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윤법달의 북한 종교 이야기(2)
윤법달 | amiko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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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01 21: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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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권 수립과 한국전쟁 기간 동안의 북한종교
▲ 평양 칠골교회. 6․25 한국전쟁은 북한의 종교지형을 급격히 위축시키는 동시에 북한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동질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다. [사진 제공-윤법달]
북한에서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같은 해 12월까지 소련군이 철수함에 따라 북한사회는 본격적으로 인민민주주의혁명을 강화 발전시키는 단계로 접어든다.
인민민주주의혁명의 강화는 결국 프롤레타리아독재 기능을 더욱 강화하여 반혁명세력의 척결을 본격화하게 되고, 인민정권의 수립을 위한 넓은 범위의 통일전선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독재 확립을 위한 좁은 범위의 통일전선으로 전환하게 되는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 때문에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혁명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선전 선동에 역점을 두게 된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혁명 역량을 강화시킬 목적의 통일전선을 심화시키고, 반혁명 요소에 대한 투쟁과 함께 반종교의식의 대중적 고양을 목표로 삼게 된다.
6․25 한국전쟁은 북한의 종교지형을 급격히 위축시키는 동시에 종교지형 내부의 이질적 요소들의 대거 남하를 가져와 북한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동질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전쟁의 경험이 반체제적 성향이 강한 기독교 집단에 대해서도 반미․반제적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로 이어지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머리 속에 숭미사상이 오랜 기간에 걸쳐 뿌리 깊이 박혔기 때문에 숭미사상을 뿌리빼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하여 그들이 숭미사상을 스스로 버리게 되었습니다... 전쟁 전까지만 하여도 미제를 숭배하던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통하여 미제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침략자이며 강도이며 천하에 제일 비겁쟁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그들을 저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기독교인들과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하면 능히 그들을 우리 편에 묶어세울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전쟁 과정은 치열한 공습과 죽음에 처하는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일종의 ‘종교허무주의’ 내지 미제국주의와 동일시된 기독교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반그리스도교적 사회풍조’를 만연케 하였다. 또한 전쟁 후 반미주의가 강력한 사회통합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어 반기독교적 풍토는 더욱 심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정권의 수립과 한국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 점검은 종교인들에 대한 감시 강화와 예비검거 선풍을 몰고 오게 된다.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예비검거 선풍은 1949년 봄부터 불기 시작하여 1949년 4월을 전후하여 1차 검거가 있었고, 이어 여름에 2차 검거 그리고 11월경부터 3차 검거에 들어가 6․25 전야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검거 선풍은 천주교에도 몰아닥쳐 49년 4월 28일에 덕원수도원 인쇄소 책임자인 루도빅 휘셔 수사가 불온물 인쇄 혐의로 체포되고, 5월 11일에는 나머지 독일인 신부, 수사들과 한국인 신부 5명을 모두 체포되어 덕원수도원은 결국 폐쇄되었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부분은 북한 정권이 1950년 3월 3일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제정한 형법 가운데 ‘제21장 관리질서 침해에 관한 죄’의 항목 속에 종교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종교단체에 기부를 강요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제257조)와 “종교단체에서 행정적 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교화노동에 처한다”(제258조)는 것으로 아마도 이 형법 조항은 북한 지역만을 대상으로 삼기보다 남침으로 인해 그 영향을 미치게 된 지역까지 포괄하는 의미에서 제정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1987년 2월 5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결정 제2호로 채택 공포된 북한 형법에서는 이 조항들이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 북한 정권은 1950년 3월 3일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제정한 형법 가운데 ‘제21장 관리질서 침해에 관한 죄’의 항목 속에 “종교단체에 기부를 강요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를 포함시킨다. [사진 제공-윤법달]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시기에는 소련군의 철수와 한국전쟁의 발발로 종교지도자들의 체포와 월남사태가 대규모로 발생하여 거의 모든 종교가 결정적으로 교세의 약화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전쟁 시기의 가혹한 탄압과 처형은 더 이상 종교인들이 북한 지역에서 종교의 자유라던가 종교의 사회적 역할을 운운할 수 있는 여지를 빼앗아 버리고 만다.
이 시기의 대외관계 역시 해방공간의 대외관계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이슈에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남북관계에서의 선전적 효과를 위해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통일전선형 종교단체들이 참여하는 정도였으며, 전쟁기간 중에 민족통일전선이 시도됨에 따라 동원되었지만 불과 3개월 만에 패퇴하게 되어 실질적인 활동과 그 결과를 과시하지는 못했다.
다만 조선기독교도연맹이 1950년 7월 10일 경에 이미 1947년 2월에 결성되었던 조선기독교민주동맹을 서울을 중심으로 재건하여 남한 지역 종교인들과의 공동행동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경주되기도 하였다. 또 7월 중순에는 불교신앙협회, 불교청년사, 여성불교도회 등 북한의 불교신자 1,300명이 전쟁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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