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5일 수요일

“2017년 3월 10일, 비상계엄선포”

기무사 작성 ‘계엄령’ 문건 공개..군인, 국가를 통치하다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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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7.25  18: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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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초겨울부터 시작된 촛불 정국 당시, 박근혜 정부의 국군기무사령부(당시 사령관 조현천)가 계엄령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기무사가 작성한 문서인 ‘대비계획 세부자료’는 군사 2급 비밀로, 총 67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무사가 작성한 문건이 그대로 실행됐으면 어떠했을까.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선고 당시로 돌아가, 이 문건에 따라 가정의 역사를 써본다. 군인이 국가를 통치하면 이렇게 된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정부,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해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기각됐다. 태극기부대는 환호를, 촛불시민들은 분노했다. 그토록 춥고 시린 겨울,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탄핵’을 외친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그 시각, 국방부. 한민구 국방장관 주관으로 이순진 합참의장, 장준규 육군참모총장, 조현천 기무사령관, 조종설 특전사령관, 구홍모 수방사령관 등과 국방부 정책실장, 합참 정보.작전본부장, 군사보좌관 등이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2016년 7월 터키 계엄시 군부가 시민의 저항으로 실패했던 사례에서 최소한의 인원들이 모여 계엄 성공을 위한 보안을 지키려던 것.
이들은 “폭력집회 및 시위의 규모, 사회혼란 가중 정도 및 경찰에 의한 치안통제 능력, 정부의 사법.행정 기능 발휘 가능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폭력시위 발생 지역 및 규모 등을 고려하여 시행지역을 결정하되, 현 상황 고려 시, 전국적인 시위확산 예상으로 전국 계엄 등을 우선으로 판단한다”고 논의했다.
서울시장 등 지자체단장의 요청이 불분명해 위수령은 쉽지 않고, 계엄에 대한 국민감정 악화로 전국적 규모의 시위확산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어 경비계엄 대신, 비상계엄을 결정한다. 비상계엄은 사법부를 포함해 모든 정부 부처에 대한 강력한 통제로 사회질서 회복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 기무사령부가 작성한 '대비계획 세부자료' 중 비상계엄 선포문과 담화문 내용. 2017년 계엄령을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증거이다. [캡처사진-통일뉴스]
이들은 장준규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추천한다. 이순진 합참의장은 전시상황에서만 계엄사령관이 될 수 있다는 자체적인 판단을 내렸지만, 사실상, 육사 중심의 비상대책회의에서는 3사관학교 출신 이순진 합참의장이 탐탁지 않았던 것.
“현재와 같은 정부 기능 및 치안 질서가 마비된 상황에서도 대북 억제력 발휘가 절실한 바, 군사대비태세는 반드시 확립되어야 하”며 “계엄사령관은 군사대비태세 유지 임무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면서 장준규를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해줄 것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황교안 대통령 직무대행 체제도 염두에 뒀다.
이와 함께, 탄핵소추안 결정 이후 집회.시위 확산 등 국가 위기상황 관련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 및 치안 질서 확립을 위한 군사작전 지원을 위해 전국 비상계엄선포를 건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계엄이 선포되기 전, 한민구 국방장관은 주한 외국무관단을 소집해 현재 국내 상황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주한 외국 대사를 대상으로 일부 언론의 편파 보도에 따른 국내 상황이 왜곡돼 보도되지 않도록 협조를 부탁했다.
심지어 국방장관은 주한 미국 대사와 중국대사를 따로 공관에 불러, 비밀리에 계엄의 불가피성에 관해 설명했다.
그리고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정부는 탄핵 결정 이후 집회.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시위대의 무장 및 폭동, 강력 범죄 확산 등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됨에 따라 공공의 안녕질서를 회복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의 위기를 종식시켜 헌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1. 계엄의 종류 : 비상계엄
2. 계엄지역 : 전국
3. 시행일시 : 2017년 3월 10일 00:00부
4. 계엄사령관 :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장준규
대통령 박근혜”
뒤이어 장준규 계엄사령관은 담화문을 발표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현재 우리는 대규모 폭력 소요로 인해 치안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국가비상사태를 맞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유언비어 확산으로 사회혼란이 가중되고 있으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폭력시위 확산 및 사재기가 급증하고 있어,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이에 정부는 헌법 제77조에 의거하여 17년 3월 10일 00:00을 기하여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본인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국민여러분!
저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원활한 작전을 위하여 부여된 책임과 임무완수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우리 군을 믿으시고 계엄사령부의 통제에 적극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야 국민총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계엄사령부는 공공의 안녕과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국민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거듭 다짐합니다.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드립니다.
2017.3.10.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장준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계엄사령관은 다음의 포고문을 내건다.
‘포고문’
“계엄법 9조(계엄사령관의 특별조치권), 대통령 공고문 제1호(비상계엄선포문)에 따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고 계엄임무수행군의 임무수행을 지원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계엄이 선포된 전 지역은 2017년 3월 10일부터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니 준수해야 함.
 가. 통행금지 시간 : 23:00~익일 04:00
 나. 지구 및 지역 계엄사령관의 통행증을 소지한 자는 가능함.
1) 통행증 발급 대상자
가) 계엄시 관련 필수요원 : 공무원, 동원된 민방위대원, 생활필수품 공급요원, 보도요원 등
나) 야간통행이 필요하다고 인정된 자 : 긴급환자, 의료종사자 등
다. 지구/지역계엄사령관 판단하 사회질서가 확립되고 계엄임무수행군 임무수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 지역은 야간 통행금지 해제가 가능함.
(단, 통행금지 해제 및 시간 변경사항은 계엄사 보고후 시행)
2. 계엄임무수행군의 원활한 임무수행을 위해 지구 및 지역계엄사령관이 지정한 도로는 차량운행을 금지하되 허가된 도로만 사용해야 함.
3. 언론, 인터넷, 통신, 출판, 보도는 검열을 받아야 함.
가. 검열시간
1) 신문 : 조간(매일 12:00~22:00), 석간(매일 05:00~12:00)
2) 방송 및 통신, 인터넷 : 수시
3) 주.월간지 및 기타 : 매일 13:00~15:00
나. 검열요령
1) 검열자료는 신문(간판 인쇄본 2부), 방송 및 통신(원고 1부), 기타 출판 간행물 및 전시물(견본 2부), 영상매체 및 공연물(제작품 원본 1부)를 제출
2) 인터넷신문은 각 신문사가 포털사이트로 전송 전 온라인으로 제출
3) 보도검열은 사전검열을 원칙으로 하며, 필요시 사후검열 가능
4. 보도매체 및 인터넷, SNS를 통해서 집회 및 단체행동을 선동하거나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행위를 금지함.
5. 자유민주주의 체제 부정과 전복을 기도하거나 이를 내용으로 한 불법 유인물, CD, 음반, 컴퓨터 보조기억매체 등을 제작.소지.배포하는 행위를 금지함.
6. 계엄사령관이 정하는 군수물자에 대한 조사.등록시 이에 응하여야 하며 임의 반출을 금지함.
7. 계엄임무수행군 임무수행에 저해되고 사실을 왜곡하는 사이버 공간을 포함한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지함.
8. 계엄선포지역에서의 의례적인 종교행사, 관혼상제 등을 제외한 사회혼란 및 계엄임무수행군 임무수행 방해를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함.
9. 사회혼란 조성 및 계엄임무수행군 임무수행을 저해하는 직장이탈, 조업거부,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체 금지함.
10. 각종 흉기, 폭발물, 화염병 등을 제조.소지.투척하는 등 일체의 폭력행위를 금지함.
11. 전국의 대학 이상의 학원은 휴교 또는 휴업지정 후 24시간 이내에 휴교 또는 휴업을 하여야 함.
이상의 포고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계엄법 제9조(계엄사령관의 특별조치권)에 의하여 영장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법칙)에 의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017.3.10.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장준규
군, 전국에 배치되다..포고문 위반자는 계엄군사법정으로
비상계엄선포와 포고문이 발표되자 전국에 군대가 투입됐다. 시위대의 저항이 가장 적은 야간을 틈타 장갑차를 이용해 6개 기계화사단, 2개 기갑여단, 6개 이상의 특전사 소속 군인들이 총을 휴대한 채 거리에 나왔다. 75만 명의 촛불시민들을 1만 5천 명의 군인이 진압할 수 있는 규모이다.
주요 시설이 집중된 서울은 엄혹했다. 2개 사단, 2개 특전여단으로 구성된 계엄군은 청와대, 헌법재판소, 정부청사, 국방부를 장악했다. 대규모 집회가 예상되는 광화문광장은 경찰 1만5천 명, 30사단 2개 여단, 9공수여단이, 여의도에는 20사단 1개 여단이 배치됐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707대대가 대기했다.
서울 외에 경기 2, 5기갑사단과 9특전여단, 강원 11사단과 3특전여단, 충청 8사단과 13특전여단, 전라 26사단과 11특전여단, 경상 수기사와 7특전여단이 각각 맡았다.
  
▲ 계엄군은 '시위대 저항이 가장 적은 야간에 진입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캡처사진-통일뉴스]
계엄법에 따라,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합동수사본부장은 계엄사령관의 명을 받아 소관업무를 처리하고,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 업무를 관장한다.
합동수사본부장은 국정원 안보수사국장, 경찰 보안국장, 헌병 조사본부장을 조정하는 위치로, 계엄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체포.구금.조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지녔다.
그리고 계엄군사법원이 설치됐다. 계엄선포 시 계엄관할 지역 내 사법, 검찰 및 법무행정사무를 관장해 신속하고 엄정한 사법 및 법무행정 시행으로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와 계엄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내란 및 외환의 죄, △국교에 관한 죄, △공안을 해치는 죄, △폭발물에 관한 죄, △공무방해에 관한 죄, △총포.도검.화학류 등 단속법에 규정된 죄, △군사상 필요에 의하여 제정된 법령에 규정된 죄, △통화에 관한 죄, △살인의 죄, △강도의 죄, △방화의 죄,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죄 등을 다룬다.
위에 해당되는 13개 죄를 계엄령하에서 피할 수 있는 촛불시민이 얼마나 될까. 계엄군은 촛불시민들을 하나둘씩 잡아가기 시작했다. ‘비상계엄지역에서 계엄사령관은 군사상 필요시 체포, 구금, 압수, 수색, 거주, 이전,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또는 단체행동에 대해서 특별한 조치가 가능하다’는 계엄법 9조에 따른 것.
시민들은 이사할 수도 없었다. 한 장소에 여러 명이 모이면 끌려갔다. 길을 걷다 수상하다고 의심받으면 아무 때나 영장없이 수색을 받았다. 책도 낼 수 없었고, 신문과 TV도 맘대로 볼 수 없었다. 
  
▲ 계엄사령부는 합동수사본부를 편성하도록 했으며, 본부장은 기무사령관이 맡도록 했다. [캡처사진-통일뉴스]
  
▲ 비상계엄 선포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내용. [캡처사진-통일뉴스]
계엄군이 끌고 간 시민 중 주요 사범은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에서 직접 처리됐다. 기타사범은 헌병, 경찰, 국정원 등에서 수사했다.
수사 1국은 기무사 중심으로, 포고령 및 계엄법 9조 특별조치권 중 수사관할 범죄, 형법상 내란.외환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 군형법상 반란, 이적의 죄, 군사기밀누설, 암호부정사용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죄 등을 다뤘다.
수사 2국은 헌병이 다루며, 내란.외환.국가보안법 외 사회지서를 유지를 해하는 범죄 등을 맡았다.
수사 3국은 경찰로, 경찰청 홍제동 수사분실에서 수사 1국과 2국 관할이 아닌 범죄를 처리했고, 국정원 중심의 수사 4국은 형법상 내란.외환의 죄, 군형법상 반란의 죄, 국교에 관한 죄, 국가보안법 위반 죄, 사이버 범죄수사 등을 맡았다.
여기서 조사받은 시민들은 각 지역에 설치된 계엄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단, 계엄군사법원이 재판권을 갖는 범죄 중 중요범죄를 제외한 범죄는 계엄군사법원의 신속한 사건처리를 위해 계엄법 제10조 단서의 규정에 따라 일반법원에 재판권을 위임한다고 계엄사령부가 알렸다.
그렇다고 일반법원에서 처리되는 경우가 얼마나 됐을까. 계엄사령관이 특별히 지시한 사건 또는 계엄군사법원 관할 사건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계엄군사법원에서 재판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계엄군, 국회와 정부를 장악하다..대외 유화책도
계엄사령부는 국회의 계엄령 해제를 저지했다. 국회는 임시회의를 소집해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해제를 시도했다.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해제해야 한다는 헌법 77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계엄사령부는 당.정협의를 통해, 국회의원 설득 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여당인 새누리당을 통해 계엄의 필요성과 최단 기간 내에 해제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계엄해제 의결에 참여하지 말라고 유도했다.
이래도 안될 경우, 계엄사령부는 국회의원 299명 중 진보성향 160여 명, 보수성향 130여 명으로 각각 분류, 집회.시위금지 및 반정부 정치활동 금지 포고령을 선포해 위반한 국회의원을 집중 검거해 사법처리했다.
결국, 정족수에 미달한 국회는 국회의장 직권으로도 계엄해제가 상정되지 못했다. 계엄을 그대로 유지됐다.
  
▲ 국회를 장악하는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캡처사진-통일뉴스]
계엄군은 정부도 장악했다. 각 군 본부에서 중.대령급 장교 48명을 소집, 각 부처에 2명씩 파견했다. 정부 부처별 5급 이상 공무원 2명은 정부연락관으로 계엄사에 소집됐다.
계엄군의 원활한 정부 부처 업무 통제를 위해, 계엄위원회가 설치됐다. 계엄사령관의 자문기구로, 계엄부사령관이 위원장을 맡고 군, 정부 차관급 인사, 대학 부총장 및 교육감 등 학계, 언론사 국장급 인사 등 20여 명으로 구성됐다.
계엄군은 자신들의 통제를 거부하는 정부 부처에 대해서는 대통령 및 국무총리를 통해 경고 및 제재조치를 하고, 공무원은 계엄법 제8조 계엄사령관의 지휘.감독 위반으로 3년 이하의 징역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치안질서 유지’라는 이유로 자행됐다.
계엄군은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위한 외교활동도 강화했다. 계엄사령관은 주한 무관단을 소집해 계엄의 불가피성과 신속한 사회질서 확립 등 계엄 시행의 지지를 당부했다.
국방장관은 주한 미 대사를 초청해, 미국 정부가 한국의 계엄 상황을 인정해달라는 부탁했다. 외교장관은 기자, 기업인 등 주요 국가 주한 사절단을 초청해 계엄 시행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장준규 계엄사령관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고문을 발표했다. 외국인 유화책이었다. “공항만 출입 통제 간 외국인 등록증 및 여권 소지자는 출국을 허용한다. 국내 주둔 외국 기업 및 법인의 영업활동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계엄군, 보도통제에 나서다..SNS 계정은 강제로 폐지
계엄군은 재빠르게 언론 장악에도 나섰다. 계엄사령부에는 기무사 1명, 현역 13명, 동원 34명으로 구성된 보도검열단이 구성됐다. 합동수사본부에는 합수본부 7명, 계엄사.문체부 파견관 각 1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 언론대책반이 설치됐다.
이들은 ‘보도검열 요령 및 지침’을 하달했다. 계엄에 유해되고 공공질서를 위협하며 군의 사기를 저하하고 군사기밀에 저촉되는 내용은 보도금지됐고, 정부와 군의 발표, 반정부 의식을 불식시키며 시위대의 사기를 저하하는 내용은 확대보도 대상이었다.
조간신문은 매일 05:00~12:00, 석간신문은 매일 15:00~22:00, 방송.통신.인터넷 매체는 수시, 주.월간지는 매일 13:00~15:00 한국언론회관에서 검열을 받아야 했다.
  
▲ 보도지침. [캡처-통일뉴스]
만약, 보도지침을 위반할 경우, 1차 경고에 이어 2차 기자실 출입금지, 보도증 회수, 현장취재 금지, 외신매체 출국조치 처분을 받아야 했다. 세 번째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의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래도 지침을 어길 경우, 매체 등록을 취소하고 보도정지 조치를 내렸으며, 전국적으로 <KBS-1TV>와 라디오를 단일방송으로 전환했다.
보도가 단일화되자, 문체부 장관이 정부발표를 국방부와 계엄사가 상황을 브리핑하는 것을 기자들은 문체부가 운영하는 프레스센터에서 받아써야 했다.
그리고 언론 통폐합도 진행됐다. 계엄군은 방송 22개, 신문 26개, 통신 8개로 중앙 언론사를 통폐합했고, 지역 언론은 방송 32개, 신문 14개로 묶었다.
인터넷 포털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통제됐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민.관.군 합동으로 ‘인터넷유언비어대응반’이 설치, 모니터링을 강화해 불온내용이 식별되면 신속하게 차단했다. 유언비어 등을 유포하는 인터넷 포털과 SNS 계정은 계엄법 제9조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 직권으로 폐지됐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됐다. 계엄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군인이 국가를 통치하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통일뉴스>는 자유로이 기사를 쓸 수 있다. 촛불시민의 힘이 더욱 고마운 하루를 우리는 보내고 있다.
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관련 ‘대비계획 세부자료’는 다행히 실행되지 않았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봉암을 닮은 사람, 노회찬 약전

인간 노회찬의 삶과 사랑
2018.07.25 18:50:58




노회찬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났고, 그를 기억하기 위한 움직임들은 다양한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간 노회찬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노회찬이 살아온 삶을 기록한 글이 여기 있다. 이 글은 월간 <시대> 제50호(2017.07~08월호)의 한 꼭지로,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안재성이 썼다. '안재성이 만난 사람들'이라는 코너의 글이다. 노회찬에 대한 약전(略傳)으로 손색이 없다. (☞ 월간 <시대>에 실린 글 바로 가기) 

이 글은 노회찬의 출생에서 국회의원 입문 때까지를 주로 다룬다. 따라서 원문에는 있는 '국회의원 입문 이후 노회찬의 행보'와 2007년 이후 '진보정당사' 부분은 안재성 작가와 월간 <시대>를 펴내는 박종철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편집했다. 안재성 작가와 박종철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이 글의 원제는 '진보정당운동의 산증인, 노회찬'이다. 편집자.

1. 조봉암을 닮은 사람 

노회찬을 보면 조봉암이 생각난다는 이들이 있다. 조선공산당의 창당 주역이었으나 현실 공산주의의 국가폭력에 반대해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던, 필요에 따라 이승만과 손잡고 토지개혁을 주도하기도 하지만 또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처형된 조봉암의 일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봉암은 야만적 시대의 제물로 갔으나 노회찬은 3선 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섯 석밖에 안 되는 정의당의 원내대표지만 그 여섯 석도 우리나라 진보정당 현실에는 소중하다. 물론 그가 속한 정의당이나 그가 천명해 온 주장은 진정한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또 다른 여러 진보정당이 존재하지만, 국회의원이 있는 유일한 진보정당인 것이 사실이다. 

노회찬을 두고 한국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자 주역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노회찬은 1987년 12월 대선에서 처음으로 민중후보를 내세운 이들을 중심으로 창당한 민중의 당(1988년)을 주도한 이래, 민중당(1990년)으로부터 진정추(1992년), 민주노동당(2000년), 진보신당(2008년), 통합진보당(2011년)을 거쳐 현재의 정의당(2012년)까지 한 번도 진보정당운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을 뿐더러 늘 주역의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만들거나 속했던 진보정당들이 모두 그와 다른 정파들에 의해 장악되어 그는 밀려나거나 스스로 분당해 나왔다. 

그럼에도 맨 처음 진보정당운동을 시작했고, 많은 동지가 자의든 타의든 물러난 상황에서 유일하게 국회에 진출한 정당을 이끌고 있으니, 그를 두고 현대 진보정당사의 산증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후보로 나서면서 시작된 진보정당운동이 올해로 꼬박 30년째다. 노회찬의 진보정당운동 시계와 똑같다. 지겹게 들어 온 멍청한 질문이겠지만, 왜 오로지 이 운동에 일생을 바치는가 물으니 이렇게 답한다. 

"한 사람이 평생에 한 가지 일만 추구해도 이루기 힘든데 어떻게 여러 가지 일을 하겠습니까? 학창 시절에 결심한 대로 이 사회의 약자와 빈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뿐입니다."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일부러 낳지 않은 건 아니지만, 노회찬은 아이조차 없는 극히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노동자를 위한 일간지 <매일노동뉴스>를 10년간 운영하느라 빚더미에 앉아 오랫동안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다. 처음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은행에서 의원용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조건이 안 된다며 거절당한 일화도 유명하다. 지금도 그는 전세살이를 하고 있다. 삶과 사상이 일치하는, 이 변치 않는 무욕의 삶이 지금의 그를 있게 했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음, 편향되지 않음, 재치 넘치는 특출한 표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욕심 없음 등등으로 표현되는 이 노회찬 특유의 인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진보 진영 인사들은 대개 운동 경력만 내세울 뿐이다. 개인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잡지에 이 꼭지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노회찬 의원이 부산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경상도 말은 억양이 강해서 고향을 떠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출신지를 숨기기 어렵다. 그런데 노 의원의 말투에서는 경상도 억양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이유부터 물어보았다.

2. 첼로 연주하는 아이 

아버지의 이력부터가 독특하다. 아버지 노인모 씨는 이북 출신이다. 일제 치하에서 흥남에 있는 조선질소비료라는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다가 징병으로 끌려가 고생하고 돌아와서는 원산의 도서관에서 사서를 하던 문학예술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초량동 산동네에 살면서 원태순 씨와의 사이에 셋을 낳아 키웠다.

노회찬은 위로 누나를 둔 맏아들로, 1956년 8월에 태어났다. 부모가 이북 말을 쓰니 노회찬도 자연히 이북 억양에 익숙해졌다. 노회찬이 부산 출신임에도 남과 북이 합쳐진, 어디 출신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특이한 억양을 가진 이유다. 

초량동 산동네는 전쟁 피난민들이 많이 살던 빈민촌으로, 무허가로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이 대부분이었다. 노회찬의 다섯 가족은 그나마 집도 없이 방 한 칸을 세 내어 살았다. 부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할 때까지 그 집에 살았으니, 노회찬의 부산 생활은 초량동 빈민가의 셋방살이가 전부다. 

산비탈 판잣집에서 셋방살이를 했어도 마음만은 빈곤하지 않은 가족이었다. 문화적으로는 다른 어느 가정보다도 풍요로웠다. 박봉이나마 안정된 수입이 있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물질적 욕망보다는 문학예술을 사랑하도록 인도했기 때문이다. 방이 두 칸으로 늘자 암실부터 만들어 스스로 찍은 사진을 인화하던 멋쟁이 아버지였다.

"살림은 가난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어요. 아버지는 저에게 문학과 예술에 눈을 뜨게 해 준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독서하는 것을 보고 배워서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였는데, 중학교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전축 앞에 불러 놓고는 너도 이제 중학생이니 이걸 들어야 한다면서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 주세요. 백 번은 더 들었을 거야.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연주였는데, 처음에는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심취하게 되었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가난한 살림에 남편과 비싼 오페라 공연을 다니던 이였다. 월남을 하기는 했으나 북한에서 살면서 사회주의 교육의 좋은 점을 보았기 때문일까? 노회찬이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어머니가 먼저 나섰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사람은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고르게 했다. 누나는 피아노를 택했고, 노회찬은 바이올린보다 큼직한 것이 배우기 쉬울 듯해 첼로를 택했다. 

연습용 첼로는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사사가 문제였다. 부산에는 첼로 선생이 한두 명밖에 없던 데다 수강료도 엄청났다. 운 좋게도 부산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주자였던 배종구 교수에게 직접 배울 수 있었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역시 좋은 교수를 만났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대학 진학을 위해 배우는 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해서 배우려는 것을 안 두 교수는 거의 돈을 안 받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재능은 없음이 분명하다.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분들께 꽤 여러 해 배웠는데 열심히 하라는 말만 잔뜩 들었지, 너는 재능이 있다고 말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제가 리코더는 아주 잘 불었어요. 무슨 노래든 듣기만 하면 즉석에서 악보로 옮겨 불 정도였지요." 

어렵게 배운 첼로 솜씨로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이화여고 축제에 초대 받아 3천원의 출연료까지 받고 공연한 적도 있었다. 첼로를 배우며 음악에 심취해, 당시 서울의 낭만파 학생이라면 필수적으로 출입하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도 드나들고, 서정주의 시를 가사로 삼아 직접 작곡해 본 적도 있었다. 

음악만이 아니었다. 문학, 철학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열독했고 영화도 무척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는 한 해 개봉된 모든 영화를 보러 다녔다. 

책상물림의 샌님이 아니었다. 삼육국민학교, 부산중학교 다니는 내내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반장을 했다. 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도 하고 중고등학교 때 선생들이 부당하게 굴면 바로 대들어 싸우기 일쑤였다. 

"중학교 때부터 그랬고 고등학교 내내 그랬어요. 조금이라도 부당하다 싶으면 못 참고 선생님한테 바로 대들어서 엄청 많이 맞았습니다.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 맞기, 주먹으로 얼굴 맞기, 꽃병으로 머리두들기기 등등 정치나 학원이나 폭력이 일상이던 시절이었는데도 계속 반항했죠." 

잘못된 일에는 반항을 하되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 애정과 존중심을 잃지 않는 그의 특징은 그때도 나타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세계사 선생이 미국 인디언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피식거리며 동조를 하지 않자 "너희는 텔레비전도 못 봤냐?"고 성질을 냈다.이에 아이들이 전부 못 봤다고 하자 속 좁은 선생은 못 본 놈 나오라고 고함쳤다. 겁난 아이들은 아무도 나가지 않는데 노회찬이 혼자 나갔다. 자취방에는 진짜 텔레비전이 없었던 것이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인데도 대든다고 생각한 선생은 무자비하게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 무한대로 맞았어요. 싸대기를 양쪽으로 무한대로 맞고 나니까 기분이 좀 그랬죠. 선생님이 과도했고 어른답지 못하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괜히 폼을 잡아 선생님으로 하여금 학생을 때리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억울하게 맞고도 교무실에 찾아가서 '죄송합니다!' 이랬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더라고요." 

아니다 싶으면 곧장 일어나 대드는 성격은 이후에도 변치 않아 참 많이 얻어터지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운동도 좋아해서 중학교 시절부터 펜싱과 육상은 선수급이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무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노 씨 성을 따 '노지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운동도 잘했지만 아마도 커다란 체구에 그보다 더 큰 머리통, 그리고 두려움을 모르고 옳고 그름을 지적하는 대범한 성격에서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오늘의 그가 보수와 진보 양쪽의 공격을 개의치 않고 '민의'라는 상식적인 눈높이에서 나오는 소신 발언을 계속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사회운동도 퍽 일찍 시작했다. 아는 선배의 영향을 받거나 학습 서클에 들어가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이던 1973년의 일이니 참 조숙했다. 

3. 인생의 미스터리들 

인생이란 묘한 우연에 좌우되기도 한다. 나이대로 하면 1972년에 부산고에 입학해야 했던 그가 재수를 하고 한 해 늦게 경기고에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의 한 미스터리다. 지역의 명문이던 부산중학교에서는 넷 중 세 명이 부산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교 10등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던 노회찬이 낙방을 하고 만 것이다. 정말 이유를 알수 없었다. 평소 경기고에 가고 싶기는 했지만, 일부러 시험을 망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가족에게서 오해를 받는 것도 싫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등학교를 아예 포기하겠다고 주장하는 그를 아버지는 서울로 보내 재수를 하게 했다. 

"서울에 온 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거죠. 부산에 있었으면 아마 내가 이 길로 안 들어섰을 겁니다. 반항심만 극대화된 채 친구들과 어울려 이상한 길로 빠졌을 겁니다."

어쨌든 전국의 수재가 모여든 경기고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또 다시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이번에는 스스로 원해서 택한 길이었다.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박정희는 소위 유신헌법을 선포해 '영구 대통령'의 길을 연다. 이건 분명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노회찬을 분개시킨 것은 국회를 해산시켰다는 점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와요. 국회는 해산시킬 수 없다고. 그런데 국회가 해산됐다는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해서 책을 다시 봤어요. 확실히 잘못된 거라. 나는 그 다음 날 엄청난 데모가 일어날 줄 알았어. 국회가 해산됐으니까. 그런데 아닌 거야. 멀쩡한 거야. 이게 지금 뭐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 이래 가지고 어린 나이에 저항을 시작한 거죠."

정부 발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사상계>를 청계천 헌책방에 가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었다. 논문도 있고 논조도 어려워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별로 없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재수 시절 혼자 그렇게 끙끙 앓고 지내다가 경기고에 들어가니 정광필, 이종걸 등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몇 명 생겼다. 똑똑한 친구들과 독재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 노회찬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해 학교에 배포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흔쾌히 응했다.

글은 노회찬이 썼으나 등사가 문제였다. 철필로 긁으면 공신력도 없거니와 글씨체가 드러나 체포되니 타자를 쳐서 등사하기로 했다. 타자기가 귀한 시절이고 칠 줄도 몰랐다. '청타'라 해서 푸른 등사 원지에 타자를 쳐 주는 몇 군데 청타집을 찾아다녔으나 원문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신고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겨우 한 군데 청타집에 사정해서 타자를 친 다음, 공범 중 한 명이 다니는 부천의 한 교회로 갔다. 전철이 없던 시절이라 완행 기차를 타고 소사역에 내려 밤중에 몰래 교회에 들어가 등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한참 등사 중일 때 목사가 불쑥 들어왔다. 밤중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다 끝났구나, 신고를 당해 감방에 가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겠구나 생각했지요. 근데 목사님이 우리가 등사해 놓은 유인물을 한 장 집어 들고 죽 읽어 보더니 다시 내려놓고는 단 한 마디도 않고 나가서 문을 닫아 주는 거라. 참 고마운 목사님이었지요."

무사히 1,200장 정도를 등사한 일행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학교에 들어가 책상 속에 한 장씩 넣어 두었다. 

읽어 본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찬동하자 학교가 뒤집어졌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우려해 즉시 조기 방학을 선포하고는 모두 집에 가라고 내몰았다. 학생들이야 방학이 당겨졌으니 신이 나서 누가 뿌렸는지 몰라도 고맙다고 떠드는 것이었다. 경찰이 정문부터 학교를 빙 둘러 감싸고 있었지만 문제가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일을 통해 규합된 친구들에게 노회찬은 기초부터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런 사회과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로 선택한 것이 철학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에 가서 하드카버로 된 두꺼운 <세계철학사>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옛 소련의 아카데미에서 출간한 세계철학사와는 아무 상관없는, 플라톤이니 칸트가 등장하는 부르주아철학사였다.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재미도 없어 얼마 안 있어 포기하고 <다리>, <사상계>를 함께 보는 시사 모임으로 바꿨다. 

이듬해인 1974년 4월 3일은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란 이름으로 전국의 주요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공동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기획한 날이자, 박정희가 군대를 동원해 대학가에 위수령을 내리고 민청학련 관련자는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한 날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던 경기고 학생 하나가 교문 밖에서 어떤 대학생이 선생님 주라며 준 서류 봉투를 받아다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학생들이 열어 보았다. 유신 반대를 선동하는 민청학련 명의의 유인물이었다. 

노회찬은 교실 문을 잠가 선생님들의 진입을 막고 큰 소리로 유인물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동조했고 즉석에서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사 토론회가 열렸다.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농성이 학교 전체로 퍼져나가자 학교 측은 또 다시 휴교를 선포했다. 교실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학생들은 노회찬을 중심으로 도서관에서 시사 토론을 이어 갔다.

경기고 학생들의 이날 수업 거부는 전국이 공포로 얼어붙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기획되었던 이날의 시위는 대부분 실패해 버렸는데 뜻밖에 고등학교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 외에도 고등학교 시절의 저항의 무용담이며 문화예술과 관련된 일화는 무궁무진하다. 자연히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서울대 철학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하고 곧바로 입영 영장을 받는다. 베이비붐 시대라 웬만하면 현역병에서 제외될 때라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보충역, 이른바 '방위'가 되었다. 

1978년에 제대하고 다시 입시를 치러 고려대학교 정치외교과에 합격했다. 동갑내기들은 대개 75학번인데 4년 늦은 79학번이 된 것이다. 

"대학에 간 이유는 오로지 데모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 혁명을 꿈꾸고 있었으니까요. 친구들이 대학에서 데모를 주동하다 보니 대학에 가기 전에도 벌써 몇 번 경찰서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기도 했고요." 

신입생이라지만 벌써 졸업했을 나이인 데다 이미 고교 1학년부터 경력이 화려한 그가 들어오자 학교에서는 선배이던 친구들이 곧바로 그에게 '이념 서클'을 맡겼다. 1학년이 지도하는 특이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유신 독재의 마지막 해이던 1979년부터 시작해 4년 내내 마음껏 데모를 했다. 여러 이념 서클을 지원하고 고려대 처음으로 학회를 만들어 지도하는 등 학생이 아니라 '직업운동가'로 살았다. 

이렇게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으나 그는 학생운동이야 지나가면서 자동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머지 긴 인생은 노동운동에 바치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광주항쟁을 목도한 많은 대학생이 정치운동만으로는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절박감으로 노동, 농민, 빈민 등 기층민중운동을 지향할 때였다. 

성적과 취업에 목숨이 걸린 요즘과 달리 대학의 성적 관리가 느슨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운동권 학생이라면 출석을 거의 안 해도 시험만 치르면 학점을 주어 어서 졸업시켜 버리려 했다. 노회찬은 4학년이 된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등록해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하고 현장 취업에 나섰다. 학교는 시험만보러 가서 졸업장은 받았다. 

처음 취직한 곳은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의 하청 공장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려면 본인이 직접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러시아혁명기의 인민주의적 분위기 속에 3년 가까이 열심히 공장에 다녔다. 이 3년간 받아 본 월급이 20여년 후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받아본 거의 유일한 정규적 수입이었다. 

노동자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공장에 다니는 동안, 대학생들 사이에는 현장 취업의 열풍이 불어 1985년쯤에는 전국에 위장 취업자가 만 명은 되리라는 말까지 돌았다. 출신 학교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거나 개별적으로 공장에 흩어진 이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차례 시위를 주동하느라 경찰의 추적이 시작되어 공장에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경찰은 그에게 공식적으로 수배령을 내렸고, 7년간의 기나긴 지하활동이 시작되었다. 정기 수입이라곤 없이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가 알 수 없는, 그의 인생의 또 다른 미스터리가 시작된 것이다. 
ⓒ노회찬 전 의원 홈페이지
4. 인민노련에서 정의당까지 

보수파가 이미 확보한 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이라 이권다툼만 한다면, 진보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해야 하니 논쟁이 필연적이다. 

노회찬도 알게 모르게 우리 진보운동을 좌우한 중대한 논쟁과 이합집산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다. 독자적 진보정당을 만들 것인가 말것인가, 민족문제인가 계급문제인가, 사회주의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 등의 논쟁으로 야기된 주류 운동권의 분열 또는 연합을 이끌어 낸 사건들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쟁들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민노련'이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라는 큰 바위를 만난다. 70년대 운동가들이 반파쇼 민주주의운동이라는 큰 틀 안에서 별다른 논점 없이 뭉쳐 있었다면, 잇달아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이 유입된 80년대 운동은 그 벽두부터 온갖 정파의 난립과 논쟁과 파쟁으로 얼룩졌다. 나쁜 의미든 좋은 의미든, 활동가들은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혹은 소속되기 위해 수백 종은 될 팸플릿을 읽고 밤새 논쟁을 벌여야 했다. 

인민노련은 1986년부터 인천, 주안, 부천 등 경인 지역에서 활동하던 위장 취업자들이 결합해 투쟁을 전개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의 와중에 공식적으로 결성을 선포했다. 지도부는 노회찬, 주대환, 최봉근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민중민주주의적 성향(이른바 '피디PD')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성 직후 주체사상파를 포함한 민족해방 진영(이른바 '엔앨NL')이 일방적으로 이탈하면서 인민노련의 성향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민노련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비판하며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양쪽으로부터 사민주의니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활동가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탁월한 논객인 주대환, 최봉근, 황광우 등이 집필한 기관지의 영향도 컸다. 단시간 내에 정회원만 600명을 넘어서서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지하조직이라고 할 만했다. 

인민노련에서 노회찬이 맡은 임무는 조직부장이었다. 그의 조직수완에 대해 주대환은 이렇게 증언한다. 

"노회찬 씨는 자기주장을 먼저 내세우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워 논쟁을 벌이도록 내버려 두고는 그중 다수를 차지한 주장을 선택해 자기 것으로 소화해 결론을 삼습니다. 자연히 큰 반발 없이 조직화에 성공합니다. 정략적으로 그렇게 한다기보다 본래 성품이 그런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타고난 조직가지요." 

조직 담당 중앙위원으로, 기관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을 이끌던 노회찬은 결국 수배 7년 만인 1989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 체포되어 2년 반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편, 체포되기 1년 전인 1988년 12월에는 인천 지역의 다양한 노동자 조직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김지선과 결혼했다. 노회찬보다 한 살이 많아 1955년생인 김지선은 중앙여중을 졸업하고 16세 나이로 인천 대성목재 등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로 일하다가 노동운동을 시작해 70년대에 두 차례나 구속된 적이 있는 맹렬한 활동가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에게 반해 버린 노회찬은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결혼하자고 구애했다가 거절당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결혼에 성공한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혁명을 위해 안 가진 것이 아니라, 잇단 감옥살이와 수배 생활로 그럴 여유가 없다 보니 임신 적령기를 넘어 버린 것이다. 뒤늦게 한방과 양방을 다 동원해서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두 사람은 입양이라도 하려고 신청했으나 집도 수입도 없다고 해서 자격 미달로 거절당했다. 

1992년 석방되고 보니 인민노련을 주축으로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여러 정파가 결합해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약칭 진정추를 결성하고 있었다. 결성식에 5천 명이 모일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이미 1987년 대선에서 백기완을 민중 진영의 독자 후보로 내세운 주역이던 노회찬은 1992년 12월 선거를 맞아서도 백기완 선대본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선거 결과는 비참했다. 백기완은 1%밖에 얻지 못했고, 보수세력과 손잡은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진보정당운동을 포기하고 떠났지만 노회찬은 남았다.

진보정당 추진 세력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민주노총, 전국연합 등과 합쳐 국민승리21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도 노회찬은 진정추의 후신인 민중정치연합의 대표로 이를 주도했다.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권영길 역시 참패했으나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진보정당의 존립 여지는 넓어졌다. 

이에 힘입어 2000년 1월에는 민주노동당을 결성했다. 이에 민족해방 계열도 대거 당에 합류하더니 다수파가 되었다. 이때부터 민족해방계열은 자주파로, 노회찬이 속한 민중민주계열은 평등파로, 권영길로 대변되는 중도파는 국민파로 불리게 된다.

운동권의 주류이던 자주파가 합류한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와 2004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했다. 비례대표 8명을 포함한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여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44년 만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에 성공한다. 

2004년 선거는 노회찬에게도 처음으로 의원 배지를 안겨 주었다.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그는 당선되리라 예상하기 어려웠던 비례대표 8번으로 등재했는데 뜻밖에 턱걸이로 당선된 것이다. 

선대본부장으로서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그는 꼼꼼히 일지를 기록했다. 이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졌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으로 제13회 전태일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 현대 노동운동의 기원이랄 수 있는 전태일의 이름으로 주어진 이상은 그가 받은 수많은 상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상일 것이다.

초선 의원임에도 노회찬의 활약은 놀라웠다. 그는 국정감사의 피감기관이 뽑은 베스트 의원,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신사적인 의원, 시민운동가들이 뽑은 최우수 의정활동 1위, 방송국 피디들이 뽑은 최우수 의원 1위 등 여러 여론조사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는다. 출석률과 발언 등의 지표에서도 최우수 의원의 하나였고, 비정규직노동자 처우 개선 등 4년간 무려 467건의 법안을 발의해 31건을 가결시키는 등 입법 활동에서도 선두였다.

노회찬이라는 이름을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이었다. 1997년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의 통화를 불법으로 도청한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었다. 그 속에는 삼성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및 검찰 고위 간부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인맥을 관리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사실은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가 먼저 방송을 통해 공개했는데 이때는 뇌물을 받은 검사들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이에 해당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해 불의 앞에 차별이 없음을 선포했다. 이에 검찰은 명예훼손,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을 기소하고 나섰다. 길고 긴 재판 끝에 노회찬은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을 받아 국회의원 자격까지 잃었으나 2009년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노회찬의 길이 항상 옳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항상 옳은 단 하나의 진리의 길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노회찬이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든, 시기와 사안마다 옳다고 판단되면 서로 지지하고 틀리다고 판단되면 비판하면서 큰 길을 함께 걷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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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북 미사일발사장 해체 감사”… 이젠 미국 행동할 차례

VOA “서해위성발사장 해체, 북이 미국에 다음 단계 상응조치 요구한 것”
▲ 사진 : 미국의소리(VOA) 홈페이지
김정은 북한(조선) 국무위원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지난달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폐기를 약속한 시설인 ‘서해위성발사장’ 해체작업에 착수한 데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감사의 뜻을 밝혔다. 조만간 참전용사 유해가 미국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는 기대도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각)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열린 해외참전용사회(VFW) 대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새롭게 공개된 위성사진은 북한(조선)이 주요 미사일 부지의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는 걸 보여준다”며 “미국은 그 점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미국의소리(VOA)가 보도했다.
앞서 미국의 북한(조선) 전문매체 ‘38노스’는 북이 2주 전부터 미사일 엔진시험장인 서해위성발사장을 해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지난 20일과 22일 촬영된 위성사진을 공개했다. 해당 사진엔 미사일 발사체를 조립할 수 있는 구조물을 해체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북한(조선)의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와 모든 아시아의 번영과 안보, 평화의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고 있다”고 바람을 나타내곤 “김정은 위원장과 훌륭한 만남을 가졌으며,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고 VOA는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북쪽 지역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 송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미국은 한국에 생명을 바친 전우들의 유해가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면서 “빠른 시일 내 전사자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해 미국 땅에 눕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의소리(VOA)는 “북한(조선)의 서해위성발사장 폐기 움직임은 답보 상태에 빠진 미-북간 비핵화 협상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을 전망”이라며 “예정대로 한국전쟁 미군 유해 송환도 이뤄질 경우 비핵화에 대한 미국 내 회의론을 누그러뜨리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VOA “서해위성발사장 해체작업, 북미간 물밑접촉의 결과일 가능성”
VOA는 24일(현지시각)자 ‘뉴스해설’ 꼭지에서 “북이 이 시설(서해위성발사장)을 완전히 해체하고, 아울러 한국전쟁 정전협정일인 27일에 맞춰 미군 유해도 송환한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했던 두 가지 약속을 실행에 옮기는 게 된다”고 의미를 강조하곤 38노스가 이번 조치를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약속을 이행하는 중요한 첫 단계”라고 평가한 점을 부연했다.
그러면서 VOA는 서해위성발사장 해체 작업이 북미간 물밑접촉의 결과일 가능성을 언급했다. VOA는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막후에서 아주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비핵화 진전 상황을 평가한 점을 환기시키곤 “서해발사장 폐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38노스가 북의 발사장 해체 움직임이 이미 2주 전에 시작됐다고 본 점을 거론하곤 “한국 청와대도 미국과의 정보 공유를 통해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이어 VOA는 북의 이번 조치가 종전선언을 염두에 둔 것임을 지적했다. 즉 “북이 서해발사장 해체에 착수한 건 무엇보다 미국과의 핵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며 “이를 통해 종전선언이라는 다음 단계 상응조치를 미국에 요구한 것”이란 얘기다.
미국의 종전선언 검토 가능성에 대해선 “알 수 없다”면서도 “다만, 비핵화의 진전 속도가 미국의 종전선언에 달려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고 중요성은 강조했다. 종전선언은 당초 미국의 대북 안전보장 조치 가운데 최우선으로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달 7일 “싱가포르에서 종전 선언에 서명할 수 있다”고 밝힌 사실을 근거로 댔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이 “미북관계 정상화의 첫 걸음”이자 “가장 쉬운 부분”이라고 말했었다.
미국이 종전선언에 대한 입장을 바꾼 이유에 대해선 “일부에선 북한(조선)이 주장하는 단계적 비핵화를 미국이 사실상 수용키로 한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북이 단계를 세분화해 단계별 안전보장 조치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종전선언을 협상카드로 삼으려 한다는 지적”이라고 분석했다.
미국 관영 매체조차 북이 서해위성발사장 해체에 이어 27일께 미군 유해 송환을 시작할 경우 다음은 미국이 행동에 나설 차례란 분석을 내놓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김동원 기자  ikaros0704@gmail.com


송영무 장관을 향한 기무사의 ‘의문’스러운 반발

송영무 국방부 장관
송영무 국방부 장관ⓒ정의철 기자

송영무 국방부 장관과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간부들 간 벌어진 낯뜨거운 '진실 공방'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앞두고 기무사가 작성한 이른바 '촛불 계엄 문건'에 대한 사후 보고를 둘러싸고 송 장관과 기무사의 주장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특히 국방장관과 대령이 공개적으로 설전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양측의 진실 공방만 부각되는 양상이다. 이 때문에 정작 기무사가 내란 음모를 계획했다는 '기무사 문건 논란'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상 초유의 사태 벌어진 국방위 회의장
국방부장관에 정면으로 맞선 기무사
이석구 기무사령관이 2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석구 기무사령관이 24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사건의 발단은 24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벌어졌다. 이날 회의에는 기무사 간부들이 총출동했다. 이석구 기무사령관, 민병삼 100기무부대장(대령)과 '기무사 계엄 문건' 작성에 관여한 소강원 기무사 참모장과 기우진 기무사 5처장도 직접 출석했다. 소 참모장은 기무사 계엄 문건을 작성할 때 꾸려진 TF팀 팀장을 맡았고, 기 처장은 문건 작성의 실무 책임자를 맡은 당사자다.
이 자리에서 이석구 기무사령관은 송 장관에게 계엄 문건을 보고했을 당시 "이 사안의 위중함을 인식할 정도로 대면보고를 했다"며 "20분 정도 (충분히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 장관은 "5분 정도 보고를 받았고, 지휘 일반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반박했다.
이후 이어진 민병삼 기무부대장의 발언은 진실 공방 논란에 불을 붙였다.
민 부대장은 "군인으로서 명예를 걸고, 양심을 걸고 말한다"며 "7월 9일 장관께서 '위수령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법조계에 문의해보니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계획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한다. 장관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다만 직권 남용에 해당되는지는 검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송 장관이 당시 해당 문건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주장이었다.
이 발언을 들은 송 장관은 "완벽한 거짓말"이라며 "대한민국의 대장까지 마치고 장관하는 사람이 거짓말하겠느냐. 장관을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국방부 수장의 말을 기무사 대령이 면전에서 반박하고, 원색적인 표현까지 동원해 입씨름을 벌이는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되자 발언의 진위에만 모든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장 자유한국당은 송 장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몰아세우며 사퇴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논란은 다음날인 25일 장외전으로까지 번졌다. 기무사는 송 장관이 한 발언의 진위를 입증하기 위한 보고서를 추가로 공개했고, 국방부는 "사실무근"이라고 재반박에 나섰기 때문이다. 같은 날 여야 원내대표들은 기무사 계엄 문건에 대한 특별수사단의 수사 결과가 발표된 뒤 국방위원회와 협의를 거치고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기무사는 왜 항명에 가까운 반발을 감행했나
조직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기무사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와 4.16연대, 민중공동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기무사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시민사회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기무사 해체 등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와 4.16연대, 민중공동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기무사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시민사회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기무사 해체 등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김슬찬 인턴기자
그러나 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이 같은 소동이 정작 사건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입을 모아 강조하고 있다.
기무사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계엄 문건을 작성한 부대로서, 친위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즉, 특별수사단의 수사를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송 장관에게 맞서면서 양심선언을 하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기무사가 항명에 가까울 정도로 국방장관에 반기를 든 이유는 책임 회피로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김광진 국방부 정책자문위원회 자문위원은 25일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기무사는 (계엄령을 검토한 것이) 기무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송 장관 역시 (그렇다고) 이야기해놓고 왜 이제 와서 기무사가 다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덤터기를 씌우느냐며 반발하는 것"이라며 "우리(기무사)한테 칼 대지 말라고 하는 중"이라고 해석했다.
특히 김 자문위원은 기무사 간부들이 국회에 출석한 것 자체가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국방위 회의에 기무사 대령이 출석해 발언한 적 있나. 아주 이례적인 것"이라며 "더욱이 (어제 출석한 기무사 대원들은) 계엄 문건으로 조사 받고 있는 사람인데 이와 관련한 내용을 진술하기 위해 떼로 몰려 왔다는 것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상만 국방부 국방개혁자문위 간사 역시 송 장관의 주장이 진실이냐, 거짓이냐에 대한 문제는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논쟁이 아니라고 힘줘 말했다. 오히려 고강도 기무사 개혁을 준비했던 송 장관을 흔들기 위한 기무사의 공작 중 하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 간사는 같은 날 통화에서 "진실 공방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박 전 대통령의 권력 하에서 기무사가 친위 쿠데타를 모의하려고 했다는 것"이라며 "그 중간에 있던 송 장관의 발언과 판단의 적절성은 논쟁거리가 될 수는 있지만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친위 쿠데타라는 계획안을 짰던 사람이 누구고, 그것을 통해 얻으려고 했던 게 무엇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며 "어제 기무사의 행태는 송 장관을 날리려는 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기무사는 이번 기회에 송 장관을 날리면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국방개혁안을 중단시키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현역 군복을 입은 기무사 대령이 장관의 면전에서 공방을 벌이는 황당무계한 상황을 연출해 송 장관의 리더십을 훼손하려는 것이 목표인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진실 공방 논란의 실체는 기무사가 자신의 조직에 대한 개혁 움직임을 중단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기무사 개혁 방안을 논의 중인 국방부 기무사 개혁위원회 장영달 위원장은 통화에서 "다른 곳도 아니고 군이 국민들 앞에서 자신들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것은 심각하다"며 "지금 기무사는 명령대로 수행했는데, 우리만 죽일놈 취급을 당하는 것은 억울하다는 뜻 아닌가. 그런 부분은 합동수사단에서 밝혀내야 할 문제"라고 조심스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