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5일 일요일

2005년 ‘시위 농민 사망’ 때는 조화까지 보냈던 박근혜

‘시위 농민 사망 관련 대국민 사과를 했던 노무현 대통령’
임병도 | 2016-09-26 09:21:01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농민 사건과 관련해 경찰의 진압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대통령이 즉각 사과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인을 밝히고 그 과정에 책임져야 할 일이 나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말은 누가 했을까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아닙니다. 바로 새누리당 당 대표인 이정현 의원이 2005년 한나라당 부대변인 시절 했던 말입니다.

‘시위 농민 사망,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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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시위 과정에서 사망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은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한나라당은 공식 논평에서도 ‘농민의 죽음이 과잉진압과 연관이 있는지 여부는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한다.’라며 ‘당연한 사과와 보상 등 정부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정부의 책임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시위 사망 농민 빈소에 조화 보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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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전용철 농민 빈소에 조화를 보낸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민중의소리

2005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고 전용철 농민 빈소에 조화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범대위 관계자는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쌀 개방을 강행 날치기 후 농민들에게 사형선고 내려놓고서 이제 와서 조화를 보낸 건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관련기사: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명의로 화환 보내와)
또다른 범대위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고인에 대한 어떤 조문도 원치 않는다”며 “두 당은 전용철 농민 살해를 교사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당을 해체하기 전에는 조문과 관련된 모든 절차를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조화는 범대위 관계자에 의해 빈소 밖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빈소에서 쫓겨난 박 대표 조화)

‘시위 농민 사망 관련 대국민 사과를 했던 노무현 대통령’

2005년 12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시위 농민 사건 관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먼저 ‘시위 도중에 사망한 전용철, 홍덕표 두 농민의 사망이 경찰의 과잉행위에 의한 결과라는 인권위원회 발표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경찰의 과잉 진압 때문이었다는 인권위 발표를 대통령이 인정한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사죄 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위로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국민과 유가족 모두에게 사과합니다.
이어서 노무현 대통령은 ‘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라서 정부는 책임자를 가려내서 응분의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국가가 배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처벌을 약속했습니다. 대국민사과 이틀 뒤 허준영 경찰청장은 사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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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 당시 경찰이 직사한 물대포에 맞고 의식불명에 빠졌던 농민 백남기(70)씨가 사고 317일만인 25일 숨을 거둔 가운데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조문이 이어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지난해 11월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던 백남기 농민이 317일 만에 숨졌습니다. 경찰은 이미 백남기 농민이 위독해지자 서울대병원을 에워쌌고 한때 조문객과 시민의 통행을 막기도 했습니다.
경찰은 유가족과 시민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법원에 부검을 위해 압수수색검증 영장을 신청했다가 기각당했고 집요하게 또 부검 신청을 검토 중이라고 합니다. (관련기사:백남기 농민 ‘부검’막기 위해 모인 시민, ‘시신 탈취’ 가능성도 배제 못해)
노무현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이나 재임 기간에 비슷한 시위 농민 사망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노무현 대통령보다 더 과한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2005년처럼 대국민 사과와 책임자 처벌만 바랄 뿐입니다.
2005년 사망한 전용철,홍덕표 농민이나 2016년 사망한 백남기 농민이나 똑같은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왜 2005년은 책임자 처벌과 대통령 사과를 요구했으면서 2016년에는 아무런 처벌도 사과도 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 국민의 죽음 앞에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와 책임을 지길 요구할 뿐입니다. 10년 전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랬듯이 말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150 

‘만남의 집’ 거주 통일애국열사 첫 합동추도식 뜨겁게 거행

‘만남의 집’ 거주 통일애국열사 첫 합동추도식 뜨겁게 거행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9/26 [02:3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영령들께 추모의 술잔을 올리는 안재구 비전향장기수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민가협 어머님들의 추모 인사     © 자주시보

▲ '만남의 집’ 거주 통일애국열사 합동추도식 제사상과 신위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범민련 이규제 의장의 추도사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24일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양심수후원회 주관 [‘만남의 집’ 거주 통일애국열사 합동 추도식]이 전통 제사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관련 자료집에서 “양심수로 규정하고 석방운동을 했던, 이미 세상을 떠나신 모든 비전향장기수들이 당연히 추모의 대상이지만 오늘 모시는 분들은 ‘만남의 집’에 계셨다가 돌아가시어 직접 장례를 모셨던 금재성, 최남규, 정순택, 정순덕, 문상봉 선생님과 송환되어 북녘으로 가셨지만 ‘만남의 집’의 상징이셨던 리종, 김석형, 리종환, 김선명 선생님만으로 제한”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말했다.

▲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의장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권 회장은 추도사에서 “부모 형제 같은 혈연관계 말고도 그러한 가족 못지않게 특별한 인연으로 가족 이상의 인간적 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다며 비전향장기수가 갇혀 있었기에 양심수후원회가 생겼고 이 분들의 석방운동과 후원과정에서 ‘만남의 집’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남의 집은 비전향장기수들과 후원회원들이 특수한 인연을 맺게 하는 공간이었고 분단시대 자주통일의 염원과 지행 속에서 혈연관계 못지않은 인연과 연고를 갖게 되었다”며 “그런 연고가 있기에 선생님들을 누구보다 가까이 모시면서 정들었던 관계를 영원히 소중히 간직하려고 다시 모였다”는 말로써 합동추도식을 처음으로 열게 된 취지를 설명하였다.

김호현 민가협양심수후원회 전 회장은 자료집에서 “몇 년 전부터 일부 선생님 추도식을 갖은 이래 최근 양심수후원회 정체성 확보 및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는 합동추도식이 2016년 총회준비위원회와 2016년 정기총회에서 특별사업으로 채택되어 오늘 뜻깊은 추도식을 거행하게 되었다.”며 “부디 통일조국 그날까지 간단없이 진군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시고 영면하시기를” 기원하였다.

▲ 통일광장 김교영 비전향장기수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진보연대 한충목 상임대표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추도사에서 통일광장 김교영 선생은 “하나부터 열까지, 산에서 바다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해 다 모든 것을 다 바친 분들”이라며 이분들 신위 앞에서 각자의 의지를 다잡자고 말했다.
이규제 범민련 의장은 “목숨을 바쳐 투쟁하신 분들의 영상을 보니 부끄러운 마음 두 가지가 든다.”며 “북측이 제안한 미군철수공동대책위원회를 성사시키지 못한 점, 지금도 북측이 제안해온 통일을 위한 연석회의를 빨리 성과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죄송하다.”고 언급하고 “오늘 추도식을 계기로 마음 가다듬고 어른들의 높은 뜻을 받들어 의지를 다지자”고 강조하였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한충목 진보연대 상임대표도 “모든 것을 다 바친 선생님들의 뜻을 이어 심양에서 열릴 예정인 연석회의 관련 회의에서 반드시 남과 북 해외의 합의를 이끌어 내고 결의하는 자리로 만들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 목이 메인 소리로 추모의 시를 낭송한 민중탕제원 양희철 비전향장기수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민중탕제원 양희철 선생은 추도시를 읽기 앞서 “선생님들 영상과 신위 앞에 서니 몸에 전율이 인다.” [추모]라는 제목의 추도시를 목 메인 소리로 절절히 낭송하였다.

“땅을 뚫고 하늘을 찌르는 것 있으니
통일을 이루려 분투하셨고
목숨마저 던지셨던 님들의 모습
그 자랑찬 업적 그 행적은
잊혀지지 않고 추동합니다.
...
세계평화애호민의 열화같은 성원과
먼저가신 남북 동지들의 영령 모시고
대동의 세상 경축하게 하소서
...”

▲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어제도 오늘도 따뜻히 보살피고 그 뜻을 빛내가는 후배들의 추도사과 회고담, 다들 감회에 어려 눈을 감은 사진이 많이 찍혔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추도식에서는 만남의 집 비전향장기수와 인연을 맺어온 후배들도 나와서 감회 깊은 회고와 그리움을 표했다.

그들 중에는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너무 큰 감동을 받아 신혼살림집에 시아버지처럼 모셔 들이고 봉양하고 보살폈던 이도 있고 만남의 집에서 잔치를 할 때면 석작 가득 붙임개를 해서 이고 멀리서 차를 타고 오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그렇게 기뻤다는 여성도 있었으며 소중한 재산을 뭉텅 덜어내어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흔쾌히 기증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도 이제는 머리에 흰서리 내려앉은 중년을 맞이하였지만 추도사에서 회고하는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과의 인연은 단 한 장면도 잊혀지지 않고 생동하게 살아있었다.
그들도 이번 추도식을 계기로 의지를 가다듬고 당당하게 조국통일을 위해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 양심수후원회원들이 정성껏 마련한 제사음식, 추도식 후에 함께 이 음식을 나누며 통일의 의지를 다졌다. 음식 하나하나 정갈하고 맛이 깔끔했다.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참 많은 원로 선생들과 지인들이 모이다보니 마당에까지 자리를 펴고 앉아 양심수 후원회에서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들며 먼저 가신 선생님들도 추모하고 핵시험으로 갈수록 치열해져가는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도 뜨거운 이야기들도 뜨겁게 나누었다.
그러면서 다들 하루 빨리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통일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들을 간절히 토로하였다.

만남의 집에서 어르신들이 정성껏 가꾼 사과와 호두, 감들도 이제 통일의 그날이 무르익었음을 말하고 싶은지 지치도록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바알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 낙성대 '만남의 집' 텃밭에서 가을 햇살 아래 바알갛게 익어가는 과일들. 사과, 감, 호두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 지난 날을 돌이켜 본 것일까. 합동추도식을 마치고 감회깊은 미소 표정을 짓던  안재구 비전향장기수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미워도 다시한번, 남북 수해지원 60년사

[친절한 통일씨] 1984년부터 본격화된 남북 수해지원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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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26  00:4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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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함경북도 지역 수해현장. 북한은 이번 홍수를 '해방 후 대재앙'이라며 수해복구에 전념하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지난 8월 말부터 9월 2일까지 강타한 태풍 '라이언록'이 북한 함경북도를 휩쓸었다. 수백 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고 6만 8천여 명의 수재민이 거리에 나앉았다. 김정은 시대 사회주의강국의 최전성기를 과시하려 진행된 '200일전투'는 함경북도 수해복구로 목표가 바뀌었다. '해방 후 대재앙'이다.
세계식량기구(WFP)는 북한 주민 14만명을 대상으로 긴급구호에 착수하고 국제적십자사는 수해복구 특별지원금 52만 달러를 투입했다. 유엔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북한 수재민 지원 모금을 호소했다.
대북 인도지원 민간단체가 대북수해지원 모금운동에 나섰다. 반관.반민 성격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도 수해지원 범국민모금운동을 선언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북한 주민이 대규모 수해피해를 겪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근본적으로 그간 북한 주민들을 돌보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 몰두해 온 북한 당국을 용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대북 수해지원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공이 돌아간다는 발언도 나왔다. 통일정책을 담당하는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의 입에서다.
국제사회가 50여년 만의 심각한 홍수라며 지원을 호소하지만, 한국은 정작 국제사회의 일원이 아닌 듯한 모양새다. 인도적 지원은 정치의 후순위인가. 분단이후 남북 정부간 수해지원 60년사를 돌아본다.
1950~60년대, 북한의 수해지원 제의에 '자존심' 세운 남한
1956년 7월 14일부터 24일까지. 남한에 폭우가 내렸다. 사상자 68명, 건물 1만 9백여동 파손 등 약 43억 7천 7백만 환으로 피해액이 집계됐다. 북한 조선적십자사는 27일 대한적십자사 앞으로 홍수이재민들에 대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메시지를 발송했다. 미곡 50t, 모포 9만6천 마, 의류 2만 점, 신발 오천 족을 제공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이는 국제적십자사에도 접수됐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거절했다.
1957년 8월 남한 전역에 홍수가 났다. 같은 달 9일 북한 조선적십자사는 2천만 원(북한돈) 상당의 구호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승만 정부는 또 거절했다.
1959년 9월 16일. 태풍 '사라호'가 들이닥쳤다. 8백여 명 사망, 1만 2천3백여 동 주택 파손 등 약 662억 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북한은 23일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결정 60호를 발표했다. 쌀 3만 석, 직물 1백만 마, 신발 10만 켤레, 시멘트 10만 포대, 목재 150만 재 등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승만 정부는 세 번째 거부했다.
"이번 태풍 사라호로 입은 풍수해에 구호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의한 것은 일종의 선전책이며 논평할 가치조차 없다.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괴뢰의 폭정하에 굶주리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963년 6월 20일 태풍 셜리가 남부지방을 강타, 50여 명이 사망하고 건물 6천여 동이 파괴됐다. 북한은 수재민 구제를 위한 백미 10만 석 무상제공을 제의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를 거절했다.
  
▲ 1984년 북한이 지원한 대남수해지원 쌀.[자료사진-통일뉴스]
1984년 9월 29일. 북한의 수해지원물품 분단선 넘다
1984년 8월 31일부터 4일동안 서울.경기.충청지역에 집중호우가 내렸다.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으면서 서울은 최악의 홍수를 겪었다. 161개 지역 2만 2천5백 가구에 9만 3천8백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초.중.고에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졌고, 전국적으로 189명 사망.실종, 35만 1천여명 이재민, 1천333억 원 피해액이 집계됐다.
9월 8일. 북한은 방송을 통해 수재지원을 제의했다. 쌀 5천 석, 천 50 마, 시멘트 10만 톤, 기타 의약품을 구호물자로 보낸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대한적십자사가 '인도주의적 조치'에 협력하고 '동포애적 결정'에 동의하면 차와 배로 직접 실어가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지난 정부와 달리 전두환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례적' 단어 그 자체였다. 같은 달 14일부터 29일까지 남북 적십자사 간 논의가 이어졌고,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판문점과 인천항, 북평항에 북한 수재물자가 도착했다.
북한 쌀은 수해지역 주민들에게 33kg에서 66kg까지 전달됐다. 묵은 쌀이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지만 실향민들은 "쌀을 받고 나니 고향생각이 더욱 간절하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부는 왜 북한의 수해지원 제의를 받아들였을까. 우선 당시 정치적으로 남북의 골이 깊었다. 머리 위에 핵을 얹고 살 수 없다고 요즘 목소리를 높이지만,  당시는 지금과 차원이 달랐다.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이범석 외무부 장관 등이 사망했다. 전두환도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북한에 대한 전두환 정부의 감정은 좋지 않은 정도 수준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당시 정부는 "우리가 주기 위해서는 받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배경이 무엇이든, 북한의 수해지원을 수락한 이후, 1984년 남북 경제회담, 1985년 분단 이후 첫 남북 이산가족상봉이 이뤄졌고, 그해 10월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와 장세동 안기부장은 밀사로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논의했다. 북한의 수해지원을 받은 일로 남북은 해빙의 물꼬를 텄다.
  
▲ 2007년 북한으로 보내는 쌀이 군산항에서 선적되고 있다. [사진제공-군산시]
1995년 6월 25일 남한의 수해지원 쌀 분단선 넘다
1995년 북한에 '100년만의 대홍수'가 닥쳤다. 150억 달러의 재산피해와 52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는 '고난의 행군'을 예고했다. 북한이 수해지원을 요청하기 전 김영삼 정부는 그해 3월 대북 식량지원 의사를 밝혔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해 5월 일본에 쌀 공급을 공식 요청하면서, 남측의 대북지원을 받겠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6월 중국 베이징에서 '대북 곡물제공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됐다.
한국전쟁 발발 45주년 당일인 6월 25일 오후 5시 20분 강원도 동해항 30번 부두에서 쌀 1차분 2천t을 실은 '씨아펙스호'가 북한으로 출항했다. "우리가 주기 위해서는 받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전두환 정부의 입장이 이행된 것이다.
씨아펙스호 인공기 게양사건, 삼선비너스호 사진촬영 사건 등으로 대북 쌀지원이 순탄치 않았지만, 10월 7일 정부의 첫 대북 쌀지원은 마무리됐다.
정부의 첫 대북 쌀지원이 진행되던 때, 북한의 수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북한은 유엔에 수재긴급구호를 요청했고, 유엔 조사단은 수해지역이 전 국토의 75%이며 수해복구를 위해 1천 5백만 달러의 물자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대북 쌀지원과 맞물려 대한적십자사(한적)는 11월 12만 달러 상당의 현물지원을 발표했고, 같은 달 대북 수재구호품이 남포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12월 한적은 대북 수재구호용 담요 3천장을 추가로 지원했다. 그리고 민간차원의 대북지원도 함께 시작됐다.
그럼, 정부가 대북 쌀지원을 처음 했을 당시 남북관계는 호시절이었나? 아니다. 북한은 대북지원 쌀이 출항하던 날인 25일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했다. 앞서 5월 북한 군 판문점 대표부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을 폐쇄했다.
당시 공노명 외무부 장관은 처음으로 유엔에서 북한인권을 거론했다. 10월 서부전선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남북관계는 절대 호시절이 아니었다. 물론 김영삼 정부 단 한 차례였지만, 정부차원의 대북 쌀 지원이 이뤄졌다. 그리고 무장공비가 출몰해도 한적은 대북 수해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홍수 피해를 입은 함경북도 회령의 한 마을 [자료사진-통일뉴스]
2000년 이후, 정부의 인도주의는 '정치'에 밀리다
2000년 9월 태풍 '프라피룬', '사오마이' 등으로 북한 함경남도 지역 13개 시.군에 이재민 4만6천여 명이 발생했다. 김대중 정부는 차관 형식으로 그해 10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쌀 30만t, 옥수수 20만t을 지원했다.
2006년 북한에 폭우가 내려 549명 사망, 295명 실종, 2만 8천 가구 주택이 파손됐다. 1차 북핵 실험 정국 속에 노무현 정부는 차관 형식이 아닌 수해 긴급구호지원 성격으로 쌀 10만t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2010년 북한에 수해가 발생했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쌀 5천t, 컵라면 3백만 개, 시멘트 4천t을 지원했다. 남북관계 경색국면이 지속되던 시기지만, 남북 적십자회담이 1년 2개월 만에 열리고 이산가족상봉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쌀과 시멘트는 더 이상 정부의 대북 지원물품에 포함되지 못했다. 2011년 수해에 초코파이가 지원품목에 등장했다. 북한은 답하지 않았다. 2012년 수해 지원으로 밀가루 1만t, 라면 3백만 개, 의약품 등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거부했다.
그리고 2013년부터 지금까지 정부차원의 대북 수해지원은 중단됐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하며, 주민의 참상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5차 북핵실험 이후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수해가 대수냐"는 반응이다. 인도주의는 정치논리에 밀렸다.
북한은 '해방 후 대재앙'이라는 함경북도 수해복구에 전념하고 있다. 국제사회도 50~60년만의 심각한 수해라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북한 인권을 다루는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인도주의 지원은 유엔 안보리가 부과한 대북제재에서 제외된다"고 강조했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북한을 비난하는 박근혜 정부에게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부메랑이 날아오고 있다.

대학생, 세월호 유족, 김제동 "밤새운 시민들이 부검 막았다"


16.09.26 07:06l최종 업데이트 16.09.26 08:58l







▲ 백남기 농민 빈소 찾은 김제동 방송인 김제동이 26일 새벽 고 백남기 농민의 빈소가 마련된 대학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강제부검을 막기 위해 밤샘농성중인 시민,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권우성
▲ 백남기 농민 빈소 찾은 김제동 방송인 김제동이 26일 새벽 고 백남기 농민의 빈소가 마련된 대학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강제부검을 막기 위해 밤샘농성중인 시민,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권우성




26일 오전 6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앞. 누군가 "법원이 검찰의 부검영장 신청을 기각했대"라고 외치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농민 백남기씨 시신을 지키기 위해 밤을 새운 수백여 명의 시민들은 웃으며 아침을 맞이했다.

25일 오후부터 이날 새벽까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급박하게 흘렀다. 백씨는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집회 때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의식을 잃은 후 317일 만인 25일 오후 숨을 거뒀다. 경찰은 "사인은 물대포"라는 유가족의 입장에도, 시신을 부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찰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은 이날 0시 법원에 부검 영장을 청구했다.

이 때문에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아래 백남기 대책위)는 이날 새벽 경찰이 장례식장에 진입해 백씨의 시신을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를 알렸고, 많은 시민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방송인 김제동씨도 있었다.
▲ 밤새 백남기 빈소 지킨 학생들에게 감사 마음 전하는 김제동 방송인 김제동이 26일 새벽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남기 농민 빈소를 조문한 뒤 검찰의 강제부검을 막기 위해 밤새 빈소를 지킨 학생들에게 빵과 음료수, 초콜릿 등을 건네주고 있다. 이날 김제동은 밤샘농성을 벌인 학생들에게 "고맙다. 정말 멋지게 살고 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유성호
▲ 백남기 농민 부검 영장 기각 속보에 환호하는 학생들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남기 농민 빈소에서 검찰의 강제부검을 막기 위해 밤새 빈소를 지킨 학생들이 부검 영장 기각 속보에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유성호
▲ 고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에 올려 퍼진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고 백남기 농민의 장례식 빈소를 밤새 지킨 학생과 시민이 결의대회를 열어 서로 어깨동무하며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고 있다. ⓒ 유성호
뜬눈으로 장례식장을 지킨 시민들

"얘들아, 자가면서 해. 춥다. 아이고."

김제동씨는 장례식장에서 젊은 대학생들에게 빵과 음료수를 건네며 이 같이 말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김씨는 대학생, 세월호 유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냈다. 장례식장을 오고가는 차와 시민들이 부딪히지 않도록 차의 운행을 돕기도 했다.

장례식장에는 책이나 교재를 보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대학생 박석완(20)씨는 25일 오후부터 장례식장을 지켰다. 그는 "26일 오전 10시 30분 경기도 안성에 있는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면서 "이날 오전 6시 30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첫차를 타고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피곤하지 않을까. 극심한 취업난인데 학점·토익 점수와 같은 스펙 쌓기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박씨의 답은 달랐다.

"많은 친구들이 국가폭력으로 백남기씨가 눈을 감은 것을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직접 거리에 나가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압박이 크긴 하지만, 이 자리에 나오는 게 더 의미가 있다."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손아무개(21)씨는 교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백남기씨 사건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문제"라면서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 나왔다. 여기에 있는 게 더 큰 공부"라고 전했다.

세월호 유가족 10여 명도 밤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최근 단식과 거리농성에 몸과 마음이 지쳤다. 또한 국정감사와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전체회의 참석 등 바쁜 일정이 예정돼있다. 하지만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던 유가족들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으로 자리를 옮겨 밤을 새웠다. 이날 오전에는 유가족들이 경기도 안산에서 이곳으로 출발한다.

전명선 4·16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백남기씨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외치다가 쓰러졌다. 너무나도 비통하다"면서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백남기씨는 1년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본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2년 동안 단식·노숙농성으로 아무리 힘들다 해도 오늘 농성을 두고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밥차'는 이날 장례식장에서 시민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했다. 김학현(50)씨는 1톤 트럭에 온수기, 라면 700개 등을 가져왔다. 라면은 동이 났다. 김씨는 "누군가를 위해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낀다. 그 마음이 모여 경찰의 침탈을 막아낸 것 같아 기분이 좋다"라고 강조했다.

박석운 백남기 대책위 공동대표는 날이 밝은 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부검을 막은 것은 밤을 꼴딱 새우면서 힘들게 버텨준 시민들과 온 국민의 성원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살인자 처벌, 진상규명의 여망을 모아갈 것이다. 백남기씨를 고이 보내드릴 때까지 장례절차는 지연될 수밖에 없다"라고 강조했다.

▲ '강제부검 안돼! 백남기 농민을 지켜라' 지난해 민중총궐기 도중 경찰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농민이 317일만인 25일 오후 사망했다. 고인에 대한 강제부검에 반대하는 시민, 학생들이 26일 새벽 대학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시신안치실앞에서 경찰투입에 대비해 밤샘농성을 벌이고 있다.ⓒ 권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