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4일 월요일

“남쪽 개구리와 평양 개구리 똑같습니다”


살아온 이야기(못다 한 이야기-2) 이병진 교수 기사입력: 2014/08/04 [22:20] 최종편집: ⓒ 자주민보 [200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 구금된 이병진 교수는 2012년 6월부터 월간 <작은책>에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글이 연재되는 도중 전주교도소 측으로부터 원고발송불허 처분을 받아 원고를 수정, 투고하는 과정을 거치다 재판을 시작했고, 승소했습니다. 전주교도소에 영치되었던 두 편의 글을 이병진 교수와 월간 <작은책>의 양해를 얻어 전재합니다._ 편집자] *이 글은 지난 2012년 12월호에 실으려다 전주교도소 측에서 부당하게 서신을 검열해 내보내지 않은 글입니다. 이병진 씨는 서신 검열, 발송 불허 및 교정 시설 영치 처분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이병진 씨 원고가 국가보안법상 이적 표현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전주교도소 측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2014년 5월 29일, 대법원에서도 ‘심리불속행기각’ 판결을 내려 이병진 씨 손을 들어 줬습니다. 이병진 씨는 그 판결에 따라 원고를 돌려받아 작은책에 빠진 글을 두 편 보내왔습니다. 이번 호에는 마지막 글을 실었습니다. [_작은책] 초대소는 대동강이 잘 보이는 낮은 산 언덕 위에 있었다. 1층에는 아주 넓은 접견실이 있는데 이곳은 영화를 볼 수 있게끔 시설도 갖추어져 있었다. 접견실 옆에는 식당과 주방이 있었고 2층에는 여러 개의 방과 서재가 있었다. 초대소 근처에는 몇 개의 부속 건물과 넓은 정원 마당이 있었다. 나는 가끔씩 초대소 주변을 산책하면서 조용히 사색을 하기도 했다. 숲 속에 둘러싸인 초대소에서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남쪽의 한적한 사찰에 와 있는 듯했다. 어느 날인가, 내가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을 깊이 감상하는 모습을 본 지도원 동무가 말한다. “이 선생님이 대동강을 무척 좋아하십니다. 대동강 나들이 사업을 조직해야겠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좋죠!” 나는 아침 여덟 시에 식사를 하고 초대소를 출발하여 외부 일정을 끝내고 오후 다섯 시쯤에 돌아왔다. 저녁은 간부들 또는 초청된 선생님들과 먹으면서 여러 가지 관심사들을 놓고 토론도 하고 대화도 나누었다. 대부분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손님들이 초대소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나의 서재실에는 목련 컬러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방송을 볼 짬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손님이 안 계실 때는 밤늦게까지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그다음 날 늦잠을 자느라 일정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발만 동동 구르는 금희 동무와 아주머니를 대신해서 지도원 동무가 내 방에 올라와서 깨우곤 했다. “잠꾸러기 선생님, 아침 먹어야지요!” 지도원 동무가 짓궂게 나를 놀리기도 했다. 체류 일정이 짧아서 나는 평양과 그 주변 지역만 방문하기로 했는데도 늘 시간이 부족했다. 가는 곳마다 북녘 동포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처음에는 서먹했지만 곧 서로 친해졌다. 그럴 때마다 한민족이라는 민족적 동질감을 깊이 느꼈다. 창광 유치원과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천진난만하고 밝게 자라는 아이들을 만나서 참 기뻤다. 1993년 4월에 개관한 3대 혁명 전시관도 둘러보았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는 청년 학생들을 만났는데 학생들은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가 높았다. 그들도 이남에서 온 나에게 무척 호기심이 많았다. 그들도 내가 이북에 가 보고 싶어 했듯이 남쪽에 가 보고 싶어 했다. 나와 똑같은 청년 학생들을 만나니 동료 의식과 공감대를 쉽게 나눌 수 있었다. 나는 미리 계획도 없이 길을 가다 무작정 차를 세워 틈틈이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를 경계하며 조심스러워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나에게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에는 우연히 나이 어린 초급반 학생들이 제법 줄을 맞추며 집에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어 보였는데 왁자지껄 떠들면서 개구쟁이 짓을 할 법도 한데도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집에 가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그런 나에게 지도원 동무가 말했다. “우리 사회는 개인보다는 집단을 더 중요시합니다. 아이들도 집단주의 문화를 배우면서 스스로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 쫓기듯이 살아간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이 먼저다. 나는 그런 이남 사회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더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는 말을 듣고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이런 집단주의 가치관은 미국의 핵 사찰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도 나타났다. 내가 만나 본 평양 시민들은 고난의 행군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이렇게 굶어 죽으나 전쟁하다 죽으나 죽는 일은 매한가지이므로 이왕에 죽는다면 전쟁하다 죽는 게 더 값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많은 이북의 주민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데 놀랐다. 그래서 나는 왜 북의 주민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원로 교수 선생들과 진지한 토론을 했다. 교수들은 나에게 북의 대중들은 우리 민족이 힘이 약해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 핍박받았던 한 맺힌 역사의 교훈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와 조국을 외세에 빼앗기면 아무리 재능 있는 개인일지라도 핍박받으며 비참하게 살 게 될 거란 사실을 일본 제국주자들의 식민 지배의 만행을 보고 똑똑히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북 주민들은 개인의 이익과 목숨도 소중하지만 그런 개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집단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점을 깨닫고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위하는 일에 더 큰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 민족의 한 맺힌 역사에 가슴이 저리게 아팠다. 그러면서 북쪽 동포들이 왜 개인보다는 민족의 이익과 공동체를 우선시하는지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남과 북이 그런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본다면 우리가 서로 미워하는 분단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 생각이 그렇게 흐르자, 우리가 오늘날까지 분단의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속시키려고만 하는 일이 부끄러웠다. 또한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아픔을 이겨 내려면 우리가 있는 그대로 북의 모습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노력한다면 우리는 한민족, 한핏줄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고 다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나는 처음 평양에 도착해서는 감격과 흥분에 들떴었다. 이후 실제 북녘 동포들의 삶을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들의 낯선 일상 생활의 모습에 놀라고 긴장했다. 이질감도 느꼈다. 그러나 북녘 동포들과 자주 만나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민족적 정서를 서로 느끼면서 금방 친해졌다. 우리 민족의 한 맺힌 삶을 공유했을 때에는 공명 치는 떨림의 일체감으로 전기가 ‘찌릿찌릿’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이렇게 나는 내 가슴속 깊숙이 쌓아 놓았던 분단과 불신의 벽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하였다. 그런 많은 분들의 사려 깊은 배려와 정성에는 민족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도원 동지는 약속대로 대동강 나들이를 조직했다. 나는 이틀 후면 평양을 떠난다. 나는 초대소 식구들 모두 가자고 졸라서 금희 동무, 아주머니, 요리사 아저씨, 운전을 해 주신 선생님, 지도원 동무, 리진우 형님까지 나들이에 나섰다. 5월 말 평양은 감자를 캐고 모내기를 하느라 바쁜데도 나의 초청을 받고 마을 주민 몇 분과 변전소 소초장도 와 주었다. 우리는 이별을 아쉬워했지만 통일이 되면 이곳에 다시 모여 만나기로 약속했다. 5월의 대동강 물은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조개와 물고기를 잡으며 모두들 어린 시절의 아이들로 되돌아갔다. 지도원 선생은 풀낚시로 개구리를 잡겠다고 한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개구리가 잡혔다. 나는 너무 신기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야! 이거 보세요. 평양 개구리와 이남 개구리가 똑같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한바탕 웃는다. “이것 보라우. 개구리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우. 저 감자밭의 감자도 똑같고 감자꽃도 똑같다우.” 지도원 동무가 보탠다. 그렇다. 내가 평양에서 알게 된 진실은 남과 북의 개구리만 똑같은 게 아니었다. 새소리, 물소리, 산과 들, 그리고 우리는 원래 한민족이라는, 그래서 북녘 동포들과 우리는 똑같은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소중한 동포애를 가슴 가득 안고 평양을 떠난다. 이별의 서운함이 크지만 통일이 되면 꼭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순안 비행장을 힘차게 날아올랐다. 안녕! 평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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