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1일 월요일

포스트 코로나, 바보야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야!

시민건강연구소 웨비나 "정치 역량 강화가 유일 해법"
코로나19로 인한 사회·경제 붕괴가 일어나면서,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대비를 위해 정치와 시민·사회운동 역량을 더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11일 시민건강연구소가 주최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건강정의' 웨비나(웹+세미나)에서 강의 발제자로 나선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와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코로나19로 인해 세계적으로 진행된 노동 양극화가 더 심화'하는 미래가 도래하고 있다는 지적 아래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경제 분야가 아닌, 정치와 운동 영역에서 더 적극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강연에서 주목해야 할 건, 코로나19 이전 세계 노동, 경제의 화두였던 4차 산업혁명의 도래, 즉 기술 발전보다 정치의 중요성을 두 강연자가 강조했다는 점이다.

관련 설명을 위해 신 교수는 '코로나19 체제 이전', 즉 세계화와 신자유주의화가 가속화하던 시기 노동의 질과 양이 연령, 젠더, 인종, 소득, 교육 등에 따라 점차 벌어졌으며, 그간 발전한 기술 수준은 코로나19 유행 이후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비대면(untact)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예견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비관적 미래상과 비슷하다. 기술 발전으로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를 제외한 다수 노동자가 노동 시장에서 이탈하리라는 전망이 세계적으로 오랜 기간 쏟아졌다. 신 교수는 이미 상당수 노동자가 제조업이 아닌 서비스업에 종사함에 따라 "산업 사회는 코로나19 이전에 종언을 고했다"고 단언했다.

신 교수는 그러나 정치 격차가 기술 발달로 인한 격차보다 노동 양극화를 더 심화한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 양극화의 주된 원인은 기술 문제가 아닌 정치 문제에 있었다"며 "대표적 사례로, 스웨덴은 영국보다 로봇을 3배 정도 더 사용하지만 불평등 수준과 빈곤율은 영국이 스웨덴보다 훨씬 높았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이후 양극화가 더 심화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는 때, 이 '초격차 사회'를 막는 힘은 정치에서 나온다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김 연구원은 같은 선상에서 한국 정치와 시민사회운동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데 의문을 표했다.
그는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동조화하고 △노동을 존중하며 △연대와 협력이 표준이 되는 모델이 '뉴 노멀'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불평등이 심화하고, (사회 운동이자 새 정치의 기반이 되어야 할) 노동계급은 더 약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여성, (자영업자 등) 불안정 취업자, 노인 노동자, 청년(실업자), 이주 노동자 등에 더 집중되는 현실을 김 연구원은 지적했다. 정치와 운동이 작동하지 않은 결과로 취약 계층이 일방적으로 코로나19 위험과 코로나19로 인한 실업 등의 경제적 위험에 더 노출됐다는 지적이다.

신 교수는 더 바람직한 '포스트 코로나19 뉴 노멀'을 준비하기 위해 기존 고용체제와 사회보장 체제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점을 인정하고, 기본 소득 등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로봇세를 신설하고 일자리 공유제 등의 실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대안 모색에 나서야 한다고 전했다. 더불어 이윤의 과도한 집중화를 막을 제도적 장치를 정치권이 모색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시민건강연구소는 포스트 코로나19 시대를 전망하는 차원에서 4주 연속 기획 웨비나를 진행 중이며, 이날 웨비나는 3주차 프로그램이다. 오는 18일 저녁 7시에는 '정보인권과 자유권'이라는 주제로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와 최홍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이 발표에 나설 예정이다.

해당 웨비나는 온라인으로 진행되며, 신청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지정된 양식으로 온라인 신청을 하는 이는 시민건강연구소로부터 구글 미트 링크를 전달받아 웨비나에 참여 가능하다. (☞ 신청하기)

▲기존의 노동 유연화, 노동 기반 복지 사회가 유지될 경우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노동 양극화는 초격화하리라는 우려가 나온다. 새로운 모델을 위해 정치와 시민사회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지난달 13일 서울 중구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진행된 설명회에 입장하는 실업급여 신청자의 모습. ⓒ연합뉴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051120554461465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광주항쟁 곳곳에 등장한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20.05.12 07:12l최종 업데이트 20.05.12 07:17l
사진: 이희훈(lhh)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2020년,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에 주목한다.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증인'들의 이야기를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말]
 5.18민주화운동 당시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고 당시 같은 위치에 섰다. 당시 제일은행이 있던 건물은 허물고 무등빌딩이 새롭게 지어졌다.
▲  보안사 5.18 사진첩에 실려 있는 사진. 한 외국인이 광주시민들과 들것을 나눠든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해당 사진은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던 광주 동구 금남로의 무등빌딩에서 찍힌 것이었다.
ⓒ 이희훈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  보안사의 5.18 사진첩에 실려 있는 사진. 한 외국인이 광주시민들과 들것을 나눠든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 나경택 제공
 
시작은 위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외국인 남성이 한국인 4명과 들것을 나르는 모습. 그의 축 처진 오른 어깨는 들것의 무게를 짐작게 했다.

해당 사진은 지난해 11월 처음 공개된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사진첩 중 '증거물사진 393-1980-9' 40쪽에 담겨 있었다. 여러 권의 사진첩엔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이 가득했다. 당시 보안사는 '광주사태의 증거물'로 이 사진들을 모았지만, 도도했던 40년 세월은 그것을 5.18민주화운동을 증명하는 '역사'로 만들었다.
  
이 외국인은 어쩌다 이 사진에 담기게 됐을까? 그것도 직접 들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당시 광주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 그리고 영화 <택시운전사>의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처럼, 그동안 널리 알려진 5.18 속 외국인은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렸다. 위 사진 속 외국인은 그들과 또 다른 방식으로 항쟁의 중심에 서 있는 듯했다. 체크무늬 셔츠의 증인,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그곳, 무등(無等)
 
 5.18 민주화운동의 핵심 장소인 광주 동구 광산동에 위치한 구 전남도청사. 국가등록문화재 제16호로 2002년 지정 되었다.
▲  5.18민주화운동의 핵심 장소인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국가등록문화재 제16호로 2002년 지정 되었다. 은행나무 또한 40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이희훈
 
지난 4월 28일 옛 전남도청 앞에 섰다. 뜨거웠던 항쟁을 지켜본 도청 울타리 안의 은행나무가 곧장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조금 옮기니 5.18을 상징하는 너른 분수대가 우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분수대 너머엔 최근 복원된 시계탑이, 그 너머엔 수많은 탄흔을 품은 전일빌딩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날엔 인근 지산동에 있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전두환의 재판을 봤다. 40년 전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군대는 사진 속 들것에 실린 이를 비롯해 수많은 시민을 무참히 살상했다. 법원에 들어서던 노년의 전두환은 책임과 반성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가 27일 오후 전남 광주지방법원에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마치고 부인 이순자씨와 경호를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씨가 4월 27일 오후 전남 광주지방법원에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마치고 부인 이순자씨와 경호를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 이희훈
 
전일빌딩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 사진 속 장소가 정확히 어딘지 알고 싶었다. 사실 해당 사진은 보안사가 찍은 게 아니다. 당시 나경택 <전남매일> 기자가 찍은 사진을 보안사가 압수한 것이었다. 다행히 필름까진 빼앗기지 않아, 이후 이 사진과 함께 여러 5.18 당시 사진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4월 28일 통화한 나 기자는 해당 사진을 "전일빌딩에서 찍었고 (사진 속 장소는 당시) 관광호텔 쪽"이라며 "전일빌딩 5층에 친구가 일하던 '대한교육보험' 사무실이 있어서 그곳에 양해를 구하고 들락날락했던 것 같다"이라고 말했다. 사진 속 건물엔 "재산세 수납 중", "한국은행 국고수납 대리점"이란 글귀가 붙어 있었다. 출입문에 새겨진 익숙하지 않은 마크도 눈에 띄었다.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금남로
▲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광주 동구 금남로 일대.
ⓒ 이희훈
 
검색을 거듭해보니 당시 제일은행의 마크였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엄지 모양의 제일은행 마크보다 훨씬 이전의 마크다. 옛 전남도청을 등지고 전일빌딩에서 두 블록 정도 이동하면 가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 기록관)가 나오고, 바로 길 건너 맞은편엔 지금도 SC제일은행이 있다. 1990년대 새로 올린 건물이긴 하지만, 바로 옆 옛 상업은행(현 우리은행)과 함께 5.18 현장의 한복판이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전일빌딩과는 좀 떨어져 있었다. 아무리 따져봐도 전일빌딩에서 잡은 앵글이라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당시 관광호텔 자리와도 거리가 있었다. 갸웃거리며 사진을 손에 든 채 건물 앞을 서성이는데 한 남성이 "여기가 아니고 저기예요"라며 옛 전남도청 방향을 가리켰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남성은 사진 속 장소를 잘 아는 듯했다.

남성은 자신을 "제일은행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1990년에 입사해 5.18 당시엔 광주에 없었다"라면서도 "선배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 속 건물 또한 광주 지역 언론을 통해 본 기억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건물에도 제일은행이 있었고, (사진 속 장소인) 저쪽에도 출장소 비슷한 제일은행이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이 지점장은 직접 발걸음을 옮겨 사진 속 장소를 정확히 찍어줬다. 역시 1990년대 새로 지어졌지만, 계속해서 무등빌딩이란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이었다. 광주시민들에게 친숙한 삼복서점(현 알라딘 중고서점)이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지하 1층에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나 기자가 이야기했듯, 새 건물이 올라가기 전엔 관광호텔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에 담긴 건물 1층 모퉁이 부분은 한창 리모델링 공사 중이었다. 길 건너 전일빌딩으로 이동해 다시 무등빌딩을 바라봤다. 40년 전 나 기자의 시선을 상상해봤다. 공사 차량의 분주한 움직임과 드르륵 울려 퍼지는 소음 너머로 사진 속 장면이 겹쳐졌다. 광주를 품은 산처럼 '무등(無等, 등급과 차별이 없음)'이란 이름이 붙은 그 건물 앞을, 한 외국인과 여러 광주시민이 들것을 나눠 쥔 채 지나고 있었다.

들것
     
 광주
▲  외국인이 들것을 든 모습이 담긴 사진의 장소는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던 금남로의 무등빌딩이었다. 새로 올려진 건물은 여전히 무등빌딩의 이름을 갖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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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무등빌딩 앞의 모습.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이희훈, 나경택

나 기자는 "5월 19일 혹은 20일에 찍은 사진 같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집단 발포 후 시민들의 거센 항의에 직면한 계엄군이 5월 21일 광주 외곽으로 물러났으니, 사진은 그보다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이 한창이었던 시점이었다. 나 기자는 "사진도 몰래 찍어야 했다"며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전했다.

"가방도 못 메고 점퍼 속에다가 카메라 두 대 숨겨갖고 전일빌딩에 숨듯이 들어가 있었죠. 그 사진 찍을 때도 기억이 나요. 들것에 있는 냥반은 곤봉으로 세게 맞아븐 거 같습디다. 얼마나 구타를 당해브렀는지 눈알이 막 빠질 듯 그래요."

나 기자는 이 사진을 비롯해 자신이 찍은 여러 사진이 보안사 사진첩에 들어간 이유도 설명했다.

"6월 2일부터 신문을 다시 낼 수 있다 그래요. 근디 사진을 못 싣잖아요. 소설가 문순태 그 분이 그때 <전남매일> 편집부국장이었는디, 독일에 좀 있어갖고 외신기자들을 좀 압디다. 그래서 내가 '(항쟁 기간에 찍은) 사진들 외신에 줍시다'라고 해서 독일에선가 보도가 좀 된 모양이에요. 근께 6월 3일인가 찦차가 집으로 찾아 왔습디다. 그때 내가 방림동 살 땐디, 505보안대 소속 중령이 사복을 입고 왔어요. 오후 10시 쯤 됐응께 우리 애기 엄마도 얼마나 무서웠겄어요. (그 사람이) 위에 보고해야 한다고 사진을 주라 근께 (신문사로 가서) 인화해갖고 줬죠."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것을 든 외국인의 모습이 담긴 또 다른 사진.
ⓒ 나경택 제공

나 기자는 해당 사진의 전후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을 더 보내왔다. 들것을 든 이들은 최루탄 때문인지 소매로 연신 코를 막고 있었다. 방독면 가방을 멘 채 곤봉과 최루탄 발사기를 든 군인 사이를 위태롭게 지나기도 했다. 군인들은 윗옷이 벗겨진 들것 위 부상자를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 기자는 사진 속 외국인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정확히 누군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상당히 젊었어요. 젊은 외국인이 저런 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게 참말로 대단허죠. 우린 알잖아요. 당시에 얼마나 엄혹했는지. 그때는 양림동에 있던 선교사들이라고만 생각했제 다른 생각은 못했어요."

그런데 나 기자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진 속 흰색 상의를 입은 남성이 당시 광주CBS 보도국 차장이었던 노병유 기자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노병유 차장한테 물어본께 '내가 맞다' 그래요. 흰색 상의가 의사 가운이었대요. 기자다본께 센스가 있었는지, 의사 가운을 빌려다가 입으믄 계엄군들도 크게 뭐라 못할 거라 생각한 거죠."

하얀 가운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
▲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것을 든 외국인의 모습이 담긴 또 다른 사진.
ⓒ 나경택 제공

지난 4일 노 기자와 연락이 닿았다. 5.18 직후 신군부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된 그는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전했다. 사진 속 외국인에 대한 묘사도 구체적이었으며 그를 "평화봉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였다. 단원들은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교육, 의료, 농수산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파견 국가에서 미국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의도도 이 제도에 담겨 있었다. 한국엔 1966~1981년 평화봉사단이 들어와 있었다. 주한미대사였던 캐슬린 스티븐스 한미경제연구소장이 1975~1977년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때 당시 CBS광주방송이 가톨릭센터에 있었단 말입니다. 내가 취재를 마치고 들어오던 차에 금남로 쪽에서 막 최루탄이 쏟아지고 그래요. '병원으로 가야겄다'는 생각에 얼른 피한다고 들어간 곳이 '박윤식 외과'였어요. 아이고, 하도 눈물이 쏟아져서 원장실로 가본께 원장이 평화봉사단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평화봉사단은 입술 있는 데가 터져서 피를 흘리고 있드만요. 근디 옆에 중환자가 누워있어요. 곤봉으로 머리를 얼마나 맞았는지 의식불명이에요. 머리가 깨져서 붕대로 감싸 놨고요. 딱 봐도 위중해요. 원장이 '우리 병원에선 안 돼요, 언능 대학병원으로 안 가면 생명이 위독합니다' 해서 그 평화봉사단이랑 같이 들것을 들고 전남대병원으로 갈라고 했죠. 그때 내가 원장한테 '당신 가운 좀 벗어주쇼' 부탁했어요. 전쟁 중에도 의사 가운 입은 사람은 안 쏘잖아요. 그랬더니 원장이 옷걸이에 걸려 있던 새 가운을 줍디다."


당시 금남로 인근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이 마냥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노 기자가 의사 가운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곳곳에 계엄군이 배치돼 시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노 기자는 그 외국인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둘이 들것을 들고 가는디 무거워서 못 들겄어요. 그때 제일성결교회 자리에 새 빌딩이 올라가고 있었거든요? 거기 공사장에 시민들 몇 사람이 피해있더라고요. 내가 '이것 좀 같이 들자'고 한께 몇 사람이 용기 있게 나옵디다. (외국인은 비교적 안전하니) 그 평화봉사단을 앞에 세우고, 나는 의사 행세를 하믄서 분수대 근처까지 갔어요. 앰뷸런스가 있드만요. 환자는 태워주고 나는 못 태워준다 해서 택시를 잡아다 뒤따라갔죠. 병원에 도착했는디 접수가 안 돼요. 이 사람이 의식불명이라 이름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다 책임진다 하고 내 이름 노병유로 접수를 했어요."

노 기자는 "당시 환자를 후송하는 데 정신을 쏟고 있어서 그 외국인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면서도 당시 그에게 느꼈던 감정을 상세히 떠올렸다.

"겁에 질려버린 것처럼 보였는디도 정말 성실히 움직이드만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으로 보였을 정도로. (박윤식 외과 원장실에서) '평화봉사단 저 사람도 저라고 움직이는데 내가 가만있어서 쓰겄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께 나도 의사 가운이라도 빌려 볼 용기를 낸 거죠."

평화봉사단
  
 평화봉사단 자료집에 담겨 있는 팀 원버그. 광주에서 근무하던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생생히 목격했다.
▲  평화봉사단 자료집에 담겨 있는 팀 원버그. 광주에서 근무하던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생생히 목격했다.
ⓒ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나경택·노병유 기자와 연락이 닿기 전, 이미 사진 속 외국인의 신원을 지목했던 이를 만날 수 있었다. 5.18 당시 전남대 학생이었던 최용주씨는 정년퇴직 후 5.18기념재단 연구위원 자격으로 해외 기록물을 발굴·분석해왔다. 평화봉사단 또한 그의 주된 연구대상이었다. 그는 5월부터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최 과장은 사진 속 인물을 "1980년 5월 당시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광주에 와 있던 팀 원버그(Tim Warnberg)"라고 설명했다. 평화봉사단 소속이란 점은 노 기자의 당시 기억과도 맞아 떨어진다.

1954년 11월 3일에 태어나 미네소타대학에서 화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팀은 전남대병원에 배치돼 근무 중이었다. 한국 이름은 자신의 성 '원버그'와 비슷하게 지은 '원덕기'였다.
 
5.18 이전부터 팀을 알고 지냈다는 사람을 지난 4월 28일 광주에서 만날 수 있었다. 1961년생인 이흥철씨는 충장로우체국 옆 '타박네 음악감상실'에서 DJ로 일하다가 팀을 처음 만났고, 그와 함께 5.18을 마주했다. 그가 일하던 음악감상실은 사진 속 무등빌딩과도 지척 거리였다.

이씨는 "나는 그를 팀이라고 불렀고, 팀은 나를 리(Lee)라고 불렀다. 팀은 밥 딜런(Bob Dylan)의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자주 신청했었다"라고 떠올렸다.
 
 이흥철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고 당시 같은 위치에 섰다. 당시 제일은행이 있던 건물은 허물고 무등빌딩이 새롭게 지어졌다.
▲  이흥철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평화봉사단 소속 팀 원버그(Tim Warnberg)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고 당시 같은 위치에 섰다. 당시 제일은행이 있던 건물은 허물고 무등빌딩이 새롭게 지어졌다.
ⓒ 이희훈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http://omn.kr/1nj2u  
덧붙이는 글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주민 갑질에 목숨 끊은 경비원 추모 물결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김민주 기자 kmj@vop.co.kr
발행 2020-05-11 23:37:16
수정 2020-05-12 08:26:31
이 기사는 번 공유됐습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 씨가 한 주민의 갑질에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추모와 반성의 촛불’ 시간을 마련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 씨가 한 주민의 갑질에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추모와 반성의 촛불’ 시간을 마련했다.ⓒ민중의소리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전날 새벽 한 주민의 폭언·폭행을 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와 반성의 촛불’ 시간을 마련했다.
11일 저녁 7시, 어스름이 깔릴 무렵 주민들이 경비실 앞으로 속속 도착했다. 퇴근하고 바로 참석한 사람들, 아기띠로 아이를 안고 온 사람들, 양초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과 그들을 챙기는 할머니들까지. 주민 100여 명은 촛불을 들고 두 손을 모았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경비실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경비실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다.ⓒ민중의소리
한 주민이 고인이 겪은 ‘갑질’ 사건을 정리해 발표했다. “얼굴을 수십 차례 때리고 머리를 수차례 폭행해 뇌진탕 증상을 얻으셨고...”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이내 차분해졌다.
주민 황선 씨는 직접 추모시를 준비했다. 고인을 떠올리게 하는 추모시 ‘선물’에 주민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다음은 추모시 ‘선물’ 전문.
<선물>
우리는 당신이
이상한 나라에서 왔는 줄 알았잖아요
의전이 형식이 되고
인사라는 것도 짐이 되기 쉬운 세태에
당신은 가장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가장 빨리 인사를 하셨습니다.
밤 새 깨어 쓰레기 분리수거를 돕던 당신,
봄처녀 꽃을 따듯 화사한 얼굴로 꽁초를 줍던 당신,
보이는 모든 아이에게서 홀로 업어 키운 딸아이를 떠올리던 당신.
이 모든
당신의 예사롭지 않은 선함이
사실은, 쓸쓸하고 아팠던 당신의 역사가 빚어낸
진주같은 거라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삼킨 눈물방울이 빚은 진주라는 것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요.
당신이 온 풍요로운 웃음의 나라로 가고 계신가요?
이제야 당신의 인생에 눈길을 주고
이제야 당신의 사연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우리가 드릴 선물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기억할게요.
그리고 당신을 닮아가겠습니다.
당신을 꼭 닮은 세상을
당신의 손주들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고마웠습니다. 미안합니다.
주민들은 고인을 기리며 ‘우리의 맹세’를 발표했다. 한 주민이 대표로 마이크를 잡고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후 선생님의 억울함을 해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우리의 사회가 이웃 사랑의 기품이 넘쳐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늘 주의하고 애쓰겠다”며 “그리하여 우리는 갑질 없는 세상, 착한 사람이 절망에서 쓰러지지 않는 세상을 바로 이 아파트로부터 구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경비실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경비실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다.ⓒ민중의소리
주민들은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눴다. 한 입주민은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저희들 곁에서 정말 물심양면으로 우리의 손발이 돼줬던 아저씨”였다며 “너무나 비통하다”고 말했다.
추모식을 진행한 송인찬(38) 씨는 “비가 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출근하는 데 옷 젖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항상 차 운전석으로 저를 밀어 넣고 차를 밀어줬다”고 기억했다.
이어 “제가 흡연자인데 가끔 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곤 했는데 아저씨께서 아파트 온 주변을 다 돌아다니시면서 쓰레기 줍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반성했다”며 “그래서 꼭 통을 만들어서 버리곤 했다”고 말했다.
송씨는 추모식이 끝나고 기자와 만나 “아파트 입주민들을 위해 하시는 하나하나가 삶의 귀감이 될 정도로 항상 솔선수범하시고 친절하게 해주셨다”며 “개인적으로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분은 다신 못 뵐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제가 훨씬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해주셨다. 그렇게 해주시니까 저도 인사를 더 하게 됐다”며 “그리고 그냥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웃으시면서 ‘오늘도 고생하셔유’ 하시고 저녁에 돌아오면 ‘오늘도 고생많았어유’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이들은 ‘석별의 정’을 부르며 추모식을 마쳤다. “잘 가시오 잘 있으오/축배를 든 손에/석별의 정 잊지 못해/눈물만 흘리네”라는 가사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추모식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이들은 자리를 바로 뜨지 못하고 촛불을 든 채 경비실 앞에 서서 이웃 주민들과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씨가 일하던 경비초소 책상에 놓여있는 경비일지에 고인 최씨가 작성한 기록은 3일까지였다. 격일로 근무하던 고인은 지난 5일 새벽에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주민들이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했었다.
최씨가 일하던 경비초소 책상에 놓여있는 경비일지에 고인 최씨가 작성한 기록은 3일까지였다. 격일로 근무하던 고인은 지난 5일 새벽에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주민들이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했었다.ⓒ민중의소리
앞서 고인은 10일 새벽 생전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인은 지난달 21일부터 자신이 일하던 아파트 주민 심모 씨로부터 지속적인 폭언·폭행을 당했다. 주민들을 위해 주차 공간을 확보해 놓고자 이중 주차돼 있던 심씨의 차량을 옮기려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이날 오후 서울강북경찰서는 아파트 주민들을 만나 폭행 사건과 관련한 진술을 들었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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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 3년,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제언 : 구시대적 통일관을 바꿔야

이형구 주권연구소 연구원 | 기사입력 2020/05/11 [16:10]
▲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3주년 특별연설 모습 [사진출처-청와대 홈페이지]

후퇴하는 남북관계, 오직 미국 탓일까?

5월 10일, 어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취임 3년 동안 가장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것도, 앞으로 2년 남은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도 남북관계 발전이다.

오늘날 주된 남북교류 사업으로 꼽히는 개성공단 재개, 금강산 관광 재개는 소수의 분단적폐세력들 빼고 대다수의 국민이 찬성하고 있다. 2018년엔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세계사적인 첫 북미정상회담도 열렸다. 게다가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교체한 데 이어 올해 총선에서 분단적폐세력을 참패시켰다.

이런 때에 평화와 번영, 통일을 실현하지 않는다면 또 언제 실현하겠나 싶을 정도로 남북관계 발전의 호기이다. 그런데 실제 남북관계는 발전은커녕 후퇴하는 듯 보인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남북관계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는 기본 요인은 미국의 방해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문제도 분명 있다. 예컨대 일본과의 분쟁에서 문재인 정부는 대체로 일본에 강경대응을 하고 있다. 지소미아 파기만 해도 훗날 결국 철회하기는 했지만, 당시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가 강행한 바 있다.

방위비분담금 문제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억 달러(약 1조 5천억 원, 약 50% 인상안)를 요구하고 있지만 문재인 정부가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정부는 미국에 13% 인상안을 제시했는데 “13% 인상도 많다”는 입장이다. 이런 사례들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모든 요구에 곧이곧대로 순응하는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유독 남북관계에서는 미국에 찍소리도 내지 못한다. 남북 교류협력의 주된 장애물인 대북제재도 북한과 마주 앉아 협의하면 해결할 방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남북관계에서 당사자인 북한과는 협의하지 않은 채 미국 설득에만 매달리고 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통일관·대북관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북한을 나쁜 나라라고 보고 있으며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의 체제가 자본주의로 바뀌어야 한다는 관념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자세히 살펴보자.

원인은 대북관

대통령 취임사는 대통령의 정책 방향을 집약해 보여주는 중요한 연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 중 한반도 부분을 보자.

“안보위기도 서둘러 해결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동분서주하겠습니다. 필요하면 곧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겠습니다. 베이징과 도쿄에도 가고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도 가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라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겠습니다. 한미동맹은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한편으로 사드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 및 중국과 진지하게 협상하겠습니다. 튼튼한 안보는 막강한 국방력에서 비롯됩니다. 자주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북핵문제를 해결할 토대도 마련하겠습니다. 동북아 평화구조를 정착시킴으로써 한반도 긴장완화의 전기를 마련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통일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남과 북의 협력은 일언반구 없이 ‘한미동맹 강화’와 ‘북핵 폐기’만을 외쳤다. 문재인 대통령의 통일관, 대북관은 2017년 1월 출간한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통일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될 텐데, 북한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훈련이 되지 않았으니 상당히 순진할 수밖에 없고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할 것 같다” (그래서) “흥남에서 무료 변호 상담, 무료 변론을 하면서 거기서 생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통일을 자본주의 체제 통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통일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로의 통일이 될 텐데”라는 대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체제를 사라질 수밖에 없는 나쁜 체제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반북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은 통일 정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통일부가 공표한 ‘문재인의 한반도 정책’에는 최우선 과제로 ‘평화공존’을 꼽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통일 정책은 ‘통일’이 아니라 ‘공존’인 것이다.

‘문재인의 한반도 정책’에 “‘평화공존’은 그 자체가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덧붙여 놓았지만, 공존과 통일은 엄연히 다르다. 지금도 한국과 북한은 공존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도 평화공존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화공존론은 사실상 흡수통일론이다. 2014년에는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의원도 공존통일을 주장했다. 보수 지식인 박성조 교수도 평화공존론을 주장하며 “한국의 통일은 ‘동족(同族)주의’에서 벗어나 북한과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을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공존론도 보수세력의 평화공존론과 같다. 통일을 하려면 결국 북한이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런 관점에 있으니 남북관계도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의 승인과 허락하에 추진하려고 드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8월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북한 내 자본주의 경제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며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설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그러나 남과 북은 70년 넘는 동안 체제 대결을 통한 통일을 실현하지 못했다. 통일은 ‘민족’을 ‘체제’보다 앞세워야 실현할 수 있다.

2000년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스스로 반공주의자라고 밝혔지만, 남북이 ‘한민족’으로서 반드시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여겼다. ‘민족’을 ‘체제’보다 우위로 본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냉전적 남북관계는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합니다. 1,300여 년간 통일을 유지해온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도 한없는 죄책감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남북 간의 화해와 교류협력과 불가침…이것을 그대로 실천만 하면 남북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에의 대로를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체제보다는 민족과 통일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체제’를 ‘민족’보다 우위로 본다면 어느 한 쪽의 체제가 붕괴해야 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빠진다.

그러나 ‘민족’을 ‘체제’보다 우위로 본다면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통일을 포기하지 않게 된다. 대신 남과 북이 체제가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통일을 할지 방안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15공동선언 제2항에서 사실상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토대에서 통일을 추진해나가자는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퇴임 후인 2006년에도 “제1단계의 ‘남북연합’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남북연합’ 체제는 1민족 2독립정부제도이다. 남북은 남북정상회담, 남북장관급회담, 남북국회회담 등을 가질 수 있으며, 모든 안건을 만장일치로 처리함으로써 남북 어느 쪽도 불안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북연합’을 10년이고 20년 한 후에 남북연방제나 완전통일로 들어갈 수 있다”라며 체제가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 통일을 추진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국민에게 알려 나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반북의식이 강해 ‘체제’ 통일이 되어야 ‘민족’ 통일이 가능하다는 태도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체제’가 다르더라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이 미국의 반대를 뚫고 6.15공동선언을 합의해 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미국의 방해에 꼼짝 못 하는 문재인 정부의 차이이다.

민주당의 경우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은 어떨까?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얼마 전까지 민주당 원내대표를 한 이인영 의원은 ‘2018년 한반도 정책 세미나’에서 “1단계는 남북의 교류협력과 투자의 증대, 2단계는 산업과 자원의 연합, 3단계는 시장화 화폐의 교류통합, 4단계는 재정과 정치의 점진통일”이라며 통일 구상을 밝혔다. 점진적인 통일은 산업과 시장의 통합 이후에나 일어날 일로 보고 있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자본주의 체제 통일을 염두하고 있는 것이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2018년 3월에 한 강연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후에 김정은 국무위원장 시대가 열려) 통일이 멀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9년 10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도 “빠른 통일의 길은 없어 보입니다. 대신 긴 평화의 시간이 흐를 겁니다”라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의 경우 2018년 판문점 정상회담과 9월 평양정상회담 전후에 이뤄진 것이다. 연이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국민 속에선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부쩍 커졌지만,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국민과는 반대로 통일이 더 멀어졌다고 봤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가 국민과 반대로 통일이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남북통일을 남북의 화해와 관계개선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북한 체제가 붕괴해야 이뤄지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의 사고방식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수록 북한의 체제 붕괴는 요원해지고 그만큼 통일도 멀어지는 것이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북한 체제 붕괴를 구상한 탓에 박근혜 정권의 반북 통일 정책에도 동조한 바 있다.

박근혜는 2014년 갖은 통일정책을 발표했다. 박근혜가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북한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극도의 반북 대결 정책을 편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반북통일정책의 하나로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통일지성 원탁회의’라는 것을 추진했다.

‘통일지성 원탁회의’는 흡수 통일을 준비하는 기관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통일 지성 원탁회의 구상을 ‘통일준비위원회’를 꾸림으로써 현실화했다. 통일준비위는 내부에 흡수통일 준비팀을 꾸렸다는 의혹이 나와 시민사회의 지탄을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박근혜 정권의) 통일부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지성 원탁회의’는 바람직하다”, “즉각 시행해야 할 일”이라며 적극 지지했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흡수통일준비팀 논란을 겪은 통일준비위에 대해서도 “제가 통일준비위원회에 대해서 굉장히 지지했던 사람”이라며 더욱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활동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가 박근혜 정권의 통일 방안에 동조한 이유는 북한 체제는 옳지 않고 변화해야 한다는 ‘반북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대북관: 돈은 피보다 진하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대북관을 정리해보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민족 개념이 “피보다 돈이 중요하다”는 경제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이인영 전 원내대표가 직접 한 말에서도 정확히 드러난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2019년 5월에 한 강연에서 “예전에는 통일의 당위성을 한반도의 민주주의 체제 정착, 남과 북은 하나라는 민족주의 사상에서 찾았다”면서 이제는 “경제 논리로서 통일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통일을 경제 성장의 수단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면서 민족을 고리타분한 이야기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물론, 통일하면 큰 경제 효과도 이룰 수 있다. 통일은 경제 성장이라는 효과도 가져오지만 어디까지나 통일은 통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를 뒤집어서 경제 성장을 목적으로, 통일을 경제 성장의 수단으로 뒤바꾸면 안 된다.

경제 성장이 목적으로 되면 꼭 통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경제 효과만 누리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통일의 필요성은 점점 옅어지고 통일정책도 ‘평화통일’이 ‘평화공존’으로, ‘평화공존’이 ‘이웃국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통일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주는 ‘민족’ 우선의 관점이 필요하다. 민족은 돈이나 경제 등의 다른 가치로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인영 전 원내대표와 같이 민족이 구시대적 가치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어 우려스럽다. 2007년에는 대표적인 문인 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논란 끝에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꾼 일이 있었다. 당시 도종환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은 명칭 변경에 대해 “근본을 지키되 새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쇄신하라는 법고창신의 요구”라고 말하기도 했다. ‘민족’이란 개념은 새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민족’은 오늘날 시대적 가치에 더없이 부합한다. 우리 국민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주민들을 직접 보았다. 88.7%의 국민이 남북정상회담을 지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5.1경기장에서 “평양 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분 우리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라고 한 연설은 평양 주민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우리 국민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남북 대결’ 의미로서의 민족은 구시대적 가치이지만 ‘평화와 통일’의 민족은 온 국민의 지지를 받는 오늘날의 가치이자 전통적인 가치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체제’나 ‘경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민족’을 우위에 놓는 통일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통일관: 협력보다 반북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통일관을 정리하면 경제 우위를 통해 북한의 체제를 붕괴하고 흡수통일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정책은 미래통합당과도 별다른 점이 없다. 다만 접근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래통합당은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대결정책을 편다면 민주당은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교류협력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북한과의 교류협력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방점은 ‘교류협력’보다 ‘반북’에 찍혀 있다는 것이 문제다.

문재인 정부가 반북의식과 경제 우위를 활용한 북한의 체제 붕괴를 추구하면 통일을 실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압박은 남과 북의 공조로 헤쳐나가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과감하게 북한과의 공조를 선택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열쇠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이제 국회에서도 절반을 훌쩍 넘는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 갤럽이 5월 8일에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71%이고 민주당 지지율은 46%에 달했다. 적폐의 방해에 굴하지 말고 국민의 요구를 실현하라는 기대의 표현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국민의 명령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한편,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의 열쇠는 국민의 손에 쥐어져 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알아서 척척 국민의 요구를 해결하는 만능해결사는 아니다. 다만, 미래통합당이 국민의 뜻에 거스르려는 적폐라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국민이 지지하고 힘을 실어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배와 같다.

남북관계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알아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지만 앞서 살펴본 한계로 미국의 방해를 뿌리치기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2016년 탄핵 촛불이 타오른 이후 한국 정치는 국민이 주도했다. 민주당이 180석을 확보한 총선도 지금은 민주당의 시대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국민주권 시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손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실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