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 방안 발표 방역지원금, 손실보상 업종 90만명과 별도 포괄지급 손실보상 분기 하한액 10만원→50만원…방역물품비 10만원도
김부겸 국무총리가 1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방역강화 조치 시행에 따른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방안 관련 정부 합동 브리핑을 하고 있다. 왼쪽은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연합뉴스
정부가 코로나19 방역 조처 강화에 따른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 방안으로 320만명의 소상공인에게 손실보상과 별도로 방역지원금을 10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다. 손실보상 대상 업종도 미용업과 키즈카페 등 12만곳을 추가해 90만여곳으로 늘리고, 분기별 하한 지급액을 1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올리기로 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17일 정부서울청사 합동브리핑실에서 “현 시점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재원들을 총동원하여 소상공인, 자영업자 분들이 체감할 수 있는 추가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총리에 이어서 발언한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권칠승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발표를 종합하면, 정부는 우선 손실보상 대상 소상공인 90만곳에다 지원대상이 아니었던 여행업과 공연업 등 230만곳을 더해 모두 320만곳 소상공인에게 방역지원금을 10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3조2천억원의 재정을 추가로 투입한다. 홍 부총리는 “매출감소만 확인되면 매출규모, 방역조치 수준과 무관하게 100만원의 현금이 지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또한 방역패스 적용 확대에 따른 방역물품 비용으로 최대 10만원의 현물지원도 한다. 식당과 카페, 피시(PC)방, 독서실과 스터디 카페 등 115만곳 소상공인들이 지원 대상인데, 전자출입명부 단말기, 체온측정기, 칸막이 등 방역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때 받은 영수증 등을 제출하면 비용을 지급받을 수 있다. 이 지원에는 1000억원의 재정이 추가로 소요된다.
정부는 아울러 기존 손실보상 대상이 아니었던 이·미용업과 키즈카페 등 인원·시설이용 제한업종 12만곳을 신규로 포함해 손실보상 대상을 90만곳으로 늘리기로 했다. 손실보상 분기별 하한 지급액도 1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올린다. 손실보상 관련 재원은 1조원이 추가되면서 모두 3조2천억원이 됐다.
권 장관은 “현재 집행 중인 손실보상 업체 명단을 활용해 다음 주 중에 방역지원금 1차 지원대상 디비(DB·데이터베이스)를 확정하게 된다”며 “올해 안에 영업시간 제한을 받은 소상공인의 상당수가 신속하게 지원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5월,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은 신선했다. 순식간에 세계를 휩쓴 코로나의 위력 앞에 온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몸을 동그랗게 움츠렸지만, 정부로부터 가구당 4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의 뜻밖의 현금 지원을 받았다. '이게 뭐지?' 신기했다. 잔뜩 움츠린 마음의 두 팔을 조금은 쭉 펼 수 있었다. 오래 살다 보니, 아니 또는, 아직 그렇게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구나.
형편에 따라 큰 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려워진 그 상황에 결코 작은 돈은 아니었다. 그런 금액을 아주 하찮고 우습게 생각할 정도의 대단한 금수저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 돈을 조금씩 써가면서 조금은 묘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대박!' 맞는데, 나만 맞는 대박이 아니라, 다 같이 맞고 있는 대박이라서, 다 같이 훈훈해지는 느낌이 드는 특이한 대박이랄까? 그래서 '별것 아니네'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거꾸로, 묘하게 따듯한 깨소금 맛을 느끼게 해주는 아주 특별한 대박.
세상은 모를 일이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렇듯 특별한 신선함과 신기함을 선사해주었던 그 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이 이제 어디선가로부터 '퍼주기'라는 질타와 비난을 받고 있다. 마치 아주 나쁜 일이요, 죄악이라는 것처럼. 혼란스럽다. 정말 그런가? 나의 혼란은 죄가 아니다. 말장난, 속임수가 있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공유했던 소중하고 특별했던 그 느낌(feeling)에 대한 변호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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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쉽게 지금 미국의 바이든 정부를 보라. 유럽과 일본의 정부 정책을 보라.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퍼주기'를 안 하고 있나. 우리가 놀랄 만큼, 우리가 받았던 것보다 열 곱절 스무 곱절로 크게 퍼주고 있다. 지금 이런 재난 상황에서 퍼주기를 안 하면 언제 퍼줄까? 이제 대한민국은 G20가 아니라, G10에도 들어가는 나라다. K방역의 성공으로 이 팬데믹 이후에는 GDP 순위가 올라가게 되어 있다. 필경 현재 이미 그러하다. 그럼에도 한국만은 안 된다는 주장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지금 퍼주기로 말하면 G20 중 한국이 꼴찌다. 한국보다 GDP가 낮은 나라보다 서민 지원에 훨씬 더 인색하다. 왜 한국만은 안 되나?
'퍼주기' 주장(=비난, 단죄, 공격)이 말장난이요 속임수라는 또 다른 근거는, 그렇게 주장하는 측이 이번 대선의 승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적극재정 정책을 펼 것이 뻔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다만 현 정부가 그런 정책'을 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내로남불'이다.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너는 하지 마라, 내가 할게'다.
인간사에서, 인생사에서 누구든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극단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도움은 항상 선하다. 그럴 때 '퍼주기'는 항상 선하다. 그렇게 프레임을 벗기고 추락하고 있는 쪽을 돕는다는 의미로 다시 정의한, '재난 상황에서의 퍼주기'를 재정정책 용어로 하면 '적극재정', '구제재정'이 된다.
지금 미국, 유럽, 일본 정부가 화끈한 적극재정 정책을 펼치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해도 되더라는 나름의 경험,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2008년의 절체절명의 글로벌 금융위기 때 행해진 미국 연방준비은행(연준)의 '헬리콥터 머니' 정책이 그것이다. 문자 그대로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린 것은 아니었다. 망하게 된 부실 금융사 계좌에 상상할 수 없는 막대한 돈을 1,000,000,000…… 입력하여 엔터키 때려서 보내주었다. 휴짓조각이 된 주식과 채권을 전량 매입해주는 방식으로 돈을 마구 꽂아준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적극재정을 펼쳐서 망해가는 금융사들을 살려 놓았다. 다 죽었다가 살았으니 금융권력에게는 기사회생의 대성공이요, 그래도 인플레가 발생하지 않았으니 미국 정부로서도 성공이었다 할 만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사태의 묘한 진행 상황을 보면서 "잠깐만!" 하며 호각을 불었던 쪽이 있었다. 그 유명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이다. "아니, 잠깐만!!!" 그 '헬리콥터 머니'는 누구에게 갔지? 도산 위기에 빠진 거대 금융사로만 갔고, 직장 잃고 집 잃은 서민들에게는 한 푼도 가지 않았다. 되살아난 금융사 CEO는 보너스 축제를 벌이고, 빚더미 위에 앉은 서민은 감옥에 갔다. '1대 99'가 여기서 나왔다. 헬리콥터에서 뿌린다는 그 막대한 돈은 왜 몽땅 최상층 1%에게만 가고, 어찌하여 99%에게는 한 푼도 오지 않았는가? 이건 아니다. 사기다. 1이 아니라 99에게 가야 마땅하다. 구제할 쪽은 99%였지, 1%가 아니었다. 경제만 살고 서민은 죽는 경제는 필요 없다. 서민이 살아야 경제가 사는 경제가 필요하다. 엔터키를 쏘는 방향을 바꾸어라. 1% 쪽이 아니라 99% 쪽으로.
지금 유럽과 일본, 그리고 이제 미국 정부까지를 '적극재정'으로 돌아서게 한 것은 순전히 코로나 팬데믹의 힘이다. 서민들이 당하고 있는 재난의 크기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이 재난 상황을 구제하지 않으면 나라 경제, 아니 세계 경제 전체가 붕괴할 위기에 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양극화는 극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비대면 플랫폼 대기업들은 오히려 엄청난 코로나 특수를 누리고, 봉쇄, 영업 제한, 업무 제한으로 소득 기회를 잃은 대면 사업, 대면 근무의 서민들은 생계 위기와 파산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적극재정'이 어느 쪽을 지원해야 하는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되었다.
코로나 재난이 준 교훈은 크다. 지난 수십 년 간 부동의 진리처럼 군림해왔던 것이 '균형재정 원리' 또는 '긴축재정 원리'였다. 수십 년을 겪고 보니, 그래서 알고 보니, 이 원리는 결국 경제권력을 몽땅 민간 금융자본에 떠넘기라는 교리였다. 경제에서 정부는 빠져라. 지원한다고 나서지 마라. 정부가 빠질수록 경제가 좋다. 정부가 거둔 세금(세수) 이상 돈을 쓰면 경제를 망친다. 돈이란 정부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민간 은행이 만든다(대출). 은행 대출을 받은 기업이 돈을 벌어야 서민에게도 돌아간다(낙수효과). 서민도 돈이 필요하면 민간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라. 금융기관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니 정부는 금융기관 규제를 철폐하라. 지난 수십 년 세계는 이러한 교리를 주문처럼 따랐다. 그리하여 금융권력 전성시대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전성시대라고 부른다.
그 잘못된 교리가 병으로 쌓이고 엉켜서 터진 것이 2008년 금융위기였다. 규제가 풀린 거대금융사들은 사기에 가까운 부실 대출로 막대한 수의 서민들을 빚더미 위에 올려놓았고, 소득이 준 서민들의 대출금 상환이 불가능해지자 연쇄적인 도산 위기에 빠졌다. 바로 그때 미국 연준을 비롯한 많은 서방 국가 중앙은행들은 한없이 돈을 만들어 망해가는 금융자본에 퍼주었다. 금융기관이 죽을 지경이 되니, 결국 돈을 만드는 쪽은 민간 금융기관이 아니라 국가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명백해졌다. 신자유주의의 긴축재정 교리는 이미 이때 끝났다. 전환의 첫 신호는 그때 켜졌다. 그러나 부패한 금융사에게만 국가가 돈을 몽땅 퍼주었던 것은 명백하게 부당했다. 긴축재정에서 적극재정으로 전환한 것은 맞다. 그러나 전환의 방향이 틀렸다. 전환의 방향은 그때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제시했던 것처럼, 1%의 부패한 금융권력이 아니라 피폐해진 99%의 서민경제 쪽으로 가야 했다.
이번 코로나는 두 번째 신호다. 이제는 미국, 유럽, 일본의 정부만 아니라, 여력이 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정부가 코로나 구제, 서민구제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대로 재정정책 전환의 방향이 잡히고 있다. 본격적인 적극재정의 시대가 돌아왔다. 처음이 아니다. 한때 밀려났다 다시 돌아왔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은 2차대전 이후 30여 년 동안 사회보장국가의 적극재정을 통해 안정된 번영을 이루었다. 적극재정이 서민고용과 서민생활 부양에 쓰일 때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함을 보았다. 이후 금융권력이 비대해져 사회보장국가를 억눌렀던 지난 30~40년이 정도(正道)를 이탈한 때였다. 금융권력이 국가의 재정지원까지 독점하면 양극화가 걷잡을 수 없게 극심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금융권력만 한없이 좋고, 서민은 한없이 괴로웠던 때였다. 이제 풍향이 바뀌고 있다. 이 전환의 방향을 확고하게 틀어쥐어야 한다. 서민중심의 적극재정으로.
나라는 1%의 권귀(權貴)가 아니라, 99%의 민(民)을 살리자는 물건이다. 이것이 우리의 오랜 전통이 말하는 '민유방본(民唯邦本)'이 뜻하는 바다. 나라의 존재 이유는 오직 민의 안녕에 있다. 지금 코로나 상황에서는 '나라의 재정권은 오직 민(民)이 평안하게 잘 살도록 하는 데 쓰이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코로나 정국에 주목받고 있는 기본소득, 기본자산, 보편복지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다. 저명한 경제사상가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모두가 국가 재분배 경제에 속한다. 그 셋 중에 내가 주장하는 것만이 진짜고, 다른 쪽은 가짜라는 어법이 있는 모양이지만, 이는 진실과 멀고, 특히 지금 상황에서는 백해무익하다. 지금은 그 재정지원을 빨리 집행하는 것이 관건이다. 민의 사정이 그만큼 어렵다. 그것에 어떤 이름을 거는가로 다투며 시간을 허송할 여유가 없다. 기본소득도 기본자산도 보편복지다. 보편복지를 위한 수단이 많아지는 것은 문자 그대로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아울러 그 모두가 우리 전통에 결코 낯설거나 이질적이지 않다. 우리 전통의 경제사상은 칼 폴라니와 통하는 바 많다. 모두에게 소득원, 일자리를 줘야 한다는 정전법 원리, 재난 상황에서는 나라가 재정을 풀고 국력을 동원해 재난에 처한 소민(小民)을 구제해야 한다는 상평(常平), 환곡(還穀)의 원리가 모두 우리 역사에서 늘 강조되어 왔음을 기억하자.
국경없는기자회(Reporter Without Borders, 이하 RSF)가 16일 전 세계 언론인 탄압 사례를 집계한 ‘2021 언론인 탄압 통계’를 발표했다. 올해 부당하게 구금되어 있는 언론인은 488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가운데 65명은 범죄 혐의가 아닌 인질로 붙잡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구금된 여성 언론인 수도 올해 가장 많았는데, 지난해보다 33% 늘어난 60명이었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올해 언론 활동을 하다 구금된 언론인의 숫자는 연례 보고서를 발표하기 시작한 1995년 이래 최고치다. 2021년 12월 중순 기준으로 수감되어 있는 언론인 및 언론 노동자는 총 488명으로 지난해 같은 시기 대비 20%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급증의 주요 원인은 미얀마, 벨라루스, 그리고 중국이다.
최근 5년간 언론인을 가장 많이 가두고 있는 중국은 올해도 127명의 언론인을 구금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언론인은 19명이며, 이 중에는 2021년 국경없는기자회 언론자유상을 수상한 변호사 출신 시민기자 장잔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알려졌다. 장잔은 지난해 2월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외부에 알렸다는 이유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중국의 언론자유지수는 180개 국가 중 177위다.
벨라루스에는 여성 언론인 17명과 남성 언론인 15명이 감옥에 갇혀 있다. 이들 중에는 폴란드에 본사를 둔 벨라루스 독립 TV채널 ‘벨사트’ 기자 다리아 출초바와 카차리나 안드레예바가 포함되어 있다. 군사쿠데타가 벌어진 미얀마에선 53명의 언론인 및 언론 노동자가 감금되어 있다.
크리스토프 들루아르 국경없는기자회 사무총장은 “기자들의 임의 구금이 극단적으로 치솟은 것은 이들 독재 정권의 소행”때문이라고 밝힌 뒤 “국제 사회가 권위주의 정권의 탄압을 중단시킬만큼 압력을 가하지 못하는 지정학적 권력 관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올해 1월1일부터 12월1일까지 언론 활동으로 살해된 언론인은 46명으로 집계됐다. 한 해 사망 언론인이 50명 아래로 내려간 것은 2003년 이후 처음이다. 이를 두고 국경없는기자회는 “시리아‧이라크‧예멘에서 갈등이 완화되고, 언론자유기구가 언론인 보호를 위해 국제적 차원의 공조와 단일 국가 차원의 캠페인을 벌인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아직도 거의 일주일에 한 명꼴로 언론인이 목숨을 잃고 있다. 2021년 살해된 언론인 중 65%는 표적 살인을 당했다”고 밝혔다. 표적 살인은 멕시코(7명), 아프가니스탄(6명), 예멘(4명), 인도(4명)에서 두드러졌다는 설명이다. 한편 올해 집계에선 직업 언론인을 포함해 시민 기자와 언론 노동자까지 대상에 포함했다.
"안중근 의사 후손들이 왜 한국에 머물지 않고 미국으로 갔겠나. 살길이 없으니까 그런 거다."
15일 오후 안중근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 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난 황 여사의 지인이 한 말이다.
보훈처에서 공직생활을 한 지인은 황 여사가 2015년께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거처 마련과 병원 치료 등을 도왔다. 또 황 여사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도록 행정을 도맡아 처리한 인물이다. 그를 두고 주변에서 '황은주 여사 양아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애를 썼다.
그가 전한 황 여사의 삶에는 위대한 독립운동가 집안이 으레 겪는 고단함과 안타까움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1928년생인 황은주 여사는 안중근의 장녀 안현생의 딸로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핍박 때문에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외할머니인 안중근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의 손에 자랐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1909년 10월 안 의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의거에 성공했다. 일본제국의 헌법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 및 5대, 7대, 10대 일본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한 일제의 심장으로 여겨지는 이토를 저격해 사망케 한 것이다. 이토를 보낸 일제가 안 의사와 남은 가족들을 어찌 대했을지 불 보듯 뻔한 상황.
다행히 안 의사는 의거 직전 동료를 통해 남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 살림을 장만해놨으니 그리로 오라'고 전한다. 의거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당시 안 의사에게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와 부인 김아려, 딸 안현생(1902년생), 아들 안분도(1905년생), 안준생(1907년생) 등이 있었다.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편지를 받고 며느리 김아려와 손주 안분도, 안준생을 연해주로 보낸다. 자신과 손녀딸 안현생은 국내에 남았다. 김아려 여사는 장춘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힘겹게 도착한 하얼빈에서 김 여사는 남편이 이토를 쏴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손에 잡혀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곡절 끝에 풀려났지만 일제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국내에 남은 안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와 장녀 안현생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
안정근 및 안공근 등 동생 가족을 포함, 안 의사 가족들은 일제의 위협을 피해 야반도주해야만 했다. 이후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꼬르지포 인근에 정착하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이듬해에 장남 분도가 7살 나이에 비명횡사한다.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사망한 것인데,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밀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은 가족들은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안창호와 김구의 도움으로 러시아를 떠나 상하이로 이주하게 된다. 1919년 10월의 일이다. 1920년대 안 의사 장녀 현생은 신흥무관학교 1회 졸업생이자 임시정부 초대 군무부 참사를 지낸 황일청을 만나 결혼했고 1928년 딸 황은주를 낳았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난다. 이 일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급히 떠나 피난 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안 의사 일가는 상하이를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는 상하이에 남은 안 의사 가족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당장 황 여사의 아버지 황일청은 윤봉길 의거 후 평양으로 끌려가 연금생활을 한다. 황 여사의 어머니 안현생도 이때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따라간다. 상하이에 남은 황 여사가 할머니 김아려 여사의 손에 자랄 수밖에 없던 이유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칼날은 안중근의 하나 남은 아들 안준생에게 집중됐다.
정확히 30년을 버틴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일제의 압박에 굴복하고 만다. 1939년 10월 15일 안준생은 이토 히루보미의 아들이자 일본 광업 사장이었던 이토 분키치를 박문사(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당)에서 만나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안중근의 아들이 이토의 아들을 만나 사죄한 일은 이토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박문사에서 이뤄졌다. 다음날 매일신보 등 친일신문은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이 잇다'라는 제목을 써가며 관련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안준생은 어찌 됐을까. 임정의 수장 김구는 안준생을 '호부견자'라 칭하며 "더러운 변절자는 처단해야 한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실제 <백범일지>에도 해방 후 중국 경찰에 '안준생을 죽여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
1939년 10월 변절하고 상하이로 돌아온 안준생을 본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고생했다"라는 한마디를 건넨다. 일제는 이후 안준생에게 고급주택을 건네며 물질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 하지만 1945년 일제는 패망하고 안준생 역시 중국 공산당에 밀려 홍콩으로 이주한다. 안준생은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 혼자 국내로 들어온다. 부산 피란지에서 폐결핵을 앓았던 안준생은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적십자선에서 사망한다.
1939년 안준생을 통해 박문사 화해극을 이끌어낸 일제는 시선을 돌려 안중근의 장녀 안현생과 사위 황일청을 대상으로 삼았다. 1941년엔 안현생과 황일청도 '만선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행렬에 끼어 박문사를 찾아 이토에게 분향 배례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황 여사가 불과 17세였던 1945년 12월, 아버지 황일청은 광복군 출신 인사의 총에 맞아 절명한다. 주된 이유는 황일청이 평양에서의 압류 생활 후 장쑤성 쉬저우에 끌려가 '조선인 교민회장'으로 활동했다는 것. 반강압에 의해 끌려갔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인 교민회장'을 하며 일제가 주는 녹을 먹었다. 이곳에서 황 여사와 가족들은 해방을 맞이했다. 귀국선을 기다리며 황일청은 집 아래층에 교민 자녀를 위한 '서주 한국 중학교'를 열고 조선 학병들로 교사진을 꾸렸다.
당시 쉬저우에는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온 40여 명의 광복군도 있었다. 이들과 쉬저우에 남아있던 학병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갈등도 발생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 3일 밤 10시께, 광복군과 학병 출신 인사들이 함께 있던 황 여사 아버지 방에서 '꽝' 하는 굉음이 울렸다. 황일청은 머리에 총을 맞고 절명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남긴 친일인명사전에도, 정부가 남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혼자 남은 황은주는 어찌 살았나
▲ 안중근 의사의 손자 항렬 유족 중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황은주 여사가 지난 12일 밤 별세했다. 15일 빈소가 마련된 보훈중앙병원 장례식장 모습.
아버지를 떠나보낸 황은주는 불과 석달도 안 된 1946년 2월 할머니 김아려도 떠나 보낸다. 할머니의 나이 69세. 남편과 어머니를 연달아 잃은 황은주의 모친 안현생은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그러나 악재 속에서도 가족들은 살아남아야 했고 황은주는 아버지 친구였던 이범석 장군 일가의 도움을 받아 1946년 5월 부산에 도착한다. 이후 황 여사의 어머니 현생도 서울에 도착했고 먹고살기 위해 전구 장사를 하며 버텼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대구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그곳에서 안 의사의 남은 가족들은 허위 장군 후손의 도움을 받으며 버텨냈다. 이후 어머니 현생이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전신)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어머니 현생 역시 1959년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1960년 4월 사망했다.
이화여대 음대를 나온 황은주 여사는 군인 남편을 만나 슬하에 네 명의 자식을 뒀다. 남편이 군생활을 마무리한 1970년대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라는 안 의사의 유언을 받들지 못한 사실과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는 이유로 1980년대 중후반 홀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을 이어갔지만 남은 가족들의 요청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렇게 매해 안 의사와 관련된 행사가 있으면 오고 가기를 반복했다. 2010년대 들어 한국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했고 2015년 영구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황 여사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지 않았다. 안 의사의 직계 후손임에도 외손 등이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안 의사의 직계 3손 중 김영삼 정부 들어 뒤늦게 안준생의 아들 안웅호(토니 안)가 혜택을 받았지만 2013년 사망해 다른 직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는 안 의사처럼 순국선열의 경우 독립유공자의 손자녀 1명만 보상금을 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보상금을 받을 권리는 다른 손자녀에게 이전되지 아니한다고 명시됐다.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오마이뉴스>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17일 진행되는 황 여사의 발인식 추도미사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맡을 예정이다. 황은주 여사의 장지는 용인천주교공원묘원으로 정해졌다.
논문 표절 의혹으로 시작해 허위 이력 논란으로 치명타, 사법 리스크도 여전 남소연
기자 nsy@vop.co.kr 발행2021-12-16 17:34:02 수정2021-12-16 17:34:02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부인 김건희 씨. (자료사진)ⓒ뉴시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 씨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기존에 제기됐던 '사법 리스크'는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 데다가 '논문 표절'에 이어 '허위 경력'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윤
후보가 정치적 명분으로 삼는 공정과 상식이란 기치도 흔들리는 형국이다. 윤 후보는
김 씨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여권의 공작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왜 유독 김 씨에게만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논문 표절 의혹에 배우자 두둔한 윤석열 "학위
취소될 정도인지 의문" 시작은 '논문 표절' 의혹이었다. 김 씨가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작성한 박사학위 논문인 ▲아바타를 이용한 운세 콘텐츠
개발 연구 1건과 학술지에 게재된 ▲온라인 쇼핑몰 소비자들의 구매 시
e-Satisfaction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대한 연구 ▲애니타를 이용한 Wibro용 콘텐츠
개발에 관한 연구-관상·궁합 아바타를 개발을 중심으로 ▲온라인 운세 콘텐츠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대한 연구 등 총 4건의
논문이 표절 의혹을 받고 있다. 논문표절 검증 서비스인 '카피킬러'를 통해 이
논문들의 표절률을 조사한 결과 보통의 논문보다 높은 수준의 표절률을 기록했다. 이
외에도 각종 비문과 출처 표기 없는 무단 발췌, 잘못된 참고 문헌 표기 등의 문제가
드러났다. 특히 '온라인 운세 콘텐츠 이용자들의 이용 만족과 불만족에 따른 회원
유지와 탈퇴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는 제목의 '회원 유지' 부분을 'member Yuji'라고
표기한 것으로 드러나 대표적인 부실 검증 의혹이 제기된 논문이다. 김 씨 논문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국민대학교는 내년 2월 15일까지 논문 4편에 대한 검증을
마치겠다고 밝혔다. 당초 윤 후보 측은 김 씨의 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 "결혼
전"일이라는 점을 부각하며 '과잉검증'으로 몰아갔다. 동시에 여당 후보의 논문 표절
의혹을 더 엄격히 검증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물타기성 입장도 내놨다. 윤 후보는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관련
질문을 받자 "학문적으로 표절이고 학위로 인정되기 곤란하다면 당연히 취소돼야 하고
취소 전에 (학위를) 반납해야 한다"면서도 "표절이 학위가 취소될 정도로 심한지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두둔했다. 임용 이력서마다 '허위 경력' 기재 '단순 실수'
아닌 '경력 부풀리기' 의심도 논물 표절 의혹 이후 곧바로 '허위 이력' 논란이
불거졌다. 김 씨의 과거 대학교에 제출한 임용 지원서에서 사실과 다른 이력을 다수
적어 넣은 것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이 의혹은 최근까지도 뒷받침할 추가 증거
자료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김 씨 역시 일부 의혹에 대해 시인하는 발언을 내놓으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윤 후보 측 해명처럼 '단순 실수'가 아닌 고의적으로 경력을
부풀린 게 아니냐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상황이다. 김 씨는 ▲2001년 한림성심대학교
시간강사를 시작으로 ▲2004년 서일대학교 시간강사 ▲2007년 수원여자대학교 겸임교원
▲2013년 안양대학교 겸임교원 ▲2014년 국민대학교 비전임 교원으로 임용됐다. 문제는
임용 과정에서 제출한 이력서에 모두 허위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김 씨는 한림성심대를 지원하며 자신의 경력에
서울 대도초등학교 실기 강사로 근무했다고 적었지만, 정작 해당 학교에서는 김 씨가
근무한 이력이 없었다. 서일대학교 지원 과정에서는 서울 대도초등학교에 더해 서울
광남중학교, 서울 영락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고 밝혔지만, 이들 학교에서도 근무
이력이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서울시교육청은 김 씨가 서울영락고가 아닌
영락여상(현 영락의료과학고)에서 미술강사로 재직한 사실은 확인됐다고 밝혔다. 직전
이력서에 적은 '서울 광남중학교 교생실습' 이력은 '서울광남중학교 근무'로
바뀌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부인 김건희씨가 2013년 안양대학교에 제출한
이력서.ⓒ서동용 더불어민주당 의원 수원여대 겸임교원 임용 당시 작성한 이력서에는
허위 경력뿐 아니라 허위 수상 내용도 다수 기재돼 있었다. 최근 YTN 보도를 통해
드러난 의혹 역시 수원여대 임용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김 씨는 2002년 3월부터
한국게임산업협회 기획팀 기획이사로 재직했다고 했지만, 정작 협회가 설립된 건
2004년 6월이었다. 윤 후보 측은 협회가 설립 인가를 받기 전에 김 씨가 비상근
무보수로 일했다고 해명했으나 협회 관계자는 김 씨와 함께 일한 기억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또, 2004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적었지만
김 씨의 이름으로 응모된 출품작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해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받았다는 대상특별상 수상 이력 역시 논란이다.
출품업체 대표는 이미 작품 제작을 마친 뒤 김 씨가 입사했기 때문에 그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다고 증언했다. 이전 이력서에 기재됐던 '서울영락고' 근무 이력은
'영락여고 미술교사 정교사'로 바뀌었다. 안양대와 국민대 임용 과정에서도 조금씩
이력을 고쳐서 제출한 부분이 확인됐다. 이 시기는 윤 후보와 결혼한 이후다. 김 씨는
한국폴리텍1대학교 서울강서캠퍼스에서 '산학겸임교원'으로 일했지만, 이력서에는
한국폴리텍1대학미디어콘텐츠과 '부교수(겸임)'이라고 허위로 작성했다.
산학겸임교원은 교수 직책과 구분되는 기간제 교원이다. 추가로 드러난 의혹도 있다.
16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김 씨는 한림성심대에 낸 이력서에 1995년 5월
'미술세계대상전입상(우수상)'이라고 수상 내역을 기재했다. 하지만 당시 수상자
명단에는 김 씨의 이름은 없었다. 김 씨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김 씨가 2003년 작가로 출품했던 전시회 도록에 '삼성미술관 기획전시'에
참여했다는 이력도 '허위'라는 보도가 나왔다. 김 씨는 '한겨레'를 통해 "당시 성남
분당에 있는 '삼성플라자(현 AK플라자 백화점 분당점)' 건물 내부 갤러리에서 전시를
했던 것"이라는 해명을 내놨다. 말끔히 해소 안 되는 사법 리스크 '코바나콘텐츠'와
'도이치모터스' 김 씨의 '사법 리스크'도 여전히 정리되지 않고 있다. '코바나콘텐츠
불법 협찬' 의혹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코바나콘텐츠 불법 협찬 의혹이란 일부 협찬사들이 수사와 재판 관련 편의를
바라고 윤 후보의 배우자인 김 씨에게 협찬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에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와 시민단체 등이 지난해 9월 윤 후보와 김 씨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바 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지난 6일 공소시효가 임박했던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했다. 다만 2019년 6월 윤 후보의 검찰총장 후보자 지명 시기와 맞물려 대기업
협찬이 크게 늘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김 씨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에 '전주'로 가담했다는 의혹도 남아 있는 리스크 중 하나다. 특히
지난달 권오수 도이치모터스 회장이 구속되고 재판이 시작되면서, 김 씨에 대한 수사
역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검찰은 김 씨의 연루 의혹에 대해 계속 수사 중이라는
입장이다. 앞서 윤 후보 측은 경선 과정에서 주가조작 의혹을 해소하겠다며 김 씨의
증권 계좌 내역 일부를 공개한 바 있다. 공개한 자료에는 2009년 1월 1일부터 2010년
12월 31일까지 도이치모터스 주식 관련 매수 주문을 한 내역이 담겨 있었다. 김 씨가
이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이정필 씨에게 주식 계좌를 맡긴 시점(2010년 1월
14일)부터 계좌를 회수한 시점(2010년 5월 20일)을 감안했다는 게 당시 윤 후보 측
설명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주가 조작이 이뤄진 시점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거래 내역 전체를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이에 윤 후보는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사건의 단서가 된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다 공개했고,
지금 검찰에서 1년 반 동안 계좌를 전부 다 열어봤다"며 "이걸 (전부) 공개하라는 건
제가 볼 때는 억지"라고 거부했다. 윤 후보는 배우자가 연루된 의혹에 대해
과잉수사라고 반발했다. 윤 후보는 이 같은 의혹에 모두 부인하며, "26년간 검사
생활했지만 상식에 반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발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