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안철수가 옳고 문재인과 주류가 틀렸다


야당은 진검승부로 살았음을 역사는 말한다

임두만 | 2015-12-01 08:52:5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문재인 대표의 ‘문안박 공동지도부 구성’ 제안을 ‘문안박’ 중 1인인 안철수 전 대표가 거부했다. 거부의 명분은 간결하다. 그렇게 해서는 떠난 지지층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스스로 야권의 한 축이라고 생각하는 모두가 야권 수뇌부 자리 하나를 두고 겨뤄 이기는 자에게 죽이되든 밥이되든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혁신전대니 통합전대니 명칭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그렇다.
▲문재인-안철수의 협력과 경쟁…
그런데 이에 대한 문재인 대표 측의 반응은 영 떨떠름하다. 이 제안을 받은 다음 날인 30일 오전 최고위원 회의에서 문 대표는 “당 혁신의 출발은 혁신위의 혁신안을 실천하는 것이다. 거기서 더 혁신해 인적 쇄신까지 가야 한다. 혁신위의 혁신안조차 거부하면서 혁신을 말하는 것은 혁신의 진정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란 말로 전당대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문 대표의 완곡한 표현보다 측근들의 격앙된 반응이 진짜 문 대표 측 기류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안 전 대표의 제안이 나온 뒤 연합뉴스와 통화한 전해철 의원은“전대를 하면 줄서기가 불가피한 데 혁신 전대가 아닌 분열의 전대가 된다”고 비판했다.
연합은 또 김기식 의원은 “공천보장을 조건으로 뒷거래가 난무하는 구태 공천 전당대회가 되지 않겠냐”고 반문했으며, 한 3선 의원은 “2·8 전대와 문 대표의 재신임에 불복하는 것이자 당내 권력투쟁을 하자는 것”이라며 “전대에는 최소 한 달 반의 시간이 필요한데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분열을 자초해 총선을 망치는 지름길”이라고 성토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친노친문 핵심들만이 아니라 범주류로 분류되는 당 지도부급 중진들도 안 전 대표의 제안을 비판했다. 전당대회가 통합이 아니라 분열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전병헌 “당이 통합된다면 전대만큼 좋은 것이 없을 것이지만 당이 처한 현실적인 조건을 보면 사생결단식 분열전대가 될 가능성이 커 보여 걱정스러운 일이 많다” 추미애 “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피 흘리는 정치는 관둬야 한다. 전대, 다 좋다. 그러나 전대는 지지 세력에게 비전과 희망을 주는 통합방식이어야지 전대에서 내가 이기지 못하면 분열의 명분이 될 수밖에 없는 전대라면 마지막 남은 민주세력을 뿔뿔이 흩어지게 할 것이다”
이처럼 범주류라는 최고위원들의 반응도 마뜩찮다. 그러나 이런 의견들은 실상 현재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놓기 싫다는 말 외에 다른 뜻은 없다. 역사는 야당 내 극한 전쟁이 야당도 살리고 정치도 살렸다는 기록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근대정치 70년사에서 야당은 극한 당내 쟁투를 통해 존재가치도 부각시키고 여당과 전쟁할 수 있는 힘도 길렀으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 40대 기수론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을 단행했다. 당시 야당을 이끌던 당수는 유진오 박사, 그러나 유 총재는 대선에 출마할 수 없는 와병상태가 되었다. 유진오 외에 대안은 유진산 정도… 하지만, 유진산으로는 박정희의 대항마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여야 모두 공히 인정했다.
이때 당 원내총무인 김영삼 의원이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곧이어 김대중 대변인과 이철승 의원 등의 출마선언이 뒤따랐다. 이에 당시 실질적 당권파인 유진산 부총재는 40대 기수론에 대해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젖비린내가 난다=아직 어리다)”라며 이들 3인을 “정치적 미성년자”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40대 대선후보 출마자들은 ‘만년 들러리 야당을 추구할 수는 없다’고 주장, 밀고 나갔다.
60년대 중후반 야당은 그야말로 힘든 상황이었다. 윤보선의 연이은 대선패배에 따른 분열, 민주당 구파는 윤보선파, 유진산파로 갈라져 있었고, 신파에 뿌리를 둔 박순천파 등은 김대중과 이철승을 핵으로 갈려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민중당 신한당 등으로 갈려 이전투구를 했다. 이때 이들 정당을 하나로 합한 당이 신민당이며 당 대표는 유진오 민주당 대선후보가 맡았다.
1967년 대선을 앞두고 1966년 민중당 대선후보로 영입된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은 야권후보 단일화에 따라 윤보선에게 후보를 양보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패했다. 이제 야권에 대선후보감으로 유진오만한 사람이 없었다. 민중당과 신한당은 합당하면서 당명을 신민당으로 하고 자연스럽게 유진오 민중당 대표를 당수로 세웠다. 그리고 1969년 전당대회에서 유진오는 다시 총재가 되었으며 민주당 구파의 실세인 유진산이 총재보다 더 힘이 센 부총재가 되었다.
더구나 이 와중에 유진오 총재가 뇌졸증이란 와병 상태에 들어간다. 야당은 계속 혼미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더군다나 실권을 쥐고 있던 건 수석 부총재인 유진산이었다. 유진산 체제의 야당, 지금 새정치민주연합보다 더한 지리렬렬이었다.
40대 기수론은 이때 나왔다. 1969년 11월 8일, 42세이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여기에 곧바로 김대중 이철승이 가세했다. 그래서 당시 대선후보 지명 전당대회는 말 그대로 ‘죽자사자’ 쟁투였다. 오랜 반목 상태이던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대리전에 청년보수 아이콘인 이철승이 가세, 좌우논쟁까지 가히 혈투였다. 구파의 유진산은 노골적으로 김영삼을 밀었고, 신파는 김대중-이철승으로 갈려 밀었다. 이 첨예한 대립은 1956년 창당 후 수차례 분열과 통합을 거듭, 신민당으로 하나 되었던 당을 또 쪼갤 것 같은 쟁투로 번졌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쟁투는 당을 살렸다. 무기력했던 신민당은 일약 인기정당이 되었다. 후보지명전은 김대중의 승리, 김영삼은 패배의 쓰라림에도 흔쾌히 승복,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지원유세를 위해 전국을 순회했다. 피나는 혈투의 당내경선과 아름다운 승복의 역사, 이 역사는 신민당 계열 정당의 좋은 승복사례가 되었다.
2. 김영삼-이철승의 대결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김대중의 도쿄납치 후 동교동 연금, 유진산 총재의 사망 등으로 야권의 지도부는 사실상 김영삼 1인체제가 되었으며 1974년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가 되어 박정희 유신정권과 대립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의 영수회담 이후 선명 노선이 약화되면서 당 내부에서 그에 대한 반대가 커졌다.
이철승은 이런 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밀어내고 당권을 잡겠다면서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다. 유신을 인정하고 극한투쟁보다 야당도 국익을 위해 정부에 협조할 것은 협조해야 한다는 기조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철승의 이런 방향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러나 이철승은 비록 김영삼이 박정희와 밀약 의혹으로 인기가 떨어졌다 해도 전당대회에서 이기기는 힘들었다. 이때 이철승의 도우미로 박정희의 지령을 받은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이 나섰다.
역사는 이 전당대회를 각목대회라고 한다. 차지철의 신호와 이후락의 조종을 받은 조직폭력배 김태촌은 휘하 조직들을 이끌고 관훈동 신민당 당사를 공격했다. 폭력배들이 도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창문으로 뛰어내린 김영삼 총재는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실려갔다. 이후 열린 전당대회에서 이들은 전당대회장에 난입, 각목을 휘둘러 김영삼 측 대의원을 전당대회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은 다음 이철승 의원을 대표로 선출했다.
이후 이철승이 이끈 신민당을 우리 역사는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란 별칭을 붙였다. 있으나마나한 야당… 이철승이 이끈 유신시대 야당 신민당은 유신헌법이 1구2인제 선거법으로 지역구 당선보장이란 당근을 줬으므로 무늬만 야당의 역사를 썼다.
이에 재야는 들끓었고 김대중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지도자들이 명동성당의 결혼식을 빙자, 전격적 시국선언을 하면서 저항하는 ‘명동성당 사태’까지 일어났던 시기다.
이 당권을 다시 김영삼이 탈환한 전당대회가 1979년 5월 30일 치러진 5.30 전당대회다. 이른 바 ‘아서원 전당대회’라고 불리기도 한 전당대회 역사다. 이철승의 임기 만료로 열린 5.30 전당대회… 분열이 아니라 분당 지경에 이를 정도로 극한 전쟁을 치렀다.
당시 총재 후보로 이철승 김영삼 외에 신도환 김재광 박영록 이기택 조윤형 등 모두 7명이 출마했다. 당권 탈환에 나선 김영삼씨는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9일 전격적으로 김재광 박영록 조윤형 등 세 후보의 지지선언을 끌어냈다. 이들은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고 전격사퇴한다. 동교동 자택에 연금 중이던 김대중씨가 이들에게 후보사퇴와 김영삼 지지를 호소한 결과였다.
이뿐 아니다. 이들에게 사자를 보내 사퇴를 끌어 낸 김대중은 그날 밤 감시 중이던 중정 요원과 마포서 형사들의 눈을 피해 대의원들의 숙소인 중국음식점 아서원을 전격방문 김영삼 지지를 호소하여 지지를 끌어내 김영삼 당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이 죽기 살기의 전당대회 역사는 박정희 정권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무늬만 야당을 퇴치한 전당대회… 이후로도 우리 역사는 늘 패권적 권력에 기생하려는 야당이 있었으며 이 야당을 분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죽기살기식’ 전당대회를 통해 살려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으면 분당을 감행했다. 이때의 분당은 역사의 순기능으로 작용했지 역기능으로 작용한 적은 없다.
3. 80년대 이후
1985년 신한민주당 창당을 두고 당시 제1야당이던 민한당 당권파들은 야당분열이라고 비판했으며 통합을 말했다. 하지만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켰고 민한당은 죽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 당시 신한민주당 당권파들은 분당을 분열이라고 공격하며 창당을 방해하려고 깡패들을 동원했다. 통일민주당은 6.29를 끌어냈으나 신한민주당은 1988년 13대 총선에서 전멸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당시 통합민주당 당권파들은 분당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며 통합 노래를 부르면서 김대중을 분열주의자로 몰았다. 야당 분열은 민자당 정권의 영속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며 단일야당으로 통합만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결과는? 새정치국민회의는 역사상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으며 민주당은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이 되었다.
이 모든 역사는 진검승부다. 이 승부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당을 살리기도 했고, 그게 되지 않아서 분당이 되었을 때라도 그 분열과 분당은 역사의 순기능으로 작용했지 역기능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이로 보건대 지금 새정치연합의 당권파들이 하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다.
유신시대 1구 2인제 선거법 하에서 당 공천만 받으면 지역구 당선은 거의 보장받던 시기 국민과 역사는 안중에도 없고 국회의원 배지만 욕심내던 것과 지금 전혀 다르지 않다. 야권연대를 통한 1:1 대결이면 최소한 호남유권자가 많은 지역구에서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니 그저 야당이 하나여야 한다는 자기이익을 위한 정치공학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지금 이대로 야당을 두자는 말은 역사에 죄를 지어도 좋으니까 그냥 국회의원 당선만 시켜주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다. 분열은 죄가 아니며 죽기 살기의 당권투쟁은 야당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전당대회 흥행은 언론의 조명을 받고 언론의 조명이 쏟아지면 야당은 올라가고 잠재적 후보들은 대권 후보가 된다. 노무현이 대권을 잡은 역사도 그 페이지 속에 있다.
그래서다. 죽기 살기 전쟁을 하라. 그게 야당이 사는 길이다. 그래도 안 되면 깨는 것이 정답이다. 다시 말하지만 장인(匠人)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라도 명작이 될 것 같지 않으면 깨거나 찢고 다시 그리거나 만든다. 지금 야당은 그 외에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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