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비롯해 대다수 동물은 많든 적든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생존하기 위해 각자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다. 무리를 지으면 그만큼 적은 비용으로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그렇다면 무리의 규모는 무조건 커야 좋을까? 그렇지 않다. 무리의 규모가 커지면 그만큼 결속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동물의 세계에서 무리의 결속을 다지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침팬지는 털고르기(Grooming)로, 황제펭귄은 체온나누기(Huddling)로, 대머리따오기는 교대비행(Turn taking fly)으로 무리의 결속을 다진다. 무리의 결속을 다지는 방법은 무리의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규모와도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무리 지어 생활하는 모든 동물은 그것이 혈연으로 뭉쳐진 형태라 하더라도 갈등을 피할 수 없으므로 결속을 다지기 위해 저마다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가지는데 그것이 무리의 규모를 결정하기도 한다.

유전적으로 인간과 가장 유사한 침팬지의 경우 적게는 10마리에서 많게는 150마리까지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침팬지 무리의 규모는 무작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털고르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최적의 수로 볼 수 있다. 침팬지 무리는 깨어 있는 시간의 약 20%를 털고르기에 투자하는데, 무리의 규모가 너무 크면 그만큼 털고르기에 많은 시간을 써야 하므로 오히려 생존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황제펭귄은 겨울이 되면 온도가 영하 40~50도까지 떨어지는 남극에서 새끼까지 낳아 기르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극한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의 몸을 밀착해 거대한 원을 만들어 안쪽에 있는 펭귄은 바깥쪽으로 움직이고, 바깥쪽에 있는 펭귄은 안쪽으로 움직이는 이른바 '체온나누기'를 하기 때문이다. 황제펭귄은 수천 마리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안쪽의 온도가 너무 높아지지 않을 만큼, 또 추위에 노출되는 시간이 모두에게 비슷하게 주어질 만큼의 규모로 체온나누기를 한다.

멸종위기종인 대머리따오기는 번식을 마치면 지중해에서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까지 약 2000㎞를 이동하는데, 대부분의 철새들처럼 V자로 편대를 지어 비행한다. 비행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V자로 편대를 짓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힘이 가장 많이 드는 맨 앞자리를 한 마리가 계속 이끄는 것이 아니라, 무리가 교대하는 방식으로 전체의 에너지 소모량을 줄인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즉 비행을 하는 각각의 철새가 맨 앞으로 나서는 시간이 동료의 도움을 받는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만약에 침팬지 무리의 일부가 털고르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작은 갈등조차 견디지 못하고 결국 무리는 해체되고 말 것이다. 또한 황제펭귄 무리 중에 일부가 바깥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계속 안쪽에 있으려 한다면, 대머리따오기 중의 일부가 선두에 서지 않고 계속 뒤에 있으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모두 얼어 죽거나 그렇게까지 멀리 비행할 수 없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의 무리에도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은 털고르기도 하지 않고, 체온나누기도 하지 않고, 교대비행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무리는 어떻게 결속을 다질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로 결속한다. 그로 인해 인간은 그 어떤 동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를 이룰 수 있었다. 그야말로 지구촌이 하나로 결속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리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그만큼 결속력이 약하다. 이해가 맞지 않으면 서로 전쟁도 불사한다.

따라서 결속의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속의 질이 중요하다.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로빈 던바 교수는 한 인간이 최대 150명까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수가 아니다. 결속을 긴밀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물들이 털고르기를 하듯 서로를 배려하여 쉬운 말과 따뜻한 말을 주고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긴밀하게 결속할 수 있다. 지금 당신은 가족에게 동료에게 민원인에게 그렇게 하고 있는가? 이제는 '털뽑기'를 당장 멈추어야 할 때이다.

김형주 상명대 국어문화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