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5일 화요일

남북철도 착공식 ‘서울↔판문’ 열차, 북으로 출발…“감개무량”

개성 판문역 철도 착공식, 남북 각 100명 참석 예정
공동취재단, 신종훈 기자
발행 2018-12-26 09:44:00
수정 2018-12-26 09: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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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개성 판문역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 참석하는 남측 인사들이 받아든 기념 승차권.
26일 개성 판문역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 참석하는 남측 인사들이 받아든 기념 승차권.ⓒ통일부 제공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를 위한 착공식이 26일 마침내 열린다. 이날 오전 10시 북측 개성 판문역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는 남측 참석자들을 태운 9량의 특별열차는 서울역에서 북으로 내달렸다.
개성이 고향인 김금옥 할머니 등 이산가족 5명과 경의선 마지막 기관사인 신장철 씨, 각 정당 대표 인사, 통일부·국토교통부 장관 등 100여 명을 태운 특별열차는 오전 6시 48분께 서울역을 출발했다. 행사 초대를 받은 자유한국당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고향 땅 가는 희열" 
이산가족 김금옥(86) 할머니는 북측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취재진에게 "(소회는) 말도 못 하죠. 몇 년 만에, 나서 자란 학교 다니던 고향 땅에 간다는 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희열이랄까, 기쁨이랄까 몰라요"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젊은 분들은 '왜 저렇게 고향을 갈망할까' 하지만, 그거 아니다. 정말 개성은 (고려의) 도음지답게 깨끗하고 공기도 맑고 좋다"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 실향민들 많지 않나. 그분들도 당신들 고향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기차 타고 가보고 하는게 저희들의 큰 희망"이라고 강조했다. 
26일 북측 개성 판문역에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을 위해 개성이 고향인 김금옥 할머니가 새마을호 특별열차를 이용해 서울역을 출발하고 있다.
26일 북측 개성 판문역에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을 위해 개성이 고향인 김금옥 할머니가 새마을호 특별열차를 이용해 서울역을 출발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지난 2007년부터 1년간 경의선 화물열차를 마지막으로 운행했던 신장철 씨는 당시 자신의 신고식 사진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2007년) 마지막 열차를 끌고 경의선을 운행하다가 끊긴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퇴직을 하고 언젠가 다시 한 번 가볼까 했다"며 "이런 좋은 기회가 돼서 가게 돼 어제 밤잠을 설치고 (이른 아침) 부지런히 나왔다"고 말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마주 앉은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2015년 만월대 복원 때 개성에 갔는데 자전거를 많이 타더라"고 말문을 열었고, 조 장관은 "개성에는 사람들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때문에 자전거가 굉장히 많다"고 호응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통일부 장관을 지낸 박재규 경남대 총장은 "오늘 열차 타러 오면서 굉장히 감회가 새로웠다"며 "이번에는 신의주까지 연결돼서 중간에 멈추지 말고 주욱 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함께 여는 평화, 번영' 
특별열차는 새마을호 객차 6량과 기관차 2량, 발전차 1량 등 총 9량으로 구성됐다. 바깥에는 '함께 여는 평화, 번영'이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참석자들은 '서울↔판문'이 쓰여진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 기념 승차권'을 받아든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공식 행사는 오전 10시 개식을 알리는 북측 취주악단의 공연으로 시작된다. 이어 북측 대표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착공사 및 침목 서명식, 궤도 체결식, 도로표지판 제막식 순으로 진행된다.
26일 북측 개성 판문역에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을 위해 우리측 참석자들이 새마을호 특별열차를 이용해 서울역을 출발하고 있다.
26일 북측 개성 판문역에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을 위해 우리측 참석자들이 새마을호 특별열차를 이용해 서울역을 출발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북측에서는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민족경제협력위원회의 방강수 위원장과 박명철 부위원장, 김윤혁 철도성 부상, 박호영 국토환경보호성 부상 등 1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아울러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유관국인 중국·러시아·몽골의 장·차관급 인사들과 국제기구 대표도 함께한다.  
행사가 끝나면 남측 참석자들은 개성 송악플라자에서 점심을 먹은 뒤 오후 1시쯤 올라갈 때와 같은 열차를 타고 귀환할 예정이다.  
이번 착공식은 대북제재가 엄연한 현실에서 곧장 공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정상이 약속한 철도협력을 이행해나간다는 정치적 상징성을 보여주는 행사에 가깝다. 이와 관련, 김현미 장관은 "일단 공동조사, 실태조사를 더 해봐야 한다고 하더라"며 "실제로 공사하기 전까지 할 게 굉장히 많다. 설계만 해도 1~2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3.1운동 100주년, '개벽파'를 재건하자"

[유라시아 견문] 다른 백년, 다시 개벽 : 유학국가에서 동학국가로
2018.12.25 18:33:39




1. 천지개벽

설국열차는 느릿했다. 두 칸짜리 완행열차이다. 뜨문뜨문 간이역마다 한참이나 뜸을 들인다. 삿포로에서 꼬박 5시간을 걸려 이른 곳이 왓카나이(稚內), 일본의 땅 끝 마을이다. 북쪽 섬 홋카이도(北海道)하고도 최북단, 작은 마을에서 큰 바다가 펼쳐진다. 고즈넉하기 보다는 적막한 시골이었다. 하룻밤 새 통 눈이 그치질 않는다. 북쪽 섬과 북쪽 바다의 경계가 흐릿하다. 굳이 변경까지 찾은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 때문이었다. 러시아와 일본 간 회심의 빅딜이 성사되었다. 사할린과 홋카이도를 다리로 잇겠단다. 그 국경다리가 닿는 첫 마을이 왓카나이였다. 2030년, 이 땅 끝 마을이 국경 도시로 변신한다.  

사할린 북쪽으로는 오오츠크해가 열린다. 더 북쪽으로는 캄차카(Камчатка) 반도가 자리한다. 캄차카도 홋카이도도 화산폭발이 만들어낸 섬이다. 실은 일본 본토까지 그러하다. 자연지리로는 하나로되, 인문지리로써 딴 나라가 되었다. 나라를 막론하고 온천에 제격이다. 캄차카의 간헐천에서는 혹한의 겨울에도 뜨거운 물이 솟아난다.  

내가 이른 때는 7월 한여름이었다. 바닷바람이 유독 산뜻하다. 끈적거림이라곤 하나도 없다. 특유의 비린내도 나지 않는다. 공기는 상쾌하고 풍경은 장쾌하다. 기나긴 겨울을 버텨낸 뭇 생명이 폭발적으로 솟구친다.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들판 너머로는 만년설을 인 화산의 자태가 눈이 시리다. 그 깨끗한 눈물이 녹아 더욱 투명해진 강물이 철철철 넘쳐흐른다. 강가에는 불곰들이 어슬렁거린다. 싱싱하고 신선한 킹연어를 맨손으로 잡아 잡순다. 도구를 쓰는 사피엔스 무리도 보인다. 킹연어와 킹크랩을 사다 나르는 일본과 한국과 중국의 수산업 무역회사들이 이미 즐비하다. 동시베리아와 동아시아가 합류하여 동유라시아가 되어간다. 

▲ 왓카나이.ⓒ이병한

방향을 틀어 삿포로에서 남하하면 하코다테(函館)에 이른다. 홋카이도의 남쪽 끝이다. 메이지유신 150주년, 북해도 개척의 첫 삽을 뜬 곳이다. 혼슈를 마주하는 해양 도시로 화려하다. 본토와 연결되는 신칸센 역도 자리한다. 2030년이면 삿포로까지 노선이 확장된다. 도쿄부터 삿포로까지, 태평양의 절경을 감상하며 고속열차 여행을 할 수 있다. 삿포로는 왓카나이와 하코다테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허브 도시가 될 것이다. 고로 홋카이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게 된다. 일본 또한 섬나라가 아니다. 사할린-홋카이도와 동시에 연해주-사할린 다리도 건설되기 때문이다. 북해도와 연해주가 직통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사할린을 통하여 일본 열도를 내달린다. 모스크바는 극서 런던과 극동 도쿄를 잇는 중간역이 된다. 1945년 패망 이래 일본은 태평양 국가로 맹성했다. 2045년 일본은 유라시아의 일원으로 반전하게 될 것이다. 대양과 대륙을 잇는 해륙국가로 변모한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가교가 될 것이다. 20세기 초반 유럽과 아시아 사이, 20세기 후반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 더는 좌고우면 할 것 없다. 21세기 신대륙과 구대륙을 아우르는 일본의 신시대이다.
캄차카 반도의 북쪽으로는 얄류산 열도가 길게 펼쳐진다. 끝내 끝에 달한 곳이 베링해협이다. 동유라시아, 동시베리아 하고도 최동단이다. 지구 꼭대기 북극이 지척이다. 전례 없던 바닷길이 열리고 있다. 북극항로 개척이 활발하다. 베링해협에서 좌회전하면 바렌츠 해의 무르만스크까지 한 걸음에 닿는다. '북극의 수도' 딕손은 이미 분주하다. 야말 LNG 프로젝트가 한창인 사베트 항구도 활기가 넘친다. 북러시아의 항만도시들로 한정되지도 않는다. 러시아의 서쪽, 발트해 국가들도 요동친다. 노르웨이에서는 키르케네스 항구가 앞서간다. 핀란드에서는 로바니레미 항만이 으뜸이다. 라트비아에서는 리가 항이 첫 손에 꼽힌다. 가장 주목할 나라는 핀란드이다. 현재 북극위원회 의장국이다. 2017년 시진핑 주석이 몸소 방문했다. 북유럽 항구를 유럽의 중원과 연결시키는 북극회랑 고속철도를 건설키로 했다. 핀란드의 코우볼라(Kouvola) 철도 포럼을 이어받은 곳은 요동반도의 다롄이다. 한겨울에 서유라시아에서 다보스 포럼이 열린다면, 한여름 동유라시아에서는 다롄 포럼이 열린다. 발트해부터 발해만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부터 홋카이도까지 북유라시아 도시들 간 연결망 사업에 의기투합했다.

▲ 베링해협. ⓒ이병한

북극회랑 고속철도는 남진하여 남/북 유럽을 더욱 촘촘히 묶는다. 북해와 지중해를 뒤섞는다. 남유럽은 지중해를 사이로 북아프리카를 마주본다. 가장 가까운 곳이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 지브롤터 해협이다. 볕이 좋은 날이면 서로의 국경이 바라보일 만큼 도탑다.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 해저 터널을 놓기로 했다. 서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가 고속도로로 연결된다.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이 모로코라면, 동쪽 끝에는 이집트가 자리한다. 동아프리카와 서아라비아 반도에도 다리가 생긴다. 홍해를 가로지르는 이집트-사우디 대교이다. 아랍의 패권을 다투었던 백년의 앙숙이 이웃지간이 된다. 아라비아 해를 지나 벵골 만에 이르면 남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에도 해양다리 건설이 논의 중이다. 인도양의 동/서로도 신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지중해, 유장했던 인도양 세계가 유려하게 부활한다. 

▲ 다롄 국제회의장. ⓒ이병한

구세계의 귀환, 앞서가는 곳은 역시 '지속의 제국' 중국이다. 이미 홍콩과 마카오를 광동성과 잇는 다리를 완성시켰다. 복건성과 대만을 엮는 남중국해 다리 또한 시간문제이다. 신시대의 물결은 황해까지도 이른다. 요동반도의 다롄에서부터 산동반도의 옌타이를 잇는 해저터널을 건설한다. 더 나아가 산동반도를 한반도와 연결시키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다. 유력한 후보지로는 인천과 군산, 평택이 꼽힌다. 황해는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를 잇는 동북아의 지중해가 될 것이다. 서해만도 아니다. 남해도 출렁인다. 큐슈의 후쿠오카와 부산, 거제를 잇는 해저터널도 재차 거론되고 있다. 동해와 서해와 남해, 한반도의 3면이 모두 꿈틀거린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구대륙만 직통하는 것도 아니다. 베링해협에서 우회전하면 알래스카가 곧장이다. 빙하기, 시베리아 원주민과 아메리카 원주민은 생활공동체였다. 아이스로드, 얼음길을 따라서 사람들이 오고갔다. 동시베리아와 서알래스카 사이에도 바닷길을 닦는다. 절반은 해저 터널로, 절반은 해양다리로 만드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구대륙과 신대륙을 잇는 글로벌 신시대가 코앞이다. 캐나다와 미국의 서부를 질주하는 캘리포니아 종단 고속열차가 달릴 것이다. 멕시코를 지나 칠레와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가닿는다. 20세기에는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가 시베리아와 아메리카에 각기 생겼다. 21세기는 동반구와 서반구를 주파하는 지구 횡단열차 시대가 열린다. 5대양 6대주라는 말도 과거지사가 된다. 지구를 육로로 일주하는 신세기가 도래한다. 지구는 둥글다.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친구를 다 만나고 돌아온다. 멀지않은 미래이다, 2050년, 불과 한 세대 이후이다.  
천하의 지붕, 북극의 빙하는 계속 녹아내린다. 북극곰은 눈물을 흘린다. 사피엔스는 눈빛을 반짝거린다. 얼음물 사이로 파랑이 일렁인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마저 있다. 신대륙 개척하듯 북극항로 건설에 사활이다. 그 새로이 열리는 바다를 바라보노라니 판단이 명료하게 서지 않는다. 천재지변이 될지, 천재일우일지 가늠하기 힘들다. 멈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돌이키기 힘들다. 앞으로 20년 아무리 애쓴다한들, 지난 200년 화석연료 남용의 후과를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운명이라 하겠다. 업보라고도 하겠다. 인간의 활동이 지질학적으로, 지구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인류세로 진입한 것이다. 천지인(天地人) 가운데서도 말석을 차지했던 인간이 천지개벽의 주체로 등극한 것이다. 인간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지리를 재창조하고 지구를 재구성한다. 해안선을 다시 그리고 지표면의 고저를 변동시킨다. 하늘의 진노보다 땅의 분노보다 사람의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한 지구사의 신시대가 개막한다.

2. 물질개벽 

21세기, 더 이상 독립국가는 없다. 의존하지 않는 홀로서기, 독립(In-dependent)은 적폐이다. 20세기형 민족해방운동도 앙시앙레짐이다. 땅따먹기를 일삼는 제국주의 시대의 방편이었을 뿐이다. 경쟁의 논리가 바뀐다. 연결력 경쟁을 한다. 영토의 정복(conquer)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 도시와 도시,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 인물과 사물을 연결(connect)시키는 경합이 성/쇠를 가른다. 담을 치고 성을 쌓는 자는 고립된다. 길을 내는 자가 주도한다. 더 많은 길을 닦고 더 많은 길을 여는 나라가 지도국이 된다. 길 내기와 길들이기는 불가분이다. 길을 깔면 깔수록 길을 들일 수가 있다. 영토를 더욱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장소를 연결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한층 중요해진다. 자연스러움(자유무역)과 억지스러움(보호무역)이 충돌한다. 가릴 것 없고 꺼리지 않는 원활한 흐름과 덜컥거리는 마찰이 경쟁한다. 한쪽은 국경을 봉쇄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제재를 가한다. 다른 쪽은 자원과 상품과 자본과 기술과 사상과 데이터의 교환과 거래를 촉진한다. 뚫리면 강해질 것이요, 막히면 약해질 것이다. 세계 최대의 연결망을 보유한 국가가 21세기를 선도하게 된다.  

국민국가(Nation-State) 또한 유들유들해진다. 전 지구적 네트워크의 연결자(Node-State)가 된다. 노마디즘(Nomadism)이 내셔널리즘을 잠식한다. 그 연결(Inter-dependent) 국가들의 집합도를 19세기형 세계지도, 만국전도로는 재현할 수가 없다. 국가 간 체제로 쪼개져 있는 현재의 세계지도가 미래의 청사진, 천하도를 왜곡시킨다. 글로벌 허브 도시들 간의 횡단적 네트워크(connectivity atlas)를 그려야 한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와 송유관과 인터넷과 케이블 연결망을 입체적으로 구현해야 한다. 흡사 인체도에 방불할 것이다. 지구를 몸통으로 삼아 사람과 자본과 정보와 에너지가 피처럼 흐르고 기처럼 통하고 숨처럼 드나든다. 터닝 포인트, 물류와 문류와 인류의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초래한다. 티핑 포인트, 더더욱 많은 연결망이 누적되어 전혀 격이 다른 세계로 도약한다. 나라님에 충성하는 난세가 저물고, 하나님/하늘님/한울님을 모시고 섬기고 받드는 치세의 논리가 재귀한다. 포스트-웨스트(Post-West), 만인이 만국에 가로막히지 않았던 천하가 환생하고 움마가 재생한다. 

하여 유라시아는 더 이상 '거대한 체스판'도 아니다. 인과 연의 인드라, 그물망이다. 접속하고 접촉하고 접대한다. 외계에서 관찰한 지구별의 상징 또한 만리장성이 아니게 된다. 억리와 조리에 달하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될 것이다. 지상의 길이 달라지면 땅의 논리, 지리 또한 전변한다. 19세기 주조된 '유럽'이라는 개념도 물렁해진다. 타자로 강요되었던 '아시아'라는 발상 또한 물컹해진다. 유럽과 아시아를 따로 분리하기가 힘들어진다. 고로 유라시아는 하나이다. 또 유라시아는 여럿이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너 안에 나도 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는 자타불이의 지평으로 올라선다. 남과 나를 가르지 않는 자리이타의 경지에 도달한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요, 온 마음이 한 마음이다.  

앞으로 30년, 지난 300년보다 더 많은 연결망이 만들어진다. 2050년이면 유라시아 전체가 일심동체로 엮이고 묶이게 된다. 남으로는 인도양, 북으로는 북극해, 서로는 대서양, 동으로는 태평양. 네 개의 대양을 아우르는 하나의 대륙이다. 사해동포 감각이 실감으로 승한다. 유라시아를 중원으로 구대륙 아프리카와 신대륙 아메리카를 좌/우로 겸장하게 될 것이다. 고로 유라시아는 다시 지구의 중원이다. 고인류의 시원인 아프리카와 신인류의 고향인 아메리카를 잇는 개신(改新)인류의 요람이 된다. 구대륙의 쇠락과 신대륙의 득세를 조정하고 조율하는 글로벌 균형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언 30년 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념과 체제 대결이 저물었다. 한쪽의 승리, 역사의 종언이 아니었다. 일방의 굴욕을 강요하는 서구적 근대의 마침표였다. 서세동점의 끝물이었다. 바로 그해 World Wide Web이 탄생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상의 길과는 또 다른 천상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오프라인과는 또 다른 온라인 신천지의 개막, 디지털 창세기였다. 축의 시대, 천주일가와 천하일가는 소원했다. 천주와 천하와 움마가 공진화하여 지구일가(Global First)를 이루지 못했다. 이제 축의 시대에 망의 시대가 접속한다. 망과 망으로써 축과 축을 소통시키고 융통시킨다. 축과 축을 잇고 땋는 망과 망이 겹겹으로 포개진다. 축과 망이 상호진화 한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공진화한다. 상전벽해, 물질이 개벽한다.

3. 정신개벽 

더는 개인(In-dividual)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사문화될 개념이다. 디지털 신세계가 각별한 것은 만인과 만국만 연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 인터넷 시대가 열린다. 인공지능 시대가 개창한다. 자가용도 냉장고도 유사-의식을 탑재한다. 스스로 도로를 주행하고, 알아서 식품을 주문한다. 자동에 자각을 보태어 자율에 도달한다. 생산 활동의 도구에서 생명 운동의 주체로 진화하는 것이다. 인물과 동물과 식물은 물론이요 광물까지 접속한다. 만인과 만물이 활물(活物)로써 소통한다. 만물의 영물(靈物)화, 물질개벽의 특이점을 돌파한다. 

장차 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마저 희미해 질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분단체제가 허물어진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기반이 통으로 허물어진다. 만민평등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만물평등, 제물평등만이 오롯하다. 나의 마음 됨됨이와 남의 마음 씀씀이가 일파만파, 실시간으로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죄와 벌의 시간차가 초 단위로 축소된다. 인과응보의 순환 또한 전생과 후생으로 갈리지 않게 된다. 신속하고도 광범위한 업보의 네트워크가 여여하게 펼쳐진다. 양심과 욕심이 전천후로 전방위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고로 천상에도 천하에도 유아독존 할 수가 없다. 근대적 주체의 죽음, 포스트휴먼이고 트랜스휴먼이다. 에고를 다스려 슈퍼에고로 거듭나야 한다. 헛나에 휘둘리지 말고 참나를 갈고 닦아야 한다. 소아에서 대아로 거듭나야 한다. 몰아를 연마하고 무아를 단련하야 진아에 도달해야 한다. 자아와 자유와 자연을 합일시켜야 한다. 일천년 전 가라사대, 천인합일이라 하셨다. 일백년 전 가로되,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 하였다.  

더 이상 이성만으로는 인간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인공이 인간을 월등하게 앞지른다. 인간지능은 인공지능에 백전백패, 단 일승도 거두기 힘들어진다. 격차는 나날이 벌어질 것이다. 족탈불급, 비교불가하다. 이성과 이성의 네트워크, 집합지성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성적 인간은 백세 인생의 잉여로 전락할 것이다. 서둘러 사람의 근간을 재정립해야 한다. 논리와 합리보다 성리와 도리가 더 중요해진다. 무릇 천리를 배우고 익혀서 성리를 밝히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었다. 사람은 나면서 이미 사람으로 존재하되, 돌아가는 순간까지 영원히 사람이 되어가야 할 숙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다운 사람 되기가 인류의 숙제가 된다. 노동자와 소비자를 넘어서는 존재, 참사람 되기가 영구혁명=천명이 된다.
새로운, 색다른 견해도 아니다. 150년 전 이르되 "인내천"(人乃天), 사람 안의 하늘을 발굴하고 한울을 발현하는 것이 평생의 학습이라 했다. 공자는 일흔이 되어서야 천성을 닮은 인성,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는 범인들에게도 30년이나 더 긴 세월이 덤으로 주어진다. 미숙한 사람에서 완숙한 사람으로, 설익은 인간에서 무르익은 인간으로, 홍익인간에 육박해 가야 한다. 인권을 앞세우기보다 인륜을 다해야 한다. 누리기보다는 모시고 섬겨야 한다. 하늘 아래, 땅 위에, 공손하고 겸허해야 한다. 장차 지구의 운명은 오롯이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세상만사 사람 책임이다. 그러한 정신개벽, 의식의 빅뱅이 수반되지 못하면 사피엔스는 정보사회의 숙주로 전락한다. 임포메이션과 데이터로 강등된다.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의 소외를 고민했다. 정보화 시대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소외되는 백척간두에 처하게 된다. 노동의 해방보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탈노동 속도가 더욱 빠르다. 깨어나야 한다. 깨우쳐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생생하게 생각하고, 생생으로 생활해야 한다. 선업은 더하고 악업은 덜어내는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  
▲ <유라시아 견문> 3권.ⓒ이병한
공부부터 바뀌어야 한다. 골방에서 골만 쓰는 과학은 거두어야 한다. 지나치게 뇌에 집중한다. 이성 중심주의의 폐단이 뇌 과학 일방으로 치달았다. 

부디 몸을 써야 한다. 온 몸을 통째로 다 써야 한다. 혼신을 다해야 한다. 심신을 변혁시켜야 한다. 유적 존재로서 인간의 근간은 노동에 있음이 아니다. 기도와 수도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이었다. 명상하고 수련하고 수양함이 사피엔스의 남다름이다. 태초의 빅뱅, 우주가 발생했다. 지구가 발생하고 생명이 생겨났다. 그 우주적 진화 과정을 자각적으로 의식하는 생각도 발생했다. 생명에서 생각으로의 도약에 사람이 등장했던 것이다. 

노동은 부차적이다. 생명을 묵상하는 생각이야말로 근본적이고 근원적이다. 생명을 생각하는 되먹임과 되새김이야말로 인간의 생활이자 생업인 것이다. 물질세계는 더더욱 복잡해 질 것이다. 복합계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의식은 더더욱 집중도가 높아져야 한다. 얼의 완성도를 고취시켜야 한다.  
앎의 대상 또한 외부에서 내면으로 반전시켜야 한다. 최첨단 과학은 사람과학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뜻하지 않는다. 수심정기(守心正氣), 수련학을 말한다. 문헌학과 서재학에서 수양학과 수도학로 진화한다.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 만인이 주인 되는 초기 민주화 시대를 지나서 지상과 천상의 변증법, 만민이 주님 되는 후기 민주화 시대로 진화한다. 만인이 주인이자 주님으로 주권자가 된다함은 공소한 레토릭이 아니다. 만인이 만물과 접속함으로써 모두가 왕년의 황제와 천자의 권능만큼 파급력을 미치게 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함도 옛말이다. 글로벌 네트워크, 이제는 독배가 될 수도 있다. 일인이 욕심을 내고 흑심을 부리면 일사천리 지구적 영향을 미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발상 또한 철지난 격언이다. 아랫물과 윗물을 나눌 수가 없다. 모두가 맑아지고 전부가 밝아져야 한다. 고로 선천시대, 지배층을 도덕적으로 훈육시켰던 원리 또한 만인들에게 전면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 만인이 성인(聖人)이 되고, 만민이 천민(天民)이 되어야 한다. 만인이 갈고 닦지 않으면 후기 민주, 후천개벽의 때가 오더라도 만개하지 못한다. 후천세계의 촛불을 밝히고 기운만 지피다 스르르 사라져 버린다. 후기민주 시대가 오고 있음에도, 혹은 이미 왔음에도 초기민주에 길들여지고 선천세계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후천개벽의 사명을 받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의 문법도 달라져야 하겠다. 지리가 동/서로 나뉘지 않듯이 천리 또한 성/속으로 가름할 수 없게 된다. 세속화에서 탈세속화로 재영성화로, 성과 속이 하나로 융합된다. 이성과 영성이 합류한다. 혼/백과 영/육이 공진화한다. 원시반본 천지회복(原始反本 天地回復), 천상의 신학과 지상의 법학을 회통시키는 천지의 동학(東學)도 되살아난다. 지난 백년, 법가의 득세가 저물어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규율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를 규정했던 법학은 사후적 대처이다. 만인과 만물이 전면적이고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신시대에는 사후 약방문, 뒷북이 되기 십상이다. 영토에 고정되고 국가에 귀속되는 법학으로부터, 하늘과 땅과 사람을 모시고 살리는 동학으로 반전시켜야 한다. 정과 성으로 남을 모시고 님을 섬겨야 한다. 제물평등과 경천애인, '정치적 영성'을 일깨워야 한다. 깨뜨림과 깨우침과 깨달음의 공진화, 정신의 개벽이다.
▲ 경주 용담정. ⓒ이병한

4. 다시 개벽파  

개벽파가 일어나야 한다. 개벽파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개화파만 있던 것이 아니다. 마주 편에 척사파만 있던 것도 아니다. 개화 대 척사, 프레임을 바꾸어야 한다. 지난 백년의 적폐이다. 승자가 쓴 역사이다. 승리한 개화파가 힘으로 쓴 역사이다. 척사파를 나무람으로써 정당성을 구하고 정체성을 취했다. 뜻으로 본 역사를 써야 한다. 개벽파야말로 역사의 주체였다. 줄기차게 옹골차게 변화와 변혁을 추동했다. 1860년 동학의 창도야말로 새 시대의 개막, 개벽의 태동이었다. 낡고 묵은 조선의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새 나라'를 표방했다. 유학국가에서 동학국가로의 환골탈태, 신시대의 신문명 개벽천하(開闢天下)를 창안한 것이다.

고로 1876년 강화도조약이 근대의 출발점이 아니었다. 개항기니 개화기니 시대인식 또한 진부한 개념이다. 서구적 근대를 표준으로 삼아 외부의 충격을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편향되고 편벽된 사관이다. 1860년 이후 '개벽기'야말로 19세기의 올바른 이름, 정명(正名)일 것이다. 유학국가를 고집하는 척사파도 서학국가를 맹종하는 개화파도 지배계층의 보/혁 갈등에 그쳤을 따름이다. 동학국가를 표방하는 개벽파야말로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민주주의의 첫 깃발을 휘날린 것이다. 동방적 민주화의 원형이자 영성적 근대화의 원조였다. '새 정치'의 마르지 않는 샘, 원천이었다. 1987년 민주화 전후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고민했다면, 2017년 촛불혁명 이후로는 <개벽 전후사의 인식>을 궁리해야 하겠다. 지난 150년의 역사를 '개벽사'(開闢史)로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다시 개벽의 환생을 재촉하고 촉발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학술로만 그칠 일도 아니다. 사회운동가로서 개벽파의 불씨를 되살리고 재점화하는 실천 활동에 매진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서구적 근대를 반복하고 변주하는 양대 세력, 개화좌파(진보)와 개화우파(보수)가 '더불어한국당'으로써 지루하게 경합하는 구시대와 구체제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토착적 근대의 회생과 창생을 꾀하는 신시대와 신문명의 새 물결, 개벽의 파도를 일으키고 싶다. 그것이 내 나름의 '적폐 청산' 과업이다.
▲ 천도교 중앙대교당. ⓒ이병한
개벽파 재건의 적기는 2019년 3월 1일로 보인다. 동학의 후예 천도교가 이끌고 서학의 후신 기독교가 보조를 맞추어 3.1운동이 일어났다. 서학은 가까스로 토착화되었고, 동학은 마침내 세계화됨으로써 3.1운동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동학과 서학의 연합이자 개벽파와 개화파의 협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국의 독립만 요구한 것이 아니라 태평천하, 지상천국을 소망했다. 천국(서학)과 천하(유학)와 천도(동학)의 공진화, 지구일가(地球一家, Global First)를 염원한 것이다.
20세기 전반기 탈식민운동은 동학/개벽파가 전위에 섰다. 천도교, 원불교, 증산교, 대종교 등이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1948년 분단정부 수립과 1950년 한국전쟁은 개벽파에 찬물을 끼얹는다. 미/소가 주도하는 냉전체제에 깊숙이 말려듦으로써 남/북 분단, 좌/우 갈등이 전면에 도드라졌다. 고로 20세기 후반 탈분단, 탈냉전 운동에는 개화파가 맹위를 떨쳤다. 

개화우파(자유주의)와 개화좌파(사회주의)가 민주화를 주도하는 사이, 개벽파는 수줍게 후방 지원에 머물렀다. 2019년 3.1 100주년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개화와 개벽의 대합장-대합창을 도모할 만하다.  
조급할 것도 없다. 100년 전과는 시세가 달라졌다. 개벽파를 좌초시켰던 지난 120년, 서세동점 또한 끝물이다. 최후의 서세 미국도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동/서가 재균형을 찾아간다. 구대륙과 신대륙도 균형을 맞추어간다. 앞으로 30년, 한 세대를 내다보면서 착실하게 진지전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개벽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매체부터 필요하다. 다음은 학당을 세워야 한다. 대안적 학술과 교육으로 새 학파를 일구어야 한다. 그래야 새 사상에 기초한 새 정파, 새 정당도 출범시킬 수 있다. 2045년, 해방 100주년 언저리에는 개벽파가 여당이 되고 주류가 되는 후천세계의 원을 크게 그려보는 것이다. 통일헌법 또한 응당 동서고금을 회통한 신동학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서구파와 동구파에 주눅 들지 않는 토착파의 기개로써 나라다운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다. 
일국적 성/속 합작에 그칠 것도 아니다. 2045년은 UN 창설 100주년이기도 하다. 개화의 총본산인 UN에 버금가는 개벽의 총아로서 UR(United Religions)을 출범시킬 적기이기도 하다. UR을 통하여 개화와 개벽의 대합장/대합창을 지구적 수준에서 전개하는 것이다. 그래야 지구적 근대에 걸맞는 후천 개벽의 대해(大海)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신동학을 '동'(東)에만 가두지 말아야 한다. 동아시아 또한 이미 좁다. 동유라시아, 동반구 넘어, 전 세계로 방류하고 환류시켜야 한다. '동학의 세계화', '개벽의 지구화'이다. 그 사업을 감당하라고 익산에 온 것 같다.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만인이 은인이고, 모두가 은혜이다. 

▲ 원불교 익산 성지.ⓒ이병한

(개벽의 성소, 미륵 마을 익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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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공감한 경향신문, 슬픔이 불편한 조선일보

[아침신문 솎아보기] 경향신문 약자 위한 ‘4개의 성탄절’, 추모가 불편한 조선일보 “분향소로 뒤덮인 도심”

이정호 기자 leejh67@mediatoday.co.kr  2018년 12월 26일 수요일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성탄절.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로 숨진 ‘주거 난민’ 7명을 기리는 거리 추모미사와 서울 양천구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에서 고공농성 409일째로 세계 신기록을 세운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박준호 사무장과 홍기탁 전 지회장을 위한 캐럴이 울려 퍼졌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선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진 비정규직 김용균씨를 추모하는 미사도 열렸다. 그 옆에선 시리아와 이집트 난민들과 함께하는 성탄절 예배도 열렸다.  
사회적 약자 위한 ‘4개의 성탄절’ 다룬 경향신문 
▲ 경향신문 26일자 1면 사진기사(위)와 10면 관련기사(아래).
▲ 경향신문 26일자 1면 사진기사(위)와 10면 관련기사(아래).
▲ 한겨레신문 26일자 1면.
▲ 한겨레신문 26일자 1면.
경향신문은 성탄절 다음날인 26일 신문 1면에 이들 4개 미사와 예배 사진을 실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온 예수 탄생의 의미를 기리는 25일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성탄절 미사와 예배 사진으로 2018년 한국의 겨울을 상징했다.
경향신문은 26일자 1면 사진에 이어 10면에도 “여기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가장 가슴 아픈 이에게 은총을”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파인텍 고공농성장의 성탄’을 다뤘다. 이 기사엔 409일째 고공농성 중인 박준호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사무장이 굴뚝 위로 올라온 신부와 목사와 함께 한 의료진에게 건강검진을 받는 사진도 함께 실렸다.

한국일보도 26일자 10면에 파인텍 고공농성장 사진과 함께 ‘기쁜 성탄절, 슬픈 신기록… 굴뚝농성 409일’이란 제목의 기사로 사회적 약자를 다뤘다. 한겨레신문도 26일자 1면에 ‘굴뚝 위 409일…성탄절 슬픈 신기록’이란 제목의 머리기사와 함께 두 사람이 농성하는 굴뚝 사진을 실었다.  
추모가 불편한 조선일보 “분향소로 뒤덮인 도심”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이 사회적 약자들의 농성과 추모를 불편해 했다. 조선일보는 26일자 12면에 ‘추모 앞세운 또다른 시위… 분향소로 뒤덮인 도심’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국일고시원 희생자 추모미사와 광화문 김용균씨 분향소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동화면세점 앞에 보수단체가 세운 고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 분향소를 한꺼번에 소개하며 “서울지하철 광화문역 반경 300m에만 (분향소가) 4곳이다. 죽은 이들을 추모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좌우(左右), 노정(勞政) 갈등의 골이 깊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 조선일보 26일자 12면.
▲ 조선일보 26일자 12면.
조선일보는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과 주거 난민의 죽음을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자살 뒤섞어 좌우 갈등 또는 노정 갈등으로 해석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도심에 들어선 분향소 대부분은 불법”이라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 유일하게 이해 당사자가 아닌 시민의 목소리를 담았는데, 그 시민은 조선일보에 “오랜만에 나온 광화문이 상가(喪家)처럼 변해 있어 마냥 성탄절을 즐기기도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이를 놓치지 않고 ‘시민들, 광화문 상갓집된 듯’이란 작은 제목으로 담았다.  
조선일보는 아직 들어서지도 않은 분향소 설치예정에도 불편해 했다. 조선일보는 홈리스공동행동이 27일 국일고시원 앞에 세울 예정이라고 소개한 뒤 곧바로 화재로 7명의 숨진 국일고시원을 운영하던 원장에게 분향소 설치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고시원을 운영하던 원장은 조선일보에 “(분향소 설치를) 고시원 입주민 5~6명이 관여하는 것으로 안다. 그중 2명은 불이 안 난 2층에 살던 주민”이라고 했다. 2명은 당사자도 아닌데 분향소 설치에 관여한다는 불편한 심정이 엿보인다. 날도 추워지는데 거주 난민인 국일고시원 피해자 후속 지원이 어떻게 돼 가는지 취재해야 할 마당에 고시원 운영자의 해명만 들은 셈이다.  
한국일보 “발전공기업 외부인력 더 늘렸다” 
한국일보는 26일자 8면에 ‘에너지 민영화 정책, 발전공기업 외부인력 더 늘렸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부의 민영화 정책 때문에 최근 5년 사이 발전공기업들이 외부화 비율을 더 늘렸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비정규직 김용균씨의 안타까운 사고를 추모에만 머물지 않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 방향을 짚었다. 
▲ 한국일보 26일자 8면.
▲ 한국일보 26일자 8면.
한국일보는 35개 공기업 임직원 대비 외부인력 비율은 2013년 32.8%에서 2018년 40.6%로 해마다 오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발전공기업들의 외부인력 비율이 전체 공기업의 외부인력 비율보다 높다고 분석했다. 

'생대구 전'과 '말린 대구탕', 별미 중에 별미

겨울이 제철 생선 대구(大口)


등록 2018.12.26 09:10수정 2018.12.26 09:11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멀리서 귀어(貴魚)가 찾아온다. 입이 커서 대구(大口)라 불리는 생선이 연안으로 붙는다. 대구는 차가운 물에서 사는 냉대성 어종으로 봄이 오기 전 근해에서 산란한다. 부산, 진해, 거제가 맞대고 있는 진해만이 유명한 산란장이다. 

동해를 지나오기에 동해와 진해만에서는 겨울이 되면 항구마다 대구 풍년이다. 경남 거제시에서는 12월이 되면 대구 축제를 연다. 대구의 메카는 지금까지 진해 용원항과 외포였지만 근래에는 충남 대천에 자리를 내줬다. 생산량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서해에서 잡히는 대구는 먼 바다에서 난다. 대천항에서 어선으로 네다섯 시간을 가야 한다. 수심이 100m 정도의 큰 웅덩이 같은 곳에서 자란다고 알려졌다. 동해야 10분 정도만 나가도 100m 권이지만 서해는 한참을 나가야 한다. 

100m 수심의 온도는 7~12도로 냉대성 어종인 대구가 살기에 적합하다고 한다. 동물성 플랑크톤이 많아 이를 먹으려는 새우며, 베도라치가 대구의 먹잇감이 된다. 

충남, 대구 어획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
 
▲ 2017년도 기준으로 충청남도에서 위판된 대구의 양이 3654톤이다. 그 해 전국에서 잡힌 대구 어획량은 6479톤으로, 이 가운데 충남이 56% 정도의 어획량을 기록한 것이다. ⓒ 김진영
 
2017년도 기준으로 충청남도에서 위판된 대구의 양이 3654톤이다. 그 해 전국에서 잡힌 대구 어획량은 6479톤으로, 이 가운데 충남이 56% 정도의 어획량을 기록한 것이다. 경상남도가 그 뒤를 이었다. 충남에서 대구가 많이 잡히지만 항구 분위기는 진해 용원항이나 거제 외포항과는 사뭇 달랐다. 

경남에서 대구가 나는 항구에 가면 대구 맑은탕, 대구찜 등 대구 요리를 파는 곳이 많았다. 한편에서는 싱싱한 대구를 말리는 장면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말린 대구를 잘 찢어서 매운 간장 양념에 찍어 먹으면 별미다. 

몸통은 덜 말라 부드럽고, 꼬랑지 부분은 꾸덕꾸덕하게 말라 있어 부위별로 다른 맛이 난다. 겨울이 한창인 1월에 통영, 거제, 진해에 간다면 대구 한 마리를 사서 맛보는 것도 괜찮다. 서울에서는 다동 충무집에서 한겨울에 '대구포'라는 메뉴를 팔기도 한다.

충남에서도 대천항이 대구 위탁 판매를 가장 많이 한다. 새벽부터 배가 들어오기 시작해 오전 8시에 경매를 시작한다. 경매가 시작되기 전에 항구 주변을 둘러봤다. 외포나 용원항처럼 대구 음식을 하는 곳이 있나 찾아봤다. 아무리 찾아도 어느 항구의 음식점처럼 모둠회, 물회, 물메기는 팔아도 대구 음식을 내는 곳이 없었다.

경매를 시작한 위판장을 찾으니 대구로 채워진 상자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지만, 정작 그 주변에서는 그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경매가 이뤄진 대구는 현지에서 소비하는 것보다는 수도권 식당이나 대형 마트에 납품한다고 한다. 

대구는 겨울 별미다. 1990년대에는 한 마리에 수십만 원에서 백만 원대까지 갔었다. 대구가 남획으로 사라졌던 시기였기 때문에 상당히 비쌌다. 최근에는 방류 사업으로 개체 수가 복원되면서 3~4kg 나가는 대구를 몇만 원이면 살 수 있다. 온라인으로 주문 가능하고 손질까지 해서 보내주니 집에서는 간단히 씻어서 곧장 요리할 수 있다.

맛없는 대구전은 '글레이징' 악용한 탓
 
▲ 생대구로 전을 부치면 별미 가운데 별미다. 살이 수분기를 머금고 있어 부드럽기도 한없이 부드럽거니와 고소함이 그 어떤 생선 살보다 뛰어나다. ⓒ 김진영

대구로 만드는 요리 가운데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게 '전'이다. 명절에 냉동 포장된 대구전 감을 사서 부치면 푸석해서 맛이 없다. 대구전 감을 만드는 과정에서 글레이징(glazing)을 한다. 글레이징은 대구살 표면에 얼음 피막을 씌워 탈수, 변질을 막는 작업이다. 

이를 악용해 물을 더 넣는 경우가 있다. 물을 잔뜩 머금은 대구 살을 해동해 전으로 부치면 푸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을 데워서 먹으니 맛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생대구로 전을 부치면 별미 가운데 별미다. 살이 수분기를 머금고 있어 부드럽기도 한없이 부드럽거니와 고소함이 그 어떤 생선 살보다 뛰어나다. 계란옷을 입혀 기름까지 머금게 되니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그 다음으로는 말린 대구다. 잘게 찢은 것을 매운 양념에 찍어 먹기도 하지만, 제철 맞은 무나 배추를 넣고 맑게 끓인 국은 생대구 맑은 탕에서 맛볼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대구살이 건조되면서 감칠맛과 지방이 숙성되면서 향미가 증가해 깊은 맛이 난다. 태안의 우럭젓국도 시원하지만 말린 대구로 끓인 젓국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다. 

대구 금어기는 부산, 경남은 1월 한 달, 나머지 지역은 3월이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됐다. 겨울을 대표하는 생선으로 방어를 많이 꼽지만 대구 또한 겨울에 즐길 수 있는 대표 생선이다.
 
▲ 충남에서도 대천항이 대구 위탁 판매를 가장 많이 한다. 새벽부터 배가 들어오기 시작해 오전 8시에 경매를 시작한다. ⓒ 김진영

전략적 인내의 파산과 미국의 현상유지책

트럼프 대북대응책은 전략적 인내와 달라
문경환 기자 
기사입력: 2018/12/25 [16:50]  최종편집: ⓒ 자주시보
빠르게 발전할 것 같던 북미관계가 정체되었다. 북한의 선제적 비핵화 조치에 대해 미국이 종전선언이나 제재완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북한에 추가적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 내에서조차 정체된 북미관계의 원인이 미국에게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런 미국의 대북정책을 두고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 혹은 ‘속도조절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대북정책의 본질과 성격을 놓고 볼 때 이런 이름은 정확하지 않고 오히려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일단 ‘속도조절론’이란 표현은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조절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현재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향해 나아갈 생각이 없다.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은근슬쩍 북핵폐기로 바꿔 부른다. 한반도 비핵화를 하려면 미국이 대북 핵위협을 중단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북미관계 정상화 역시 평화협정 체결이 필요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하므로 미국의 기피 대상이다. 즉, 미국은 ‘속도조절’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나아갈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북한이 너무 서둘러서 미국이 차분하게 상황을 조절한다는 인상을 주는 ‘속도조절론’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렇다면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는 어떤가? 이 표현은 일단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이 오바마 정부가 추진하던 ‘전략적 인내’의 연장선이며 본질과 성격은 같지만 전술적 변화만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지금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 대응 양태는 현상유지책

일단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는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왜 파산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전 미국 정부들이 북한과 대결도 해보고 대화도 해봤지만 모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에게 밀리기만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집권 초기에 대결과 대화를 시도했다가 똑같은 꼴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북한의 대화 요구나 군사 행동에 직접 대응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속으로 북한 내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각종 공작에 매달렸다. 경제봉쇄는 기본이며 테러, 민심 교란, 한국과 일본 등 주변국을 통한 북한 자극, 북중 관계 이간질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했다. 북한에 불을 지르기 위해 내부에 계속 불씨를 던진 꼴이다. ‘전략적 인내’ 정책은 명칭과 달리 겉으로는 ‘인내’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대북적대정책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는 통하지 않았고 북한의 핵무력 강화로 인하여 더 이상 북한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내에서조차 전략적 인내로 인해 북한이 핵무력을 강화했다며 불만이 터져 나왔다. 북한 내부에 불이 난 게 아니라 거꾸로 미국 집 앞에 불이 난 셈이다. 미국은 집에 불이 옮겨 붙기 전에 북한에게 그만 불을 지르라며 서둘러 대화에 나서야 했다. 미국에 정권교체가 없었다 해도,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해도 ‘전략적 인내’ 정책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미국이 다시 ‘전략적 인내’ 정책을 꺼내들었다는 주장은 이런 배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소리다. 

지금 미국 정부의 대북 대응 양태는 ‘현상유지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장 집에 불이 옮겨 붙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불길을 막는데 급급해 우왕좌왕하며 내놓는 것이라 ‘정책’이라고 하기조차 민망하다. 일단 미국은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단하고, 북한이 요구하는 종전선언, 제재해제는 하지 않으며 대북제재는 유지되는 지금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현상유지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1월 7일 백악관출입기자들과 회견하고 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현상유지책과 전략적 인내 정책은 나타나는 모습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전략적 인내는 대화를 전혀 하지 않고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데 반해 현상유지책은 대화를 진행하면서 군사적 압박은 최대한 자제한다. 미군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한미연합훈련의 명칭에서 ‘연합’을 빼고, 훈련 규모 축소와 언론보도 자제를 하겠다고 나오는 게 대표적인 모습이다. 심지어 이미 일부 한미연합훈련을 한반도 밖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그만큼 수세에 몰려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관성의 법칙을 이용한 전형적인 사기꾼 행태

지금 미국의 태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받는 부분은 사기꾼 수법을 쓰는 것이다. 미국은 일단 합의를 하고서는 자기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상대에게만 약속에도 없는 사항을 추가로 요구하는 전형적인 사기꾼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이미 비핵화 조치를 했음에도 조금 더 하면 종전선언도 하고 제재해제도 할 것처럼 설득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행태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의 심리학 이론과 행동경제학 이론은 기업의 영업 기법부터 협상, 심지어 정부 정책에도 영향을 준다. 2008년에 나온 행동경제학 서적 ‘넛지’(Nudge)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줬다고 알려지면서 세계적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들 이론 가운데 일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는데 사람은 한 번 어떤 결정을 하면 그 결정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걸 응용한 전략으로 ‘문전걸치기 전략’(the foot in the door technique)이 있다. 닫으려는 문에 일단 발을 넣으면 상대가 문을 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영기법에서 이 전략은 기업에게 마음의 문을 닫으려는 고객에게 작은 부탁을 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가는 전략이다.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일단 작은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그것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처음에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았을 무리한 부탁도 들어주게 된다.

이것은 실제 투자 사기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인데 일단 누군가에게 투자를 받아내고 나면 나중에 ‘지금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더 투자하면 나중에 훨씬 크게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득해 계속해서 투자를 받아내는 사례가 많다. 사기를 당하는 측에서는 투자금이 아깝기도 하고 투자를 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믿고 싶기에 계속해서 투자 규모를 늘리게 마련이다. 

느닷없는 심리학 얘기를 꺼낸 것은 미국이 다른 나라를 대상으로 저런 식의 사기를 많이 쳤기 때문이다. 대량살상무기만 폐기하면, 개혁개방만 하면, 사찰만 허용하면 경제 지원을 해주겠다는 식으로 속이고 정작 경제 지원은 하지도 않으면서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해서 결국 상대국을 무너뜨린다. 리비아의 카다피가 유엔 총회장에서 이런 미국의 행태에 속았다고 규탄했지만 끝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리비아는 붕괴하고 말았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도 ‘조금만 더 비핵화하면 약속했던 종전선언, 제재해제 하겠다’는 식으로 설득하면 북한이 이미 해버린 비핵화 조치가 아까워서라도 조금 더 비핵화를 할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북한의 태도는 단호하다. 자신들은 미국이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더 이상의 비핵화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전략적 인내 정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기꾼 행태까지 나오는 걸 보면 미국도 어지간히 궁지에 몰린 것 같다. 

전략적 패퇴 시기에는 혼선이 불가피

전략적 인내 정책은 북한 붕괴라는 목표와 기대를 가지고 갖가지 공작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현상유지책은 목표와 전망 없이 속수무책으로 ‘전략적 패퇴’의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핵위협에 공포를 느끼며 안보 위협 해소에 집중하는 방어적 성격으로 밀려난 것이 현상유지책이다. 그런데 방어선을 지키며 현상유지라도 하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은 후퇴의 연속이다. 

9월 평양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후퇴는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9월 남북공동선언을 본 미국은 처음에 발끈했으나 당장 이를 뒤집었다가 더 큰 공세에 직면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북군사합의들을 인정했고, 대북제재 위반이라고 떠들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도 인정했다. 19일 한미워킹그룹 회의차 입국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들을 불러 모아 성명을 낭독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과 미국인 북한 여행 금지 재검토를 할 수 있다며 북한에 미소를 보낸 것이다. 한미워킹그룹에서는 철도, 도로 연결사업 착공식도 승인했다. 이를 두고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에 담길 대미 메시지에 영향을 주기 위한” 의도로 풀이했다. 

미국의 거듭된 대화 요구, 비핵화 압박을 무시하고 있는 북한에게 미국이 이런 저자세를 보이는 것이 의외라는 인상을 준다. 그간 강경발언을 이어오던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입을 다물었고 매티스 국방장관은 아예 사퇴해버렸다. 중국, 러시아를 향해서도 초강경 압박을 이어가는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보이는 이런 저자세 태도를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전략적 패퇴 시기에는 대열정비도 어렵고 정책혼선도 불가피하다. 패색이 짙은 정부에서 책임자를 자주 교체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이다. 일본도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총리가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계속 바뀌었다. 지난 11월 미 중앙정보국 코리아임무센터의 책임자 앤드루 김이 취임 1년 반 만에 사임하고 최근 매티스 국방장관이 사임한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이처럼 현상유지책은 전략적 인내와 본질과 성격이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다른 개념이라면 그 운명도 다를 것이다. 전략적 인내는 나름 긴 수명을 가지고 있었다. 2010년 5월 처음 언급된 전략적 인내는 2016년까지 6년가량 이어졌다. 그러나 현상유지책은 오래갈 수 없다. 미국이 북한의 말 한 마디에도 전전긍긍하고 신년사에 뭐가 실릴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불안정한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상유지책이 파산하면 미국에게 다른 대안이 있을까? 미국이 결국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정상화, 평화체제 수립의 길로 나서면 대북적대정책은 당연히 유지할 수 없고 남북의 자주통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지긋지긋한 승인정책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글은 주권연구소와 자주시보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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