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5일 목요일

[단독 검증] 최재형의 할아버지 '최병규'는 진짜 독립유공자일까?

 출발부터 이상한 '3대에 걸쳐 형성된 품격 있는 집안’ 신화의 실체

21.08.06 07:08l최종 업데이트 21.08.06 07:08l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로 첫 공식일정을 시작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부인 이소연 여사와 함께 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 현충탑 참배소에 참배를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로 첫 공식일정을 시작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부인 이소연 여사와 함께 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 현충탑 참배소에 참배를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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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통령선거 정국이다. 각 당별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후보가 여론의 주목을 비교적 더 받고 있지만, 예측하기 힘든 변수가 많아 다른 주자들에 대한 관심도 만만치 않다. 그 중 하나가 감사원장직을 임기 중에 내려놓고 국민의힘에 입당한 최재형 예비후보다. 일부 언론에서는 '까미남'(까도 까도 미담만 나오는 남자)이라면서 여러 '미담'을 소개한다. 3대에 걸쳐 형성된 품격 있는 집안이라는 미담도 자주 거론된다.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 최병규와 6.25 한국전쟁의 영웅인 아버지 최영섭을 이은 인물이 감사원장 출신의 최재형이라는 것. 사실이라면 분명 존경할 만한 집안이다.

이제 그 미담을 검증해보고자 한다.

[의문점] 왜 보훈처 공훈록에 '독립유공자 최병규'가 없다
 

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서 최영섭은 자신의 아버지 최병규(1909~2008)에 대해 "아버지는 2002년 10월 13일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지만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장은 받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2002년 10월 13일에 독립유공자 서훈이나 표창을 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해 8·15 광복절을 앞두고 표창한 208명의 독립유공자 중에도 평강 출신의 최병규의 이름은 없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캡쳐 사진)"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평강 출신의 최병규가 없다. 얼마 전 작고한 최재형의 아버지 최영섭(1928~2021)은 자신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서 최영섭은 자신의 아버지 최병규(1909~2008)에 대해 "아버지는 2002년 10월 13일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지만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장은 받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2002년 10월 13일에 독립유공자 서훈이나 표창을 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해 8·15 광복절을 앞두고 표창한 208명의 독립유공자 중에도 평강 출신의 최병규의 이름은 없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캡쳐 사진)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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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작고한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의 아버지 최영섭(1928~2021) 해군 대령은 자신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서 최영섭은 자신의 아버지 최병규(1909~2008)에 대해 "2002년 10월 13일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지만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장은 받지 못했다"고 썼다. 2008년 <강원도민일보>가 낸 최병규의 사망 소식 기사의 제목도 '춘천고 항일운동 주도 최병규옹 별세'였다.

이 정도면 최병규가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은 굳이 검증이 필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의구심이 생긴다.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를 소개하고 있는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평강 출신의 최병규가 없기 때문이다.

최병규의 아들 최영섭은 대통령표창을 받은 날짜까지 책 속에 적어놨다. 하지만, 기자가 국가보훈처에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2002년 10월 13일에 독립유공자 서훈이나 표창을 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해 8.15 광복절을 앞두고 표창한 208명의 독립유공자 중에도 평강 출신의 최병규의 이름은 없다. 이로써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내용과 달리 최소한 대한민국정부가 인정하는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최영섭이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 사실과 다른 내용을 적어놨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다른 주장도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강원도민일보>의 기사에도 "이같은 공로로 국가는 고인에게 표창 수여를 추진했으나 이를 사양하는 등 일제당시 독립운동을 국민의 당연한 도리로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한 대목이 있다. 비록 아들 최영섭의 회고록 내용과도 배치된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3대에 걸쳐 형성된 품격 있는 집안'만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미담이 추가된다.

[아들의 회고록] 최병규 춘천고보 퇴학사건의 전말
 

춘천고보의 맹휴(1926) 최병규가 춘천고보에서 '퇴학처분'을 받은 것은 그해 10월 4일에 시작된 맹휴사건 때문이었다. 춘천고보 2, 3학년생들이 학교당국과 도학무국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교무주임 모리(영어담당)를 배척하는 맹휴를 단행했던 것이다.
▲ 춘천고보의 맹휴(1926) 최병규가 춘천고보에서 "퇴학처분"을 받은 것은 그해 10월 4일에 시작된 맹휴사건 때문이었다. 춘천고보 2, 3학년생들이 학교당국과 도학무국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교무주임 모리(영어담당)를 배척하는 맹휴를 단행했던 것이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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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제기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제 최병규가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하나하나 직접 살펴볼 수밖에 없다.

지난 7월 19일 국민의힘 소속 정경희 의원은 최재형 예비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최재형 전 원장의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춘천고보 3학년 재학 중 순종황제가 승하하자 상장(喪章) 달기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했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정경희 의원의 주장은 최병규의 아들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내용과 비교해 보더라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춘천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6년 4월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하자 갑조 조장 이영길과 같이 전교 학생들에게 '순종서거애도 상장(喪章) 달기' 운동을 주도했다. 2주 동안 상장을 단 이 운동은 일본경찰과 일본인 교사 삼광미(森廣美) 교무주임의 추궁으로 사건이 확대되었다. 아버지는 불온학생으로 낙인 찍혀 일본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지만 좌등원장(佐藤元藏) 교장의 수습으로 일단락되었다.

 
순종 서거 당시 순종에 대해 애도를 표하는 것은 불온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대한제국을 일제에 넘긴 순종의 죽음에 일제는 적극 나서서 조의를 표했고, 조선인들이 조의를 표하는 행위 역시 막지 않았다. 다만 그 정도와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최영섭의 회고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시 춘천고보 학생들은 순종의 서거에 대한 '봉도'를 위한 휴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실제로 춘천의 사립 정명여학교는 학교 차원에서 휴교를 했다. 그러나 춘천고보는 당국의 지침이 없다는 이유로 휴교를 단행하지 않았다. 이에 춘천고보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일제히 등교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휴교를 하루만 했다는 언론보도(<매일신보>)도 있고, 여러 날 했다는 언론보도(<시대일보>)도 있어 그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3학년 을조 조장을 맡고 있던 최병규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을 받아 추궁을 당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퇴학으로 이어질 사안은 아니었다. 정작 일제가 노심초사한 것은 순종의 서거를 계기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불온한 언동'이었다. 일제는 7년 전 고종의 인산을 계기로 일어났던 3.1운동도 경험한 바 있었다. 실제로 순종 서거 이틀 후인 4월 28일에는 '송학선 의사의 의거'가 있었고, 인산일에 맞춰서는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박두종, 이천진 등의 학생들은 당연히 퇴학은 물론 혹독한 고문과 함께 감옥살이까지 감내해야 했다.


6월 10일 전후로 춘천에서도 천도교교구장 허계훈의 집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긴장도 있었지만, 이영길과 최병규 등 춘천고보의 3학년 조장은 1926년 당시 학생들의 슬픔과 분노를 6.10 만세운동과 같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낼 정도의 의지와 능력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병규가 춘천고보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은 그해 10월 4일에 시작된 '맹휴사건' 때문이었다. 춘천고보 2, 3학년생들이 학교당국과 도학무국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교무주임 모리(영어담당)를 배척하는 맹휴를 단행했던 것이다.

모리는 수업시간에 술을 먹고 교실에 들어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주정을 한다든지, 운동장 청소를 제대로 못했다고 돌로 학생의 머리를 내리치기도 하는 수준 미달의 교사였다. 그런데도 학교당국은 최갑도, 최병규 등 4명의 주동자를 맹휴시작 다음날 새벽에 전광석화와 같이 '퇴학 처분' 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고, 이는 학생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맹휴가 1학년으로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측에 설득된 학부형이 나서서 학생들의 등교를 설득하면서 춘천고보 맹휴사건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중단됐다.

춘천고보 맹휴사건에 대해 최영섭은 회고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는 1926년 10월 4일을 기해 한국인 학생들을 멸시하고 구타, 폭언을 일삼는 일본인 교무주임 삼광미 교사 배척을 위한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일본경찰이 아버지를 체포하려 하자 교장이 사태수습에 나섰다. (중략) 결국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
 
최영섭은 아버지 최병규를 비롯한 4명의 학생이 퇴학당한 춘천고보 맹휴사건의 실체를 좀 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춘천고보 맹휴사건의 기본 성격은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해볼 때 '한국인 학생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배척운동'이라기보다는 '학생을 구타하는 등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추지 못한 모리 교사 배척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당시 언론은 '조선인 차별의 언행'을 하는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는 다른 학교의 맹휴를 보도할 때는 "일본인 교사 배척"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춘천고보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맹휴에 나섰던 사건은 3년 후인 1929년에 있었다. 그해 5월 춘천고보 학생들은 "조선역사 조선문법 조선어 시간을 연장할 것. 독서의 자유를 줄 것. 학우회를 일체 생도에게 위임할 것" 등을 내걸고 맹휴를 추진했다.

그런데 사전에 발각되면서 주동학생 6명이 무기정학을 당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춘천고보 학생들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호응해 끝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주동학생 6명이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때도 학교당국은 이들에 대해 출교조치를 단행했다. 춘천고보 학생들은 1938년에도 독립운동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으로 이연호 등 137명이 검거되고 36명이 송청되는 등 큰 수난을 당했다.

[증조부 최승현] 최병규가 일본당국으로부터 '3년 거주제한형'을 당했다고?
  
의 평강분국장을 지냈고, 1918년 3월부터는 유진면장과 고삽면장 등을 지냈다. 최승현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면장을 계속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5년에도 유진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승현은 1921년에는 강원도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 평강지회 지회장도 맡았다.(매일신보, 1918. 3. 7 기사(왼쪽)와 1921. 9. 16 기사) ."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최병규의 아버지 최승현의 유진면장과 유도천면회 평강지회장 추임을 알리는 매일신보 기사  1904년부터 1906년까지 평강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일했던 최승현은 경술국치 이후 어느 시점부터 1918년 3월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평강분국장을 지냈고, 1918년 3월부터는 유진면장과 고삽면장 등을 지냈다. 최승현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면장을 계속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5년에도 유진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승현은 1921년에는 강원도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 평강지회 지회장도 맡았다.(매일신보, 1918. 3. 7 기사(왼쪽)와 1921. 9. 16 기사) .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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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섭이 퇴학당한 아버지 최병규에 대해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고 한 대목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구속돼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닌데, 일본당국이 어떻게 3년 거주제한을 내렸다는 것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3년간의 거주제한형'이라고 표현해 재판 결과로 그러한 판결을 받은 듯이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런 죄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최병규가 재판받기는커녕 구속된 사실조차 없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를 일본당국이 아니라 최병규의 부모가 취한 조치로 받아들이면 말이 된다. 춘천고보에 유학 보낸 아들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조치를 당했으니 아버지로서는 귀향과 함께 '근신'을 요구하면서 '3년 거주제한' 조치를 얼마든지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최병규의 아버지 최승현(1887~1953)이 어떤 인물인가 확인해보면 이러한 가설이 보다 설득력을 갖게 된다. 최승현은 최재형 예비후보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1904년부터 1906년까지 평강 공립소학교 부교원으로 일했던 최승현은 경술국치 이후 어느 시점부터 1918년 3월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평강분국장을 지냈고, 1918년 3월부터는 유진면장과 고삽면장 등을 지냈다. 최승현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면장을 계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935년에도 유진면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승현은 1921년에는 강원도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 평강지회 지회장도 맡았다. 유도천명회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통치'에 힘입어 조직된 관변단체로 악화된 지방 민심을 수습하고 총독부의 시정방침을 선전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조직이었다.

강원도 당국의 적극 지원과 관료들이 함께 참여했던 유도천명회는 유교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데 앞장설 목적으로 만들어진 서울의 경학원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최승현은 평강군에서 1943년에 펴낸 <평강군지>의 편집자가 돼 군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도 평강군 당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최승현이었다면 춘천고보에서 퇴학당한 아들 최병규에 대해 '3년 거주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울러 최승현의 이력을 통해 최영섭이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왜 할아버지를 철저히 배제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최병규의 야심] 거주제한에서 풀려난 이후 그가 했던 일
  
최병규의 강원도회 의원 출마 소식을 알린 매일신보 기사(1937. 5. 8) 유진면 면협의원을 하고 있던 최병규는 1937년에는 평강군에서 1명을 뽑는 강원도회 의원 선거에도 도전한다. 이때 최병규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는데, 강원도회 의원 출마자 72명 중 양구에 출마한 정현수와 함께 가장 어린 나이였다.
▲ 최병규의 강원도회 의원 출마 소식을 알린 매일신보 기사(1937. 5. 8) 유진면 면협의원을 하고 있던 최병규는 1937년에는 평강군에서 1명을 뽑는 강원도회 의원 선거에도 도전한다. 이때 최병규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는데, 강원도회 의원 출마자 72명 중 양구에 출마한 정현수와 함께 가장 어린 나이였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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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규가 "3년의 근신이 끝난 뒤 처자식과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글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최병규가 만주로 간 것은 그로부터도 9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렇다면 9년 동안 최병규는 무엇을 했을까? 이에 대해 최영섭은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1926년 평강군 고삽면 사하리 독골로 귀향한 아버지는 금족령에 처해 있던 중, 필자가 태어난 1928년부터 1942년까지 평강군 유진면 사창리 주빈동(붉은봉) 일대에 약 200만 평의 산야에 약 40만 주의 낙엽송을 심었다. 붉은봉에 가택을 마련한 아버지는 1931년 식구들을 최병렬 큰아버지 가족으로부터 분가해서 평강군 유진면 사창리 주빈동 77번지로 이사했다.
 
그런데 최병규는 이 기간 나무만 심고 있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중흥시조를 꿈꾼 최병규의 '야망'이 컸다. 최병규는 유진면으로 이사 온 직후인 1935년에 유진면 면협의원에 이름을 올렸다. 통상 지역의 유지들이 맞는 자리임을 감안할 때 불과 스물일곱의 나이에 면협의원이 됐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놀라운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같은 면협의원 선거에서 최병규의 형 최병렬도 고삽면 면협의원에 당선됐다. 이로써 아버지 최승현은 유진면 면장, 큰 아들 최병렬은 고삽면 면협의원, 둘째 아들 최병규는 유진면 면협의원을 동시에 하는 평강군의 유력 집안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최병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듯하다. 1937년 평강군에서 1명을 뽑는 강원도회 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이때 최병규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는데, 강원도회 의원 출마자 72명 중 양구에 출마한 정현수와 함께 가장 어린 나이였다.

면협의원이야 말단 기관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강원도회 의원에 도전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문제는 도전했다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최병규가 도전했던 강원도회는 3.1운동을 경험한 일제가 조선인의 독립요구를 무마하고자 '자치'를 운운하면서 1920년부터 만들었던 도 단위 자문기관이었다.

말은 도민의 의사를 반영한다고 하지만, 최병규가 강원도회의원이 되겠다고 출마했던 1937년 당시 강원도 인구 약 160만 명 중 선거에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유권자는 1790명에 불과했다. 31명의 의원 정수 중 21명이 민선의원, 10명이 관선의원이었다. 관선의원은 대부분 일본인이 차지했다. 민의를 수렴한다는 것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다.

강원도회 의원의 지위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후 만들어진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 "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제4조 8호)로 친일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가능했던 자리기도 했다. 이 기간 최병규는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여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1938. 6. 30 <매일신보>)하기도 한다.
 
최병규의 국방헌금 '미담' 기사(매일신보, 1938. 6. 30) 최병규는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여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1938. 6. 30 매일신보)하기도 한다. 회갑 축연비를 알뜰히 쓰고 돈을 남겨 국방헌금에 헌납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일제에게는 '미담 중의 미담'이었다.
▲ 최병규의 국방헌금 "미담" 기사(매일신보, 1938. 6. 30) 최병규는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여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1938. 6. 30 매일신보)하기도 한다. 회갑 축연비를 알뜰히 쓰고 돈을 남겨 국방헌금에 헌납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일제에게는 "미담 중의 미담"이었다.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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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클라이막스] 최병규는 정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을까?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은 아버지 최병규의 일제 말기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38년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목단강성 해림가(海林街)로 건너갔고, 1940년에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을 해림으로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7년간 해림에서 살면서 해림가 부가장(海林街 副街長)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와 전달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해방되기 전 1944년 12월 가족들을 데리고 할아버지가 사시는 평강군 유진면 후평리로 돌아왔다.
 
1920년대 춘천고보 시절의 활동만으로 독립유공자라고 하기에는 좀 낯뜨거울 수 있지만, 1938년 이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에 나섰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춘천고보 시절의 활동도 비록 부족했지만 만주에서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의미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도 의구심이 발생한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무려 7년 동안 벌인 선친의 '독립운동기'를 이렇게 한두 줄의 설명으로 그치고 있으니 말이다. 앞에서 살펴본 1926년의 춘천고보 시절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당연히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먼저 1938년에 최병규가 목단강성 해림가로 건너간 이유가 '과연 독립운동을 위해서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아버지의 3년 거주제한 조치도 감내한 후 강원도 평강에서 면협의원을 하고, 도회 의원에도 도전하고, 아버지 회갑연을 알뜰히 마치고 돈을 남겨 일제에 국방헌금까지 바쳤던 인물이 갑자기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면 납득할 만한 이유나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해림에서 살면서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았다는 대목에 이르면 의문은 더 증폭된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1932년에 오족협화(일본인, 조선인, 한족, 만주족, 몽골족)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괴뢰 '만주국'을 세워 만주 일대를 장악했다.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조·중연합군을 형성해 대항하고 있었지만, 주요지역은 이미 다 일제의 치지였다. 목단강성 영안현 해림가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따라서 해림가 가장이나 부가장이라는 자리는 만주국 행정체계의 말단 조직을 의미한다. 조선거류민단장 역시 일제가 조선인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제민간조직답게 특별한 조선인만이 맡을 수 있는 자리였다. 이 두 기관에서 부가장과 단장을 맡았다는 최병규는 그 자체로 최소한 일제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이 당시 하는 일은 국방헌금이나 애국기 헌납금을 잘 걷는 일, 방공훈련에 주민들 잘 동원하는 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창구역할을 잘하는 일 등이었다. 
 
해림에서 애국기2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헌납했다는 매일신보 기사(1945. 3. 29)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이 당시 하는 일은 국방헌금이나 애국기 헌납금을 잘 걷는 일, 방공훈련에 주민들 잘 동원하는 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창구역할을 잘하는 일 등이었다.
▲ 해림에서 애국기2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헌납했다는 매일신보 기사(1945. 3. 29)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이 당시 하는 일은 국방헌금이나 애국기 헌납금을 잘 걷는 일, 방공훈련에 주민들 잘 동원하는 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창구역할을 잘하는 일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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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림가 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는 것은 독립운동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정반대의 근거 자료를 제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다른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런 직책을 맡은 이유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적진에 깊숙이 침투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지위를 이용해서 독립자금 확보를 누구로부터 얼마나 '은밀하게' 했는지, 그렇게 마련한 독립자금을 누구에게 '은밀히'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최병규의 행적에 쏠린 의혹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의혹] 최병규 만주 진출의 진짜 목적

기자는 이상의 분석을 통해 최병규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간 게 아니라, 만주 개척을 위한 일제의 정책에 호응해서 만주로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추가로 제기하고자 한다.

일제는 1937년 목단강성을 새로 만들면서 대대적인 이민 정책을 추진했다. 최병규가 만주로 건너갔다는 1938년에도 일제는 넓은 만주에 "자유이민 문호를 광개"한다면서 "영농 목적의 만주이민 취급 요강을 발표"했다. '중앙개척협회'도 만들고 도별로 '조선이주협회'라는 민간단체도 만들어 이주희망자를 모집했다.
 
개척결혼을 위해 해림으로 가나 전남지역 여성들 이야기(매일신보, 1943. 9. 15)  일제는 1937년 목단강성을 새로 만들면서 대대적인 이민 정책을 추진했다. 최병규가 만주로 건너갔다는 1938년에도 일제는 넓은 만주에 "자유이민 문호를 광개"한다면서 "영농 목적의 만주이민 취급 요강을 발표"했다. '중앙개척협회'도 만들고 도별로 '조선이주협회'라는 민간단체도 만들어 이주희망자를 모집했다.
▲ 개척결혼을 위해 해림으로 가나 전남지역 여성들 이야기(매일신보, 1943. 9. 15)  일제는 1937년 목단강성을 새로 만들면서 대대적인 이민 정책을 추진했다. 최병규가 만주로 건너갔다는 1938년에도 일제는 넓은 만주에 "자유이민 문호를 광개"한다면서 "영농 목적의 만주이민 취급 요강을 발표"했다. "중앙개척협회"도 만들고 도별로 "조선이주협회"라는 민간단체도 만들어 이주희망자를 모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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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최승현은 면장을 오랫동안 지내면서 일제의 식민정책에 충실히 복무해왔고, 본인은 고향 평강군 유진면에서 면협의원까지 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일제의 정책은 최병규의 구미를 당겼을 가능성이 있다. 더군다나 아버지 최승현은 1917년 <매일신보>가 주최한 '만주시찰단(단장 조중응)'의 일원으로 만주를 방문해본 경험이 있었다. 최병규도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만주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최병규가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과 조합할 때 갖는 어려움과 달리 강원 지역에서 모은 만주 개척단원들을 이끌고 만주로 간다는 내용과의 조합은 비교적 자연스럽다. 이럴 때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지 1년을 경과한 1939년에도 유진면 협의원에 또다시 선출됐다는 <매일신보>의 보도 역시 의문이 풀리게 되고, 왜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지 않고 1944년 12월에 귀향했을까 하는 의문도 풀 수 있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최병규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최병규는 독립유공자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친일 의혹이 다분한 인물이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3대에 걸쳐 형성된 품격있는 집안'이라는 최재형 예비후보 집안에 대한 '미담 신화'는 출발부터 당사자들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확인된다.

* <오마이뉴스>는 지난 3일부터 최재형 예비후보 측에 표창 진위 여부와 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 등 반론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응답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큰사진보기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4일 오후 경기도 파주 미라클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했다.
▲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4일 오후 경기도 파주 미라클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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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설국열차'의 비극...'인격 산재'도 막아야 한다"

 [인터뷰]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사건 자체는 물론 이후 논란도 사람들의 입길에 올랐다. 서울대 관계자 일부는 갑질 행위자로 지목된 관리자의 '선한 의도'를 강조하며 '갑질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관리자의 행동에서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청소노동자의 이야기를 보도하며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싣는 언론도 있었다.


지난달 30일, 고용노동부는 '관리자가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에게 행한 필기시험과 복장 점검 및 품평은 업무와 무관하며 직장 내 괴롭힘이 맞다'고 판단하며 유족과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이어 지난 2일 오세정 서울대 총장은 사건 발생 38일만에 고인과 유족에게 공식 사과했다.


 

지난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만나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과 이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의견, 그리고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한국사회와 서울대에 필요한 변화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지난달 15일 더불어민주당 산재예방TF 구성원 자격으로 동료 의원과 함께 서울대를 방문해 유족과 청소노동자를 만나고, 이어 지난달 22일 관련 토론회의 사회를 보는 등 여러 활동을 하며 사건을 가까이에서 본 의원이다.


 

이 의원은 "필기시험, 복장 품평 등에 모욕감을 느끼고 코로나 이후 높아진 노동강도로 힘들어한 청소노동자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서울대 당국자들의 태도에서 섬뜩함을 느꼈다"며 "이번 사건을 둘러싼 그들의 태도는 국민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들이 당한 모욕을 보며 "입시나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면 평생 멸시받는 삶을 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청년들이 떠올랐다"고 하기도 했다.


 

재발 방지를 위해 한국사회가 해야 할 일로는 청소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갑질 방지 교육 강화 등을 언급했다. 서울대가 할 일로는 청소노동자 등 기관장 발령 직원과 총장 발령 직원을 나누고 이들을 다르게 대우하는 차별적 고용구조의 철폐를 꼽았다.


 

프레시안 :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이후 여러 활동을 했다. 더불어민주당 산재예방TF 구성원 자격으로 서울대를 방문했고 관련 토론회 사회를 보기도 했다. 우선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이면서 산재예방TF에서 활동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 어떤 계기로 산재예방TF 활동을 시작했나?


 

이탄희 : 산재와는 인연이 좀 있다. 2년 전 노회찬 정의상을 수상했다. 그때 김용균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인권과 평등상을 받았다. 처음 뵙고 인사를 했고 김용균 씨 사연을 들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때 받은 상금을 유가족 모임에 쓰시라고 다 기부했다. 그러고 나서 산재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지난해 6월에는 산재 솜방망이 처벌을 막기 위한 '양형개혁법' 발의도 했다.


 

이후 교육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보니 산재 사망이 교육 이슈와도 연관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의역 김군, 태안화력 김용균 씨, 평택항 이선호 씨 같은 산재 피해자 중에는 교육 경쟁에서 결과적으로 소외된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이 비정규직이 되고 위험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다 목이 잘리고 머리가 터져서 돌아가신다. 교육위에서도 이런 문제의식과 관련한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최근 이선호 씨 사건을 접하고 다시 산재 문제를 다뤄봐야겠다 생각해 산재예방TF 일원으로 참여했다.


 

프레시안 :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을 접하고 현장을 찾기 전에는 어떤 생각을 했나?


이탄희 : 시험을 보게 하고 점수를 매기고 복장을 통제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관리자가 청소노동자에 대해 경제적인 통제를 넘어 인격적 통제까지 하려고 했다고 느꼈다. 청소노동자는 굉장히 열악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사용자나 관리자가 조금만 함부로 대해도 굉장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인격적 통제까지 받을 때 받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건을 접했을 때 '청소노동자들이 굉장히 큰 압박감을 느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서울대에 간 날, '설국열차'라는 비유를 썼다. 서울대 안에서 머리칸에 있는 사람과 꼬리칸에 있는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당일 대화나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탄희 : 그날 서울대 당국자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고인의 동료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양쪽이 속한 세상의 풍경이 너무 달랐다. 특히나 당국자들은 설국열차 머릿칸에 사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청소노동자들이 있는 공간과 전혀 다른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청소노동자가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번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청소노동자들이 사전에 고지도 없고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시험을 보게 되고, 거기서 0점을 맞고 그 시험지를 받아들고 이러면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다. 드레스코드에 대해서도 지시한 사람들은 그냥 '예쁘게 입고 오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누가 보기에 예쁜 걸까. 지시한 사람이 보기에 '예쁘게'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듣는 청소노동자들은 고인이 했다는 말처럼 '최저시급을 받는데 조금이라도 돈을 모아서 정장을 사야 하는 거 아니야'하는 압박감을 느낀다.


 

또, 코로나로 업무량이 폭증했다. 기숙사 측은 늘어난 업무량을 어떻게 할지 청소노동자와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 검열'을 한다고 하면 청소노동자들은 '사람 늘릴 생각은 없으니 내가 이 일을 다 감당하지 않으면 해고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서울대 당국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청소노동자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설국열차의 머릿칸, 꼬리칸이 갈라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레시안 : 사건이 벌어진 이후 서울대 당국자나 청소노동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순간이나 말을 하나만 더 꼽는다면 어떤 것인가?


 

이탄희 : 좀 의외일 수 있는데, 고인의 남편을 만나 처음 들은 이야기가 ‘저희 아버지도 서울대 법대 10회 나왔어요’였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처음에 서울대에 취업이 됐다고 해 너무 뿌듯했다고 했다. 개인적 인연도 있으니 더 그랬다는 거다. 또 서울대가 한국 사회에서 갖고 있는 상징적인 위치가 있으니까 내가 여기 구성원이 된다는 느낌에 뿌듯했다는 거다.


그런데 1년 반 정도 지난 시점에 보니, 아내는 죽었고, 남은 건 배신감과 모욕감뿐이라고 했다.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


▲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서울대 당국자들의 태도, 국민 기억에 오래 남을 것"


 

프레시안 :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먼저 필기시험이나 드레스코드 지정, 품평과 관련해 이를 지시한 관리자나 서울대 일부 관계자의 발언을 보면, 관리자의 의도를 강조했다. 필기시험은 직무교육의 일환이고 드레스코드를 지정하고 감점 발언을 한 것은 농담이라는 식이다. 관리자의 의도를 근거로 '갑질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탄희 : 필기시험이나 드레스코드는 이미 고용노동부 조사를 통해 갑질로 인정된 일이다. 서울대 총장도 조사 결과를 수용했다. 지금은 그런 변명에 전혀 타당성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굳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서울대 당국자들이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용자 측의 입장에만 공감하는 듯 한 태도를 보인 게 결국 서울대를 향한 신뢰에 굉장히 크게 악영향을 미쳤다. 그게 국민들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거다.


프레시안 : 언론에 관리자의 조치에서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했다. 고인이 시험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모욕감을 느꼈다는 증언이 나오는 가운데 엇갈리는 증언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이를 '갑질이 없었다'는 근거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이탄희 : 저는 굉장히 인위적인 갈라치기라고 느꼈다. 고인이 시험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도 사건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제가 청소노동자들과 두루두루 이야기할 때 다들 시험에서 모욕감을 느꼈다고 표현했다. '한번도 예고한 적도 없고 동의를 구한 적도 없고 억지로 시험을 보게 했다'는 거였다. 어떤 분은 '수세미 갖고 곰팡이 닦고 화장실 청소하고 손 마디마디가 아픈데 연필 잡고 글자를 쓰라고 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웠다'고 이야기했다.
 


이게 청소노동자들이 느꼈던 모욕감의 본질인데 시험에서 1등을 했는지 꼴등을 했는지가 뭐가 중요한가. 1등 했다고 모욕감을 안 느꼈겠나. 고인도 1등을 했지만 그날 밤과 다음날 아침 주변 사람에게 '너무너무 불편하고 힘들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1등을 했으니 고인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누구였을까. 시험을 낸 사람의 시각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다.


 

시험을 낸 사람의 시각에서 청소노동자의 시각이 갈리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일부 언론이 받아쓰면서 청소노동자 사이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것 같아서 그 부분은 좀 악의적이라고 느꼈다.


 

프레시안 : 시험과 관련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 한국사회에 평가 도구 혹은 좋은 일자리 등 과실을 분배하는 장치로서 시험이 갖는 위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일이 터졌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도 더 크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이탄희 : 동의한다. 시험만능주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한국의 평범한 시민 사이에 널리 확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이번 사건에서 국민들의 분노로 표출됐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한 번씩 성찰을 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시험은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아주 이례적인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특히나 객관식 시험이나 필기시험은 사실상 단기적인 암기력을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무궁무진한 능력 중 백분의 일, 천분의 일밖에 안 되는 작은 걸 심사하는 거다. 그걸 갖고 사람의 전체적인 능력을 판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서울대 당국자 사이에서 노조에 대한 혐오적 혹은 적대적 발언도 나왔다. '노조가 중간관리자 갑질 프레임을 짜고 일을 키웠다'는 식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탄희 : 노조에 대해 여러 관점이 있는 것 같다. 그 중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속에서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자들이 노조에 대해 느끼는 서운함, 배신감에 대해서는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지적했지만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확립해야 하고 이를 확립하기 위해 대기업 정규직이 지금까지보다는 협조적인 태도를 훨씬 더 보여야 한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사회적 약자들이 사용자와 대척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연대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노조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노조의 그런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면 절대 안 된다. 그걸 부정하면 사회적 약자는 고립되고 혼자 남는다. 자기 권리를 주장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혼자서는 내 요구가 부당한지 정당한지조차 확신하기 어렵다. 이러면 '힘없는 사람들은 맞서 싸우지도 말고 앉아서 죽어라'고 이야기하는 사회가 돼버린다. 


노조와 사회적 약자 사이를 갈라치는 형태의 노조에 대한 혐오적이거나 적대적인 시각은 매우 위험하다.


"코로나 이후 쓰레기 양 네 배로 늘었지만 인력 충원 없었다"
 


프레시안 : 고인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스트레스와 과로에 의해 생길 수 있는 병이다. 갑질이나 이를 둘러싼 서울대 당국자의 발언 뿐 아니라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의 일상적인 노동조건 역시 이번 사건에서 중요하게 들여다봐야 할 대목이다. 직접 가서 들은 청소노동자들의 노동강도는 어땠나?


 

이탄희 : 코로나 이후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들이 거의 살인적인 노동량을 소화했다. 고인은 2019년 말 취업했다. 2020년 서울대 기숙사에서는 2019년에 비해 거의 두 배 정도 쓰레기가 배출됐다. 2021년에는 상반기에만 2020년에 배출된 것과 맞먹는 양의 쓰레기가 배출됐다. 고인이 취업할 때에 대비해 올해 서울대 기숙사 쓰레기양이 네 배가 됐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동안 인력 충원이 안 됐다.


 

고인이 일하던 건물은 특히 노동여건이 열악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쓰레기봉투를 양손으로 들고 계단에서 끌며 오르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그 봉투가 100리터 봉투였다. 이걸 '골병 봉투'라고 부른다. 청소노동자 근골격계 질환의 원인이 된다고 해 공공기관에서는 사용이 금지됐다. 그런데 서울대는 무감각하게 이 골병 봉투를 쓰고 있었다.


쓰레기 양이 원래보다 네 배로 늘었는데 100리터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걸 처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프레시안 : '청소 검열'도 고인의 노동강도를 강화한 원인의 하나로 지목된다. 기숙사 측에서는 "안전관리팀장이 업무 지시를 하고 나서 청소상태가 좋아졌다고 해 '청소 검열'이 아닌 '청소 점검'을 했다"고 해명했다. 업무 점검은 관리자의 권한이라는 시각도 있다. 고용노동부도 이 건에 대해서는 갑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탄희 : 일단 사건의 사실관계를 보면, 고인이 토요일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수요일에 기숙사 측이 '청소 검열'을 한다고 고지했다. 고지를 받은 고인이 목요일과 금요일 극도의 과로를 했다. 그래도 노동량을 다 소화 못해서 토요일에 나와서 일을 하다 중간에 휴게실에 갔고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 


이 사안의 경과를 보면 '청소 검열'이 고인에게 굉장히 큰 압박감으로 작용했고 이것이 사망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청소 검열'을 갑질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과로사를 하게 만드는 노동조건이 정당한가'라는 면에서 노사관계나 근로조건 관점으로 살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 더불어민주당 산업재해 예방 태스크포스(TF)의 이해식, 장철민, 이탄희 의원이 15일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사건과 관련해 기숙사인 관악학생생활관을 현장 방문하고 있다. 사진은 청소노동자로 근무하다 지난달 26일 숨진 50대 여성이 생활하던 휴게공간을 살펴보는 이탄희 의원. ⓒ연합뉴스

"사용자에게는 갑질 방지 교육, 노동자에게는 법적 보호 장치 고지 필요"


 

프레시안 : 지난 2일 노동부 조사 결과에 대해 페이스북에 '근본적인 문제에는 근접하지 못했다'고 썼다.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한국사회 전반의 청소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할 것 같다. 청소노동자에 대한 갑질이나 이들의 노동강도에 대한 관리자의 무관심이 서울대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이와 관련해 노동부 조사에서 어떤 점이 아쉬웠나?


 

이탄희 : 구조적인 문제를 살펴봐야할 것 같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사관계 면에서 청소노동자가 극도로 취약한 위치에 있다. '삼중차별을 받는 약자'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바닥 중에 바닥 중에 바닥이라고 표현했다. 풀어서 말하면 간접노동이고, 중고령 노동이고, 그 중에서도 여성 노동이다. 극도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청소 노동자의 지위를 어떻게 격상할 것인가.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노동부 조사에서는 이를 논의하기 위한 단서를 발견하거나 제공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이번 일이 관리자가 악마여서 벌어진 일은 아닌 것 같다. 본인이 절대 강자의 위치에 있는데 자기가 강자라는 걸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굳이 미루어 짐작하지 않은 데서 이 문제가 생겼다. 그런데 (강자가 약자의 처지를) 이렇게 미루어 짐작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행태는 서울대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 다 벌어지는 일이다. 강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직시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구조를 만들기 위한 단초도 노동부 조사에서는 제시되지 않았다.


프레시안 : 이번 사건과 같은 비극을 막으려면 한국사회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이탄희 : 역시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원론적인 면에서 '청소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도 동등한 인격이다. 경제적 역할이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이 아니다'라는 걸 한국사회가 전반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사용자가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본인이 절대 강자고 갑이라는 걸 명확하게 직시해야 한다. 중소기업 사장이나 중간 관리자라면 '나도 전 사회적으로 보면 을인데 내가 무슨 강자냐'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 청소 노동자는 훨씬 더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에서는 본인들이 갑이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돌을 던져도 상대방은 맞아 죽을 수가 있다. 이에 대한 자발적 직시가 어렵다면 강제라도 직시할 수 있도록 소통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프레시안 : 언급한 변화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거나 구상 중인 정책이 있나? 


이탄희 : 사용자를 교육하고 노동자에게 직장 내 괴롭힘과 관련한 보호수단을 고지해 둘 사이에 상대적으로 평등한 의사소통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사용자에게는 갑질 방지 교육, 인권 교육 등 노사 관계에서 본인들이 절대적 강자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게 해야 할 것 같다.


 

노동자에게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상의 노동자 보호 절차를 제대로 고지해야 한다. 현행 법에서도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예방, 대응 규정'을 마련하게 했지만, 이를 노동자에게 의무적으로 고지하게 하지는 않고 있다. 이걸 사용자가 의무적으로 고지하게 해야 한다.


 

"서울대의 차별적 고용구조, 청소노동자 비극에 일조했다"


 

프레시안 : 서울대의 특징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일반적으로는 비정규직이 산재 위협에 더 취약하다. 그런데 고인을 비롯한 서울대 청소노동자 다수는 2018년 직접고용됐다. 그런데도 산재 사망이 일어났고 갑질과 높은 노동강도가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2019년에도 한 청소노동자가 열악한 휴게실에서 숨졌다. 서울대에서 청소노동자들이 직접고용 이후에도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이탄희 : 서울대에는 여전히 차별적인 고용구조가 있다. (직접고용 직원 중에도) 서울대 법인의 직원으로서 총장이 직접 발령을 내는 직원이 있고, 기관장이 발령을 내는 직원이 있다.


 

총장 발령 직원의 인건비는 법인 예산에서 인건비로 잡힌다. 그런데 기관장 발령 직원 인건비는 법인 예산에 인건비로 잡히지 않는다. 법인 예산에는 각 기관의 운영비가 잡히고, 이 운영비에서 각 기관이 기관장 발령 직원의 급여를 지급한다. 서울대 법인 전체를 총괄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기관장 발령 직원 인건비는 인건비가 아니라 기관 운영비 안에 섞인 작은 비용으로 인식된다.
 


이런 구조 때문에 서울대에서는 원하청 구조에서 발생하는 것과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원하청 구조에서 원청은 하청업체 직원의 인건비에 신경쓰지 않는다. 도급비를 주고 끝이다. 원청이 도급비를 줄이면 하청업체는 줄어든 도급비에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마른 걸레를 쥐어짜는 식으로 알아서 인건비를 낮춘다. 마찬가지로 서울대 법인도 기관장 발령 직원 인건비는 신경쓰지 않는다. 각 기관의 예산에 대해서는 원청이 도급비를 다룰 때처럼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전체 규모를 어떻게 줄일까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한다. 


서울대에서 고인과 같은 기관장 발령 직원에 대해서는 업무량이 늘어도 새로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인건비 지출을 늘릴 수 있는 구조적인 토대가 없다. 이런 차별적인 고용구조가 비극적인 사건에 일조했다. 


프레시안 : 서울대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이탄희 : 총장 발령 직원과 기관장 발령 직원 사이의 차별 철폐가 급선무다. 노조도 요구하고 있지만 이번 사건의 조사나 노동조건 등을 두고 학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협의체 구성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스스로 이런 일을 자발적으로 하지 못하면, 그때는 마지막 수단으로 외부적인 감시 감독이 필요하다. 서울대가 법인화된 지 10년이 넘었다. 그 동안 한 번도 교육부 종합감사를 받지 않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서울대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상징성 있는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스스로 어느 정도 수준의 윤리적인 경영, 윤리적인 학교 운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사회적 믿음도 조금은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믿음이 이번 사건으로 무너지게 되면 종합감사를 실시할 필요성이 강해진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이번 사건을 통해 본 중대재해법 시행령 제정안,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문제


 

프레시안 : 산재 사망, 갑질과 관련해 이미 있는 법과 관련한 질문을 하고 싶다. 지난해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됐지만,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 유예,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 등에 대한 비판이 있다. 정부가 마련한 시행령 제정안의 법 적용 대상에서 과로사와 연관이 깊은 뇌심혈관계 질환이 제외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탄희 :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와 50인 미만 사업장 적용 유예에 대해 저는 사업주에 대한 지원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 재정적인 지원이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 지원책이 마련되면 적용 제외나 유예의 정당성도 그만큼 약해진다. 사업주의 거부감도 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경제적인 지원책 마련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면 좋겠다.


 

과로사와 관련해서는 뇌심혈관계 질환을 시행령으로 (중대재해에서) 배제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포함해야 한다. 단, 한국 산재 실무상 산재를 조금씩 더 인정하는 추세이기도 하니 (뇌심혈관계 질환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에는 사업주가 쉽게 면책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대해서도 조사와 보호 조치의 주체가 사용자라는 점을 두고 실효성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탄희 :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의 문제점, 허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원래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생겼을 때 사용자가 갑질 행위자와 피해자, 어느 쪽에도 몰입하지 않고 제3자 또는 중립자로서 사건을 조사하고 개선책을 내고, 피해가 확인되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주체다. 그런데 이번 사건처럼 사용자가 갑질 행위자 쪽에만 과몰입되어 변호인인 것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어쨌든 법적으로는 피해자가 필요하면 관할 노동지청에 신고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관할 노동지청이 직권으로 조사할 수 있게도 되어 있다. 서울대에 대해서도 관악지청을 통해 노동부가 관여했고, 그 결과 갑질이 인정됐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잘 해결된 사안이다.
 


단, 이번 사안을 참조해서 관할 노동지청이 갑질 행위 사안에 더 쉽게 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장치를 더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 등을 통해 사회적 관심이 불러일으켜지지 않은 사건에도 감독기관이 관여할 수 있는 경로를 추가해야 한다.

 


"'시험 떨어지면 멸시 당하며 살 것'이라는 불안 느끼는 청년들이 떠올랐다" 


프레시안 : 끌으로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이탄희 : 사건을 접하고 처음에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분노하는 감정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섬뜩했다.


분노한 건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들의 관점에 굉장히 공감이 됐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이 비슷한 방식으로 경제적 통제를 넘어 인격적 통제까지 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꼭 비정규직 노동자만으로 한정되지도 않는다.


 

많은 청년도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 요즘은 청년들이 학교 다닐 때부터 출세 경쟁이 아니라 불안 내지 공포 경쟁을 한다. 왜냐면, '내가 입시나 입사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면 그때는 단순히 임금을 조금 받는 수준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굉장히 멸시 받고 모욕감을 느끼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20, 30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만 맴돌 수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년들이 공포 경쟁, 불안 경쟁을 한다. 그러니까 그 수많은 청년, 수많은 학생이 어떻게 보면 잠재적인 청소 노동자인 거다. 이들의 처지에 공감이 돼 많이 분노했다.


섬뜩했던 건 거꾸로 청소 노동자를 통제하는 이들을 보면서였다. 서울대 당국자들이 청소 노동자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공감능력이 제거되어 있는 무감각한 하나의 사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이번 사건만으로 그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배제된 사람들의 처지에 공감하지 못하는, 섬뜩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거라는 데 대해 굉장히 경각심을 갖고 있다. 이를 좀 줄여 나가고 방지하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받는, 어쩌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80414142046876#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