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9일 수요일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김한솔 기자

기후위기 시대,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의 소멸과 전환은 피할 수 없다. 석탄화력발전은 순차적 폐지가 예고됐다. 내연기관차는 전기차로 전환되고 있다. ‘모두’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이같은 전환이 필수적이라면 전환 과정 역시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손실을 나눠야 한다.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은 기후위기에 대응해 어떤 지역이나 업종에서 급속한 산업구조 전환이 일어날 때, 과정과 결과가 모두에게 ‘정의로워야’ 한다는 개념이다.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전환 책임을 일방적으로 떠안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경향신문은 ‘기후위기 시대,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기획 1~2회에서 전환 대상 산업에 종사하는 석탄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와 내연기관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체감하는 지금까지의 전환 과정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기후위기 시대,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마지막 회에서는 정의로운 전환 과정에서 더욱 소외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그런 노동자들을 늘리고 고착화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차별적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문제를 다룬다. 정부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도 짚어봤다. 이제 사회적으로 막 논의가 시작된 정의로운 전환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하는 본질적인 고민과 뗄 수 없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석탄발전소의 ‘투명인간’들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아마도 석탄을 실은 트럭을 운전하거나 발전기를 정비하는 중년 남성이 연상될 것이다. 여기 충남에 있는 석탄화력발전소에서 5년째 일하는 A씨가 있다. 발전기, 터빈, 사무실, 발전소 앞 도로…. 발전소 내·외부 모든 곳에 A씨와 그 동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A씨는 발전소 자회사 소속 청소·미화 노동자이고, 여성이다.

A씨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오전 7시30분쯤 출근해 직원 사무실 책상 주변과 화장실 휴지통을 비운다. 직원들 작업복을 수거해 세탁장에 보낸다. 기름걸레로 바닥을 밀고, 마른걸레로 마무리한다. 사무실 정수기와 커피머신 물통 청소까지 하고 나면 오전이 거의 지난다. 쪽잠을 자고 난 뒤 오후에도 비슷한 일을 반복한다. 발전기와 터빈 같은 ‘현장 청소’ 일이 특히 고되고 위험한데, 이것은 돌아가면서 한다. 방진 마스크와 안전모, 귀마개를 착용하고 40도 안팎의 현장에서 기름걸레로 바닥을 민다. 흔히 생각하는 발전소의 ‘핵심 업무’는 발전기를 돌아가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A씨가 쓸고 닦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발전기가 함께 멈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A씨가 쓸고 닦는 덕분에 직접 발전기를 돌리는 누군가는 깨끗한 작업복을 입을 수 있고, 깨끗한 화장실을 쓸 수 있고, 청결한 공간에서 쉴 수 있다.

발전소 일은 누구에게나 고되다. 차이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샤워실이 없어요.” A씨와 90명 넘는 그의 동료들은 매일 조를 짜고 순서를 정해 교대로 남성용 샤워실에서 씻는다. 남의 작업복은 세탁장에 맡기지만 자신들의 작업복은 맡길 여력이 없어 샤워를 하면서 직접 빤다. 휴게실이 있는 층에도 여자 화장실은 없다. 자신이 밥 먹은 그릇을 씻을 싱크대도 없다. “건물 지을 때 설계도에 우리들 공간도 들어가 있었어야 해요. 그런데 다 만들어 놓은 다음에, ‘어? 아줌마들이 쉴 데가 없네?’ 해서 자투리 공간을 준 거죠.”

다양한 노동자 배제한 ‘새 일자리’를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석탄발전소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청소·미화 노동자들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해물질이 배출되는 장소인 만큼 매일 청소는 해야 했을 것이다. 다만 A씨 같은 노동자들, 그러니까 ‘비핵심’ 업무로 분류되고, 직접고용돼 있지 않고, 남성 중심인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몇 안 되는 여성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A씨는 항상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투명인간인 셈이다.

■노동자는 균일하지 않다 

국적·성별·지역 차이 존재하는데
‘균일한 집단’으로 노동자를 묶으면
모두에게 정의로운 전환은 불가능
 

석탄화력발전소는 남성 중심 사업장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분할 것 없이 남성 노동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 그런데 왜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숫자도 적은, 게다가 발전소의 ‘비핵심 업무’로 생각되는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의 문제에 신경써야 하는 걸까.

“미국에서는 정의로운 전환 논의가 원주민이나 흑인 문제와 결합해서 나오고 있어요. 같은 노동자라도 그 안에서 국적·성별·지역 등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균일한 집단’으로 묶여서 논의돼 온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한 거죠. ‘너희에게 적용되는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개념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아’라는 목소리인 거예요.” 정은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이 말했다.

노동자는 모두 다르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더라도 성별에 따라 더 불리한 업무환경에 놓일 수 있고, 국적에 따라 차별받을 수 있으며, 고용형태에 따라 맞닥뜨리는 문제가 다를 수 있다. 개별 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이렇게 다양하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서는 이 다양성이 고려돼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정의로운 전환 가이드라인’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정의로운 전환) 정책과 프로그램은 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도전과 기회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할 때 젠더 관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공평한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구체적인 젠더정책이 고려돼야 한다.”

■정의의 범위는 넓다 

기존 노동시장의 문제 반복 없도록
새 일자리의 고용형태·임금체계 등
어떻게 짤 것인지 고민을 해봐야
 

정의로운 전환은 전환 과정에서 과정과 결과가 모두에게 정의로울 것을 지향한다. 석탄화력발전소 대신 신재생에너지가 들어서고, A씨를 포함한 기존 발전소 노동자들에게 바뀐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자. 하지만 A씨가 여전히 시간에 쫓겨 남성 샤워실에서 샤워하고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쪽잠을 자야 한다면, 그것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는 2019년 ‘젠더 관점에서 본 신재생에너지’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재생에너지 분야의 여성 비율은 32%로,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분야보다 다소 높은 수준이지만 그 안의 여성들은 같은 직위 남성보다 적은 임금과 유리천장의 문제를 겪고 있다고 밝혔다.

“영역의 차이일 뿐 남성 노동자를 기본값으로 상정하는 노동구조 자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재생에너지로 바뀐다고 해도 (노동 조건은)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이 되는 거죠.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과정에서 그런 차별이 얼마나 사라질 수 있을까.” 정 연구원이 말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간다면 그건 정의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아직은 주체가 되지 못한, 가시화되지 않은 이들을 발굴해 드러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젠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조직 노동자, 동일노동 동일임금, 노동시장 이중구조 같은 것도 젠더와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제기된 문제이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정의로운 전환의 범위를 전환 과정에서 사라지는 ‘일자리 보전’에 한정하는 것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오래된 문제’까지 함께 논의한다면 정의로운 전환과 기존 노동운동의 주장을 동어반복하는 게 아닐까.

“정의로운 전환을 통해서 기존 노동시장이 갖고 있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판타지를 가지면 안 됩니다. 다만 정의로운 전환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의 고용형태, 임금체계 같은 것을 어떻게 짤 것인지를 고민해 볼 필요는 있어요. 기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만들어낸 문제점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조성주 정치발전소 대표가 말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때를, 고착화된 현실에서는 바꾸기 어려웠던 구조적 문제점들을 개선할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정규직 일자리여야 한다’ 같은 납작한 논의로는 그 안의 문제점들을 그대로 안고 갈 수밖에 없어요. 예컨대 전통적으로 저숙련, 저학력 그리고 여성에게 집중됐던 일자리들의 ‘사회적 가치’를 더 높게 설정한다거나,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임금체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고민들이 많이 필요하죠.”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열린 2050 탄소중립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열린 2050 탄소중립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하고 있다. 청와대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는 메시지 분명히 줘야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 ‘한국판 그린뉴딜’에서 정부가 그리는 미래는 낙관적이다.

정부는 탄소중립은 ‘도전적 과제’이지만 가야 할 길이며, ‘전향적, 선제적, 능동적 접근’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경제·사회의 부담은 최소화하고, 우리의 역량은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으로 움직일 것이고, 그린뉴딜은 “미세먼지 해결 등 우리 삶의 질을 높여줄 뿐 아니라 날로 강화되고 있는 국제 환경규제 속에서 우리의 산업 경쟁력을 높여주고, 녹색산업으로의 성장으로 대규모 일자리를 창출해 낼 것”(한국판 뉴딜 국민보고대회의 대통령 기조연설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쉬운 전환’은 없다. 전환은 필연적으로 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의 고통을 수반한다. 석탄화력발전소·내연기관차 퇴출로 일자리를 잃을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이 이미 이를 보여준다.

정의로운 전환을 오래 연구해온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이 보기에 지금 정부가 내놓는 메시지는 지나치게 ‘긍정적’이다.

“지금은 이 산업 전환이 ‘굉장히 크고 어려운 전환이며, 전환 과정에서 피해와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는 게 우선이에요. 그런데 현재 정부는 계속해서 무언가의 앞에 ‘K’를 붙여가면서 (이 전환이) 새로운 산업의 기회라는 식의 말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기업과 정부부처, 노동조합 모두 이것이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시그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전환의 과정을 자꾸 ‘새로운 일자리 창출의 기회’로만 부각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과정’임을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해와 협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넘어…‘살고 싶은 사회’로의 전환 생각해야 

한국노동연구원의 이정희 박사도 지금까지의 정부 정책은 ‘산업정책으로서의 접근’이었다고 평가한다. ‘탄소중립을 위해 어떤 산업정책을 펴겠다’는 계획만 밝혔을 뿐, 그로 인해 직접적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로부터는 구체적인 의견수렴도 받지 않았고, 하다못해 전환 과정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이해당사자인 노동자들은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 계획상) 그린뉴딜도 결국은 녹색산업 혁신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인데, 기후위기를 빌미로 기업활동을 어떻게 잘 영위하게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느낌이에요.”

■‘잊혀진 사람들’ 막기 위한 소통과 정보 공유 

정부, 전환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해·협조 구해야
‘잊혀진 사람’ 없도록 다양한 소통을
 

불평등 연구자인 로버트 라이시 미국 캘리포니아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코로나 4계급’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계급으로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이 등장했다고 했다. 미국인 대부분이 ‘볼 수 없는 곳’에 머무는 이들이 코로나19가 닥쳤을 때 가장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이정희 박사는 정부가 지금과 같은 접근 방식을 고수한다면 일부 노동자들은 조용히 사라져 ‘잊혀진 사람들’이 되고, 일부는 대안을 찾지 못해 극한투쟁만 하는 두 그룹으로 나뉠수 있다고 우려한다.

“누군가 나한테 영향을 미칠 의사결정을 하면 그 과정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에요. 요구를 100% 관철하지 못하더라도 그런 자리를 만드는 게 민주주의이고, 특히 기후위기와 같은 전 인류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당연히 그런 주체들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게 중요하죠. (지금처럼) 마치 경제 개발하듯이 정부 주도로만 가면 어떤 저항으로 이어질지 몰라요.”

그는 “각 주체가 각자의 고민을 들고 와 이야기하고, 공감대 형성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대화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정부는 최근 출범한 탄소중립위원회를 통해 이 박사가 말한 것처럼 각계의 의견수렴을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무려 97명의 위원을 둔 ‘거대 조직’에서 실질적인 의견수렴과 논의가 가능할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이 솔직한 고민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는 작은 단위의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기구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층위에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현우 위원의 말이다. “소통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대표 몇 명이 공식적인 기구에 소속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도 많고, 비정규직도 많기 때문이에요. ‘여러 층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결국 ‘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제도가 결합됐을 때 가능해요.” 캐나다의 정의로운 전환 태스크포스(TF)는 2018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투명한 정보 공개’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노동자들과 자주 그리고 분명하게 소통하라.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무언가가 결정되지 않았다면,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정보 공개와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환경 및 시민사회단체 연합인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정부의 그린뉴딜 계획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환경 및 시민사회단체 연합인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정부의 그린뉴딜 계획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정의와 공정 사이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용어의 문제’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현우 위원이 쓴 책 <정의로운 전환>을 보면, 이 용어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과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환경정의,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이 작성한 ‘기후변화와 노동계의 대응과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위하여’이다. 영어의 ‘Just Transition’이 ‘정의로운 전환’으로 번역돼 소개된 뒤 연구자들은 대개 이 용어를 사용해왔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나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며 이 용어가 부각되기 시작한 요즘, 정부는 ‘정의로운 전환’ 대신 ‘공정(한) 전환’이라는 표현을 쓴다.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에서도 ‘탄소중립사회로의 공정 전환’을 3대 정책방향 중 하나로 제시했고, 탄소중립위원회의 분과에도 ‘공정전환위원회’가 등장했다.

영어의 ‘just’에는 ‘공정(fairness)’의 의미도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이 쓰이는 맥락은 분명히 다르다. “ ‘공정한 전환’에는 전환 과정이 절차적, 사후적 보상 문제로 축소되는 뉘앙스가 있어요. 의미가 분명히 달라요. 영어에도 ‘Fair and Just Transition’(공정하고 정의로운 전환)이라는 용례도 있기 때문에, 두 개의 의미는 다른 것이죠.” 김현우 위원이 말했다. 정은아 연구원도 같은 생각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공정 담론’을 고려했을 때, ‘공정한 전환’은 정의로운 전환이 기존에 주장했던 깊이와 폭을 충분히 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의로운 전환에는 기후위기 대응 정책이 어떤 차별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노조 자체의 역량을 강화해 작업장의 민주화를 이뤄내는 것이라든지 지역 내 산업 다양화와 생태 전환 같은 문제도 포괄돼 있어요. 정부가 ‘공정 전환’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발표하는 정책은 결국 노동자의 ‘일자리 대책’으로만 축소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의든 공정이든, 그 의미만 잘 구현되면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어떤 개념을 정책화하는 데는 어떤 단어로 시작하는지도 중요하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진행한 산업 전환 관련 연구용역 설문조사에는 ‘정의로운 전환과 공정한 전환’이라는 용어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도 포함됐다. 이정희 박사는 지금은 보편화된 ‘비정규직’ 단어를 예로 들었다. “외환위기(IMF) 이후에 비정규직이 50%를 넘었다는 통계청 수치가 나왔어요. 노동진영에서는 ‘비정규’라는 말을 들고나왔는데, 당시 노동부에서는 ‘비전형’ ‘비정형’이라는 단어를 썼죠. 용어 때문에 엄청 논란이 있었어요.” ‘비정규’가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의 지위를 강조하는 단어인 반면 비전형이나 비정형은 고용의 특수한 형태를 강조한다. “그때 한창 (비정규직의) ‘규모 논쟁’이 있었거든요. 정부는 당시 종사자 지위에 따라 상용직, 임시직, 일용직으로 분류했을 때 임시직과 일용직만 ‘비정형(혹은 비전형)’에 해당한다고 했고, 노동계에서는 상용직으로 분류되더라도 파견이나 하청업체의 경우 용역업체 계약이 끝나면 잘리는데 정규직으로 볼 수 있느냐고 맞섰어요. 결국 특정 단어를 쓴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죠. ‘정의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과정에서의 참여와 가치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정부 쪽에서 생각하는 공정한 것은 무엇인지 들어봐야죠.”

2050 탄소중립 추진전략 작성에 참여한 부처 관계자는 “ ‘정의’라는 단어가 공문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고, 의미상으로는 정의로운 전환과 같다고 생각한다. 과정과 결과가 모두 포함돼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 

전환의 범위, 더 넓고 깊게 확장될 것
수많은 이해 관계자 조율하려면
‘지향해야 할 가치’를 기준 삼아야
 

충남연구원은 올해 초 석탄화력발전소 폐지로 영향을 받는 ‘20명의 주체’에 대한 가상 인터뷰집,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스무가지 목소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노동자뿐 아니라 발전소 인근 어민과 개발위원회 임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의원, 지역기자, 청소년 등 발전소와 직접적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각 주체가 어떻게 전환의 영향을 받는가 상세히 다룬다.

정의로운 전환의 범위는 명확히 정해진 것이 없다. 논의가 무르익지 않은 초기 단계에는 ‘화석연료 기반 산업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조금 좁게 다뤄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넓고, 깊게 확장될 것이다. 이 보고서가 보여주듯 전환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직접적인 종사자들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개인의 일상, 산업의 구조, 국가의 정책방향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면에서 변화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많은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조율돼야 할까. 결국 정의로운 전환에 관한 논의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정희 박사가 말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지금과 같은 대량생산 시스템하에서 계속 살 것인가,라는 고민들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기후위기와 관련한 논의를 축소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일자리 문제’로 제한해서 한정된 파이를 내가 가질지 네가 가질지 논의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의로운 전환 이후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 대량생산, 대량소비, 과도성장주의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당장 답이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본질적인 고민일 것 같아요.”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106100600015#csidx59d646c96cb7a7a9b49aeb5917e458c 


"녹이 시뻘건 '철관'... 순간, 눈에서 불이 났다"

 [6·10만세운동] '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을 찾아서 ①

21.06.10 07:22l최종 업데이트 21.06.10 09:35l글: 김병기(minifat)사진: 권우성(kws21)

6월 10일 개최되는 6·10만세운동 기념식은 처음으로 치러지는 정부 주관 행사이다. <오마이뉴스>는 6·10만세운동의 의미와 주요 인물을 조명한다.[편집자말]
큰사진보기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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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낫이 원체 무겁잖아요. 그걸 들고 열두 살 때 공동묘지에서 혼자 아버님 묘를 벌초한 자리에서 잠깐 졸았나 봐요. 흰 창호지 전지를 양손에 들고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열개 정도 내려갔더니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흰 뼈가 나오더라고요. 팔, 다리, 가슴뼈... 그런데 머리가 없어!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다 눈을 번쩍 떴어요. 너무 무서웠죠."

권대용(77세)씨는 지금도 섬뜩하다고 했다. 그 뒤 6·10만세운동의 주역인 막난 권오설 선생(1897~1930)의 '철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 66년이 걸렸다. 

[철관] 12살의 꿈

권오설 선생의 양아들인 권씨가 부부합장을 위해 파묘한 것은 2008년 4월 15일이었다. 제95주년 6·10만세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만난 권씨는 파묘 당시 "녹이 시뻘겋게 슨 철제 관을 보고 눈물은 안 나오고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고 회상했다.

국가보훈처는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권오설·이선호·박래원·이동환 선생을 선정했다.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서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다. 권오설 선생은 노무현 정부 때인 지난 2005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추서됐다.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와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권오설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와 2005년 노무현 정부 당시 권오설 선생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독립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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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진보기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권오설, 이선호, 박래원, 이동환 선생을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들은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민족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인물이다.
▲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권오설, 이선호, 박래원, 이동환 선생을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들은 1926년 6월 10일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민족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인물이다.
ⓒ 독립기념관/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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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佳日)마을. 삼각형 모양의 정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이곳은 안동 권씨가 500년간 지켜온 동성마을이다. 지난 2일 찾아간 선생의 고향 마을 어귀 가일지(못)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잔물결이 일었다. 그 앞에 우뚝 선 300년 된 회화나무 그늘 아래 정자에서 대여섯 명의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면서 웃었다.

이곳이 항상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안동의 모스코바'. 이 마을에 붙여진 별칭이다. 근대 사회주의 운동을 연 권오설과 권오직 형제, 권오상(권오돈) 등 안동의 초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풍산들이 내려다보이는 가일못 제방 위, 현충시설로 지정된 권오설 선생 기적비 앞에 서면 일제 강점기의 엄혹했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입구에 세워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 민족독립을 위해 몸 바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삶과 뜻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1월 11일 세워졌다.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입구에 세워진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 민족독립을 위해 몸 바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삶과 뜻을 기리기 위해 2001년 11월 11일 세워졌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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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 권오돈(족보명 오상, 1900~1928, 애족장(2005)), 권오운(1904~1927)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북 안동 가일마을.
▲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 권오돈(족보명 오상, 1900~1928, 애족장(2005)), 권오운(1904~1927)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북 안동 가일마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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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 "두개골이 왜 안 보이노... 두개골 찾아봐라"

권오설 선생이 묻힌 가곡 1-2동 공동묘지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맨홀 공장 뒤쪽으로 돌아 산길을 오르니 '권오설 선생 묘소'라고 적힌 작은 표지석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위쪽에 아카시아와 밤나무가 묘소를 감싸고 있었다. 

'6·10만세운동의 주역/노동 민족 운동의 지도자/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의 묘'라고 적힌 묘비석만 없었다면, 다른 묘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권씨가 열두 살 때 잠시 잠들었다던 바로 그곳이었다.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소(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고인은 6.10만세운동 직전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0년 4월 17일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했으며, 2008년 4월 14일 고인의 묘에서는 철관이 발견되었다. 현재 철관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한 공동묘지에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가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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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일본 놈들이 아버님 시신을 훼손한 게 아닌가? 그 꿈을 잊은 적이 없어요. 하지만 형편이 힘들어 확인할 생각은 못했죠. 마침 2008년에 보훈청에서 이장·보수비용으로 150만원을 줬어요. 문중에서는 둘레석을 쌓은 뒤 상석을 놓자 했는데, 저는 그 속을 미치도록 들여다보고 싶었죠. 결국 생각한 게 어머니와의 합장이었어요."


포클레인으로 조심스레 파내려가다가 직사각형 모양의 녹슨 철관의 형체가 나오기 시작할 때 권씨는 공사를 중지시킨 뒤 학계에 알렸다. 인부들이 손으로 조심스럽게 파내려가 철관의 형체를 보존시키면서 유골을 수습할 때였다. 

"어? 그런데 왜, 두개골이 안 보이노? 빨리 두개골 찾아봐라."

그는 꿈속에 본 모습이 떠올라 또다시 섬뜩했다고 했다. 하지만 구석진 자리에서 뒤늦게 발견된 두개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했다.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파묘하기 전 권오설 선생의 묘소 모습.
▲  합장을 위해 파묘하기 전 권오설 선생의 묘.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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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인의 양자 권대용씨(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묘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묘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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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권오설 선생의 묘에서 붉게 녹슨 철관이 발견되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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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일제가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을 철관에 넣어 매장한 현장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에 확인되고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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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였죠. 원래 합장하려던 날인 4월 17일(권오설 선생의 기일).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요.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슬프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철관을 보았을 때에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틀 뒤에 창밖을 보며 폭우보다 더 많은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생가터] 양반유림 가문의 빈농... 까치구멍집

가일마을 입구 회화나무를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병곡종택과 수곡고택의 담장을 따라 걸으면 남천고택 담장 안쪽에 권오설 선생 생가터가 있다. 해방 후에 불이 났고, 지금은 참깨 묘목이 자라고 있다. 작은 텃밭만 봐도 당시 권오설 선생의 가난을 짐작할 수 있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생가터. 권오설 선생 생가 흔적은 사라지고 밭이 되었다.
▲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생가터. 권오설 선생 생가 흔적은 사라지고 밭이 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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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죠. 초가집 용마루 양 옆에 구멍이 있어서 일명 까치구멍집이라고 불렀습니다."

권대용씨의 말이다. 권 선생의 부친 소암 권술조는 서당 훈장을 지내는 양반 유림이었는데, 빈농이었다. 권 선생은 부친의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7년에는 남명학교를 다니며 신학문과 한학을 익혔다. 1916년 대구 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 전신)에 입학했지만, 3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친일교사 배척, 동화적 노예교육을 반대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집안이 가난해서 학비 낼 돈도 없었지만, 요즘말로 하면 소위 '운동권'이었나 봅니다. 권술조 할배가 쓴 제문을 보면 이 때 당시를 묘사하며 '루에 오르던 자의 사다리를 뗐다'고 절망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뒀지만, 일본인 교장도 부친의 재능을 아껴서 경주 부잣집에 가정교사를 하도록 배려해줬다고 하더라고요."(권대용)
 
큰사진보기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가 고인의 아버지가 작성한 제문(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다.
▲  1926년 융희 황제(순종)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의 양자 권대용씨가 고인의 아버지가 작성한 제문(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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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선생은 그 뒤 상경해서 중앙보통학교와 경성부기학교 등을 다녔지만 중도에 그만뒀고, 지인이 자리를 알선해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다가 3·1운동을 맞았다. 권대용씨는 "그 때 부친이 광주 시위를 주도한 배후로 지목돼 체포된 뒤 6개월의 형을 살았다"고 말했다. 권 선생은 목포에서 복역했다.  

[원흥의숙] 100년 뒤에 들어선 한옥책방 '가일서가'

가일마을 입구 두 갈래 길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노동서사'가 나온다. 177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문중 위패를 모시던 제사 공간이었고 서당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1919년 11월, 고향 가일마을로 돌아온 권오설 선생은 이곳에 '원흥의숙'이라고 불리는 원흥학습강습소를 세워 마을 청소년을 교육했다. 

"많게는 학생들이 200명이 넘었다고 하더라고요. 부친은 교장 겸 교사였지요. 월급을 타면 필기구를 사라고 아이들에게 다 나눠줬답니다. 일직면에는 '일직서숙', 풍산에는 '풍산학술강습회' 등 분교를 열어 교육운동을 했지요. 목소리가 하도 카랑카랑해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도 들렸다고 합니다."(권대용)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이 고향인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원흥학술강습소를 운영했던 노동서사. 오른쪽 건물은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된 노동재사.
▲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이 고향인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원흥학술강습소를 운영했던 노동서사. 오른쪽 건물은 학생들의 숙소로 사용된 노동재사.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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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숙식도 했던 노동서가 바로 옆 건물 '노동재사'에는 작은 한옥 서점이 들어서 있다. 이가람, 김현정 부부가 문중의 허락을 받아 차린 '가일서가'다. 책만 파는 게 아니라 노동서가 한쪽 방에서 글쓰기를 교육하고, 가일서가에서는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인문 사랑방이었다. 지난 2일에도 사진작가를 초대해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였죠. 1919년에 이곳에서 원흥의숙이 시작됐는데, 100년 뒤인 2019년에 가일서가를 열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일제의 불공정한 지배에 대해 깨우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건물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요. 한번은 국회도서관에서 이곳을 소개해달라고 해서 '막난 권오설에 부치는 편지'라는 글을 썼는데, 선생님의 아드님(권대용)이 고맙다고 전화까지 주셨어요."(가일서가 김현정씨) 

[조선공산당] "왜놈들과 맞선 항거의 무기"

권오설 선생이 100여 년 전에 가일마을에서 시작한 건 교육운동만이 아니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펴낸 자료총서 '권오설2'에 따르면 1920년에는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했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 일직면금주회 회장,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입회, 풍산청년회 결성 등 청년·농민·노동운동을 벌였다. 

그 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간 권오설 선생은 1924년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됐다. 조선노동총동맹 상무위원을 거쳐 책임자로 올랐다. 서울에서는 인쇄직공조합을 조직하고 양말직공·고무직공·양화직공의 파업을 지도했다. 1925년 4월 17일에는 김재봉·김찬·조봉암·박헌영·김단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권오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권오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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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은 일제에 의해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와해됐지만, 권오설 선생은 조직 재건을 위해 박헌영 다음으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았다. 당시 그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들어오는 자금도 관리하고 있었다.   

"8·15 때 해방된 것은 친일파였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습니다. 반민특위가 뒤집어진 뒤 부친의 이름 앞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었죠. 그래서 서훈도 늦게 받았어요. 하지만 부친이 활동할 때에는 남북이 갈리지도 않았죠. 당시 78%의 민중이 사회주의를 옹호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려면 많은 정보와 자금이 필요했고, 조직을 통해야만 가능했어요. 사회주의는 왜놈들과 맞선 항거의 무기였죠."(권대용) 

1926년 9월 1일 발표된 조선공산당 선언에도 "당면한 투쟁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조선을 절대로 해방함에 있다"고 적혀있다. 당면 정치 요구로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 및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비밀, 보통,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에 있을 일 ▶일본의 군대, 헌병 및 경찰을 조선에서 철수할 일 ▶무제한의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을 내걸었다. 권대용씨의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2편] "안동이 발칵...'철관' 내려올 때 까마귀 떼 바글바글" http://omn.kr/1tswl 

[관련기사] "중기관총으로 겁박... 좌-우익이 함께 만세 불렀다" http://omn.kr/1tp07 )
 

[아침신문 솎아보기] “국민의힘 ‘권익위’ 조사 받아라” 빗발치는 여론

 국회의원 조사권한 없는 감사원 찾아간 국민의힘, 언론에서도 비판 이어져

여야를 막론하고 소속 의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투
명하게 밝히겠다는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권익위 결과를 받아든 더불어민주당이 8일 투기 의혹을 받는 12명 의원에게 탈당 권유 및 출당 조치 방침을 내린 가운데, 정의당·열린민주당·국민의당·기본소득당·시대전환 등 5개 야당도 9일 권익위를 찾아 소속 국회의원과 직계 존·비속에 대한 부동산 거래 전수조사를 의뢰했다. 국민의힘만이 국회의원 조사 권한도 없는 감사원을 찾아가면서 비판이 일고 있다.

이날 9개 주요 종합일간지 중에서 6개 신문에는 국민의힘을 꼬집는 사설이 게재됐다.

경향신문: 국민의힘, 감사원 핑계 말고 부동산 조사 당당히 응해야
국민일보: 국민의힘, 소속 의원 투기 조사 권익위에 맡기는 게 옳다
서울신문: ‘국회의원 부동산 투기’ 근절 없이 정권 잡을 생각 말라
조선일보: 야당도 부동산 투기 전수조사 피해 갈 생각 말라
한겨레: 야5당도 전수조사 의뢰, 국민의힘 ‘쇼’만 할 건가
한국일보: 야5당 권익위 의뢰에도 국민의힘만 감사원 타령

 

▲6월10일자 9개 종합일간지 1면 모음
▲6월10일자 9개 종합일간지 1면 모음

국민일보는 “민주당 출신 전현희 전 의원이 위원장이어서 정치적 편향성이 우려돼 권익위 조사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궁색하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도 “이미 국민의힘 일부 의원은 부동산 투기 등 혐의로 정부합동특별수사본부(특수본)의 수사를 받고 있다”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여권의 땅 투기와 내로남불만 비판할 처지가 아니다. 이런 의혹을 철저히 조사해서 투기와 불법이 드러난 의원들은 출당과 고발 등 고강도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는 “국민의힘이 감사원 조사를 계속 고집한다면, 전수조사를 통해 소속 의원들의 투기 의혹이 무더기로 드러날까봐 겁내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 법무차관 택시기사 폭행 ‘용구사미’ 수사 비판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 수사에 대한 경찰 결론에 여러 지적이 이어진다. 일선 경찰관의 잘못을 지적한 수사 결과가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이다. 서울경찰청 청문·수사 합동진상조사단은 관련자 91명을 조사한 결과 외압이나 청탁을 의심할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당 수사관은 특수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고의 직무유기 여부에 대해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경찰수사심의위원회 판단을 받겠다고 했다.

▲이용구 전 법무부차관에 대한 경찰 수사를 풍자한 6월10일 중앙일보 '박용석 만평
▲이용구 전 법무부차관에 대한 경찰 수사를 풍자한 6월10일 중앙일보 '박용석 만평'

경향신문(경찰 “이용구 폭행 서초서 부실 수사”…윗선 개입은 못밝혀)은 “경찰이 부실 수사에 윗선 개입이 없다고 결론내린 것은 이 전 차관이 청탁하거나 외압을 행사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면서도 “경찰이 유력한 공수처장 후보로 거론되던 이 전 차관의 신분을 알고 ‘셀프 봐주기’를 했다는 의심은 남아 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이동언)는 이 전 차관 사건 전반을 검토하면서 내사종결 처리 과정에서 경찰 윗선의 개입이 없었는지 수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는 청와대와 법무부가 이용구 전 차관의 폭행 사건을 인지하고도 인사를 진행했다고 보도(“靑, 이용구 폭행 알고도 법무차관으로 임명”)했다. “경찰의 진상조사 과정에서 법무부는 지난해 11월 9일 이전, 청와대는 같은 달 16일 이후 이 전 차관의 폭행 사건을 인지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 전 차관은 8일 또는 9일에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의 정책보좌관과 수차례 통화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며 “이 때문에 청와대가 이 전 차관 폭행 사건의 경찰 처분 과정에 대한 정밀한 인사검증 없이 차관 임명을 강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는 것이다.

한겨레는 사설(경찰수사 공정성에 경각심 일깨운 ‘이용구 사건’)에서 “이번 사건은 일선 경찰관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서 수사 공정성이 크게 흔들릴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이런 사건이 반복된다면 경찰에 대한 국민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며 “올해 시행된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더 큰 권한을 쥐게 된 경찰은 이제 독자적 수사기관의 자격을 갖췄는지 판가름할 시험대에 올라 있음을 명심하고 환골탈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6월10일자 동아일보 '김순덕 칼럼'(위)과 한겨레 '백기철 칼럼
▲6월10일자 동아일보 '김순덕 칼럼'(위)과 한겨레 '백기철 칼럼'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을 앞두고 이준석 전 최고위원의 상승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한겨레 편집인의 ‘백기철 칼럼’, 동아일보 대기자의 ‘김순덕 칼럼’ 등 기명 칼럼이 이를 다뤘다. 상대적인 기성세대 시각의 글로 묶어볼 수 있으나 초점은 다르다.

백기철 한겨레 편집인은 “‘8090 정치’ 시대”란 제목의 칼럼에서 “이준석 돌풍은 이른바 ‘80 정치’의 본격 부상을 의미한다. 1985년생 이준석의 등장은 30대와 20대, 즉 80, 90년대생을 중심으로 한 세대교체, 세대극복론이 구호가 아니라 현실임을 보여준다”고 규정했다. 그는 “이준석의 ‘80 정치’는 ‘나쁜 정치’의 징후가 많다. 현실 정치의 성과보다는 방송을 통한 이미지 쌓기, 젠더 갈등을 이용한 편가르기 등으로 떴다는 점에서 한계도 분명하다”면서 여성의 중첩된 고통 외면, 상위 엘리트 청년 중심의 공정론, 흡수통일에 집중된 대북관 등을 비판했다.

다만 “그럼에도 이준석은 ‘박근혜 키즈’로서 ‘탄핵의 강’을 건넜고, 꼰대 문화에 젖은 보수 야당에 새바람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강력하다”며 “8090 정치의 쓰나미 앞에서 ‘장유유서’, ‘구상유취’의 꼰대 정치는 설 자리가 없다. 보수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 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보 쪽이 더 절실해 보인다”고 봤다.

동아일보 김순덕 대기자는 “이준석과 ‘10원 한 장’의 公正”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김 대기자는 “일각에선 공정 아닌 ‘경쟁’에 방점을 찍고 ‘이준석은 실력주의자’라고 공격한다”며 “이 정권처럼 운동권 네트워크끼리 봐주는 패거리주의자나 시대착오적 마오쩌둥주의자보다는 백배 낫다”고 했다.

그는 민주당 대선주자로 꼽히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 ‘기회는 공평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밝혔던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 뒤 ‘윤석열 대망론’을 언급했다. 김 대기자는 “2019년 7월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취임사를 통해 강조한 핵심 가치가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이었다” “심지어 차기 대선주자로 윤석열을 지지하는 전문가들 모임의 이름도 공정과 상식”이라면서 “불행한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윤석열은 10원 한 장의 불의도 미리 밝힐 의무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