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7일 일요일

[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20

 


‘코리아 하우스’와 미야모토의 최후
강진욱  | 등록:2021-02-08 08:06:31 | 최종:2021-02-08 08:28:34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20
 - 11월 26일 방송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하여

강진욱 <1983 버마> 저자

20. ‘코리아 하우스’와 미야모토의 최후

‘코리아하우스’는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의 태국 방문 때 중앙정보부가 설립, 관리해 왔다는 소문이(?) 태국 교민들에겐 널리 퍼져 있(었)다 한다. KAL 858 사건 관련 ‘국정원종합보고서’에 있는 내용이다. 국정원은 또 ‘코리아하우스’의 최초 운영자는 최○○ 대령이며, 일본군 출신 국제무기상 미타니 타다시(三谷忠志)의 한국인 처 ‘마담 장’은 일본 나라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항공(또는 타이완 항공) 승무원을 지낸 첫 한국인 스튜어디스였으며 3대 태국주재 한국대사 장 모 씨의 조카라고 보고서에서 밝혔다(국정원보고서 및 자료 관련 내용은「<서현우의 KAL858 사건 분석 보고서> 부실수사와 의문점들 (8)출처를 알 수 없는 언론보도」<통일뉴스> 2010.1.6 에서 재인용함,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8153)

‘코리아 하우스’의 여주인이었던 ‘마담 장’의 삼촌으로 3대 태국주재 한국대사를 지낸 이는  장성환(張盛煥) 씨다. 그의 이력과 ‘코리아 하우스’가 생겨날 당시의 한-태국(및 미국과의)  관계를 세밀히 살펴보면 ‘코리아 하우스’가 한.미.일 3국 정보당국이 공유하는 아시아 정보네트워크에 속해 있음을 어렵잖게 추리할 수 있다.

▲장성환. 1976년 6월 대한무역진흥공사 사장에 임명됐을 때 신문에 실린 사진

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미국의 아시아전략(침략) 거점과도 같은 나라. 특히 ‘코리아 하우스’가 문을 연 1966년 태국은 한국과 미국이 선두에 선 베트남 침탈의 교두보였다.  1983년 아웅 산 묘소 테러나 1987년 KAL 858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태국은 철저히 친미반북 노선을 표방했다.

1920년생인 장성환은 일제(日帝) 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고, 한국군 창설 당시 육군항공대 소속이었다가 공군 창설에 관여했다.

[당시의 공군 출신자들을 분석해 보면 ①일본 공군 출신으로 김정렬(金貞烈).박범집(朴範集).이근석(李根晳).김창규(金昌奎).장성환(張盛煥) 등 제 씨가 있고 ②중국 공군 출신으로는 중국 공군의 노장 중의 한 사람인 최용덕(崔用德).이영무(李英茂).김진일(金震一).김영재(金英哉) 등 제씨와 중국 공군에서 미 공군으로 편입한 김신(金信. [김구 선생 아들]) 씨가 있었으며 ③일본민간항공 출신으로는 장창덕(張昌德) 씨와 ④평양.군산.대구 등지에 있었던 비행학교 기술자로 4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이 500여 명 ... ](「건군비화 (5)항공협회 조직」<경향신문> 1958.8.28)

( 일본 이다즈께 기지에서 조종교육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들 (후열 좌측부터 : 중위 정영진, 중위 이상수, 중령 김 신, 중위 장동출, 대령 이근석 / 전열 좌측부터 중령 김영환, 중위 김성룡, 대위 강호륜, 대위 박희동, 중령 장성환)

장 씨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8월 주미한국대사관 공군무관(대령)으로 발탁돼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준장으로 진급했고 이곳에 있는 동안 한국군의 비행기 구매에도 관여했던 모양이다.

[미약한 해양경비력을 확충 강화하는 방책의 하나로서 내무부에서는 그동안 정찰용 비행기의 구입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늦어도 오는 9월 말 경에는 3대를 갖게 될 것이라 한다. 그동안 주미대사관에 근무하는 장성환 공군 준장을 통하여 미국 캔자스주에 있는 세스나 항공사와 구매에 대한 절충을 거듭한 결과 이 회사 제품 세스나 180형 3대를 대당 1만6천불 가격으로 구입하도록 계약 ... 4인승인 이 비행기는 방금 정비 중에 있는 고로 9월 말일까지는 한국에 도착케 될 것 ... ](「정찰기 3대 구입 - 9월까지 해양경비에 배치」 <조선일보> 1954.6.28)

이처럼 일찌감치 미국의 ‘자산’(asset)으로 키워진 그가 귀국 후 한국군 및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56년 5월 3일부터 약 일주일 간 필리핀 휴양지 바키오시에서 열린 ‘자유 각국 공군지도자회의’에 김정렬(金貞烈) 공군참모총장(중장)과 함께 참가했다. 김정렬은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 미국이 만든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라면 그 역시 미국이 애지중지하는 ‘자산’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승만 정권 말년 국방장관으로 미국의 4.26 이승만 하야공작에 깊숙이 관여했고, 박정희 정권에서 또 국방장관을 지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급서한 뒤 최규하에게 하야를 진언하며 전두환 정권 창출을 위한 미국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그런 뒤 노태우 정권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다. ‘미국의 자산’이라면 이력이 이쯤 돼야 한다. 그가 ‘자유 각국 공군지도자회의’에 참석하기 전 기자에게 행사의 의의를 설명했다.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은 기자에게 이 회의가 개최되는 취지는 오직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 큐터 미 극동군사령관이 주최하는 것이라고 ... 이 회의에 공군 대표를 참가시킬 국가는 한국을 위시하여 미국.국부[대만].비율빈[필리핀].자유월남.태국.파키스탄.호주.뉴질랜드 등 ... 이 회의에 관하여 공군 옵저버들이 말하는 것을 종합해 보면 이 회의는 오늘날 극동 지구에 있어서 공산 측의 공군력에 의한 기습에 대한 전체적인 방위계획을 논의하게 될 것이며 자유 각국의 공군력 강화 계획도 검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다. ... 김 중장과 장 준장은 오는 30일 서울을 출발하여 동경 경유 바키오로 향하기로 되어 있다.] (<경향신문> 1956.4.26)

장성환은 1958년 6월에는 공군사령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정보국장 전봉희 대령과 함께 공군참모총장(장지량)을 수행해 태국 수도 방콕에서 열리는 연례 공군지휘관회의(6.4∼6.8)에 참석했고(<조선일보> 1958.6.1), 곧이어 공군참모차장이 된다. 그런데 1959년 5월 갑자기 물러난다. 그 자리에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이 임명됐다.

그런데 그의 갑작스런 경질을 안쓰러웠는지 미8군 사령관은 매그루더는 1960년 3월 5일 그에게 미국 공로훈장인 ‘리젼 오브 메리트’를 수여한다. 장 소장이 공군참모차장 재직 때의 공로를 높이 샀다 한다(<조선일보> 1960.3.5). 미국이라는 든든한 ‘빽’ 덕분이었는지 그는 5.16 쿠데타 이후 공군참모차장으로 복직하고, 1962년 4월 3주일 간 미 국방성을 방문하는 영예를 누린다.

[장성환 소장은 3주일 간에 걸친 미 공군기지 시찰여행의 최종 여정으로 3일 간에 걸쳐서 워싱턴을 방문하기 위하여 4명의 참모들을 대동하고 4일 당지에 도착 ... 그는 기자들에게 5일 미 국방성 관리들과 회담하고 한국 공군의 증강 문제를 포함하는 상호 이익에 관한 문제를 토의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말했다.](「공군 증강 문제를 토의 - 장성환 차장, 5일 국방성서」 <조선일보> 1962.4.5)

미 국방성을 다녀오자마자 장성환은 7대 공군참모총장(1962~1964)이 된다. 미국은 그를 공군참모총장에 앉히기 전에 국방성으로 불러들여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지 않았을까? 이해 11월 19일에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공군본부로 장성환 공군참모총장을 예방하고 약 40분간 환담했다고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2년 뒤, 이번에는 미국 공군참모총장의 초청으로 또 미국에 간다.

[【워싱턴.20일.AFP.합동】미 공군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초청으로 미국 각지를 시찰 중인 한국 공군참모총장 장성환 준장이 20일 아침 4일 체류 예정으로 워싱턴에 도착했다. 장 중장은 이곳에서 미 국방성 관리들을 방문한 뒤 오는 24일 귀국을 위해 출발할 예정이다.] (<동아일보> 1964.2.21)

커티스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 미국의 일본 본토 폭격 때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며 폭격에 주저하는 조종사들을 조져댔고, 베트남 폭격 때는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호언했던 자다. 한국전쟁 때도 그는 아마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을 것이다. 평양을 폭격하던 미군 조종사가 “더 이상 폭탄을 떨어뜨릴 곳이 없다(성한 건물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이유다.

르메이는 또 1962년 소련이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 했을 때 소련과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려는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가리켜 “애송이 새끼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며 쌍욕을 해댔다. 헐리웃 영화 <D-13> 속에서지만 현실이 그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이 영화를 본 느낌으로 케네디는 저들에게 ‘죽어(여) 마땅한 자’였다).

( 커티스 르 메이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케네디에서 했다는 말. “그렇게 유화적으로 해서야 어디 ... ”)

케네디 대통령은 또 베트남 침략전에 소극적이었다. 미국의 아시아 지배 의도야 다를 리 없었겠지만, 침탈의 방식에서 커티스 르메이 같은 자들이 대변하는 미 군산복합체와 이견을 보였다. 그랬던 케네디가 살해된(1963.11.22) 뒤 미국의 베트남 침략이 본격화됐다면(통킹만 사건 조작 1964.8.2) 케네디를 죽인 것은 미 군산복합체인 것이다. 이렇게 추정하는데 하등 무리가 없다(1968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후보 선출이 유력했던 로버트 케네디를 죽이고 닉슨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도 바로 이 자들이었을 것이다). 커티스가 장성환을 미국에 부른 때는 미 군산복합체가 베트남 침략의 구실을 찾기 위해 호시탐탐할 때였다. 

[【워싱턴.21일.AP.동화】한국 공군참모총장 장성환 중장은 21일 미국은 65년까지 한국 공군에게 초음속 F5A 제트전투기를 공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장 장군은 앞으로 3년 간에 걸쳐 한국 공군은 현재의 F26 세이버 제트기로부터 신속히 상승하는 고도의 F5A 프리덤 전투기로 완전히 전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F5A 제트기는 소련이 공급하고 북괴 공군이 조종하는 MIG21 제트전투기와 비교할 수 있다.](「한국 공군현대화 - 65년까지 F5A제트기로 대체」 <동아일보> 1964.2.24)

당시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군사 및 경제적 지원을 호언하며 한국군을 베트남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이처럼 미 군부 핵심과 끈끈한 연을 맺고 있는 장성환은 2년 간 공군의 최고위 직책인 공군참모총장 자리에 있다 물러난 뒤 태국 대사(3대, 1964.10~1967.10)로 간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이지만, 당시 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반공체제의 허브, 첩보와 공작의 센터였다는 점에서 그의 태국대사 지명은 간단히 볼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는 미국이 필요로 하는 인재였으며 특히 아시아 전역을 커버하는 첩보의 중심지로 보내졌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미국의 신뢰도를 가늠할 수 있다. 실제로 그의 태국대사 재직 시기는 미국이 한국군을 끌어들여 베트남을 침탈하는 야만적 전쟁이 극악한 형태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그의 태국 대사 지명은 미국이 베트남 침략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1964.8) 지 두 달 만이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통킹만 사건 조작 직후(8월) 장성환이 신임 태국대사로 내정되고 두 달 뒤인 1964년 10월 6일 개각 발표 때 정식으로 태국주재대사에 임명됐다. (*이때 주미대사는 김현철(金顯哲), 주일대사는 김동조(金東祚)가 임명됐고, 그가 공군사령부 작전부장 시절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정렬은 캐나다 대사로 나갔다. 이때 경질된 말레이시아 대사가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崔泓熙)였다. 그의 후임 말레이시아 대사가 최규하(崔圭夏).)

장성환이 태국대사로 간 지 채 두 달이 못 된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방문 길에 방콕에 경유할 때 대통령을 영접했고, 박 대통령을 대신해 태국 수상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영예를 누린다. 당시 한국과 태국 관계, 특히 박정희 대통령과 타놈 키티카촌 수상 사이는 거의 절친(切親) 수준이었다. 타놈 역시 육군참모총장(중장) 시절인 1957년 8월  미국이 후원하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처지였다. 이 둘 사이에 장성환이 있었다.

( 1964.12.16 조선일보 / “박 대통령을 대신한 장성환 주태국대사로부터 1등근무공로훈장을 받고 미소 짓고 있는 타놈 태국 수상”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966년 2월 7-18일 박정희 대통령은 태국과 말레이시아, 대만 등 아시아 3국을 순방한다. 이 해 미국은 자기네들이 벌이는 베트남 침략전에 따라 나서는 나라들을 불러 아시아반공연합체를 만들려 했다. 1954년 이승만의 제창으로 진해에서 중화민국(대만)과 필리핀 등 친미반공 8개국이 모여 설립한 ‘아시아민족반공연맹(Asian People's Anti-Communist League, APACL)이 1966년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12차 총회 결의로 해체되고 1967년 4월 1일 재발족한 것이 ’아시아반공연맹‘이다.

[박정희 대통령 부처는 2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 동안 말레이시아, 태국, 자유중국 등 동남아 세 나라를 방문하고 아세아에서의 공산 침략에 대처한 자유진영의 결속과 후진 지역에 속해 있는 이 지역의 개발을 위해 상호 밀접한 ... 유대 강화를 주창할 예정.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은 14일 오전 박 대통령과 공식 수행원 14명의 동남아 순방 일정을 발표 ... 비율빈[필리핀]은 방문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 아세아 국가원수로서 최초로 동남아 여러 나라를 순방하게 될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공산 진영이 민족주의를 선전 무기로 삼아왔음을 지적 ... ](「박 대통령, 동남아 순방 일정 공표」 <조선일보> 1966.1.15)

위 글에서 청와대 대변인이 특별히 “대통령, 필리핀 안 가”라고 발표한 이유가 있다. 당시 미국이 기치를 든 아시아반공연맹의 ‘아시아 맹주’를 꿈꾸던 박정희가 필리핀 대통령 마르코스에게 심한 라이벌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만들어 준 놀이판에서 둘이 ‘도토리 키 재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미국 존슨 정권이 주도하고 박정희 정권이 적극 찬동한 아시아반공연맹의 허브가 바로 태국 방콕이었고 이곳에 장성환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1966년 4월 18일부터 동남아외상회의를 위한 예비회담, 8월 19일에는 아시아태평양이사회의 대사급 상임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모두 아시아 반공체제 구축을 위한 미국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 회의에 장성환이 한국 대표로 참석했음은 물론이다. 장성환이 대사로 있을 때 한국과 태국 간 관계는 날로 증진됐다. 장성환이 활발하게 태국 외교 무대를 누빌 때는 미국과 태국과의 관계는 ‘밀월’ 이상이었다.

[미국과 중공과의 대결에 대비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태국이 미군의 보급기지로서 불가결하다는 ... 동남아 외교 로비로 불리는 방콕은 연중 국제회의와 향락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로 붐비고 ... 월남전은 ‘강 건너 불’로만 볼 수 없는 태국으로서는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인 지원과 세련된 태국류의 ‘외교적 수완’을 병용 ...  ] (<동아일보> 1966.8.25)

( 1966.8.25 동아일보)

이처럼 미국과 태국 한국이 베트남 침략전 확대를 획책할 때 방콕에 ‘코리아 하우스’가 문을 연 것이다. 처음에는 중앙정보부와 연결된 ‘최 대령’이, 나중에는 일본군 출신으로 ‘첩보 세계의 영원한 현역’이라는 미타니 다다시(三谷忠志)가 주인이 됐고, 장성환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그의 조카 ‘마담 장’이 미타니와 결혼해 안주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미국과 일본 및 한국의 아시아 정보네트워크로 활용되던 이곳에 드나든(1984년) 미야모토 아키라(宮本明) 같은 이들은 절대로 ‘친북계’나 ‘총련계’ 또는 ‘(북한)간첩’일 수 없다. KAL 858편 여객기를 폭파시킨 것은 바로 일본 내에서 암약하며 대북공작을 꾸미던 한.미.일 정보조직음에 틀림없다.

말짱 거짓말이었다.


그가 1948년 제주 4.3 항쟁에도 관여했다는 주장 역시 거짓이었다. 국정원보고서에 나오는 이경우는 미야모토의 한국명이다.

미야모토(이 경우)를 안기부가 관리하고 있었다는 증거도 나왔다.

위 국정원보고서에서 안기부의 ‘하OO’ 공작원은 미야모토를 관리하던 요원이었을 것이다. 그가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1987년 12월 5일은 일본 공안당국이 미야모토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고 찾아다녔을 때이다. 이런 때 안기부 공작원이 미야모토의 근황을 보고했다는 사실은 안기부가 미야모토를 관리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위 문건 아래 문단. “1984년 9월 초 형과 공작원 등이 모인 자리에서 ‘이번에 나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며 신변을 정리’했으며 ...” 이 말은 미야모토가 방콕과 마닐라 등지를 돌아보고 온 뒤 곧바로 월북이라도 한 것 같은 뉘앙스다. 국정원이 안기부 ‘하OO’ 공작원의 보고서를 공개한 이유도 그렇게 정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안기부는 이경우가 마치 평양에서 사망한 것처럼 조작했다. 그래놓고 ‘하OO’ 공작원의 동생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썼다.

웃기는 얘기다. 안기부 공작원의 동생이 어떻게 평양 장례식에 참석한단 말인가. 이경우는 안기부가 신병을 관리하는 상태에서 사망했고, 일본 모처에 묻혔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존재를 소멸시킨 상태에서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네 어쩌네 하며 쇼를 벌인 것이다.

미야모토 즉 이경우는 1984년 9월 하치야 신이치(와 리은혜로 알려진 여성) 등을 데리고 방콕 등지를 여행할 때 이미 자신이 몸이 성치 않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위 문건에 나오는 “이번에 나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는 말도 그 의미였을 것이다. 실제로 귀국할 때 미야모토는 휠체어를 탈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하치야 신이치가 밝힌 바 있다(18편 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 실제로 미야모토는 몇 달 뒤 병원을 찾는다. 

( 미야모토 입원신청서. 노다 미네오 책 122쪽)

그는 간암 말기였고 당뇨도 있었다.

( 노다 미네오 책 『나는 검증한다 - 김현희의 파괴공작』123쪽)

( 노다 미네오 책 124쪽)

노다 미네오 씨는 또 미야모토가 1985년 2월,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이 다 드러나는 보험증을 내고 입원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노다 미네오 책 123쪽)

( 노다 미네오 책 125쪽)

미야모토를 가리켜 ‘북한계’ ‘(조)총련계’ ‘간첩’ 운운하며 수배령을 발령했다는 보도는 모두 안기부와 일본 공안 당국이 꾸민 연극일 뿐이었다. 노다 씨는 일본 공안당국의 수상한 행동을 예리하게 짚었다.

( 노다 미네오 책 125쪽)

이렇게 안기부와 일본 공당 당국은 한통속으로 미야모토를 싸고 도는 가운데, C 원장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는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을 것이고, 그는 조용히 죽음을맞이했을 것이다.

( 노다 미네오 책 124쪽)

일본 공안 당국이 그의 죽음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저들은 그가 북한으로 도망쳤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던 것이다.

( 노다 미네오 책 207쪽)

위는 노다 미네오 씨가 만난 일본 공단 관계자의 말이다. 그러나 미야모토는 무슨 잠수함이나 쾌속정 따위를 타고 북한으로 도망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그의 입북 가능성을 묻는 노다 미네오 씨의 질문의 C원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노다 미네오 책 123쪽)

또 그의 입북설 외에 그가 말레이시아를 통해 종적을 감췄다는 정보도 일본 쪽에서 흘러나왔다. <요미우리신문> 1987년 12월 2일 자 조간 사회면 톱과 같은 날짜 석간 1면 톱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 노다 미네오 책 208쪽)

( 노다 미네오 책 208쪽)

노다 미네오 씨는 ‘1983 버마 사건’에 대한 한국이나 일본 정부의 공식 설명을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전두환 대통령 스스로 참배일을 하루 연기하도록 지시”했고, 사건 당일 전 대통령 자신과 부인 및 몇몇 측근들만 “늦게 숙사[영빈관]을 나서는 등 이례적인 행동”을 했다며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근본적으로 2개월 전부터 한국 측 경비원 약 300명, 거기에 버마 측 경비원이 엄중하게 체크하고 경비하는 가운데 사당[아웅 산 묘소] 천장 안에 폭발물을 장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고 부연했다. 올바른 사고력을 지닌 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한국 측 경비원이 300명이었다는 말은 30명의 오기로 보이지만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또 미야모토의 행적과 관련해 근거 없는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데는 한.일 양국 공안 당국 차원을 넘어 정부 고위 당국자들까지 가세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노다 미네오 책 209쪽)

그런데 이 ‘콸라룸푸르 도피설’의 진원지도 바로 앞글에서 살펴본 ‘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입이었다.

( 노다 미네오 책 209쪽)

그런데 실상은 콸라룸푸르에 다녀왔다는 말은 미야모토가 지어내 하치야를 통해 퍼뜨린 말일 공산이 컸다. 노다 미네오 씨는 하치야 신이치에게 미야모토가 콸라룸푸르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에 “그가 그렇게 말해서”라고 대답했다. 노다 씨는 ‘북한 공작원’이라는 미야모토가 자신의 행적을 낱낱이 이야기했을 리 없다고 본다. 그의 의심이 맞을 것이다.

( 노다 미네오 책 209쪽)

결국 미야모토 아키라의 행적과 신분, 그의 사망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이처럼 미야모토 자신과 그를 싸고 돈 일본 공단 당국(자)에게서 나온 조작된 언설이었고, 이를 일본과 한국 신문.방송이 퍼 나르면서 진짜인 양 퍼진 것이다. (21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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