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0일 목요일

한자, 한문 그리고 쉬운 우리말 번역

[통일문화 만들어가며 236] 《조선왕조실록》 한자와 중국 한자의 관계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4/07/11 [04:04]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옛책은 중국식 한문과 우리식 한문, 이두 등이 포함되어 있어 번역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북에서도 20년이나 걸려 번역했다고 한다. 남측에 출간된 책 중에서 들녘출판사의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을 한권으로 간추려 정리한 책인데 그 중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직접 번역한 것인지 여러 번역서를 종합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음) 남과 북의 협력이 꼭 필요한 분야가 이런 학술분야일 것이다. © 자주민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다룬 [통일문화 만들어가며 235] “중국한류 키우려면 김수현 장백산광고 이해해야”(http://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6763)에 독자 “고양이”님이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았다. “뭐 하나 여쭤보아도 될런지요? 혹시 조선왕조실록을 읽어 보셨는지요 ? 전체를 다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조선왕조실록은 한어로 기록된 문서라는 겁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는 한문이라고 하지만 이른바 한글이 한국어에 특화되었듯이, 왕조실록의 한문은 한어에 특화되어 있지 않나해서입니다. 왕조실록은 정확히 한어순으로 알고 있읍니다. 흔히들 글을 빌렸다 하지만 글만 빌린게 아니고 말까지 빌리지 않고서는 완벽한 한어문장으로 방대한 문서를 작성한다는 것에 의문점이 상당해서 여쭤봅니다. 주변에 한어내지 한어문장에 허심탄회하게 문의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여쭤봅니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조실록》은 단편적으로 얻어 본 수준이었고 또 “특화”가 무슨 말인지 몰라 한국에서 만든 사전을 펼쳐보기도 했다. 질문의 관건은 “흔히들 글을 빌렸다 하지만 글만 빌린게 아니고 말까지 빌리지 않고서는 완벽한 한어문장으로 방대한 문서를 작성한다는 것에 의문점이 상당”하다였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한자, 한문을 많이 사용했고 역사도 한자로 기록한데 대해 한국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어떤 사람들이 한자를 우리민족의 글자라고 주장한다는 말을 듣고 웃은 적이 있다), 필자 나름대로 이렇게 이해했다. 여기서 말하는 “글”은 “글자” 즉 “한자”를 가리키고 “말”이란 한마디한마디의 서술방식, 서술순서 등등까지 포함한 문장격식을 가리키는 모양이라고. 질문 덕분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모르던 정보들을 알게 되었고 생각도 많아져 답을 작성해본다. “고양이”님에게 만족을 줄지는 미지수이나, 필자로서는 최선을 다한다. 《이조실록》이 한어순이라는 건 필자가 본 범위 안에서는 맞다. 가장 쉬운 방식이 같은 사건을 다룬 《이조실록》과 《명실록》의 기록을 대조하는 것이리라. 1407년(명나라 영락永樂5년)에 태종 이방원(李芳遠)이 당시 세자였던 이제(李褆, 세종의 큰형, 흔히 양녕대군으로 알려진 인물)를 진표사(進表使, 음력설을 축하하는 표문을 바치는 사절)로 삼아 명나라에 보냈는데, 당시 명나라를 통치하던 영락황제도 죽은 뒤 마침 태종이란 시호를 받았기에 《명실록》에도 《태종실록》이 있다. 이조의 《태종실록》13권 9월 을해일 기록과 명나라 《태종실록》 75권 이듬해 영락6년 정월 경술일의 기록을 대조해보자. “遣世子褆如京師, 賀正也.(아래 사절단의 구성과 작별의식 등 구체적인 내용은 줄임)” “朝鮮國王李芳遠遣世子褆奉表,貢馬,金銀器及方物。” 우리글로 옮기면 앞의 기록은 “세자 (이)제를 파견해 (명나라) 수도로 가게 하니 정월 초하루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다.”쯤이겠고, 뒤의 기록은 “조선국왕 이방원이 세자 (이)제를 파견하여 표를 바치고 말, 금은그릇과 토산물을 올리게 했다.”쯤이 되겠다. 두 기록에서 꼭같은 네 글자는 “챈쓰즈티(遣世子褆)”이다. “보낸다”, “파견한다”는 의미인 “챈(遣)”이 한문에서는 “세자”의 앞에 붙었는데, 우리말, 우리글에서는 뒤에 가는 법이고, 시가 따위 특수한 경우를 내놓고는 동사, 술어를 앞에 놓지 않는다. “遣世子褆”의 한자들을 유지하되 우리말식으로 기록한다면 아마 “세자(世子) 제(褆)를 견(遣)하여”로 될 것이다. 이런 비교를 통해 “완벽한 한어문장”을 재확인할 수 있겠는데, 단순히 “말까지 빌리”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왜 그럴까? 의문을 풀려면 우선 옛날에 존재했던 “언문불일치”현상을 재확인해야겠다. 우리 민족이 말(언어)과 기록수단(문자)의 차이로 오랜 세월 “언문불일치”상태에 처했다면, 중국은 입말과 서사어의 차이로 “언문불일치”현상이 오래 유지되었다. 이런 차이는 20세기 10년대 후반부터 백화문운동(白话文運動)이 벌어진 다음에야 차차 사라져서 지금은 말하는대로 적는 방식이 고착되었다. 지금 몰밀어 문언문(文言文)이나 고문(古文)이라고 부르는 옛날 서사어는 입말과 비길 때 문법부터 시작해서 많이 다르고 오랜 세월 조금씩 변화를 가져왔기에 아무리 이름난 전문가들이라도 정통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우리 민족 조상들은 중국의 “언문불일치”현상을 잘 아는 상황에서 한자를 사용했고 한문을 사용했는바, 말하는 사람들과 글 쓰는 사람들이 갈라진 건 상당히 특이하다. 즉 어떤 사람들은 당시 중국에서 쓰이는 말을 애써 배웠고, 어떤 사람들은 중국에서 모범으로 떠받들리는 옛글이나 옛시들을 애써 배웠는바, 두 부류의 사람들은 별로 교차되지 않은 것이다. 중국말을 배워서 써먹은 사람들은 대개 역관(譯官)이 되었는데, 중국말교과서들이었던 《노걸대(老乞大)》나 《박통사(朴通事)》는 시대에 따라 수정편찬되면서 중국말의 변화에 순응했고 또 배우기 쉽도록 언해본(諺解本)들도 나왔으나, 그런 책들에 나오는 중국어는 선비나 관리들의 글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신분등급차이가 심하던 이조시기에 역관들이 중인(中人)에 불과했고 한문, 한시 사용자들은 양반신분을 자랑하기가 일쑤였던 현상에서 교차가 별로 이뤄지지 않은 이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이조시기 중국말을 역관들이 꽤나 재산을 모았다는 기록들이나, 선비, 관리들이 중국인들과 필담으로 뜻을 통했다는 기록들은 두 부류 인물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상당히 정확한 심지어 상당히 아름다운 말이나 글을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누군가는 한자와 한문이 아시아에서 통용된 현상을 유럽에서 라틴어가 통용되던 현상과 비교했는데 비슷한 소리다. 한자와 한문이 그 상대적인 안정성과 간결성으로 하여 국제통용문자로 쓰인 건 객관적인 사실이고 그런 과거를 특별히 부끄럽게 여길 필요는 없다. 단 민족문자가 창제된 뒤에도 공문서에서 천대받은 건 잘못이요,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사람들도 사문서에서는 곧잘 사용한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이조시기 궁전이나 명문에서 오가던 한글서류들이 꽤나 전해내려오는데 지금 쓰이지 않는 한자어들을 내놓고는 어순을 비롯하여 서술구조가 지금 하는 말과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런데 이런 쉬운 우리말이 공식서류에 적힐 때에는 어려운 중국고대서사어로 바뀌었다! 말과 글자가 달라지고, 글과 문장이 달라졌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언문의 2중불일치를 스스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궁중에는 붓과 종이를 갖고 임금을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말들을 적는 벼슬아치들이 있었다는데 처음부터 우리말을 한자로 옮겨 적었는지 아니면 먼저 이두나 훈민정음으로 속기했다가 정리했는지 아니면 직접 한자로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만, 같은 날 같은 일을 다룬 현존사료들을 비교하면 한문기록의 변화과정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통일문화 만들어가며](229) “농사짓는 사람들이 징을 왜 치는가?”(http://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16282)에서는 영조 14년(1738) 음력 11월 을축일(17일)에 임금과 우의정이 나눈 대화를 《이조실록》 <영조실록> 47권에 근거해 인용했다. 영조가 호남어사 남태량(南泰良)을 만난 장리에서 남태량이 어사 원경하(元景夏)가 속공(屬公, 물건을 관청의 소유로 하는 일)한 징·북 및 깃발을 마땅히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영조가 “농사짓는 사람들이 징을 왜 치는가?”고 물었더니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밭일이란 고됩니다. 혹시 게으름을 피우며 힘써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징이나 북을 두드려 그 기운을 북돋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간에서 군용물품을 감추어두면 뜻밖의 근심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때문에 지금 이미 속공한 이상 돌려주는 것 또한 뒤바뀌는 처사입니다, 마땅히 가치를 따져서 구제물자에 보충하거나 아니면 돈주조에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아뢰었고, 영조가 반론을 폈다는 게 골자다. “그렇지 않다. 과연 도적으로 된다면 호미 따위를 갖고도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일어날 수 있다. 진승, 오광이 어디 무기를 가졌던가? 당당한 국가가 어찌 민간의 물건을 가져다가 돈주조에 보태겠는가?” 이날의 이 만남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도 기록되었는데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위와 관계되는 대화부분원문들을 아래에 대조하면서 말하는 사람을 직관적으로 알아보도록 발언자가 바뀔 때마다 줄을 바꾸었다. 한자를 모르는 분들은 우선 발언 회수와 문장의 길이만 주의하시기를 부탁드린다. 《영조실록》: 泰良仍言: 前御史元景夏所屬公錚皷旗幟,宜還給民間. 上問曰: 農人之用錚鉦何也? 右議政宋寅明曰: 田野之間,勞於擧趾.或有懶不力作者,則擊金皷以振其氣.然民間藏戎器,恐有意外之慮.故爾今旣屬官,還給亦顚倒.宜折直補賑資,否則宜用鑄錢也. 上曰: 不然.苟爲盜也,鋤耰棘矜,皆可奮臂.陳勝、吳廣何嘗有兵?堂堂國家豈資民間之物而補貨泉乎? 《승정원일기》: 上曰: 元景夏御史時,屬公者皆寺中旗幟.而今此書啓,有民間錚鼓旗幟,還給民間之請.民間曾亦有此物乎? 寅明曰: 民輩耕穫之時,皆以此器,鼓動赴役者也.元景夏之當初禁斷,雖出於爲國慮患之意.此亦過慮.人心若離,鋤耰棘矜,皆可爲盜.何患無兵器?旣是民物,遽然屬公,則宜有民怨矣. 泰良曰: 民物決不(可)屬公.何以處之乎? 上曰: 安復駿之作爲片鐵歸家者,豈不駭然哉?其旗幟, 能如軍門恒用者乎? 泰良曰: 皆是無用之物.而旣是百年民俗, 亦難禁止矣. 寅明曰: 旣奪之後, 出給亦顚倒.自賑廳會錄,計直用之.何如? 上曰: 復駿之取用,亦云非矣.則朝家何可計直取用乎?大臣鋤耰之言,誠是矣.陳勝·吳廣,豈必待兵刃而興乎?元景夏未免過慮.此御史引蘇軾漏鼓之例,亦過矣. 泰溫曰: 補賑則民輩,反爲得食其費矣. 上曰: 此未免於割肉充腹也. 寅明曰:計直而給民輩,鑄錢時用之,好矣. 上曰: 堂堂之國,豈待民之錚鼓而用之乎?置之,可也. 이 대화에서 “상(上)”은 임금 영조를 가리키고 “태량(泰良)”은 남태량(南泰良), “인명(寅明)”은 송인명(宋寅明), 그리고 “태온(泰溫)”은 《영조실록》에 나오지 않으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우승지(右承旨) 남태온(南泰溫)이다. 그밖에도 여러 사람이 있은 현장에서 이 부분 대화에는 영조, 남태량, 송인명, 남태온 4명이 참여했는데, 현장기록인 셈인 《승정원일기》와 달리 잘 정리된 《영조실록》은 적잖은 말들을 줄이거나 합성하거나 늘였다. 예를 들어 “호미”는 송인명이 먼저 언급했고(“人心若離,鋤耰棘矜,皆可爲盜.何患無兵器?”, 인심이 흩어지면 호미, 고무래, 가시나무 따위로도 도적이 될 수 있으니 어이 병장기가 없을까 걱정하오리까?), 영조가 찬성했는데(“大臣鋤耰之言,誠是矣.” 대신의 호미 말이 실로 맞도다), 《영조실록》에서는 영조가 직접 꺼낸 것으로 되어 있다. 결과적으로는 영조의 영명함이 돋보인다. 진(秦)나라의 혹정을 반대해 봉기한 농민군 수령들인 진승, 오광을 거든 대목도 조금 다르다. 《승정원일기》:陳勝·吳廣,豈必待兵刃而興乎?(진승, 오광이 어찌 반드시 무기가 생기기를 기다려서 일떠났던고?) 《영조실록》: 陳勝、吳廣何嘗有兵?(진승, 오광이 어디 무기를 가졌던가?) 또 송인명이 악기를 언급한 부분은 내용이 상당히 늘어나면서 바뀌었다. 《승정원일기》: 民輩耕穫之時,皆以此器,鼓動赴役者也.(백성들은 밭갈이나 가을을 할 때 모두 이런 악기로 (사람들이) 일하도록 격려하는 바입니다.) 《영조실록》: 田野之間,勞於擧趾.或有懶不力作者,則擊金皷以振其氣.(밭일이란 고됩니다. 혹시 게으름을 피우며 힘써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징이나 북을 두드려 그 기운을 북돋게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자그마한 사례이지만, 한문을 잘 아는 분들이 《승정원일기》와 《영조실록》을 자세히 대조하면 입말색채가 줄어들고 서사어성분이 늘어난 변화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위의 예에서 특히 마지막 송인명의 발언은 원래 말보다 중국의 고대서사어에 더 접근했다. 보다 완벽한 한문이라 할까? 《이조실록》의 우리글번역에서 원본의 이런 변화도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준다. 인물들의 말을 될수록 자연스럽게 옮기겠느냐? 아니면 보다 예스럽게 옮기겠느냐? 필자 개인적으로는 될수록 자연스럽게 옮겨야 맞다고 생각한다. 《이조실록》에서 인용한 중국고대문서는 물론 순수한 한문이고 이조정부가 작성한 외교문서들도 완벽을 기한 한문인데 그렇다 해서 전문을 다 한문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중국의 고문대가들이라도 《이조실록》 앞에서는 두 손을 들 대목들도 많기 때문이다. 조선(북한)의 어느 한 책에서는 1970년대 초반 김일성 주석이 《이조실록》번역을 결심한 사연을 다루면서 그 어려운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실록문체란 보통의 한문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법률, 종교, 문학 등 각 분야의 어휘들이 다 집합되여있을뿐아니라 리두문체와 한문체로 옮긴것도 들어있기때문에 그를 해석하는 능력도 겸비되여야 하는것이다. 사실상 리두해석 같은 것은 이미 나이가 환갑이 넘은 홍기문박사를 제외한다면 누구도 할수 없으므로 실록번역이 어려운 상태에 놓일수 있었다.” 그때 환갑이 넘었다는 홍기문은 《임꺽정》의 저자인 아버지 벽초 홍명희가 나이차가 고작 15살인데, 광복 전부터 워낙 이두해독을 비롯한 특정분야의 대단한 권위였고 아버지를 따라 월북한 다음 고전문학작품들을 번역하는 등 일을 하면서 높은 명성을 누렸다. 고한문을 아는 학자들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조실록》번역을 위해 강력한 학자집단이 구성되었고 역본 400책을 출판하는 20년 번역과정에서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배양하였고 그 덕에 지금 조선에서 고문서번역자들이 활약한단다. 조선의 역문은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방침에 따라 먼 뒷날의 후대들도 알아보도록 쉽게 풀어쓰는 원칙에서 번역했으므로 읽기 쉽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학자집단의 검열을 거쳤기에 정확도도 상당히 높다. 이에 비해 한국의 역본은 한자어를 직역한 부분들이 많아서 필자처럼 한문을 엔간히 아는 사람들도 읽기 힘든 경우가 많고, 더욱이 개인적으로 일부 내용을 번역해서 출판한 책들은 몇 페이지 이상 봐주기가 어렵다. 《이조실록》만이 아니라 다른 한문사료나 한문문학작품들도 한국에서는 이상한 해석에 시달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한글세대들이 이른바 한문전문가들의 잘못된 해석에 근거해서 엉뚱한 논리를 펴는 걸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룰 작정이다. 그리고 《이조실록》을 비롯한 방대한 기록사료들을 놓고 한국에서는 “조상들의 놀라운 기록문화”를 운운하기 좋아하는 경향이 있던데, 그 기록문화의 정화를 제대로 흡수, 이용하는 문제는 진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조선에서는 봉건사관들이 위조할 필요가 없었던 자연변이 등 기록들을 모아서 수백 년 천문, 기상 등 자료들을 연구했다는데, 연구방식, 연구결과 등 한국과 다른 점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남북현실정치와 관계없는 이런 연구성과들이야말로 충분히 교류되어야겠건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남북관계의 현실이다. 빈약한 자료들에 근거해서 “북한의 **”을 운운하는 이른바 연구서적들은 곧잘 눈에 띄는데 정작 중요한 것들은 외면당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조선사람들이 정도전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설 따위를 퍼뜨리면서 조선이 참 한심하다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던 세력들이 있다. 상당수 한국인들의 역사지식이라는 게 드라마에서 얻었음을 감안할 때 그런 설이야말로 웃긴다. 삐딱한 눈길로 남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야 통일문화가 이뤄지는 법이다. [2014년 7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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