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되면서 재벌 기득권의 위력이 다시 만천하에 드러났다. 촛불혁명을 이뤄낸 민중들의 뛰어난 정치의식은 전직 대통령 두 명을 구속시킬 정도로 위력적이었지만, 재벌의 수장인 이재용을 가두는 데에는 충분치 못했던 모양이다.
재벌의 사전적 의미는 “거대 자본을 가진 동족으로 이루어진 혈연적 기업체”다. 이는 비단 우리말 사전뿐 아니라 옥스퍼드 사전과 영문 위키백과에도 나오는 정의다. “와, 우리나라 기업 형태가 당당히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돼있다니 참 자랑스러워요”라며 기뻐할 일이 아니다. 이게 불고기나 비빔밥처럼 한국을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특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전이 지적하는 재벌의 두 가지 특징은 ①수십 가지 일을 하는 거대기업인데 ②가족이 몇 대째 세습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수십 가지 일을 하는 기업은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 경영은 수십 명의 전문 경영인이 나눠 맡는다.
다른 나라에도 몇 대째 세습을 하는 기업이 있다. 하지만 이런 기업은 보통 한 가지 일만 한다. 즉 다른 나라에서는 수십 가지 일을 하는 거대기업을 한 가문이 소유해 몇 대째 세습하는 지배구조를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온 세상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 해괴한 지배구조를 우리가 붙들고 있을 이유가 도대체 뭔가? 그것도 법질서와 사회적 정의를 파괴하면서까지 말이다. 재벌을 해체하는 일에 진심으로 진지해져야 하는 이유다.
일본의 재벌 해체
이 거대한 괴물을 해체하기 위한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다행히 인류에게는 재벌을 해체한 두 번의 전례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은 재벌을 해체한 것이고 다른 한 번은 유사재벌을 해체한 것이지만, 재벌이라는 존재가 워낙 희귀하다보니 이 두 사례 모두 우리가 참고할 만한 소중한 기록들이다.
첫 번째 사례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정의 일본 재벌 해체다. 사실 재벌의 뿌리는 일본이다. 한자로는 우리와 똑같이 財閥이라고 쓰고 ‘자이바츠’라고 읽는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가 일본을 휘어잡았던 3대 자이바츠다.
이들의 역사는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깊다. 미쓰이는 1673년, 미쓰비시는 1870년, 스미토모는 1919년 각각 설립됐다. 미쓰이는 사실상 중세 시대에 설립된 기업이다. 아무튼 후진 거 발전시키는 데에는 일본도 참 한 가닥 하는 나라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정은 3대 자이바츠 가문이 소유한 주식을 강제로 매각해 분산시킨 뒤 이들의 기업 경영을 원천적으로 금지했다. 독점금지법, 카르텔해체법, 경제력분산법 딱 세 가지 법으로 신속하게 자이바츠를 박살낸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사재벌
일본의 사례가 군정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뤄졌다면 2012년 단행된 이스라엘의 유사재벌 해체는 그보다 훨씬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스라엘의 개혁 대상을 ‘유사재벌’이라고 부른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의 주요 기업들이 엄밀히 말해 재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 재벌은 ①수십 가지 일을 하면서 ②한 가문이 이를 세습한다는 두 가지 특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기업들은 수십 가지 일을 하기는 했지만 세습은 하지 않았다. 다른 서구 사회의 복합대기업과 비슷한 형태를 지녔던 셈이다.
이런데도 이들이 ‘유사재벌’로 묶이는 이유는 2000년대 들어 이들이 세습을 진지하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원활한 세습을 위해 한국 재벌들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만약 이들의 의지대로 세습이 됐다면 이스라엘은 일본, 한국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로 재벌을 보유한 국가가 됐을 것이다.
당시 Nochi Dankner, Bino, Tshuva, Ofer, Lev Leviev, Azrieli 등 6대 유사재벌의 매출은 이스라엘 전체 국내총생산의 25%를 차지했다. 이들이 민중들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이스라엘 언론에 이런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최근 교외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한 이스라엘의 일반 가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집과 이웃집 모두 같은 대기업에서 지은 것이고, 보험이나 휴대폰과 인터넷 서비스도 다 같은 회사가 제공한다. 냉장고에는 역시 같은 회사가 운영하는 슈퍼마켓에서 사온 제품들로 가득 차 있다.
옷장에 들어있는 옷들이나 구두도 같은 회사에 속하는 상점들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집에서 보는 신문도, 재테크를 위해 이용하는 금융업체도 다 같은 복합대기업의 계열사다. 아버지는 이스라엘 최대의 화학 공장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신생 바이오텍 기업에서 일한다. 그런데 이 회사들도 같은 복합대기업 소유다.”
실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래미안 아파트에서 살면서 삼성전자 TV를 보고 갤럭시 핸드폰을 쓰는데, 자동차보험은 삼성화재가, 도난방지시스템은 에스원이 각각 담당하고, 휴가는 호텔신라에서 보낸다. 이것들을 하나씩 다른 재벌 제품으로 교체(TV는 LG, 자동차보험은 현대해상, 통신사는 SK, 휴가는 롯데호텔)할 수는 있지만, 민중들의 삶이 5대 재벌에 장악된 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민중의 힘으로 정치를 바꾸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 유사재벌들을 어떻게 해체했을까? 사실 이 과정이 너무나 간단해서 보는 내가 다 허탈할 정도였다. 이스라엘 의회와 정부가 그냥 법으로 재벌을 해체해버린 것이다.
실제 동원된 법안은 여러 개였고, 그 내용도 꽤나 복잡했지만 요지는 하나다. 유사재벌이 더 이상 경제적 독점을 누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세습을 하지 못하도록 법을 바꿔버린 것이다. 미군정이 단 세 개의 법안으로 자이바츠를 해체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래서 결국 재벌 해체는 정치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두 번의 재벌 해체 모두 강력한 집권세력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재벌 해체는 재벌을 해체할 의지를 가진 세력이 집권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 어느 나라이건 늘 자본은 정치를 장악해 왔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스라엘 의회와 정부는 6대 유사재벌 해체에 발 벗고 나섰을까?
그들이 유사재벌 개혁에 나선 것은 2011년 말부터였다. 그런데 이 해 7월 이스라엘에서는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민중시위가 벌어졌다. 6대 유사재벌이 장악한 신자유주의 30년 동안 불평등은 극에 달했고 민중들은 이를 견디다 못해 가두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유사재벌의 세습 시도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6주 동안 무려 30만 명이 텔아비브 중심가에서 텐트를 치고 시위를 벌였다. 의회는 민중들의 투쟁에 놀라 허겁지겁 개혁안을 만들었지만 불충분한 개혁안에 민중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총선에서 유사재벌 해체와 불평등 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들이 대거 당선됐다. 이 신진 세력이 민중들의 열망을 등에 업고 2013년 유사재벌 해체를 완성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 사례가 무엇을 뜻할까? 재벌 해체는 정치의 문제이지만, 한 발 더 들어가면 결국 민중들의 의지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단언컨대 이스라엘 유사재벌 해체의 동력은 민중들의 투쟁이었다.
이스라엘 민중들은 6주 동안 30만 명이 텔아비브 거리를 누비며 싸웠다. 이스라엘 인구가 우리의 7분의 1가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로 치면 6주 동안 연인원 약 200만 명이 투쟁에 나섰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6주 동안 200만 명이 아니라 하루에도 200만 명이 투쟁에 나선 경험이 있는 나라다. 이스라엘의 민중 투쟁이 아무리 대단했다 한들, 우리 민중들의 투쟁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재벌 해체는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이 꿈의 실현 여부는 우리 민중들이 지닌 꿈과 의지의 크기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원대한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으로 공정한 나라,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나라를 위해 우리는 다시 또 다시 긴 투쟁의 여정에 나서야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