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공포하고 화룡시정부가 세운 표지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61년 1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공포하고 화룡시정부가 세운 표지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다시 처창즈를 벗어나 고동하가 굽이치는 계곡을 지나서 굽이 굽이 30분이나 달렸을까. 이번엔 어랑촌(漁浪村)항일유격근거지이다. 마을 입구에 1961년 1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공포하고 화룡시정부가 세운 표지석이 있다.

"1932년 12월에 창건. 이듬해 1월 중공화령현위에서는 이곳에다 평강·어랑촌혁명위원회(후에는 인민혁명정부로 고쳤음)를 성립하였다. 중공화령현위, 평강구위 기관과 화룡현 유격대지휘부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1934년 9월에 근거지 군민들은 처창즈에로 전이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화룡유격대의 근거지였으며, 1934년 9월 군민이 함께 이곳에서 처창즈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2017년 10월에 다시 세운 표지석에는 이곳 근거지의 면적이 약 250만㎡이며, 중공 화령현위와 평강구위, 유격중대 제1,2소대 주둔지, 인민혁명정부, 병기공장 등 유적지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다.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어랑촌은 10쳐 차례에 걸쳐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한 청산리전투(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중 10월 22일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일본군 27기병연대와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어떻게 만주의 외진 산골마을에서 그토록 치열한 항전이 10년여를 전후해 계속될 수 있었을까? 

"당시 두만강 연안의 산악지대는 조선에서 이주한 가난한 농민들이 주민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조직들이 확대되여 수많은 대중이 그에 결속되였으며 대중운동이 급속히 발전한 곳이였다. 또한 험산계곡들과 무성한 삼림으로 뒤덮여있어 적들이 최신무기를 가지고도 공격하기에는 어렵고 유격대가 방위하기에는 유리한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북측 설명이다.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일제의 식민통치를 피해 이주해 온 조선 유민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고 연길과 용정 등지에서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인 청년들의 영향으로 공산주의 조직이 깊숙히 뿌리내렸으며, 인마의 통행이 곤란한 지경의 울창한 삼림지대인 곳이 바로 어랑촌이었다.

두만강 연안 간도지방에는 당시 전체 재만 조선인 약 80만명의 절반이 집중되었고 이곳의 공산주의 운동은 조선인들이 출발점을 이루었다.

유격근거지 창설을 결정한 1931년 12월 명월구회의와 1932년 5월 소사하회의에서 김일성은 "유격근거지는 적들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해방지구형태가 기본으로 되어야 하며 국내작전을 하는데서나 조국 인민들의 지원을 받는데서 다같이 편리한 두만강연안의 산간지대들에 꾸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1932년 5월 안도현 소사하에 첫 유격구를 창설한다.

여기서부터 유격구가 부챗살처럼 뻗어나가면서 짧은 기간에 두만강 연안으로 확대되었으니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도 그중의 한 곳인 셈이다. 

어랑촌 항일영웅 37인의 초상과 간단한 소개가 적혀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어랑촌 항일영웅 37인의 초상과 간단한 소개가 적혀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마을 입구의 표지석 위로 조성된 203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어랑촌 항일영웅 37인의 초상과 간단한 소개가 적혀있다. '동북항일연군', '조선족'이라고 쓰인 기록이 즐비하다.

손철운(孙哲云, 동북항일연군 제2군 독립사단 제2중대장, ?~1934), 최수만(崔寿万,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1독립사단 참모총장. 1904~1934), 조기섭(趙基燮,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사령부 부관), 안정규(安正奎, 중국공산당 안도구위 서기. 1906~1934), 김덕춘(金德春, 중국공산당 화룡현위 선전부장. 1901~1933), 이명배(李明培, 중국공산당 어랑촌 지부 서기. 1912~1933), 차보균(车宝均, 화룡현 유격여단 대원. 1904~1934), 이화춘(李华春, 1901~1933), 박파(朴波, 1909~1933), 고도(高度, ?~1933), 양철운(扬鉄云, 1910~1933), 김선(金善, 1919~2009), 박수배(朴寿环, 1909~1938), 김정옥(金貞玉, 1915~1934), 리계순(李桂順, 1914~1938), 그리고 중국공산당 화룡현위 서기로 활동하며 처창즈 유격근거지에 파견되기도 했다가 민생단으로 몰려 31살의 나이로 죽음을 당한 김일환(金日煥, 1903~1934) 등이다.

희생자 중에는 김일환의 모친이자 리계순의 시어머니인 오옥경(吴玉京, ?~?)도 있다.

어랑촌 유격근거지의 투쟁을 만화로 그려 소개한 게시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어랑촌 유격근거지의 투쟁을 만화로 그려 소개한 게시판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계단을 더 올라가면 1933년 2월 12일 동틀 무렵 일본군 수비대와 위만경찰 등 360명이 불시에 어랑촌 항일유격근거지를 습격하여 포위 토벌을 감행할 때 6시간 치열한 전투끝에 적군 18명을 사살하고 결국 장렬히 전사한 13용사의 비석과 추모시설이 있다.

북측 기록에 따르면, 1933년 봄 일본군이 수십문의 박격포로 포사격을 감행한 뒤 토벌을 강행할 때 어랑촌유격근거지에 있던 약 80명의 유격대원들은 돌과 폭발물을 재어넣은 작탄(炸彈)은 물론이고 심지어 창으로 맞서며 유격구를 지켜냈다.

비행기를 동원해 폭탄을 투하할 때는 구식 보총으로 대공사격을 가하는 등 완강한 투쟁을 벌여 2,000여명의 대병력을 물리쳤다고 한다.  

리계순에 대한 소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리계순에 대한 소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어랑촌 항일영웅 중 북한이 '여성혁명가의 훌륭한 본보기'로 내세우는 리계순에 대해 더 살펴보자.

리계순은 어랑촌유격구에서 화룡유격대 창건자의 한 사람인 김일환과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그가 민생단의 누명을 쓰고 희생당한 뒤에는 처창즈유격구로 옮겨가 극심한 기근속에 유복녀를 낳았다.

시어머니와 함께 민생단 혐의를 뒤집어쓰고 갖은 고초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유격구의 해산을 겪게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두살배기 어린 딸을 시어머니에게 맡긴 채 무송에서 유격대에 입대했다.

1936년 말~1937년 초 모진 추위속에 동상을 입게 되어 전투부대에서 싸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백두산과 가까운 밀영의 후방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던 1937년 초겨울, 요양중인 상태에서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장백현경찰서로 끌려갔다.

고문으로 날과 밤을 지새우던 리계순은 장날 군중들앞에서 공개적으로 '반성' 연설을 하면 석방시키겠다는 일제 경찰의 회유책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주민들이 모인 당시 장백현 '제1완전소학교' 운동장에서 '조선인민혁명군과 함께 반일항전에 나서야 한다'는 연설을 한 뒤 그날 밤 형장에서 쓰러져갔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주민들은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언땅을 파낼 수도 없고 봉분도 만들 수 없는 조건에서 땅위의 눈을 깨끗이 쓸어내고 영구를 안치한 다음 흙도 덮지 못하고 돌를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 돌무지 무덤이 생긴 것은 1938년 1월이었다.

대성산 혁명렬사릉의 리계순 반신상 [사진-노동신문 갈무리] 
대성산 혁명렬사릉의 리계순 반신상 [사진-노동신문 갈무리] 

리계순의 유해는 1989년 5월 중국 장백현을 떠나 압록강 다리를 건너 혜산시로 넘어왔다.

그 무렵 어느 해 10월 혜산시 건너편 중국 장백현의 '제1완전소학교' 근처 돌무지속에 한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리계순의 최후를 목격한 지역민 여러 명의 증언과 유물을 통해 그의 유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장과 분묘, 대성산혁명열사릉의 반신상 아래에 안치하는 문제 등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격대에 입대하며 시어머니에게 맡긴 두살배기 유복녀는 1958년 3월 외할머니인 리계순의 어머니와 평양에서 만난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생애를 다룬 장편소설 『잠들지 않는 넋』이 출간되었고 그의 이름을 붙인 리계순사리원사범대학이 있다.

무참한 지경의 대종교 3종사 묘역

어랑촌유격근거지에서 차로 산길을 내려오다 보면 건너편 봉우리가 청산리이고 산 아래 20여분 거리의 평지가 화룡시 용성진 청호촌(청파호)이다.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대종교 3종사의 묘역이 이곳에 있다.

홍암 나철은 1909년 단군교를 중광해 1910년 7월 30일 대종교로 개칭했으며 1914년 총본사를 백두산이 바라보이는 이곳 청파호로 옮기고 자신의 묘도 이곳에 쓰도록 한 인물이다. 1916년 8월 15일(이하 음력)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그해 11월 20일 이곳에 안장됐다.

2대 교주인 무원 김교헌이 1923년 11월 18일 서거후 화장을 거행한 뒤 바로 이곳 청파호에 안장됐으며, 대종교 항일무장투쟁의 책임자로 청산리전투의 주력부대인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총재를 지낸 백포 서일이 1921년 9월 8일 서거 후 1927년 4월 3일 이곳으로 이장했다.

대종교 3종사 묘역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대종교 3종사 묘역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대종교 3종사 묘역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대종교 3종사 묘역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화룡시 인민정부가 1991년 9월 1일 '화룡시 문화유물 보호단위'로 공포하며 세운 '반일지사무덤' 표지석에는 "반일지시 라철, 서일, 김교헌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계몽운동과 반일교육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 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 서일이 령도한 《북로군정서》 소속의 반일무장부대와 《국민회》 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전투》는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고 씌여 있다.

현재 세워진 비석 중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의 비석은 원래의 비석을 찾아 세웠으나 김교헌의 비석은 끝내 찾지 못해 연변주정부가 새로 제작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묘역 둘레는 군데 군데 기둥을 세운 가로 두 줄의 석조물로 막혀있고 입구에는 CCTV가 설치되어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방목하는 소떼들은 맘놓고 넘나드는지 여기 저기 널부러져 방치된 쇠똥이 보기에 민망하고 무참하다.

청산리전투가 벌어진 청산리골과 어랑촌 유격근거지가 한눈에 들어올 듯 지척이고, 백두산이 100km 밖 저 멀리로 보이는 대종교 3종사 묘역의 현재 모습은 우리의 흐려진 기억만큼이나 아득하다.

강렬한 독립의지...'15만원 탈취사건'

15만원탈취사건 표지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5만원탈취사건 표지석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920년 1월 4일 저녁 6시 무렵. 멀리 용정시내 일본영사관의 불빛이 보이는 동량(東良) 어구 골짜기 앞이었다. 해가 짧은 겨울철이었지만 음력 보름이라 달은 밝았다.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철제 현금궤짝과 우편물 행낭이 실려 앞장서고 역시 말을 탄 무장 경관 2명이 뒤를 따랐다.

갑자기 나타난 여섯명의 습격자들이 총을 쏘며 호송대 2명을 살해하고 철제 궤짝을 탈취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의 이름은 임국정, 한상호, 최봉설(일명 최계립), 윤준희, 박웅세, 김준.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이었다.

명동학교옛터기념관의 15만원탈취사건 소개 자료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명동학교옛터기념관의 15만원탈취사건 소개 자료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한해 전인 1919년 3월 13일 연변 각지에서 모인 3만여명(누계 8만6천여명, 용정시 정부 조성 3.13반일의사릉 기록)의 조선인 군중이 용정시에 모여 일본영사관을 향해 시위행진을 하다 14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살당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그들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여섯명의 철혈광복단 단원들은 그해 7월, 앞으로 반일투쟁은 평화시위가 아니라 무장투쟁으로 전환해야한다는 다짐을 하고 이를 위해 군자금 모금에 대해 협의했다.

철제 궤짝에는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촌 출장소까지 운송하는 길회철도부설자금 15만원(일본돈)이 실려있었다. 그 돈을 탈취하기로 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총 세자루와 보총 한자루, 수류탄 네개를 구입한 뒤 사격과 매복공격 훈련을 마치고 1919년 6월 연변으로 돌아올만큼 치밀하게 작전을 준비했다.

1919년 경기도 수원의 4인 가족 가장의 월급이 25원이니 15만원이면 현재 화폐가치로 150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이하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 『독립운동 열전-잊힌 사건을 찾아서』) 그 무렵 블라디보스토크 무기시장에서 소총 1자루와 탄환 100발을 30원에, 기관총 1문은 200원에 살 수 있었다. 청산리전투를 주도한 북로군정서 규모의 독립군부대를 9개 정도 편성할 수 있는 큰 돈이었다.

용정을 빠져나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동한 이들은 현지에서 러시아 장교를 통해 1차 무기 거래 계약을 마치고 소총 1,000자루와 탄약 100상자, 기관총 10문을 인수하기로 했다. 작전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런데 막상 무기를 인수하기로 한 1920년 1월 31일 새벽 일본 헌병대가 이들의 합숙장소를 급습하는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간신히 탈출한 최봉설을 제외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이 모두 체포되었다. 무기거래를 중개한 밀정 엄인섭의 밀고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무기 획득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고 체포된 이들은 1921년 8월 25일 사형집행을 당하게 된다.

사건 주모자 중 한 사람인 최봉설(1899~1973, 일명 최계립)은 창동학원을 다니던 1914년 철혈광복단에 가입해 1920년 15만원 탈취사건에 참가한 뒤 1922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리동휘의 지시로 녕안현에 '적기단'을 조직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이후 소련으로 가 혁명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명동학교 옛터 기념관 기록) 

'15만원 탈취사건 유적지' 표지석은 3개가 세워져 있는데, 1996년 1월 31일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사건 개요와 함께 이 사건을 조선 민중의 반일투쟁이 평화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한 중요한 계기라는 평가가 적혀있다. 지난 2017년 10월 용정시 정부는 하천을 가로지르는 도로 옆 산 기슭 아래 새로운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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