거이다. 도대체 이 지구상에 시위를 촬영한다고 잡아가는 나라가 어디 있으며 나아가 촬영기자를 구금하는 곳이 어디 있는가. 종로서는 이미 5월16일 청와대앞시위를 촬영하던 여기자를 연행·구금했던 곳이니 한마디로 상습적인 파쇼적 폭압기관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여성시위자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성추행하는 만행도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매번 어김없이 벌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초보적 자유인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유린하고 집단성추행을 벌이는 종로서와 그 배후의 청와대, 미대사관을 향해 코리아연대는 정의로운 투쟁을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아연대는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힌다.
첫째, 만약 종로서가 이후에도 촬영자를 연행하고 여성시위자를 성추행한다면 코리아연대는 미대사관을 향한 평화적인 반미시위의 도수를 결정적으로 높여나갈 것이다. 그 실천적 조치의 범위안에는 미대사관진입이 포함될 것이다. 한마디로 선택사항이 필수사항이 되고 그 시기도 앞당겨질 것이다. 둘째, 종로서가 당장 1인시위자리에 매어놓은 폴리스라인을 해제하고 우스꽝스러운 훼방책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1인시위의 도수 또한 비상히 높아지며 때로 철야도 불사할 것이다.
코리아연대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미대사관·청와대·종로서는 어리석은 공안탄압과 야수적인 폭력만행을 중단하고 민심이 원하는대로 박근혜는 당장 물러나고 미군은 이땅을 떠나야 할 것이다.
                                                    2015년 9월16일
                                        자주통일과민주주의를위한코리아연대

포화 속에 평화의 꽃 피운 불굴의 정원사


<인터뷰> 평양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이끈 (사)남북체육교류협회 김경성 이사장
이승현 기자  |  s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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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8  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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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측 선수단을 이끌고 평양에서 열린 제2차 국제유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했던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과 17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포화 속에 탄생한 평화의 꽃’.
지난달 16일부터 24일까지 평양 능라도의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린 ‘제2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를 일컬어 나온 표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수단의 입국을 이틀 앞둔 지난달 14일 남북은 열흘 전 파주시 군사분계선(DMZ)에서 발생한 지뢰폭발 사건을 두고 서해지구 군 통신선으로 ‘군사적 결판을 내보자’, ‘가차없이 응징할 것’이라며 일촉즉발의 충돌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6일 남측 선수단을 포함해 165명의 방북단을 이끌고 평양에 들어간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은 그 와중에도 남북고위당국자접촉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21일부터 극적 타결에 이른 24일까지 평양 5월1일경기장에서 8개 참가팀을 2개조로 나누어 조별예선을 거쳐 순위결정전과 준결승, 결승전까지 예정된 경기를 치러야했다.
대회가 끝날 때까지 몸은 경기장 주석단에 앉아 있지만 눈과 귀는 온통 군사분계선에 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비상연락망을 통해 한국 정부와 통화하면서 북측으로부터 신변안전 담보를 받고 여차하면 조기철수를 할 수도 있다는 전갈을 받고 북측과 긴박한 협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회를 계속하겠느냐는 의사를 북측과도 수시로 상의하고 확인하면서 대회는 진행됐다.
김경성 이사장은 평양 대회를 마친 후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마련한 정례 정책포럼에 참석해 ‘체육교류로 열어가는 남북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긴박한 당시의 상황을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 김 이사장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연이어 대규모 방남과 방북을 성사시킨 불굴의 의지와 비결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17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사)남북체육교류협회에서 김 이사장을 만나 며칠 전 포럼에서 못 다한 뒷이야기를 더 들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는 듯 ‘포화 속에 탄생한 평화의 꽃’이라는 시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성사시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를 정의했다.
이번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사실 지난해 11월 경기도 연천에서 열렸던 제1차 국제유소년(U-15)축구대회 당시에도 북측 선수들이 입국하기 20일 전에 북에서 대북전단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이에 다시 남측이 대응사격을 하는 등 정전상태인 한반도의 긴장이 유감없이 펼쳐진 상황이었다.
  
▲ 김경성 이사장은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정책포럼에서 '체육교류로 열어가는 남북화해와 평화'를 주제로 지난 10년간 자신의 경험을 담백하게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 대회 성사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쉽지 않은 긴장 상황에서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비결이 있었다면?
■ 김경성 이사장 : 지난 8월 16일 남측 선수·임원만 84명 방북했는데, 이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대규모 방북사례가 된다. 2회 평양대회는 직전까지 남북이 비보도 보안을 지키면서 철저한 준비작업을 거쳐 8월 15일에야 첫 보도를 했다.
8월 14일 지뢰폭발 남북 군사상황이 시작됐는데, 남측 당국에서 16일 방북을 승인했다. 다른 사업 같았으면 못 가게 했을 것이다. 17일부터 한미 을지훈련기간이 되면서 군사적 긴장 수위가 높아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로서는 국민의 신변안전에 대한 우려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에서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년 1회 대회 때 유사한 군사긴장 상황을 겪고도 북에서 내려오면서 이미 대회의 체질이 강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회 연천대회도 군사적 충돌 상황속에서 잘 치러졌다. 그런 군사상황에서도 북이 내려왔다는 것은 그동안 남북체육교류협회가 북과 지속적으로 해 왔던 평화적 사업의 성과가 이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때도 북측 4.25체육단이 우승했는데 4번의 만찬에 모두 참가했다. 우리 측 남경필 도지사를 비롯한 여야 국회의원, 지자체 단체장, 기업인 등 700여명이 북측 선수 및 임원들과 대화의 기회를 가졌다.
작년 연천 대회 이전에 남북 간에 대화가 거의 없었는데, 결국 축구대회를 하다보니까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보면 남북대화의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셈이다.
11월 국내에서 3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 개최
□ 평양대회 이후 연속적으로 구상,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 15세미만 국제유소년축구대회는 작년 1회 대회 때부터 북측과 남북체육교류협회가 장기사업으로 합의한 것이다. 기본 틀은 봄에는 평양, 가을에는 남측 도시, 겨울에는 중국이나 유럽, 남미 등 따뜻한 나라에서 개최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 2회 평양대회를 봄에 하지 못한 이유는 남북관계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 것이고 3회 대회는 가을에 남쪽으로 내려올 차례이다.
김 이사장은 14일 포럼에서도 현실적 일정을 고려할 때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끝나는 11월쯤 경기·강원도에서 3회 대회를 준비하겠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회 장소는 여러 지역이 경합하는 만큼 특정하지는 말자고 덧붙였다.
□ 무리한 일정은 아니라고 본다는 건가.
■ 제가 추진을 안 하면 몰라도 추진을 하면 가능할 것이다. 다만 3회 대회가 2회 평양대회 일정과 간격이 너무 짧고 내년 1월 겨울대회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꼭 해야 하느냐는 고민을 하고 있다.
□ 지난 14~15일 북에서 국가우주개발국, 원자력위원회 등을 앞세워 위성발사와 핵실험 의지를 밝힌 상황인데 대회 진행에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나?
■ 남북 간에 실제로 포탄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과 견주어서 위성 발사 등 의사표시를 한 것이 더 큰 긴장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북에서 인공위성을 쐈으니 유엔이 나서서 국제대회를 하지 말라고 제재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 정부가 ‘No’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산가족 상봉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인데 과연 평화적인 경기까지 손을 댈 것인지는 생각할 여지가 있다.
북측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도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이미 가장 기분 나쁠 수 있는 대북 삐라를 뿌린 연천지역에도 와서 경기를 치르지 않았나.
  
▲ 8.24.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제2회국제유소년축구대회 우승팀인 북측 4.25축구단에 김경성 이사장이 우승 트로피를 수여하고 있다. [사진제공-남북체육교류협회]
□ 유소년축구대회 북측 파트너십이 다소 복잡해 보이는데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
■ 남북체육교류협회의 북측 파트너는 국방위원회에 소속된 위원회인 4.25체육단인데 군 소속이라는 특성상 남측 민간과 연계해주는 민족화해협력위원회(민화협)이라는 창구가 필요한 것이다. 북측 민화협은 국제대회와는 직접 상관없고 창구역할에 그치는 것이다.
또 4.25체육단이 국제축구대회를 주최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체육성, 조선축구협회 등을 거쳐 평양국제축구학교로 대회 주최가 조정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국제유소년(U-15) 축구대회는 남북체육교류협회(이사장 김경성)와 평양국제축구학교(교장 현철윤)가 공동 주최하는 행사로 남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경기도, 강원도, 연천군이 후원하고 있다.
□ 유소년축구대회의 참가범위를 더 넓히거나 확대해야 하지 않나.
■ 그렇다. 작년 1회 대회 때는 남북을 포함해서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 4개국이 참가했었다. 이번엔 거기에 남미의 브라질과 유럽의 크로아티아가 추가로 참가했다.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FIFA대회는 17세 대회부터 시작되고 그 미만 연령대의 대회는 없다. 또 15세 유소년대회에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대회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이 대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
또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때 경기를 성사시켰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앞으로도 남북 당국이 이 대회를 관계 개선 등의 평화적 사업에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제2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가 진행된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 전경. [자료사진-통일뉴스]
□ 이번에 대회를 치룬 5월1일경기장은 북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인 ‘아리랑’공연으로 유명한 곳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시로 지난해 10월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준공한 이후 이번 대회가 5월1일 경기장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대회였다고 들었다.
5.1경기장에서 '아리랑' 대신 월드컵 예선전을
■ 과거 5월1일경기장은 국제축구연맹(FIFA)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월드컵 지역 예선도 김일성경기장에서 치를 수밖에 없었다. 5월1일경기장은 15만 명의 관중이 들어가는 거의 세계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새로 짓다시피 개건을 한 후 북은 특히 홈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되는 월드컵 예선 경기를 이곳에서 진행할 계획을 갖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도 봤지만 15만 명의 관객이 뿜어내는 엄청난 축구열기를 세계에 송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북한은 스포츠를 통해서 내부결속과 함께 북의 위상을 키우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체육강국의 메시지를 통해 내부결속도 시키지만 국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아리랑은 더 이상 계획이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과거에는 북에서 내부결속 수단으로 봄부터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아리랑’을 준비하면서 여름, 가을까지 집단체조를 했는데, 지금은 스포츠를 주요 매개로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 축제가 가졌던 효과나 의의가 스포츠로 전환된 것이라고나 할까.
또 최근에는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오는 엘리트 체육 외에도 생활 스포츠를 강화하고 있지 않나. 이는 국민건강에 대한 홍보와 함께 개선되고 개방된 북한 사회의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는 메시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5월1일경기장은 다목적 체육경기장으로 새로 지어졌다. 북측 매체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준공한 5월1일경기장은 15만석의 관람석을 가진 축구장과 육상주로, 예비 운동실, 선수침실, 감독실, 심판원실, 검사등록실 등이 국제기준에 맞게 갖춰졌으며, 수영장, 탁구장, 미니골프장, 피로회복실을 비롯한 체육 및 문화 후생시설과 서비스 시설이 최상의 수준에서 완비되어 선수들의 훈련과 경기는 물론 관람객의 편의도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경기장에서는 축구경기 외에 마라톤을 비롯한 육상종목들과 탁구, 수영 경기 등이 열리게 된다.
  
▲ 평양 능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진행된 제2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 모습. [사진제공-남북체육교류협회]
양궁·마라톤·격투기도 남북교류 유력 종목
□ 축구 외에 다른 경기 종목들에 대한 협조와 교류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2년 전부터 양궁장비를 꾸준히 지원해 왔다. 양궁장비는 1세트에 보통 1만 달러 정도 된다. 어지간한 초정밀 총포보다 비싼 고가 장비인데, 지금까지 정부 승인을 받고 20세트 이상 보내줬다.
지난해 5월 중국 강서성에서 남북 양궁대회를 열었는데, 장비 활용과 기술 교류뿐만 아니라 선수지도도 진행했다. 북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감독들을 인정한다. 또 실제로 성적이 좋아지니까 북측도 양궁교류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바라고 있다.
□ 남측 감독들이 평양에 가서 가르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나.
■ 양궁은 특히 단기적으로 열흘 정도만 지도해도 효과가 크다. 장비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성적이 확 달라지기 때문에 기본 장비에 선수 체형별로 맞춤형으로 활용하는 방법, 야외경기에서 바람에 적응하는 방법 등을 ‘원포인트’ 지도방법만 가져도 상당히 효과가 있다.
또 북측 선수들이 집중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단기적인 기술전수만 이루어져도 성적이 많이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그밖에 어떤 경기종목이 남북 교류에 유력하다고 볼 수 있나.
■ 남북이 함께 교류하면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종목으로 축구와 양궁, 마라톤을 꼽고 싶다.
축구는 전 세계가 열광하는 종목이고 양궁은 우리 민족이 잘하는 종목이며, 마라톤은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종목이라고 생각한다.
또 북한이 전통적으로 격투기가 강하다. 복싱, 레슬링, 유도, 특히 태권도 등. 그런데 북은 격투기에 강하면서도 개정된 룰 등에 대한 숙지가 덜 되어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있다. 반면 남측은 약해지고 있다. 사회체육 저변이 확대되면 격투기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격투기 종목에서는 기술이나 시설, 인프라, 용품 등 북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선전하지 말고 성과내라'
□ 사업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사업수지는 어떻다고 할 수 있나.
■ 수익사업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지원사업으로 한 것이니까 대차대조표를 따지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개인재산은 많이 썼다.
살면서 진화된다고 할까. 돈을 벌기 위해서만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북교류 사업을 하면서 이 분야로 진화되면서 행복도 찾아지는 것 같다. 물론 돈을 벌고 싶지만 남북이 같이 버는 사업을 만들면서 벌고 싶다.
□ 남북관계가 곡절이 많았는데 흔들리지 않고 대회를 지켜온 비결을 이야기해 달라.
■ 2006~2008년까지는 이 대회가 남북을 오가며 진행되던 정기교류전이었다. 남측 선수들을 매년 봄·가을에 6번 평양에 데리고 갔고 같은 기간에 북 선수들은 남측에 4번을 방문했다.
3년간 남북 선수들이 남북을 10회 왕래했던 거다.
이렇게 정착되던 남북유소년축구대회 정기교류전이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남북에서 할 수 없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다 중단했을 때 이 대회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매년 겨울에 남북 선수들이 만나서 합동훈련도 경기도 했다. 2014년 겨울까지 중국에서 하다가 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 스포츠 교류는 허용을 했기 때문에 작년에 연천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지난 10년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작년에 포탄이 날아다니던 연천으로 북측 선수들이 내려 온 것이다. 이게 기본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평양공단을 개발하다가 5.24로 막혔을 때 그 기반을 단둥으로 옮겨서 축구화를 만드는 아리스포츠공장을 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보니 북측과 두터운 신뢰가 쌓인 것 같다.
김 이사장은 지난 14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정책 포럼에서도 “통일사업은 일관되고 지속적인 사업이어야 한다”며 조급하게 선전하려 하지 말고 성과를 내는 데 주력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지난 8월 뜨거웠던 평양에서 9박10일을 함께 한 관계자들과 함께 만찬장에서 ‘홀로아리랑’의 가사를 읊었다고 회고했다.

"장준하, 명백한 타살... 이제라도 기록 공개해야"


15.09.18 19:42l최종 업데이트 15.09.18 19:4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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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와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장준하(1918~1975)가 패기 있고 기상이 활달한 '행동가'였다면 함석헌(1901~1989)은 촌색시 같이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사상가'였다. 장준하는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총을 들고 항일운동을 벌였던 반면 함석헌은 그의 격렬한 말과 글로 낙심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고난을 극복할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장준하는 '야당정치인'으로 독재자 박정희와 정면대결을 벌였고 이 시기 함석헌은 '재야언론인'으로 박정희정권의 잘못을 누구보다 거침없이 비판했다.

장준하와 함석헌의 삶의 모습은 이렇게 겉으로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또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 정권기에는 민주화운동가였다. 이 땅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장준하와 함석헌은 '바늘과 실'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가장 소중한 가족들은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1975년 8월 17일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장준하가 의문사 당한 후 함석헌은 장준하에 대한 인물평을 이렇게 했다. 

"그(장준하)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나라의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쳐보려고 온갖 노력과 투쟁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 함석헌의 평가처럼 장준하는 그저 삶의 매 순간을 오직 공익을 위해, 민족의 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며 온갖 노력과 투쟁을 한 이다. 

나는 고상만을 지난 2004년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직장동료'로 처음 만났다. 그때 그는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었다. 1970년 대 말부터 '함석헌 환자'였던 나는 곧 정의감이 넘치는 '장준하 매니아' 고상만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고상만은 나의 후배이자 친구이면서 또 스승이 되었다.      

그런 고상만이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발간했다. 이 책은 박정희 독재정권시설 중앙정보부가 불법으로 민간인들을 사찰하고 야당 국회의원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 박정희 독재정권이 저지른 추악한 국가범죄에 대한 기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상만의 말처럼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한 사찰, 미행, 도청 그리고 사설 정보원 활용을 통한 정보 수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해서는 안 될 정치 개입"이었다. 이렇게 박정희정권은 "국가의 안보와 상관없는 독재자의 권력 연장용 도구로서 국가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처벌받아야 할 불법 행위이지 보호할 가치가 있는 국가 기밀이 아니다"라고 고상만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장준하에 대한 '중요 상황 보고'를 통해 친일장교 출신 독재자 박정희가 광복군장교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 장준하를 얼마나 비열하게 불법으로 감시하고 탄압했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고상만의 증언처럼 이 책을 통해서 "독재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똑똑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추악한 불법범죄행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불이익을 감수하고 당당하게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스승' 고상만의 용기에 깊이 감사드린다. 다음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과 <함석헌평전>의 저자인 기자가 지난 몇 달간에 걸쳐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와 국가 권력기관 자료 토대로 책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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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표지
ⓒ 오마이북
- 먼저 출간을 축하드린다. 정말 어려운 시절에 큰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비밀 기록으로 새롭게 조명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
"2015년 올해는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40주기를 맞이하는 해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 40주기에 선생님의 삶과 투쟁, 죽음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책을 쓰고 싶었다. 원래는 8월 기일에 맞춰 책을 내려 했는데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더 좋은 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 지난 2012년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을 출간한 바 있다. 기존의 저서 그리고 다른 분들이 또 그동안 쓴 '장준하평전'과 이 책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 나온 장준하 선생님의 평전과 이 책의 큰 차이점은 증언을 하는 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전의 평전들은 장준하 선생님의 유족이나 지인, 또는 동지들의 증언을 주요 토대로 삼았는데 이번에 내가 쓴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평전은 생전 장준하 선생님을 지독하게 감시했던 중앙정보부 등 국가 권력기관이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책을 썼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를 통해 장준하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을 수 있었다. 나 역시 평전을 쓰며 매우 흥미로웠던 이유다."

- 20세기를 살다 간 장준하 선생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 특별히 젊은 세대들이 아는 일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2015년 올해는 대한민국의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졌는데 나는 장준하 선생님 자체가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또 해방후에는 <사상계> 언론인으로, 이어 독재 권력하에서는 민주 투사로, 이를 제도적으로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을 지낸 장준하 선생님의 삶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장준하의 삶을 알아가는 것이 또 다른 역사 공부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가장 사랑한 사람, 바로 장준하였기 때문이다."   

- 지난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을 받는다. 당시 박정희가 장준하 선생을 감옥에서 죽이려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소문이 사실이었나?
"사실이었다. 박정희는 장준하를 죽이고 싶었다. 이를 위해 제일 처음 한 일이 바로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긴급 조치 발동을 통해 장준하를 감옥에 15년간 갇아 두려고 했다. 당시 장준하 선생님은 56세였는데 만약 15년을 다 살고 나온다면 일흔이 넘는 나이가 된다. 

이 당시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60세를 갓 넘었을 때였는데 협심증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장준하가 감옥에서 일흔을 넘겨 건강하게 나올 수 있다고 여긴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를 불과 10개월 만에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결국 중단하지 않는 장준하 선생의 저항이 비극적인 의문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20여 일 전인 1975년 7월 말 그는 김대중을 찾아 갔다. 당시 그는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 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함석헌은 이를 놓고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전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그가 의문사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하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은 매우 정확한 인식이었다. 실제로 2003년 12월 당시 나는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나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에 대해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다. 

'장준하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하는 의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물음에 대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나도 1973년에 암살당할 뻔했는데 장준하 선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한 사실이 있다. 나 역시 박정희 권력하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장준하 선생님이 화해하면서 거사를 논의하는 상황을 중정이 알게 되었고 결국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이 변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장준하 선생에 대한 국가기록 공개해야"

- 지난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한 날 당시 중앙정보부는 어떤 기록을 남겼나?
"단 한 장의 문서만 남겼다. 이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시간대 별로 별스럽지 않은 일조차도 장준하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으로 남겨놨던 중정이 정작 사건이 발생한 당일에는 사고가 발생하여 사망했다는 단 한 장의 문서만 남겨 놨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산된 문서는 다음날인 18일 오전 7시 57분경, 장례 일정에 대한 협의를 담아 보고서를 작성했다. 무려 11시간동안 공백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이 시간에 적어도 수차례의 추가 보고문이 있다고 확신한다. 의정부 지청 검사와 부검의 그리고 보안부대 고위 관계자가 사건 현장에 왔는데 이들이 무엇을 봤고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하고 보고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일체 없다. 이는 중정 요원들조차 이상한 일이라고 조사과정에서 답한 바 있다. 지금이라도 이 기록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이다."

- 장준하 사후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던 국내기자는 연행, 구속되고 또 외신기자는 아예 추방되기도 했다. 장준하가 정말 단순 사고인 추락사를 당했다면 박정희는 왜 그토록 진실을 은폐하고 철저하게 언론을 탄압했을까?
"중정은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아니면 다른 어느 기관이 했나 살펴볼 것 같기도 한데 전혀 그러한 흔적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의혹을 제기한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는가 하면 의혹을 보도한 외신 기자를 추방하기도 한다. 장준하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 잘 실었다.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다." 

- 장준하는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모두 37번 연행되고 그중 3번 구속되었다. 그후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 당했다. 그러나 당시 장안에서는 박정희가 죽은 장준하조차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는데?
"장준하의 사망 경위에 대한 보고는 대단히 엉성한데 반면 중정은 장준하 사후 장준하 선생의 유족과 동지들을 감시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예를 들어 함석헌 선생님이 장준하 선생 사후 두 달여 만에 명동에서 추모제를 하려고 하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1주기 기일 때는 더욱 그랬다.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준하 선생을 박정희 권력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죽은 사람조차 이렇게 두려워 할 지경이니 살아있는 장준하는 얼마나 무서웠겠나." 

-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 그리고 해방 후에는 언론인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에 맞섰던 장준하 선생이 마침내 1967년부터 정치인으로서 본격적인 현실참여를 결심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박정희 권력은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를 탄압했다. 판매방해와 세무조사로 이중, 삼중의 고통과 어려움을 줬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더 이상 비판만으로는 박정희 권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것이 바로 국회의원 선거출마였다. 이를 통해 국회에서 싸워 박정희 권력의 부도덕성과 야만적인 탄압에 맞서고자 했다. 만약 장준하 선생에게 조금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 텐데... 많이 안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 장준하 선생은 부인과 3남 2녀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단 한 번 월급봉투를 집에 가져온 적이 없다고 한다. 또 그의 지인인 이행우 선생은 한 번 식사 시간에 우연히 장준하 선생 집을 방문하고 놀랐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인데 장 선생이 식사하는데 반찬이 깍두기 하나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왜 장준하 선생은 그토록 가난했을까?    
"높은 도덕성, 청렴성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난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서도 이러한 많은 일화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장준하 선생은 국회의원 명함조차 만들지 않았다. 당시 국회의원 명함만 가지고 가도 마치 신분증처럼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였는데 장준하 선생은 그러한 부도덕한 일에 얽이지 않기 위해 아예 명함조차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 책에 실린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와 국회의원 명함' 일화는 글을 쓰는 나조차도 먹먹한 감동을 느끼는 일이었다. 이처럼 정직하고 청렴한 정치인을 다시 만나고 싶다."

"장준하, 절대 추락사 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타살됐다"
기사 관련 사진
▲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
ⓒ 고상만

-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사건' 조사관을 지냈는데, 장준하 사건 조사관 입장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무엇이라고 추정하는가?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장준하 선생은 절대 추락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백히 타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누가 죽였느냐'는 것으로 앞으로 국가차원의 조사 기구가 만들어져 그곳에서 책임있게 규명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여러 시나리오가 있는데 국가차원의 조사기구가 만들어진다면 내가 적극 지원하고 도와 남은 의혹을 명쾌하게 풀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자신 있다. 확실하게 진실을 규명할 것이다."

- 끝으로 장준하 선생이 한국역사와 사회에 남긴 소중한 유산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는가?
"장준하 선생은 생전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씀이 우리 사회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못난 후손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심, 이웃을 생각하는 연대감,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함께 가겠다는 인권의식이 나는 장준하 선생이 나에게 준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시대는 다시 어둡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낙관한다. 장준하 선생이 꿈꾼 정직한 나라, 용기 있는 정의를 위해 나는 제2의 장준하처럼 살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 명, 한 명 늘어난다면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장준하 선생이 남긴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말하고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함께 가자!"

* 저자 고상만은 인권 운동가,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등 의문사한 이들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저서-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2012년), <다시, 사람이다>(책담, 2014년) 외 다수. 2012년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등 수상.

○ 편집ㅣ박혜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