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2일 토요일

그녀는 왜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죽음을 택했을까

등록 :2019-01-13 09:10수정 :2019-01-13 10:43


[토요판] 김수정의 여성을 위한 변론/ ⑤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생 마감
장례 뒤 확인한 친구와 카톡 대화
성희롱·성차별 시달린 사실 보여줘
“이쁜이” “커피 타 와라” “쉬었다 가자”

우울증 발병과 자살로 이어졌지만
공무원공단 공무상 재해 인정 안 해
“직장생활 부적응” “무능력했다” 등
가해자 황당한 진정서 증거로 제출

성차별·성희롱이 근무환경 악화
여성들 견디기 어렵게 만들어
일러스트 조재석
일러스트 조재석
지난해 말 나는 국방부에서 주최한 대체복무제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자 네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 특히 더 긴장한 채로 토론을 진행했다. 군대도 가지 않는 여성이 군대 문제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는 자극적이고 일차원적인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시간여 토론의 말미, 한 참석자가 많이 참았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여자는 군대 갔다 오기 전에는 발언을 하지 말라.” 귀를 의심하던 중 옆자리 다른 토론자가 먼저 “차별적인 발언”이라며 항의를 했고, 나도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출산을 못하는 남자들은 출산정책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다. 발언하시는 분은 남자인데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느냐”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나는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다. 학생일 때도, 어른이 되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도, 언제 어디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희롱·성폭력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나의 능력이 저평가될까 봐 긴장하고 또 긴장하며 살아왔다. 쉰살이 다 된 지금도 나는 여성이라서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제지당하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다. 이렇게 상시적인 긴장 속에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여성이 어디 나뿐인가. 지난해 초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연극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사실 폭로와 이에 연대하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나는 그녀들에 대한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는 사실과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당했다’고 외치는 슬픈 연대라는 사실 때문에….
친구 한명에게만 남겼던 ‘비밀’
죽은 뒤에 나를 찾아온 그녀는 20대 후반의 갓 결혼한 공무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수년간 공무원이 되려 공부한 끝에 4전5기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어렵게 공부해 공무원이 된 그녀가, 임용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대체 그녀는 왜 죽어야 했단 말인가. 그렇게 원했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그녀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삶만 꿈꾸면 됐는데 말이다.
그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는 그녀의 휴대폰에서 친한 친구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확인하고서야 그녀가 왜 병이 들었고, 자살에 이르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공무원으로 임용된 뒤 성희롱과 성차별에 시달려온 것이다. 그는 그녀의 카톡에서 실명이 확인되는 가해자들의 성희롱 행위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였고, 인권위원회는 조사 결과 성희롱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일로 관계기관은 발칵 뒤집어져 성희롱 전수조사를 하고 성차별적 문화 개선, 엄벌 등의 성희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책을 마련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죽음이 공무상 재해가 아니라는 공무원연금공단(이하 공단)의 판단에 있었다. 공단은 그녀의 발병과 그로 인한 자살은 그녀의 기질로 인한 것일 뿐 직장 내 성희롱 등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봤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 몇번이 그녀의 우울증을 발병시키거나 악화시키기에는 미흡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녀는 입사 뒤 6개월간 시보(일종의 수습) 공무원이었다. 6개월간의 근무성적이 좋으면 정식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녀를 성희롱한 사람은 모두 그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상급자였다. 정식 임용을 앞둔 그녀는 그들의 부당한 지시나 성희롱에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녀의 근무공간은 매우 좁은 연구실 같은 곳이었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성희롱 가해자와 함께 근무해야 했고, 심지어 나중에 그녀가 성희롱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린 뒤에도 4개월 가까이 가해자와 분리되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다. 게다가 그녀는 가해자들을 포함해 직장 상사들에게 “이쁜이”라 불리며 수시로 커피를 타는 등 업무와 무관한 성차별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가해자를 알 수 있었던 여러차례의 성희롱 외에도 “나는 딸을 안을 때 가슴이 닿는 느낌이 좋다”, 회식 뒤 “쉬었다 가자” “둘이 같이 가서 옷을 골라달라” 등 직장 상급자의 농담을 가장한 성희롱 발언이 그녀 또는 다른 여성 동료들에게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음이 그녀가 남긴 기록에서 확인됐다. 그녀의 여성 상급자도 성희롱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들 또한 시보 공무원에 불과한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했다. 정식 공무원이 되고 승진을 해도 성희롱이나 성차별적인 관행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여성 상급자들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암울할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을까.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성 없는 예민한 여자로 찍히지 않기 위한, 상급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그녀의 침묵은 그녀를 병들게 하였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책임자에게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채 성희롱을 여러차례 당했으니 성희롱 방지 교육을 실시해달라고 요청했다. 단 자신이 이런 요청을 한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튿날 가해자 한명이 찾아와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는 사과를 받았다는 기쁨보다 가해자가 즉시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고 “이 일은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나에게 두고두고 족쇄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카톡 메시지를 친구에게 남겼다.
소송 중 공단은 일부 성희롱 가해자가 직접 작성한 진정서를 증거로 제출했는데, 나는 그 내용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직장생활 부적응 성격으로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고 무능력했으며, 심지어는 그녀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열애 기사가 그녀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기관의 징계까지 받고도 저런 내용의 진정서를 쓴 가해자들의 태도보다도 더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그 진정서를 증거랍시고 법정에 제출한 공단의 태도였다. 나는 공단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반성은커녕 심각한 명예훼손적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한 가해자들의 태도에 비추어볼 때, 그녀가 생전에 가해자들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며 그녀의 자살이 공무상 재해로 인한 것임을 강조했다.
우울증으로 인한 그녀의 자살이 성희롱과 무관하다는 공단의 판단에는, 그녀가 우울증 진단과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한번도 의사에게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그녀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성희롱 피해 사실 등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우울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상담 의사에게뿐만 아니라, 입사 동기들과 카톡으로 직장 내 고충에 대해 활발히 대화를 나눌 때에도 성희롱 피해 사실만은 밝히지 못하였고 남편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오직 친구 한명에게만 피해 사실을 토로했다.
이는 성폭력(성희롱도 넓은 의미의 성폭력에 해당한다) 피해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원인을 자기 자신(자신의 행실)에게 돌림으로써 죄책감으로 우울감에 빠지거나 자해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넘기려고 하고, 치료를 받으러 가서도 피해를 당한 사실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성희롱 피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피해가 회복되기 어렵고, 오히려 2·3차 가해는 당연한 부록이며, 결국에는 피해자 자신이 직장과 공동체에서 손가락질받고 쫓겨날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공단은 그녀의 이런 전형적인 태도를 오히려 그녀의 죽음과 성희롱 피해 사실이 전혀 무관하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그녀의 기질만을 문제 삼은 것이다.
끝까지 노력했지만
나는 그녀의 우울증이 원래 그녀의 우울 기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초·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을 뒤지고 대학 친구들까지 찾아 그녀의 과거 생활을 추적했다. 쾌활하고 밝은 그녀였다. 수년의 긴 수험 기간을 견뎌낸 강인한 그녀였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만 떼어놓고 보면 ‘추행이나 강간도 아니고 언어적 성희롱 몇마디 들었다고 자살까지 하나’라고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적 성희롱 자체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고자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언어적 성희롱을 비롯한 성차별적 근무환경에 수시로 노출되면서 우울증이 발병했고 급격히 우울증이 악화됐으며, 결국에는 병이 깊어져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성희롱과 성차별을 견뎌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인내하면서, 때론 싸우면서 죽을힘을 다해 견뎌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소송을 하면서 그녀의 죽음의 억울함에 대해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규명하려 노력했다. 자살의 원인을 밝혀내는 철저한 심리적 부검(자살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고 고인의 유서나 일기 등 개인적 기록과 병원 진료 기록 등을 분석해 자살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하여, 그녀의 우울증 발병과 악화의 원인이 수시로 발생하는 성차별과 성희롱을 견뎌야 했던 직장 내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직장 내 성희롱이 경중을 불문하고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은 성차별적 사고에서 비롯된 성희롱이 여성이 일하는 근무환경을 크게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성차별로 인한 근무환경의 악화는 결국 여성을 직장에서 견디기 어렵게 만들고, 여성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게 된다.
소송은 1심 패소, 2·3심 승소로 그녀가 사망한 지 수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판결문을 받아 들고 판결문에 기록된 그녀의 행적을 되새겨보았다. 그녀는 끝까지 살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복용하고,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간 삶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쳤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피해자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의 생각처럼 그녀의 죽음 자체는 이례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으로 때론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받고, 실제 죽기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 등 피해 사실 드러내기에 동참했다. 이는 여성들의 사사로운 투정이나 남성에 대한 모함이 아니라 직장과 사회에서 동등한 동료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다. 그나마 여성들이 말하고 외치고 드러내는 것은 지금보다 나아질 희망이 있다는 징표이다.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 그녀의 이례적인 죽음은 일상이 되어, 집단으로 절벽을 뛰어내려 자살하는 레밍처럼 모두가 손을 잡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새해 벽두 희망의 좌절보다 희망의 실현을 믿고 싶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보다 공감의 언어가 훨씬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싶다.
▶ 김수정: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 두 딸의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생계형 변호사다. 성폭력, 가정폭력,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 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되고 싶다. 그녀들을 위한 변론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녀는 왜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죽음을 택했을까

등록 :2019-01-13 09:10수정 :2019-01-13 10:43


[토요판] 김수정의 여성을 위한 변론/ ⑤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생 마감
장례 뒤 확인한 친구와 카톡 대화
성희롱·성차별 시달린 사실 보여줘
“이쁜이” “커피 타 와라” “쉬었다 가자”

우울증 발병과 자살로 이어졌지만
공무원공단 공무상 재해 인정 안 해
“직장생활 부적응” “무능력했다” 등
가해자 황당한 진정서 증거로 제출

성차별·성희롱이 근무환경 악화
여성들 견디기 어렵게 만들어
일러스트 조재석
일러스트 조재석
지난해 말 나는 국방부에서 주최한 대체복무제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자 네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 특히 더 긴장한 채로 토론을 진행했다. 군대도 가지 않는 여성이 군대 문제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는 자극적이고 일차원적인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시간여 토론의 말미, 한 참석자가 많이 참았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여자는 군대 갔다 오기 전에는 발언을 하지 말라.” 귀를 의심하던 중 옆자리 다른 토론자가 먼저 “차별적인 발언”이라며 항의를 했고, 나도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출산을 못하는 남자들은 출산정책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다. 발언하시는 분은 남자인데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느냐”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나는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다. 학생일 때도, 어른이 되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도, 언제 어디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희롱·성폭력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나의 능력이 저평가될까 봐 긴장하고 또 긴장하며 살아왔다. 쉰살이 다 된 지금도 나는 여성이라서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제지당하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다. 이렇게 상시적인 긴장 속에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여성이 어디 나뿐인가. 지난해 초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연극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사실 폭로와 이에 연대하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나는 그녀들에 대한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는 사실과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당했다’고 외치는 슬픈 연대라는 사실 때문에….
친구 한명에게만 남겼던 ‘비밀’
죽은 뒤에 나를 찾아온 그녀는 20대 후반의 갓 결혼한 공무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수년간 공무원이 되려 공부한 끝에 4전5기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어렵게 공부해 공무원이 된 그녀가, 임용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대체 그녀는 왜 죽어야 했단 말인가. 그렇게 원했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그녀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삶만 꿈꾸면 됐는데 말이다.
그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는 그녀의 휴대폰에서 친한 친구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확인하고서야 그녀가 왜 병이 들었고, 자살에 이르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공무원으로 임용된 뒤 성희롱과 성차별에 시달려온 것이다. 그는 그녀의 카톡에서 실명이 확인되는 가해자들의 성희롱 행위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였고, 인권위원회는 조사 결과 성희롱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일로 관계기관은 발칵 뒤집어져 성희롱 전수조사를 하고 성차별적 문화 개선, 엄벌 등의 성희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책을 마련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죽음이 공무상 재해가 아니라는 공무원연금공단(이하 공단)의 판단에 있었다. 공단은 그녀의 발병과 그로 인한 자살은 그녀의 기질로 인한 것일 뿐 직장 내 성희롱 등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봤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 몇번이 그녀의 우울증을 발병시키거나 악화시키기에는 미흡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녀는 입사 뒤 6개월간 시보(일종의 수습) 공무원이었다. 6개월간의 근무성적이 좋으면 정식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녀를 성희롱한 사람은 모두 그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상급자였다. 정식 임용을 앞둔 그녀는 그들의 부당한 지시나 성희롱에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녀의 근무공간은 매우 좁은 연구실 같은 곳이었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성희롱 가해자와 함께 근무해야 했고, 심지어 나중에 그녀가 성희롱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린 뒤에도 4개월 가까이 가해자와 분리되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다. 게다가 그녀는 가해자들을 포함해 직장 상사들에게 “이쁜이”라 불리며 수시로 커피를 타는 등 업무와 무관한 성차별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가해자를 알 수 있었던 여러차례의 성희롱 외에도 “나는 딸을 안을 때 가슴이 닿는 느낌이 좋다”, 회식 뒤 “쉬었다 가자” “둘이 같이 가서 옷을 골라달라” 등 직장 상급자의 농담을 가장한 성희롱 발언이 그녀 또는 다른 여성 동료들에게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음이 그녀가 남긴 기록에서 확인됐다. 그녀의 여성 상급자도 성희롱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들 또한 시보 공무원에 불과한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했다. 정식 공무원이 되고 승진을 해도 성희롱이나 성차별적인 관행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여성 상급자들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암울할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을까.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성 없는 예민한 여자로 찍히지 않기 위한, 상급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그녀의 침묵은 그녀를 병들게 하였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책임자에게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채 성희롱을 여러차례 당했으니 성희롱 방지 교육을 실시해달라고 요청했다. 단 자신이 이런 요청을 한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튿날 가해자 한명이 찾아와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는 사과를 받았다는 기쁨보다 가해자가 즉시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고 “이 일은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나에게 두고두고 족쇄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카톡 메시지를 친구에게 남겼다.
소송 중 공단은 일부 성희롱 가해자가 직접 작성한 진정서를 증거로 제출했는데, 나는 그 내용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직장생활 부적응 성격으로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고 무능력했으며, 심지어는 그녀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열애 기사가 그녀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기관의 징계까지 받고도 저런 내용의 진정서를 쓴 가해자들의 태도보다도 더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그 진정서를 증거랍시고 법정에 제출한 공단의 태도였다. 나는 공단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반성은커녕 심각한 명예훼손적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한 가해자들의 태도에 비추어볼 때, 그녀가 생전에 가해자들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며 그녀의 자살이 공무상 재해로 인한 것임을 강조했다.
우울증으로 인한 그녀의 자살이 성희롱과 무관하다는 공단의 판단에는, 그녀가 우울증 진단과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한번도 의사에게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그녀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성희롱 피해 사실 등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우울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상담 의사에게뿐만 아니라, 입사 동기들과 카톡으로 직장 내 고충에 대해 활발히 대화를 나눌 때에도 성희롱 피해 사실만은 밝히지 못하였고 남편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오직 친구 한명에게만 피해 사실을 토로했다.
이는 성폭력(성희롱도 넓은 의미의 성폭력에 해당한다) 피해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원인을 자기 자신(자신의 행실)에게 돌림으로써 죄책감으로 우울감에 빠지거나 자해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넘기려고 하고, 치료를 받으러 가서도 피해를 당한 사실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성희롱 피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피해가 회복되기 어렵고, 오히려 2·3차 가해는 당연한 부록이며, 결국에는 피해자 자신이 직장과 공동체에서 손가락질받고 쫓겨날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공단은 그녀의 이런 전형적인 태도를 오히려 그녀의 죽음과 성희롱 피해 사실이 전혀 무관하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그녀의 기질만을 문제 삼은 것이다.
끝까지 노력했지만
나는 그녀의 우울증이 원래 그녀의 우울 기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초·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을 뒤지고 대학 친구들까지 찾아 그녀의 과거 생활을 추적했다. 쾌활하고 밝은 그녀였다. 수년의 긴 수험 기간을 견뎌낸 강인한 그녀였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만 떼어놓고 보면 ‘추행이나 강간도 아니고 언어적 성희롱 몇마디 들었다고 자살까지 하나’라고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적 성희롱 자체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고자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언어적 성희롱을 비롯한 성차별적 근무환경에 수시로 노출되면서 우울증이 발병했고 급격히 우울증이 악화됐으며, 결국에는 병이 깊어져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성희롱과 성차별을 견뎌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인내하면서, 때론 싸우면서 죽을힘을 다해 견뎌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소송을 하면서 그녀의 죽음의 억울함에 대해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규명하려 노력했다. 자살의 원인을 밝혀내는 철저한 심리적 부검(자살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고 고인의 유서나 일기 등 개인적 기록과 병원 진료 기록 등을 분석해 자살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하여, 그녀의 우울증 발병과 악화의 원인이 수시로 발생하는 성차별과 성희롱을 견뎌야 했던 직장 내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직장 내 성희롱이 경중을 불문하고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은 성차별적 사고에서 비롯된 성희롱이 여성이 일하는 근무환경을 크게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성차별로 인한 근무환경의 악화는 결국 여성을 직장에서 견디기 어렵게 만들고, 여성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게 된다.
소송은 1심 패소, 2·3심 승소로 그녀가 사망한 지 수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판결문을 받아 들고 판결문에 기록된 그녀의 행적을 되새겨보았다. 그녀는 끝까지 살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복용하고,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간 삶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쳤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피해자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의 생각처럼 그녀의 죽음 자체는 이례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으로 때론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받고, 실제 죽기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 등 피해 사실 드러내기에 동참했다. 이는 여성들의 사사로운 투정이나 남성에 대한 모함이 아니라 직장과 사회에서 동등한 동료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다. 그나마 여성들이 말하고 외치고 드러내는 것은 지금보다 나아질 희망이 있다는 징표이다.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 그녀의 이례적인 죽음은 일상이 되어, 집단으로 절벽을 뛰어내려 자살하는 레밍처럼 모두가 손을 잡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새해 벽두 희망의 좌절보다 희망의 실현을 믿고 싶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보다 공감의 언어가 훨씬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싶다.
▶ 김수정: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 두 딸의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생계형 변호사다. 성폭력, 가정폭력,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 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되고 싶다. 그녀들을 위한 변론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녀는 왜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죽음을 택했을까

등록 :2019-01-13 09:10수정 :2019-01-13 10:43


[토요판] 김수정의 여성을 위한 변론/ ⑤ 직장 내 성희롱·성차별

공무원 임용 10개월 만에 생 마감
장례 뒤 확인한 친구와 카톡 대화
성희롱·성차별 시달린 사실 보여줘
“이쁜이” “커피 타 와라” “쉬었다 가자”

우울증 발병과 자살로 이어졌지만
공무원공단 공무상 재해 인정 안 해
“직장생활 부적응” “무능력했다” 등
가해자 황당한 진정서 증거로 제출

성차별·성희롱이 근무환경 악화
여성들 견디기 어렵게 만들어
일러스트 조재석
일러스트 조재석
지난해 말 나는 국방부에서 주최한 대체복무제 마련을 위한 공청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자 네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으로 특히 더 긴장한 채로 토론을 진행했다. 군대도 가지 않는 여성이 군대 문제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는 자극적이고 일차원적인 공격이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시간여 토론의 말미, 한 참석자가 많이 참았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여자는 군대 갔다 오기 전에는 발언을 하지 말라.” 귀를 의심하던 중 옆자리 다른 토론자가 먼저 “차별적인 발언”이라며 항의를 했고, 나도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출산을 못하는 남자들은 출산정책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다. 발언하시는 분은 남자인데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느냐”며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여성으로서 나는 늘 긴장된 삶을 살아왔다. 학생일 때도, 어른이 되어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 뒤에도, 언제 어디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희롱·성폭력에서,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나의 능력이 저평가될까 봐 긴장하고 또 긴장하며 살아왔다. 쉰살이 다 된 지금도 나는 여성이라서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제지당하는 삶을 여전히 살고 있다. 이렇게 상시적인 긴장 속에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여성이 어디 나뿐인가. 지난해 초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연극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에서 이어진 여성들의 성희롱·성폭력 피해 사실 폭로와 이에 연대하는 #미투운동을 보면서 나는 그녀들에 대한 격려의 박수를 치기보다 속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전히 여성의 삶은 고단하다는 사실과 오직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당했다’고 외치는 슬픈 연대라는 사실 때문에….
친구 한명에게만 남겼던 ‘비밀’
죽은 뒤에 나를 찾아온 그녀는 20대 후반의 갓 결혼한 공무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수년간 공무원이 되려 공부한 끝에 4전5기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어렵게 공부해 공무원이 된 그녀가, 임용된 지 불과 10개월 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대체 그녀는 왜 죽어야 했단 말인가. 그렇게 원했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그녀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한 삶만 꿈꾸면 됐는데 말이다.
그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그는 그녀의 휴대폰에서 친한 친구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확인하고서야 그녀가 왜 병이 들었고, 자살에 이르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공무원으로 임용된 뒤 성희롱과 성차별에 시달려온 것이다. 그는 그녀의 카톡에서 실명이 확인되는 가해자들의 성희롱 행위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였고, 인권위원회는 조사 결과 성희롱 사실을 확인했다. 이 일로 관계기관은 발칵 뒤집어져 성희롱 전수조사를 하고 성차별적 문화 개선, 엄벌 등의 성희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책을 마련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의 죽음이 공무상 재해가 아니라는 공무원연금공단(이하 공단)의 판단에 있었다. 공단은 그녀의 발병과 그로 인한 자살은 그녀의 기질로 인한 것일 뿐 직장 내 성희롱 등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봤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 몇번이 그녀의 우울증을 발병시키거나 악화시키기에는 미흡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녀는 입사 뒤 6개월간 시보(일종의 수습) 공무원이었다. 6개월간의 근무성적이 좋으면 정식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녀를 성희롱한 사람은 모두 그녀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 상급자였다. 정식 임용을 앞둔 그녀는 그들의 부당한 지시나 성희롱에 문제제기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녀의 근무공간은 매우 좁은 연구실 같은 곳이었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성희롱 가해자와 함께 근무해야 했고, 심지어 나중에 그녀가 성희롱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린 뒤에도 4개월 가까이 가해자와 분리되지 못하고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다. 게다가 그녀는 가해자들을 포함해 직장 상사들에게 “이쁜이”라 불리며 수시로 커피를 타는 등 업무와 무관한 성차별적인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가해자를 알 수 있었던 여러차례의 성희롱 외에도 “나는 딸을 안을 때 가슴이 닿는 느낌이 좋다”, 회식 뒤 “쉬었다 가자” “둘이 같이 가서 옷을 골라달라” 등 직장 상급자의 농담을 가장한 성희롱 발언이 그녀 또는 다른 여성 동료들에게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음이 그녀가 남긴 기록에서 확인됐다. 그녀의 여성 상급자도 성희롱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들 또한 시보 공무원에 불과한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했다. 정식 공무원이 되고 승진을 해도 성희롱이나 성차별적인 관행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여성 상급자들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전히 암울할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을까.
농담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성 없는 예민한 여자로 찍히지 않기 위한, 상급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그녀의 침묵은 그녀를 병들게 하였다. 견디다 못한 그녀는 책임자에게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은 채 성희롱을 여러차례 당했으니 성희롱 방지 교육을 실시해달라고 요청했다. 단 자신이 이런 요청을 한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튿날 가해자 한명이 찾아와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는 사과를 받았다는 기쁨보다 가해자가 즉시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 큰 두려움을 느꼈고 “이 일은 앞으로 직장생활에서 나에게 두고두고 족쇄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카톡 메시지를 친구에게 남겼다.
소송 중 공단은 일부 성희롱 가해자가 직접 작성한 진정서를 증거로 제출했는데, 나는 그 내용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래 직장생활 부적응 성격으로 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고 무능력했으며, 심지어는 그녀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열애 기사가 그녀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기관의 징계까지 받고도 저런 내용의 진정서를 쓴 가해자들의 태도보다도 더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그 진정서를 증거랍시고 법정에 제출한 공단의 태도였다. 나는 공단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은 물론, 반성은커녕 심각한 명예훼손적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한 가해자들의 태도에 비추어볼 때, 그녀가 생전에 가해자들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며 그녀의 자살이 공무상 재해로 인한 것임을 강조했다.
우울증으로 인한 그녀의 자살이 성희롱과 무관하다는 공단의 판단에는, 그녀가 우울증 진단과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한번도 의사에게 이런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그녀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성희롱 피해 사실 등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우울과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상담 의사에게뿐만 아니라, 입사 동기들과 카톡으로 직장 내 고충에 대해 활발히 대화를 나눌 때에도 성희롱 피해 사실만은 밝히지 못하였고 남편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오직 친구 한명에게만 피해 사실을 토로했다.
이는 성폭력(성희롱도 넓은 의미의 성폭력에 해당한다) 피해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모습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원인을 자기 자신(자신의 행실)에게 돌림으로써 죄책감으로 우울감에 빠지거나 자해행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수치심 때문에 피해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넘기려고 하고, 치료를 받으러 가서도 피해를 당한 사실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성희롱 피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피해가 회복되기 어렵고, 오히려 2·3차 가해는 당연한 부록이며, 결국에는 피해자 자신이 직장과 공동체에서 손가락질받고 쫓겨날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공단은 그녀의 이런 전형적인 태도를 오히려 그녀의 죽음과 성희롱 피해 사실이 전혀 무관하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그녀의 기질만을 문제 삼은 것이다.
끝까지 노력했지만
나는 그녀의 우울증이 원래 그녀의 우울 기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 초·중·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을 뒤지고 대학 친구들까지 찾아 그녀의 과거 생활을 추적했다. 쾌활하고 밝은 그녀였다. 수년의 긴 수험 기간을 견뎌낸 강인한 그녀였다. 그녀가 당한 언어적 성희롱만 떼어놓고 보면 ‘추행이나 강간도 아니고 언어적 성희롱 몇마디 들었다고 자살까지 하나’라고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적 성희롱 자체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고자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언어적 성희롱을 비롯한 성차별적 근무환경에 수시로 노출되면서 우울증이 발병했고 급격히 우울증이 악화됐으며, 결국에는 병이 깊어져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녀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성희롱과 성차별을 견뎌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 인내하면서, 때론 싸우면서 죽을힘을 다해 견뎌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소송을 하면서 그녀의 죽음의 억울함에 대해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규명하려 노력했다. 자살의 원인을 밝혀내는 철저한 심리적 부검(자살자의 가족을 비롯한 지인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고 고인의 유서나 일기 등 개인적 기록과 병원 진료 기록 등을 분석해 자살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하여, 그녀의 우울증 발병과 악화의 원인이 수시로 발생하는 성차별과 성희롱을 견뎌야 했던 직장 내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직장 내 성희롱이 경중을 불문하고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은 성차별적 사고에서 비롯된 성희롱이 여성이 일하는 근무환경을 크게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성차별로 인한 근무환경의 악화는 결국 여성을 직장에서 견디기 어렵게 만들고, 여성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게 된다.
소송은 1심 패소, 2·3심 승소로 그녀가 사망한 지 수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판결문을 받아 들고 판결문에 기록된 그녀의 행적을 되새겨보았다. 그녀는 끝까지 살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을 찾아가고 약을 복용하고,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간 삶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쳤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해도 피해자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의 생각처럼 그녀의 죽음 자체는 이례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으로 때론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받고, 실제 죽기도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많은 여성이 직장 내 성폭력 등 피해 사실 드러내기에 동참했다. 이는 여성들의 사사로운 투정이나 남성에 대한 모함이 아니라 직장과 사회에서 동등한 동료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다. 그나마 여성들이 말하고 외치고 드러내는 것은 지금보다 나아질 희망이 있다는 징표이다. 희망이 좌절되는 순간 그녀의 이례적인 죽음은 일상이 되어, 집단으로 절벽을 뛰어내려 자살하는 레밍처럼 모두가 손을 잡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새해 벽두 희망의 좌절보다 희망의 실현을 믿고 싶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보다 공감의 언어가 훨씬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싶다.
▶ 김수정: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 두 딸의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생계형 변호사다. 성폭력, 가정폭력,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 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되고 싶다. 그녀들을 위한 변론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무역전쟁과 달러기축체제의 위기(4)


-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끝)
  •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 승인 2019.01.12 16:47
  • 댓글 0
세계경제의 불안정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계에 이른 양적완화, 천문학적 부채위기가 전후 7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다. 미국이 최근 강력히 시행하고 있는 ‘대규모 무역전쟁’과 ‘금리인상’, 그리고 ‘경제제재의 남발’은 본질적으로 달러기축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3대 경제전략이다. 당연히 이에 대항하는 주요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달러국채를 팔아치우고, 제재에 저항하면서 달러결제시스템을 우회하는 새로운 국제결제시스템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는 새로운 다극화된 경제질서로의 전환기에 서있다.[필자주]
1. 양적완화가 끝나고 있다
2. 금리인상과 무역전쟁 그리고 경제제재의 향방
3. 중국제조 2025와 미중 무역전쟁의 향방
4. 윤곽을 드러내는 다극화 경제질서
1) 세계질서 전환을 추동하는 ‘3대1’의 전략구도
2018년 세계정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북한(조선)의 핵무력 완성에 의한 북·중·러 3개 핵보유국간의 전략적 협력관계의 실현이다. 역사상 처음 북·중·러 대 미국이라는 3대1의 핵보유국간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전후 미국 우위의 핵패권 구도가 완전히 무너지는 역사적 사변이다. 이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해 시리아전쟁을 필두로 아프가니스탄전쟁, 예멘전쟁, 그리고 65년을 끌어온 한반도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전쟁이 거의 동시에 끝나고 있는 것이다. 전후 역사에서 미국이 개입한 주요 전쟁이 이처럼 한꺼번에 끝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계속해서 세계의 경찰일 수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시리아 주둔 미군의 전면철수 명령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의 부분철수 결정 보도가 나온 직후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Sputniknews)는 “(공식적인 그 발언이) 올해(2018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전문가 발언을 보도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이 더 이상 해외 군사작전에 수백억 달러를 퍼부을 여력이 없음’을 드러낸 것으로, 이는 “미국 패권을 이루는 경제, 제도, 군사적 기초의 붕괴가 이제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미 의회조사국도 지난해 11월 ‘러시아나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패배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의회 보고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군사력면에서도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에 뒤진다는 솔직한 토로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제기되어온 ‘미국의 세기가 끝나고 있다’는 조짐이 이제 가시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 형성과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상당수 국내외 주류언론들은 미국의 세계경찰 포기가 트럼프 대통령의 지나친 미국우선주의의 산물이라거나 동맹국에 방위비를 더 내게 하기 위한 술수라는 등 트럼프 정부 정책위주로 보도하고 있다. 이런 류의 분석은 마치 트럼프 대통령이 마음을 바꾸거나, 대통령을 교체하면 언제든 미국이 세계경찰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나 본질은, 이제는 미국이 세계경찰 역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핵무력 완성 3국의 전략적 단결과 미국의 군사력, 경제력의 위축으로 미국이 더는 세계경찰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전환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향수에 젖어있는 미 군산언복합체를 비롯한 추종, 동맹세력들은 어떡해서든 시리아 철군을 미루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되돌리려 하고 있다. 올해는 이 전환적 흐름이 확고히 자리 잡는가 아니면 뒤로 더 밀린 것인가를 가르는 결전의 해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2일 ‘대만동포에게 고하는 편지’ 발표 40주년 기념연설에서 “현재 세계는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변혁기”라고 규정하고 군에 전쟁 계획을 철저히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중국은 차제에 대만과의 통일까지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 역시 지난해 3월에 이어 12월에도 최첨단 극초음속 전략무기 ‘아방가르드’ 등을 선보이며 평화정착 흐름을 거스르려는 미국을 위축시켰다. 미국은 3대 핵보유국의 전략적 단결에 의한 강력한 전쟁억지력에 의해 더 이상 세계 각지에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확대하지 못할 것이다.
2)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주체 – 브릭스 플러스(BRICS+)
이러한 지정학적 변화는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질서의 근본적 변화과정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를 중심으로 한 남남협력의 강화는 달러기축체제를 끝내는 새로운 국제금융질서 수립과정과 맞물려 새로운 다극화 세계경제질서의 핵심 동력이다.
2017년 9월 중국 샤먼에서 열린 9차 브릭스정상회의에서 중국은 ‘브릭스 플러스’(BRICS+)라는 남남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고, 지난해 7월 10차 브릭스정상회의는 요하네스버그선언을 통해 다자주의 세계경제질서의 주체로서 브릭스 플러스를 제창했다. 주지하듯이 남남협력이란 주로 남반구에 몰려있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국들간의 무역, 산업기술, 금융 등 전반의 경제협력을 의미한다. 이는 북반구 선진국들의 경제침탈에 대항한 신흥국들의 자주적 경제발전을 위한 협력체계로, 그간 아프리카-남미협력회의(ASA)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의 방해와 간섭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 지난해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한 인도의 모디 총리(왼쪽), 중국의 시진핑 주석, 남아공의 라마포사 대통령,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브라질의 미셰우 테메르 당시 대통령.
그러나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중국을 중심으로 국제통화기금(IMF)를 대체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고, 또 세계은행(IBRD)를 대체하는 브릭스 자체의 신개발은행(NDB)이 설립되어 브릭스만 아니라 기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의 인프라 건설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자금지원 체계가 마련되었다. 이로써 남남협력은 미국 등 서방의 간섭과 방해를 배제하고 실질적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금융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기초한 브릭스 플러스는 기존 브릭스 국가들과 여타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들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남남협력체제를 완성해 나간다는 브릭스의 전략방향이다. 즉 브릭스 자체를 확대하기보다 브릭스를 축으로 한 남남협력을 확대 강화한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이를 “보다 밀접한 파트너십 네트워크”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초강대국(미국)에 의한 경제제재나 경제전쟁이 없는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이 주연인 “새로운 유형의 국제관계”(a new type of international relations) 건설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 미국 중심의 패권적 세계경제질서를 신흥국, 개발도상국 중심의 다극화된 새로운 경제질서로 바꿔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해 남남협력을 4차 산업혁명의 중심으로 발전시킨다는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the BRICS Partnership on New Industrial Revolution)을 제안하였다. 이것은 남남협력을 기존의 신흥국간 호혜적인 무역, 금융, 기술교류 수준이 아니라 향후 세계경제를 주도해 나갈 첨단산업의 중심기지로 바꿔나간다는 전략이다. 자금과 첨단기술의 준비는 새로운 경제질서 구축의 핵심이다. 중국은 자국의 ‘일대일로’와 ‘중국제조2025’ 전략을 5대륙의 남남협력 체계인 브릭스 플러스에 기반한 “신산업혁명 브릭스 파트너십” 전략과 연동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해 브릭스는 기존 지역협력기구의 집합체(the aggregation of regional integration groups)로서 빔스(BEAMS) 건설을 선언하였다. 빔스는 아프리카 연합(AU), 상하이협력기구(SCO),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같은 기존 남남간의 지역협력기구를 더 큰 통합체계로 묶는다는 의미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은 브릭스 플러스와 빔스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남남협력의 가장 확장된 플랫폼”(most extensive platform for South-South cooperation with a global impact)으로 정의하였다. 브릭스는 남남협력체계를 개별 국가와의 네트워크 확대와 지역연합기구의 통합이라는 중층적 구조로 만들어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의 강력한 중심주체로 세우려는 것이다.
이같은 중층적 남남협력체계가 건설되면 내부거래에 사용되는 통화체제는 당연히 달러가 될 수 없다. 달러기축체제는 붕괴된다. 세계는 다극형에 맞는 통화체계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중‧러를 중심으로 한 여러 신흥국들은 ▲달러를 대체하고 새로운 기축성을 세우기 위한 금 보유 확대와 국가 차원의 암호화폐 준비 ▲국제달러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를 대체할 새로운 결제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3) 2024년 달러 사용 폐기 선언과 RCEP
이와 관련해 달러 사용 폐기계획을 선명하게 내세운 국가는 러시아다. 러시아 재무부는 지난 해 10월 2024년까지 달러 의존에서 벗어날 것을 발표하였다. 달러 사용 폐기를 시한을 정해 발표한 경우는 처음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 정부는 무역결제를 달러 대신 루블로 할 것을 기업에 촉구하고, 특히 러시아가 세계적 우위에 있는 석유, 가스, 무기 수출 등은 루블로 거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 터키나 인도는 러시아 최첨단 미사일방어시스템(MD) S-400 구입대금을 루블로 지불하였다. 더불어 러시아는 지난해 보유한 미 국채 84%를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금을 사는 등 2000톤 이상의 금을 확보하여 루블의 신뢰성 제고는 물론 달러기축 폐기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가 달러 사용을 중단한다는 것은 러시아 일국에만 적용될 사안이 아니다. 러시아 주도의 국제협력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독립국가연합(CIS)은 물론 브릭스의 무역거래 역시 달러 사용 폐기를 지향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러시아는 미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의 군사대국이다. 이미 중동의 새판짜기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치, 군사적 힘의 우위는 경제질서 형성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이미 이란, 터키는 무역거래에 달러 사용을 줄이고 자국 화폐나 위안, 루블, 유로 비중을 높이면서 금 보유를 확대하고 있다. 터키는 유럽으로의 관문이고, 이란은 유라시아의 중심이다. 향후 중동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이란과 터키가 협력하여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를 견인하면서 안정화의 길을 열 것이다. 이 변화 과정에서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이들 나라와의 협력(남남협력) 아래 확대되면서 중동은 달러를 배제한 다극화 경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또 브릭스의 일원인 인도는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와 루피와 바터제(barter. 물물교환)에 의한 거래, 중국과도 자국 통화 거래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달러가 부족한 베네수엘라와는 인도 의약품과 석유거래 바터제를 추진하고 있다. 인도가 사실상 돌아서면서 미‧일이 추진하던 중국포위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은 무너졌다(중국의 달러 사용 중단 관련 사항은 이 글 3편 참조 바람).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할 다극화 흐름은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다. RCEP는 아시아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참여하여 세계 인구 절반과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규모 경제협정으로 올해 최종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협정이 주목되는 것은 처음으로 미국이 제외되고 중국 주도로 아시아의 통합된 경제블록(질서)이 건설된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 협정을 아시아지역 남남협력 모델로 세우려 하고 있다. 당연히 달러 사용을 당장 중단하지는 못하더라도 줄이게 되고 위안화 사용 비중은 대폭 늘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뉴스는 현 세계경제에 대해 ‘미국의 경제제재 남발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이탈로 사실상 국제무역기구(WTO)의 규정이 무력화된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RCEP는)중국을 비롯한 역내 국가들의 대안적인 국제 및 지역 무역 규정 마련을 위한 시도”라고 평가하였다. RCEP는 다극화 경제질서의 아시아지역의 축이 될 것이다. 지난해 말 발효된 일본, 호주 주도의 11개국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경제공동체협정’(CPTPP)은 중국포위 성격을 폐기하고 RCEP와 협력할 수밖에 없다.
70년 이상 세계를 지배해온 달러기축체제가 그 수명을 다하고 있다. 그 기한이 러시아가 계획하는 2024년이 될지, 중국이 전망하는 2025년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런 대전환기에는 항시 과거의 향수에 젖은 자들에 의해 긴장과 혼란이 높아지는 법이다. 전쟁이 발발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역사상 처음 출현한 핵보유국간 3대1의 전략구도는 강력한 전쟁억지력으로 작동하여 더 이상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은 없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은 바로 이러한 세계사적 대전환의 일환이다. 불가역적이다. 미국 패권체제 몰락은 그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 인위적 분단장벽도 무너지게 할 것이다. 통일한반도의 출현이 가까워지고 있다.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통일한반도는 남남협력의 한 축으로 세계적 번영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끝)
손정목 4.27시대연구원 국제분과장  webmaster@minplus.or.kr

미국의 전쟁 목표는 '세계 경제 정복'

[전쟁국가 미국·2강-①] 2차 대전과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2019.01.12 11:52:41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서 박인규 이사장의 '전쟁국가 미국' 강연을 마련했습니다. 이 강연에서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해온 군사주의 노선이 현재 세계의 혼란과 부의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봅니다. 

<프레시안>은 지난해 12월 5일에 시작해 오는 3월 31일까지 격주로 진행되는 강연의 내용을 정리해 독자 여러분들께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아래는 지난해 12월 19일 진행된 2회 강연을 보강한 내용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2차 대전은 미국에게 '좋은 전쟁(Good War)'이었다.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던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를 무찌름으로써 인류의 해방자로 떠오른 한편 막대한 전쟁 수요로 대공황을 단숨에 극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엔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전후 세계를 이끌어갈 국제 안보 및 경제 기구의 창설을 주도하면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다. 바야흐로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 말기 절대무기인 원자탄을 독점하면서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 즉 '미국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만능(omnipotence)의 환상을 품게 된다.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한 만큼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감, 또는 환상은 4반세기를 넘기지 못한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고도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 군사주의의 실패를 의미한다. 군사력에 의거한 세계 경영이 파탄한 것이다. 미국은 왜 군사주의로 나아갔을까? 그 원인은 2차 대전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1차 대전보다 10배나 많은 전쟁 특수를 겪으면서 미국 경제가 전쟁 없이는 유지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을 통해 미국 경제는 '영구 전쟁 경제'가 됐고, 이는 다시 미국이라는 나라를 '영구 전쟁 국가'로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2차 대전은 1차 대전의 후속편이다. 1차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2차 대전의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즉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 요구가 나치의 득세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당시(1919년) 경제학자 케인스가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이라는 책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배상금 규모가 독일의 정상적 경제활동을 통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유럽의 지속적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는 1, 2차 대전을 합해서 30년 전쟁(1914~1945년)이라고 부른다. 영국 패권이 무너진 후 세계 패권을 계승하기 위한 투쟁이 30년간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새롭게 뜨는 자본주의 국가는 미국과 일본, 독일이었는데 독일은 유럽을, 일본은 중국과 동남아를 독점 지배하려 했던 반면 미국은 세계 전체를 가지려 했다. 이로 인해 독일과 미국, 일본과 미국이 한판 붙은 것이 2차 대전이다. 2차 대전은 자본주의 열강의 패권 전쟁이었다. 

2차 대전의 결과 영국, 프랑스 등 과거 세계를 호령했던 유럽 국가들은 2선으로 물러나고 미국과 소련이 세계의 양대 주도세력으로 떠오른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식민지 민족들, 16세기 이후 서구의 세계 정복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노예로 전락했던 이른바 '제3세계'가 해방됐다는 점이다.  

1945년에서 1960년까지 약 60개의 국가가 해방됐다고 한다. 1945년까지 서구 세력(일본 포함)이 아니면 인간도, 나라도 아니었다. 제국주의 세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 아닌 사람(unpeople)이자 사회 아닌 사회였다. 이들이 2차 대전 후 세계사의 무대에 당당한 주역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전쟁은 인명과 재산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 체제를 포함해 모든 것을 파괴한다. 1차 세계대전은 소련 혁명을 낳았고, 2차 대전은 중국 혁명을 초래했다. 기존 정치 체제가 파괴된 결과다. 나아가 전면적인 식민지 해방이 이루어졌다. 서구의 비서구 지배도 무너진 것이다.

식민지 인민들은 수 백 년 동안을 서구 자본주의에 당해왔다. 따라서 해방된 후 이들은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1945년 이후의 세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복원하려는 미국과, 민족 자결을 통해 스스로의 생존과 자유를 확보하려는 제3세계 '피압박 민중' 간의 대결로 압축해 볼 수 있다.  

미국의 2차 대전 전쟁 비용, 1차 대전의 13배 

미국은 독일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 등 세계 정복을 꿈꾸는 세력을 물리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했다고 믿는다. 또한 유엔과 IMF, IBRD 등의 창설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다고 자부한다.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발발까지, 즉 위기의 20년(1919~1939년)은 혼란과 불안정, 갈등과 대결의 시대였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패권 국가가 되고 나서 유엔을 통해 집단안보를 완성하고, IMF 등을 통해 자유무역체제를 복원한 후 비로소 세계는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후 1970년까지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서유럽과 일본 등 동아시아)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한다('영광의 25년').  

이런 측면에서 미국이 2차 대전을 '좋은 전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2차 대전을 통해 세계의 해방자로 부각됐고, 세계 패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자본주의 진영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국이 해방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2차 대전 덕택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도 '좋은 전쟁'이라는 인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또한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은 미국이 아니라 독일과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좋은 전쟁'이란 인식의 보다 본질적인 이유로는 전쟁 특수가 있다. 즉 루스벨트의 뉴딜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대공황을 전쟁 특수가 해결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501억 달러 상당의 전쟁 물자를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 등 연합국에 제공했다(무기대여법 : Lend-Lease). 루스벨트 대통령이 말한 '민주주의의 병기고(Arsenal of Democracy)'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JP모건이 연합국에 외상으로 판매한 군수 물자는 약 50억 달러였다. 그 10배의 전쟁 물자를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했다.  

렌드리스를 포함한 미국의 총 전쟁 비용은 2950억 달러로 1차 대전 때의(220억 달러) 13배가 넘는다. 이를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3조 9300억 달러, 4조 달러에 가깝다. 참고로 1939년의 미국 국방비는 30억 달러 정도였다. 평시 국방비의 약 100배를 4년 만에 사용한 셈이다. 공황의 원인이 수요 부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쟁 특수는 단숨에 대공황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전쟁 특수는 일종의 극약 처방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군수 물자 생산을 일종의 투자라고 치자. 그 투자는 일자리는 만들어내지만 결국에는 죽음과 파괴만을 초래할 뿐이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적 결과를 낳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민수용 투자는 일자리 창출과 함께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따라서 군수 경제는 비상시에 단기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지속적일 수는 없다. 그런데 미국 경제는 2차 대전을 통해 '전쟁 중독'이라는 치명적 질병에 감염됐다. 이후에도 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나치 격퇴의 수훈갑은 소련 

2차 대전의 실상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이 2차 대전 승전의 최대 수훈 국가라는 것이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전장 모두에서 싸운 유일한 국가라는 점에서 일리가 없지는 않다. (영국과 프랑스는 동남아에서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밀렸고, 소련은 종전 1주일 전에야 대일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나치와의 전쟁에서 수훈갑은 단연 소련이었다.  
▲ 1945년 5월 베를린에 입성해 깃발을 내건 소련군. 뒤쪽으로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위키미디어커먼스

2차 대전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은 돈으로 때웠고 소련은 몸으로 때웠다고 볼 수 있다. 즉 미국은 주로 전쟁 물자 생산을 통해, 소련은 엄청난 인명의 희생으로 승전에 기여했다. 그 결과는 미국의 경제적 번영, 소련 경제의 초토화였다. 

소련은 군인 사망자 약 1300만 명을 포함해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면 유럽전쟁과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미국과 영국의 군인 사망자는 60만 명 정도다.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사망한 소련군 숫자가 60만 명이다. 약 10만 명의 미군이 유럽 전장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1945년 4월 말 베를린 공방전에서의 소련군 전사자와 같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군 전사자 대 소련군 전사자의 비율은 1 대 53이었다. 

2차 대전에서 전사, 부상, 또는 포로로 잡힌 독일군은 1350만 명인데(독일 성인 남성의 46%) 이중 1000만 명이 동부전선, 즉 소련과의 전투에서 발생한 것이다. 소련은 나치 병력의 5분의 4, 적어도 4분의 3을 대적했다. 나치 격퇴의 9할은 소련이 담당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전투의 대부분을 자국 영토에서 치른 소련은 경제적 피해도 막심했다. 1280억 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 당시 소련 GNP의 25년 치에 해당한다. 1945년 GNP는 1941년 대비 20%나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독일로부터 받아낸 전쟁 배상금은 고작 51억 달러였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따라서 전쟁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 본토에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단 6명. 당시 공군력에서 뒤졌던 일본은 폭탄을 장착한 기구를 제트기류에 태워 미국으로 보냈다. 산불 등을 유발할 목적이었는데, 이 기구 중 하나가 캘리포니아에서 터지면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연합국의 전쟁 물자 생산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엄청난 전쟁 특수를 누렸다. 대기업이 최대 수혜자였다. 막대한 이윤이 보장되는 정부 발주 전쟁 물자 계약 중 80%가 56개 대기업에 돌아갔다.  

일반 국민도 단맛을 봤다. 1940년 14.6%였던 실업률이 1944년 1.2%로 뚝 떨어졌다. 사실상 완전고용이다. 노동자 평균 임금도 1939년 주당 23달러에서 1945년 44달러로 90% 인상됐다(인플레율 25%). 지긋지긋한 대공황을 벗어난 것이다. 1930년대 맹위를 떨쳤던 반전 여론은 쑥 들어갔다. '총과 버터(Guns and Butter)'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즉 전쟁 경제와 민생 경제의 양립이 가능하다는 환상이 널리 퍼져 갔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은 전 세계 GNP의 50%를 차지했고 금 보유량은 3분의 2가 될 정도였다. 당시 미국의 인구는 세계의 6%였다. 아시아와 유럽이 전쟁으로 초토화된 반면 미국은 더욱 번영하는 경제대국, 군사강국으로 우뚝 섰다. 같은 승전국이지만 미국은 부강해진 반면 소련은 피폐해졌다. 전쟁이 끝날 당시 미국의 경제 규모는 소련에 3배에 달했다.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미국은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제3세계 민중의 민족 자결을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대외에 천명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다. 즉 2차 대전은 미국에게만이 아니라 세계에도 '좋은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미국인의 인식은 현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벨기에계 캐나다 역사가 자크 파월은 저서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를 통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미국은 연합국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도 군수물자를 제공했고, 해방된 국가들의 민족 자결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병기고'라던 미국은 '나치의 병기고'이기도 했다. 전쟁 기간 나치 독일의 상당수 군수물자를 미국 기업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의 반(反)파시스트 세력을 일관되게 정치에서 배제했다.  

그는 "2차 대전은 파시즘과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미국의 성전이 아니라 기업의 이해관계와 돈, 이윤을 놓고 벌인 투쟁"이라고 규정한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미국 경제의 해외 팽창이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 정책의 주된 동기는 자유, 정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미국 대기업을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분야 파워엘리트의 이익이었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미국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그리고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추구했다. 민주냐 독재냐, 또는 평화적 수단이냐 군사력이냐는 중요하지 않았고, 미국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민주주의, 자유, 정의 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월뿐만이 아니다. 영국 역사가 A.J.P. 테일러는 "영국과 미국 정부는 히틀러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 말고는 유럽의 어떤 변화도 원치 않았다"고 지적한다. 정치, 경제, 사회의 어떠한 개혁도 원치 않았다는 얘기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전쟁 중 워싱턴에서 일했던 브루스 캐턴은 사회 개혁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는 듯 보였던 전쟁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와 권력이 이전과 같은 사람들의 손에 집중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추축국들의 패배에만 전념했을 뿐, 다른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중략] 전쟁의 성과가 사회 및 경제 개혁을 가져오기 위해, 또는 그런 개혁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들이 엄숙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한때 미 국무부 차관보로 일했던 시인 아치벌드 매클리시는 전후의 세계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작금의 사태 진행을 보건대 우리가 만들 평화,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평화는 석유의 평화, 금의 평화, 해운업의 평화, 요컨대 도덕적 목표나 인간적 관심이 결여된 평화가 될 것이다." 

'전쟁의 정당화',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 
역사가 하워드 진의 평가는 더욱 매섭다. 그는 2차 대전을 통해 "파시즘 국가는 패배했으나 군사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 독재, 극악한 민족주의, 전쟁 등 파시즘의 요소들은 전후 세계에 널리 자리 잡게 됐다"면서 "우리는 파시즘에 맞서 승리를 거뒀지만, 그 결과 남은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두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다투면서 파시스트 강국들이 시도했던 것보다 더 큰 규모로 새로운 세력권을 개척하는 세계였다"고 말한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와 한국, 그리고 필리핀에서.

그는 특히 "2차 대전이 세계인의 생각에 미친 치명적이고 심대한 장기적 효과"에 대해 주목한다. 그것은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킨 것"이며 이로 인해 "1차 대전의 무의미한 살육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것이 됐다"는 점을 꼽는다. 이것이야말로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 국민을 어떤 비참한 모험으로 이끌고 가건, 또는 다른 사람들(한반도, 베트남, 이라크 등)에게 그리고 미국인 자신에게 어떤 파괴를 가하건, 2차 대전을 (국민의 전쟁 동원을 위한) 하나의 모델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나치즘 대신에 공산주의가 전쟁의 이유로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했으며, 더 이상 공산주의라는 위협을 사용할 수 없을 때면 사담 후세인 같은 손쉬운 적이 히틀러에 비견될 수 있었다. 2차 대전이 절대 선이라는 가정은 전쟁 자체에 정의라는 후광을 만들어 주었으며(한국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이 없었음을 주목하라), 오로지 베트남 같이 극악무도하고 공식적 거짓말에 흠뻑 젖은 모험만이 이런 후광을 헤쳐 없앨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미국의 지배 엘리트가 창시한, "미국은 원초적으로 다른 나라 정치인들보다 우월한 도덕성을 갖고 행동한다는 그릇된 주장이 동시대인들의 반향을 얻고 그 이래로 미국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이런 면에서 2차 대전 이후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닐뿐더러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2차 대전이 어떠했기에 미국은 전쟁을 정당화 했는가, 그 실상을 들여다본다.  

포드, GM 등 미국 대기업, '나치의 병기고' 

1940년 1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은 민주주의의 병기고'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미국이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 생산 공장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미 육군 조사관 헨리 슈나이더는 보고서를 통해 포드의 독일 자회사 포드 베르케에 대해 '나치의 병기고(Arsenal of Nazism)'라고 지칭했다.  

포드를 비롯한 제네럴 모터스(GM), 스탠다드 오일, IBM, ITT(국제전신전화회사, AT&T의 전신) 등 미국의 20개 주요 대기업은 전쟁 이전은 물론이고 전쟁 기간에도 나치 독일을 위한 군수품 생산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들 대기업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은 물론 교전 국가인 독일에도 군수품을 제공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들에게 전쟁은 최고의 장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대기업의 전쟁 장사를 미국 정부조차 막을 수 없었다.  

1940년 6월 26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는 독일 상공인 대표단이 주최하는 나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 GM의 간부인 제임스 무니 등 미국 대기업의 유명 인사가 참석했다. 7월 1일에는 미국 석유기업 텍사코가 뉴욕에서 축하 연회를 벌였다. 제임스 무니,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 등이 참석했다.  

1940년 6월은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한(6월 22일) 직후다. 나치는 1939년 9월 폴란드를 시작으로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 5월 이후에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차례로 정복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미국의 한복판에서 미국 대기업 간부들이 참석하는 나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미국 대기업이 제공한 군수 물자가 나치 승전에 커다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기업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보다는 사업과 이윤이 훨씬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사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은 미국의 최대 투자 대상 국가였다. 우선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330억 달러, 독일이 예상했던 액수의 2배) 갚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했다.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 배상금을 갚아나갔다. 

히틀러 이전부터 JP모건과 체이스은행(석유 재벌 록펠러 소유)이 전담하다시피 한 독일에 대한 대출은 1920년대 비틀거리는 독일 경제를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들의 대독일 차관 업무를 전담한 것은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가 임원으로 있었던 설리번 앤드 크롬웰이라는 법률회사였다. 두 사람은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각각 국무장관과 CIA 국장을 맡는다. 

1933년 이후 독일은 더욱 매력적인 투자처로 떠올랐다. 정권을 잡은 나치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불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사업하기에 최적의 상태가 된 것이다.  

앞에 말한 포드 베르케의 경우, 1935년에서 1939년 사이 이윤은 20.4배 늘어난 반면 제조원가에서 인건비 비율은 1933년 15%에서 1938년 11%로 대폭 줄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미국 대기업의 진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한마디로 독일의 경제 회복과 재무장은 미국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비약적 경제 성장을 이룬 두 나라가 있다. 독일과 소련이다. 독일은 가혹한 노동자 탄압과 대대적 재무장에 의해, 소련은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계획에 의해 비약적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 1930년대 미국의 노동계급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소련의 실험에 열광했고,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주목했다. 미국에서 1930년대를 '붉은 30년대(Red Thirties)'라고 부른 이유다. 

독일의 비판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려는 자는 파시즘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파시즘이야말로 가장 사악한 형태의 자본주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탄압함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낸 나치 독일에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1933년 독일을 방문한 윌리엄 크누센 GM 회장은 "독일 경제는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1939년 3월 독일을 찾은 알프레드 슬로언 GM 회장은 그 전 해 나치의 체코 수데텐란트 강제 합병을 애써 무시하면서, 독일의 전쟁 행위는 "(우리로서는) 크게 이문이 남는 것"이며 독일의 국내 정치는 "GM 경영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1935년에는 듀퐁 등 대기업의 배후 조종으로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파시즘 정권을 세우자는 쿠데타 음모가 진행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미국 자본가들은 파시즘에 매료됐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준 것도 미국 기업인이었다. 히틀러는 자동차 재벌 헨리 포드가 1921년에 쓴 <국제 유대인>이란 저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자신의 집무실에 포드의 초상화를 걸어놓았고, 1938년에는 그에게 독일의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미국 기업인들은 히틀러 정권이 얼마나 끔찍한 정권인지를 알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거래를 계속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을 투옥, 살해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국제결제은행(BIS)은 미국과 독일의 전쟁배상금 문제를 전담하기 만든 은행으로 1930년 스위스 바젤에 설립됐다. 이 은행은 2차 대전이 시작된 뒤에도 나치에 대한 금융서비스를 계속했다. 유럽에서 나치가 약탈한 금의 대부분이 BIS에 예치돼 적성국교역법에 의해 봉쇄됐을 현금을 나치에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모겐소 미 재무장관은 BIS 임원 14명 중 12명은 "나치이거나 나치의 조종을 받는 자"라고 지적했다.  

한편 록펠러 소유의 체이스은행은 전쟁 기간에도 나치 부역세력인 프랑스 비시정권과 거래를 계속했다. 비시 정권과 나치의 중개자 역할을 하면서 전쟁 중 수신고가 2배로 늘어났다. 

이렇듯 미국 자본가와 나치 독일은 가까웠다. 유럽에서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현재 250개 미국 기업이 독일에 4억 5천만 달러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중 58.5%는 상위 10개 기업이 점유하고 있었다. 투자액 비율로는 스탠다드 오일이 14%로 1위, 제네럴 모터스(GM) 12%로 2위였다. 1939년 GM, 포드의 독일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했다. 이들은 2차 대전 발발 이후에도 전쟁 수행에 필요한 트럭, 탱크, 장갑차, 폭격기 등을 공급했다. 
▲ 2차 대전 당시 GM 오펠 공장에서 생산한 트럭. 나치 정부는 GM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다. ⓒwww.opel.com

"GM이 없었다면 나치의 소련 침공은 불가능" 

포드와 GM은 한때 독일군 탱크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고, 스탠다드 오일은 독일이 수입한 석유의 90% 이상을 공급했으며, IBM과 ITT 등은 전쟁 수행과 유대인 학살에 필요한 정보통신기술을 제공했다.  

일례로 나치의 소련 침공 직후인 1941년 7월, 독일의 석유 제품 수입 물량 중 미국산 비율은 44%였으나 9월에는 94%로 껑충 뛰어오른다(중립국 스페인을 통해 독일에 수입됐다). 독일 역사가 토비아스 예르작은 스탠다드 오일을 비롯해 미국 기업이 나치에 제공한 석유는 "총통을 위한 연료"라고 평가했다. IBM의 경우, 당시 홀러리스 카드천공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열차 운행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색출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처형하는 등에 이용했다. 

히틀러의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미국 기업이 제공한 합성석유가 없었다면 폴란드 침공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역사가 브래드포드 스넬은 "제네럴 모터스가 없었다면 나치의 폴란드 및 소련 침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포드, GM 등 미국 대기업이 이윤을 위해 나치에 협력했다면 나치 독일은 승리를 위해 미국 대기업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 정부에게 중요했던 것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의 국적이 아니었다. 그 기업이 얼마나 많은 전쟁 물자를 생산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길어야 2∼3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소련에 대한 전격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더 많은 비행기, 더 많은 탱크, 더 많은 트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전쟁 물자를 대량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은 포드 등 미국계 기업들만이 갖고 있었다. 헨리 포드가 창안한 대량 생산 기법, 즉 '포디즘'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치의 최고 전략 기획가인 헤르만 괴링과 전쟁 물자 담당 장관 알베르트 스피어는 포드나 GM 자회사의 경영에 대한 개입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리고 두 회사는 나치 정부의 목표치를 초과하는 대량생산으로 이에 보답했다.  

이에 따라 나치 정부는 GM의 오펠 공장에 "모범적인 전쟁 기업"이라는 명예를 부여했고, 더 많은 '기업가적 자유'를 허용했다. 독일 연구자 아니타 쿠글러는 오펠이 "자신의 모든 생산 및 연구 역량을 나치에 제공함으로써 나치의 장기적 전쟁 수행 역량을 증강하는 데 기여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도 독일도 IBM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왜 이러한 기업들을 저지하거나 처벌하지 못했을까? 현대전은 산업전이다. 대기업의 도움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참전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12월 13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기업의 적성국과의 사업 거래를 허용하는 특별명령을 은밀하게 발표했다. 적성국교역금지법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으면 사업 거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역사가 찰스 히감은 루스벨트 정부가 "전쟁 승리를 위해 석유 기업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스탠다드 오일의 석유는 히틀러에게 중요한 만큼이나 미국에게도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1942년 미국 정부가 적성국교역금지법에 따라 스탠다드 오일의 대독일 석유 공급을 처벌하려 했으나 극히 가벼운 처벌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탠다드 오일 측은 "우리가 공급하는 석유가 없다면 미국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고 한다. 결국 스탠다드 오일은 약간의 벌금을 내는 것으로 처벌을 면했고 이후에도 나치와 계속 거래했다.  

IBM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IBM의 정보처리 기술은 미국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나치와의 유착을 막을 수 없었다. IBM의 나치 협력을 파헤친 역사가 에드윈 블랙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IBM은 전쟁보다도 큰 존재였다. IBM의 너무나 중요한 기술 없이는 미국도 독일도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히틀러도 IBM이 필요했고 연합국 역시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전쟁부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전쟁 수행 과정에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라고 말했다.  

반면 반전 평화주의자 스메들리 버틀러 장군은 전쟁을 막으려면 기업이 전쟁으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윤이 남지 않는다면 기업이 전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이루진 것은 스팀슨의 견해였다.  

미국과 독일의 자본가들은 비록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상대방 적대 국가에 있는 자신의 자산이 "안전하게 유지되고, 적절하게 관리되며, 적대 행위가 끝나면 원상 그대로 반환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과 나치 정부는 (전쟁 행위와 무관하게 자본가의 재산은 절대적으로 존중돼야 한다는) 국제 자본주의의 불문율을 준수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 때문이었다. 또 반파시즘 전쟁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반파시즘 세력을 일관되게 억압했다.  

미국은 '민족 자결'을 억압했다
 

1941년 8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대서양헌장을 통해 전쟁이 끝난 후 피압박 민족의 민족 자결을 존중하며,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달랐다. 미국은 자주적이고 진보적인 반파시스트 세력의 득세를 극도로 경계했다. 전후 미국의 핵심 목표인 세계의 문호 개방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3년 1월 미국, 영국, 소련은 카사블랑카 회의를 통해 독일의 항복을 공동으로 받는다는데 합의한다. 전후 처리를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각국은 이때부터 자국의 전쟁 목표를 추구하면서 물밑 경쟁을 벌였다. 경쟁의 목표는 독일 수도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는 것이었다.  

또한 각국이 군사 점령한 국가의 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도 관심의 초점이었다. 카사블랑카 합의의 정신대로 미국, 영국, 소련 합의로 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 점령한 국가의 마음대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아가 대서양헌장에 명기된 '민족 자결'의 원칙이 지켜질 것인지도 곧 드러날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 영국, 소련 합의에 의한 전후 처리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자기들대로, 소련은 소련대로 자국이 점령한 지역의 전후 처리를 단독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등 피점령국 국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대서양헌장이 약속한 '민족 자결'은 공수표였다. 그 첫 사례가 이탈리아다.

1943년 여름,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시칠리섬을 거쳐 로마에 입성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점령한 미국과 영국의 이탈리아 처리는 피점령국 처리의 선례가 될 터였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참여를 배제한 것은 물론 이탈리아 반파시스트 세력을 무장 해제하고 국내 정치 참여를 철저히 막았다.

이탈리아에는 상당한 정도의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세력이 군사·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외국인 침략자에 대한 항전인 동시에 국내 보수 세력에 맞선 내전이기도 했다. 전통 엘리트, 즉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그리고 교황청 등은 1922년 무솔리니의 집권을 도왔고 그로부터 커다란 혜택을 입은 세력들이었다. 레지스탕스는 이들 보수 세력을 권력에서 몰아내려 했다. 레지스탕스의 활동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자 했다.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반파시스트 세력과 협력하는 것을 일체 거부했다. 미국과 영국이 보기에 이들의 지향이 너무도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반파시스트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왕정 폐지를 비롯해 사회, 정치, 경제 분야의 급진적 개혁을 원했다.  

특히 처칠은 알프스 너머 유럽 대륙에서 급진적 개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반파시스트 세력을 소련의 볼셰비즘과 동일시했다.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요구를 이탈리아의 공산화로 본 것이다.  

결국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는 무장 해제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해졌다. 이탈리아 국민의 소망과 기대, 반파시스트 세력의 열정과 능력은 전후 이탈리아 복구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미국과 영국은 이탈리아 왕가와 군, 대지주, 은행가, 기업가, 교황청 등과 협력했다. 이들은 무솔리니에게 협력한 대가로 커다란 혜택을 입었던 세력으로 대다수 국민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 이전 이탈리아의 구질서를 복원했다.

미국과 영국의 점령 이후 최초의 이탈리아 지도자는 무솔리니의 부역자였던 바돌리오 원수였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국민은 '무솔리니 없는 파시즘'이라고 개탄했다. 무솔리니만 사라졌을 뿐, 과거의 억압적 구질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시칠리아 등의 마피아를 '반공의 보루'로 칭찬하면서 이들과 결탁했다. 이른바 마피아 작전(Operation Mafia)이 그것이다. 뉴욕의 전설적 갱 럭키 루치아노와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한통속이 돼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의 전복 공작 등을 추진했다. 

미국 정보기관과 국제 범죄 조직이 마약 거래를 중심으로 비밀공작을 펼치는 것은 이후 현재까지 미국 대외 정책의 비밀스런 전통이 됐다. 미국은 카스트로 암살 시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전복 공작 등 의회 승인을 받을 수 없는 CIA의 불법적 반혁명 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국제 범죄 조직의 마약 거래 대금으로 충당했다.  

프랑스에서는 어땠는가? 미국과 영국은 1944년 8월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이탈리아는 미국과 영국의 교전 상대국이었던 반면 프랑스는 어엿한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런던으로 망명한 드골 장군이 자유 프랑스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를 이탈리아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한편 프랑스 본국에는 나치에 부역한 페탱 원수의 비시 정권이 레지스탕스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1944년 3월 '레지스탕스 헌장'을 발표하면서 전후 프랑스의 급진적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페탱과 드골은 매국노와 애국자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보수적이었다. 반면 레지스탕스는 급진적이었다. 레지스탕스는 페탱을 경멸했고, 드골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며 보수적이라고 보았다. 레지스탕스 내에서 드골 추종자는 극소수였다. 

전후 프랑스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서로 다른 구상을 갖고 있었다. 2차 대전으로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을 잃고 작은 섬나라로 전락한 영국의 처칠은 전후 드골의 프랑스와 함께 미국과 소련에 맞설 수 있는 독자적 유럽 세력의 구축을 구상했다. 반면 루스벨트는 드골이나 레지스탕스보다는 페탱과 협력하는 것을 선호했다. 레지스탕스는 원천적으로 협력이 불가능한 상대였고, 드골은 처칠의 하수인(전후 프랑스가 미국보다는 영국에 기울 것을 우려)으로 보았던 것이다.  

미국은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1940년 6월)에도 비시 정권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다. 미국과 비시 정권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것은 1941년 11월 비시 정권에 의해서였다. 미국의 전쟁 목표는 1차 대전으로 산산조각이 난 세계 경제를 다시 한 번 단일한 자본주의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에 고분고분하고 보수적인 인물이 프랑스 지도자로 적격이었다. 페탱을 선호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국은 드골의 집권을 막기 위해 드골을 마다가스카르 총독에 임명하자고 영국에 제의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상륙 후 미국은 비시 정부가 임명한 현지 총독 프랑수아 다를랑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드골은 격노했고, 미국 내에서도 나치 부역자와 협정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때마침 다를랑이 알지에에서 암살되면서 이 문제는 흐지부지됐다. 드골파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결코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를 지도자로 인정했다. 당시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은 자신의 일기에 드골에 대해 "잘난 체하는 데다 야망만 많은 속 좁은 인물"이라고 썼다.  

그러나 드골은 첫째 다를랑과 같은 비시 정권 부역자가 아니었고, 둘째 레지스탕스 세력처럼 급진적인 사회경제 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애국자인 동시에 보수파라는 점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프랑스 국민에게, 후자는 미국과 영국에 필요한 것이었다.  

스팀슨은 "드골은 나쁘다. 하지만 그 외의 선택은 더 나쁘다"고 실토했다. 특히 프랑스 공산주의자와 좌파가 소련과 관계 강화 움직임을 보이면서 이를 차단해야만 했다. 드골 외에 다른 대안은 없었다. 미국 역사가 가브리엘 콜코는 "프랑스를 좌파로부터 구해낼 누군가가 필요했다", "미국은 드골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를 훨씬 더 싫어했다"고 말한다. 1944년 10월 23일, 미국은 드골을 프랑스 정부의 합법적 지도자로 인정했다.

연합국이 파리를 해방하기 수일 전, 레지스탕스는 자력으로 파리를 탈환하겠다는 목표 아래 무장 봉기했다가 나치 독일에 의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본다. 며칠만 기다리면 이루어졌을 파리 해방을 위해 레지스탕스가 무모한 봉기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과 영국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드골을 지도자로 내세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파리를 장악한다면 전후 프랑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중앙집권적 국가라는 점에서 수도 장악은 정치적 영향력과 직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의 봉기는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드골의 집권에 대해 "단 한 번도 전투를 하지 않은 장군, 단 한 번도 선거를 치르지 않은 정치인"인 드골이 전후 프랑스의 권력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파월은 "드골이 레지스탕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상당한 정치적 개혁을 했지만, 그가 아닌 급진적 정부가 들어섰다면 레지스탕스 헌장에 제시된 더 급진적 개혁이 현실화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방 후 미국과 영국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해방자는 해방된 국민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대서양헌장의 민족 자결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프랑스의 피해는 그리스가 당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이탈리아 및 독일 파시스트에 대한 피어린 항쟁의 결과로 전후 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처칠과 스탈린의 밀약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1944년 10월 처칠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비밀 협상을 벌인다. 1944년 6월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그해 9월 라인강 도하를 위한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에 실패함으로써 베를린 점령을 놓고 소련과 벌이던 경쟁에서 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처칠은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몸소 모스크바까지 날아간 것이다.  

이 비밀 협상에서 양측은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은 소련의 세력권(소련이 90퍼센트), 그리스는 영국의 세력권(영국이 90퍼센트)으로 하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50 대 50으로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합의한다. 

이 비밀 합의에 따라 영국은 전쟁이 끝난 이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 우파를 지원할 수 없게 되자, 영국은 미국에 SOS를 쳤다. 이에 따라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바로 냉전의 공식적 기원으로 얘기되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다(1947년 3월). 핵심은 국제 공산주의의 음모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게 된 그리스 국민을 위해 그리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스탈린은 처칠과 맺은 밀약을 '충실히' 지켜 그리스 내전에 일체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 레지스탕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우파에게 패배했고 이후 그리스는 군부 독재 등 숱한 고난을 겪게 된다. 결국 그리스는 미국, 영국, 소련 등 강대국 간 흥정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의 고난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국제 문제에 개입한다는 미국의 주장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